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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5일 오후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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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페이지 82

    고구려: 6대 태조대왕, 실질적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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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도 아닌 왕이 태조라는 묘호 비슷한 시호를 받았고 거기에 대왕이다.
    처음부터 심상치가 않은데 기록을 보면 더 어이가 없다.
    7세에 왕위에 올라 99세에 동생에게 선위하였고, 상왕으로 9년을 더 살다가 118세에 사망했다고 한다. 재위기간만 93년으로 세계 최장 기록인데,
    다 믿기는 어렵다.

    휘는 고 궁, 모본왕의 사촌 동생이다.
    모본왕이 칼 맞고 죽은 후, 원래는 아버지 재사가 다음 왕으로 추천을 받았는데,
    재사가 자기는 나이가 많다고 고사하고 자기 아들을 대신 추천하였다고 한다.
    재사는 유리명왕의 막내아들이므로,
    당시는 유리왕 사후 38년이 지난 시점이고 대무신왕이 서기 4년에 태어난 것을 고려하면,
    나이가 많아야 40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중년이라는 이야기인데,
    중년이 나이가 많아 왕위를 고사하고 코흘리개를 왕으로 삼는다?
    그리고 유리왕의 손자라면 해씨일 텐데 태조왕은 왜 고씨일까?
    이해불가가 아닐 수 없다.

    동명성왕과 유리명왕이 이주세력이 확실하다면,
    초창기 고구려에서 이 두 세력을 중심으로 토착세력인 소노부와 계루부의 주도권 쟁탈전이 마치 드라마처럼 치열하게 펼쳐졌을 것이고,
    엎치락 뒤치락 하였겠지만 결국 계루부의 승리로 귀결되어, 이때부터 제대로 된 고구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얼개는 짜이지만,
    워낙 오래전의 일이므로 입증할 수는 없다.
    태조왕은 그저 신비로울 정도로 오래 살면서 조폭 수준의 부족국가를 왕권 중심의 고대국가로 나아가게 만든 대단한 임금 정도로만 기억해도 무방할 것이다.

    태조왕은 어려서 매우 총명하였는데, 특이하게도 태어나자마자 눈을 떠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고 한다.
    석가모니 보다는 못하지만, 아무튼 이적인데…그러려니 하자.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초기에는 모후가 섭정을 하였고,
    장성 한 이후에는 정복국가 고구려의 실질적 시조답게 주변 국가들을 약탈하고 병탄하기 시작하였다.

    55년 요서 지역에 10개 성을 쌓아 후한의 침공에 대비하였고
    56년에는 동옥저를 병합하여 동으로는 창해,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렀다.
    68년에 갈사국을, 70년에는 조나를, 72년에는 주나를 병합하였고
    105년에는 요동군을 약탈하였으며,
    118년에는 예맥과 더불어 현도군과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121년 봄에는 후한이 예맥을 공격하여 동생인 수성을 보내 막았고,
    나이가 많아 힘들었는지 수성에게 국정을 돌보도록 하였다.
    음력 4월에는 요동의 선비족과 더불어 요수현을 공격하여 요동태수 채풍을 살해하였다.
    음력 12월에는 마한, 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부여가 방해하여 크게 패하였다.
    122년에도 마한, 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쳤으나 부여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그런데 왜 마한이고 예맥일까? 현도성이 살수 남쪽에 있었단 말인가?
    146년에 요동의 신안과 거향을 약탈하고, 서안평을 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였으며,
    낙랑태수의 처자를 생포하였다. 이때가 99세, 
    도대체 죽을 생각을 안 하는 형보다 먼저 늙어죽을 것을 염려한 동생이 난리를 치는 바람에,
    상왕으로 물러나 별궁에서 여생을 보내다 165년 서거하였다.
    향년 118세.

    워낙 오래 재위하였고 업적이 많아, 한 사람이 아니라는 설, 후대에 조작으로 기간을 늘렸다는 설 등
    별의 별 설이 난무하지만, 뭐가 되었건 강력해진 무력을 바탕으로 후한의 변경요새들을 본격적으로
    두들기기 시작한 임금이었다.
    비록 약탈하고 화친하고를 반복하는 전형적인 흉노 짓이었지만, 이 짓도 강해야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중국 놈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강국의 기초를 놓은 명군이었다.
    태조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백제 고이왕, 신라 내물왕과 함께 고대 국가의 기틀을 잡은 왕으로 불린다.

    고구려: 5대 모본왕, 안습의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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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릴 모에 근본 본, 근본을 그리워한다…가 아니라, 능침이 자리 잡은 지역의 이름이 모본이다.
    우리 고대사 초기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폭군으로, 신하들을 베게나 깔개로 사용했다는 전설을 가진,
    연산군의 선배격인 양반이다.

    해우,
    대무신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형이 자살한 후 태자가 되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역사상 흔한 불운의 주인공이었다.
    그래도 단종처럼 죽지는 않았고, 숙부 민중왕의 석연찮은 사망 이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러한 반전의 뒤에는 뭔가 많은 사연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나 기록이 없으므로 패스.

    48년 즉위하여,
    49년 후한의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하였고, 요동 태수 제융의 제안으로 화친하였다.
    이 해에 폭풍이 불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등 악천후가 있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그런데 즉위 4년부터 갑자기 포악해져서 신하들을 침구로 사용하고 함부로 죽이다가, 
    즉위 6년에 모본 사람 두로에게 칼 맞아 죽었다.
    뒤는 재사의 아들, 7살짜리 궁이 이었고.

    기사만 보면 미친놈 비슷한데,
    요서지방을 공격하고 요동 태수를 협박하여 영토를 넒힐 정도로 만만찮은 능력을 지녔고,
    자연재해에 고생하는 백성을 구휼하는 어진 심성을 가진 임금이,
    왜 갑자기 미쳐서 신하와 침구를 구별 못하고 칼 맞아 죽었을까?

    해씨 고구려 설에 의하면 동명성왕은 계루부 왕이고,
    동화같이 등장한 유리왕, 그리고 공통으로 이름에 해자가 들어가는 대무신왕, 민중왕, 모본왕은 모두
    소노부 출신 왕들이다.
    그런데 모본왕의 뒤를 이어 7살에 등극한 궁은,
    고구려의 실질적인 시조라고 불리는 태조왕으로 이때부터 계루부가 왕권을 독식하게 된다.
    따라서 유리왕의 쿠데타로 주도권을 잃어버린 계루부가,
    대무신왕 사후 민중왕, 모본왕으로 이어지면서 소노부가 분열되고 약화된 틈을 노려, 
    모본왕을 시해하고 주도권을 차지하였고,
    쿠데타의 명분상 모본왕을 폭군으로 만들었다는 스토리가 가능해진다.
    아닐 수도 있다.

    기록이 없어 답답하지만,
    뭐가 되었건 절치부심하여 되찾은 왕위를 6년 만에 잃고 죽은 것으로도 모자라,
    폭군의 오명까지 뒤집어 쓴 모본왕,
    안습이 아닐 수 없다.

    “플라이강원 항공사”공식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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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이강원 홈페이지 캡쳐.

    [수완뉴스=김동주 기자] 강원도가 29일 국토교통부로 부터 플라이강원의 정기항공운송사업을 위한 운항과 안전을 위한 모든 심사를 통과하고 운항증명(AOC, Air Operator Certificate)를 교부받고 항공사로 공식 출범한다고 밝혔다.

    플라이강원은 강원도 양양국제공항을 모기지로 하는 저비용항공사로 이번에 국토교통부에서 발급하는 운항증명을 교부받았다. 운항증명(AOC)는 항공사가 안전한 운항을 수행할 능력을 갖추었는지 심사하여 허가하는 제도로써, 조직, 인력, 시설, 장비, 운항관리, 정비관리 및 종사자 훈련 프로그램 등 국가기준인 85개분야 3,800여개 검사항목에 대한 안전운항능력을 6개월여 동안 국토교통부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했다.

    플라이강원은 운항증명 취득으로 공식 항공사로 출범함에 따라 향후 추진할 과제로 국내선과 국제선 운항을 위한 노선허가를 받은 후 항공운임을 홈페이지에 20일간 공시 및 소비자구제에 관한 사항을 30일간 안내하고, 취항은 국내선은 11월 말, 국제선은 12월 말 예상된다.

    항공기 운영은 금년도 2대, 2020년 7대, 2021년 9대, 2022년에는 10대를 연차적으로 도입 운영할 계획이다. 취항 도시는 2022년 국제선 28개, 국내선 3개 등 총 31개 도시가 있다.

    플라이강원이 항공기 10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게 될 경우 2022년에는 지역 및 국가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상당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강원도는 플라이강원 여객사업 운영방향에 대해 외국인 유치에 목표로 두며, 공급좌석 80%는 외국인에게 나머지 20%는 내국인에게 공급할 계획을 가진다고 밝혔다. 강원당국은 2020년에는 110만명, 2021년에 168만명, 2022년에 204만명으로 2022년에는 1일 공항이용객이 5,589명이고, 입국관광객은 2,794명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대진대 경영학과 이의경 교수에 따르면 플라이강원 출범에 따른 지역경제 파급효과로 2022년에 3조 4,922억원에 달하는 등 강원도와 국가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상당할 것으로 분석했다.

    또한 플라이강원 출범에 있어서 일자리 창출도 기대된다. 2019년 현재 226명이 근무중이고, 2022년에는 총 658명이 근무하게 될 예정이다. 2022년에는 40,260개의 직접 및 간접 고용과 파생고용의 일자리가 생겨 인구증가와 연동되고, 관광증가로 2조 318억원의 지출액이 예상된다.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플라이강원 항공사 공식출범과 관련해서 강원도 기반으로 하면서 양양국제공항을 모기지로 하는 플라이강원이 항공사로 공식 출범을 전 도민과 함께 축하 하고, 플라이강원이 아시아 하늘길과 남북 하늘길을 열어가는 전담항공사의 역할을 기대한다고 말하고, 플라이강원이 조기 안정화되고 정상화될 수 있도록 도정의 최우선 과제로 선정해서 행정력을 집중, 전폭적인 행정지원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플라이강원에 대해서 성급하게 기대효과를 단정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있는 상황이다.

    춘천·원주·강릉 권역별 명사초청 학부모 아카데미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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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김동주 기자] 강원도교육청(교육감 민병희)은 올바른 교육 정보 제공과 바람직한 학부모 학교 참여 문화 확산을 위해 춘천·원주·강릉 3개 권역에서 도내 학부모를 대상으로「강원 학부모 아카데미」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28일 강릉권(강원도교육연수원)에서 김경일 교수의 ‘메타인지를 이해하면 학습과 지혜가 보인다’ △29일 춘천권(강원도교육청)에서 정혜신 작가, 이명수 심리기획자의 ‘당신이 옳다. 자기 마음의 치유’ △11월 4일, 원주권(원주교육문화관)에서 조승연 작가의 ‘창의력, 인문학에서 찾다’를 주제로 명사 특강으로 진행된다.

    또한, 학부모들의 바람직한 학교 참여 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한 학부모지원 정책도 공유한다.

    도교육청 이광희 교육협력담당 사무관은 “교육활동에 활발히 참여하는 학부모가 늘어날수록 아이들이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한다”며, “이번 학부모 아카데미가 보다 많은 학부모들이 교육공동체의 주체로 역량을 키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동주 기자

    고구려 : 4대 민중왕, 진통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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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호만 보면 민주 투사 출신 같지만, 그 정도의 인물도 그럴만한 시대도 아니었다. 한자도 다르다.
    고구려 왕들은 대부분 능침이 자리 잡은 지역의 명칭을 차용한 일종의 묘호를 시호로 사용한다.
    좀 성의가 없긴 하나 그래도 중국 놈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던 조, 종보다는 나름 정감이 있다.

    해색주.
    대무신왕의 동생으로 유리왕의 넷째 또는 다섯째 아들이라고 하므로, 왕위와는 거의 인연이 없는 서열이었다.
    그런데 대무신왕이 후한 광무제에게 패전한 후 급사하자,
    유력한 후계자였던 호동왕자는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이유로 오래 전에 자살하였고, 
    태자 또한 국사를 돌보기에는 너무 어렸기에,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얼핏 보면 국가의 위기를 모른 척할 수 없어 대신 무거운 짐을 짊어진 갸륵한 숙부 같지만,
    역사 상 대부분의 경우처럼 그냥 조카의 왕위를 찬탈했을 것이다.

    5년간 재위하였는데 업적은 별로 없으나 좀 특이한 기록이 있다.
    재위 4년째에 사냥을 나가, 민중원에서 석굴을 발견하고 그 곳을 자신의 장지로 정했는데,
    그 해 말에 대승이 일만여 호의 백성과 함께 낙랑군으로 가버렸고,
    왕은 이듬해에 사망했다고 한다.
    기록도 짧고 내용도 별 것이 없으나 조금 더 생각을 해보면,
    팔팔한 나이에 사냥을 하다가 하필 석굴을 자기 무덤으로 정했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봐도 이상하고,
    그 후 상당한 인구가 적국으로 탈출하였으며 이어 왕이 바로 죽었다는 것 또한 너무 부자연스럽다.

    석연치 않은 즉위와 여러 자연재해 기록 등으로 보아, 옥좌가 편안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고,
    왕위를 빼앗기고 억울해 했을 조카가 뒤를 이었으니, 뭔가 숨겨진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므로,
    멋대로 상상을 해본다면,
    민중왕은 정통성 시비에 휘말려 반대파에 의해 석굴에 감금되었으며, 
    민중왕 지지파들은 예전의 소서노처럼 고구려를 떠났고, 왕은 결국 제거되었다.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진실은 항상 안개 저 편에 있다.

    이름이 해색주라는 것 또한 걸리는 부분이다.
    모두 이름이고 성이 고씨일 수도 있지만 해씨라면?
    민중왕이 해씨면 대무신왕, 유리왕, 그리고 다음 대 모본왕도 모두 해씨가 되는데 동명성왕은 고씨이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

    고구려는 5부족 연맹체로 시작하였으므로, 초창기에는 하나하나가 모두 부족 국가였다.
    그 중 비류국이 속해 있던 소노부가 최대 세력이었고 부족 연맹체 형성을 주도하였는데,
    계루부가 동명성왕과 손잡고 주도권을 빼앗었다고 추정해 본다면,
    동명성왕 2년, 비류국의 항복을 받았다는 기사가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후 소노부가 유리왕과 손잡고 다시 주도권을 탈환했다면,
    정벌 당했던 비류국 송양의 딸들이 연속해서 왕비가 된 것도 이해가 되고.
    이해할 수 없었던 계루부 소서노 세력의 이탈도 설명이 가능해 진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동화처럼 상봉한 동명성왕과 유리명왕은 부자지간이 아니라, 성까지 다른 생판 남이 되어버린다.
    이를 해씨 고구려 설, 또는 유리 쿠데타설이라고 한다.

    이 또한 꿰어 맞추기에 불과한 추정일 뿐 입증된 것은 하나도 없으므로 다르게 생각해보면,
    해모수는 두목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두목 급들은 초창기에는 해씨를 사용하지만,
    왕권이 강화되면서 특별한 왕성을 만들어 쓰게 되는 것이 고대의 관행이었을 수 있다.
    백제의 왕성이 처음에는 해씨였다가 나중에 부여씨로 바뀌게 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일 것이고.
    따라서 이것저것 골치가 아프면 그냥 해씨가 곧 고씨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뭐가 되었건 상상해 볼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이 고대사를 공부하는 재미일 것이다.

    고구려: 3대 대무신왕, 처절한 인생을 산 정복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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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무신도 아닌 대무신, 왕이 어떤 인생을 살면 이런 어마무시한 시호를 가지게 될까?

    휘는 무휼.
    유리왕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송양의 딸이라고 한다.
    기록에 있는 송양의 딸은 유리왕의 첫째 부인으로 결혼 후 1년도 못살고 졸했는데,
    그 짧은 기간에 쌍둥이도 아닌 아들들을 어떻게 셋씩이나 낳았을까?
    화희도 송양의 딸이었거나. 아니면 치희가 도망가고 다시 맞아들인 왕비가 또 송양의 딸이었을 것이다.
    셋째면서도 왕위를 이을 수 있었던 까닭은,
    위의 두 형과 아버지가 가장 사랑했던 바로 밑 동생이 이런 저런 이유로 흉사한 덕일 것이고.
    아무튼 영특, 총명하였고 큰 지략이 있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미 6살에 외교에 두각을 나타내었고.
    10살에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매복 작전이라는 고난도의 전술을 펼치며 막강 부여군을 박살냈으며,
    11살에 태자로 책봉되어 국정을 맡아 보았고,
    15살에 유리명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는데,
    말도 안되고,
    아마도 형들의 업적(주로 해명)을 끌어온 것일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믿기 힘든 기록을 가진 대무신왕은 즉위 3년차부터 이름값을 하기 시작하였다.
    일단 동명왕묘를 세워 정통성을 내외에 천명하였고,
    거루라는 좋은 말을 얻었는가 하면, 복속하라는 대소왕에게 대가리 하나에 몸뚱이가 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 외교적 망신을 주었다….는데, 무슨 뜻인지는 알쏭달쏭하다.
    재위 4년, 연료가 필요 없는 솥과 금도장 및 병기들을 얻었으며, 괴유, 마로 등의 인재들을 영입하였다.
    마치 어드벤쳐 게임처럼 이런 여러 가지 득템을 한 후 동부여를 공격하였는데,
    초반에는 괴유가 대소왕의 머리를 베는 등 선전하였으나,
    왕이 죽었다는 소식에 열받은 부여군에 포위되어 겨우 탈출하는 망신을 겪었다.
    반면 동부여에는,
    왕의 사망 여파로 대소의 동생이 압록곡 부근에 갈사부여를 세우며 독립하고,
    대소의 사촌동생은 부여 백성 1만 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귀순하는 등, 혼란과  분열이 발생하였다.
    전쟁의 성과가 비교적 짭잘하였던 셈이다.

    재위 9년 개마국을 정벌하고, 구다국의 항복을 받았다.
    재위 11년, 요동 태수의 침략을 받아 위나암성에서 농성하였는데,
    적이 수십 일을 포위하며 고사 작전을 쓰자,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보내어 퇴각하게 하였다.
    성안에 물이 많으니 헛수고 그만하라는 뜻이다.

    재위 14년에는 낙랑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
    자동 경비 시스템, 자명고를 둘러 싼 호동왕자낙랑공주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로 잘 알려진 전쟁인데. 그 유명세에 비해 실체적 진실은 아직 논란이 많으므로 반 신화 쯤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사랑을 위해 아버지를 배신하는 딸, 신화의 흔한 주제이다.
    불쌍한 낙랑국왕 최리는 배신한 딸을 죽이고 항복하였고, 멸망한 낙랑의 유민 5000명은 신라로
    투항하였다고 한다.
    낙랑 정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왕자 호동은 시기를 받아, 모후와 간통하려 했다는 추문에 휩싸였고,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하였다는데,
    자살하면 결백이 증명되나? 

    재위 15년에는 후한의 광무제에게 사신을 보냈고, 신나라 때 왕망이 하구려라고 낮추었던 국명을 다시 회복하였다.
    왕망이, 남의 나라 이름을 제멋대로, 그러니 금방 망했지.
    재위 27년에는 후한 광무제의 바다를 건넌 공격에 낙랑을 도로 빼앗겼고, 빼앗긴지 한 달 만에 향년 41세로 서거하였다.
    전쟁 중에 입은 부상이 원인인 듯하다.

    정확한 기록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에는 신라도 침공하였고, 후한 광무제와 9년 전쟁을 하기도 하였으며, 동해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고 한다.
    시호로 보아도 생애의 대부분을 전장에서 보낸 듯한데,
    가정사도 복잡하여, 형제들 뿐만 아니라 든든한 후계자이자 가장 사랑했던 아들 호동이 자살을 선택할 정도로,
    드나 나나 전쟁인 삶을 살았다.
    내, 외정 모두 모험을 심하게 즐겼다는 평도 있으나,
    부족국가 수준이었던 고구려의 생존을 도모하고, 나아가 지역의 강자로 키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고구려: 2대 유리명왕, 한국판 테세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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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러진 칼을 신표 삼아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찾아 가는 한국판 테세우스.
    사랑을 잃고 황조가를 읊조리는 낭만주의자.
    겁 많은 큰 아들은 병으로 잃고, 과격한 둘째 아들은 자살하게 하고, 총애하던 넷째는 물에 빠져 죽어, 여섯 아들 중 반을 가슴에 묻는 실존적 고뇌를 많이도 겪은 아버지.
    참으로 에피소드가 풍부한 양반인데,
    이 분은 추모 대왕이 동부여에서 사고치고 다닐 때 만든 자식으로 아버지 없이 자랐다고 한다.
    아버지가 미운 오리새끼였는데 아들이 백조대접을 받았을 리는 없으므로,
    생과부가 된 어머니 예씨 부인과 어렵게 살았을 것이나,
    그래도 유리걸식하며 떠돌지 않고 씩씩하게 자란 것을 보면, 이쁜 할머니 유화의 도움이 컷었나 보다.

    기원전 24년 유화부인이 죽고 그녀의 흑기사 금와왕도 따라 죽는 바람에 살기가 힘들어졌는지,
    아니면 새로 왕이 된 대소와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유리는 기원전 19년,
    어머니를 모시고 장도에 올라 그 동안 소식한 줄 없는 졸본의 잘난 아버지를 찾아갔고,
    아버지로 추정되는 아저씨에게 일곱 모난 돌 위 & 소나무 아래, 즉 주춧돌 위 소나무 기둥 구멍에서 찾아낸 칼 조각을 내밀자,
    고구려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던 이 아저씨는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칼과 맞춰 보았는데,
    그러자 희안하게도 칼에 피가 통하면서 서로 이어졌다고 한다.
    어머니도 동반했겠다 이 정도면 아들로 인정받을 만한데, 이 부자에게는 다른 사정이 있었는지,
    유리는 햇빛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해모수급의 재주까지 보여주고 나서야, 아들로 인정받고 태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급의 능력이 없으면 아들이 아닌가?
    그리고 아들이 이렇게 난이도 높은 시험을 2차까지 치는 동안 예씨 부인은 뭐하고 있었을까?
    그 동안 너무 늙어 서로 못 알아본 것은 아닐테고.

    모든 신화가 그러하듯이 허황된 이야기는 당시 상황의 은유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유리가 등장한 후 발생한 소서노 모자의 탈출이라든가, 동명성왕의 때 이른 죽음 등의 정세 변화들을 고려하면, 고구려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유리가 동명성왕을 찾아갈 때 하필 칼 조각을 가지고 갔다는 것은 일종의 무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달랑 모자만 찾아간 게 아니라 동반한 세력이 있었다는 의미일 수 있고,
    동명성왕이 보관하고 있던 칼 조각과 아귀가 맞았고 피까지 통했다는 것은,
    오이, 마리, 협부, 등으로 상징 되는 선 이주 동부여 세력의 일부와 유리 동반 세력의 제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햇빛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신술은 무력의 우위 또는 기선 제압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러한 추정이 맞는다면,
    소서노 모자는 예전에 추모나 유리가 동부여에서 그랬던 것처럼, 실력에서 밀려 졸본을 탈출한 것이고,
    유리의 등장 이후 5개월 만에 40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동명성왕 또한 자연사가 아닐 가능성이 커진다.
    그리고 고구려와 동부여의 관계가 악화된 이유도 유리 세력의 탈출 때문이라는 추정도 가능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항상 안개 저편에 있으므로 알 길은 없다.

    왕위에 오른 유리왕은 기원전 18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으나 바로 죽었고,
    이듬해에 그 유명한 화희와 치희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황조가를 지었다.
    기원전 9년에는 선비족을 토벌하였고.
    기원전 6년, 동부여의 대대적인 침입을 받았으나 폭설 덕분에 물리칠 수 있었다.
    서기 3년에는 오녀산성을 떠나 국내성으로 천도하였고 개국 공신 협보를 좌천시켰다. 
    계루부의 본거지에서 왕 노릇하기 불편하였나 보다.
    서기 4년, 죽은 첫째를 대신해 둘째 해명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서기 8년, 황룡국왕이 해명의 힘을 시험해보려고 강한 활을 선물하였는데,
    해명이 힘자랑을 하며 활을 꺾어버려, 황룡국왕을 부끄럽게 하는 바람에, 유리왕이 노하여 해명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열받은 해명은 땅에 창을 거꾸로 꽂아 놓고, 달리는 말 위에서 창날에 몸을 던지는 초원 용사의 방법으로 자결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뭔 소리일까?
    유리왕은 왜 국위를 선양한 자식에게 자결을 명할 정도로 노하였고,
    애비가 그런다고 해명은 왜 그렇게 살벌한 방법으로 자살했을까? 황룡국은 웬 듣보잡 국가고?
    도대체가 이해 안가는 일들 투성인데, 알 수가 없다.
    서기 9년 대소왕이 사신을 보내 부여를 섬길 것을 종용하였으나,
    왕자 무휼이 반발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유리왕의 자식들은 참 말을 안 듣는다.
    서기 12년, 신나라의 왕망과 툭탁거렸고
    서기 13년, 부여의 침공을 무휼이 격파하였다.
    서기 14년, 양맥을 정복하고 현도군의 고구려 현을 빼앗았고,
    서기 18년에 서거하였다.

    유리왕은 등장부터 범상치가 않은, 이해하기 어려운 인생을 살다 간 사람으로,
    계루부의 본거지인 오녀 산성을 떠나 국내성으로 천도하였고, 해씨를 성으로 쓰는 등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추모대왕의 자식이 아니라 소노부 출신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해씨 고구려 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를 당시로부터 2000년의 세월이 훨씬 지난 지금,
    관련 기록이 전무한 상태에서, 실체적 진실을 알기는 어렵다.

    격동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고구려의 임금이었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위대함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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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몽이 부여에서 달아나 강물을 건너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사진=우타가와 사다히데 (歌川 貞秀 )의 조선정벌기 / 나무위키 출처)

    추모대왕

    위대한 고구려의 시조 추모(주몽)는 사생아였다.
    전해지는 설화에 의하면,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압록강 가에서 동생들과 함께 놀고 있던 유화를 꾀어내어,
    함께 하룻밤을 지내고는 다음날 혼자서 승천해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는 바람에,
    열 받은 유화의 아버지 하백은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딸자식을 내 쫒아버렸고,
    쫓겨난 유화는 떠돌다가 동부여의 금와왕을 만나게 되었는데, 사연을 들은 금와가 유화를 거두었다고 한다. 유화가 이뻤나 보다.
    그리하여 유화는 금와와 같이 살게 되었는데,
    방안에 멀쩡히 있는 유화에게 느닷없이 햇빛이 따라 다니며 비추었고,
    그 이후에 덜컥 임신을 하여, 괴상하게도 알을 낳았다고 한다.
    해모수가 제우스 흉내를 냈었나 보다. 아니면 같은 놈이거나.
    이에 열 받은 금와왕이 알을 없애버리려고 하였으나,
    껍질이 단단하고, 짐승들이 보호하는 등 해괴한 일들이 반복되어 도로 돌려주었다는데…
    금와왕, 이 양반도 어지간하다. 사람이 좋은 건지, 이쁘면 다 용서가 되는 건지.
    아무튼 이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알에서 아기가 태어났는데,
    이 분이 바로 그 유명한 동명성왕이시다.

    이러한 복잡한 사연을 간직한 아기는 다행히 무럭무럭 자라 활도 잘 쏘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으나,
    배도 다르고 씨도 다른 형제들에게는 미운 오리새끼에 불과하였을 것이므로, 구박과 멸시가 심했을 것이고,
    자기 잘못도 아닌데 받아야 하는 핍박이라는게, 참는다고 참아지는게 아니므로,
    비슷한 처지의 불우한 남자애들이 그러하듯이 추모도 이런저런 사고를 치며 청소년기를 보내었을 것인데,
    다행히 이쁜 어머니를 둔 덕에 죽지 않고 무사히 성장하여 장가까지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사는 게 만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뭔가 결정적인 사고를 치게 된 추모는 어머니 유화는 물론 갓 임신한 마누라까지 내팽개치고,
    오이 ,마리, 협보 등과 함께 동부여를 탈출하였는데,
    추모 패거리의 도망을 눈치챈 금와의 큰 아들 대소 왕자는, 그동안 뭔 원한이 그리 쌓였는지 추격대까지 파견하여 잡으려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엄리대수라는 강가에 이르러 추모가 “나는 천제의 손자이며, 강의 신의 외손자이다. 지금 쫓기고 있으니 도와 달라.” 고 외치니,
    이 황당하고도 뻔뻔한 말에, 자라와 물고기 떼가 물 위로 주르륵 떠올라 내구성이 훌륭한 민영 다리가 되어 주었으며,
    추모 일행이 강을 건너자, 다리 영업을 중단하고 도로 지들 서식지로 돌아가버려 추격대를 허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소위 어별성교(魚鼈成橋)설화인데, 웬만한 위인 설화에는 단골로 등장하는 흔한 구라로서,
    부여 동명왕 설화에도 나온다.

    어찌 어찌 졸본 땅에 도착한 추모는 돈 많은 과부 소서노와 결혼 하였으며, 처갓집의 재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
    기원전 37년 계루부의 본거지, 졸본의 오녀산성을 근거로 고구려를 건국하였고,
    가업을 물려받은 사위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두목이 된 추모대왕도 의욕적으로 일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절 두목들의 일이라는 게 전쟁 또는 약탈이었으므로,
    우선 주변 말갈족 부락을 평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고. 대대적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36년, 비류수 상류에 있던 비류국을 정복하여 다물도로 삼았고,
    기원전 34년, 졸본성과 궁궐을 완성하여 나라의 꼴을 갖추었다.
    기원전 32년, 오이와 부분노를 보내 태백산(백두산) 동남쪽에 있던 행인국을 정복하였으며,
    기원전 28년, 부위염을 보내 북옥저를 정복하였다.
    기원전 24년 가을 음력 8월, 동부여에 남아있던 어머니 유화부인이 죽자, 사신을 보내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 준 금와왕에게 감사를 표하고 토산물을 보냈다.
    기원전 19년 여름 음력 4월, 아들 유리가 예씨 부인과 함께 도망쳐 오자 태자로 삼았으며, 5개월 뒤 향년 40세로 서거하였다.

    유리의 동부여 탈출시기가 금와왕이 사망하고 대소가 왕위에 오르는 시기와 일치하는데,
    이때부터 고구려와 동부여의 관계가 틀어지고, 소서노가 두 자식과 함께 고구려를 탈출하는 사태가 이어지는 등 국제 정세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우리의 추모 대왕은 마치 동화와 같은 아들과의 만남 후, 겨우 5개월 만에 40이라는 이른 나이로 세상을 버리시고.
    이해가 안가는 일들이 겹쳐서 일어나는데,
    유리왕, 아무래도 이 냥반이 수상하다.

    평창군, 평창관광택시 연계 평창여행 서포터즈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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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평창] 올림픽도시 평창군에서는(군수 한왕기) 10월 19일(토) 11시에 단풍이 아름다운 오대산 전나무숲길에서‘2019 평창여행 서포터즈 발대식’행사를 갖고 평창여행 서포터즈 활동을 시작한다.

    평창군이 주최하고 평창 코레일과 평창관광택시가 협력하는 이번 행사는 기차여행 등 개별여행을 유도하고 평창군 내 관광지를 홍보를 위한 서포터즈 활동에 대한 안내를 받고 준비하는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이번 평창여행 서포터즈는 35팀 80명이 선발되었으며, 2019년 9월부터 본격 도입된 ‘평창관광택시’ 프로그램과 연계하여 지정코스 및 자유코스를 선택하여 평창군 구석구석을 누비며 SNS와 블로그, 유투브를 통해 오는 12월까지 평창군을 여행하며 관광지를 소개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이시균 문화관광과장은 “이번 행사는 자유 개별여행의 일환으로 인터넷 매체를 통해 평창군 관광지를 홍보하고 지역의 숨겨진 매력을 찾는 중요한 기회로 삼고, 대중교통 부문의 관광서비스개선과 관광택시운영 등 다양한 관광사업 시도에 발판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동주 기자

    평창군 발왕산 정상에 ‘평창 평화봉’ 지명제정, 국가지명위원회 최종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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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평창] 16일, 평창군 대관령면 수하리 산1번지 발왕산 정상 산 보우리의 이름이 ‘평창 평화봉’으로 정해졌다. 그동안 발왕산 정상 산 보우리는 무명으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기념하고, 강원도민과 평창군민의 염원으로 자긍심이 고취되었다.

    평창군은 2019년 2월부터 평창 평화봉 지명 제정을 위해서 문헌 및 자료수집을 완료하고 지명사용을 위한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4월에는 주민의견을 수렴한 결과 78%이상이 대부분 긍정적인 의견이었다. 5월 14일 평창군 지명위원회에서 의결되고 7월 29일 강원도 지명위원회 의결 후 10월 16일 국가지명위원회에서 최종 의결됨에 따라 국토지리정보원 고시 제2019-4044호로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수하리 산1번지 봉우리에 ‘평창 평화봉’지명을 결정 고시하였다.

    인위적 작명이라는 문제 제기가 있었지만, 국가지명위원회에서는 동의 17명, 부동의 7명으로 최종 가반수 이상으로 가결되었으며 이는 평화라는 것이 2018평창 올림픽의 불굴의 정신과 지구촌의 평화를 구현하고 평화로운 삶의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곧 올림픽정신을 비롯하여 최종적으로 발왕산 정상에 그 뜻을 남기고 싶은 강원도민과 평창군민의 바램을 위원회에서 반영하여 최종 결정된 것이다.

    한왕기 평창군수는 발왕산이 2018평창 동계 올림픽의 장소적인 상징성도 있지만, 평창은 이미 그 이름 속에 평화라는 뜻이 내재되어 있다. 평창(平昌)이라는 지명을 그대로 풀이하자면 평화와 번영이다. 평평하다 평화롭다는 의미의 평(平)과,창성하다 흥성하다는 뜻의 창(昌)이라는 글자의 조합이다. 평화와 번영을 의미하는 평창에서, 발왕산 정상에 ‘평창 평화봉’은 발왕산을 찾는 평창과 강원도를 방문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평창과 평화, 동계 올림픽을 기억하는 ‘평화도시 평창’의 유산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평창군에서는 평창 평화봉 지명 제정을 선포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2019. 12월경 ‘평창 평화봉’ 선포식 및 포럼을 개최할 예정이며, 이는 평창 평화봉의 지명된 유래와 그 뜻을 기념하는 행사로서 세계에서 최초로 평화를 상징하는 산봉우리에 지명을 제정함으로서 평창 평화봉을 중심으로 평화의 발원지로서 세계적 랜드마크가 되었다.

    김동주 기자

    고구려: 유일한 정복 국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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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개마무사 (사진=영화 안시성 스틸컷/네이버영화 출처)

    광개토대왕으로 상징되는 우리 역사 상 유일의 정복국가.
    우리 민족이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그리워하는 고대국가.
    속말 말갈이 주축이 되어 만주에서만 놀았던 발해에 비해, 영토의 반 가까이가 한반도에 걸쳐 있었고
    평양에 도읍을 두었기에 중국 놈들이 뭐라고 하던 무조건 우리나라.
    역사의 대부분을 한반도에서만 복닥거리는 못난 후손들에게 만주를 회복해야 할 민족의 정신적인 영토로 제공한 위대한 조상의 국가.

    이 자랑과 긍지의 고구려는 동명성왕이 압록강 상류 졸본지역에 자리를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기록에 나타나는 동명성왕의 휘는 추모, 주몽, 중모, 중해, 상해, 도모 등 다양한데,
    이는 모두 한자의 음차이므로 뜻과는 상관없이, 이름이 이와 비슷한 발음이었다는 뜻이다.
    고구려쪽 기록이라 할 수 있는 묘지명이 추모성왕으로 기록되어 있고, 광개토대왕릉비에도 추모왕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추모가 원 발음에 가장 가까울 것인데,
    하필 어리석다는 의미의 蒙자를 사용한 주몽이 가장 유명한 이유는,
    변방 이민족을 천시하는 중국 놈들의 못된 버릇에 놀아난 결과일 것이니,
    주몽보다는 추모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한 운 좋은 사나이 추모는 동부여에서 태어났으나, 배도 다르고 아비도 다른 형제들의 핍박에 고향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애비가 도대체 뭐하는 자이길래, 위대한 추모왕의 초년 삶이 이렇게 기구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데,
    신화에 따르면,
    추모의 아버지는 해모수라는,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니던,  무려 천제(天帝), 혹은 천제의 아들로서,
    아침에 지상에 내려와서 볼 일을 보고, 저녁에는 천상으로 복귀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태양신 아폴로와 환웅을 합쳐놓은 어마무시한 신급의 능력자로서,
    부여의 건국 설화도 등장할 뿐만 아니라 역사상 단군과 동일시되기도 하는데,
    관련 신화를 보면,
    기원전 58년 오룡거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와 북부여를 세우며 스스로를 해모수라고 칭했고, 
    아들 부루에게 해씨를 성으로 물려주었다고 한다. 이 해부루가 동부여의 시조가 된다.
    나중에 나라를 해부루에게 물려주고 하늘로 원대 복귀했는지,
    아니면 천하를 유람하며 놀았는지는 모르지만, 이 냥반이 강가에서 놀던 유화를 유혹하여 추모를 낳게 했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렇게 되면 족보가 심히 꼬인다.
    해모수에게 버림받은 유화를 거둔 사람은 금와왕인데,
    금와는 해부루가 천신에게 빌어서 얻은 아들이므로 해모수의 손자가 된다.
    따라서 금와는 할아버지의 첩을 거둔 셈이고 추모는 족보상 삼촌뻘이 된다.
    아무리 고대라 해도 설마 이런 막장드라마를 썼을까?

    해부루가 동부여로 떠난 뒤 빈자리를 차지하고, 부여의 시조가 된 동명왕도 해모수를 칭했다는 것으로 보아,
    해모수는 민족의 태양이니 구국의 태양이니 하듯이 한 나라의 시조를 높여 부르는 보통 명사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해모수.. 해.. 태양…
    나라를 세우고 난 후 간 큰 놈들을 스스로를 해모수라 부르고, 좀 염치를 아는 것들은 해모수의 아들을 칭한 것이 아닐까?

    뭐가 되었건 해모수의 아들 추모에 의해 우리의 고구려가 시작되었다.

    삼성전자, ‘갤럭시 폴드 5G’ 21일부터 일반 판매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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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전자가 폴더블 스마트폰 ‘갤럭시 폴드 5G(Galaxy Fold 5G)’를 21일부터 삼성전자 홈페이지와 전국 삼성 디지털 프라자, 모바일 스토어, 이동통신사 매장 등에서 일반 판매를 시작한다.

    9월 6일 국내에 출시된 ‘갤럭시 폴드 5G’는 그 동안 일부 디지털 프라자와 이동통신사 매장, 삼성전자 홈페이지, 오픈 마켓에서 한정적인 수량으로 사전 예약 등을 통해서만 구입이 가능했다.

    ‘갤럭시 폴드 5G’는 갤럭시 스마트폰 중 가장 큰 7.3형 ‘인피니티 플렉스 디스플레이(Infinity Flex Display)’를 탑재해 기존 스마트폰의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모바일 경험을 제공하며 접으면 한 손으로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휴대성을 제공한다. ‘갤럭시 폴드 5G’는 코스모스 블랙, 스페이스 실버 2가지 색상으로 이동통신사 모델과 자급제 모델로 출시되며 가격은 239만8000원이다.

    한편 ‘갤럭시 폴드’는 현재까지 국내를 비롯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스위스, 노르웨이, 러시아, 싱가포르, 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우디아라비아, 멕시코 등 21개국에서 출시됐다.

    편집국 보도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