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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5일 오전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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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윕포커스, 대외협력부 이사에 동국대 재학생 한규범 씨 임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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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규범 대외협력이사 (사진=한규범 이사 제공)

    스윕포커스(대표 김동주)는 24일, 대외협력이사로 한규범 씨를 임명했다고 밝혔다. 한씨는 동일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여 동국대학교에 재학 중으로 고교시절 남학생 부회장 및 경기도평택교육지원청 지역학생자치회 전체대표직을 역임하고 현재 자유한국당 평택시을 대학생위원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 임명에 대해 한규범 대외협력이사는 “스윕포커스의 발전에 최선을 다해 더 좋은 방향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며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 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한편, 본 지는 지난해 9월 수완뉴스에 ‘청소년언론 브랜드’로서 인수되었으며 ‘스윕포커스’는 시사연구언론을 목표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의 분야를 걸쳐 ‘제 3의 시선’에서 다양한 입장을 포용하여 미래세대를 이끌어나갈 오피니언 리더를 키우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email protected]

    신라 : 23대 법흥왕, 불교 그리고 개혁 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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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은 원종 또는 모즉지, 원종은 개명일 것이다.
    지증왕과 연제부인 사이에서 태어나, 소지왕의 사위 자격으로 514년 왕위에 올랐다 하는데,
    이 동네 족보는 워낙 복잡하므로 공동 아들일 수도 있고 조카에 당숙에……
    아무튼 여러가지 신분이 복합되어 계승 1순위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재위 4년, 병부를 설치하여 군제를 개혁하였고.
    7년에는 율령과 관제를 반포하고 관료의 복식을 지정하여 중앙집권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14년에 이차돈이 하얀 피를 흘리며 순교하였고, 15년에 불교를 국교로 선포하였다.
    18년에는 상대등을 임명하여, 6부의 귀족 세력들을 관료체계에 포함시킴으로써,
    왕실은 6부의 하나인 탁부의 대표가 아니라, 신라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19년에는 금관가야를 합병하여 낙동강 유역을 손에 넣었고, 덤으로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까지 얻었다.
    23년에는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말년에 흥륜사에 출가하여 법공 화상이 되었고, 바로 사망하였다.
    재위는 27년, 시호는 법흥이다.

    남들은 한참 전에 고대국가의 체제를 갖추었고 일차 전성기까지 지났는데,
    지진아 신라는 이제야 제대로 모양이 나오는 고대국가가 되었다.
    그만큼 신라가 후진적인 사회였다는 뜻일 것이고, 이 한심한 신라를 개혁할 수 있는 방법은 불교 도입 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차돈의 순교에서 알 수 있듯이 도입 과정에서 많은 피를 뿌려야 했고, 정착을 위해서도 많은 진통이 필요하였다.

    왕즉불 사상에 따라 왕가와 석가모니의 가계를 동일시하였고,
    토속신앙의 아성인 일곱 성지를 과거불이 주재하던 장소라고 우기며 밀어버리고, 절을 짓는 국책사업을 벌였는데,
    이는 왕실에 부처의 권위를 부여하여, 기존 질서를 뿌리부터 파괴하는 짓이었으므로,
    대대로 토속 종교의 제사장을 겸하던 귀족들 입장에서는,
    이전 소지왕 대의 신궁 설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기가 차고 억장이 무너질 일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득권 세력이 순순히 제 밥그릇을 빼앗기는 법은 없으므로,
    법흥왕의 정책도 귀족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딛혀, 짓던 절을 때려 부쉈다가 다시 짓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때 지어진 절들 중 유명한 것이 분황사, 사천왕사, 불국사 등으로,
    어찌보면 가소로운 사기이거나 무리한 밀어붙이기 처럼 보이기도 하나,
    법흥왕의 불교 도입과 왕즉불 사상을 이용한 왕권강화는 결과적으로 샤머니즘이 판치던 부족 연맹체 수준의 신라를 명실상부한 고대 왕권 국가로 탈바꿈시킨 계기가 되었으며,
    법흥왕은 이렇게 결집된 힘을 바탕으로 영토를 넓혔고, 후대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상당한 명군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시기에도 왜구의 준동이 없었다. 이놈들에게 도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걸까?
    맛이 간 백제를 지원하느라 여력이 없었던 건지, 아니면 나제동맹이 확장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국립농관원, 2020년 공익직불제 도입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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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강원]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강원지원(지원장 박은엽, 이하 ‘농관원’)이 2020년부터 새롭게 시행되는 공익직불제 도입을 위해 농관원 소속 공무원 및 공무직을 대상으로 하는 설명회를 가졌다. 공익직불제는 쌀 중심의 농정패러다임 전환과 작물간의 형평성 제고, 중/소규모 농가에 대한 소득안정 기능 강화로 농가간 형평성 제고, 환경/생태관련 의무를 강화하여 국민 눈높이에 맞는 농업으로 발전에 역점을 두었다.

    공익직불제 개편전후 비교 (자료=국립농관원 강원지원 평창지소)

    다시 말해, 공익직불제는 농업활동을 통해 환경보전, 농촌공동체 유지, 식품안전 등 공익을 창출하도록 농업인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제도이다. 또한, 직불제 개편에 대한 국민 공감대 형성을 위하여 준수의무도 강화하였다.

    이번에 개최한 설명회에서는 일선 사무소 직원들이 공익직불제 개편방향과 세부시행방안 등을 습득하여 새롭게 시행되는 공익직불제를 농업인들이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공익직불제 시행 관련 설명회 개최 (사진=국립농관원 강원지원 평창지소)

    농관원 관계자는 “새롭게 시작되는 공익직불제가 빠른 시일 내에 정착할 수 있도록 언론보도, 문자발송, 홍보용 포스터·리플릿 배포, 현장방문지도, 집합교육 등 다양한 홍보수단을 동원하여 홍보에 전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한, 농업인들이 공익직불금 감액 등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직불금 수령을 위한 의무사항”을 철저히 준수하여 줄 것을 당부하였다.

    신라 : 22대 지증왕, 대물 중흥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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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은 지대로, 지도로, 지철로 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원 발음은 지절로 정도일 것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담력이 세었다 한다.

    고구려에 볼모로 있던 눌지왕의 동생 복호의 손자로 소지왕과는 6촌간이고,
    437년 64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 3년에 순장을 금지하고 우경법을 시행하였으며 신궁에 제사지냈다.
    이듬해에 국호를 신라로 통일하였고 칭호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었다.
    5년에 상복에 관한 법을 제정하여 시행하였고 12개의 성을 쌓았다.
    이듬해에 나라 안의 주·군·현을 정하였고, 얼음 저장법, 선박 이용법 등을 정했다.
    10년에 시장을 관리하는 관청을 설치하였고.
    13년에 실직주 군주 이사부를 시켜 울릉도의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재위 15년 만에 훙하니 그때 나이가 78세였다고 한다.

    소지왕은 죽기 직전까지 여인을 탐하여 평생 거느린 처첩이 10명에 이르렀다는데,
    아들이 없어 6촌 동생이 뒤를 이었다는 것이 이상하고,
    소지왕기에 잦은 외침 및 신궁 설치 등 사회불안 요소가 많았다는 점을 결부해서 생각해 보면,
    소지왕 말년에 뭔가 심상찮은 일이 있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그러한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소지왕이 사위인 법흥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과도기적으로 지증왕에게 왕위를 잇게
    했다는 설이 정설처럼 취급된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고대에는 모계의 전통이 강하고 성문화가 개방적이었는데,
    신라 왕실은 그 중에서도 유독 심해 거의 난잡지경이었으므로, 가능한 이야기라는 생각도 든다.

    지증왕이 45cm에 달하는 거대 물건에 맞는 여자를 찾아 공개구혼까지 하여 맞아들인 연제부인이,
    소지왕의 후궁이기도 했다는 기사는,
    당시 신라 왕실의 성문화가 어떠했는지를 상징하는데,
    이 정신 없는 상황에 신궁의 왕실 전용 씨받이 여인들까지 가세하면,
    신라 왕실의 족보는 거의 미로 찾기에 가까워진다.
    이런 상황에서 내 새끼에 대한 확신을 갖기는 왕이라도 어려웠을 것이다.

    무슨 사연이 있었고, 무슨 자격으로 왕위를 이었건 지증왕은 최초가 많은 왕이었다.
    신라에서 왕호를 사용한 최초의 왕이고,
    한반도에서 순장을 최초로 금지하였으며, 우경법을 최초로 실시하였고,
    우리나라 역대 왕들 중 가장 큰 성기를 보유한 왕이었다….. 이건 아닌가? 아무튼 등등.
    이와 더불어 각종 법을 만들고 주. 군. 현제를 정비하여 왕권 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양반 대에는 특이하게도 외침의 기록이 없는데
    고구려는 장수왕 사후 쇠퇴기에 접어들었으니까 그렇다 치고,
    왜놈들마저 조용한 것은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지만,
    신라가 그만큼 안정되어 있었고,반대로 왜국에는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
    뭐가 어찌되었건 이렇게 대외환경이 안정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 양반의 복이었고 신라의 복이었다.
    덕분에 과도기를 때우는 역할에 불과했던 지증왕은,
    신라를 한 단계 업그레드 시킨 영명한 군주가 될 수 있었다.

    신라 : 21대 소지 마립간, 신궁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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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왕으로, 비처왕이라고도 불리는데,
    원 발음은 비치로서, 비처로 이두식 표기가 된 것을 다시 불교식으로 고쳐 소지가 되었다고 한다.

    자비 마립간의 장자로 479년 왕위에 올라,
    즉위 이듬해에 말갈의 침입을 막았고, 북쪽 변경을 순시하여 방비를 다졌다.
    즉위 3년째에 고구려, 말갈 연합군에게 일곱성을 빼앗기며 파죽지세로 밀렸으나,
    백제, 가야와 연합군을 결성해 겨우 막아낼 수 있었다. 나제동맹 덕분에 산 셈이었다.
    이듬해엔 전통의 웬수 왜구와 싸웠다.
    6년에 고구려가 다시 쳐들어 왔으나, 물오른 나제동맹이 위력을 발휘하여 고구려군을 박살내었고.
    8년에는 삼년산성, 굴산산성 등을 수리하였으며, 지겨운 왜구 놈들을 격퇴했다.
    이듬해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신궁을 건설했다.

    11년에 고구려의 침입을 또 다시 받았고 성을 빼앗겼다
    12년에는 비라성을 다시 쌓았으며 시장을 만들어 물자를 유통시켰다.
    15년에는 백제의 요청으로 동성왕과 결혼동맹을 맺었고
    이듬해에 백제의 도움을 받으며 고구려와 싸웠다.
    다음해에는 반대로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백제를 구원했다.
    18년에도 고구려의 공격을 막았고.
    19년에는 왜구의 침입은 막았으나 고구려에게 우산성을 빼앗겼다.
    22년 왜구의 공격에 장봉진을 빼앗겼고
    그 와중에 미인 ‘벽화’를 후궁으로 맞이하였으나, 몇 달 뒤에 서거 하였다.

    거센 파도와도 같은 고구려의 공세를 나제 동맹에 의지해 겨우 겨우 막는 동안,
    전통의 원수 왜구의 공격도 끊이지 않아 소지왕은 거의 매년 전쟁을 하여야 했다.
    비록 할아버지가 남긴 나제동맹에 힘입은 바 크다 하나,
    당대의 신화 같은 장수왕의 인생 마지막 대공세를 비교적 선방하며 나라를 지켜낸,
    소지왕의 업적 또한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위, 아래로 시달리며 위기를 넘기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실업자 대책을 세우고 유통을 장려하여 경제 부흥을 유도하는 등 경제적 식견 또한 남달랐다.
    소지왕은 수컷 역할에도 충실하였는데, 알려진 후궁만 아홉으로 그중에는 이복동생도 있었다고 한다.
    고대 왕가의 족보는 원래 개족보라지만 신라는 좀 더 심했던 듯하다.

    이 양반의 업적 중엔 신궁의 설치도 있는데,
    이전의 시조묘 제사가 왕실뿐 아니라 여러 세력의 장들이 다함께, 국조이자 천신인 혁거세왕에게 올리는 제사였던 반면,
    신궁은 시조의 탄생지에 설치한 김씨 전용 사당 같은 것으로서,
    정통성의 독점을 노린 의미가 있었다.
    또한 신궁의 무녀는 대대로 김씨 왕실의 씨받이가 되어 김씨 족벌체제에 기여하였으며,
    후대에 미실 같은 여걸이 탄생하는 요람이 되었다.

    * 사금갑 설화

    재위 10년째에 있었던 이야기라 한다.
    왕이 신궁에 거동하였을 때 사람 말을 하는 쥐가 나타나서, 건방지게도 까마귀를 따라가라고 명령을 하였고,
    시종에게 따라가게 하자, 연못에서 웬 노인이 나타나 편지를 전해 주었는데, 
    겉봉에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한다.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한 사람만 죽는 게 낫지 않겠나 싶었으나,
    그 한 사람이 왕이라는 소리에 식겁하여 열어보니, `사금갑` 즉 거문고 갑을 쏘라고 적혀 있었다 한다.
    왕이 궁에 들어가 시키는 대로 하자,
    거문고 갑 안에서 숨어있던 중과 궁주가 튀어나왔다 하는데, 둘이 그 안에서 뭔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죽여 버렸고,
    그 이후 15일을 오기일이라 하고 찰밥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한다.
    이것이 오늘날 정월 대보름날 약밥을 먹는 풍속의 유래가 되었고,
    노인이 나타나 편지를 전해주었다는 연못을 서출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신라의 전통적인 토속 신앙과 불교 사이의 갈등을 의미한다고도 하고,
    불교의 수용을 둘러싼 신라 왕실과 귀족 집단 간의 대립을 나타낸다고도 하고,
    김씨 왕족 내부의 소지왕과 그 반대 세력간의 암투,
    또는 신궁 설치와 관련된 갈등을 내포하고 있다는 등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신궁은 제 세력들의 연합을 상징하는 시조묘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김씨 독점의 성지였기 때문에 이를 고깝게 생각한 다른 귀족들이 당연히 있었을 것이고,
    사금갑 설화는 당시의 불안한 사회상을 반영한 설화라는 설이 가장 끌리기는 하지만,
    그 누가 알랴.

    신라 : 20대 자비 마립간, 축성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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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자비, 불교 냄새가 물씬 나는 이름이지만, 불교와는 별 관계없는 인생을 살았다.

    눌지왕의 장자이자 실성왕의 외손자로서,
    독립운동파였던 아버지의 세력과,
    괴뢰정권이었던 외할아버지의 세력을 통합할 수 있는 신분이었으므로,
    국론의 통일과 내부의 단결이 절실했을 당시의 사정상,
    신라왕으로 이 양반 만큼 어울리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신라 왕가 특유의 사위상속의 전통도 부자상속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되었다.

    458년 즉위하였고,
    이듬해에 100척의 배를 끌고 온 대규모의 왜구와 싸웠는데,
    서라벌이 포위되는 불리한 싸움이었으나 어찌 어찌 물리칠 수 있었다.
    4년에 사촌 누이와 결혼하여 족벌을 강화하였고,
    5년, 6년 연속하여  왜구가 침입하였으나 장군 덕지 등이 활약하여 물리쳤으며.
    10년에는 전함을 수리하였다 .
    11년에 고구려와 말갈이 실직성을 습격하였으나, 물리친 후 강릉에  성을 쌓았고.
    12년에 서라벌의 구획을 나누고 방리의 이름을 정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13년에는 충북 보은에 있는 그 유명한 삼년산성을 쌓았고.
    14년에 모로성을 쌓았고,16년에는 명활성을 수리했으며 ,
    17년에 일모 ·사시 ·광석 ·답달 ·구례 ·좌라 등의 성을 쌓았다.
    이 해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해 나제동맹에 따라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미 한성이 함락되고 개루왕도 죽은 뒤였다 .
    19년에도 왜구가 쳐들어왔으나 또 장군 덕지가 물리쳤다 .
    20년에도  왜구의 침입이 있었고.
    479년 서거하여  21년간의 재위를 마쳤다.

    평생 전쟁하며, 성만 쌓다 볼 일 다 본 것 같지만,
    이 시기에 쌓은 성들 덕분에 이후 이어지는 고구려 및 말갈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었고,
    진흥왕기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되찾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평생 노심초사한 자비왕,
    그가 없었다면, 신라는 삼국통일은 고사하고 삼국 중 가장 먼저 망했을 지도 모른다.

    신라 : 19대 눌지 마립간, 제 2의 창업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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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립간, 말뚝의 의미라 하는데, 왕을 의미하는 호칭으로는 좀 이상하지만,
    조정의 첫 말뚝 즉 기준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나름 정겹기도 하다.
    이사금이 연장자라는, 집안 어른의 이미지를 갖는다면,
    마립간은 정권의 기준 또는 대표라는 정치적인 의미가 강한 칭호라 하겠다.

    내물왕의 장자로 태어나 조국이 고구려의 속국이 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으며,
    일종의 매국노나 다름없는 실성에게 왕위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핍박에 눌지왕 삼형제 모두가 볼모살이를 해야했다.

    417년 실성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고,
    이듬해에 만고의 충신 박제상의 도움으로, 
    고구려와 왜에서 각각 볼모 생활을 하던 동생들을 빼내올 수 있었다.
    이후 서라벌에 주둔하던 고구려 군대를 몰살시키며 독립을 쟁취하였고,
    재위 8년에 고구려와의 관계를 재정립하였다.
    15년에 왜병의 침입을 막았고,
    17년에 백제와 그 유명한 나제 동맹을 맺었다.
    24년에 연속된 왜인의 침입을 막았고.
    28년에는 퇴각하는 왜병을 쫒다 죽을 뻔 했다.
    38년에는 고구려의 침입을 막았고,
    이듬해에 동맹국 백제를 구원하였다.
    파란 만장한 삶을 살며 많은 업적을 남기고 458년 서거하였다.
    42년간의 재위였다.  

    눌지왕은 고구려의 미천왕에 비견될 만한 인생 유전을 겪은 사람으로 상당한 능력을 지닌 정치가였다.
    김씨 왕조를 확립했던 나름 위대했던 아버지가 화병으로 죽고,
    어린 동생들은 적국의 볼모로 보내졌으며,
    정적인 실성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야 하는 등 비극적인 유소년기를 보내었는데,
    장성해서도 고난은 이어져, 고구려에 볼모로 가야했고 목숨까지 위협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실성왕에 대한 고구려의 지지를 철회시킴은 물론 제거까지 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고구려와 실성왕 사이에 어떠한 갈등이 존재했고, 눌지왕이 어떻게 이용했는지는 모르나, 
    직접 시해하지는 않았기에 왕위 찬탈의 오명을 피할 수 있었고,
    장인을 죽였다는 패륜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만일 직접 죽였다면 고구려에게 두고두고 이용당하거나 제거되었을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직접 시해자인 고구려로 비난을 돌려 후일 복수를 주장할 수 있는 명분까지 만든 것이다.
    고구려의 지지로 왕위에 오른 후에는 탄탄한 신라 내의 지지기반을 이용하여,
    고구려 주둔군을 몰살시켜 버렸고 독립을 쟁취하였다.
    어찌 보면 싱겁기까지 한데, 그만큼 그의 능력이 뛰어났다는 뜻도 된다. 
    눌지왕은 정치의 연장인 외교에서도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였는데, 
    얼떨결에 독립한 후에도, 뭘 어찌했는지 고구려와의 관계가 그다지 나쁘지는 않아,
    전면적인 전쟁은 없었고, 웬만한 분쟁은 외교적으로 마무리 하였다.
    그의 최대의 외교적 업적은 어제의 적을 오늘의 동맹으로 만든 나제동맹이 었다.
    비록 당대에 큰 도움을 받지는 못하였으나,
    이후 신라는 나제동맹을 기반으로 고구려의 팽창을 저지하고 힘을 길러, 
    진흥왕대에 한강유역을 확보하게 된다.
    박제상의 볼모사건 이후,
    왜와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아 지금까지의 칭찬이 무색해지는 감이 없지 않아 있으나,
    어찌 어찌 막으며 잘 버텨 내었고,
    백성들을 보살피고 농업을 장려해 후대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았고, 부자 상속제를 확립하여 나라 꼴을 제대로 잡은 눌지 마립간,  
    제 2의 창업 군주라 불리어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신라 : 실성 마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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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실성, 발음이 묘한데, 열매 實에 성스러울 聖으로 한자 뜻은 좋다.

    미추왕의 둘째 사위로 내물왕과는 동서지간이라 하는데,
    100살 이상 차이가 나는 장인과 사위…. 조작일 것이다.
    이찬 대서지의 아들로 392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졌는데,
    401년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이 되는 바람에 내물왕이 신세를 비관하고 몸져눕자,
    귀국하여 총독 비슷한 짓을 하였다.
    더욱 기가 막혀진 내물왕이 402년 사망하자,
    전왕의 아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내물왕과 별 혈연적 연고가 없었음에도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옹립되었다.
    고구려의 압력 때문일 것이고, 신라의 속국화가 심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하겠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왜와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막내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보냈다.
    자신의 의지였는지, 고구려의 제안이었는지….야 모르겠지만,
    딴에는 잠재적인 정적을 제거하고, 적국도 달래는 묘수를 쓴 셈이나,
    바로 이듬해에 백제의 침입을 받았고,
    볼모의 효과가 없었는지 아니면 왜국정권의 통제력이 약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재위 4년, 6년에 걸쳐 왜놈들의 연속 침입을 받았다.
    뭐 주고 뺨 맞은 꼴이 난 것이다.
    열 받은 실성왕은 7년에 왜인들이 대마도에 군영을 설치한다는 말을 듣고 선공할까도 했으나,
    자신이 없었는지, 그냥 지켰다.

    11년에는 내물왕의 둘째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었는데,
    이 역시 정적을 제거하고 상국의 환심을 사는 양수 겹장의 묘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4년에는 왜인들과 풍도에서 싸워 이겼다는데, 섬이면 해전을 했을 것이므로,
    신라가 제법 기력을 회복했었나 보다.
    자신감도 좀 생겼는지,
    자신의 사위이기도 한  내물왕의 장남 눌지마저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어 제거하려고 하였는데,
    오히려 눌지가 고구려 세력을 이용하여 역관광을 보내버렸다.

    재위는 16년,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실성왕은 키가 크고 똑똑했으며 미래를 볼 줄 알았다 하는데,
    그의 인생을 보면 별로 맞지 않는 인물평 같다.
    그래도 젊어서는 볼모로서 조국에 기여하였고,
    총독 비슷한 왕이 되어서도 혼이 없는 매국노가 아닌 신라왕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려고 하였다.

    군사적 능력도 상당하였고 식견 또한 뛰어나,
    신라가 고구려에 완전히 흡수되는 것을 막고, 연속되는 왜구의 습격에 나름 잘 대처하며,
    위기의 신라를 지켜낸 임금이었다.

    왕비는 신라 왕계에 등장하는 마지막 석씨로서 이후 석씨는 왕족에서 완전히 빠지는데,
    기록이 없으므로 약간의 상상을 해보면,
    실성왕은 자신의 성씨인 김씨보다는, 석씨의 사위 역할에 충실하였고,
    석씨는 김씨로 넘어간 왕권을 되찾기 위해, 김씨 비주류였던 실성왕에게 올인하였는데,
    결국 눌지로 대표되는 김씨 세력에게 패배하였고,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완전히 몰락하였다….
    가 아닐까?

    신라 : 17대 내물 마립간, 나도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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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내물, 나물, 나밀, 마립간, 이사금이라고도 하고… 그냥 내물왕이라고 하자.

    이후 이어지는 김씨 왕들의 시조뻘 되는 양반으로 미추왕과 동일시 되기도 하는데,
    기록에 의하면 구도 갈문왕의 자손으로,
    아버지는 미추 이사금의 동생이고, 아내는 미추 이사금의 딸 즉 사촌 누이라 한다.
    어머니도 김씨라 하므로 전형적인 족내혼의 가계로서,
    미추왕의 조카이자 사위라는 명분으로 왕좌를 차지한 듯하다.

    356년 석씨들을 밀어내고 즉위하였는데, 아무래도 반발이 있었지,
    민심을 다독이며 초반 치세를 시작하였다.
    재위 9년에는 대규모 왜병의 침입을 매복 작전으로 패퇴시킬 수 있었으나,
    왜군의 규모와 기세에 놀랐는지,
    11년에 근초고왕이 주도하는 국제 네트워크에 참여하여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 근초고왕의 선물을 받는 등 백제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이 국제 네트워크가 신라에는 별 이득이 없었는지, 
    재위 18년에 백제 독산성주의 투항을 받아들이면서 근초고왕과 사이가 틀어졌고,
    이후 전진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하는 바람에, 
    백제와 그 동맹인 가야 그리고 왜의 시달림을 받게 되었다.

    결국 재위 37년에 이름도 이상한 ‘실성’을 볼모로 보내면서 고구려동맹을 구걸하였다.
    이듬해 대규모 왜인의 공격은, 비록 금성을 포위당하였어도 고생 끝에 단독으로 물리칠 수 있었으나.
    44년에 고구려에게 맛이 간 백제가 방향을 돌려, 가야, 왜와 함께 침입한 연합공격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서라벌이 함몰 위기에 몰리는 등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고구려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광개토대왕 5만 대군을 파견하여 왜병을 물리쳐 주었고,
    그 와중에 오랜 숙적인 가야를 밀어내고 낙동강 하구까지 진출할 수 있었으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고구려는 군을 서라벌에에 주둔시키고, 정치에 간섭하는 등 상전 노릇을 하였다.

    석씨에게 어렵게 빼앗은 정권을 고구려에 헌납한 꼴이 된 내물왕은 상심하여 몸져누웠고,
    이에 고구려는 볼모로 있던 실성을 귀국시키며 영향력을 더 확대하였다.
    더욱 기가 막혀진 내물왕은 시름시름 앓다가 재위 47년에 훙하였다.

    영욕이 교차하는 삶이었다.

    초반에는 석씨로부터 성공적으로 왕권을 빼앗았고,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여, 정복 군주의 면모를 보였으며,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등 나름 멋진 삶이었다.

    그러나 당대의 한반도 패자였던 근초고왕을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백제와 그 네트워크상에 있는 가야, 왜의 시달림을 받아야 했고,
    거기에 말갈도 준동하고, 천재지변까지 겹쳐 나라꼴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결국 동맹인 고구려에 구원을 청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상대가 하필 광개토대왕이었다.
    동맹도 힘이 비슷해야 동맹이지, 변방의 소국 신라는 결국 고구려의 속국이 되어버렸다.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었으니 화병이 날만도 하였을 것이다.

    그나마, 근초고왕과 광개토대왕을 모조리 겪고도 백제의 아신왕 꼴이 나지는 않았고,
    아들 눌지 대에 이르러 다시 독립국가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그 후손들이 삼국을 통일 하였으니,
    자식복은 있는 삶이었다.

    고구려 태조왕, 백제 고이왕과 함께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은 왕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 16대 흘해 이사금, 석씨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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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 흘해, 내해 이사금의 손자이다.

    왕위 계승서열 1위이면서도 첨해 이사금에게 왕위를 뺏기고,
    본거지에서 왜병에게 목숨을 잃은 석우로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나이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아들이라기보다는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재위 내내  왜구에 시달리며 농업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재위 21년째에 벽골지를 만들었다는데, 이게 그 유명한 김제 벽골제…는 아닐 것이다.
    거리도 거리지만 당시 신라 국력으로 백제 세력권 내의 김제에 저수지를 만들었다?
    택도 없는 이야기이다.

    재위  37 년에는 왜병이 금성을 포위하여 겨우 물리쳤고.
    356년, 재위 47년에 졸하였다.

    흘해 이사금은 석씨의 마지막 왕이다.
    이후 석씨는 신라 왕계에서 사라지는데, 박씨와 달리 왕비 하나도 배출하지 못하는 완전한 몰락이었다.
    그 몰락 원인으로는, 과도한 족내혼으로 인한 자손 단절설이 있는데, 
    근친 교배로 인한 열성 유전자의 발현은 불임의 원인이 될 수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는 좀 부족하고,
    이 외에도 다른 설에서 주장하는, 석씨의 분열( 골정계, 이매계 )과 석우로의 죽음으로 인한 이매계의 몰락 그리고 골정계의 세력 확장 실패 등 여러 원인들이 복합되어 왕조의 몰락이라는 사건을 만들었을 것이다.

    뭐가 되었건 확실한 사실은,
    박, 석, 김이 서로 물고 물리는 신라의 정치 게임에서,
    흘해 이사금을 마지막으로, 석씨가 완전히 빠져 나갔다는 것이다.

    신라 : 15대 기림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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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 기림, 조분 이사금의 손자라 하는데 확실하지 않다. 
    가계만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업적도 이상한데,
    298년에 즉위하여 재위 3 년째에 왜와 화친하였고, 비열홀이라는 고구려 접경지역을 순행하였다.
    이 시기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왔다고 하는데…이건 뻥이고.

    재위 13년만인 310년에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아마도 끼워 넣기 위해 만들어진 가공의 왕일 것이다 .

    신라 : 14대 유례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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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 유례 또는 유리, 다시 석씨 임금으로, 조분 이사금의 아들 또는 손자라고  한다.

    이 양반은  창업주도 아니면서 ‘ 어머니가 밤길을 걷다가 별빛이 입으로 들어왔는데 임신이 되었더라’는 망측한 탄생 설화를 가지고 있다.
    별빛이든 뭐든 호적상 아버지의 씨는 아니므로 사생아란 이야기인데,
    아무리 사위 상속이 대세인 시대라 해도,  뼈다구의 품질을 유난히 따지는 신라에서 어떻게 애비 없는 자식이 왕이 될 수 있었을까?
    미추왕의 사위로 왕위를 계승했으나 단지 기록이 없을 뿐이라고 생각해본다 해도,
    다른 미추왕의 사위들은 100년 후에나 나타나는데 이 양반은 왜 이렇게 일찍 나타났을까?
    그리고 유리라는 이름도 이미 3대 유리 이사금 때 나온 이름이고.
    참 이상한 게 많은 양반인데,
    그래서 미추왕과 더불어 가공의 인물로 의심받고 있다.

    가공의 인물이라니까 좀 허탈하긴 해도 역사란 기록이므로 일단 살펴보면,
    284년 미추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왕위에 오른 후엔 왜구에게 주구장창 시달렸다.
    하도 시달리니까 일본 본토 원정을 기획하기도 하였는데, 
    단독으로는 엄두가 안 났는지 백제와 연합할 생각까지 하였으나,
    도움은커녕 도리어 해를 입을 가능성이 커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재위 14년째에는 옛 이서고국의 군사들이 공격해 왔다는데, 
    이서고국은 경주 근처 청도군쯤에 있었던 소국이라 한다.
    이 정도 거리면 이미 예전에 박살을 냈을 텐데 새삼스럽게 공격을 해왔다는 것도 이상하고,
    신라가 대병을 동원하였으나 막지 못하여, 죽은 미추왕이 전직이 대나무였던 군사들을 보내 막았다는 것은 더 이상하다.
    이 군사들은 김씨의 사병들이었다는 해석도 있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당시 김씨의 세력이 석씨의 세력을 능가하였다는 뜻이 된다.

    만일 미추왕과 유례왕이 가공의 인물이라면 모조리 헛소리가 되긴 하지만,
    기록이 있고 재미있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알아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