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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는 세균이 아닌 ‘바이러스’, 바이러스와 세균의 차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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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과 함께 떠오르는 가짜뉴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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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소프트, 코로나 19 여파로 “오피스 365” 제품의 성능 낮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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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왜 나만 몰랐지 하는 청소년 정책, 앞으로 알아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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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우 칼럼리스트

[수완뉴스=박정우] 올해 3월 9일부터 마스크 5부제를 시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를 들어, 1995년생과 2000년생은 금요일날 약국이나 농협 등 공적 판매처에 가면 마스크를 1인당 2매씩 구매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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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학평 4월로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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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교육청 홈페이지 공지사항에 올라온 <2020학년도 3월 전국연합학력평가 시행일정 순연 안내> (사진=서울시교육청 홈페이지 캡쳐, 수완뉴스)

[수완뉴스=유덕현 기자] 코로나19 여파로 인해 전국의 초중고교의 개학이 2주 연기됨에 따라 서울특별시 교육청은 지난 4일에 당초 3월 19일로 예정되었던 “2020학년도 3월 전국연합 학력평가”를 4월 2일로 연기되었다고 발표했다. 사실상 4월 학평이 된 것이다. 이번 3월 학평이 4월로 연기됨에 따라 예정된 4월 학평이 연기될지 의문이다. http://www.sen.go.kr/web/services/bbs/bbsView.action?bbsBean.bbsCd=72&bbsBean.bbsSeq=5796

유덕현 기자

고려 : 24대 원종, 몽골의 속국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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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정
평생 최가들에게 시달렸으면서도 오래 오래 살았던 고종의 맏아들인데,
어려서부터 영특 총명하고 기상이 활달했었는지는 잘 모르겠고, 그런게 필요하지도 않았겠지만, 아무튼, 나이 40에 늙으신 아버지를 대신해 적국에 항복하러 길을 떠나야 하는 기구한 팔자였다.
그런데 가는 도중, 아버지가 돌아가시더니 이어 몽골 두목 몽케도 죽어버리는 황당한 일이 발생하였다.
청부자와 타겟이 동시에 사라진 것인데,
이런 경우, 일반적인 청부라면 흐뭇하게 휴가를 즐기면 되었겠지만,
조국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 그럴 수는 없고, 다음 타겟을 찾아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점입가경으로, 몽골 놈들이 쿠릴타이를 양쪽에서 열더니 각각 아리크부카와 쿠빌라이를 두목으로 선출하는 더 황당한 일이 발생하였다.
몽골에 내분이 생긴 것이다.
이때 만일 고려가 전기처럼 정상적으로 기능을하는 국가였다면,
이러한 첩보를 입수하자 마자 귀국하여, 곧 다음 대를 이어갈 태자로서 문무신료들을 모아 놓고, 어찌하면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 동안의 원수를 갚고 나라를 반석 위에 올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겠지만,
망가질 대로 망가져 이미 국가라고 할 수 없는 고려에서, 왕이라고 할 수 없는 왕의 아들이었으므로, 이 가련한 태자는 신분에 걸맞는 정략, 군략 대신에, 투전판의 시정잡배들처럼 고려의 운명을 걸고 어느 놈이 다음 대 몽골 두목이 될 지 찍어야 했다.
그런데 열성조의 도우심인지 아니면 원래 도박에 소질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기특하게도 수도에 있는 아리크부카를 패스해서 카이펑에 있는 쿠빌라이를 찾아갔는데,
대권 계승의 명분에서 밀리던 쿠빌라이는 고려의 태자가 자기에게 항복하러 온 것을 보고 감격하여 마치 동맹을 대하듯,
후대에 매국적 입성론을 막은 원종의 최대 업적이라고 불리는 불토개풍 즉 세조구제를 약속해 주고, 원종과 사돈을 맺기로 약속하였으며,
나중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딸 제국대장공주를 고려로 시집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래봐야 어차피 치욕스러운 항복이므로,
누가 시집을 왔는지 갔는지, 쿠빌라이가 얼마나 감격했었는지 따위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지만,
다만, 세조구제가 고려 정체성 유지의 일등공신이자 대단한 특혜라고 대대손손 원종에 대한 칭송이 마르지 않으므로, 이게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업적이길래 그 고고한 유학자들까지 칭찬 일색인지,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 첫번째 조항에,
‘옷과 머리에 쓰는 관은 바꾸지 말고 그냥 고려의 풍속에 따라 하던대로 하라’ 라고 되어 있고,
나머지 항은 그냥 일반적인 항복조항이다.
액면만 보면, 이게 뭔 특혜인가 싶기도 하고,
실제로 쿠빌라이가 고려에 대해 취한 조치도 말 그대로 의관만 그대로 두었지 그 동안 사용하던 명칭들을 모두 격하하였는데,
이에 따라 본인을 지칭하는 “짐”은 “고” 또는 “과인”으로,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명령을 담은 글인 “선지”는 “왕지”로 바뀌었으며,
충렬왕 때부터는 각종 관청과 관직의 명칭들도 모두 격하되었다.
제사제도 또한 바뀌어 원종 이후의 왕들은 묘호를 사용하지 못하였고, 시호의 앞 글자에도 원나라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 ‘충’자를 넣어야 하였다.
이는 쿠빌라이가 고려의 항복에 감격한 것이 아니라, 그저 기특하게 생각하여 약간의 자치권을 인정하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고려는, 남송처럼 나라 자체가 사라져 백성들은 물론 왕경 귀족 전부가 천민이 되지는 않았으나,
자주국이 아닌 원의 변방을 지키는 번견으로서, 달라면 주고, 보내라면 보내고, 바치라면 바쳐야 하는 신세를 면하지는 못하였으므로,
원의 요구를 감당해야 했던 고려 백성들의 처지는 남송의 백성들과 도긴개긴이었는데,
그러나 왕의 입장은 또 달랐던 모양이다.
100년 동안 아무 실권이 없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허리가 꺾이기도 하였는데, 까짓 호칭이 무슨
대수였을까?
황제의 말만 잘들으면 저 조폭같은 무신 놈들을 확실하게 때려잡을 수 있고, 호칭이야 무엇이든
국내의 권력도 차지 할 수 있으므로,
원종으로서는, 쿠빌라이가 28년 동안 조국을 초토화시키고 전체 인구의 1/3을 없애버린 철천지
원수의 수장이 아니라,
오히려 잃었던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기형적인 고려의 정치 지형을 정상화시켜 주는 은인으로
보였….는지 까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원종은 쿠빌라이의 은혜에 감복하며 기꺼이 지시에 따랐다.
따라서 이 조항은 왕과 그 주위에서 기생하는 귀족들을 보호하는 기능을 했을 뿐,
일반 백성들은 물론 고려 전체로 보아도 그다지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는데,
나중에는 오히려 개혁 추진의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후기에 고려는 농장의 확대와 양인 수의 감소로 인하여, 국가의 세수가 감소하고 유민이 넘쳐 나는 등 사회문제가 심각하였는데,
이에 황제가 직접 관료를 파견하여, 만화의 근원인 노비제를 손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사정 따위보다는 언제나 자파의 세력 보존과 확대가 최우선인 당시의 권문세족들이, 세조구제를 명분으로 전통적인 노비제를 건드리면 안된다고 주장하여 개혁이 좌절되는 기막힌 일이 있었다.
이미 국가기관의 수와 기능이 축소되고 명칭도 다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부마국으로서 대대로 몽골 공주를 비로 맞이하여, 왕실에 왕건 유전자의 씨가 마를 지경이 된 고려에서,
다른건 다 바꿔도 노비제만은 세조의 유훈이라 못 바꾼다는 고려 기득권들의 이 어처구니 없는 논리는,
고려 정체성 유지의 일등공신이라는 세조구제의 허실을 제대로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원종은 1260년 고종의 뒤를 이었는데,
비록 몽골에서는 쿠빌라이의 환대를 받으며 국왕으로 책봉까지 받았으나,
국내의 위치는 여전히 얼굴마담이자 방패막이로서 무신 집정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한심한 신세를 벗어나진 못하였으므로,
노비 출신 집정 김 준을, 무슨 대단한 공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떡하니 최고급 공신인 벽상공신으로 올리고 다시 뒷전으로 물러 앉았다.
그러나 대처에 나가 큰 판에서 놀아본 원종은, 정쟁의 대가 쿠빌라이에게 한 수 배웠…..는 지는
모르겠으나,
무신집정의 한계를 드러내며, 우물 안 개구리 마냥 되지도 않는 대몽항쟁의 지속을 주장하는 김 준을, 내부 알력을 이용한 차도살인지계로 제거하였다.
이는, 시대의 흐름을 모르는 어리석은 무부놈 때문에 만백성이 위험에 처할까 걱정하여 그리한 것…..은 아닐 것이고,
김 준을 그냥 두었다가 쿠빌라이의 심기라도 건드리게 되면 그 알량한 제후왕 자리마저 날라갈까 보아 그랬을 것이다.

1268년 임 연과 공모하여 김 준을 죽여버린 원종은,
바로 친정을 실시하여 그 동안 고귀한 왕을 능멸하고 백성들을 학대한, 이 천인공노할 무부놈들을 단매에 때려 죽이고 선정을 베풀…… 지는 못하고,
그냥 지 양아버지를 패죽인 임 연을 새로운 집정으로 인정하였다.
그런데 임 연은, 자기도 무신 집정라는 것을 주장하기라도 하듯이, 김 준처럼 철저한 대몽항쟁을
주장하였는데,
이래서야 고차원적인 스킬을 사용해가며 김 준을 제거한 보람이 없기에,
원종은 몽골의 출륙환도 요구를 명분으로,
1269년 태자 심을 몽골에 입조하게 하고, 개경으로 환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과 입장이 다른 임 연은 이에 결사반대하였는데, 그래도 원종이 고집을 부리자,
마치 최 우처럼 왕의 측근들을 도륙하였으며, 야별초를 동원해 원종을 폐위시키고 안경공 창(영종)을 왕위에 올렸다.
임 연이야 보고 듣고 배운대로 선배들 흉내를 낸 것이었겠지만,
그러나 시대는 이미 이러한 무단 통치가 통할 시대가 아니었다.
마침 귀국 중이었던 태자 심이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몽골로 다시 돌아가 쿠빌라이에게 일러바친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한 쿠빌라이는 당장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요절내겠다고 임 연을 협박하였고, 이 무시무시한 협박에 바짝 쫄은 임연은 원종을 부랴부랴 다시 복위시켰는데,
그렇다고 입조하여 해명하라는 쿠빌라이의 명에 따라 원종과 함께 입조했다가는, 목이 따로 높은데 걸릴 게 분명하였으므로,
원종을 홀로 입조시키는 한편, 야별초를 내륙 각지에 파견하여 육지의 인원과 물자를 섬으로 대피시키고 몽골과의 장기 항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당랑거철인지는 지도 알았을 것이므로,
스트레스가 많았는지 얼마 후 등창으로 죽어 버렸고,
그의 아들 임유무가 뒤를 이어 아버지의 유업을 이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몽골에 입조한 원종은 세자 심의 국혼을 추진하였고,
다시 귀국한 후에는,
강화도로 돌아가 봐야 도로 무신놈들의 포로 겸 꼭두각시가 될게 뻔하였으므로,
개경에 머물며 진짜 왕처럼 모두 개경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하였다.
이래서 최가들이 다른 것은 다 몽골놈들이 하라는 대로 해도 왕의 입조만은 악착같이 막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최가들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고…아무튼 강화도의 조정은 무시무시한 몽골을 등에 업은 왕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하였으나,
집정 임유무는, 남들이 간다고 어떨결에 따라갔다가는 정권 뿐만 아니라 목숨마저 위험하였기에, 지 애비처럼 이를 거부하고 대몽항쟁의 지속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임 연도 아닌 그의 아들 따위는 이미 원종의 상대가 아니었다.
원종은, 이제는 원숙한 경지에 이른 차도살인지계를 또 사용하여 임유무를 죽여버림으로서,
개경환도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하며, 무려 100년 만에 무신 시대를 완전히 끝장내 버렸다.
원종은 ‘이 얼마나 조상님들께 자랑스럽고 자신에게 떳떳한가’라고, 스스로 기꺼워했…는지 까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건 일국의 집정을, 실력을 키워 당당하게, 왕명으로 절차를 밟아 처벌한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조폭처럼 자파의 세력을 동원하여 토벌한 것도 아니라,
철전지 원수 몽골의 힘을 이용하여 궁지에 빠뜨렸고, 이에 대해 반발하자 암수를 사용하여 제거하였으므로 이에 대한 반발이 없을 수는 없었다.

임유무가 죽고 조정의 중신들이 개경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삼별초배중손을 중심으로 봉기하였는데,
기존 병력들의 이탈이 심해지자 이대로 강화도를 지키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였는지, 김 준이 준비해둔 대몽항전기지 진도로 탈출하였다.
초기에는,
서남해 운송의 요충인 진도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남해안을 포함한 거대 해상세력을 형성하였고, 나주와 전주를 공격하는 등 기세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몽골놈들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자 수세에 몰렸으며,
결국 김방경을 필두로 한 여몽연합군에게 진도를 빼앗기고 말았다.
삼별초는, 치열했던 이 진도 공방전에서 배중손 등의 지휘부가 사망하고 대부분의 병력이 사라졌으므로, 사실상 여기서 망한 것이었으나,
이렇게 끝내기에는 그 동안 최고 권력자의 주구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백성들의 고혈을 빨던 삼별초의 내공이 간단하지 않았다.
근성의 삼별초는 포기하지 않고 잔당을 모아 제주도로 이동하였고, 김통정을 중심으로 최후의 저항을 시작하였는데,
그러나 시대의 대세는 이들의 분투인지 발악인지 모를 저항을 가볍게 분쇄하였고,
결국 최후의 농성을 하던 김통정을 자살로 몰고가 삼별초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삼별초를 우리 민족의 끈질긴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민족혼의 화신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삼별초의 난을, 대제국 몽골의 엄청난 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우리 민족의 꺾이지 않는 기상을 보여준 쾌거로 인식하는 경향도 있으나,
사실 삼별초는 고려의 중앙군을 무너뜨린 최가들이 권력 유지를 위해 양성한 사병집단으로서,
최고 권력자의 친위대 역할을 한, 철저히 반민중적인 조직이었고,
삼별초의 난은, 그 동안의 패악질로 갈 데가 없어진 잔당들이 발악적으로 일으킨 반란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하는 짓도 그냥 대규모 해적질이었다.
다만 봉기할 때,
병력 부족을 해소하기 위하여 강화도의 관청에 보관되어 있던 노비 문서들을 불태우며,
노비들의 참여를 적극 독려하였기에 노비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이 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삼별초에 가담하려는 노비들이 줄을 이었으며,
삼별초의 본거지까지 갈 수 없는 노비들은 동조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므로,
삼별초의 난은 그 반란의 동기나 명분과 관계없이, 노비들의 신분 상승 욕구에서 반란의 동력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민족혼이니 저항정신이니는 다 하품나는 소리이고,
그나마 의미를 찾는다면 신분 해방을 위한 노비들의 눈물겨운 투쟁 정도일 것이다.

한 편, 서경의 최 탄은 1269년 임 연이 원종을 폐하자 반란을 일으켰는데,
최 탄은, 천하에 패역한 역신 임 연의 죄상을 낱낱이 고하고 군사를 휘몰아 강화도로 진격하 ….기는 고사하고,
무고한 주변 고을과 여러 성의 관리들을 학살한 후,
서경을 비롯한 북계의 54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의 6성을, 마치 제 것인양 통채로 원나라에 바쳐 버렸다.
게다가 이 빌어먹을 놈은, 원종의 복위를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면서도,
원종이 복귀만 한 게 아니라, 무신 정권을 끝장내고 왕정을 복고했는데도 불구하고, 고려로 돌아오기는 커녕, 쿠빌라이에게 고려의 토벌군을 막아달라고 애원하였는데,
원종에게 감격했었다는 쿠빌라이는 이 고려의 반역자에게 냉큼 호응하여,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고 최 탄을 그 책임자인 총관으로 임명하여, 감히 어느 누구도 이놈에게손을 못대게 하였다.
한편, 쿠빌라이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던 원종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가 팔아먹지도 않았는데 날아가버린 서북면이 너무 아까웠는지,
공적 사적 연줄을 총동원하여 쿠빌라이에게 서북면을 돌려달라고 여러번 호소하였으나,
그렇게 친하다던 쿠빌라이는 그럴 때마다 택도 없는 소리 말라며 일축하였다고 한다.
결국 원종은 죽을 때까지 서북면을 돌려받지 못하였다.

원종이 삼별초 때문에 고생을 하든 서북면이 아까워서 복통에 시달리든,
대주주 쿠빌라이는 고려에 일본원정을 위한 전비를 부담하게 하는가 하면, 치사하게 여자까지 보내라고 명령하였는데,
전문경영인으로 전락한 원종은 이에 대해 항의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삼별초의 방해 속에서도 일본 원정을 위한 함대를 만드느라 허리가 휘어야 했으며,
고려판 위안부를 모집하기 위한 결혼도감을 설치하여 만백성의 원성을 들어야 했다.

원종은 1274년 향년 5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는데,
쿠빌라이가 아직 시비를 걸지 않았는지, 황제의 예로 장사지내고 종묘에 모실 수 있었으므로,
묘호를 부여받은 고려의 마지막 왕이 되는 행운도 챙길 수 있었다.
다음대 충렬왕부터는 오리지날 제후 대접을 받았기에 묘호가 없다.

여담 : 몽골의 침입을 격퇴한 나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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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전사상  몽골군만큼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군대는 거의 없다 .
알렉산더 , 카이사르 , 아틸라 …정도와 비교해 봐도 몽골군이 더 쎈 느낌인데 ,
이 엄청난 압도감 때문에 마치 몽골군이 천하무적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
몽골군이 패배하거나 점령에 실패한 나라도 많다.

우리하고도 연관이 많은 일본을 보면,
쿠빌라이는 남송과 전쟁을 할 때 일본에게 송과 관계를 끊고 원에 복종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십대의 쇼군은 겁도 없이 거부했고, 수차례에 걸친 협박에도 무시로 일관하였다.
이에 열받은 쿠빌라이는 고려를 앞세워서 일본으로 쳐들어갔는데, 
마치 유럽의 기사를 연상케 하는 무사도의 일본군과 전쟁 전문가들의 싸움이었으므로, 게임이 될 수
없었다.
연합군은 초전부터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거의 완승할 뻔했으나, 
태풍으로 타고 온 배가 왕창 부서지는 바람에 보급이 걱정이된 연합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되자 쿠빌라이는 아쉬웠던지,
옛 송의 병력 10만까지 포함된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하여 2차 침입을 명하였고,
선발대로 끌려간 김방경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선전하였으나, 태풍에 또 발목을 잡혔다 .
남송의 병력 10만은 배에서 내려 보지도 못하고 배의 침몰과 함께 다수가 사망하였고 , 
곤죽이 되어 겨우 상륙한 병사들도 일본의 적개심이 가득한 칼날에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
일본 애들도 일차 때 피 흘리며 제법 배웠던 모양이다 .
14만의 연합군 중 생환한 병사는 3만에 불과했다고 한다.
쿠빌라이는 3차 원정도 계획했으나 베트남이 더 열받게 하는 바람에 칼끝을 베트남으로 돌렸고, 
덕분에 일본은 태풍 때문에 이겼든 뭐 때문에 이겼든,
몽골의 침입을 격퇴했다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게 되었다.
몽골은 자체 동원한 병사나 자원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피해 또한 거의 없었으나, 
원정 준비에 피박을 쓰고 괜히 끌려가 칼춤을 췄던 고려나,
칼춤도 제대로 못 추고 죽는 역할만 했던 남송군만 한심하게 된 셈이었다.

일본은 재수가 좋았다고 치고 , 베트남의 경우를 보면 ,
쿠빌라이는 남방해상로를 장악하기 위하여,
세 번에 걸쳐 베트남을 침략했고 세 번 다 수도를 함락하는 개가를 올렸으나, 
베트남은 이에 굴하지 않고 치열하게 저항하였다.
특히 이차 침략에서 쿠빌라이는 50만을 동원했다고 하는데, 과장했다 해도 굉장한 병력이었을 것이다.
이 어마무시한 공격에 수도 하노이는 물론 전국토가 유린되어 임금도 항복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구국의 영웅 쩐흥다오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전국에 왕조가 위험하다고 호소하였고, 
그의 호소에 백성들이 호응하여 무려 25만의 장정들이 모였다고 한다.
쩐흥다오는 이렇게 모은 병사들로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한편 청야전술을 사용하여 몽골군을 괴롭혔고,
전쟁의 장기화로 무더운 기후와 식량부족에 시달리던 몽골군은 결국 후퇴하다 역습에 말려 대패하였다.
게릴라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반 백성들의 자발적인 협조가 필수적이므로,
베트남 쩐 왕조의 평소 정치가 나쁘지 않았고, 민심을 잃지 않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패배한 몽골응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재차 침입하였으나,
쩐흥다오는 다시 바다와 육지에서 활약하며 조국에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 주었다.

그외 몽골의 침입을 막았던 나라들을 보면 ,
캄보디아는 베트남이  2차 침입을 받았을 때 고려처럼 덤으로 침입을 받아 수도를 내주었으나,
베트남과 함께 게릴라전을 수행하여 물리쳤고.
백인의 발상지, 체첸의 고향 등으로 알려진 캅카스 지역 또한 몽골군을 격파하였다.
페르시아 속담에 ‘왕이 미치면 캅카스로 전쟁하러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동네는 지형이 험하고 아주 호전적인 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 살벌한 땅에 수부타이와 제베가
쳐들어갔다가 거의 죽을 뻔했다고 한다.
결국 그 대단한 몽골군도 캅카스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지금의 그루지야인 조지아국과 동맹을
맺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자바섬도 몽골군을 격퇴하였고.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 역시 명군 바이바르스의 활약으로  몽골 세력을 시리아에서 격퇴하였다.
인도의 노예 왕조, 할지 왕조, 투글루크 왕조도 몽골의 도전을 받았으나 치열하게 싸웠고 결국
견뎌내었고.
폴란드도 초장에 무지 깨졌으나, 몽골 내부의 사정이든 뭐든, 아무튼 저항하여 성공적으로 지켜내었다.
노보고르드는 습지가 많은 땅인데 폭우까지 내려 땅이 너무 질척거리는 바람에 패스, 무사할 수 있었다.

고려 : 여몽전쟁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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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조의 운명은 의종이 이의민에게 허리를 꺾이면서 사실상 끝난 것이었다.
이후 왕들은 아무런 실권이 없는 얼굴마담들로서 무신 집정의 칼에 죽지만 않으면 감사한
신세들이었으며,
전국적으로도, 반란, 민란이 끊이지 않는 전형적인 왕조 말기의 혼돈 상황이 지속되었다.
따라서 언제 왕조가 교체 되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다만 호족연합체의 성격이 짙은 고려의 특수성과 집권 무신 세력들 간의 격렬한 내부 쟁투가,
그나마 왕조가 숨쉴 수 있는 작은 틈을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시기에 집권한 최충헌은,
치열한 권력투쟁을 거쳐 집권세력 내부의 혼란을 성공적으로 잠재웠고, 무자비한 숙청으로 정권의
위협요소들을 제거하였으며,
강화된 권력을 바탕으로 왕의 교체를 마음대로 하는 등 고려의 실질적인 군주로 군림하였다.
그리고 왕처럼 권력을 아들 최 우에게 상속하였다.

최 우는 애비가 남겨준 기반을 더욱 공고히하고, 혼란에 지쳐버린 문신들을 포용하여 신질서를
구축하였고, 그 일환으로 자택에 제 2의 조정을 만들어 정사를 처리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로, 대궐의 조정은 빈 껍질이 되었고, 왕의 존재 의미는 더욱 희미해졌으나,
반면, 실질적 조정을 이끌고 있는 최 우는 그 역할이나 위상에서 왕과 다를 바 없었으므로,
별탈이 없었다면 자연스럽게 최 우를 시조로 하는 새로운 왕조가 출현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인지, 대권을 인수한지 6년 만에 몽골놈들이 침입하는 바람에,
왕조의 창업이라는 최 우의 찬란한 꿈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라가 버리고,
외적에게는 비굴, 치사하고 자국 백성들에게는 잔악무도한 우리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1차 침입 시,
마치 안시성주가 재림한 듯한 박서와 희대의 명장 김경손은 귀주성에서 북로군 1만의 발길을 잡았고, 개경도 만만찮은 저항을 하였다.
이에 몽골군은 개경의 함락을 포기하고 흥왕사 등 개경 주변을 초토화하였으며, 전장을 충주 등
전국으로 확대하였는데,
고려 조정은 재추회의를 열어 항복을 결의하고 박 서에게 항복을 명령하였다.
이는 최 우가 현실적인 힘의 차이를 인정하고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고심끝에 내린 합리적인 결정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이 후의 행적으로 보아 그 보다는 아마도,
안북성에서 중앙군이 소멸된 마당에, 사나운 몽골군을 금쪽같은 지 사병으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
싫었을 것이다.
금나라를 공격하기에도 빠듯한 전력이었던 오고타이는 이를 냉큼 받아들였고,
침략군은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챙기고, 일종의 총독인 다루가치까지 남긴 후 금의환향하였다.
꼴랑 3만으로 그만큼 챙겼으니 흐뭇하였을 것이다.
당시 충주 유씨를 비롯한 거대 호족들은 항복에 반대했다고 하는데,
만일 이때 고려 조정이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베트남처럼 전국에 왕조의 위기를 알리며 봉기를 호소하는 한편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등 총력투쟁을
전개했더라면,
당시 국제 정세나 몽골 내부의 사정 등으로 보아 베트남보다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왕이 아닌 단순 독재자에 불과했던 최 우는 전국적인 봉기의 구심점이 되기 힘들었고, 민심 또한
그 동안의 폭정으로 이반되어 있었기에,
최 우를 비롯한 당시 정권 담당자들은 추진 동력을 얻을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최 우는 승리하기도 힘들고, 요행히 승리한다 해도 자기 울타리가 무너질 것이 확실한
개경에서 어정대기보다는, 세력을 보전하기에 보다 안전한 강화도로 보따리를 쌌고,
얼굴마담에서 방패막이로 역할이 바뀐 고종은 포로 아닌 포로가 되어 끌려가야 했다.

강화도 천도는,
독재자 최우의 입장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희석시킬 수 있고, 잠복해 있던 반대세력들을 노출시켜
없애버릴 수 있는 기회이며, 지방 세력들에 대해 상대적 우위를 확보, 유지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이었는데,
인간의 본성인란게,
국가와 민족의 안위보다는 개인의 안전과 복리를 우선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러한 최 우의 결정을 아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그 결과가 너무 참혹하고 수치스러워, 후손된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아쉽지 않을 수 없다.

강화도에 웅크린 최우는 왕의 입조를 제외한 몽골의 모든 요구를 다 받아주었으며,
마치 친원파 처럼 몽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으므로,
본토에 남겨진 지방호족세력들은 중앙의 도움 없이 알아서 저항을 하거나 항복해야 했는데,
문제는 몽골군의 성격이었다.
몽골은 금이나 남송을 치러가는 길에 덤으로 고려까지 건들인 것이므로,
최대 3만을 넘지 않는 소규모의 군대였으며,
1차 침입시를 제외하면 다루가치조차 남겨놓지 않는, 점령군이 아닌 순수 약탈군이었다.
따라서 만일 무서워서 항복을 하게 되면,
몽골군이 철수한 후엔 최 우에게 배신자 취급을 받아 홍복원이 꼴이 나기 쉬웠다.
결국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중소 지방세력은 아예 보따리를 싸서 심산유곡으로 숨어들거나,
외딴 섬으로 피신을 하여 자체 청야작전을 실시하였고,
충주 유씨처럼 무력이 좀 되는 거대 호족 세력들은 산성에 의지해 눈물겨운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이렇게 본토의 지방 호족세력들이 소멸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최우가 즐거워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몽골군이 물러나면 방호별감 등을 파견하여 그 동안 못 받았던 세금을 걷고, 항복했던 놈들은
도륙하였으며,
서경처럼 반골기질이 강하고 침입 때마다 항복하는 지역은 주민들을 아예 소개시켜 폐허로 만들었다.

또한 강화도는 천혜의 요새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몽골은 약 2만 정도의 병력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강화도에 대해 적극적인 점령을 시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해군을 본격적으로 동원하지도 않았는데,
그런데도 최 우는 안북성 패배로 중앙군이 궤멸된 후, 중앙군 역할을 해야 했던 삼별초를 비롯한
강화도 병력들을 전쟁에 거의 투입하지 않았고, 전국단위의 의용군 모집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최 우의 반민중적인 작태는 민심의 이반을 가속시켜,
오히려 몽골군을 환영하고 그들의 통치를 원하게 만드는 이적 행위로 귀결되었다.

여몽전쟁은 1231년부터 1257년까지 총 9차례에 걸쳐 27년 2개월간 지속된 전쟁으로,
간헐적인 휴식기를 뺀다하더라도 11년이 넘는 전쟁이었다.
나름 처절하게 저항한 모양새이기는 하나,
이 기간동안 인구의 1/3이 사라졌고, 물적 손실은 헤아릴 수가 없었으며, 결국은 항복하여 몽골의
반식민지가 되었는데,
이러한 참혹한 결과는,
주력도 아닌 소수의 별동대를 맞아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제 일신상의 안위만을 위하여
강화도 천도를 단행하였으며,
싸우지도 않으면서도 완전 항복만은 하지 않아, 전국토가 유린되는 것을 유도, 방치한 최 우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나,
그 이전에,
당대 최강의 전력이라는 거란 궁기병을 맞이해서도, 수십만씩 동원하며 맞서 싸울 수 있었던 정규군
조직을 거의 해체하고,
자신의 사병 조직만을 키운 그의 애비 최충헌도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며,
아무런 명분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권력만을 위하여 왕을 무력화시키고 나라를 파탄 지경으로 몰고
갔던 역대 무신 정권의 담당자들도 그 원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보신만을 위해 나라를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버린 역대 최악의 난신적자 최 우,
그의 가문 우봉 최씨는 최 우의 손자 최 의가 살해 될 때 거의 멸족하였다.

고려 : 노비출신 집정 김 준, 몽골의 9차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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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였다.
초명은 인준, 최 우의 가병이었고, 벼슬을 받은 후 셀프 작명으로 김 준이 되었는데,
면천 후, 옛 주인 최 우의 첩과 사통하였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이므로 최 우는 뭐 주고 뺨 맞은 꼴이었으나,
이미 싫증이 났던 첩이었는지 아니면 김 준을 아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김 준을 죽이지 않고 곤장 50대에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하였으며, 말년에 다시 불러 최 항을
보좌하게 하였다.

최 항 시대의 김 준은 최양백과 더불어 정권의 양대 실세였는데,
최 항이 죽고 최 의가 집권하게 되자, 친위군 대장인 최양백에게 밀리게 되었다.
이에 열받은 김 준은 최양백을 횃불로 지져 죽이고 최 의의 목을 따,
최가의 60년 무단정치를 끝장내버렸다.
최 의를 죽인 김 준은 고종의 무한 감사와 함께 공신호를 하사 받았으나,
신분적 한계 때문인지, 쿠데타 주동 세력들을 확고하게 장악하지 못하여, 문신 류경의 집권을 막지
못헸다.
그리고 몽골 놈들이 또 초상난 지 한 달 만에 고종의 출륙과 입조를 요구하며 침입하였다.

몽골의 요구에 당시 집정이었던 류경은 예전처럼 고식적인 방법으로 대응을 하였고,
몽골군 또한 노략질을 시작하였는데,
이번에는 자랄타이가 끌고 온 병사가 적었는지 아니면 고려 군민들에게 요령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으나,
예전과 달리, 전국 각지에서 저항을 만나 뜻대로 남진하지 못하고,
경기도와 서해도 그리고 강화도 연안 일대를 공격하는 데만 집중하여,
강화도에 틀어밖혀 권력 투쟁에 날새는지도 모르는 밥버러지들을 긴장시켰다.
그런데 류경 정권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권력 강화와 부정축재에만 몰두하였으므로,
김 준은 문신 독주에 불만을 가진 각군 지휘관들을 비롯한 무신세력의 동의를 얻어,
류경이 대몽 강화와 대몽 전쟁 지휘에 모두 실패한 무능한 자라며 탄핵하였다.
그러나 류 경이 한 짓은, 잘한 짓은 아니었으나 이전 최가들과 별 차이가 없었고,
또 딱히 별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이는 단지 문신 류 경의 집권에 불안을 느낀 무신세력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만들어 낸 구실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한평생 무신들에게 시달렸던 고종이 이번에도 무신들의 손을 들어 주며 왕정복고의 기회를
날렸기에,
김 준은 비로소 집정이 될 수 있었고,
별수 없는 선택이긴 했으나, 1259년 3월, 왕의 출륙과 입조를 조건으로 몽골과 강화를 맺음으로써,
길고도 길었던 28년 간의 몽골과의 전쟁을 마무리한 집정이 되었다.

6차 침입부터 고려를 전담했던 자랄타이는,
태자가 입조하기 위해 몽골로 출발하고 강화도의 성을 철거하는 것을 보고야 군대를 철수시켰는데,
철수하는 도중 갑자기 뒈졌다.
인생의 마무리가 고려 침입이었던 셈이다.
자랄타이가 죽고 두 달 후에 고종이 죽었고, 그 두 달 후엔 몽케도 죽었다.
이들이 저승에서 만났다면 할 말들이 많았을 것이다.

1260년, 원종이 즉위한 후,
이전의 무신 집권자들 처럼 대망의 벽상공신이 된 김 준은 각종 관직에 올라 명실상부한 권력자가
되었으나,
자파 세력이 김 준이 노비였던 시절부터 기세가 등등했던 무신들이었기에, 절대 권력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집단 지도체제의 얼굴마담 수준의 권력밖에 갖지 못했던 김 준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몽항전을 지속하였으며, 삼별초의 난보다 11년 앞서 제주도 천도를
기획하기도 하였는데,
그러나 이는, 어짜피 권력도 없겠다, 입조든 뭐든 한 목숨 보존하면 그만인 왕의 입장과는 배치되는
것이었으므로, 결국 갈등으로 이어졌다.
계급투쟁이나 평등사회 같은 사상이나 고상한 이념과는 인연을 맺을 수도, 맺을 의지도 없었던 김 준은,
역대 모든 무신 권력자들 처럼,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발버둥쳤고, 자연스럽게 부정부패로 연결되었는데,
이는 같은 욕망의 노예들이었던 쿠데타 동지들의 반발을 불렀고,
결국 원종의 이간책에 말려, 궁궐에서 양아들 임연의 몽둥이에 타살되었다.
1268년이었다.

김 준은 이의민에 이은 두번째 오리지날 천출출신 집권자였다.
최 항과 최 의도 어머니가 각각 창기와 여종이었으므로 종모법에 따라 천출임이 분명하지만,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았기에, 바닥부터 출발한 이의민이나 김 준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따라서 김 준의 성공은 어쨌든 인간 승리임에는 틀림없는데,
쿠데타의 명분이 왕정복고와 개경환도였기에, 일을 처결하는데 형식적이나마 왕의 동의가 필요하였고,
권력의 기반이 약해 이전 집권자들처럼 마음대로 숙청을 하지도 못하였으므로,
최가들처럼 무단 독재를 할 수도,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도 없었다.

풍채가 늠름하고 천성이 관후하였으며 아랫사람에게 공손하였고,
또 궁술과 무예에 능했고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해서 여러 사람들의 인심을 얻었다고 하는데,
불쌍하게도 노비출신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더불어 시대의 흐름을 읽는 눈을 갖지 못해 비명횡사하였다.
그래도 10년이나 집권하였으니 개천에서 용난 셈이었고, 나름 보람찬 인생이었을 것이다.





고려 : 최가의 마지막 최 의, 몽골의 8차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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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항도 지 애비를 닮아 본처에게서는 아들을 보지 못했고,
중질할 때 남의 집 여종과 사통하여 아들을 보았다.
얘가 최 의인데, 사내자식이 이쁘고 부끄러움이 많았다고 한다.
최 항은 지가 천출이라서 그랬는지,
최 의를 일찌감치 아들로 인정하고 글도 가르치고 예도 가르쳤다고 한다.
최 의는 김 준, 최양백 등의 지지로 대권을 승계하였는데, 지 애비가 죽던 날,
애비의 첩과 간통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그 애비에 그 아들이었다.

1255년 교정별감이 된 최 의는 자신을 험담하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 일단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고,
애비처럼 선정을 베풀며 치세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여 권력기반이 약하였고,
집권한지 한 달도 못되어 몽골의 8차 침입을 받게 되면서, 본색을 드러내어, 백성들을 약탈하였고
최양백 등 측근들만을 가까이 하였으며, 참소가 있으면 살육을 함부로 자행하였다.
못된 짓만 거듭하던 최 의는 결국, 실세였으나 소외되어 있던 김 준 등의 공격을 받았는데,
최 의는 너무 뚱뚱하여 담을 넘어 도망하지 못하고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끌려나와 죽었다고 한다. 1258년이었다.

최 의는 약 3년 정도 집권하였는데,
최 항보다 어리석었다는 평을 받고 있으나 집권자의 자질이 없기는 애비나 자식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다만 최 항은 최 우가 단단히 다져 놓은 기반 위에서 치세를 시작할 수 있었던 반면,
최 의는 최 항의 치세를 겪으며 기반이 약화되고 분열되기 시작하는 시기에 집권을 하였고,
크고 작은 실수를 범하여 그 분열을 가속화 시켰다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몽골에 대한 저항력을 거의 상실한 시대였다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고.
어쨌든 이로써 최가의 60년 무단정치는 4대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우봉 최씨들은 이때 거의 참살되어 역사에서 완전히 퇴출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몽골의 고려 전담관 자랄타이는 고려에서 최 항이 죽든,
그의 이쁘장한 아들이 집권하든 말든, 고려에서 세폐가 올라오지 않자 바로 쳐들어 왔다.
1257년 5월이었다.
현대의 불법 추심도 이보다 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려는 화들짝 놀라 몽케에게 출륙과 친조를 약속하였고.
매번 치는 사기에 몽케가 왜 동의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몽골군은 동년 음력 10월 일단 철수하여 북방에 주둔하며 고려가 약속을 지키는지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고려 : 최항의 시대, 몽골의 7차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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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5년 1월에 철수했던 놈들이 2월에 다시 내려와 개경에 진을 쳤고,
압록강 해안 지대에도 군대를 집결 시킨 후 8월부터 다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놈들은 낙동강 연안 일대까지 진출하였으며,
다음해에는 무등산에 진을 치고 전라도 남쪽까지 노략질 하였다.
군사적 대응을 포기하다시피한 고려는 사신을 보내 몽케를 설득하였고
몽골군이 서경으로 물러나면서 7차 여몽전쟁이 종료되었다. 1256년이었다.
7차에서는 해전도 있었는데,
정부군은 패배한 반면 지역의 해적들은 몽골 해군을 상대로 승리하는 웃지 못할 촌극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비참 지경에서도 고려의 집권자 최항은 강화도에서 풍악을 울리며 잔치를 벌였고,
반대파를 참수하였다.
고종은 공신호를 하사하고 벼슬을 높이고 식읍을 가봉하고…열심히 최 항의 지랄에 장단을 맞췄고.
덤 앤 더머가 따로 없었다.

애비가 하던 짓을 그대로 따라하며 나라를 착실히 말아먹던 최 항은 1257년,
8차 침입이 있기 직전 병이 들어 뒈졌다.
애비를 닮아 글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고려 : 최항의 시대, 몽골의 6차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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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케의 아버지 톨루이는 징기스칸의 막내 아들이었으므로
초원의 관습대로라면 몽골초원과 가장 많은 재산 및 인원을 상속받은 톨루이가 대칸이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몽골은 더 이상 목가적인 목동들의 나라가 아니었으므로 천하의 주인 자리를 원시적인 관습에 따라 결정할 수는 없었고,
징기스칸의 유지 또한 쿠릴타이에서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말 많고 탈 많은 쿠릴타이가 열리게 되었는데,
그 대단했던 대 두목 징기스칸도 결정하지 못한 일을 소두목들이 쉽게 결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일반적인 장자승계로 가자니 장자인 주치는 징기스칸의 친자가 아니라 오히려 원수의 자식이었으며,
그나마 일찍 죽어 승계권이 그의 아들 바투에게 있었고,
초원의 관습을 따라 막내를 임명하자니 욕심 많고 힘센 다른 형제들이 반대하였다.
그렇다고 친자식들 중 맏이인 둘째를 선택하는 것도 명분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렇게 복잡한 삼차방정식을 전직 초원의 강도들이 쉽게 풀리는 만무하였는데,
만일 분열되면 천하에 깔린 원수들이 몽골을 회쳐먹으려고 들게 뻔하였으므로,
어떻게든 풀긴 풀어야 했다.
결국 이 도적놈들은 치열한 이합집산을 거쳐 조정자의 개념으로 오고타이를 선택하였는데,
대위를 움켜쥔 오고타이는 조정자에 만족하지 않았고, 대대손손 자기 새끼들이 대칸이 되기를
원하였다. 
누구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오고타이와 그 뒤를 이은 귀유크는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펼치며 톨루이가를 박해하였고, 
장자 주치의 아들인 바투와 대립하였다.
이 와중에 오고타이 계열은 많은 원수를 만들었고.
따라서 귀유크가 죽었을 때 그 동안 집중적으로 탄압을 받은 톨루이 울루스가 가장 세력이 약했으나,
여러 가지로 심경이 복잡한 바투와, 그동안 양산되었던 불만세력들의 지원에 힘입어,
톨루이의 장자 몽케가 대칸이 되었다.

몽케는 신변의 안전과 자파의 강화를 위하여 대대적인 숙청을 하였고, 그 결과 그 동안 밉상이었던
오고타이계가 거의 몰락하였는데,
속은 시원했겠지만, 
징기스칸의 피를 이어 받은 황금씨족을 공개적으로 숙청하는 것은 금기였으므로 비판의 소지도 다분히 있었기에,
몽케는 이러한 비판을 잠재우고, 자신의 존재의미도 과시할 겸 동생 쿠빌라이에게 남송정벌을 하게
하였고, 그 밑 동생 홀라구에게는 중동 정벌을 지시하였다. 
제일 이뻐했다는 막내 동생 아릭 부케는 데리고 있었고.
그런데 홀라구는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주변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등 썩 일을 잘했으나, 쿠빌라이는
하는 짓이 영 미덥지 못했다.
딴마음을 품은 것 같기도 하고.
이래저래 마음이 불편했던 몽케는 결국 친정을 결심하였는데,
이참에 고려도 정리하고 싶었는지, 자랄타이를 고려 전담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이후 자랄타이의 행보를 보면,
몽케는 금쪽같은 전사들을 소모하며, 이미 털을 대로 털어먹은 고려를 점령해서 영토화하기 보다는,
완전항복을 받은 후 빨대를 꼽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을 한 듯하다.
오고타이 부자도 못한 일을 했다는 명분도 짭짤했을 것이고.

개뿔도 없이 사기로 연명하는 고려에 최항을 대동하고 왕이 입조하라는 명령을 내린 몽케는
친히 남송을 향해 진군하였는데, 하필 이때 고려는 매국노 이 현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이는 명백한 반몽골적 행위이었으므로 자랄타이는 1254년 늦여름,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6차 여몽전쟁이 시작었다.
이놈들은 김윤후의 충주성과, 처인성의 데자뷰, 홍지대사가 버틴 상주산성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쓸고 다니며 5개월 동안 엄청난 살육을 자행하였다.
포로만 20만이 넘었고 살상자는 셀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진행된 여몽전쟁 중 인명 손실이 가장 많은 전쟁이었다는데, 얼자 최 항은 그냥 강화도에 짱 박혀 있었다.

경상도 남부, 전라도까지 휩쓸던 이놈들은 1255년 1월 몽케의 명으로 철수하였는데,
예전처럼 거짓으로라도 항복을 받고 철수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종전이 아니라 휴식을 위한 휴전의 성격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