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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4일 오후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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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춘대길 건양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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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 사무실 입구 문에 붙인 ‘입춘대길 건양다경’ (사진=수완뉴스)

    [수완뉴스=온라인뉴스팀]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란 ‘봄의 시작을 알리고, 크게 길하며, 경사로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한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우리 전통대로 ‘봄의 시작’인 입춘(2월 4일)을 맞이하여, 각 집집마다 대문이나 들보, 기둥, 천장 등에 써붙이는 관습이 있다.

    입춘하면 떠오르는 입춘대길 건양다경이라는 말 외에도’부모는 천 년 동안 장수하시고 자식은 만대까지 번영하길 바란다’는 의미로서 ‘부모천년수 자손만대영(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 ‘산처럼 오래살고 바다만큼 재물이 쌓이길 바란다’는 의미의 ‘수여산 부여해(壽如山 富如海)’라는 글귀를 쓰기도 한다.

    우리 역사에서 입춘 날은 고려시대 때 관리들에게 1일 휴가를 주고 입춘 하례를 행하도록 했다. 동국세시기에는 조선시대 관상감에서 입춘 날 주사로 벽사문을 써 대궐 안으로 올리면 대궐에서 이를 문설주에 붙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천문연구원에 따르면 2020년의 입춘시는 오후 18시 3분이다.

    [사진] 한국 학생 바이애슬론 대회 지도자상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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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김동주 기자] 31일, 제11회 한국 학생 바이애슬론연맹 회장배 전국대회 폐회 및 시상식이 평창 알펜시아 바이애슬론 경기장 2층 컨벤션홀에서 열렸다. 사진은 대회 지도자상 수여식 및 기념사진 이다.

    김동주 기자

    [사진] 평창 학생 바이애슬론 대회 폐회 및 시상식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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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김동주 기자] 31일, 한국 학생 바이애슬론연맹이 주최하고 평창군, 강원도, (사)대한바이애슬론연맹이 후원하는 ‘제11회 한국 학생 바이애슬론연맹 회장배 전국대회’ 폐회식이 평창 알펜시아 바이애슬론 경기장 2층 컨벤션홀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서는 대회장 최종열, 부대회장 황보덕규, 김경순, 평창군 천장호 행정지원국장, 강원도 김진석 의원 등이 참석하였으며, 초등부, 여자중등부, 남자중등부, 여자고등부,남자고등부, 대학부 스프린트, 계주경기에 대한 시상식이 함께 열렸다.

    (c) 수완뉴스 김동주 기자 촬영
    평창군 천장호 행정지원국장 (c) 수완뉴스 김동주 기자 촬영
    평창군 지역구 소속 강원도 김진석 도의원 (c) 수완뉴스 김동주 기자 촬영
    대회장 최종열 회장이 상장을 수여 후 학생에게 악수를 하고 있다. (c) 수완뉴스 김동주 기자 촬영
    대회장 최종열 회장이 웃으며 대회 우승자에게 악수를 청하고 있다. (c) 수완뉴스 김동주 기자 촬영
    대회장 최종열 회장이 대회 우승자에게 우승 메달을 달아주고 있다. (c) 수완뉴스 김동주 기자 촬영
    (c) 수완뉴스 김동주 기자 촬영
    대회장 최종열 회장과 학생들이 상장과 메달을 걸고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c) 수완뉴스 김동주 기자 촬영
    (c) 수완뉴스 김동주 기자 촬영
    (c) 수완뉴스 김동주 기자 촬영
    경기체육연맹 회장이 학생에게 상장 전달 및 메달을 달아주고 있다. (c) 수완뉴스 김동주 기자 촬영
    경기체육연맹 회장이 웃으며 대회 우승자에게 악수를 청하고 있다. (c) 수완뉴스 김동주 기자 촬영
    (c) 수완뉴스 김동주 기자 촬영
    강원도 김진석 도의원이 상장 및 트로피 전달 및 학생과 악수를 하고 있다. (c) 수완뉴스 김동주 기자 촬영
    강원도 김진석 (평창군) 도의원이 학생들과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c) 수완뉴스 김동주 기자 촬영
    평창군 천장호 행정지원국장이 학생에게 상장 전달 및 메달을 걸어주고 있다. (c) 수완뉴스 김동주 기자 촬영

    김동주 기자

    신라 : 29대 태종무열왕, 중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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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폐왕 진지왕의 장손자였다.

    유교의 세례를 받기 전의 고대에서 폐왕이 되었다 함은,
    비상한 사태가 발생하여, 왕을 포함한 핵심 정권 담당자들이 물리적으로 제거되었음은 물론, 당시 지배세력 또한 완전히 몰락하였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패배한 자들은 분노에 치를 떨며 복수를 꿈꾸었을 것이고, 승자들은 지은 죄가 있기에 되치기의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므로,
    승자들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였을 것이고, 패자들은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승자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진평왕이, 잠재적 불온세력의 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진지왕의 장자 김용춘을 사위로 삼는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 짓을 하였다.
    사위상속이 전통이었던 예전의 신라라면, 이는 진평왕이 자신의 쿠데타를 반성하여,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에게 양위하기로 마음먹은 나름 고귀한 행위였을 것이나,
    자신의 가계에 대해 망상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던 진평왕이 그랬을 리는 없고,
    아마도,
    당시 신라는 눌지왕 이래 이미 부자상속이 정착되어, 부마는 더 이상 욍위 계승과는 인연이 없는 명예직에 불과하였으므로,
    최대 정적 김용춘에게 실권이 없는 명예를 주는 대신, 자기 딸내미 천명공주의 평생 밀착 감시를 받게 함으로써,
    어린 놈이 감히 복수를 꿈꾸며 자체 세력을 키워, 진평왕과 현 조정의 높으신 어르신들의 꿈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천명공주가 아버지의 안락한 수면을 위하여 이 한 몸 바치기로 결심….하였는 지까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적과의 동침을 강요 받는 정략 결혼이라고 하더라도, 서로 사랑하지 말란 법도 없으므로,
    천명공주가 자식이라도 낳게 되면 이 또한 김용춘에게는 혈연적 족쇄가 될 것이었다.
    따라서 김용춘은 때론 마음의 휴식이 되고, 때론 고난을 함께 헤쳐나가는 인생의 동반자와 결혼한 것이 아니라, 감시자이자 조련사를 배정받은 꼴이 되었는데,
    김용춘이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이 정략 결혼으로 인해 평생 괴로워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귀신 두목으로 살아야 했던 막내 동생 비형랑 보다는 나은 삶이었고,
    거기에 김춘추라는 걸출한 아들도 얻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장가를 잘 간 셈이 되었다.

    진지왕의 직계에는 폐족의 딱지를 붙이고, 자신의 직계에는 석가모니의 가계를 복사&붙이기를 하여,
    대망의 석가모니가 태어나기만 하면 불국토를 선언하고,
    세세만년 자기 핏줄만이 왕위를 차지할 수 있게 하려던 진평왕의 남사스러운 계획은,
    54년간 아들을 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딸만 줄줄이 얻은,
    진평왕의 얄궂은 운명으로 인하여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폐기될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진평왕의 석가모니 왕 만들기 계획이 어그러지면,
    황당하게도 고위급 밀착 감시자까지 붙여 놓았던 폐족의 수장 김용춘이,
    전왕의 장자이자 현왕의 사위라는 신분으로 졸지에 왕위계승 서열 1위가 되어 버리는 골 때리는 상황이발생하고,
    만약 서열대로 김용춘이 왕이 되면,
    복수심 여부와 관계 없이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라도 지 아버지를 복권시킬 것이 뻔하였다.
    그리되면 진지왕을 폐위했던 진평왕은 빼박 찬탈자로 전락하게 되고,
    진평왕을 옹립했던 현 집권세력 또한 줄줄이 역적으로 엮기게 되므로,
    ‘명분이고 국익이고 나발이고를 떠나, 보신이 최우선’ 인 동서고금의 대부분의 기득권자들처럼,
    당시의 집권세력은 김용춘에게 유형, 무형의 다양한 견제를 하였을 것인데,
    이러한 살얼음판 같은 정치 상황에서 김용춘이 괜히 왕위 계승의 헛 꿈을 꾸었다가는,
    어느 귀신이 잡아가는 지도 모르게 이 세상을 하직할 수 있었고,
    그의 장자 김춘추 또한 아버지가 잘 못되면 1+1으로 맛이 가는 처지가 되었으므로,
    이 시기 김 용춘, 춘추 부자는, 마누라들이 아들을 못 낳아 열을 잔뜩 받고 있었던 진평왕의 눈치를 보느라, 숨도 제대로 못 쉬었을 것이다.

    김춘추는 어머니가 성골의 창시자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였고, 아버지도 전왕의 장자였으므로,
    삼국사기에서 정의하는 성골 기준 즉 부모가 모두 왕족이어야 한다는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지만,
    진지왕 계열은 왕위계승불가 딱지가 붙어 있는 미운 오리 새끼들이었기에 왕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진골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억울하다면 억울할 수 있는 처지의 김춘추는,
    역시 망국 가야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평생 달고 살아야 하는 김유신을 만나 의기투합하였고,
    진평왕 말기에 칠숙의 난을 진압하고 여왕을 옹립하면서, 정계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활역에 힘 입어 선덕여왕의 의붓아들이 되었다.
    폐족이 실세가 된 것이다.
    그러나 여왕의 등극으로 표면화된 신라의 위기를 이용하여 끝장을 보려는 백제 의자왕의 대공세는
    신라를 더욱 옥죄었으므로,
    왕이 되기 전의 김춘추는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천둥에 개 뛰듯,
    고구려와 왜를 찾아 읍소와 구걸을 반복하였다.
    그러나 별 성과는 없었고, 고구려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인근 국가들의 냉대와 괄시로 인해, 체면은 고사하고 국내의 정치적 입지마저 위협받게 된 김춘추는,
    이미 춘추,전국시대부터 그 효용이 입증된 원교근공책에 따라,
    멀리 있는 당대 최강대국 당나라에서 살 길을 구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에 입조한 김춘추는 나라도 살리고 자신도 살기 위해,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당황제 이세민이게 매달렸다.
    신라를 여왕이 통치하는 한심한 족속들이라며 멸시하던 이세민이는,
    고구려 안시성주에게 한방 제대로 맞은 후에는 인식을 바꾸어,
    신라를 고구려에 대해 양면전선을 형성할 수있는 후방공략기지로 대우하였으며,
    고구려를 점령하면 평양 이남은 신라의 영역으로 인정하겠다는 밀약과 함께 동맹을 맺어주었다.

    이쁘고 말 잘 듣던 진덕여왕 사후, 무열왕은 김유신의 무력과 자신의 외교 치적을 바탕으로,
    화백회의의 추대를 받아 654년 왕위에 올랐는데,
    군사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왕권처럼 허망한 것도 없으므로,
    폐왕의 자손으로 자체 무력이 미미했던 무열왕은,
    즉위 이듬해에, 당대 최고의 군벌로 성장한 동맹 김유신의 동생, 문희의 소생인 법민을 태자로 삼았고,
    또, 문희 소생인 딸 지조를 김유신에게 시집 보내어 처남을 사위로 삼았다.
    김유신 입장에서는 외조카와 결혼한 것이므로,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해괴한 일이지만,
    중첩된 혼인관계로 세력의 결속을 다지는 것은 고대의 관행이었고, 그 중에서도 신라는 더 심했으므로 그러려니 하자.
    이 해에 고구려, 백제, 말갈 연합군에게 북쪽 변경의 성을 무려 33개나 빼앗겨 당에 SOS를 날렸고,
    당은 이에 화답하여,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비록 소정방의 원정은 실패하였으나 고구려의 압력을 해소하는 효과는 있었다.
    3년부터 아들을 비롯한 친족들을 요직에 등용하며 왕권을 강화하였고,
    7년 차에 최측근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면서 내부정리를 완결하였다.
    상대등은 신라 최고위 관직으로 대대로 귀족세력의 수장이 맡는 것이 관례였고, 주로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는데,
    이러한 막중한 자리에 가야 출신 가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김유신을 임명함으로써,
    잠재적 불만세력이었던 옛 가야 출신들의 체제 내 편입을 완료함과 동시에,
    신라의 신주류라고 할 수 있는 이들에게,
    왕권의 대척점에 서기 쉬운 기존의 여타 귀족세력들에 대한 통제와 관리를 맡김으로으로써,
    왕권도 강화하는 양수겹장의 묘수를 쓴 것이었다. 
    이러한 내부정리는 이후 국가의 명운을 건 전쟁을 수행하는데 꼭 필요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신라의 운영체제가 얼굴 마담을 내세운 간접경영에서 실세의 직접경영으로 바뀌든,
    내부 정리를 하든 말든, 대외 여건은 별로 달라지질 않아서,
    백제 의자왕은 끝장을 볼 기세로 더욱 가열차게 공격하였고,
    고구려도 당이 침공을 멈춘 틈을 이용하여, 배후의 안전을 위해 신라를 두들겼는데,
    설상가상으로 당대의 뛰어난 군사전략가이자 신라의 오랜 후원자였던 당태종 이세민이가 뒈져버렸다.이로써 오랫동안 공들인 신라의 구걸외교는 거덜나기 직전이 되었는데, 죽으라는 법은 없었는지,
    뒤를 이은 비리비리한 당고종이 지 애비 보다 더 뛰어난 필살기를 시전하며, 신라에 구원의 동아줄을 던졌다.
    사실 이세민이는 김춘추와 밀약을 맺을 정도로 신라를 대우하였지만,
    백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정작 신라의 위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사람 팔자 뿐만 아니라 나라 팔자도 알 수 없긴 마찬가지여서,
    세민이가 죽고 당고종이 즉위하자, 예상과 달리 분위가 급반전하여 백제에 대한 당의 직접 침공이 성사되었다.
    덕분에 신라는 지옥으로 떨어졌다가 지장보살을 만난 정도가 아니라, 승천하여 옥황상제를 만난 셈이 되었고.

    대망의 660년, 마침내 소정방의 13만 대군이 배에 올랐고, 김유신의 5만 군사 또한 백제로 향하여,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백제군을 격파하였고, 당나라 군대도 백제군의 저지를 뚫고 기벌포에 상륙하여 백제의 숨통을 끊었다. 
    이 후 소정방은 당으로 돌아갔고 신라도 전후 정리를 시작하였으나,
    백제는 망한 후 더 거세게 저항을 하였고, 고구려도 칠중성을 공격하였다.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열왕은 백제부흥군을 잡기 위해 태자와 함께 친정까지 해야 했는데,
    지 애비보다 더 음흉하고 매몰찼던 당고종은 점령한 백제 땅에 대한 신라의 권리를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마저 지들의 식민지 정책인 기미지배체제에 편입시키려고 하였다.
    그 동안 당의 지원을 얻기 이해 남발했던 외교적 수사들이 독이 되어 돌아온 셈이었다.

    당은 제 멋대로, 신라도 개고생을 했던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백제 왕자 부여융을 도독으로 임명하는 등 갑질을 하였으므로,
    겉 모양만 보면, 마치 백제가 부활한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이래서야 종노릇을 하며 백제를 멸망시킨 보람이 없기에,
    김유신을 비롯한 신라의 조야는 당과 일전불사를 외치며 펄펄 뛰었으나, 
    무열왕은 그저 침묵하였다고 하는데,
    이를 외세에 의존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게 없었던 자연인 김춘추의 한심하고도 소심한 망설임으로 폄훼할 수도 있겠으나, 그 보다는,
    백제부흥군의 여전한 저항, 상존하는 고구려의 위협, 그리고 왜의 동향 등을 고려하면,
    그래도 비빌 언덕은 당밖에 없었고,
    설령 다른 요인들이 신라에 우호적이었다 해도,
    당대의 패권국 당과 싸우는 것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의 상황이 아닌 한 미친 짓에 가까웠으므로,
    당시의 침묵은,
    당대의 뛰어난 정치가다운 냉철한 판단에 의한 인내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무열왕은 당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이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나,
    속에서 열불이 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인데,
    그래서인지 백제부흥군의 기세가 더욱 심해지고, 고구려까지 북한산성으로 쳐들어 오는 등,
    되는 일이 하나도 없던 8년, 6월에 평생의 운을 다하고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였다.
    비록 폐족의 종손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인생역전에 성공하여,
    무열왕계 왕통의 시조가 되는 광영을 누리기는 하였으나,
    서거 당시에는 나라가, 늑대를 쫓으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인 형국이었으므로
    저승가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담소를 잘했고 대식가였다고 한다.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신라 중대 왕실의 시조로서, 백제를 멸망시키는 위업을 이루었다.
    저자세 굴욕외교로 외세를 끌어들여 통일을 이루는 바람에,
    한민족의 무대가 반도로 국한되었고, 결국 사대하는 민족이 되었다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당시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라고 부를 정도로 동류의식이 없었고,
    백제 또한 성왕의 목이 잘린 이후부터는 신라를 철전지 원수로 대하였으므로,
    삼국은 서로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적대적인 외국에 불과할 뿐이었다.
    한민족이란 개념 자체가 아예 없던 이러한 상황에서,
    무열왕에게 ‘같은 민족의 등에 외세의 칼을 꼽는다’는 죄의식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열왕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어떠하건,
    당시 신라인에게 태종무열왕은 누대의 원수였던 백제를 멸망시킨 영웅이었으며,
    백제의 침략에 대한 걱정 없이 생업에 몰두 할 수 있게 해준 은혜로운 임금이었다.
    그는 원효대사의 장인 즉 설총의 외할아버지도 된다.

    여담이지만,
    신라 왕들 중 묘호가 알려져 있는 왕은 태조 성한왕, 태종 무열왕, 열조 원성왕 이렇게 셋인데,
    무열왕의 묘호가 하필 생전에 굽실거릴 수밖에 없었던 당태종 이세민이와 같아,
    중국 놈들이 신문왕에게 시비를 걸고 철회를 요구했지만,
    신문왕은 전성기 신라의 왕답게 완곡하게 거절하였다고 한다.

    신라 : 28대 진덕 여왕, 마지막 고귀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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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대 진덕여왕

    이름은 승만, 국반 갈문왕의 딸로서 선덕여왕과는 사촌지간이다.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총명하였다고 한다.

    비담의 난이 진행되는 와중에 사망한 선덕여왕의 유언에 따라,
    화백회의도 거치지 않고 647년에 즉위하였는데,
    즉위 후 불과 9일 만에 김유신이 비담의 난을 진압해준 덕분에 왕좌를 지킬 수 있었다. 
    알천을 상대등으로 삼아 대리 청정하게 하였으며,
    신라의 정정 불안을 틈탄 백제의 공격을 막았고, 이어 신궁에 제사지내었다.
    이듬해에도 이어진 백제의 공격을 막아 내긴 하였으나, 이러다 죽겠다 싶었는지,
    김춘추를 당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살려달라고 매달렸다.
    김춘추는 내시 노릇을 자청하며 구걸외교의 진수를 보여주었고,
    당태종 이세민이는 고구려에 한 번 혼쭐이 난 후라 그랬는지,
    선덕여왕 때와는 다르게 신라를 후대하였고 동맹도 맺어주었다.
    이에 고무된 김춘추는 귀국 후 한화정책을 주도하여,
    군제, 제도, 관료의 복식 등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는데,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김춘추, 김유신 일파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나,
    고구려, 백제는 이에 별 관심이 없었는지, 오히려 공격을 더 심하게 하였고,
    3년차에는 백제에게 7개 성을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졌다.
    즉위한지 단 3년 만에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믿을 건 당 밖에 없었으므로,
    치당태평송을 지어 바치고 당의 연호를 사용하는 등 더욱 당에 매달렸다.
    5년에는 품주를 집사부로 바꾸어 기밀 사무를 취급하게 하는 등 중앙집권을 강화하였으며,
    대당 종속, 굴욕 외교를 지속하였다.
    8년간 재위하였다.

    국반의 딸이므로 성골이라고 우겨 볼 수는 있으나,
    진평왕의 자식이 아니므로 오리지날 성골은 아니고,
    여왕의 무능은 선덕여왕 때에 신물나게 겪었으므로 여인의 능력을 기대해서도 아니고,
    화백회의를 거치지 않았으니 정통성에도 핸디캡이 있었고,
    도대체 왕이 될 만한 조건이라고는 하나도 갖추지 못한 여인이었다.
    왕으로서의 자격도 명분도 없었으므로,
    임명권자나 다름없는 김춘추, 김유신 일파의 바지사장 또는 얼굴마담 역할에 충실하였을 것이다.

    재위 기간의 업적이라고는 대당 외교가 거의 전부인데, 그 외교라는 것이 너무나 굴욕적이었다.
    직접 지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직접 비단에 수를 놓아 이세민이에게 바쳤다는 태평송을 읽어보면 마치 당 황제의 현지처 내지 승은을 입은 시녀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인데,
    이는 신라가 왕의 여성성까지 이용해야 할 정도로 절박했었다는 의미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야심가 김춘추 입장에서는 참으로 편리한 방패막이였고, 쓸 만한 도구였을 것이다.
    이쁘고, 말 잘 듣고, 거기에 살 날 얼마 안 남은 마지막 고귀한 여인,
    김춘추 생애 최고의 파트너가 아니었을까?

    신라 : 27 대 선덕여왕, 초유의 여인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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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대 선덕여왕

    이름은 덕만, 진평왕의 장녀 또는 차녀로서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며,
    김유신, 김춘추 등 신라 최고의 영웅들을 휘하에 두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여걸…로 알려져 있다.

    이 여인은 632년 진평왕이 아들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추대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신라가 아무리 후진 사회였다 해도 그래도 명색이 국가인데,
    성골이라는 사이비 종교 이론이 먹힐 정도로 만만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동서고금을 통틀어 언제나 보수적인게 귀족들인데,
    이 보수 꼴통들이 여왕의 탄생을 박수치며 반겼을 리도 만무하므로,
    나름대로 추정을 해보면, 
    진평왕 말년에 있었던 칠숙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진평왕의 헛소리에 반대하던 귀족들이 일망타진 되었고,
    겨우 목숨을 부지했던 귀족들도,
    반란을 진압하여 기세등등했던 김 용춘, 춘추 부자와 김유신 같은 공주 측근들의 서슬에 눌려,
    별 수 없이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한다.
    이유가 뭐든,
    과도기적 혼란을 상징하듯,
    여왕은 즉위 후 바로 친정하지 못하고 을제, 김용춘 등에게 대리 청정하게 하였는데,
    김용춘은 진지왕의 맏아들이므로 여왕의 오촌 당숙이 되고, 천명공주의 남편이므로 제부 또는 형부도 되는데,
    나중엔 여왕의 3남편들 중 하나라는 신분도 가지게 된다.
    성골이든 지랄이든 개판인 족보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즉위 이듬해에 신궁에 스스로 제사 지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친정을 한 듯한데,
    자체 무력을 갖지 못한 여왕이었으므로, 일반적인 왕처럼 정사를 보았다기보다는,
    비상체제를 평시체제로 바꾸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신라의 사정이야 어떻든 백제는 또 다시 침입을 하였고, 
    여왕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을 것이나, 어찌어찌 막아낸 듯하다.
    다음 해에 연호를 건평으로 바꾸었고,
    분황사를 완공시켰으며 이후에도 수시로 절을 짓는 등 불교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5년째엔 옥문곡에 숨어있는 백제 게릴라를 신기를 발휘해 찾아내었다는데,
    뭐로 찾아냈건 그전에 먼저,
    국경 경비를 비롯한 방어시스템이 허술하여 서라벌 근처까지 적의 대규모 게릴라가 침투한 것이므로,
    이는 김유신을 비롯한 당시 군부 실력자들의 실책이 분명하였다.
    따라서 여왕의 신기는 이들의 실책을 가리기 위해 지어낸 프로파간다로서 일종의 물타기였을 것이다.
    7년에는 고구려의 칠중성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으나,
    11년에는 백제 의자왕의 대공세로 성을 40여개나 빼앗겼고,
    요충지 대야성을 잃었으며,
    당항성까지 백제와 고구려의 연합공격을 받게 되어 나라가 거의 망할 지경이 되었다.
    이에 김춘추를 예전의 상국 고구려에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고구려는 도움은 고사하고 김춘추를 억류시켜버렸다.
    이에 신라는 김유신을 보내 일전 불사를 외치며 무력시위를 하였고,
    당나라를 막기에도 벅찼던 고구려는 김춘추를 풀어주었다.
    고구려에 실망한 신라는 다시 당에 매달렸는데,
    12년에 당태종 이세민이가 고구려를 공격하자,
    없는 살림에 3만이나 되는 군사를 동원하여 응원하였으나 고구려는 멀쩡하였고,
    그 사이 백제에게 성을 7개나 빼앗겼다.
    이렇게 헛 짓만 하며 국력을 고갈시키는 정부를 보는 귀족들의 시선이 고울 리만은 없었으므로, 
    이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귀족세력의 대표 비담을 상대등으로 삼아 국정에 참여시켰다.
    13년에는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다시 측근 세력에게 힘을 실어 주었는데,
    김유신은 신라 최고의 영웅이자, 선덕여왕의 수호천사 답게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백제를 공격하여 7성을 도로 빼앗았다.
    14년에는 당에서 돌아온 자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나라가 망할 지경인데도 국력을 기울여 황룡사 구층 목탑을 지었다.
    이러한 정신 나간 짓과 무능에 열 받은 비담과 염종이 16년에 반란을 일으켰고,
    그 와중에 왕이 죽었다.

    뭇 영웅들의 헌신적인 보좌를 받으며 나라를 다스린 초유의 여인 군주.
    현대의 페미니스트들을 열광시킬 수 있는 아이템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녀의 능력은 실망스러웠다.
    신라 역사상 최고 영웅들의 보좌를 받으면서도 나라를 멸망 직전으로 몰고 갔고,
    여인으로서의 한계와 더불어 현실 감각도 떨어져, 주변 강대국들의 멸시를 받았다.
    현실에서 좌절을 겪을 때마다 불교로 도피하였고,
    남편 셋뿐만 아니라 많은 애인들까지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보지 못해,
    그 알량한 성골도 이어가지 못하였다.
    약간의 신기를 초인적인 예지능력으로 미화하는 경향도 있으나,
    평범한 무당도 그 정도는 한다.


    청소년의 진로는 청소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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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크포틴엔터테인먼트 공식 홈페이지(사진=사이트 캡쳐화면)

    [수완뉴스=김동주 기자] 청소년 창업가, 청소년 강연자, 청소년 유튜버 등이 모인 MCN(다중채널네트워크)인 ‘마이크를 잡는 청소년들’이라는 타이틀을 내걸은 <마이크포틴엔터테인먼트 MiC4TEEN Ent. 이하 MCN>가 설립되어 많은 청소년들 사이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MCN을 설립한 공희준 대표는 고등학생 신분으로서 ‘맞춤형 곤충 사료 생산 기업’인 ‘(주)칠명바이오’를 창업하여 직접 운영도 하고 있는 완주고등학교 재학생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마이크포틴엔터테인먼트는 청소년 창업가, 강연자, 유튜버 등이 소속된 회사로서, 다양한 사회 이슈에 관심과 강점을 가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맞춤형 심화교육, 매니지먼트 업무를 맡고 있다.

    마이크포틴엔터의 대표를 맡고 있는 공희준 학생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주)칠명바이오를 창업 하고 현재까지 경영하면서 미성년자 대표로서 초기 창업에 관한 정보력 부족 등으로 겪었던 불이익, 사회적 부정적 시선으로 겪었던 고충 등으로 회상하며 ‘나 홀로 외롭고 힘들게 걸어왔던 가시밭길을 친구들은 함께 즐겁게 걸을 수 있는 꽃길로 만들 것’라는 생각으로 청소년의 진로 활동을 도울 회사를 창업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미 마이크를 잡고 있는 청소년들이 많고,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청소년들이 다수 배출되고 있다. 많은 청소년들이 본인의 강점 분야를 공유할 수 있는 역량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낼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를 도와보고자 설립하게 됐다. 더 이상 기성세대에서만 배움을 찾는 시대는 끝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편, 마이크포틴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이들은 (주)칠명바이오 공희준 대표, 한국역사진흥원 강사빈 원장, 청소년 개발자 김준섭 씨가 소속되어 있다.

    마이크포틴엔터테인먼트의 관계자이거나 잘 아시는 분은 아래 연락처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033-333-0391(전화 받지 못할 경우 070-7896-9463), E. [email protected]

    김동주 기자

    2020. 3. 1.자, ‘유,특,초,중등교사 총 1,744명’ 인사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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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김동주 기자] 강원도교육청(교육감 민병희)은 1월 30일, 3월 1일자 교사 인사 발령을 단행했다.

    이번 인사 규모는 초등 596명, 중등 862명, 보건교사 53명, 특수교사 90명, 유치원교사 73명, 영양교사 43명, 전문상담교사 18명, 사서교사 9명 등 총 1,744명이다.

    교사 인사발령은 순환 전보 원칙과 본인 희망에 따른 전보, 퇴직 등으로 생긴 결원을 보충하기 위한 것으로, 교육중심․학생중심의 ‘모두를 위한 교육’ 실현과 단위학교의 안정적 교육과정 운영 지원에 주안점을 두어 실시했다.

    도교육청은 인사 관련 규정에 따른 공정한 인사행정 구현을 위해 1월 14일 희망지를 고려한 전보순위명부를 사전 공개했다.

    특히 올해 인사에서는 공교육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중·고교 교사가 자녀와 동일 학교에 근무할 수 없도록 하는 ‘상피제’를 처음 적용하였다.

    도교육청 강삼영 교원정책과장은 “전보순위 명부를 공개하여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전보인사가 이뤄지도록 노력하였으며, 중・고등학교 상피제 적용으로 공교육의 신뢰도를 보다 높이고자 했다.”며 “학교 현장에서는 2월을 온전히 새 학년 준비기간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했다.

    김동주 기자

    2020청소년책의 해 막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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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김동주 기자] 2020 청소년 책의 해 네트워크(실행위원장 안찬수)는 30일, 광화문 에무시네마(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양우, 이하 문체부)와 ‘2020청소년책의해’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이날 행사는 시작 공연, 상징, 표어 및 포스터 공개, 주요 사업계획 발표, 질의응답 순으로 진행되었다.

    청소년기의 긍정적인 독서 경험을 확산하기 위한 ‘2020청소년책의해추진

    ‘2020청소년책의해’는 청소년들이 갈수록 책과 멀어진다는 위기감에서 출발하였다. 한국인의 ‘생애 독서 그래프’에 따르면, 독서 관심도가 가장 급격하게 떨어지는 시기가 청소년기다. 현재 20대인 경우 청소년기를 거치며 51.8%→38.6%로 독서 관심도가 하락하였고, 30대는 47.3%→38.1%로 독서 관심도가 하락하였다. 이는 청소년기의 부정적인 독서 경험이 청소년들로 하여금 책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함께 읽는 2018 책의 해 독자 개발 연구 보고서 : 읽는 사람, 읽지 않는 사람>, 2018 책의해조직위원회)

    이에 ‘2020청소년책의해’ 사업은 청소년 친화적인 독서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청소년들의 독서환경을 개선하는 데에 초점을 맞춰 청소년기 독서문화의 변화를 꾀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 청소년 독서율 제고 ▲ 즐겁고 신나는 청소년 독서 분위기 조성 ▲ 학교 밖 청소년 독서환경 개선 ▲ 청소년 독서문화 연구 등을 목표로 다양한 사업들을 추진할 계획이다.

    ‘2020청소년책의해’는 실행위원회 체제로 효율적인 사업 진행을 꾀한다. 이번 실행위는 현장에서 활동하는 독서, 출판, 도서관, 서점 등 청소년 독서 관련 기관·단체들이 참여했다. 실행위는 2019년 3월부터 여러 번의 회의를 거쳐 7대 사업을 확정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도서관협회, 한국서점조합연합회, 어린이청소년책작가연대, 책으로따뜻한세상만드는교사들, 여주사람들, 책과사회연구소, 책과교육연구소, 청소년문화연대 킥킥, 책읽는사회문화재단 등이 이번 실행위에 참여하였으며, 특히 청소년들과 함께 활동하는 교사, 작가, 사서들이 포함되어 좀 더 현장감 있는 사업 추진을 꾀한다.

    ㅊㅊㅊ? ㅊㅊㅊ!

    이번 기자간담회에서는 ‘2020청소년책의해’ 상징(엠블럼)과 표어(슬로건), 포스터도 함께 공개됐다. 상징이자 표어인 ‘ㅊㅊㅊ’는 각각의 ‘ㅊ’마다 책의 다양성, 성장성, 연결성을 함축하고 있다. 또한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해석의 여지를 남겨 청소년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다.

    포스터는 정보전달 위주가 아닌 아트 포스터로 제작하였다. 3종의 포스터는 각각 ‘ㅊ’의 의미를 담고 있다. 포스터는 도서관, 서점, 학교에 우선적으로 배포되며, 수령을 희망하는 기관이나 단체는 bookteen.net에서 신청할 수 있다. 한편, 상징·표어·포스터 디자인은 다양한 굿즈로 활용될 예정이다.

    또한 ‘2020청소년책의해’의 가치와 원칙도 공개되었다. 모든 사업은 공익성, 자발성, 다양성, 지속성에 의거해 진행된다. 우리 사회 모든 청소년의 즐거운 독서문화 확산을 목표로 하여, 성인과 청소년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다양한 생각과 표현을 존중하며, 지속적으로 추진하기로 하였다.

    국내 최초의 청소년 책 추천 플랫폼 ‘청소년 책 추천 홈페이지 bookteen.net’이 열린다. 이 홈페이지에서는 온라인 환경에 익숙한 청소년들을 위해 9명의 전문 필진이 연간 200여 건의 북큐레이션을 제공할 예정이다. 이외에도 청소년 큐레이터들의 투고를 받으며, 청소년들이 스스로 책을 읽고 추천하도록 지원한다.

    홈페이지에는 책 추천뿐만 아니라 사람, 공간, 이벤트에 대한 정보도 실릴 예정이다. ‘사람’ 섹션에는 청소년 작가나 인플루언서 등의 인터뷰, ‘공간’ 섹션에는 ‘청소년이 추천하는 책 읽기 좋은 곳’ 등의 공간 정보, ‘이벤트’ 섹션에는 ‘청소년 독서계획 공모전’ 등 연중 진행될 다양한 이벤트 정보가 제공된다. 특히 ‘이벤트’ 섹션에는 ‘2020청소년책의해’의 사업별 결과가 다양한 형태로 공유될 예정이며, 사업 공모 신청을 받는 등 전체 사업을 포괄하는 포털 역할을 할 계획이다. 또한 홈페이지의 정보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의 SNS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홈페이지는 지속적으로 관리·운영하여 청소년 책, 청소년 독자를 위한 정보를 제공할 예정이다.

    또한 청소년들이 직접 선정하는 ‘청소년문학상’을 추진한다. 청소년들이 청소년 문학 작품을 직접 읽고 후보도서를 선정하여 심사, 시상까지 한다. 청소년들이 함께 문학 작품을 읽고, 주변 사람들과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청소년 심사위원은 전국 중·고교 및 청소년관련 단체, 시설 등을 대상으로 하며 총 30여 개의 참여팀을 모집한다. 3월 초까지 bookteen.net에서 참여 신청 접수를 받는다.

    청소년들이 책으로 노는 문화를 경험하고, 직접 만들어가도록 지원하는 청소년 북 페스티벌이 전국 각지에서 펼쳐진다. 최대 10개 지역의 청소년 독서동아리 등이 참여한다.

    북톡북튭은 청소년 모임, 단체가 만드는 독서 관련 동영상 제작을 지원할 계획이다. 제작된 동영상은 청소년에게 친숙한 영상기반 SNS ‘틱톡’과 ‘유튜브’를 통해 공유된다. 기존 북트레일러 위주의 홍보 영상에서 벗어나 청소년 개개인의 특기나 취향과 함께 하는 책 읽기를 통해 즐거운 독서 경험을 선사한다. 또한 ‘틱톡’과 협업하여 ‘북톡 챌린지’를 진행할 예정이다. 청소년들이 책을 주제로 춤을 추거나 특정한 몸짓을 선보이는 15초 이내의 영상을 공모하여 수상자들에게 다양한 상품을 제공한다. 책에 대한 청소년들의 편견을 깨고 독서에 대한 문턱을 낮춰 좀 더 많은 청소년들이 책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할 예정이다.

    2020청소년책의해 공익 캠페인은 청소년 독서문화진흥의 필요성과 의미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을 촉구한다. 방송국, 언론사 등을 통해 청소년 독서문화 친화적인 사회 분위기를 조성할 예정이다.

    학교 밖 청소년들의 독서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시범사업으로 책읽는소년원 등을 추진한다. 경기도 안양여자소년원(정심중고등학교) 등을 대상으로 독서문화공간 조성, ‘함께 읽기 프로그램’ 운영을 통해 책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 소년원생들에게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 나아가, 소년원 내 책 읽는 문화 확산으로 소년원생들의 정서 안정과 성공적인 사회복귀를 돕는다. 이 시범사업은 학교 밖 청소년을 위한 독서문화공간과 ‘함께 읽기 프로그램’이 지속적으로 운영되는 모델을 제시할 예정이다.

    청소년 책의 해를 기념하는 조사연구 사업으로 청소년 독서문화 조사 연구 및 청소년 책 포럼을 추진한다. <미래를 만드는 읽기 – 책 읽는 청소년 사례 연구>와 연간 4회에 걸친 <청소년 책 포럼>을 연다. 먼저 <미래를 만드는 읽기 – 책 읽는 청소년 사례 연구>에서는 대학 입시 준비를 이유로 기피 대상이 된 책 읽기가 사실은 미래를 준비하는 청소년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는 것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밝힐 계획이다. <청소년 책 포럼>은 청소년 독서의 중요성에 역행하는 교육제도와 사회의 문제점을 진단하는 ‘청소년에게 책 권하는 사회는 가능한가’(3월), 청소년의 시각으로 우리의 읽기 환경에 대해 토론하는 ‘청소년의 목소리 – 내가 읽는다’(5월), 청소년 선진국들의 생생한 독서 진흥 사례 발표로 한국 현실을 성찰하는 국제 포럼 ‘청소년, 책으로 세상을 만나다’(9월), 청소년 책 읽기 환경 조성을 위한 우리 사회의 과제와 대안을 제시하는 ‘읽을 권리, 성장의 조건’(12월)을 차례로 개최한다.

    ‘2020청소년책의해’ 사업 추진과 관련된 세부적인 사항과 공모사업 일정 등은 청소년 책 추천 홈페이지 bookteen.net에서 순차적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2020청소년책의해네트워크’ 사무국은 올해 ‘2020청소년책의해’에 동참 및 후원을 원하는 기관·단체·기업·개인의 참여를 받는다.

    김동주 기자

    신라 : 26대 진평왕, 성골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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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은 ‘백정’, 현대의 어감으로는 좀 거시기 하지만, 석가모니 아버지의 이름이라 한다.
    왕후의 이름은 ‘마야’, 부처의 모친 이름이고.
    동생들의 이름은 ‘백반’ ‘국반’, 실비 식당 음식 메뉴 같지만, 모두 부처의 숙부들 되시겠다.
    이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진흥왕은 전륜성왕이고, 아버지는 전륜성왕의 세번째 화신 ‘동륜’이니,
    그야말로 로열 훼밀리에 정통, 적통을 망라한 셈이었다.
    따라서 이제 아들만 낳으면, 대망의 석가모니가 신라에 출현한 꼴이 되어 불국토를 구현할 수 있었는데,
    이 경상도 촌놈들의 부처 놀이에 부처님도 짜증이 났는지, 아들은 안 주고 줄줄이 딸만 주었다.
    이름하여 천명, 덕만, 그리고 실재를 의심받는 전설의 공주 선화.

    아들이 없어 부처는 못 만들었어도 기왕에 만든 스펙이 아까웠는지,
    진평왕은 자신의 직계만으로 성골을 만들고,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기염을 토하였는데,
    그러나 뒤를 이은 선덕여왕이 수 많은 남편들을 거느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여,
    아쉽게도 성골이 단절되고 말았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진지왕 ‘철륜’의 손자이기에,
    전륜성왕의 자손이기는 해도, 석가모니의 직계인 진평왕과는 촌수도 멀고,
    무엇보다 폐왕의 직계라서, 성골이 못되고 진골이 되는 모양이다.

    진평왕은, 석연찮은 이유로 폐위 당하고 죽은 진지왕의 뒤를 이어 579년 왕위에 올랐으나,
    이후 5년 동안은 진지왕의 모후인 사도태후 박씨의 섭정을 받아야 했는데,
    액면만 보면 사도태후가 아들을 쫓아내고 권력을 잡은 모양새이므로,
    화랑세기에서, 정신 나간 아줌마처럼 미실에게 이용만 당하는 사도태후가,
    사실은 권력을 얻기 위해 자신을 숨기고 미실을 이용한 무섭도록 냉정한 정치가로서,
    마치 권력에 눈이 멀어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냉혹한 여인으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이 살벌한 섭정의 눈치를 보아야 했을, 10대 중반 쯤으로 추정되는 진평왕은,
    재위 2년 째에 스스로 신궁에 제사 지내었고, 이찬 후직을 병부령으로 삼아 군사권을 장악하였으며,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 마다 각종 관서를 설치하는 등 중앙관제를 개혁하였다.
    어린아이치고는 썩 매끄러운 일처리인데,
    이는 진평왕이 정치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신동이라, 권력의 화신인 섭정을 상대로 온갖 정치적 난관을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아마도 진평왕을 옹립한 혁명세력들의 의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태후는 혁명의 주체가 아니라 그저 방패막이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진실이 무엇이고,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당사자들이나 알 것이나,
    아무튼 진평왕은 6년에 연호를 건복으로 바꾸며 명실상부한 친정을 시작하였고,
    15년에 명활성과 서형산성을 고쳐 쌓아 방비를 강화했으며, 지방 제도를 개혁하여 외침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24년 백제가 아막성으로 처들어 온 것을 시작으로 고구려, 백제의 공격에 끊임없이 시달렸고, 성도 자주 빼앗기는 바람에, 영토가 진흥왕 이전으로 축소되다시피 하였다.
    그래도 한강유역 만큼은 목숨을 걸고 지켰고, 중국의 황조들에 매달려 생존을 도모하였다.
    31년 모지악 아래의 땅이 9달이나 불탔다는데, 소규모 유전이었을 것이다.
    재위 50년째에는 빈번한 외침과 자연재해로 고초가 극심하여, 곤궁한 백성들이 자식을 내다파는 참상까지 있었고.
    51년에는 모처럼 고구려를 공격하여 낭비성을 함락시켰는데, 이 전투에서 김유신의 활약이 두드러졌다고 한다.
    53년에는 칠숙과 석품의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였으며,
    이듬해에 사망하여 54년의 길고 긴 재위를 마쳤다.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몸이 장대하였으며, 의지가 깊고 식견이 명철하였다고 하는데,
    어찌나 거구였고 힘이 장사였는지 한 걸음에 계단 두 개를 한꺼번에 부숴버렸다고도 하고,
    황룡사 9층 목탑, 황룡사 장육존상과 더불어 신라의 삼보로 칭해지는,
    하늘이 준 옥대를 차고 다녔다는 전설도 있는 것으로 보아, 나름 위엄과 권위가 있는 왕이었을 것이다.

    한반도 구석에 짱 박힌 소국의 왕 주제에 부처의 아비네, 성골이네 하는 꼴이 같잖아 보이기도 하고,
    이 부처놀음이 중국을 비롯한 주변의 강국들에게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지 괜히 민망해지기도 하지만,
    당시 신라 왕실의 상황이, 이복 여동생을 후궁으로 들이고, 고모와 조카가 결혼하며, 심지어는 할아버지의 첩이었던 여인과도 동침하는 등, 상하 원근 파악이 불가능할 정도로 족보가 난장판이었기에,
    이에 넌더리가 난 진평왕이 특단의 조치를 고심한 끝에 이런 짓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진평왕은, 대부분 왕족이고 친척이니 웬만한 신분으로는 권위를 세우고 질서를 잡기는 커녕, 공연히 반발만 부르기 십상이라고 생각하여,
    기왕 뻥튀기기를 하는 김에 통 크게, 부처의 가계를 ‘복사’하여 자신의 직계에 ‘붙이기’를 해버린 듯한데,
    비록 이 꼴이 무슨 사이비 종교집단 같아 우습기도 하고 나중에 부작용이 만만찮은 꼴통제도가 되긴 하지만,
    샤머니즘의 전통이 강하고 국가의 응집력이 가장 약했던 당시 신라의 사정상,
    이렇게 왕즉불 사상을 이용하여, 자신의 직계를 다른 귀족들이 감히 넘보지 못하도록 신성하게 만드는 방법 말고는,
    말도 안되는 혼인을 통한 여러 겹의 신분으로 왕위를 계승하는, 신라의 원시적인 관행을 근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처를 낳아 불국토를 이루겠다는 황당한 망상으로 골품제도를 만들었고,
    진흥왕의 영토 확장 과정에서 원수가 된 고구려, 백제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바람에,
    수, 당에게 저자세 굴욕 외교가 무엇인 지를 제대로 보여준 꼴불견의 이미지이지만,
    문란한 왕실 여인들의 준동을 다스리며 중앙관제와 지방제도를 개혁하였고,
    원광법사로 상징되는 불교세력을 적절히 이용하여 화랑도를 국가 인재 발굴 시스템으로 정착시킨 업적도 있었다.
    장수왕의 78년에는 한참 부족하지만,
    그래도 우리 역사상 손 꼽히는 54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에 비해 업적이 빈약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오랜기간 왕의 교체에 따른 혼란이 없었기에 개혁한 제도가 확고해 질 수 있었고,
    외침에 시달려야 했던 변경 주민들을 제외한,
    당대의 신민들의 삶 또한 상당 부분 예측 가능하게 되어 안심하고 생업에 몰두할 수 있었으므로,
    이것을 진평왕의 진정한 업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름 명군이었다.

    신라 : 25대 진지왕, 저승에서 찾아온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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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사륜
    사는 순 우리말 쇠의 음차이므로 사륜은 철륜과 같은 의미이고,
    철륜은 전륜성왕의 네 종류 금륜, 은륜, 동륜, 철륜의 마지막에 해당한다.
    진흥왕이 자신을 전륜성왕과 동일시하여 자식들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인데,
    진지왕이 철륜이고, 개에 물려죽은 태자의 이름이 동륜이므로, 진흥왕에게는 금, 은에 해당하는 두 아들이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있었다고 해봐야 어려서 죽었을 것이다.
    전륜성왕이 요절하고, 찌질하게 죽고… 하는 것을 보면 무슨 블랙 코메디 같기도 하지만,
    사실 전륜성왕을 자처한 고대 왕들은 많다.
    일본의 아쇼카왕이나, 목잘린 백제의 성왕… 등등,
    전륜성왕이 실제로 존재했다면 열받아서 벼락을 때리거나, 아니면 기가 막혀서 은퇴했을 것이다.

    진지왕은 형 동륜이 태자의 신분이면서도, 서모와 사통하다 개에 물려 죽었고,
    조카 백정이 왕이 되기에는 너무 어렸기에, 다음 서열의 왕위 계승권자로서,
    나라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전성기의 신라를 물려받았다고 하므로,
    액면만 보면, 마치 정치적 야심이 충만하여 어린 조카의 자리를 찬탈한 수양대군의 대선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허탈하게도 즉위하자마자 상대등 거칠부에게 국정을 맡겼고, 이듬해에 잠시 친정하였으나,
    얼마 못가 다시 거칠부에게 대리청정을 맡겼고, 거칠부가 죽자 노리부에게 대리청정하게 하였다.
    ‘이럴 거면 뭐하러 왕이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신하들에게 의지하였는데,
    업적 또한 보잘 것 없어서,
    즉위년과 2년의 백제 침입은 어찌 어찌 막아내었으나,
    3년에는 패하여 알야산성을 내주었고,
    4년엔 백제가 성을 쌓아 길을 막는데도 방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사가 어지럽고, 황음하다’ 하는 고색창연한 이유로 폐위 처분되었는데,
    그걸로도 마무리가 안 되었는지, 석연찮은 이유로 폐위 1달 후 사망하였다.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 세기에 따르면, 모후인 사도 태후와 미실 궁주가 진지왕의 폐위를 주도하였다고 하는데,
    화랑세기에만 나오는 이 미실이라는 여인은 사다함의 연인이었고, 진흥왕의 아비 다른 동생 세종의 공식 아내였으며, 진흥왕의 첩으로서 권력을 휘둘렀고, 자기 친동생을 포함하여 수많은 애인을 둔 암사마귀 같은 여인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정절과는 담을 쌓고 몸을 무기 삼아 살아온 여인이 후안무치하게도 진지왕을 황음하다 하여 쫓아냈다는 이야긴데…..
    사실이라면 어이가 상실이의 두 뺨을 사정없이 때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환타지 소설같은 화랑 세기를 배제하고 보면,
    진지왕은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인 조카 백정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기에,
    조정의 중신들을 방패막이로 내세워야 할만큼 정치적 입지가 취약하였는데,
    이 불안한 정국에, 문란하고 기세등등한 왕실의 여인들과 그녀들의 정부들까지 가세하여 치세 초기의 혼란을 부채질하였던 듯하다.
    그래도 조정에는 진흥왕기에 신라의 전성기를 열었던 신료들이 다수 남아 있었기에, 진지왕은 그들의 명망에 의지하여 근근히 버티었던 것 같은데,
    그 대표격인 거칠부가 사망하자, 버팀목을 상실한 진지왕은 결국 반대파들의 연합 공격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폐위된 듯하다.
    이러한 추론이 맞든 안 맞든,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으로 이어진 왕권 강화가 진지왕 대에 이르러 빛이 바랬고, 더불어 신라의 짧은 전성기도 끝이 났다.

    *도화녀 설화

    진지왕은 폐위되기 직전,
    도화녀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마음을 빼앗겼고 동침을 요구하였는데,
    이 아름다운 여인이 말하기를,
    ‘웬만하면 왕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으나, 이미 남편이 있는 유부녀인 고로 불가합니다.’ 하니,
    왕은 ‘거참 안타깝다’ 하며 쿨하게 돌아섰다고 한다.
    그런데 왕이 폐위되고 죽은 후, 공교롭게도 도화녀의 남편도 세상을 떠나자,
    황당하게도 죽은 왕이 도화녀에게 나타나 ‘이제 남편이 없으니 동침하자’고 졸라댔다고 한다.
    도화녀는 이 어이없는 일에 정신이 없었는지,
    아니면 생사의 경계를 넘는 그 집념과 정성에 감복하였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뜻대로 하라’고 허락하였고,
    왕은 여러 날을 머물며 생전의 한을 풀었다 한다.
    이 기막힌 정사의 후유증으로 귀신을 부리는 비형랑이 태어났다고 하는데…

    비형랑, 다음에 보자.

    신라 : 24대 진흥왕, 신라의 수퍼 에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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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대 진흥왕

    신라의 대표적인 정복군주로서,
    지증왕의 손자이자 법흥왕의 조카 겸 외손자라는 복잡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 갈문왕 입종이 조카와 결혼하여 법흥왕의 동생이자 사위가 되는 바람에 이런 이상한 신분이 되었으나, 족내혼이 만연했던 고대 신라에서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었고,
    오히려 이러한 여러 겹의 신분이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540년, 요즘이라면 중2병으로 몸살을 앓을 나이인 15세에 법흥왕의 뒤를 이어 옥좌에 앉았다.
    7세라는 설도 있는데, 뭐가 되었건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아직 어린 나이이므로 태후가 섭정을 하였는데,
    처음 1년은 법흥왕의 왕후인 보도 태후가, 그 다음은 무려 10년 동안 친모인 지소태후가 섭정을 하여, 26세가 되어서야 친정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지소태후의 권력욕이 대단하였거나, 아니면 애가 사춘기를 심하게 앓아 영 마음이 놓이질 않았거나, 또는 둘 다였을 것이다.

    재위 6년에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9년, 고구려 양원왕이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자,
    나제동맹에 따라 정예병을 파견하여 고구려 군대를 박살내었다.
    친정을 시작한 11년에는 동맹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상류의 10개 군을 얻었다.
    이때 백제는 하류의 6개 군을 얻었는데,
    내친 김에 평양까지 진격하자는 어찌 보면 타당한 백제의 제의를 거절하고,
    고구려와 타협하여 점령한 지역을 영토로 인정받았다.
    이는 동맹을 배신하는 행위였으므로, 백제의 항의는 당연한 것이었는데…
    뭐에 열 받았는지 이번에는 동맹을 향해 칼을 뽑았다.
    나제동맹이 깨지면 매우 곤란해 지는 백제는 별 수 없이 없던 일로하였으나, 기가 찼을 것이다.
    이렇게 친정 첫 해를 마무리 한 후, 이듬해에는 고구려를 단독 공격하여 10개군을 취하였다.
    이번에는 고구려가 어이없었을 것이다.
    얘가 아무래도 사춘기를 순조롭게 보낸 애는 아니었나 보다.

    전쟁에 자신감이 붙었는지 14년에는 백제가 확보한 한강 하류 지역을 마저 빼앗아 버렸다.
    이로써 신라는 기존 생산기지인 낙동강 유역과 더불어 생산력이 높은 한강 유역을 전부 확보하게 되었고, 덤으로 중국 직통 노선까지 개설하여,
    경상도 깡촌의 멋도 모르던 촌놈이, 고구려, 백제에 못지 않는 국제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업그레드 되었다.

    이해에 성왕이 보낸 백제의 왕녀를 후궁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성왕이 무슨 생각으로 이미 적이 된 신라에 결혼 동맹을 제안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별 성과는 없었는지, 다음해에 관산성에서 크게 한판 붙게 되었다.
    이럴려고 위장 결혼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백제로서는 회심의 일격을 가한 것이었겠으나,
    황당하게도 성왕이 신라 병사들에게 사로잡혀 목이 잘려버리는 바람에 참패하였고,
    결국 백제는 신라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고 말았다.

    진흥왕은 성왕의 머리를 왕궁 계단 밑에 묻어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는데,
    배신은 지가 먼저 해놓고 왜 그리 성왕을 미워했는지가 의문이고,
    믿거나 말거나인 일본서기의 기록이기에 진위 조차 의심스러우나,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
    이후 신라는 북진하여 영토를 함경도 남부까지 크게 확장하였고,
    16년에는 점령한 영토를 직접 순시하며 각지에 순수비를 세웠다.
    촌놈이 출세한 꼴이니 자못 흐믓하였을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진흥왕 순수비는 북한산, 창녕, 황초령, 마운령 등 4개이다.

    18년에 국원을 소경으로 삼았는데, 후일의 중원경으로 현재의 충주이다.
    23년에는 백제의 침입을 호되게 혼내주었고,
    미실의 연인 사다함을 보내 대가야를 복속시키며 가야들을 한반도에서 지웠다.
    가야의 유민 우륵 등을 받아들여 문화 창달에도 힘을 기울였고.
    27년에 찌질이 동륜을 왕태자로 삼았고 황룡사를 준공하였다.
    33년, 태자 동륜이 아버지의 후궁들과 사통하다 개에 물려죽었는데, 문제의 여인 미실이 이 사건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었다고 한다.
    35년에는 왕후 사도가 대리청정을 하였고, 다음해에는 궁주 미실이 잠시 대리청정 하였다는데,
    이는 자식도 죽고, 몸도 않좋고 해서 잠시 쉰 것일 수도 있고, 드센 여인들의 치맛바람에 정신이 혼미해진 것일 수도 있겠다.
    37년에는 여자들에게 휘둘리기를 좋아하는 기질 때문…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여자를 두목으로 하는 원화제도를 실시하였는데, 남모와 준정이 질투에, 치정에, 음모에…온갖 난리를 치는 바람에 폐지하고,
    새로운 인재 발굴 시스템인 화랑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아들 사륜에게 대리 청정하게 한 후 얼마 안 있어 서거하였다. 향년 51세.
    연호는 개국, 태창, 홍제 등이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가장 늦게 불교가 전파된 신라에서 불교 사랑이 가장 심하였는데,
    이 양반도 불교에 심취하여 자신을 전륜성왕과 동일시하였고, 두 아들의 이름도 불교식으로 지었다.
    그런데 백제 성왕도 전륜성왕을 자처했다고 하므로, 결국 신라 전륜성왕이 백제 전륜성왕의 목을 잘라 버린 꼴이었다.
    진짜 전륜성왕이 봤다면….기가 막혀 전륜성왕질을 때려치웠을 것이다.
    황룡사 등 많은 절을 지었고, 말년에는 법흥왕처럼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고 한다.
    불교를 이리 사랑하면서도 색계에는 신경을 쓰질 않아 미실을 비롯한 수많은 후궁들을 거느렸는데,이 후궁들 또한 색계에는 별 관심이 없어, 가뜩이나 복잡한 왕실 족보를 미로로 만들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백제의 근초고왕에 상응하는 신라의 대표 주자이긴 하나,
    당시 고구려는 돌궐의 공격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고, 백제는 뒤통수를 맞은 것이었으므로,
    위 두 양반에 비해 압도감이 좀 부족하고, 얍삽하다는 느낌까지 들기도 하지만,
    어려서는 어머니의 치맛바람에 고생을 했고, 말년에는 마누라들의 등쌀에 기를 펴지 못하는,
    미로와 같은 가정사 속에서도, 용하게 정신을 잃지 않고 능력을 발휘하여,
    한강유역을 확보하고, 가야 지역을 완전히 병합하였으며, 화랑 제도를 실시하는 등,
    후대를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긴 것을 보면,
    정복군주의 자질면에서는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인물이었다고 할 것이다.
    명군이었다.

    *미실
    위서의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만 나오는데,
    당대의 실력자들을 모두 치마폭에 가두고 권력을 휘둘렀다는 정체가 모호한 여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