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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5일 오전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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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 13대 미추 이사금, 3번째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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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미추, 첨해 이사금이 급사한 후 대신들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김알지의 6세손으로 아버지는 구도 갈문왕, 어머니는 지마왕의 손녀 박씨이다.
    아버지 구도는 딸을 골정 태자에게 시집보냈고, 골정의 아들 조분이 왕위에 오르는데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 대한 보답이었는지 조분왕은 자신의 외삼촌인 미추를 둘째 사위로 삼았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참 정신없는 개족보이지만, 당시에는 나름 합리적인 관행이었을 것이다.

    탈해왕이 박씨의 사위자격으로 왕위에 오른 것처럼, 미추왕은 석씨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를 이은 모양새인데, 뭐가 어찌 되었건 드디어 김씨 왕이 탄생하였다.

    261년 왕위에 올랐는데, 선왕의 사위도 아니고 석씨도 아니었기에 반발이 심했는지 즉위하자마자 용이 연못에서 나타나고 금성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뭔가 소요 사태가 있었나본데, 그래도 조기에 수습하고 열심히 국정을 살피고 민생을 보듬었다

    즉위 이듬해에 국조묘에 제사 지내었고, 아버지 구도를 갈문왕으로 봉하여 정통성을 세웠다.
    민생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궁실을 증축하지 못하게 하였고, 농사에 방해가 되는 짓들을 금했으며,
    억울한 놈들은 풀어주고, 배고픈 자들은 먹이고, 남당에서 형벌의 잘, 잘못을 의논하게 하는 등 자애로운 정치를 하였다.

    이 양반 치세에는  유난히 백제의 침입이 많았는데, 민생을 생각해서 그랬는지 공격은 하지 않고 방어만 하였다 .
    제위 5년, 백제의 봉산성 공격은 성주 직선이 물리쳤고
    11년의 침입도 기록은 없으나 막았을 것이다 .
    17년 괴곡성 침입은 정원이 막았고
    22년의 침략은 양질이 막았다.
    재위 23 년에 졸하였는데 비록 데릴사위 격의 왕이었으나, 민생의 어려움을 보살핀 성군이었다.

    김씨의 초대 왕답게 전설이 좀 있는데,
    다음 대 유례왕 시절, 청도 근처의 이서고국과 싸우는데 신라가 고전하자, 
    투구에 댓잎을 단 병사들이 갑자기 나타나 적을 무찔렀는데,
    승리한 후 보니, 그 병사들은 온데간데없고, 미추왕릉 주변에 수만 개의 대나무 잎들이 쌓여 있더라 …는 수호신 전설이 있고.
    역시 수호신이 된 김유신이 미추왕릉을 찾아와서 자기와 자기 자손에 대한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는 전설도 있다.

    미추왕의 다음 대는 다시 석씨로 이어져, 아직 김씨들 만의 세상은 아니었지만,
    그의 자애로운 정치는 후대에 김씨가 왕위를 독점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딸들은 내물왕과 실성왕의 아내가 되었다는데,
    이 두 사람과 미추왕의 나이 차이는 백살이 넘는다.
    이게 가능할 리 없으므로, 미추왕은 가공의 인물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갖는다.

    신라 : 12대 첨해 이사금, 의문의 중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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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 첨해, 조분왕의 동생이다.

    의문 1. 전통처럼 되어버린 사위 상속도 아니고 부자 상속도 아닌 형제 상속인데,
    당시 기준으로 계승 서열 1위이자 최고위직에 올라 병권까지 쥐고 있던 석우로는 왜 얌전히 있었을까?

    의문 2. 247년 왕위에 올라, 아버지 골정을 세신 갈문왕에 봉하였다고 하는데, 첨해왕은 왜 형도 안한 일을 해야만 했을까?
    당시 신라는 사위 상속이 전통처럼 되어 있었으므로, 남해왕의 사위인 조분왕은 아버지의 권위가 필요 없었으나,
    첨해왕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올랐기에 새로운 권위가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재위 2년째에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하는 등 정상적인 임금 노릇을 하였으나,
    3년째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또 벌어졌다.

    의문 3. 왜국에서 사신이 왔는데 석우로가 이들을 모욕하였고, 이에 노한 왜왕이 군사를 보내 서라벌 한복판에서 석우로를 불태워 죽이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신라 최고의 귀족이 본거지에서 적군의 손에 처참하게 살해되었는데도 첨해왕은 방치하였고,
    석우로의 아내는 한술 더 떠서 적군을 대접하였다고 하는데, 이 기막힌 일들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재위 9년에는 백제에게 두들겨 맞았고. 
    제위 15년에 대구에 성을 쌓았는데, 겨울에 급사하였다.

    석연찮은 즉위와 석우로의 죽음과 관련된, 쿠데타의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한다.
    다음 왕위는 계승 서열 2위였던 조분왕의 둘째 사위 김미추가 잇게 되어 처음으로 김씨왕이 탄생하였다.

    신라 : 11대 조분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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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 조분, 벌휴왕의 태자였던 골정의 아들이다.
    선왕 내해왕이 골정의 사위였던 것처럼 조분왕은 내해왕의 사위이므로, 마치 사위로 왕위를 잇는 전통이 만들어진 것 같지만,
    족내혼에 의한 사위이므로 석씨 왕통이 흔들릴 일이 없고, 석씨가 권력을 독점하는데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라 왕실은 삼국 중 족내혼의 전통이 특히 강한데, 이게 나중에 골품제도로 이어져 말기에는 문제가 되지만, 왕권이 약하던 고대에서는 정권을 안정시키는 순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족내혼의 수혜자 조분왕은 230년 내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에 이전 태자이자 처남이면서 5촌 조카 그리고 사위인 이찬 우로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벌하였다.
    3년에는 왜구가 금성까지 쳐들어와서 왕이 친히 물리쳤고.
    4년에도 왜병의 침입을 받았는데 우로가 막았으며.
    7년에 골벌국을 병합하여 경상북도 내륙 일대로 진출하였다.
    11년엔 백제가 침입하였고.
    16년에 고구려와 처음 전투가 발생하여 우로가 나가 싸웠으나 패하였다.

    18년 간 재위하며 왜구를 쫒아 내고, 영토를 넓히고 고구려, 백제와 싸우는 등 나름 다사다난한 생애를 보내었고,
    그 동안 이전 태자이자 사위인 우로의 활약이 돋보이는데, 다음 왕위는 동생이 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신라 : 10대 내해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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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 내해, 이 양반은 족보가 상당히 복잡한데,
    가장 특이한 것은 어머니가 아달라 이사금의 왕비, 내례 부인이라는 것이다.
    박씨 왕의 아내인 내례 부인이 어떻게 석씨 왕의 모후가 되었을까?

    벌휴왕의 두 아들들은 일찍 죽었으나 각각 아들을 남겼는데, 내해왕은 둘째 아들 이매의 자식이었으므로 적통이 아니었으나,
    큰 아버지의 아들 즉 사촌동생 조분이 나이가 어려,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이는 이매가 어린 나이에 할머니뻘의 여자와 연애를 하여 애를 낳게 하고는,
    바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신라 왕실의 성문화라 하겠다.

    또한 내해왕은 족내혼으로 조분의 누이 즉 사촌 누이와 결혼하였으므로 태자의 사위가 되고,
    어머니가 지마왕의 딸이므로 왕의 외손이며, 벌휴왕의 손자로서 왕의 손자도 된다.
    이러한 여러 겹의 신분이, 나이 어린 조분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명분이 되었을 것이다.
    내해왕은 나중에 딸을 조분과 결혼시켜서 족내혼을 이어 가는데,
    이렇게 되면 조분은 원래 적통이면서, 왕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가 되어 권위와 명분이 더욱 높아진다.
    아무튼 매우 복잡한 개족보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러한 복잡한 가정사를 발판으로 196년 왕위에 오른 후,
    재위 4년째에는 백제의 침입을 막았는데,
    특이하게도 재위 5년, 6년에 연속하여 일식이 일어났다.
    이 시기 가야국과 화친하였다는데, 뭔가 심상치 않은 사건들이 있었나 보다.
    8년에는 말갈이 변경을 침범하였고,
    13년에는 변경을 침범해 온 왜인들을 막았다.
    이듬해에는 포상의 여덟 나라가 가라를 침입하자 이를 구원하였고.
    17년에는 가야 왕자를 볼모로 받았다.
    19년에는 백제가 침입하였으나 대대적으로 역공하여 사현성을 함락시켰고
    23년에 또 쳐들어 왔으나 왕이 직접 나가 막았다.
    27년 29년에도 백제와 치고받았다.
    그 외 자연 재해 기록과 백성들을 구휼한 기록, 여우가 울고 뱀이 우는 뭔가 이상한 기록들이 있다.

    35년 간 재위하며, 가야는 확실히 눌렀고 백제와 대등한 싸움을 하였던,
    나름 상당한 능력을 지닌 영활한 군주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 9대 벌휴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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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 벌휴, 발음하기도 힘든데,
    이두식 표기이므로 당시 발음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석씨의 재등장으로, 탈해 이사금의 손자라 하는데,
    나이가 100살 이상 차이가 나니 친손자로 보기에는 무리이고,
    아달라 이사금이 아들이 없어 뒤를 이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박 벽방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이 분의 둘째 아들과 선대 왕의 왕비인 내례 부인이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망칙한 기록도 있고,
    이래저래 즉위 과정이 석연치 않다.

    184년 왕위에 올라, 이듬해에 소문국을 정벌하였고,
    제위 4년과  5년엔 백제와 싸워 이겼으나, 다음 해엔 졌으며,
    9년째엔 왜인 1천여 명이 기아를 피해 신라로 들어왔다고 한다.
    12년 간 재위했는데 업적이 이 정도밖에 없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일식의 기록이 3번이다.
    왕권의 불안정했음을 시사한다 하겠다.

    이 양반은 점을 잘치고 사람의 선악을 잘 판단하여 성인으로 불렸다는 것으로 보아,
    본업이 신관이었던 것 같은데,
    신관이 왕이 되었다는 것은 남해 차차웅처럼 위기관리를 위해 투입된 것일 수도 있으나,
    신라가 아직 후진적인 사회였다는 것 또한 시사한다고 하겠다.

    탈해왕 이후 석씨가 신관 계급을 맡아왔던 것으로 보이는데,
    기록이 없으므로 나름대로 추정을 해보면, 
    아달라왕 시기에 뭔가 박씨계에 엄청난 손실이 있었고,
    그 틈을 이용하여 석씨가 김씨와 손을 잡고,  내례 부인으로 상징되는 일부 박씨들을 끌어들여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닐까?
    벌휴왕의 어머니가 김씨라 하니 전혀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닐 것이다.

    신라 : 8대 아달라 이사금, 연오랑과 세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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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아달라… 성과 이름을 확실히 분리해서 발음해야 하는 임금으로,
    왕비는 지마왕의 딸이라 하므로 이름뿐만 아니라 족보도 이상하지만, 고대에 흔한 족내혼이려니 하자.
    아무튼 처가의 후원을 받아 왕위에 오른 듯하다. 

    서기 154년에 왕위에 올라,
    재위 3년째에 지금의 문경 새재인 계립령, 그리고 5년에 죽령까지 길을 열어 경상북도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신라가 삼국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는 시기였을 것이다.

    재위 12년에 아찬 길선이 모반을 모의하다가 백제로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했고, 백제가 그의 망명을 수용하자 백제를 친정하였으나 실패하였다.
    2년 뒤에는 백제의 역습을 받아 두 성을 잃고 크게 패배하였는데,
    이에 열받아 기병 8000을 포함한  28000여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당시 신라의 국력으로 이게 가능한 숫자일지는 모르겠으나,
    백제가 포로를 돌려주고 강화를 청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신라가 총력 다한 상당한 숫자였던 것은 분명하다.
    애한테 뺨 맞은 꼴이 된 백제는 3년 뒤 변경을 공격해 노략질하며 화풀이를 하였다.
    일본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경북 전역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국력을 신장시키는 등 나름 대단한 능력을 보여준 군주였다.
    총 재위기간은 31년인데 21년 이후에는 기록이 없다 .

    족내혼을 하였고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대부터는 왕위가 석씨로 이어지고,
    왕비인 내례 부인은 석씨인 내해 이사금의 모후가 된다고도 하니, 뭐가 뭔지 알 수는 없으나,
    이후 박씨는 신라 왕가에서 사라지고, 하대 신덕왕 때에나 잠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뭔가 심상찮은 일이 있었던 듯하다.
    연오랑 세오녀의 전설도 이 시기의 일이라고 하는데,
    기록이 없는 말년의 1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연오랑 세오녀

    연오랑과 세오녀는 부부로서,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닷가에 나가 해초를 따는데,
    작업 중이던 바위(물고기라고도 한다)가 움직이더니 왜로 가버렸고,
    왜인들은 이 기이한 탈것을 타고 온 연오랑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남편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남편의 신발이 남아 있는 바위를 발견하자 남편처럼 바위에 올라 탔는데,
    이 바위는 마치 궤도 차량처럼 다시 왜로 움직여, 세오녀를 남편에게 데려다 주었더란다.
    남편과 상봉한 세오녀는 귀비로 책봉되어, 부부가 함께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는데,
    반면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사라져 버리는 황당한 일이 발생하였고,
    이에 점을 쳐 보니, 해와 달의 정기가  왜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일어났다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아달라왕이 이 해괴한 점괘를 믿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왜로 사람을 보내 두 사람을 데려오게 했는데,
    이미 자리를 잡은 부부는 거부하였고, 대신 세오녀가 짠 비단을 사신에게 주었다 한다.
    사신은 별 수 없이 그 비단만 가지고 돌아 왔는데,
    부부가 권한 대로, 이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 해와 달이 예전처럼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이때 제사를 지낸 곳이 지금의 영일만이라고.

    태양이 하필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열 받기는 하나,
    연오랑 세오녀 설화는 현전하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태양신 신화로서,
    해와 달에 버금갈 만큼 중요한 손실이 아달라왕 치세에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신화를 그냥 멋대로 해석을 해 보면, 해와 달은 밝음을 의미하는 박씨의 상징으로서,
    박씨 세력 중 일부가 왕의 동의 없이 이탈하여 일본으로 건너가서 정착하였는데,
    그로 인해 아달라왕은 왕권을 유지하는데 심각한 문제가 생겼고, 복귀를 애걸했음에도 거부되었다.
    결국 박씨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석씨로 왕성이 교체되었다… 가 아닐까?
    아니면 말고.



    신라 : 7대 일성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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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 이사금의 맏아들이거나 일지 갈문왕의 아들 또는 아도 갈문왕의 아들이라고 한다. 

    유리왕의 장남이라면 동생이 왕위에 오른 지 54년 만에 왕위에 올라 21년을 재위했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발생하고,
    아도 갈문왕은 유리왕의 아들로서 일성 이사금이 갈문왕으로 추대하였으므로 가장 그럴 듯하나 확실하지는 않고,
    왕비가 김씨에서 박씨로 바뀐 것이나 족보가 불확실한 것으로 보아, 정권 상층부에 뭔가 변화가 있었던 듯하다.
    역사적 진실이야 항상 모호하기 마련이므로 그냥 그러려니 하자.

    서기 134년에 즉위하였고
    즉위 4년과 6년에 말갈이 침입이 있었으며, 이듬해에 장령에 목책을 세워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 후 말갈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고.
    재위 13년에는 경산 지역의 압독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재위 15년에 박 아도를 갈문왕으로 삼았다 .
    이외에는 자연 재해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휼하였고, 사치를 금하는 등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였다.
    21년 간 재위하였다.

    석연찮은 즉위 때문에 왕권이 약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정사당이라는 회의체 기구를 설치하여 국가를 운영하였다.

    업적은 별로 없으나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 흔적은 보인다.

    신라 : 6대 지마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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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마왕, 무슨 게임캐릭터 이름 같지만, 이 양반도 이두식 표기 때문에 이름이 이 모양일 것이다.
    아무튼 박씨이고 왕비는 또 김씨인데,
    이로 보아 김알지의 세력이 성공적으로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즉위 4년부터 이듬해까지 가야와 제대로 붙었는데, 영 일이 잘 안 풀렸고,
    이후 가야 공략은 포기했다고 한다.
    즉위 10년엔 왜의 침입을 받아 피해가 상당했는데, 이듬해엔 보복한게 아니라 그냥 강화하였다
    즉위 14년에 말갈의 침입을 받아 백제의 기루왕에게 원군을 청했고,
    백제가 다섯 장수를 보내 격퇴해 주었다.

    인접한 가야와 툭탁거렸고 왜에게는 주로 당했으며,
    우리 역사에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말갈이 등장하였다.
    백제의 지원으로 말갈을 물리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백제를 상국으로 대하던 관계가 아니었을까?

    재위 23년 만에 아들 없이 죽어 큰아버지 일성이 뒤를 이었다는데,
    이게 말이 되나?

    신라 : 5대 파사 이사금, 나름의 정복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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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파사
    이름이 뭔가 이국적인이지만, 이두식 표기이므로 원 발음은 아닐 것이고,
    박씨도 양주동 박사의 해석에 따르면 밝다의 의미를 지니므로,
    ‘밝은 푸른 수염’이나 ‘늑대와 춤을’처럼 인디언식 이름이 아니었을까?
    뭐가 되었건 도로 박씨가 임금님이 된 것으로 보아,
    탈해 이사금이 아들이 없었거나, 석씨들의 입지가 아직 확실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원래는 형인 일성이 즉위할 예정이었는데, 뭔 공작을 했는지 형을 제끼고 왕위를 차지하였다.
    왕비가 김씨인 것으로 보아 김알지 세력의 지원을 받았을 것이다.

    즉위 이듬해에 시조묘에 제사 지냈고, 민생을 살피고 농잠을 장려하였으며,  
    군비를 확충하고 체제를 정비하였다 .
    안동 지방의 고타군주가 푸른 소를 바치는 등 알아서 기었고.
    재위 6년엔 백제의 변경 침입을 막았으며,
    재위 15년과 17년에는 가야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고,
    18년엔 보복까지 기획하였다.
    22년에 월성으로 거처를 옮긴 후.
    이듬해 경주 인근의 음즙벌국, 삼척지역의 실직곡국, 압독국 등의 항복을 받았고
    25년에 실직곡국의 반란을 토벌하고 그 무리를 남쪽으로 옮겼다 .
    26년엔 백제와 화친했고, 가야를 공격했으며
    29년,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병합했다.
    재위 33년 만인 112년 10월에 서거하였다 .
    마치 고구려의 대무신왕을 보는 듯하다.

    주변의 소국들을 마구 쓸어버렸고 삼척과 대구 지방까지 영토를 넓혔으며,
    본격적이지는 않았겠으나 어쨌든 강국 백제의 공격도 막아 내었고, 가야와는 제대로 치고받았다.
    나름 업적이 많은 정복 군주였다 .

    신라 : 4대 탈해 이사금, 또 하나의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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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씨 왕조의 시작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양반은 왜의 동북쪽 1천 리에 위치한 다파나국 출신이라고 한다.
    다파나국의 현재 위치는 일본 오키 제도, 인도 타밀 등 여러 설이 분분한데,
    캄차카 반도 어디쯤이 아니었을까?

    한 왕조의 시조답게 신화가 많다.
    석탈해의 생모되시는 다파나국의 왕비가 임신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는데,
    이 이야기는 7년간 불륜을 이어오다가 덜컥 임신하여 애를 낳았다는 것이고,
    바람피운 여자의 본 남편인 그 동네 왕이, 사람이 알을 낳는 일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알을 버릴 것을 명했다…..는 것은,
    외척의 세력이 막강하여 마누라는 처벌 못하니, 애라도 내다 버려라…란 뜻일 것이다.
    왕비는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싸맨 뒤 궤 속에 넣어 바다로 떠나 보내야 했고,
    이 궤짝은 바다를 표류하다가 금관가야의 바닷가에 닿았으나, 가야인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건지지 않았는데,
    진한 아진포  어구에 이르러 비로소 웬 할머니의 구함을 받았다고 한다.
    이 할머니가 궤짝을 건져 낼 때 까치가 많아, 까치 작(鵲)자에서 새조를 떼어낸 옛 석(昔)자를 성씨로 삼았고,
    궤짝을 풀어 헤쳤다 하여 탈해로 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할머니가 유식하기도 하다.
    탈해는 노파를 어머니로 모시고 살며 고기잡이로 봉양하다가, 노모의 말을 좇아 학문에 정진하고 지리를 익혔다….는데, 학문이야 그렇다지만 웬 지리?

    다른 설에는 꿰짝을 열자 보물, 노비와 함께 웬 애가 튀어나와  용성국 출신이라는 것을 밝히고,
    토함산의 돌무덤으로 들어가 7일간 머물렀다고 한다.

    이 설이든 저 설이든, 아무튼 이 궤짝에서 나온 놈이 양산의 호공 집을 탐내었고,
    집 주변에 숯과 숫돌을 묻어 놓고 자기 집이라고 우기는 사기를 쳐서 빼앗았다는데,
    표주박을 타고 동해를 건너고, 마한에 사신으로 가서는 왕에게 개길 정도의 만만찮은 인물인 호공이,
    이 정도 사기에 살던 집을 빼앗기고 순순히 물러났다는 게 뜨악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치고,
    이게 훗날 월성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궤짝에서 나와 유식한 할머니의 손에 키워진게 아니라, 성인인 상태로 금관가야에 먼저 도착했었는데, 
    김수로왕과 왕국을 놓고 술법대결을 펼치다 지는 바람에 신라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한다.
    동물의 왕국 스타일의 쫒고 쫒기는, 술래잡기 비슷한 술법 대결 이야기만 빼면,
    이 설이 가장 그럴 듯하다.

    어쨌든 20대 초반인 서기 8년에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고,
    2년 뒤 서기 10년에 대보로 등용되어 정사를 맡았으며,
    이빨 자국 내기에 져 유리왕에게 왕위를 양보한 후에도 권력의 중심에 있었고,
    유리왕의 치세 후반기에 대리청정을 맡았다.

    서기 57년 유리 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이사금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76세… 말을 말자.
    즉위 이듬해에 사기의 희생자 호공을 대보로 삼았다…는데, 미안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고 뭔가 속사정이 있었을 듯하다 .
    즉위 3년 차인 59년, 왜와 수교하였으며,
    61년엔 마한의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바치고 항복했고, 그 이후엔 백제와 계속 치고 받았다….는 데,
    경주 땅을 벗어나지도 못한 소국 주제에 그 먼데 있는 강국 백제와? 뻥일 것이다.

    65년, 시림에서 김알지를 얻어 사위로 삼았고, 시림을 계림으로 개칭한 것으로도 모자라 계림을 아예 국호로 삼았다.
    모든 김씨들의 조상 김알지의 등장인데, 사위로 삼고 국호를 바꾸었다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세력의 중심인물이을 것이다.

    73년에는 왜구의 침입이 있었고,
    77년에는 가야 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79년에는 울산 울주구, 부산 동래구에 해당하는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을 병합하였다.
    재위 24년 만인 80년 사망하여 성 북쪽의 양정구에 장사 지냈다.
    100세까지 살았다는 이야기인데… 그냥 그러려니 하자.

    석씨들은 탈해 이사금을 두목으로 하는, 해양으로 들어온 외래 세력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왜구, 가야 등 침입자들과 싸우는 한편 왜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김알지 등 다른 외부 세력과도 제휴하는 등,
    동분서주하여 신라 주류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일생이 비록 허구적인 신화들로 가득차 있으나, 진실이 무엇이든,
    석탈해 이사금 또한 자기 시대를 최선을 다해 살다간 전형적인 신라인이었다.

    신라 : 3대 유리 이사금, 건치를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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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금은 잇금이라고도 한다.
    이빨 자국이라는 뜻으로, 연장자라는 의미와 함께,
    이가 많은 사람이 덕망이 높고 지혜가 많다는 설이 결합되어,
    왕을 의미하는 순 우리말인 임금이 되었다.
    고대에는 먹는 것이 거칠고 위생도 안 좋았을 테니, 
    이가 많이 닳기도 하고 쉽게 빠지기도 하였을 것인데,
    잘 나가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음식을 먹었을 것이고 위생에도 나름 신경 썼을 것이니,
    건치를 많이 유지했을 것이고, 잘 씹고 잘 먹으면 오래 살 확률도 높아지므로,
    남은 이빨 숫자로 그 사람의 건강이나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아주 엉터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석탈해의 제안한, 떡을 물어 이빨 자국을 세어 보는 내기에 이겨 왕이 된 유리 이사금은,
    남해왕의 장남이자 태자로서 박혁거세의 손자인데, 일본으로 건너 간 천일창 왕자의 동생이라고 한다.
    족보가 헛갈리는데,
    남해왕이 죽을 때 “너희 박가나 석가 중에 나이 많은 놈이 왕위를 이어라”라고 했다는 기록과,
    박혁거세의 비명횡사를 암시하는 기사 등을 연결해 생각해 보면,
    남해왕은 박씨로서 제대로 왕위를 이은 것이 아니라, 그냥 위기관리 내각의 수반 정도였고,
    유리이사금은 이 시기에 석씨와 대결했던 박씨의 대표 주자였을 확률이 높다.

    뭐가 되었든 서기 24년 왕위에 올라,
    즉위 이듬해에 시조 묘에 제사를 지냈고.
    즉위 5년에는 가난한 자들을 많이 구휼하였으며, 
    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모두 행복하게 살아가니, 왕이 도솔가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고,
    이웃 나라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많이 찾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즉위 9년에 6부의 이름을 고치고 그 촌장들에게 이, 설, 최, 배, 정 , 손 등의 성씨를 내렸으며 관제를 정비했다 . 
    왕은 이들 6부를 두 패로 나누어, 왕녀 두 사람이 각각의 부녀자들을 통솔케 한 후, 
    7월 보름부터 길쌈 경연 대회를 개최하였다.
    8월 보름날 성적을 비교하였는데,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이긴 편을 치하하며 축제를 열었고, 이것을 가배(嘉俳:가위)라고 하였다.
    이때 진 편이 일어나서 춤을 추며 ‘회소(會蘇) 회소’ 하고 노래를 불렀는데,
    그 소리가 아주 예술적이라 후세 사람들도 이를 따라 노래를 만들었고, ‘회소곡‘이라 불렀다 한다.
    즉위 14년에는 고구려 대무신왕의 낙랑 침입으로 , 낙랑 사람 5천 명이 와서 투항하였다.
    즉위 17년에 맥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즉위 34년째인 57년, 아들이 아닌 매제 석탈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릉원에 묻혔다. 

    이전 남해왕의 악전고투와는 달리,
    숙적 낙랑은 고구려가 손봐주고 변경의 도적 떼들은 맥국이 잡아준 덕에,
    내정을 정비하고 문화 사업도 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성군 노릇은, 우호적인 외부환경을 맞은 행운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나라가 안정되어야 가능한 것이므로,
    선왕 때부터 실권자였던 석탈해의 정치가 나쁘지 않았다는 의미도 된다.

    석탈해는 남해왕 때부터 실권자이기는 했으나 외래세력이었기에,
    무리해서 바로 왕위를 물려받기 보다는, 이빨 수를 세어보는 황당한 제안을 하여 유리왕에게 왕위를 양보하였고,
    유리왕도 사망이 임박하자, 왕위를 자기 자식이 아니라 성도 다른 매제에게 물려주어, 이전 신세를 갚았다……라는 거의 미담 수준의 권력 승계가 일어난 것처럼 보이나,
    고구려의 이름이 같은 유리왕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아무리 원시적인 시대라고 해도 왕 자리는 그렇게 쉽게 주고 받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따라서 뭔가 숨겨진 이야기가 많을 것으로 짐작되므로,
    유리왕이 사망하기 전에, 용이 금성의 우물에 나타나고, 서북방에서 폭풍우가 몰아쳤다는 기사를
    내란이나 외부의 침략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석탈해가 원인제공자였든, 종결자였든지 간에 이 환란을 극복하고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뭐가 되었건 다음 대에 드디어 석씨가 왕성으로 등장한다.

    신라 : 2대 남해 차차웅, 위기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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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차웅 혹은 자충은 중의 이두식 표기로서 무당을 의미하므로 신관이라는 이야기이다.
    고대에 신관은 매우 존경받는 직종으로 초기 부족 시대에는 부족장을 겸하기도 하였으나,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정치에서는 손을 떼고 고유 업무에 종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아무리 신라가 후진적인 사회였다고 해도 명색이 국가인데,
    무당이 왕 노릇을 했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어찌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기록을 보면
    남해 차차웅은 박혁거세의 장남으로, 죽을 때도 신화스럽게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기 4년, 왕위에 올랐는데, 즉위하자마자 낙랑의 침입을 받아 금성이 포위되는 위기를 겪었다.
    즉위 3년째에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의 묘를 세웠고,
    즉위 5년에 석탈해를 사위로 맞아들였으며, 2년 뒤에 대보로 삼아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맡겼다.
    즉위 11년에 왜구와 낙랑의 침입이 있었고.
    즉위 16년에는 북명에서 예왕의 인장을 발견했다고 한다.
    즉위 21년째인 24년에 죽어 사릉원에 장사지냈고,
    그 외엔 자연 재해에 대한 기록이 다수이다.

    남해 차차웅은 박혁거세의 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박혁거세 치세 말기 두 마리의 용이 출현했다는 기록이나 왕과 왕비가 거의 동시에 사망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 왕의 시체가 토막 난 기사 등으로 미루어 극도의 혼란이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고,
    이로 인하여 일종의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이때 제 세력들을 중재할 수 있는 위치인 신관으로서 남해 차차웅이 추대되었다.
    그런데,이러한 불안한 상황에서 낙랑이 쳐들어오고, 자연 재해가 덮치고 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고상한 신관 나으리는 결국 문제의 인물 석탈해에게 정권을 맡겼고,
    그에 의지해 겨우 겨우 왕 노릇을 하였다…. 정도의 스토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