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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4일 오후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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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페이지 68

    신라 : 31 대 신문왕, 세종대왕급의 명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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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정명, 자는 일소,
    나당전쟁이라는 승부수를 통해 삼한 통일을 완수한 문무대왕의 아들로서,
    왕권을 강화하고 제도를 정비하여,
    8세기 중엽까지 지속되는 신라의 최전성기를 연 세종대왕급의 군주이다.

    681년 왕위에 올라, 선왕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귀족세력을 압박하였고,
    이에 반발하여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면서,
    장인을 포함한 상당수의 귀족들을 반란으로 엮어 숙청하였으며, 왕비까지 내쫒아 버렸다.
    고려 광종이나 조선 태종이 롤 모델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반란 진압 후에는,
    왕궁경호를 담당하는 시위부에 장군을 6명이나 배치하여 왕권도 강화할 겸 안전을 도모하였다.
    짧은 시간 내에 반란을 진압하고 후속조치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한 것으로 보아, 친위 쿠데타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지만,
    뭐가 되었든, 이렇게 삼한통일 과정 중에 양산된 각 종 공신 등 비대해진 귀족세력들을 정리하였고,
    즉위 이듬해에 신궁에 제사 지내었으며,
    현대에 대학 입학 시험을 비롯한 각종 시험에 단골로 출제되는, 국학을 설치하였다.
    사실 국학은 진덕여왕기에 처음 설치되었으나,
    일반적으로 국학 설치는 유교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겠다는 신호와 같은 것이므로,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강한 왕권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진덕여왕은 얼굴마담 같은 왕이었기에 국학 또한 별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명실상부한 국학의 설치 운영은 신문왕이 처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3년차에 새 장가를 갔고,
    보덕국 왕 안승에게 김씨 성을 하사하고 경주에 살게 하였으나,
    이듬해에 안승의 일족이 반란을 일으카자, 보덕국을 없애버리고 점령지역 전체를 직접 통치하였다.
    7년에 태조대왕 (성한왕?, 미추왕?), 진지왕, 김용춘, 무열왕, 문무왕을 모시는 5묘의 제도를 정비해 왕통을 확립하였고. 수조권만을 행사할 수 있는 문무 관료전을 최초로 지급하였으며,
    2년 뒤, 노동력 징발이 가능한 녹읍을 폐지하는 엄청난 일을 하였다.
    692년 재위 12년 만에 6살짜리 효소왕을 남겨두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신문왕은 반란을 빌미로 귀족들의 힘을 꺾은 후, 강력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나라의 제도를 정비하여,
    군제인 9서당의 틀을 만들었고, 5단계 관직제도를 완성시켰으며, 9주 5소경의 지방제도를 확립하였다.
    국학을 설치하여 유교이념을 도입하였고
    녹읍을 폐지하여, 진골 귀족들도 일반 관료처럼 월급을 받는 월급쟁이로 만들었다.
    도읍을 대구로 옮기려고도 했었다는데, 비록 반대가 극심하여 성사시키지는 못했으나,
    이 또한 국가의 틀을 바꾸어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나당전쟁 이후 처음으로 당과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는데,
    무열왕의 묘호, 태종이 이세민의 묘호와 같아 불경이니 바꾸라는 당의 요구가 있자,
    이를 완곡히 거부하여, 나름의 자존심도 챙겼다.

    창업보다 어렵다는 수성을 훌륭히 수행하여,
    문무대왕과 함께, 후대가 감사할 만한 업적을 많이 남긴 명군이었다.

    용이 되어 동해바다에서 물고기를 주식으로 하며 살던 문무대왕이,
    아들이 벌려놓은 일이 많아 걱정이 되었는지 느닷없이 현신하여,
    불기만 하면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는 만렙 만파식적을 주고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으며,
    한국 최초의 창작 설화라고 하는 화왕 설화를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에게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진다.

    티벳 : 가르친링, 당나라의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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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르친링, 토번의 전성기를 연 명재상 가르통첸의 아들로서 군권을 쥔 실세였다.
    당시 티벳은 상당한 강국이었으나 당때문에 동쪽으로 진출할 수는 없었는데,
    당고종이 즉위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올인하자, 힘의 공백이 발생하였고, 
    이 틈에 가르친링은 서역의 4개 주요 도시인 안서사진을 공격하여 고종의 뒤통수를 제대로 때렸다.
    이에 열받은 당고종은 동쪽이 일단락된 669년,
    고구려 정벌의 영웅 설인귀에게 10만 군사를 주어 토번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아마도 이 겁 없는 서쪽 오랑캐쯤은 쉽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설인귀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대비천 전투에서 대패하였고,
    설인귀를 포함한 주요 지휘관은 모두가 포로가 되는 기막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가르친링은 포로가 된 당나라 장수들에게 다시는 까불지 말라며 훈계를 한 후 돌려보냈고,
    여세를 몰아 서역 경영의 핵심인 안서사진을 점령해 버렸다.

    당이 이렇게 서역에서 발목이 잡히자,
    문무왕은 요동을 선제공격하며 나당전쟁의 포문을 열었는데,
    토번 때문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 벌어진 나당전쟁은,
    문무왕이 성을 거점으로 삼아 끈질기게 저항하는 한편 화전양면 전술을 사용하는 바람에, 
    같잖은 티벳에게 연속으로 두들겨 맞은 당고종과 측천무후를 더욱 정신 사납게 했고,
    그러는 사이 가르친링은 서역을 거의 영토화 하였다.
    이러한 상황 때문인지 676년 기벌포 전투를 끝으로 당은 더 이상의 공세를 중단하고 한반도를 방치하였는데,
    이는 쿨하게 신라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일단 토번부터 정리하자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나름 선택과 집중의 묘를 살려,
    678년 이경현, 유심례 등에게 18만 대군을 주어 티베트를 침공하게 하였으나,
    또 다시 가르친링에게 걸려 승풍령에서 박살났고 유심례는 포로가 되었다.
    이경현이도 포위되어 죽을 지경이 되었으나, 백제의 유장 흑치상지의 구원으로 겨우 구사일생하였고,
    결국 청해성 전 지역이 토번의 영토가 되고 말았다.

    689년, 고종이 죽은 후 측천무후는
    위대가, 염온고 등에게 10만 가량의 병력을 주어 안서사진의 회복을 노렸으나, 다시 막아선 가르친링에게 궤멸되었다.
    고종의 그늘에서 벗어나 처음 시도한 원정에 실패해서 열 받았는지, 측천무후는 위대가를 유배시키고 염온고는 참수했다 한다.
    이 지경이었으니 한반도 재 침공은 꿈도 못 꾸었고 덕분에 문무왕은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한반도에서 손을 뗀 측천무후는 티벳을 상대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고
    692년 왕효걸에게 30만 대군을 주어 돌궐군과 함께 안서사진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전력을 다한 당의 공세는 확실히 대단해서,
    왕효걸은 가르친링의 아우 가르다고리가 이끄는 티벳의 15만 대군을 궤멸시켰고,
    안서도호부를 부활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상황은 역전되었고 토번이 위기에 몰리게 되었으나, 토번에는 아직 가르친링이 건재하였다.

    가르친링은 698년 3만의 군사로 반격을 시작하여 왕효걸의 30만 대군과 맞섰으며,
    이듬해 40만으로 증원된 당군을 소라한산에서 거의 전멸시켜 버렸다.
    이 전투로 인해 당의 군사력은 급격하게 약화되었고, 국서에 토번을 ‘서쪽정부‘라고 칭할 정도로 위세가 실추되었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단 한 번도 가르친링을 이길 수 없었다고 한다.

    가르친링의 활약으로,
    티벳의 위상은 높아지고 영토가 넓어지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으므로,
    원래 대단했던 가르친링 일족의 위세는 더욱 커져 하늘을 찌르게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왕권강화를 노리는 티벳의 야심찬 젊은 군주에게는 엄청난 부담이 되었고,
    필연적으로 갈등이 야기되었다.
    결국 역사상 흔한 예처럼 왕은 숙청의 칼날을 들었고, 무자비한 피바람이 불었는데,
    가르친링은 국가를 위해, 자신에게 반역의 혐의를 씌우는 군주에게 대항하지 않았고,
    청해호 근처에서 자결하여 그 신화와 같은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가히 티벳의 이순신이라 할 만하다.

    스윕포커스, 고문역에 ‘공재광 前 평택시장’ 위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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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재광 전 평택시장 (사진=본인 제공)

    스윕포커스(대표 김동주)는 13일, 고문역으로 공재광 前 평택시장을 위촉했다고 밝혔다. 공재광 前 시장은 9급 면서기로 공직생활을 시작해 안전행정부 장관 비서관,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 평택시장을 임하며 ‘9급 공직의 신화’로 불리운다. 또한 이번 총선에 평택시을 예비후보로 등록하였다.

    공재광 고문은 이번 위촉에 대해 “지금의 청소년과 청년세대는 과거와는 다른 더 높은 진입 장벽들이 가로 놓여있어, 이제는 기성세대가 된 제가 그들의 선배 된 입장과 위치에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을 약속드린다”라고 말했다.

    본 지 운영위원회(공동운영위원장 양윤모, 문환성)는 “이제 막 사회의 새 일원이 된 청소년들의 행보에 함께 해주시는 것에 대하여 더할 나위없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을 전하며 여러 사회인사들과 소통하며 청소년이 당당히 사회의 한 몫으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청소년의 사회적 성장을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공재광 고문의 ‘고문역 수락문 전문’은 오늘 13일 19시에 공개됩니다.

    당 : 측천무후, 중국사 유일의 여성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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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은 무조, 아명은 무미랑.
    목재상으로 거부가 된 무사확의 차녀로 태어나 14살에 당 태종 이세민의 후궁이 되었고,
    이쁜이로 불릴 정도로 미모가 뛰어나, 10여 년을 총애를 받으며 그럭저럭 잘 살았으나,
    이세민이가 사망하자,
    황실의 관습에 따라 머리 깎고 출가하여 남은 평생을 죽은 영감의 명복을 빌며,
    향 냄새나 실컷 맡으며 살아야 하는 한숨 나오는 팔자가 되었다.
    25살이라는 물오른 나이에, 남자도 알고, 권력의 맛도 알고, 장사꾼 집안 출신의 신앙심 없는 미모의
    비구니.
    뭔 사달이든 안 났으면 그게 더 이상하였을 것이다.
    결국 이 여인은 다시 궁으로 복귀하였는데,
    그 복귀 이유가,
    아버지의 여자, 이쁜이의 미모를 잊지 못한 고종이 후궁으로 불렀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황후 왕씨가 후궁 소숙비와의 암투에 무후를 이용하기 위해 불러들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뭐가 되었건 고종은 애비의 첩이었던 여자를, 다시 자기 첩으로 삼은 것이다.
    …..자원 재활용도 아니고, 형사취수는 들어 봤어도 원.

    액면만 놓고 보면,
    “사춘기 끝자락에 무씨 서모의 미모에 홀려 짝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철 없는 황제가,
    애비가 죽자 남 몰래 금지된 사랑을 불태우다 그만 애까지 생기고 말았는데,
    이를 알게 된 자식 못 낳는 황후가,
    남 보기도 그렇고 애가 무슨 죄냐…라고는 안 했겠지만,
    황제가 쪽 팔리게 밖으로 나돌지 말고 차라리 계집을 안으로 들여라….고도 안 했겠지만,
    어쨌건 첩 반기는 여자는 없으니, 위와 유사한 뉘앙스를 풍기며 궁으로 들이시라” 고 권유한
    모양새인데,
    그렇다고 왕황후가 남편의 바람을 이해하고 이 패륜적 사랑에 공감할 정도로 워낙에 착한 여자는 전혀 아니었으므로 그녀의 속마음에는,
    어짜피 황제의 마음은 떠났고, 지금처럼 소숙비가 총애를 받아 그녀의 아들이 태자라도 되는 날이면
    자신이 황후자리에서 쫒겨날지도 모르므로,
    황제가 죽고 못사는 이쁜이를 들여 소숙비를 견제하게 하면 자기 자리가 상대적으로 안전해지고,
    설령 이쁜이가 최후의 승자가 된다 하더라도,
    ‘설마 전 황제의 후궁이었다는 결정적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여자가 황후자리를 꿈꾸겠냐’는 냉정한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황후의 제안에,
    당고종은 윤리고 황실의 체면이고 지랄이고 뭐건 간에, 그리고 황후의 의도에 대한 고려도 없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냉큼 전 서모, 이쁜이를 후궁으로 봉해 그녀를 기쁘게 하였고, 그녀 소생의 아들을 사생아에서 일약
    당나라의 황자로 만들었다.
    다시 궁으로 복귀한 이쁜이는 이전 며느리들에게 한 수 위의 암투 능력을 선보이며,
    황후의 기대대로 소숙비를 견제하였음은 물론,
    딸 안정 공주의 죽음을 이용하여 소숙비와 소숙비를 청부했던 왕황후까지 싸잡아서 제거하였고,
    그 여세를 몰아 입궁한지 4년 만에 고종의 두 번째 황후가 되는 기염을 토하였는데,
    그러나,
    황제가 의붓 어머니와 사통하여 자식을 낳은 것으로도 모자라 조강지처를 쫒아내고 정부인으로 삼는,
    이런 듣도 보도 못한 일이 문명국을 자처하는 당대 세계 최강대국 당나라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황태후를 비롯한 황실 종친들은 물론 조정의 중신들까지 기를 쓰고 반대하였을 것이니,
    과정 하나 하나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후의 목숨은 물론 황제의 직까지 걸어야 하는 매우 위험한 도박이었을 것이다.

    당시 당나라의 권력 상층부는 관롱집단이라는 일종의 무력 집단이 장악하고 있었다.
    얘들은 북위 시절부터 존재하던 무벌인데,
    수나라의 건국과 멸망, 당의 건국 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당 고조 이연 또한 이 집단 출신이라고 할 수 있었으므로,
    수말 당초에 발행한 황위 쟁탈전을 포함한 대부분의 권력투쟁은 결국 관롱집단 내부에서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따라서 관롱집단은 일반적인 파벌이나 명문가 수준의 권력집단이 아니라,
    강력한 힘을 가진 여러 가문들의 연합체로서 국가 존립과 황권의 기반이 되는, 심하게 말해 당나라의
    실질적 주인이라고 까지 말할 수 있었으므로,
    형제들을 죽이고 아버지를 쫒아내는 살벌한 골육 간의 권력 투쟁을 통해 황위에 올랐고,
    돌궐을 확실히 밟았으며, 비록 정벌에는 실패했으나 고구려를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 넣었는가 하면,
    내치에도 재능을 발휘하여 후대에 정관의 치라고 칭송받는 시대를 열었던,
    그 대단했던 당태종도 얘들만은 함부로 대하지 못했으며, 대쪽 선비 위징도 이것들의 눈치는 살폈다고 한다.
    이들의 세력은 세월이 흘러도 줄기는 커녕 더욱 커져, 고종 대에 이르러서는 황제도 어쩌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거대문벌에 의한 세도정치 수준이었나 보다.
    그런데 왕황후도 이 관롱집단 출신이었으므로,
    관롱집단의 수장인 공손무기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황후를 제거하고 이쁜이를 황후로 만드는 것은,
    이 집단과의 정면대결을 의미하는 매우 위험한 짓이었다.
    이 거대 무력 집단에 대항할 힘이 졸부가문 출신의 이쁜이에게 있었을 리는 만무했고,
    당태종의 9남으로 태어나 치열한 태자 쟁탈전 끝에, 공손무기의 도움을 받아서야 겨우 황제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고종이 뭘 믿고 이러한 겁나는 싸움을 시작했는 지는 모르겠느나,
    적어도,
    천하의 미인이란 미인은 다 모아 놓은 황궁의 주인이 사춘기 소년처럼 미모에 홀려 오로지 사랑만으로,
    아버지의 후궁이었다는 결정적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한미한 가문 출신의 여자를, 후궁으로 들인
    것으로도 모자라 황후로 세우는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된 자세한 사연이야 당사자들 밖에 모르겠지만,
    고종 즉위 초의 당나라 조정은, 북위의 황족 출신으로 당태종 이세민의 처남이자 친구였고,
    고종 옹립 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공손무기를 비롯한 개국 공신들에 의해 거의 장악되어 있었으며,
    그 발호가 심각하였다고 한다.
    개국 공신 집단의 발호는 거의 모든 창업국가 공통의 병폐라고 할 수 있으나,
    이넘들이 지 멋대로 하게 방치해서는 누가 주인인지도 모르게 될 뿐만 아니라, 
    수나라 꼴이 날 수도 있으므로 황제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상황이었다.

    왕황후는 껄끄러운 관롱집단 출신이면서 애까지 못낳는 여자였으므로, 일찌감치 고종의 눈밖에 났을 것이고,
    대타로 사랑한 소숙비 또한 현 조정과 아주 관련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얘들과 엮인게 전혀 없고,
    문무 겸전을 추구하며 나름 강건한 철학을 지닌 이넘들이 반대할 것이 확실한 이쁜이를 내세워 숙청을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평소 유약하다고 알려졌던 고종은 보기 보다는 정치투쟁에 재능이 있었는지, 황후교체에 반대하는
    장손무기, 저수량, 우지녕 등 거물들을 몽땅 제거하였고,
    관롱집단 출신으로는 이세적이 하나 남겨 놓았다고 하는데,
    틀림없이 힘겨웠을 이 싸움에서, 강인한 성격과 비상한 두뇌를 가진 무후는 유용하고도 사랑스러운
    도구였을 것이다.
    이는 영명하다고 칭송이 자자했던 당태종도 이루지 못한 쾌거로서,
    고종은 이렇게 강화한 황권을 바탕으로 백제, 고구려, 돌궐을 점령하고 통치하는 등, 당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와 전쟁을 한 군주가 될 수 있었다.
    황후가 된 무후는 저질 건강의 고종을 돌보며, 수문제 시대처럼 황제와 황후의 협치 시대를 열어가게
    되었지만,
    절대 권력은 아직 고종에게 있었고, 무후는 단지 대리자 내지 협조자에 머물렀다.

    656년 기존의 태자를 폐하고 무후의 장남을 황태자로 세웠으나 곧 죽어 차남으로 대치하였다.
    659년에 백제를 멸망시켰고
    661년의 고구려 원정은 실패하였으나, 668년, 재수 끝에 마침내 고구려를 지도에서 지웠다.
    아버지가 못한 일을 또 하나 이루었으니, 이때를 고종의 전성기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669년에 토번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운명의 가르친링에게 패배하며 위세가 꺽이기 시작하였다.
    670년 신라의 선공으로 나당전쟁이 시작되었고 토번의 가르친링에게 서역을 빼앗겼다.
    672년 고종이 병으로 인해 정사를 보지 못하게 되자 무후가 본격적으로 대신 정치를 했으며,
    675년에 수렴청정을 선언하였다.
    676년에 나당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끝났고,
    678년엔 가르친링에게 대패하였다.
    682년에는 돌궐 제2제국이 골돌록가한(일테리시칸)에 의해 부활했으며,
    683년 고종이 죽은 후 태자인 3남 중종을 제위에 올렸으나 위황후를 비롯한 외척 세력이 대두하자,
    폐위시키고 4남 예종을 즉위시켰다.
    684년 이적의 손자인 이경업(서경업)의 난을 진압하고 이세적을 부관 참시하였다.
    689년, 가르친링에게 대패하였다.
    690년, 예종을 폐위하고 제위에 올라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황제의 시대, 무주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691년에는 묵철가한이 즉위해 쿠차(사주)와 돈황(안서도호부)를 위협했다.
    696년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40만 대군을 파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황이 좋지 못했고, 돌궐의 지원을 받아 겨우 진압했다.
    이때 거란의 반란을 틈타 이주하던 대조영을 추격하였으나 대패하였고, 발해의 건국을 허용해야만 했다.
    698년 돌궐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바람에 거란이 재 독립하였고, 이로 인해 요동 및 요서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이에 열 받아 45만 대군으로 돌궐을 공격했으나 패하였다.
    699년에 가르친링에게 40만대군이 거의 전멸하여 토번을 서쪽정부라 칭하며 대등한 관계를 인정했다.
    705년 병으로 눕자 물러나라는 압력을 받았고, 별 수 없이 3남 이현(중종)에게 양위했다.
    이리하여 무주 시대가 끝나고 도로 당나라가 되었다.

    무후의 외치를 보면, 이전 황제들이 정벌하거나 점령했던 지역을 모조리 상실하는 등 무능의 극치를 보였다.
    나당전쟁에 패하여 옛 백제 지역의 지배권을 날렸고, 발해의 독립을 막지 못해, 만주와 요동도 고구려 정벌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거란의 독립도 막지 못했고, 돌궐도 부활했으며, 토번의 기르칭린에게는 연전연패 그것도 대패로 일관하여 서역의 지배권을 잃는 것은 물론 토번의 대등한 위상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내치 쪽에서는 양상이 달랐다.

    무후는 태생적 한계가 너무 많은 황제였으므로 깔린 게 반대파였고, 상시적 반란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기에,
    죽지 않기 위해서는 비밀경찰 조직 등을 동원하여 공포정치를 실시하는 한편, 믿을 수 있는
    친정 출신들을 우대하여 친위조직을 구축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만 했으면 그저 그런 독재자의 삶을 살다가 어느 놈 칼에든 맞아 죽었겠지만, 무후는 달랐다.
    적인걸, 장간지 같은 뛰어난 자들을 재상으로 등용하였으며,
    사상 처음으로 과거제도의 완성이자 황권 강화책인 전시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때 등용된 인재들은 주로 중소지주계층 출신으로 북문학사라 불렸는데,
    무후는 이들을 친위세력으로 삼아 내치를 다졌고, 나라를 효율적으로 운영하였다.
    덕분에 무후의 치세에는 당태종 시대에 버금갈 정도로 생산력이 회복되었고,
    일반 백성들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이 북문학사 집단은 현종시기 개원의 치의 주역이 되었고, 당나라 최대의 전성기를 여는 기반이 되었다.
    이 시기에 당나라 도자기가 그 특징을 확립하였으며,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일처다부제
    시행되기도 하였다.

    불세출의 걸물이었으나,
    말년에는, 전쟁만 했다 하면 지고 되는 일 도 없고 해서 회한에 싸여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황후로서 장례를 치르고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고 한다.

    * 가르친링
    가히 당의 천적이라 할 만하다.
    자결하기 전까지 50여회에 달하는 당과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토번의 명장이었다.
    병력의 차, 상대 장수 등과 관계없이 당과 싸우면 무조건 이겼다.
    설인귀 등 고구려 원정의 영웅들을 비롯하여 당의 날고 기는 장수 모두가 가르친링의 밥이 되었고,
    10배 이상의 병력 차이도 가르친링의 전공을 높여주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가르친링의 이러한 활약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신라 : 나당전쟁, 한겨레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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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기 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간 진행 된, 삼한통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전쟁이다.

    삼국 중 가장 약했고,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던 신라는,
    통일 전쟁 직전까지도 나라의 존립을 걱정해야 하는 신세였기에,
    살기 위해 당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고구려의 배후에 위치한 신라의 전략적 가치를 역설하여 동맹까지 얻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힘의 차이가 현격하였으므로 감히 대등한 동맹은 말도 꺼내지 못하였고,
    달라면 주고, 하라면 하고, 어쩌다 뭐 하나 던져주면 감사히 받는 불평등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에게 종속되든 말든 일단 살고 보자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통일전쟁은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치면서 시작되었다.
    당연히 주력은 당군이었고 신라는 주로 보급부대의 역할을 하였는데, 
    당군은 명성대로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하며,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를 순식간에 괴멸시켰고, 그동안 대륙세력에 대해 방파제 역할을 해왔던 강국 고구려까지 멸망시킨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시키는 대로 열심히 종노릇을 하긴 하였으나,
    당군이 대부분의 결정적인 전투를 수행하였고, 병력손실도 신라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므로,
    고구려, 백제의 위협으로 부터 신라의 안전을 확보해 준 이상, 쌀 배달이나 했던 신라와 전쟁의 수확을 나눌 생각이 없었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옛 영토에 괴뢰국을 세워,
    점령지의 항복한 수장에게 벼슬을 주고 자치를 허용하는 온정적 식민지 통치방식인,
    기미지배체제에 의한 통치를 시작하였다.

    665년 8월, 당나라 칙사 유인원의 주관 하에 웅진의 취리산에서 전 백제 태자 부여융과 문무왕 간의 회맹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부여융은 웅진도독에 임명된 직후였고, 문무왕 또한 이미 4개월 전에 계림도독으로 임명된 상태였으므로,
    이 회맹은 당의 관리들인 웅진도독과 계림도독간의 양자 회담으로서,
    양자는 “땅을 구획하여 양측의 경계를 확정하고, 백성을 살게 하여 각각 산업을 영위하게 하는” 의식을 행하였다.
    이 자리에서 신라와 백제는 서로 침범하지 말고 사이 좋게 지내라는 충고까지 들어야 했는데,
    이는 당나라가 지들 나름의 기미지배체제에 의한 식민지 통치를 시작한 것으로,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신라 입장에서는 간신히 멸망시켰던 백제의 옛 자리에, 예전 한사군처럼 중국의 식민 세력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겁나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었다.
    이는 648년 당태종과 무열왕 간에 맺은 영토분할약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로서,
    승자인 문무왕이 패자인 부여융과 동급으로 취급 받는 매우 열 받는 일인 동시에,
    신라 또한 이놈들의 식민지 지배체제에 편입되었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는,
    지금까지 헛고생을 하였으며, 나라의 존립 또한 오히려 전쟁 전 보다 더 위험해졌다는 의미였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어짜피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므로,
    신라는 이판사판 붙어보는 수밖에 없었고,
    결과야 어떻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심정으로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670년 3월, 진골도 아닌 설오유가 당시 신라 국력으로는 대 부대라 할 수 있는,
    2만의 기. 보 혼성 부대를 이끌고, 전격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선제공격하였다.
    뭔 배짱인가 싶지만,
    이는, 당이 바로 전 해에 있었던 대비천 전투에서 티벳의 영웅 가르친링에게 개망신 당하는 꼴을 보고,
    얘들 사정이 예전만 못하다는 감을 잡은 문무왕이 나라의 명운을 걸고 베팅한 것으로 보인다.

    설오유 부대, 빨치산 부대 이름 같기도 하고… 하는 짓도 비슷했다.
    이 부대가 엄동설한에 산 넘고 물 건너 만주벌판을 가로지르는 장거리 행군을 하였고,
    요동의 오골성을 전격적으로 공격, 박살냈으며, 백성으로 물러나 농성을 시작한 것이다.
    당은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나, 그러건 말건,
    당나라 놈들 먹이고 입히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었던 신라가, 이렇게 정예한 특수부대를 운용했다는 사실은,
    그 동안 신라가 얼마나 열을 많이 받았으며, 당과 싸우기 위해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했었는 지를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신라는, 일종의 양동부대인 설오유 부대를 요동으로 진출시킨 후에,
    7월부터 백제 땅으로 대규모 진격을 개시하여 80여 성을 전격적으로 함락시켰고, 사비성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였다.
    671년 6월에는 석성에서 당나라 군사 5,300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고,
    10월에는 당나라 선박 70여척을 박살내고 군사 1백 명을 사로잡는 성과도 올렸다.
    전격적인 신라의 공격에 방심하고 있던 당이 제대로 한방 먹은 셈이나, 당은 역시 강국이었다.
    바로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672년 7월 고간과 이근행이 한시성, 마읍성을 공격해 점령하고,
    백수성 근처에서 신라군과 교전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신라는 상급 지휘관만 7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이것이 석문전투로서,
    이 전투에서 원술랑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가 아버지 김유신에게 맞아죽을 뻔했고, 문무왕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느나, 
    결국 파문당하여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산속에 숨어 살아야 했다. 연개소문의 자식 교육과 비교된다.
    이 패전으로 야전에서는 도저히 가망이 없음을 알게 된 신라는 이후 수성전에 치중하였고, 
    당에 사죄하는 서신을 보내는 등 화전양면 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하였다.

    673년 7월 1일, 당과의 싸움이 열세인 상황에서 신라의 정신적 지주 김유신이 세상을 떠났다.
    원술랑이 다행으로 생각하…지야 않았겠지만, 아무튼 신라 조야에 불안감이 확산되고 반란이 발생하는 등 또 한번의 위기가 닥쳐온 것이었는데,
    이미 수도 없는 위기를 겪었던 문무왕은 침착하게 위기를 넘겼고, 꾸준히 성들을 증축하고 보강하며 수성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당의 공격이 개시되었을 때는 아홉 차례를 싸워 모두 승리할 수 있었고, 당나라 놈들 목아지를 2천여 개나 도려내었다.

    674년, 문무왕은 고구려 유민들을 거둬들여 옛 백제 땅을 수비하게 하는 등 대동강 이남에 대한 권리 행사를 노골화 했는데,
    이에 당 고종은 격노하여, 꼴같지도 않은 계림도독의 관작을 삭탈하고,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했으며, 신라를 공격하였다…는데, 이때는 측천무후가 섭정을 하는 시기였고, 당 고종은 병석에서 빌빌대고 있었다.

    675년 2월, 유인궤가 칠중성을 깨뜨렸고, 이근행이 다시 신라를 공격하자,
    문무왕은 사신을 파견해 공물을 바치며 사죄하였다.
    그러자 당 고종(측천무후일 것이다)은 관작을 회복시켜주며 군사를 물렸는데, 신라는 이 틈에 백제 전토를 수복하고 대동강을 넘어 평양까지 공격하였다.
    우리가 볼 때는 참으로 눈부신 화전양면 전술이 아닐 수 없으나, 당나라 놈들은 환장할 지경이었을 것이다.
    9월에는 설인귀가 천성을 공격했으나,
    문훈 등이 반격을 가해 당군 1400명의 수급을 베고 전함 40여 척, 군마 1천 필을 탈취하였다.
    그리고 이근행이 20만의 군대를 이끌고 매소성으로 쳐들어오자, 이에 맞서 싸워 군마 3만여 필과 수많은 병기를 노획하였다.
    이게 나당전쟁 최대의 승리라는 매소성 전투인데, 당군을 몇 명이나 죽였는지는 기록이 없다. 
    문무왕은 이때에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죄의 방물을 바쳤다…는데,
    보내는 사람도 어지간하지만, 보낸다고 받는 측천무후도….이것 저것 정신 사나워서 그랬을 것이다.
    아무튼 신라는 이후로도 아달성, 석현성, 적목성 등지에서 당군과 격전을 벌였고,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676년 11월, 절치부심한 설인귀가 수군을 이끌고 서해로 쳐들어왔으나, 기벌포에서 시득에게 막히며 체면을 구겼는데,
    이후 당은 티벳의 가르친링에게 얻어맞느라 신라에 대한 공세를 이어갈 수 없었으므로,
    이것이 당의 마지막 공격이 되었다.
    마침내 나당전쟁이 끝이 난 것이다.

    신라가 당과 동맹을 맺은 것은, 그저 죽지 않고 살아보겠다는 약소국의 몸부림이었다.
    이 몸부림이 어찌어찌 통해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동참하게 되었고, 강적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백제와 고구려를 없애버린 자리에 대신 들어선 최강대국 당은 신라를 다시 생존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꼴이 된 신라가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었으나,
    측천무후가 권력을 장악해가는 과정 중에 야기된 당조정의 혼란과 때 맞춰 등장한 티벳의 영웅 가르친링의 활약 덕분에,
    문무왕은 도박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강인한 의지와 노련한 전술로 이래저래 머리 아픈 당군을 괴롭혀, 결국 당의 전쟁수행의지를 꺾어 버렸다.

    신라에게 삼국을 통일하여 하나된 조국을 만들겠다는 사명감 따위는 쥐뿔도 없었을 것이나,
    신라마저 삼키려는 당의 야욕은 삼한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7년 간의 나당전쟁은, 삼한의 백성들을 부조의 원수에서 공동의 적과 맞서 싸운 동지로 바뀌어 주었다.
    그리고 무슨 협정을 맺고 전쟁을 끝낸 것이 아니었기에, 이놈들이 언제 또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신라는 포용정책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고,
    백성들 또한 나라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었을 것이므로, 한반도의 제 종족들은 결국 신라의 이름 아래 한 민족으로 살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당 전쟁은 한민족의 출발점이 된 중요한 전쟁이며,
    이 어려운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한반도에서 당을 축출한 문무대왕은, 후대의 평가가 어떠하든,
    한겨레의 실질적 시조라 불리어 마땅할 것이다.

    두산아트센터, 무료 미술강좌, 3월 5일부터 개강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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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산아트스쿨 미술강좌 홍보 포스터 (사진=두산아트센터 제공)

    [수완뉴스=육주현 기자] 두산아트센터에서 5일부터 매주 목요일(총 5회), 두산아트스쿨: 미술에서 <미술관 건축순례: 예술공간 VS. 공간 예술>을 주제로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진행한다.

    동서양 현대미술, 사진 등 다양한 분야를 다뤄 온 ‘두산아트스쿨: 미술’이 2020년 상반기에는 건축을 주제로 5회 진행한다. 이번 강좌에서는 미술관 건축의 역사와 의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흥미로운 미술관 사례들을 지역/도시 별로 정리해 건축적 시각으로 살펴볼 예정이다. 

    수강생들은 총 5회 강좌를 통해 아틀라스(Atlas, 지도책)처럼 미술관 건축 순례의 여정을 만들어볼 수 있다. 미술관에 전시된 예술 작품과 더불어 공간 자체로서의 예술적 의미를 찾아보는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두산아트스쿨: 미술의 지난 수강생들은 “무료로 좋은 강의를 제공하는 두산아트스쿨을 지인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다.”, “무료강의라 큰 기대하지 않았는데 강의 내용이 유익해서 빠지지 말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긴다.”, “너무 흥미로웠다! 앞으로 다른 수업도 참여하고, 혼자 온 것도 아깝더라. 엄마랑 친구들 함께 하면 좋을 것 같다.”, “친구도 초대해서 같이 들었다.”, “문화에 대한 소양을 키울 수 있는 강의를 무료로 듣게 되어 고맙다.” 등의 소감을 밝혔다.

    두산아트스쿨: 미술 <미술관 건축순례: 예술공간 VS. 공간 예술> 5회 강좌 모두 무료로 진행되며, 두산아트센터 홈페이지(doosanartcenter.com)에서 회원 가입 후 신청할 수 있다. 지난 강좌는 두산아트센터 유튜브(youtube.com/doosanartcenter)를 통해 볼 수 있다.

    한편, 두산아트센터는  2020년에는 2월, 5월, 8월, 10월 4회 씩 투어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센터 관계자는 올해 첫 프로그램으로 <건축 투어>로 2월 10일(월) 오후 4시부터 약 60분간 연강홀, Space111, 두산갤러리, 로비, 화장실 등 두산아트센터 곳곳을 둘러볼 예정이다. 특히 이번 <건축 투어>에서는 공간이 완성되기까지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육주현 기자

    [사진] 뮤지컬 줄리 앤 폴 프레스콜 현장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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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육주현 기자]  지난 1월 30일 서울시 종로구 드림아트센터 1관에서 뮤지컬 <줄리 앤 폴>의 프레스콜이 진행되었다.

    뮤지컬 <줄리 앤 폴>은 1889년 낭만의 도시 파리의 대표 건축물 에펠탑 건설을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에 심장이 자석으로 변하는 여자와 철의 손을 가진 남자의 로맨스라는 참신한 상상이 결합하여 탄생한 작품이다. 다채롭고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이 펼치는 유쾌발랄한 무대와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는 매끄럽고 사랑스러운 음악과 만나 관객들에게 기적 같은 시간을 선물한다.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퍼커션, 아코디언으로 이루어진 5인조 라이브 밴드가 연주하는 총 20여개의 넘버는 배우들과 환상적인 앙상블을 이루며 생생한 음악으로 귀를 사로잡는다. 왈츠와 탱고 장르의 넘버들은 낭만의 도시 파리를 무대 위에 재현해내며 작품을 감상하는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 날 프레스콜에는 배우 김주연, 이지수, 박정원, 송유택, 정휘, 김지민, 신창주, 안두호, 정재원, 한세라, 박준후, 허만이 장면 시연을 했다.

    뮤지컬 <줄리 앤 폴>은 3월22일까지 드림아트센터 1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육주현 기자

    신라 : 30 대 문무 대왕, 용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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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법민, 삼국통일의 완성자.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 소생으로 무열왕의 장자이다.
    진지왕 계열과 가야 계열의 통합의 상징으로 영특, 총명하였고 지략이 뛰어났다고 하는데,
    왕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기에, 진덕여왕 치세에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외교를 배웠고,
    여러 관직을 거쳐 태자가 된 뒤에도 영원한 후견인 김유신과 함께 전쟁터를 전전하였다.

    무열왕 7년, 상대등 김유신과 함께 출전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부왕이 승하하자 바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이 기승을 부려 전쟁터를 떠날 수 없었기에,
    당나라 군대에 군량을 수송하는 일을 주로하며 즉위년을 보내었다.
    즉위 이듬해에 탐라의 복속을 받았고 당의 책봉을 받았으며, 여전히 쌀 배달에 종사하였다.
    3년에는 부산성을 쌓았고, 백제 부흥군의 기세를 꺾었는데,
    당나라 놈들이 지들 멋대로 계림주대도독 임명장을 수여하여, 왕으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래도 힘이 없으니 참고,
    당군 40만과 함께 백제, 왜 연합군을 백강어귀에서 궤멸시켰으며, 주류성을 함락시켜 백제를 거의 평정하였다.
    4년차부터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는데,
    5년에는 당의 강요로 취리산에서 부여융과 회맹할 수밖에 없었고,
    백제가 형식적으로나마 독립하는 꼴을 보아야 했다.
    이 때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라는 타이름까지 받아 멘붕이 되었다.
    6년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를 두들겼으며 연정토의 귀순을 받아들였다.
    7년에는 신라의 왕을 일개 대장군에 임명하는 등 당의 무시와 무례가 더욱 심해졌으나,
    참으며 쌀 배달을 하였다.
    8년에 드디어 고구려를 향해 전군을 동원하였고,
    대각간 김유신에게 내정을 맡기고 친정하여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고구려 멸망 후 당이 신라마저 먹으려 하자,
    이미 선대부터 예견하고 있던 바이므로 당과의 전쟁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10년에 요동을 선제공격하며 나당전쟁의 시작을 알렸고,
    백제를 향해 진군하여, 11년 웅진도독부를 박살내고 사비성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였다.
    당대 최강의 패권국 당나라를 상대로 제대로 한판 붙은 것이다.
    13년에 신화와 같은 태대각간 김유신이 사망하였다.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심적 타격이 막심한데, 불행은 동행한다더니,
    반란의 기미도 보이고, 당의 공세가 가중되어 어려움이 많았다.
    14년에도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며 당과 싸웠으나,
    당이 김인문을 신라왕에 봉하면서 대규모 공격을 기획하는 등, 여전히 어려움이 많았다.
    15년에는 당과 무려 18 차례의 크고 작은 싸움을 하여 모두 이겼다.
    이때 그 유명한 설인귀를 패퇴시키는가 하면, 매소성에 주둔하고 있던 20만 당군을 두들겨 쫒아내었다.
    16년 마침내 당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통일을 완성하였다.
    21년, 죽어 동해의 용이 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위대한 일생을 마쳤다.

    문무대왕은 김유신 장군과 태종 무열왕를 합쳐 놓은 듯한 사람으로서,
    외교적 능력이 뛰어났음은 물론 군사 전략에도 밝았다.
    백제 공략전과 고구려 공략전에 모두 직접 참전하였으며,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백제 부흥군과 고구려 부흥군의 항복을 받았고,
    이 부흥군의 지도자들에게 골품을 부여하는 등, 구 백제, 고구려 세력들을 포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나당전쟁을 수행하여, 한반도를 영토화하려는 당의 야욕을 분쇄하였다.

    나당전쟁은 한반도의 제 세력들이 합심하여 외적과 맞서 싸운 최초의 전쟁으로서,
    전쟁 승리의 요인으로는,
    때 맞춰 발생한 티벳을 비롯한 당 주변 국가들의 잇따른 발기 및 당의 연속된 군사적 실패,
    그리고 이를 적절히 이용한 외교,
    탄탄한 전쟁 준비 및 제갈량 뺨치는 대왕의 탁월한 전략 등 여러가지를 열거할 수 있으나,
    무엇보다,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적대적 포로가 아닌, 동일한 적을 마주한 동지로 대우하여,
    쓸데 없는 에너지 낭비 없이 대당 투쟁에 전념할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대왕의 탁월한 혜안과 용기 그리고 포용력이 없었다면 아무리 다른 요인들이 우호적이었다 해도,
    당시 신라의 국력으로 패권국 당을 꺾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결국 한반도는 중국 땅이 되었을 것이며, 통일 왕조를 통한 동일체 의식 따위는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대왕의 유조로 평을 마무리한다.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능히 영토를 안정시켰고
    배반하는 자들을 치고 협조하는 자들을 불러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평안하게 하였다.
    위로는 조상들의 남기신 염려를 위로하였고 아래로는 부자(父子)의 오랜 원한을 갚았으며,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두루 상을 주었고,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람들 모두 균등하게 벼슬에 통하게 하였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어질고 오래 살게 하였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살펴주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들이 풍족하여,
    민간은 안정되고 나라 안에 걱정이 없게 되었다.
    곳간에는 언덕과 산처럼 쌓였고 감옥에는 풀이 무성하게 되니,
    혼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고 관리와 백성에게 빚을 지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우리 민족의 비조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위대한 군주라 아니할 수 없다.

    스윕포커스, 보도제작부 이사에 국민대 재학생 한상욱 씨 임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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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도제작부 이사로 선임된 한상욱씨 (사진=본인 제공)

    스윕포커스(대표 김동주)는 7일, 보도제작부 이사로 한상욱 씨를 임명했다고 밝혔다. 한씨는 비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민대학교에 재학 중이다. 고교시절 평택시사신문 청소년기자단에서 활동하였으며 현재는 재학 중인 대학교 학보사에서 활동 중이다.

    이번 임명에 대해 한상욱 보도제작부 이사는 “스윕포커스가 많은 분들에게 읽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언론사가 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본 지에 기여와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본 지 운영위원회(공동운영위원장 양윤모, 문환성)는 “새로운 가족의 합류를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말을 전하며 새 가족과 함께 많은 노력을 본 지의 성장에 쏟겠다고 밝혔다.

    2020년도 제1회 초졸·중졸·고졸 검정고시 시행 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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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김동주 기자] 강원도교육청(교육감 민병희)은 6일, 「2020년도 제1회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이하 검정고시)」 시행계획을 강원도교육청 홈페이지에 공고했다.

    이번 검정고시는 오는 4월 11일(토),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 50분까지 지역 일반시험장 3곳(춘천, 원주, 강릉)과 재소 기관 시험장 4곳 등 모두 7곳에서 나누어 치르며, 합격자 발표는 5월 7일이다.

    구체적인 시험 장소는 3월 30일 강원도교육청 홈페이지에 안내된다.

    응시희망자는 도내 17개 교육지원청에서 원서를 교부받아 방문 접수하거나, 온라인 접수(https://kged.kwe.go.kr)하여야 한다.

    방문 접수 기간은 오는 17일부터 21일까지며, 온라인 접수 기간은 17일부터 20일까지다.

    시험 과목은 △초졸 6과목(국어, 수학, 사회, 과학, 선택 2과목) △중졸 6과목(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 선택 1과목) △고졸 7과목(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 한국사, 선택 1과목)이다.

    도교육청 강삼영 교원정책과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예방을 위하여 가급적 온라인 접수(https://kged.kwe.go.kr)를 권장한다.”면서 “접수처에 손소독제 등 방역물품을 비치하고 접수처 직원들이 마스크를 착용하는 등의 예방 조치를 하겠지만, 수험생들도 부득이 방문접수를 할 경우에는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 줄 것”을 당부했다.

    김동주 기자

    정의당 강원, 청년정책자문위원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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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김동주 기자] 4.15 총선을 앞두고 정의당 강원도당이 강원도 청년의 실정에 맞는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청년정치기획단 산하의 청년정책자문위원을 모집한다.

    당의 기존 정책에 대한 의견을 듣고 새로운 정책제안을 받는다. 강원도에서 청년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와 삶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시간도 갖는다.

    정의당 강원의 청년정책자문위원은 강원도에 거주하는 만 35세 이하 청년을 대상으로 하며, 오늘 6일부터 오는 16일까지 온라인(https://han.gl/GEGEG)을 통해 모집한다.

    한편, 청년정치기획단은 도내 청년의 활발한 정치참여를 위해 정의당 강원도당에서 설치한 기구이다. 청년인터뷰, 인권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김동주 기자

    신라 : 김유신, 위대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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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로왕의 자손이었다.
    비록 할아버지 김무력과 아버지 김서현이 왕족으로 편입되어 많은 군공을 세웠고,
    고위 관직에 등용되어 왕족을 아내로 맞이하였어도, 망국 가야 줄신인 그의 가문은 거기까지였다.
    영원한 아웃사이더로서, 허울뿐인 왕족 대접에 감지덕지하며, 싸우라면 싸우고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신세였는데,
    이 태생적 비주류 가문에서 김유신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태어났고,
    심상치 않은 성장 과정을 거쳐, 35세에 드디어 성명을 하게 되었다.
    진평왕 46년, 낭비성 싸움에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여, 신출귀몰한 무용을 뽐내며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이때부터 김유신은 신라를 대표하는 무장으로 성장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과 유대를 맺은 것이었다.
    젊고, 용맹하며, 분수를 아는 이 듬직한 경상도 청년은,
    불우한 왕족이라고 할 수 있는 진지왕의 장자 김용춘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고,
    또래인 자기 아들 김춘추와 교류하게 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김유신보다 몇 살 어릴 것으로 추정되는 김춘추는, 대부분의 젊은 애송이들이 그러하듯이,
    전쟁터에서 뛰어난 무용으로 강렬한 카리스마를 줄줄이 뿜어내던 영웅에게 매혹되었을 것이고,
    원조 비주류 김유신 또한 신 비주류라고 할 수 있는 진지왕의 손자에게 호감을 느꼈을 것이므로,
    두 젊은이는 서로 쉽게 의기투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동병상련의 동맹을 통해 김용춘은 비교적 단결력 높은 옛 가야세력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김유신은 주류에 편입될 수 있는 줄을 잡을 수 있었다.

    이 상생의 동맹은 진평왕 말기에 발생한 칠숙의 난에서 위력을 발휘하였고,
    덕분에 잠재적 불온세력으로 분류되어 자체 무력을 키울 수조차 없었던 김용춘 일파는 일약 핵심 친위세력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 힘으로는 정국을 지배할 수 없었고, 그나마도 직속이 아닌 김유신을 기반으로 하였기에,
    진평왕 사후 김용춘은,
    자신이 등극하면 바로 역적으로 전락하게 되는 진평왕 옹립파들의 불안도 다독일 겸,
    말도 안 되는 성골 이론을 내세우며, 만만한 자신의 처제(또는 처형)를 여왕으로 옹립하였다.
    이로써 김용춘은 자신에 대한 의구심을 지우며 권력 상층부에 진입하였고,
    여왕의 남편까지 되는 기염을 토하며 폐족 진지왕계를 다시 주류로 만들었는데,
    이 때 김유신은 토사구팽을 염려하였는지,
    김춘추에게 혼인으로 동맹의 격을 높일 것을 요구하였고,
    김춘추는, 김유신의 동생 문희를 전부터 좋아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따로 자파의 무력을 가지지 못한 입장이었으므로,
    기존의 동맹을 유지,강화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하였는지,
    이미 기혼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문희를 정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아무리 개판인 신라 왕족의 족보라고 해도 정부인을 둘씩이나 두는 것은 당시에도 드문 일이었는지,
    선덕여왕의 허락을 받기 위해 어설픈 연극까지 해야 했다고 하는데,
    어찌 되었건 이로써 김춘추와 김유신의 동맹은 더욱 단단해졌으며, 이는 곧 김춘추의 자산이 되었다.

    선덕여왕 9년 의자왕의 대공세에 요충지 대야성이 함락되었다.
    이때 대야성의 성주 김품석은 김춘추의 사위였으므로 아마도 낙하산 인사였을 것인데,
    이놈이 성주로서의 자질이 형편 없었는지 찌질한 짓을 하였고,
    결국 성을 잃고 자살하면서,
    저 혼자만 죽은 게 아니라 죄 없는 지 처자식까지 데리고 가는 막장 짓을 하였다.
    그리고 성을 점령한 백제 장군 윤충은,
    이미 시체가 되어 버린, 성주뿐만 아니라 김춘추의 딸과 외손주까지 모조리 효수하여,
    진흥왕에게 목이 잘렸던 성왕의 분풀이를 하였는데,
    김춘추가 죽은 딸과 손주들에 대해 얼마나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어떻게 슬퍼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대야성의 상실은,
    딸을 잃은 아비의 슬픔 따위를 위로하고 어쩌고 할 수 있는 한가한 상황이 아닌,
    신라의 존망과 관계되는 위기인 동시에,
    그 동안 김품석의 후견인 노릇을 한 정치인 김춘추의 위기였다.
    영리한 김춘추는 이 국가와 자신의 위기를 넘기 위하여, 고구려와의 협상이라는 카드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그 동안의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 및 대당 전선에 힘을 집중해야하는 고구려의 입장 등에 비추어, 상당히 실현 가능성이 있는 묘책이기는 하였으나,
    눌지왕의 독립이래,
    누대에 걸쳐 쌓인 원한 및 진흥왕의 영토확장에 따른 고구려의 분노 그리고 일관된 신라의 친당 정책 등으로 인해,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하였다.
    결국 나름 당대의 영웅이었던 연개소문은 김춘추의 현란한 외교적 수사에 넘어가지 않았고,
    되려 김춘추를 볼모처럼 취급하여 구금시켜 버렸다.
    이때 김유신은 고구려에 대해 위협도 서슴지 않는 강단을 보여주었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김춘추가 간신히 귀국한 후에도 내부의 책임론을 잠재웠을 뿐만 아니라,
    김춘추가 다시 전권대사가 되어 왜국으로 파견될 수 있게 하였다.
    왜국과의 협상도 소득이 없었으나, 이번에도 별다른 문책 없이 김춘추는 다시 당으로 건너 갔는데,
    이렇게 김춘추가 아무런 성과도 없이 천둥에 개 뛰듯이 돌아다닐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외교 말고는 살 길이 없었던 신라의 절박함 이외에도, 김유신이라는 든든한 무력이 있었다.

    김유신은 마지막 전성기를 맞은 백제와 여전한 대국 고구려의 침략을 동분서주 막아내며,
    신라의 구성으로 떠올랐고, 이러한 활약은 고스란히 김춘추의 보호막이 되었다.
    따라서 만일 김유신이 없었다면 김춘추는 애 저녁에 실각하여 목숨을 부지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신라도 망했을 것이다.
    선덕여왕 말년, 비담의 난을 계기로 정치권력은 김춘추와 김유신에게 집중되었으나,
    김춘추는 아직 진지왕계가 왕좌를 차지하기에는 이르다고 여겼는지,
    선덕여왕의 유언을 조작하여, 여왕의 사촌동생인 진덕여왕을 화백회의의 추대도 없이 옹립하였다.
    진덕여왕은 명분도, 기반도, 능력도 없는 그냥 여인이었으므로,
    폐족의 부활을 꺼리는 세력들을 정리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버는 용도로 쓰기에 적합하였을 것이다.
    김춘추의 뛰어난 정치 감각이 만들어낸 걸작이었다.

    진덕여왕기에 김유신은 대야성을 수복하고 실지를 회복하는 등 맹활약하며 대군벌로 성장하여,
    김춘추의 강력한 칼이 되어 주었고,
    여왕을 꺼리는 기본적인 입장 및 김춘추가 입조하고 있는 동안 보여주었던 눈물겨운 노력 덕분에,
    당태종 이세민이 또한 김춘추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힘을 실어 주었기에,
    이 시기 김춘추는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양이나 질에서, 실질적인 신라의 군주와 다름 없없다.

    진덕여왕은 고맙게도 8년이라는 짧은 재위기간을 마치고 자식도 없이 사망하였는데,
    화백회의는,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겁이 없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회의 중에 호랑이가 난입하자 맨손으로 꼬리를 잡아 패대기를 처버렸다는 전설의 호걸,
    상대등 알천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김유신은 강대한 무력으로 이를 취소시키고 김춘추를 옥좌로 밀어 올리는 괴력을 발휘하였으며,
    상대등이 되어 무열왕의 반대파들을 통제, 관리하였고, 매제인 무열왕의 사위까지 되어,
    정권의 굳건한 지지기반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무열왕은 이렇게 강력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국력을 총동원 하여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

    김유신은 무열왕이 59세를 일기로 사망한 후에도 여전히 기력이 왕성하여,
    조카이자 처남인 문무왕의 보호자로 활약하였으며, 숙원 사업인 통일전쟁을 지속해 나갔고,
    68세의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여,
    고구려의 포위 공격으로 다 죽어가던 소정방을 구원하면서, 고구려군을 1만 여명이나 죽이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평양성 공략전에는 노쇠하여 출전하지는 못하였으나,
    왕을 대신하여 내정을 맡았고,
    고구려 멸망 후 신라마저 삼키려는 당의 야욕을 분쇄하기 위해 나당 전쟁을 수행하다가,
    문무왕 13년 79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우리 역사 상 그 누구에 못지 않는 영광스러운 삶이었다.

    김유신과 김춘추,
    서로가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 가지고, 완벽한 협력을 이루었으며,
    신라에 의한 삼국 통일이라는, 불가능해 보였던 꿈을 실현시켰다.
    김유신이 없었다면 김춘추도 없었을 것이고, 신라의 삼국통일도 없었을 것이다.
    만주를 외세에 팔아넘긴 원흉으로 김춘추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둘의 일생은 완벽한 이인삼각이었으므로, 김춘추를 향한 비난의 반은 김유신의 몫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생애의 대부분을 경주에서 보낸 김유신 장군이,
    까닭은 알 수 없으나, 지금은 대관령 산신이 되어 각종 민원을 들고 찾아오는 민초들의 절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