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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4일 오전 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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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페이지 66

    신라 : 54대 경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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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승영, 신덕왕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917년 왕위에 올랐으나, 
    나라꼴은 박씨들이 다스리던 초기 신라 시절보다도 못하였다.

    대야성이 버텨주고 있었기에 나라를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왕명은 경주 인근에만 겨우 미칠 뿐이었고, 재정은 매우 궁핍하였으며 병력도 보잘 것 없는,
    초기 신생 도시국가 수준의 비참한 지경이었다.
    이 꼴 같지 않은 상황에서도, 김현승이 김씨의 복위를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골통은 어찌어찌 때려잡았으나 당연히 나라는 더 엉망이 되었다.
    현실 파악이 안 되는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신라가 망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해매고 있을 때 주변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918년 왕건이 궁예를 주살하며 고려건국하였고,
    집권 4년차인 920년에는 견훤이 대야성을 함락시켜 신라의 목숨 줄을 끊어 버렸다.
    이 후 견훤과 왕건은 안동과 합천 지역에서 지들끼리 치고받았는데,
    원주인인 신라는 안마당을 내주고 멀거니 구경만 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지경이 되니 신라는 누군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 동안 원한이 쌓일 대로 쌓인 견훤보다는 고려를 선택하였다.
    광개토대왕시기로 되돌아간 셈이다.
    5년에는 말갈족을 물리쳤다는데…얘들은 무슨 말갈일까?
    아무튼 과거 삼국시대 초창기의 완벽한 복원이라 할 수 있었다.
    7년에는 후당에 조공하였고, 조공 간 사신이 벼슬을 받기도 하였다.

    그 동안 반 독립적으로 할거 하고 있던 경상도 지역의 군소 세력들은 고려에 연이어 항복하였고,
    망조를 상징하듯 벽화의 개가 울고, 뜰로 튀어 나오고, 활 줄이 끊어지고…
    온갖 해괴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더 이상 신라가 재기할 방법은 없었다.

    이 양반은 924년 사망했는데,
    7년간의 재위였고 아들이 8명이나 있었는데도,
    애들이 나이가 어려 동생이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시대상황에서 오래 살아봐야 별 영화를 보기 어려웠을 것이니 큰 여한은 없었을 것이다.

    경명왕의 아들들은 왕위를 잇지는 못했지만, 밀양을 비롯한 우리나라 박씨들의 시조가 되었다.

    신라 : 53대 신덕왕, 박씨 왕조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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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경휘, 아들이 없었다는 아달라 이사금의 직계 후손이라 한다. 모계일 것이다.
    헌강왕의 사위였으므로 효공왕의 자형이고,
    여동생이 효공왕의 비였으므로 효공왕의 처남이 되기도 한다.
    효공왕은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고,
    선왕의 처남이자 자형의 신분이므로 왕위를 물려받지 못할 것은 없으나,
    그래도 성씨가 바뀌는 일이었으므로 평상시라면 어림없었을 것이다.
    당시 신라가 얼마나 정신없는 상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매제이자 처남인 효공왕의 뒤를 이어 912년 즉위하였는데,
    즉위하자마자 아버지를 추존하고, 아들을 왕태자로 삼는 등
    무려 728년 만에 복귀한 박씨 왕조의 정통성을 세웠다.
    얼마나 조상님들께 떳떳하고 자랑스러웠을까?
    그러나 이렇게 되찾은 신라는 예전처럼 활력에 넘치던 신라가 아니었다.

    자연 재해는 연이어 덮쳤고
    3년째인 914년에는 궁예가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연호를 바꾸는 등 북쪽에서 으르렁거렸으며,
    견훤도 예전의 백제처럼 신라를 부단히 괴롭혔다.
    4년에는 국가 주요하천인 참포에서 강물과 바닷물이 3일간이나 싸웠다는데,
    백두산 폭발로 인한 쓰나미가 아니었을까?
    5년에는 견훤이 또 대야성을 공격해왔으나 용케 막아내었고.
    이듬해인 917년에 사망하였다.

    박씨 중흥 시조의 치세치고는 너무나 초라하지만,
    어쩌랴, 당시 시대가 그러했던 것을.

    신라 : 52대 효공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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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요, 헌강왕의 서자이다.

    일찍이 헌강왕이 사냥 길에서 한 자색이 빼어난 여자를 만났는데,
    그 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헌강왕의 유일한 아들이 태어났다고 한다.
    사통의 결과이므로 헌강왕은 본부인의 눈치를 본 것 같으나,
    고모인 진성여왕이 인지하여 태자로 봉했고 왕위까지 물려 주었다.
    진성여왕이 말년에, 나라는 엉망이고, 몸에 병은 들고 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숨어 있는 어진 자에게 선위하였다….는데,
    이미 태자이니 숨어있는 자도 아니고, 불과 15살짜리가 어질면 얼마나 어질었겠는가?
    그냥 수사일 뿐이고, 다만 진성여왕 삼남매의 사이가 각별하였다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겠다.

    897년 고모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너무 어린 나이라 섭정을 받아야 했는데,
    엄혹한 시대 상황은 왕의 어린 사정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서,
    즉위 이듬해에 궁예가 한주와 삭주의 성을 대거 빼앗고, 송악군에 창업의 깃발을 꼽으면서 후삼국시대가 만개하기 시작하였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할 일은 해야 하기에 3년차에 박씨 처자에게 장가를 갔는데,
    왕이 장가를 가든, 누가 시집을 오든 천하는 자기 시간표대로 굴러가는지라,
    궁예가 전 주인 양길과 싸워 이겼고 그에 따라 주변 군현이 궁예에게 항복하였다.
    5년차인 901년 드디어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우면서,
    900년에 세워진 후백제와 더불어, 삼국시대를 완전히 재현하였다.

    후고구려는 옛날 고구려의 위용에는 한참 못 미쳤지만, 옛날처럼 신라를 압박했고,
    견훤의 후백제도 옛날 백제처럼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신라도 옛날처럼 대야성은 지켜내었고. 이에 자신감이 좀 생겼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이도 됐고 해서 친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20대 초반 젊은이의 의욕은 천하의 대세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해서,
    궁예는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백관을 설치하였으며, 패강진의 군현들을 복속시키는 등 나라의 틀을 잡아갔고,
    9년엔 철원으로 도읍을 옮긴 후 죽령 동북쪽의 공격을 시작으로 신라를 본격적으로 두들기기 시작하였는데,
    신라의 국력으로는 감히 맞서 싸울 수 없어, 그저 수비만 하라는 명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비참한 와중에도 자연 재해는 끊이지 않아, 거의 매년 가물었고, 혜성이 나타나는 가하면,
    시도 때도 없이 서리가 내리고, 우박에.. 대책이 없었다.
    신라야 밥을 먹든 죽을 먹든, 궁예와 견훤의 싸움은 점입가경을 달렸고,
    14년차인 910년에는 궁예가 왕건을 시켜 견훤의 나주성을 빼앗았다.

    이렇게 궁예와 견훤이 천하를 놓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동안, 원주인인 신라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  29살 먹은 왕이 할 수 있는 일은 더 더욱 없었다.
    결국 눈에 보이는 것이 여자요 술이었으니 향락으로 빠져들었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다.
    그 꼴을 보다 못한 대신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왕의 첩을 죽여 버리고,
    정신 좀 차리라고 야단을 친 모양이나,
    이미 망가진 심신은 화복되질 못하였고, 이듬해인 912년에 사망하였다.
    재위 기간은 15년, 향년 30세였다.

    효공왕 이후는 박씨가 왕위에 오르게 되어 박씨의 권토중래가 실현 되었는데,
    복귀가 너무 늦은 감이 있으나 그래도 완전히 밀려난 석씨에 비해 끊임없이 옥좌 주변에서 맴돌았던 박씨의 저력이 놀랍다.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김씨이긴 하나 견훤의 괴뢰 정부였으므로,
    효공왕이 원성왕계 왕통의 마지막이면서, 사실상 김씨의 마지막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 : 51대 진성여왕, 후삼국시대의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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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만, 경문왕의 막내딸로 오라버니들의 뒤를 이었는데,
    상당히 똑똑했던 모양이고, 중성적인 매력을 지닌 아가씨였던 듯하다.

    887년 갓 스물 정도의 나이에 옥좌에 앉았는데,
    왕 노릇이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는지, 섭정 전문 숙부, 각간 김위홍에게 섭정을 맡겼고,
    죄수를 사면하고 주군의 조세를 면제해 주었으며 황룡사에 백고좌를 베풀고 설법을 들었다.
    이듬해에는 김위홍과 대구화상에게 삼대목을 편찬하게 하였다.

    김위홍이 죽자 친정하였는데,
    친정만 하면 발생하는 반란은 이번에도 어김이 없어, 원종과 애노가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 해인 5년에는 북원 양길의 부하 궁예가 1백여 명의 기병으로 북원 동부락과 명주 관내를 습격하는 사건이 터졌고,
    6년인 서기 892년에는 견훤이 완산주를 점령하고 후백제라 자칭하니, 무주 동남의 군현이 모두 그에게 항복하였다.
    후삼국시대가 열린 것이다.

    나라는 손 쓸 수 없을 지경이 되어가고, 대책은 없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해외 유학파 최치원이 시무 10여 조를 올렸다.
    여왕은 기꺼이 받아들였으나, 내용이 육두품 중심의 유교적 개혁이 골자인지라, 당시의 기득권층인 진골 귀족들과 이해가 상충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의 반발을 꺾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을 갖춘 왕의 카리스마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이 철없는 아가씨에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시행되지 못하였고, 최치원은 도나 닦으러 갔다.
    해외 유학파들은 예나 지금이나 지가 아는 지식을 현실에 맞게 적용시키는 걸 잘 못하는 경향이 있다.

    탁상공론만 하는 서라벌의 높은 분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궁예는 스스로를 장군이라 칭하고 하슬라로 쳐들어 왔는데, 그 무리가 600에 달했고,
    이듬해에는 저족, 성천의 두 군을 취하고 철원 등 10여 군현을 공취하였다.
    다음해에는 서남쪽에서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는데 아마도 견훤의 후백제를 말하는 것 같다.
    이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신라는 서라벌 중심의 초창기 도시국가 수준으로 전락하였다.
    여왕은 철들만 하니까 병이 들었고, 큰 오라버니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30대 초반의 아까운 나이로 죽었다.
    897년의 일이었다.
    10년간 재위하는 동안, 나라가 망가져 가는 꼴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아야 했으며,
    음란하다는 악평이 무색하게 일점혈육도 남기질 못하였다.

    신라를 진성여왕이 망쳐 놓았다는 악평이 많으나,
    일대기를 훑어보면, 딱히 그녀만의 잘못이라고 비난할 만한 게 별로 없다.
    기록에는 여왕이 음탕하여 유부남인 숙부와 간통하였고,
    그 불륜에만 탐닉하여 나랏일은 신경 쓰질 않았다고 하는데,
    사실 이 정도는 신라 왕실에서 늘상 있었던 일이고,
    당시나 그 이후 고려 초까지의 성 풍속을 봐도 진성여왕이 심한 편은 아니었다.
    간신들의 무리가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상벌이 함부로 행해지고, 뇌물이 난무하고, 관직을 매수하는 등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간신의 무리라는 게 반대파의 입장에서 본 친위세력일 것이고,
    대대로 상시 반란에 시달렸으니, 죽지 않으려면 친위세력을 우대해야 했을 것이다.
    낭비가 심해서 국고가 텅텅 비었다고 하지만, 각 주군에서 조세가 올라오지 않아 궁핍에 시달렸고,
    토목공사 한 번 할 수가 없었는데, 뭔 낭비를 그리 심하게 하였을까?
    미소년들과 사랑에 빠져, 음란한 행위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비난하는 대자보까지 붙어 곤욕을 치렀다고도 하는데,
    선덕여왕은 다 늙은 여자가 형부 포함하여 남편만 3명을 들였는데,
    꽃다운 20대 초반의 처녀가 잘 생긴 총각들하고 연애 좀 한 게 그렇게 문제가 될까?
    향가 모음집이었다는 삼대목은 전해지진 않으나 업적이라고 할 만하고.
    도대체 뭔 나라를 어떻게 망쳤을까?
    이미 기울어진 상황에서, 나이 어린 여자가 왕이 되는 바람에,
    근근이 유지되던 왕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져버렸고,
    그 동안 쌓여 있던 모순들이 봇물처럼 터져버렸다는 것이 정당한 평가 일 것이다.

    최치원은 진성여왕이 사심이 없고 욕심이 적으며, 몸에 병이 많아 한가함을 좋아하고,
    말해야 할 때가 된 뒤에야 말을 하고, 한 번 뜻한 바는 빼앗지 못하는 굳은 의지를 지닌 인물로서,
    성군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안쓰러운 아가씨였다.

    신라 : 50대 정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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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황, 헌강왕의 아우이다.
    형님이 돌잡이 아들만 남기고 죽는 바람에 886년 20대 초반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다음 해에 황룡사에 백고좌를 마련하고 강의를 듣는 등 뭔가 시작해보려 한 것 같으나,
    골품 귀족들의 반항은 여지없어서, 한주에서 이찬 김 요가 반란을 일으켰다.
    경주에서 꽤 먼 지역이었으나, 군대를 파견하여 김 요의 목을 잘라버렸다.
    아직 신라는 살아있었다.
    하지만 바로 병이 들어 여동생에게 왕위를 넘기고 887년 사망하였다.
    재위는 딱 1년이었다.

    일찍 죽은 것도 문제지만 여동생에게 왕위를 넘긴 것은 더 문제였다.

    신라 : 49대 헌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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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정, 30대 초반에 사망한 경문왕의 큰아들로, 875년 10대 초반의 나이로 즉위했다.
    어린 나이였으므로 숙부 김위홍이 섭정하였고, 왕은 독서나 하며 지냈다고 한다.

    이듬해에 황룡사에 백고좌를 설치하여 강의 및 토론을 하게 하였고,
    왕도 그 강의를 들었는데, 매우 총명하여 한 번 들으면 바로 알았다고 한다. 천재 소년이었다.
    3년에 난세 종결자 왕건이 송악에서 태어났다.
    4년에 당의 책봉을 받았고 일본의 사신도 내왕하며 분위기 좋았는데,
    당에서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천하가 난세로 몸살을 앓기 시작한 것이다.

    5년에 친정을 시작하여, 국학에 나가가 강의를 들었으며 지방을 순행하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하여 일길찬 신홍의 목을 잘랐고,
    이게 자극이 되었는지 연말에 군대를 사열하고, 사냥을 실시하였다.
    6년에는 좀 안정이 되었는지 월상루에 올라 시중 민중의 아첨을 들었다.
    백성들이 기와로 지붕을 덮고, 숯으로 밥을 지을 정도로 태평성대라는 말이 이때 나온 말이나,
    나라 전체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경주 주변의 귀족들이 그렇게 산다는 말일 것이다.
    어쨌든 백성들도 기아에 허덕이지는 않았고, 오랜만에 평온했던 시기였다.
    왕이 이 아첨 소리를 듣고 즐거워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리 대단한 천재는 아니었나 보다.

    여세를 몰아 이듬해에는 잔치를 베풀었고 일본으로 부터 선물을 듬뿍 받았다.
    그 다음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고,
    11년에 최치원이 귀국하였고, 당에 사신을 보내 황소의 난이 진압된 것을 축하하였다.
    그리고 재위 12년 차인 886년 20대 초반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원성왕의 자손들은 너무 일찍 죽는다.

    이 시기에 처용가가 만들어졌는데,
    처용이 아라비아 상인 출신이라는 것으로 보아, 국제 교역이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매년 자연재해가 덮치니, 먹고 살려면 무역이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신라 : 48대 경문왕,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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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응렴, 자살한 희강왕의 손자이다.
    아버지 김계명은 문성왕 시기에 정권의 실세였는데,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다 늙은 헌안왕에게 왕위를 넘기라고 문성왕을 협박했다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뭐가 되었든 경문왕은 861년 15세 ( 또는 19세 )에 즉위하였고 상대등 김 안이 섭정하였다.
    김 안은 문성왕의 아들로 4년 전에는 어리다 하여 왕위도 물려받지 못했는데, 그 새 성장하여 상대등이 되었고 섭정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 것만이 아니다.
    헌안왕은 김균정의 아들이고 김계명은 희강왕의 아들이므로 서로 원수 사이인데,
    아무리 적의 적은 친구라지만 김계명이 헌안왕을 도왔다는 것도 이해가 쉽지 않고,
    헌안왕이 합당한 계승권자인 문성왕의 아들을 제쳐 놓고,
    왕위를 원수 집안 출신인 계명의 아들에게 물려주었다는 것도 이상하다.
    하지만 가장 이상한 것은 왕위를 빼앗긴 꼴이 된 김 안이 경문왕의 섭정을 했다는 것이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러한 일련의 진행들은 당시 정치의 난맥상을 압축적으로 나타낸다 하겠다.

    이듬해에는 섭정이 김정으로 바뀌었고 신궁에 제사 지내었다.
    이 또한 뭔가 복잡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3년에 국학에 행차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그 동안 눈치만 봤는데 이제 자신감이 좀 생긴 듯하고.
    4년에는 감은사에 행차하였고 일본에서 사신이 왔다는 것으로 보아,
    그 동안 잠잠하던 왜구들이 난리를 치기 시작했나 보다.
    5년에는 당의 책봉을 받았고 친정을 시작하였다.
    6년에 황룡사에 행차하고 백관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등 본격적인 왕권강화에 나선 듯하나,
    귀족들의 저항도 본격화되어, 이찬 윤흥 형제가 모반하다 발각되어 멸족되는 등 뒤숭숭하였다.
    다음 해에는 임해전을 중수하는 등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역병에 홍수에 기근까지, 되는 일이 없었다.
    8년에도 정신 없는 와중에 귀족들의 반란이 또 일어나 이찬 김예와 김현을 처형하였다.
    9년에는 왕자를 보내 당에 조공하였고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 정상적인 왕노릇을 하였으나.
    10년에 지진, 홍수, 역병에, 왕비까지 죽는 불상사가 연이어 일어났다.
    12년에는 새 출발을 결심했는지, 신궁에 제사를 지냈는데,
    지진에 기아에….각지에 사자를 파견하고 구휼미를 풀어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14년에 정부 조직을 개편하고 당과의 교류를 예전처럼 활성화시키는 등 분위기 쇄신을 해보려 했으나,
    귀족들은 여전하여, 이찬 근종이 궁궐까지 쳐들어왔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근위병으로 반란군을 때려잡고 근종을 거열형에 처했다.
    이 해에 최치원이 당에서 급제했다.
    15년차인 875년 혜성이 나타나고, 용이 출몰하더니 왕이 죽었다.
    향년 30세 ( 또는 34세). 근친결혼의 부작용인지 아니면 다들 암살을 당하는 것인지, 
    중대 이후 신라왕들의 명이 왜 이리 짧은지 알 수가 없다.

    자연재해와 반란이 연속되어 마치 문성왕기를 보는 것 같으나,
    다른 점은 반란을 일망타진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외교도 활성화 되어 당과의 교류가 이전 전성기 시절처럼 왕성하였고,
    일본과도 교류도 재개된 듯하다. 강해진 왕권을 시사한다 하겠다.

    이 양반은 설화가 많은데,
    제일 유명한 것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의 귀` 설화일 것이다.
    이 설화는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여러가지 버전이 있는데,
    기본 플롯은 동일하고 결말 부분에서만 차이가 난다.
    다른 나라에서는 임금이 깨달음을 얻는 경우도 있으나 경문왕은 근심하다 죽는데,
    이 설화를 왕이 뱀과 함께 잔다는 이야기와 연결시켜 생각해 보면,
    경문왕이 주변을 친위 세력에 둘러 싸고 골품 귀족들과 대립하였으므로,
    귀족들이, 반감 내지는 비아냥을 이야기에 담아 그러한 결말을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각각 순서대로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이 되었다.
    그리고 장보고의 딸과 통정하여 궁예를 낳았다는 설도 있는데,
    사실이라면 장보고는 죽고 난 다음에 외척의 꿈을 이룬 셈이나,
    궁예의 출신이 워낙 불확실하여 완전히 믿기는 힘들다.

    어쨌든 경문왕 치세 동안 궁예가 태어난 것은 확실한 것 같고, 견훤도 이 시기에 태어났다고 하니, 후삼국 시대가 멀지 않았다.

    신라 : 47대 헌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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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의정, 김균정의 아들로 선왕 문성왕의 숙부이다.

    아버지 균정과 김명이 권력다툼을 벌일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는 바람에 정쟁에 휘말리지 않았고. 병부령을 거쳐 상대등으로 임명되는 등 승승장구했으며, 문성왕의 유조를 받아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는 문성왕이 병은 깊은데 아들은 너무 어리고, 나라 사정도 안 좋고 해서 아들도 없는 다 늙은 숙부에게 나라를 맡겼다는 이야기인데….
    권력의 속성 상 아무래도 믿기 힘들고.
    따라서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 헌안왕과 경문왕의 아버지인 김계명의 협박에 의해 문성왕이 어쩔 수 없이 헌안왕에게 양위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깊은 속 사정이야 당사자들만 알 것이고.

    어쨌든 조카의 뒤를 이어 857년 왕위에 올라, 이듬해에 신궁에 제사 지냈고.
    3년차에는 기근을 구제하였으며,
    4년에 계명의 아들인 응렴을 사위로 삼았고, 병이 들어 다음해에 사망하였다.

    재위 기간도 짧고 뭐 한 게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양반은 아무래도 다음 대 경문왕으로 넘어가기 위한 과도기적인 왕이었던 것 같다.

    슬하의 딸 둘을 모두 경문왕에게 시집보냈다.

    신라 : 해상왕 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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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은 궁복 또는 궁파. 이순신 급의 민족 영웅으로,
    뭐 하나 시원한 게 없는 신라 하대에서 웅비하는 민족 기상을 보여준 위인이다.

    장보고의 출신은 불분명한데,
    아마도 전라도 해안가에서 목동노릇이나 하며 싸움질 잘하던 젊은이였을 것이다.
    이 젊은 친구가 경직화된 골품제도에 절망했는지 아니면 뭔 사고를 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친구 정념과 함께 신라를 떠나 당나라의 하급 군관이 되었는데,
    뭔 일이 있었는지 군관질을 때려치고 장사를 시작했고, 수완이 있었는지 제법 성공을 거두었더란다.

    장사에 재미를 붙이며 그냥 저냥 살던 중 해적들에게 잡혀온 신라인들이 눈에 들어왔고,
    이것이 그의 민족의식에 불을 붙였는지 아니면 다른 사업 아이템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으나,
    잘 되는 장사마저 때려치고 귀국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귀국한 장보고는 평범한 양민들이 못된 해적들 때문에 노예가 되는 실태를 흥덕왕에게 고발하였는데, 헌덕왕기에 망가진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흥덕왕은,
    이에 분기탱천…까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1만의 군사로 완도에 청해진을 세우는데 동의하였고.
    청해진 대사로 임명된 장보고는 당초의 목표대로 해적퇴치에 힘을 기울였으며, 곧 서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는데,
    그는 손에 넣은 해상권을 이용하여 당과 일본은 물론 남방, 서역 등 손이 닿는 여러 나라와 무역을 하여 거만의 부를 쌓아올렸으며, 바다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완전히 자리를 잡은 장보고는 이렇게 손에 넣은 부와 힘을, 주색잡기나 하며 자신을 위해 탕진….한 것이 아니라,
    신라 출신 노예들을 사들이거나 주인에게서 되돌려 받아 해방시켰고, 빈민들을 구제하였으며,
    신분에 관계없이 인재를 널리 받아들였고, 실력에 따라 대우하여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하였다.
    8세기 이래 왕성해진 신라인의 해상활동 능력을 조직화하여 적극 활용한 유능한 CEO였던 셈이다.
    또한 산동 주변에 모여 살며 신라방을 형성한 신라 출신 이민자들에 대한 지원도 아끼질 않아,
    법화원이라는 큰 절을 지어 신라인들에게 제공하기도 하였다.
    가히 해상왕이라 불릴만 하다.

    이 애국적이고, 칼 잘 쓰던 상인이 거목으로 성장하였을 때, 
    왕권 다툼에서 진 김우징이 망명해 오는 정치 바람이 불었고, 드디어 중앙정계로 진출할 기회를 잡게 되었는데,
    장보고는 곤경에 빠진 왕족을 돕는 대가로 왕가와 사돈을 맺기로 하여, 미래의 외척까지 꿈꾸게 되었다.
    장보고는 죽마고우 정념과 함께 군사 5000을 이끌고 경주로 향해 김 우징을 왕으로 만들었고,
    왕은 감의군사의 직책과 함께 식읍 2,000호를 하사하여 그의 공로에 보답하였으므로,
    이제 외척만 되면 완벽하였는데,
    그 고생을 하며 어렵게 왕이 된 신무왕이 6개월 만에 허무하게 죽는 바람에 외척의 꿈은 연기 되었다.

    신무왕의 뒤를 이은 문성왕은 즉위하자마자,
    장보고를 진해장군에 임명하는 등 대를 이은 신뢰를 보여주었으므로,
    장보고도 일본에 무역 사절을 파견하고, 당에 견당매물사를 보내어 삼각무역을 실시하는 등 하던 일을 열심히 하였다.
    그렇게 2–3년이 흘러, 
    문성왕이 아버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보고의 딸을 차비로 맞으려 하였는데,
    대신들이 갖가지 이유를 들며 결사반대하자, 골품 귀족들의 압력을 견디기 힘들었던 문성왕은 결국 혼사를 없던 일로 하였고,
    외척 장보고는 자동으로 물건너 가버렸다.

    이에 분노한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왕은 장보고의 부하인 염장을 꾀어 암살하게 했다고 하는데,
    이설로는, 그의 거대한 세력을 두려워한 귀족들이 암살하였고,
    이에 반발한 장보고의 부하 이창진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염장이 토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것이 진실이든,
    장보고가 청해진에 거대한 해상세력을 만들고 바다를 지배했던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사실만은
    변함없을 것이다.
    장보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청해진은 851년 정부에 의해 해산되었고,
    주민들은 벽골군으로 소개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해상왕이라고 불린 유일한 인물이었다.
    현재 일본 신사에 모셔져있는 적산대명신과 신라대명신은 장보고를 신격화한 것이라 한다.

    신라 : 46대 문성왕, 장보고를 살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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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경응,
    고생 끝에 왕위에 올랐으나, 6개월 만에, 허무하게 죽은 아버지 신무왕의 뒤를 이었다.

    839년 왕위에 오르자 마자, 장보고에게 장군직을 하사하였다.
    이듬해에는 당문종이, 억류하고 있던 국학생을 포함한 신라인 105명을 추방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뭔 사고를 쳤는지는 모르겠으나, 100명이 넘게 억류되어 있었던 것을 보면,
    중앙에서 피비린내 나는 왕권 다툼이 벌어지건 말건,
    민초들은 먹고 살기 위해 험한 바다를 건너 무역에 종사했었다는 것과,
    당시 당과 신라의 교류가 활발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 놈들이 이들을 죽이지 않고 추방한 것을 보면, 신라의 위상 또한 높았다는 것도 알 수 있고,
    아무튼 민초들의 이러한 활동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국 국가를 먹여 살리는 힘들 중의 하나가 되었으므로,
    이것이 가능할 수 있게 한 장보고의 청해진은 한낱 정쟁의 도구가 아니라,
    민초들의 삶과 국가를 지키는 파수꾼이기도 했다.

    반면에 백성들의 집에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관심이 없던 골품 귀족들은 권력 싸움에 영일이 없어서 문성왕 3년, 홍필의 반란 모의가 있었다.
    반란의 시대의 개막이었다.
    조강지처 박씨는 어찌되었는지 모르나, 4년에 이찬 김위흔의 딸을 왕비로 삼았는데,
    사돈 약속을 지키라는 장보고의 항의를 받았다.
    그래서 이번엔 장보고를 달래기 위해 장보고의 딸을 차비로 삼으려했으나,
    골품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에 열 받은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진압하지 않고 염장을 시켜 장보고를 암살하여, 돈줄인 청해진을 유지시켰다.
    군사를 동원하여 제대로 붙었으면 어찌되었을지는 모르나,
    비열한 방법으로 장보고를 죽이는 바람에,
    반 독립적인 청해진의 거대 해상 세력과 원한을 맺게 되었고, 이후 두고 두고 정권의 부담이 되었다.
    재위 7년째의 일이었다.

    나라야 산으로 가든 바다로 가든, 골품귀족들의 반란 러시는 이어져,
    이듬해엔 이찬 양순이 모반하였고,
    11년엔 이찬 김식이 반란의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13년엔 용단을 내려,
    징그럽게 말 안 듣는 청해진을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속은 시원했을지 모르나 이제 중계무역은 누가 한다는 말인가?
    재위 19년째인 857년, 숙부 김 의정에게 왕위를 넘기고 왕 노릇을 마감하였다.
    반란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왕위 다툼으로 인한 혼란과 비극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문성왕이었으므로,
    왕권 강화만이 나라를 안정시키는 열쇠가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땅에 떨어진 왕의 권위와 비대해질 때로 비대해진 골품 귀족세력들 때문에,
    왕권강화는커녕 왕의 자리를 지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대의 은인이며 현재의 친위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장보고는,
    문성왕의 든든한 배후세력이었고,
    청해진의 중계무역은,
    선대와 마찬가지로 자연재해와 반란에 시달렸던 문성왕에게 막대한 도움을 주는 돈줄이었을 것이다.
    문성왕이 장보고를 잘 달래어 그 세력을 온전히 흡수하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더라면,
    국가를 환골탈태 시킨 중흥군주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나, 
    골품귀족들에게 굴복하여 구원의 동아줄로 목을 매어 버린 듯하여 안타깝다.

    신라 : 45대 신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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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우징, 김균정의 아들로,
    즉위 전 여러 차례 시중자리에 오른 정권의 실세였으나,
    상대등이었던 아버지가 조카와 왕위쟁탈전을 벌이다 전사하자,
    김주원의 자손 김양과 함께 청해진으로 달아났다.

    장보고의 후원과 김양의 맹활약으로,
    민애왕을 죽이고 839년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의 복수도 하고 왕까지 되었으니 흐뭇하였을 것이다.
    장보고에게 벼슬을 내리는 등 공신들을 치하하였고,
    그 동안 끊겼던 당과의 외교관계를 복원하는 등 의욕적으로 왕노릇을 시작하였으나,
    바로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
    재위기간은 6개월 남짓이었고, 사인은 종기였다고 한다.
    허무하다 아니할 수 없다.

    장보고에게 피신했을 때 장보고의 딸을 태자비로 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하는데,
    너무 빨리 죽는 바람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장보고의 명도 단축하고 말았다.

    왜 신무라는 시호를 붙였을까?

    신라 : 44대 민애왕, 살해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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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명, 흥덕왕 10년 김균정이 상대등으로 취임할 때 균정의 아들 우징의 후임으로 18세의 나이에 시중이 되었다.
    흥덕왕이 유력한 두 파의 세력균형을 위하여 나름 배려한 모양이나,
    별 효과는 없었는지, 흥덕왕의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격렬한 전투가 발생했고,
    김 명은 아찬 김이홍과 함께 균정을 주살하고 제륭을 옹립하였다.
    이 때 균정의 아들 우징은 김양과 함께 청해진으로 도망가 장보고에게 의탁하였다.
    희강왕의 즉위 후, 상대등이 되었고,
    김우징이 장보고의 비호 아래 칼을 갈고 있는 상황에서,
    혁명동지 김이홍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희강왕을 자결하게 하였다.

    838년 그토록 원하던 왕위에 올랐는데, 득의의 순간은 잠깐이었다.
    김우징이 드디어 칼을 뽑아 평동장군 김양을 앞세우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김양은 파죽지세로 김민주의 정부군을 궤멸시키며 전라도 일대를 휩쓸었고 이듬해에 대구까지 진출하였다.
    민애왕은 식겁하여 금군을 포함한 10만 규모의 토벌군을 파견하였으나 대패하였고,
    이어 서라벌까지 함락되었다.
    민애왕은 별궁으로 도망가 꿩 새끼처럼 숨었으나 김양에게 발각되어 처형당하였고.
    839년의 일이었다.
    이 양반도 재위 기간은 1년 정도.

    민애왕은 누이가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희강왕의 비였고, 나머지 하나는 김우징 즉 신무왕의 비였다 한다.
    이기 머하는 짓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