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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3일 오후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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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페이지 65

    발해 : 혼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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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년간 재위하며 발해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문왕이 붕어한 후, 약 25년간 6명의 왕이 교체되는 혼란기가 이어진다.
    강왕의 15년을 빼면, 10년간 5명의 왕이 교체될 정도로 왕들이 단명하여, 대조영의 직계가 절손되었는데,
    현군 문왕의 자손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
    기록이 별로 없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잘 모른다.

    제 4 대 대원의
    문왕의 뒤는, 태자가 명이 짧아 아버지보다 일찍 죽는 바람에, 사촌 동생인 대원의가 이었는데, 1년도 못 채우고 쫓겨났다.
    시기심이 많고 포악하여 신하들에게 시해되었다는데,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손자도 있었고 조카도 많은데 하필 사촌동생이 뒤를 이은 것도 이상하고,
    폐위의 이유가 시기심이 많고 포악하다는 것도 석연치가 않다.
    안 그런 왕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기록이 부실하여 속사정은 모르나 아마도 엄청난 권력 투쟁이 있었을 것이다.
    폐위되었으므로 시호도 없다.

    제 5 대 성왕
    이름은 대화여, 명이 짧아서 왕이 되지 못한 태자 대굉림의 아들이었는데,
    아버지를 닮았는지, 이 양반도 명이 짧아 왕 노릇을 불과 반년도 못하고 병사하였다.
    연호를 중흥으로 고치고, 수도를 동경용원부에서 이전의 도읍지였던 상경용천부로 천도한 것이
    치적이라면 치적이다.

    제 6 대 강왕
    성왕의 뒤는, 문왕의 막내아들인 숙부 대숭린이 즉위하였다.
    골골하던 성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다가 왕의 자리를 꿰찬 것인데,
    숙부가 조카의 뒤를 이었으니 이 또한 상당한 무리이다.
    수양대군이 생각나기도 하는데,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15년 간 재위하였다고 하므로 왕실 안정에는 기여하였을 것이다.

    제 7 대 정왕
    강왕이 죽자 그 아들 대원유가 즉위하였다.
    문왕 이래의 정책을 계승하여 당,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구축했다고 하는데,
    즉위 3년 만에 병사하였다.

    제 8 대 희왕
    정왕이 병으로 죽자, 동생 대언의가 정권을 잡아 즉위하였다.
    정왕에게 아들이 있는데 형제 상속을 한 것이다.
    부드럽게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자리가 편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교를 융성시켰다 하는데 종교에 귀의해야 할 만큼 번뇌가 많았던 것은 아닐까?

    제 9 대 간왕
    희왕은 5년 여를 재위하다 병사하고 동생인 대명충이 즉위하였다.
    희왕도 아들이 있는데 또 동생이 왕이 된 것이다.
    그리고 1년도 못 채우고 병사하였다. 이게 병사일까?

    강왕이 조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후, 그의 세 아들이 모두 왕이 되었는데, 모두 얼마 못가 병사하였다. 그리고 대조영의 직계는 절손되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현상이 왜 발생하였을까?
    모든 창업국가의 병폐인 개국공신을 비롯한 왕족, 귀족들의 세력이 너무 비대해졌던 것은 아닐까?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문왕 사후 발해 상층부의 권력다툼이 치열하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발해 : 3대 문왕, 나라를 반석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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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우자니 겁나고, 복속되기는 싫고, 살기 위해서는 교류가 꼭 필요하고.
    우리 민족 사 내내, 사람 심정 복잡하게 만드는 대륙의 제국.
    이 염병할 놈들은 문왕에게도 주적이자 최고의 파트너였는데,
    대단한 아버지 무왕 덕분에,
    당시 대륙의 주인이었던 당나라와 굴종이 아닌 국익 우선의 평화 관계를 정착시킬 수 있었던 것이,
    문왕의 행운이었다.

    대 흠무, 무왕의 3남으로, 737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문왕의 대당 정책은 ‘개입은 최소로 하되 실리는 열심히 챙기자’로서,
    안녹산의 난이 발생했을 때에는 현종의 원군 요청을 거절하였고,
    고구려 유민출신의 이정기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반군의 원군 요청을 거절하고말만 팔았다.

    당과는 황제든 반란군이든, 전쟁으로 엮이는 것을 극력 회피하였으나,
    주변의 말갈 부족을 정벌하는 일은 소홀히 하지 않아, 흑수말갈을 제외한 나머지 말갈 대부분을 복속시켰다.
    이 정도 외치만 해도 빼어난 업적이지만 내치는 더 훌륭하였다.
    당의 문화나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3성 6부의 정부조직을 갖추었고, 주, 부, 군, 현, 제를 도입하였는데, 그 명칭이나 기능은 당과 많이 달랐다. 소위 주체적 수용을 한 것이다.

    742년 무렵 중경현덕부를 건설하고 수도를 옮겼는데, 이 동네는 철과 베, 쌀 생산이 많은 곳이었다고 한다.
    755년 무렵엔 북쪽에 위치한 말갈족 등을 보다 적극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수도를 상경용천부로 옮겼고,
    785년 무렵엔 해양교통의 요지 동경용원부로 옮겼다.
    남들은 한 번도 힘들어 하는 천도를 수시로 한 문왕, 아무리 발해의 특수성 덕분이었다 해도 대단한 능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 외, 남경남해부, 서경압록부까지 설치하며 5경을 채워, 넓은 영역에 대한 보다 효율적인 통치와 국토의 균형 발전을 꾀하였다.
    5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수도는 상경이었다. 

    문왕은 발해의 정체성에도 관심을 기울여 국호를 고려로 바꾸었고, 고구려 왕들처럼 자신을 천손이라고 하였으며, 일본을 사위 국가로 표현하여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천손이란 천하의 주인이라는 뜻이므로, 발해의 국력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일본과는 군사적인 관계에서 경제적인 관계로 전환하였고,
    연합하여 신라를 치려던 계획도 중지하였다.
    신라와도 관계를 개선하여 동경용원부에서 남경남해부를 거쳐 신라의 국경에 이르는 길에 39개 역을 설치하고 신라도라 불렀으며, 국경에 교섭 창구의 기능을 하는 탄항관문을 설치하였다.

    무왕이 좌충우돌하며 발해를 확장시키는 데 주력한 반면,
    문왕은 제도를 정비하였고, 국토를 개발했으며, 외교에서 국격을 높이는 등,
    내치 및 외교에 주력하여 발해의 완성도를 높인, 화려하진 않아도 가장 중요한 일을 한 임금이었다.
    자식들보다 오래 살며,
    70세를 넘겨서까지 국가의 기반을 다지고, 안정적인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던 현군이었다.

    문왕 덕분에, 이어진 후계 왕들의 혼란기에도 발해가 유지될 수 있었다.
    유교와 불교가 고루 융성하였다고 한다.

    발해 : 2대 무왕, 위대한 정복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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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 무예, 고왕의 장남으로 719년 즉위하였다.

    고구려의 대무신왕과 비슷한 역할을 한 정복 군주로서,
    즉위 후 세력을 본격적으로 확장하기 시작하여 옛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유목의 땅에서 영토 확장은 성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부족을 복속시키고 약탈하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발해의 확장에 주변의 부족들은 비명을 질렀을 것이고, 당나라를 긴장시켰을 것이다.
    당나라는 중간에 끼어있는 거란족 때문에 발해에 대한 직접 공격이 어렵자,
    발해 후방의 상당한 세력을 지닌 흑수 말갈을 이용하여,
    전가의 보도, 이이제이를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흑수말갈, 흑수 지역에 사는 말갈.
    얘들은 또 무슨 말갈일까?

    말갈은 일종의 비칭인데,
    우리가 한반도 북쪽의 종족들을 통칭하여 오랑캐라고 부르는 것처럼,
    중국 놈들이 지들 동북방에 사는 족속들을 싸잡아서 부르던 호칭이었다.
    흑수말갈은 발해의 동북방, 흑룡강 쪽에서 살아가던 반농반목의 족속들이었는데,
    이들이 나중에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여진으로 이름을 바꾸고 만주의 패자까지 되지만,
    이 당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단지 지역에서 나름의 세력을 가지고, 발해가 확장하는데 상당한 저항세력으로 기능하던 집단이었다.
    당이 발해를 견제하기 위한 이이제이의 도구로 쓰기에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배후 적은 항상 신경 쓰이기 마련이고, 개국 초창기의 발해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었으므로,
    무왕은 동생 대문예에게 흑수말갈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황당하게도 대문예는 형의 명령을 거부하고 당으로 도망가버렸다.
    왜 그랬을까?
    대문예는 어려서부터 당에 숙위하였으므로 친당파였을 가능성이 크므로, 당의 정책에 반하는 행동에 반대했을 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반역까지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무리가 있는데,
    기록이 없어 조심스럽긴 하나,
    당나라놈들이 무왕을 견제하기 위해 대문예와 무슨 밀약을 맺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뭐가 어찌 되었든, 무왕은 동생의 배신까지 맛보게 만든 흑수말갈을 가만두지 않았다.
    외삼촌 임아를 보내 기어이 복속시켰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대문예의 처벌을 요구하는 한편 당과 대립하는 거란을 지원하였다.
    당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한동안 수세에 몰리던 당은,
    거란을 완파한 후 자신감을 회복하여 다시 고자세로 나오게 되었는데,
    이러한 정세변화에 자극을 받았는지, 흑수말갈은 다시 당과 연합하여 발해에 대항하였다.
    이에 무왕은 소극적인 방어 대신 적극적인 공격을 택하였고,
    장문휴를 보내, 당이 공격해 올 경우 전진기지가 될 등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장문휴.
    해적들을 끌고 갔다는데, 이 겁 없는 해적들은 등주 성을 함락시키고 자사까지 죽인 후 귀환하였다.
    약탈도 좀 했을 것이다.

    무왕은 해상공격만 한 것이 아니라,
    군대를 파견하여 거란, 돌궐과 연합군을 구성하였으며, 당군을 크게 격파하기도 하였다.
    이에 당황한 당나라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그 대가가 대동강 이남을 신라 영역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무열왕 김춘추와 당태종 이세민 간에 맺었던 영토분할 약정이 이때 비로소 이행된 셈인데,
    이걸 대가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신라는 병사를 5만이나 파견하며 당의 요구에 응하였다.
    그런데 겨울이라 동사하는 병사가 속출하여, 공격해 보지도 못하고 철군하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의지가 없었을 것이다.
    발해가 훌륭한 방파제 역할을 해주는 게 오히려 든든하고 고마운데, 뭐 하러 실익도 없는 일에 목숨을 걸겠는가?
    그저 영토에 대한 당의 공식적인 승인을 받고, 발해에게도 대동강 이남은 아예 생각도 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대군을 동원하여 실력 과시만을 한 것일 것이다.
    신라는 국경지대에 장성을 쌓는 것으로 마무리 하였다.

    신라야 뭔 짓을 하건, 무왕은 그 이후에도 하북성을 공격하는 등 공세를 이어갔고,
    흑수말갈은 그 기세에 눌려 찍소리도 못하였다.
    또한 등주를 공격한 장문휴를 방어한 당의 사령관이, 배신한 동생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객단을 파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당 현종.
    개원의 치를 이룩한 위대한 현군의 표상이지만, 발해라면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의 최대의 정적은 무왕이 아니었을까?

    734년에 접어들면서 정세가 또 한 번 변하였다.
    그동안 방파제 노릇을 하던 거란이 완전히 망해 버렸을 뿐만 아니라, 든든한 동맹인 돌궐도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무왕은 더 이상의 공격은 무리라고 판단하였고, 당과 관계개선을 모색하였는데,
    발해에 신물나게 당했던 당은 결국 이에 화답하여, 평화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정치적 감각이 탁월하였던 임금이다.

    만주 지역의 실력자 흑수말갈을 초장에 효과적으로 제압하여, 지역의 패자로 자리매김하였고 영토를 크게 넓혔으며,
    전쟁과 평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국제적 위상을 한껏 드높였다.
    위대한 군주였다.

    연호는 인안, 시호는 무왕, 능호는 진릉이다.

    발해 : 시조 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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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 조영.
    발해의 창업군주로서,
    우리 역사에 고구려, 고조선을 제공하고 만주를 영원한 정신적 영토로 만들어 준,
    고마운 민족의 영웅이나, 그 흔한 탄생설화는 고사하고 출신조차 모호한 신비의 인물이다.

    중국 기록에는 발해말갈, 속말말갈, 고구려 별종 등으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고구려의 구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믿고 싶으나 그러기엔 나이가 좀 걸린다.
    출생연도는 모르고 사망연도만 719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구려 구장이라면, 고구려 멸망 후 51년을 더 살았다는 뜻이다.
    도대체 몇 살에 장군이 되었을까?
    그 시대 평균 연령을 생각해 보면, 그냥 고구려 구장의 아들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인데,
    그럼 아버지에서 걸린다.
    아버지는 걸걸중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걸걸중상은 고구려의 구장은 고사하고 아들보다 알려진 게 더 없다. 대씨도 아니고.
    구당서에는 아예 기록조차 존재하지도 않아서, 가공의 인물이라는 의심까지 받는 사람인데,
    아무튼 걸걸중상에 대해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고구려의 별종으로 영주지방에 살던 중, 이진충이 난을 일으키자,
    걸사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요하를 건너, 요루하를 경계로 성을 쌓아 지켰고,
    측천무후가 진국공에 봉해 회유하였다.
    그런데 걸걸중상이 바로 병사하는 바람에 유야무야 되었고, 아들 대조영이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되었다` 정도이다.
    나중에 대조영이 나라를 세운 후, 처음에 국호를 진국으로 정한 것으로 보아,
    걸걸중상이 아버지가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정보가 너무 없다.
    걸걸중상과 함께 걸사비우도 허국공에 봉해졌으나 거부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고구려 유민은 강경 평민파와, 온건 귀족파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걸걸중상은 병사하였고 걸사비우는 거부하였으므로 측천무후는 진압을 결심하였고,
    한바탕 전투가 불가피해졌는데,
    이해고와의 일차 전투까지 고구려 유민의 주도권은,
    온건파를 물려받은 젊은 대조영 보다는 생존한 평민 강경파 걸사비우에게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걸사비우가 싸움에 대패하며 전사하자,
    대조영이 패잔병들을 수습하였고 유일한 지도자로 떠오르게 되었는데,
    다행히 천문령 전투에서 이해고를 꺾을 수 있었다.
    대조영이 용맹하고 용병이 뛰어났던 모양이다.,
    이로써 유민들에 대한 확고한 지도력을 갖추게 된 대조영은 그 후 더 동진하여,
    옛 계루부가 있던 자리, 지금의 길림성 돈화현인 동모산에 터전을 잡았고, 
    700년경에 나라를 세웠다.
    698년에 도망친 이래 단 3년 만에 나라의 기틀을 잡은 대단한 일인데, 기록이 전무하다.

    나라 이름은 처음에는 진국이라고 했지만 외부적으로는 그냥 말갈이었던 것으로 보아,
    당시 만주는 싸잡아서 말갈의 땅으로 불렸던 것 같다.
    건국 후 돌궐과 교류하면서 주변 지역을 장악해 나갔는데, 구체적인 세력 범위는 알 수는 없으나,
    일단 압록강, 두만강 유역과 북만주 일부는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영토가 사방 2000리에 가구가 10여만 호, 강군이 수만 명이었고,
    부여, 옥저, 변한, 조선 등 해북의 여러 나라를 모두 얻었는데,
    문화나 산물은 거란, 고구려와 다를 바 없었다 한다.
    측천무후 사후 부활한 당과 외교관계를 맺고 713년 발해군왕으로 책봉을 받았으며,
    그 이후 발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신라는 발해가 당을 막아주는 방파제로 등장하였으므로 나쁠 것이 없었고,
    발해는 대동강 이남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서로 소 닭 보듯 하였다.
    신라는 고왕에게 대아찬의 관등을 수여하였다고 하는데,
    대아찬은 장관급으로 진골 대접을 한 것이지만, 17관등 중 5등급이었다.
    받는 기분이 어땠을까?

    21년간 통치하며 발해를 만주의 강국으로 키웠는데.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무덤도 모른다.

    발해 : 시작, 우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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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뒤를 이어 만주 지역에 군림했었다는데,
    관련 기록이 부실하고, 알려진 것이 많지 않아, 마치 전설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 성립이나 성장 과정, 그리고 신라와의 관계 등을 보면,
    우리 민족과의 연계는 좀 약하고 그렇다고 아주 남은 아닌 것 같고,
    과연 우리의 조상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렇다면 한민족의 형성은 언제 부터이며 어떤 종족들로 구성되었을까 하는,
    한민족의 정의나 범주에 대한 의문까지 들게 하는 나라.

    민족은 근대 이후에 탄생한 개념으로서,
    고대에는 민족보다는 그보다 작은 혈연 공동체인 종족이나, 문화 공동체 성격인 어족으로 묶이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삼국시대에 고구려, 신라, 백제는 서로를 반드시 함께해야 하는 동일 민족, 한 겨레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저 고구려족, 백제족, 신라족 정도의 개념으로 서로 다른 이 종족이 삼한 땅에 나뉘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근대적 의미의 한민족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한반도의 여러 종족들이 역사를 함께 부대끼며 운명 공동체가 되어 가면서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발해는 고구려와 달리, 개국 이래 신라를 소 닭 보듯 했으며 교류도 많지 않았고,
    통일에 대한 열망은 커녕 전쟁조차 없었으므로, 발해를 한민족 국가로 보기는 어렵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발해족 또는 고구려족 국가 정도가 맞을 것이다.

    뿌리 찾기를 해보면 한민족의 조상이 틀림없는 백제,
    백제의 뿌리가 되는 고구려, 고구려의 뿌리가 되는 부여,
    그리고 부여의 뿌리가 되는 고조선으로 계통이 이어진다.
    따라서 고조선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이고, 부여, 고구려가 우리나라라는 이야기인데,
    이런 식이면 고대의 거의 모든 나라가 우리나라이고, 온 세상이 다 고토이며 사해가 동포일 것이다.

    고조선은 물론이고 고구려의 종족 구성은 한민족을 형성한 종족들과 많이 달랐을 것인데,
    고구려의 멸망 후 발생한 다양한 부흥운동 중 발해만이 성공하였고,
    군림하고 있던 지역이나 영토의 넓이, 국력, 구성 주민 등을 보면,
    한민족과의 연계성이야 어떻든, 발해가 고구려의 정통 후계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발해가 이민족 국가라면, 고구려, 부여, 고조선도 이민족 국가가 되므로,
    이들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사라져야 하는데,
    다행히도, 고려가 개국되면서 고구려가 다시 우리 역사가 되었다.

    고려는 고구려 유민들이 모여 살던 패서 지방을 근거로 발기한 국가로서,
    고구려의 국명인 고려를 그대로 차용하였고, 고구려의 후계자를 자처하였다.
    발상지가 고구려의 옛 영토이고,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품고 있어서,
    후계자를 자처하지 못할 바는 아니나,
    이미 200여년이나 지난 일이었고, 고구려의 발상지이자 주 활동 무대였던 만주는 물론,
    평안도 북부와 함경도 일대조차 소유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고구려의 정통 후계자인 발해가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고려의 고구려 후계 주장은 조금 억지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저 건국의 명분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까지였으면, 발해는 영원히 우리 역사가 아니고, 고구려도 정통이 아닌 방계 정도의 후계자로 만족했어야 했는데,
    어느날 발해가 느닷없이 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200여년을 버틴, 나름의 강국 발해가 개전 15일 만에,
    요나라 황자 야율요골이 이끄는 기병대에게 상경이 함락되면서 망해버린 것이다.
    고구려처럼 있는 진, 없는 진 모두 빼고,
    전쟁이라면 온 백성이 진저리를 칠 만큼 기진맥진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그냥 어이없이 망한 것이므로,
    멸망 당시 군사력이 거의 온존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세력들 중 일부는 남아서 부흥운동을 줄기차게 전개 하였고, 일부는 고려로 귀화하였다.
    그런데,
    백성들을 포함한 대다수는 만주에 그냥 남았고, 일부만 귀화하였는데,
    이게 우리가 고구려의 정통 후예이며 발해가 우리 역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될까?
    발해는 고구려계와 말갈계의 연합정권이었고 이 둘은 끝까지 서로 동화되지 않은 채,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며 발해를 유지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멸망 후에는,
    고구려계는 고려로 흡수되고 말갈계는 만주에 남아, 각자 제 갈 길로 갔기 때문에,
    고려가 고구려의 정통 후계이고 따라서 발해도 우리 역사가 분명하다고 하는데,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이게 가능할까?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로 협력하며 나라를 유지해온 두 종족이 그렇게 무 자르듯이 나누어 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말갈족. 
    발해만큼 참 난해한 종족이다.
    퉁구스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다는데,
    한반도 중부에 예국을 세우기도 하고, 백제의 초창기에 백제와 피터지게 싸우기도 하는 등,
    우리 역사에 툭 하면 끼어드는 종족으로,
    만주 전역과 연해주, 한반도 중,북부 그리고 남부 일부까지 매우 넓은 서식지를 자랑하는데,
    중국 놈들은 만주에 살고 있던 모든 종족을 싸잡아서 오랑캐란 의미의 말갈이라고 불렀다고 하므로,
    이들을 단일 종족으로 보기는 무리이고,
    아마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를 받거나 저항을 하던 모든 종족들의 통칭이 말갈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말갈이라고 불렸던 이들 중 한반도에 살던 종족들은 한민족 형성에 기여하였을 것이고,
    반면에 만주에 살던 족속들은 부족의 사정에 따라 발해에 동화되거나 시베리아 삼림에 묻혀 살아갔을 것이므로,
    고려로 귀화한 이들 중에는 말갈계도 있었을 것이고, 만주에 남은 고구려계도 있었을 것이다.
    고려로 귀부한 이들은 발해의 상층부를 이루던 자들로서 상당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지배층이야 돈도 있고 무력도 있으니 고려에서 우대하고 지배층으로 편입시켜주었겠지만, 
    하층민이야 어디 그런가?
    기득권들이 간다고 괜히 남의 나라까지 따라가서, 타향살이에 종살이까지 할 바에야, 
    고향에서 부모님 모시고 사는 게 백번 나은 일이었을 것이다.
    개개인의 사정이야 무엇이든,
    발해 유민들의 무력을 받아들인 후, 고려는 비로소 후백제를 누르고 통일 전쟁의 승자가 되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른 발해 부흥운동들이 모조리 실패하는 덕분에,
    왕족을 포함해 발해 귀족들의 상당수를 포용했던 고려는 거란과 대립하며,
    발해 부흥운동의 계승을 주장할 수 있었고,
    발해의 뿌리를 흡수한 고구려의 정통 후계자를 자처하며, 
    만주를 회복해야 할 고토라고 우길 수 있게 되었다.
    발해 유민들이 200년 세월을 메꿔준 셈이었다.
    그리고 옵션처럼 고조선, 부여도 우리나라가 되었다.
    우리 말고도 고구려, 발해의 계승자를 자처한 나라들은 많은데,
    요, 금, 청 등 만주에 기반을 둔 나라들은 모두 지들이 고구려, 발해의 정통 계승자임을 주장하였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중국놈들의 동북공정도 그 맥락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실 그 말도 맞다.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발해는, 당으로 끌려갔던 고구려 유민이 탈출하면서 시작되었다.
    고구려 멸망 후 이적이 보장왕과 염병할 남건이 형제를 끌고 갈 때 같이 끌고 간 고구려 백성이 20여 만이었다.
    당시 고구려 인구가 한 100만 쯤 되었을 테니까 인구의 1/5을 끌고 간 것인데,
    아마도 평양 부근은 사람 씨가 말랐을 것이고 주요 지역들 또한 공동화 되었을 것이다.
    이놈들은 끌고 간 유민들을 요서 지방의 영주라는 곳에 풀어놓았는데,
    여기는 그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불모지가 아니라, 원래 거란족의 땅으로,
    당시 당에 복속했던 거란족이 살고 있었다.
    거란족이라고 해서 점령당한 처지를 마냥 행복하게 받아들였을 리는 만무하므로,
    분위가 썩 좋지는 않았을 것인데,
    이 불만의 땅에 고구려인 수십만이 도착한 것이다. 거러지의 모습으로.
    당연히 텃세가 있었을 것이고 고구려 유민들은 지들끼리 모여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끌려간 유민들은 유민들대로 문제가 있었다.
    당나라 놈들 눈에야 그놈이 그놈 같았을지 모르나,
    고구려는 신분제 사회였고 귀족 평민 노예의 3단계로 나누어져 있었다.
    평민은 다시 지배계층인 호민과 거의 농노 수준인 하호로 나뉘어 있었고.
    따라서 유민들은 양반인 귀족과 호민, 상놈인 하호와 노예가 뒤섞여있었고,
    종족도 이것 저것 뒤섞여 복잡하였을 것이다.
    당나라가 귀족과 호민은 장안 등 다른 지역으로 분리시켰다 하나 완벽했을 리는 없고,
    중간급들 상당수는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유민들 중에는 한 번 상전이면 영원한 상전이라고 생각하는 갸륵한 종놈들도 있었을 것이나,
    이 판국에 양반은 무슨 놈의 양반이냐고 눈을 부라리는 놈 등 벼라별 인간들이 다 있었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귀족과 평민은 사이가 안 좋고, 끼리끼리 모이는 법이니,
    대충 지배계층 출신과 피지배계층 출신으로 나뉘었을 공산이 가장 크다.
    아니면 지역, 출신 별로 나뉘었거나.
    평양 인근 출신과 그 외 지역, 성내 거주와 성외 거주자 등등. 경우의 수는 많다.
    어떻게 나뉘었건 고구려 유민은 두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고 지도자는 각각 걸걸중상과 걸사비우였다.

    고구려 유민이 날 설고 물 설은 타국에서 험난한 생활을 이어간 지 어언 20여 년, 
    거란의 이진충이 난을 일으켰다.
    이진충이가 반란을 일으킨 해는 696년으로,
    측천무후가 자기 아들을 쫓아내고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로 등극하면서 주나라를 연지 9년째 되는 해이다.
    측천무후가 아무리 걸물이었다 해도 이렇게 나라를 근본부터 뒤집어 놓았으니 혼란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당 조정은 분열되어 서로 죽고, 죽이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그동안 당에 눌려왔던 다른 나라나 종족들에게는 호기로 작용했을 것이고,
    난세의 영웅을 꿈꾸는 많은 야심가들을 자극했을 것이다.
    이 살얼음판 같은 시국에,
    불안의 땅 영주에서 도독 조문홰가 피지배 종족들의 수장들을 엿먹이는 실수를 저지른다.
    뭔 실순지는 모르겠지만, 지 멋대로 세금을 걷거나 부역을 부과하거나 했을 것이다. 아니면 언 놈을 죽였거나.
    아무튼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었으므로,
    거란의 야심가 이진충은 반란을 일으켜 영주성을 점령하고 조문홰를 척살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우리의 고구려 유민은 이진충에게 적극 협력하였고.
    이진충이는 주변으로 세력을 넓혀 나갔으나,
    측천무후라고 마냥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아서, 40만 대군을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고,
    돌궐에게 거란의 배후를 치게 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진충이는 전사하였고, 이 꼴을 봤는지 안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구려 유민은 거란족과 운명을 같이 하지 않고, 요수를 건너 동쪽으로 전화를 피하였다.

    요수건너 태백산 동쪽에 성을 쌓고 자리를 잡았으나, 측천무후의 손길을 피할 수는 없었는데,
    측천무후는 일단 두 지도자에게 벼슬을 내리고 회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거부 하였고,
    이에 열 받은 측천무후는 항복한 거란인 이해고에게 대군을 주고 진압하게 하였는데,
    이 전투에는 평민 대장 걸사비우가 더 적극적이었고 전투를 주도한 듯하나,
    의욕만 앞선 것인지, 두 파벌의 단합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대패하였고,
    사령관 걸사비우마저 전사하고 말았다.
    걸걸중상은 그전에 병사했다고 한다. 전사라고도 하고.
    무슨 이유 때문이건, 싸움에 지고 두 지도자를 모두 잃은 유민들은 멘붕이었을 것이므로,
    도망밖에는 길이 없었고.
    이 판국에 양반이고 종이고, 말갈이고 나발이고는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유민들은 대조영을 중심으로 다시 뭉쳤고 열심히 도망쳤는데, 천문령에서 따라잡히고 말았다.
    대조영은 이판사판으로 이해고에게 달려들었는데,
    궁지에 몰린 쥐가 가끔은 고양이를 물기도 하는 격으로, 덜컥 이겨버렸다.
    그래도 이겼다고 자만하지 않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달렸는데,
    돌궐이 측천무후에게 대드는 사태가 벌어지고, 거란이 돌궐에 붙는 상황이 되면서, 
    유민들은 겨우 측천무후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조영은 유민들과 함께 나라를 세웠는데,
    그 자리가 동모산, 옛 고구려 계루부의 터전이었다.

    태봉 : 궁예(2), 난세의 화려한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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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초들이 편한 시대는 별로 없지만, 난세는 민초들을 더욱 힘들게 하여,
    자신과 가족을 지킬 힘이 부족한 이들은 도둑에게 빼앗기고, 다시 도둑이 되어 빼앗았다.
    그 과정이 수월할 리는 없고, 결국 굶어죽거나 칼 맞아 죽는 것이 대다수 민초들의 운명이었는데,
    이러한 막장의 삶을 사는 민초들에게, 전직 스님 출신의 무예가 출중한 애꾸눈 장군은 신비감을 자극하였을 것이고, 의지와 숭배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궁예는 거지 떼와 다름없는 도적 병사들을 이끌고 정벌을 빙자한 약탈에 나서면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한 듯하다.

    궁예는 명주성을 접수하면서 힘을 얻었는데,
    지역의 강자이자 진골귀족인 성주 김순식은 왜 이 볼품없는 거지왕초에게 성을 내어 준 것일까?
    중앙에서 밀려난 진골 귀족으로서 동병상련의 감정으로 불우한 왕족을 후원하던 관계의 연장선상일 수도 있고.
    망할 것이 확실한 신라를 위해, 광신적인 종교집단과 피를 흘려가며 싸워봐야 득될 게 없다는 냉철한 난세의 계산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유가 뭐였든 궁예는 김순식과 동맹을 맺은 듯하며, 이 동맹을 계기로 궁예는 필요한 힘을 얻어 장군을 자칭하게 되었다.
    두목은 그냥 도둑놈인데 부하가 진골들만 할 수 있는 장군이면 족보가 이상하게 꼬이게 되므로,
    이는 결국 궁예가 ‘나 이제 독립하겠소.’ 하고 양길에게 선언하는 의미였고,
    제법 배포는 컸으나 시대의 소명의식 같은 고상한 이념과는 인연이 없었던 양길은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양길의 심리상태에 관계없이 힘과 명분을 확보한 궁예는 왕건을 거두면서 날개를 달게 되었다.

    송악(개성)에 기반을 둔 해상 호족인 왕건은,
    통일 신라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반 독립적이었던 패서계 즉 고구려계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장보고의 몰락 후 벽골군으로 이동했던 청해진 세력의 일부와도 맥이 닿는 당대의 강자였다.
    거지 왕초에 불과했던 궁예가 김 순식에 이어 왕건까지 수하에 거두었다는 것이 불가사의하긴 하지만, 이는 역으로 그의 능력이나 비전이 대단했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사실이라고 할 것이다.

    궁예의 탁월한 군사적 식견을 보여주는 것은 나주점령인데.
    나주지역은 옛 백제 땅이기는 했으나, 가장 늦게 백제에 편입된 지역으로, 근초고왕시기까지 백제에 적대적인 침미다례국으로 존속하였다.
    이들은 남만이라고 불렸으며,
    삼국형성 이전부터 중국, 일본과의 교역에 종사하였고, 해적질에도 능한 이질적인 집단이었다.
    이들과의 제휴가 있었기에 장보고가 신라 조정의 지원 없이도 청해진에서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뭐가 되었건 이 동네에서 성공하려면 일단 호족들과 잘 지내야 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들과 견훤은 갈등하였던 듯하고,
    견훤이 강제로 복속을 시키자, 일단 복종은 하였으나 뭔가 불만이 많았던 듯하다.
    이러한 현지 사정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궁예는 나주공략을 지시하였고,
    왕건은 자신의 뛰어난 해전 능력에 더해,
    또 다른 해양세력이기도 한 나주 호족들의 적극적인 협력에 힘입어 후백제 후방 깊숙이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로써 궁예는 견훤의 인후에 비수를 들이댄 꼴이 되었고,
    견훤을 압도하며 평안남도, 경기도 , 강원도, 충청도, 경상북도 일부 그리고 나주를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천하가 눈앞에 있었다.

    궁예는 정복전쟁 과정 중에 부석사에 들를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로 추정되는 경문왕의 영정을 발견하였고 칼로 베어버렸다 한다.
    이러한 과격한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우선은 자신의 뿌리이기도 한 신라에 대한 적대감의 표현일 것이고,
    두 번째는 효성과 같은 기존 가치관에 대한 부정일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으나,
    결국은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 및 새로운 질서의 창조를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후 궁예는 광신적인 자신의 친위세력을 기반으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궁예의 성공에 기반이 되어준 세력은 불교의 미륵종파와 호족들이었는데,
    이들은 과거의 강자 골품귀족을 밀어내고 현세의 강자로 군림한 당대의 주류였다.
    궁예의 전쟁은 주류의 교체라는 시대 상황과 맞물려 진행되었으므로, 궁예의 성공은 곧 이들 신주류의 성공을 의미하였는데,
    이렇게 구축된 새로운 질서는 궁예의 소명의식과는 맞지 않았고, 궁예가 원하는 질서 또한 아니었던 모양이다.
    궁예는 만민 평등, 영세 평화의 미륵정토를 꿈꾼 듯한데, 이 몽상적인 이상주의는 당연히 반발을 불렀고 저항에 부딪혔다.
    궁예의 밑천이랄 수 있는 미륵 종파에서부터 시작된 저항은, 정복 전쟁에서 가장 공이 크고 세력이 강한 패서계 호족들로 퍼져 나갔으므로,
    내편이 되어 주어야할 자들의 반발은 궁예의 기반을 흔들었고, 또 분노하게 하였다.
    불안을 동반한 분노는 폭주를 불렀고 이들에 대한 잔인한 탄압으로 이어졌는데,
    이러한 전혀 미륵답지 않은 궁예의 행동들은 주위의 신망을 잃게 만든 것에 그치지 않고,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버렸다.
    중을 때려죽이고 마누라의 음부를 찔러 죽이는 미륵이나 보살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또한 기왕 미륵의 탈을 벗고 야차가 되었으면 끝까지 밀어붙였어야 했는데,
    패서계의 수장인 왕건을 죽이지 않고 좌천시키며 타협한 것도 문제였다.
    어정쩡한 공포 따위로, 난세를 살아온 자들에게 완전한 복종을 끌어낼 수는 없었고…
    고사되기를 거부한 패서계 호족들의 한밤중의 쿠데타로, 한 순간에 다 잡은 천하를 날려버렸다.

    궁예의 죽음 또한 논란이 많은데,
    변장을 하고 도망치다가 배가 고파 보리이삭을 날로 먹던 중, 백성들에게 발각되어 맞아죽었다는,
    전혀 영웅답지 못한 최후설이 정설로 되어 있으나.
    궁예가 자살했다는 자살 바위, 한탄하며 강을 건넜다는 한탄강,
    군대를 이끌고 산에 은거해서 왕건과 싸울 때,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길 안내까지 해줬다는 설 등 영웅적인 최후를 암시하는 전설들도 많다.
    자칭 미륵이었던 궁예를 진짜 미륵으로 모시는 마을들도 있었고.
    이를 궁예미륵이라 한다.
    궁예 사후, 청주에서 잇달아 반 왕건 반란이 일어났고,
    명주의 김순식은 4년이 넘도록 왕건에게 항복하지 않았으며,
    공주지역도 여러 번의 반란 끝에 결국 후백제에 투항하였다는 등의 기록들은,
    궁예의 새로운 질서가 광인의 미친 짓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예라 할 것이다.

    기존의 권위가 무너져, 폭력적인 힘이 정의가 되고 진리가 되는 난세.
    그 난세의 바람을 타고 화려한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스러져간 궁예.
    비록 비현실적인 신정주의 국가를 꿈꾸기는 하였으나,
    만민평등, 영세평화라는 인류의 영원한 꿈을 현실에서 이루고자 했던 진정한 난세의 영웅이자,
    난세의 화려한 불꽃이었다.

    태봉(후고구려, 마진) : 궁예(1), 사나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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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서자이고 장보고의 외손자로서,
    출생 시 무지개를 닮은 흰 빛이 지붕 위에 있었고, 날 때부터 이가 있어,
    불길하다 하여 죽임을 당할 뻔했으나, 다행히 유모가 데리고 탈출하여 목숨을 구하였는데,
    이때 유모의 손가락에 찔려 애꾸가 되었다고 한다.
    일종의 출생 설화인데.
    다 믿기는 어렵고, 그저 어려서 한쪽 눈을 잃은 몰락한 진골 귀족 출신 정도로만 알아두자.

    어렸을 때는 악동이었던 모양으로,
    열 여남은 살 쯤에 말썽을 견디다 못한 유모가 궁예에게 신세내력을 알려주었고,
    이에 충격을 받은 궁예는 뜻한 바 있어 세달사로 출가했다고 하는데,
    어린 것이 말썽을 피웠으면 얼마나 피웠겠고, 뜻을 세웠으면 얼마나 큰 뜻을 세웠을까 마는,
    아무튼 평탄하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내었고, 절에 의탁해야 할 정도로 몰락했던 모양이다.
    세달사에서도 착실한 중은 아니었던 것 같고,
    종간처럼 마음에 맞는 동지들과 세속에 뜻을 두고 심신을 단련했던 것 같다. 활을 잘 쐈나보다.

    이렇게 산 속에서 외 눈으로 천하를 노려보던 궁예는,
    진성여왕 시기에 각지의 호걸들이 몸을 일으키자, 미련 없이 절을 나와 세상풍파에 몸을 던졌는데,
    산을 내려와 처음 찾아간 호걸은 죽주(안성)의 기훤이었다.
    그러나 기훤은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성질이 지랄 맞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궁예를 푸대접하였고, 궁예는 이 꼴 같지 않은 도둑놈의 휘하를 떠나 더 큰 도둑놈인 북원(원주)의 양길에게 의탁하였다.
    이때 기훤의 부하들 중 일부도 궁예를 따라갔다고 하는 것을 보아, 궁예의 리더십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양길은 멋도 모르고 궁예를 환영하였고,
    호랑이 새끼인 줄도 모르고 궁예에게 군사를 주어 북원 동쪽 땅을 접수하게 하였는데,
    궁예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고락을 함께 하였으며,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여,
    난세에 지친 자들의 의지처가 되어 주었고,
    백성들은 그런 그를 미륵의 화신으로 숭앙하였다고 한다. 절 생활이 도움이 되었던 모양이다.
    현세에 강림한 미륵이 이끄는 군대는 무적이었고, 양길의 기대를 넘어 명주(강릉)에 다다르게 되었다.
    당시 명주는 진골 귀족인 김순식의 영지로서,
    영동지역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영서까지 영향력이 상당한, 요지중의 요지였다.
    이 정도 강력한 성은, 
    아무리 미륵이 이끈다 해도, 전직 도적 내지 거지 출신 군사들에게는 난공불락이나 다름없었을 것이고, 
    이를 잘 아는 궁예는 김순식과 모종의 협상을 한 듯 보인다.
    김순식은 궁예가 절에 있을 때부터 후원을 하던 사이였다는 설도 있는데,
    뭐가 되었건, 명주를 접수한 궁예는 장군을 자칭하였다.

    명주를 기반으로 삼은 궁예는 강원도 전 지역을 석권하였고 철원에 자리를 잡았는데,
    궁예가 이렇게 성장하자 예성강 이북지역인 패서의 호족들과, 그 대표격인 송악(개성)의 해상 호족,  왕륭 · 왕건 부자도 궁예에게 투항하였다.
    궁예는 왕건의 건의를 받아들여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고,
    왕건을 시켜 양주와 청주 등 30여개 성을 정벌하였으며, 팔관회를 개최하였다.
    이렇게 궁예가 잘나가자, 주인 격인 양길은 그제야 자신이 호랑이 새끼를 키웠음을 자책하게 되었는데,
    투자한 대가를 받기는커녕 궁예에게 본거지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되자,
    견훤과 연계를 맺고 한산주의 호족들을 끌어들여 궁예를 쳤다.
    그러나 이미 다 자란 호랑이는 원주인을 물어뜯어 버렸고, 여세를 몰아 충주, 청주 등 한반도 중부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궁예는 견훤이 백제의 후예를 자처한 것처럼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였고,
    부석사에서 경문왕의 초상을 발견하자, 칼로 베어버리며 반 신라 정책을 공식화하였다.

    궁예가 이렇게 후삼국의 한 축으로 성장하자, 견훤과의 충돌은 필연이 되었는데,
    궁예의 탁월한 군사적 식견은 적 후방 깊숙이에 있는 나주를 주목하였고,
    해상 호족 출신인 왕건은 훌륭한 수족이 되어 나주를 궁예에게 바쳤다.
    이는 견훤의 뒤통수를 제대로 날린 것으로 이후 견훤은 앞뒤의 공격에 갈팡질팡하는 신세가 되었다.
    견훤을 곤란하게 만든 궁예는 효공왕 7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고쳤으며 공주 지역의 복속을 받았다.

    어느덧 한반도 최강자가 된 궁예는 당연한 수순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하여,
    우선 국내 최대 호족인 왕건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송악에서 철원으로 재 천도하였다.
    원래 철원은 교통이 불편하고 생산력이 보잘 것 없어 왕도로는 부적합한 땅이었으므로,
    궁예는 이를 보강하기 위해 청주의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대궐을 크게 짓는 등 투자를 많이 하여 도읍의 위용을 갖추었다.
    이후 평양 성주를 비롯한 북쪽 호족들의 항복을 받았고, 견훤을 상주에서 크게 격파하였으며,
    나주지역에 대한 진출도 재개하여 진도, 고이도, 덕진포 등에서 크게 승리하였고,
    견훤의 수군 장수 능창을 사로잡는 등 나주 전지역을 확고하게 지배하게 되었다.
    이 시기가 궁예의 최전성기였고 이대로 몇 해만 더 가면 난세를 끝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내외적인 성공에 크게 고무되었는지,
    궁예는 궁궐을 증축하였으며 스스로를 미륵불과 동일시 하였다.
    국호도 태봉으로 고쳤는데, 태봉은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를 의미한다고 한다.
    행차할 때면 금관을 머리에 쓰고, 금, 은으로 장식한 말안장을 얹은 말을 탔으며,
    앞뒤로 향로를 받쳐 든 남녀 어린아이 수십 명을 따르게 했고,
    또한 자신의 두 아들을 청광보살 · 신광보살이라 부르게 했으며, 직접 경전까지 지어 설법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성 모독은 당시 불교계를 지배하던 다른 종파들을 자극하였고, 반발을 부를 수밖에 없었는데,
    궁예는 자신의 경전을 혹평하는 미륵 종파의 대덕 석총을 철퇴로 패 죽여 버렸다고 한다.

    궁예는 왕권 전제화에도 공을 들여, 왕권 강화에 걸림이 되는 호족들을 숙청하거나 좌천하였는데,
    이에 따라 왕건도 시중자리에서 쫓겨나 나주로 파견가야 했으며,
    패서계 호족출신인 왕비가 호족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라고 하자, 쇠꼬챙이로 찔러죽이고 그녀의 소생인 자신의 두 아들마저 죽여 버렸다 한다.
    궁예는 숙청을 할 때 반란의 증거를 들이 민 것이 아니라,
    자신의 깨달음 내지는 신통력을 의미하는 관심법으로 알았다고 우겼다 하는데
    사실 관심법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은 타심통이라 하므로,
    궁예가 그렇게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뭐가 어찌되었든 우리 역사 상 종교적 광신을 정치에 이용한 최초이자 유일한 군주일 것이다.

    918년 7월 궁예의 살벌한 숙청에 반감과 위기의식을 느낀,
    왕건 지지파인 신숭겸 등이 한밤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대궐로 쳐들어갔고,
    궁예는 철원을 탈출하여 달아나다가 사망하여, 풍운의 삶을 접었다.

    왕자로 태어나 숨어살다가, 떠돌이 중이 되었고, 도둑의 부하가 되었으며,
    세력을 모아 장군을 자칭하였고. 두목을 꺾고 왕이 되었다.
    탁월한 전략을 지닌 뛰어난 군사 지도자였으며,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는 냉철한 정치가로서,
    따르는 민초들에게 교주로 숭앙되었고 나라를 교단처럼 운영했던 특이한 인물이었다.
    말년의 파행적 기행으로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비난과 조롱을 함께 받으나,
    난세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가장 난세에 어울리는, 진정한 난세의 영웅이었다.

    후백제 : 견훤(2), 난세라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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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세.
    사람 사는 세상이 언제인들 난세가 아니겠냐마는,
    우리 역사에서 전국시대를 의미하는 난세는 흔치 않다.
    삼국 초창기를 제외하면 후삼국시대가 유일할 것이다.

    견훤은 이 난세를 온몸으로 살아간 진정한 호걸이자 영웅이었다.
    견훤이 몸을 일으킨 진성여왕 시기는 신라의 모순이 극대화되어,
    기존 권위가 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동력을 완전히 상실한 시기였다.
    이러한 현실은 필연적으로 혼란을 불렀고, 능력 있는 야심가들을 들뜨게 만드는 토양이 되었으므로,
    각지의 힘깨나 쓰는 호족들은 모두가 영웅호걸을 자처하였고,
    눈 먼 천명이 자신에게 임하기를 염원하였으나,
    대다수의 민초들에게는 악몽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견훤이 무역의 요충이자 곡창지대가 인접해 있는 서남해에 근무하게 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행운이었다.
    첫 출발은 쉽지 않았으나,
    난세였으므로 곧 그의 능력과 영웅적인 면모는 빛을 발하였고, 보호자를 필요로 하던 민초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백제를 계승하겠다는 다소 생뚱맞은 명분은,
    삼국통일 이후 옛 백제 땅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고구려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별을 받았던,
    곡창지대의 주민들에게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켰을 것인데, 
    이는 민심을 모아 창업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 것이나, 그로인한 한계 또한 지니게 되었다.

    아버지 아자개, 양길 등 각지의 호족 내지는 도적들과 함께 난세 1세대를 형성한 견훤은,
    다른 동기들이 부침을 거듭할 때,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고 왕을 칭하는 등 선두를 치고 나가,
    마치 그대로 천하를 접수할 것만 같은 기세였다.
    그러나 그랬더라면 후세에 난세라고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난세를 난세답게 만든 또 다른 영웅 궁예가 등장한 것이다.
    이로써 삼국이 정립되었으며, 본격적인 쟁패에 돌입하였는데,
    곡창지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무장의 카리스마를 지닌 견훤과,
    신라의 버림받은 왕자라는 다소 로맨틱한 출신 배경과, 세기말적 광신에 기반한 교주의 카리스마를 갖춘 궁예의 싸움은 호각이었고, 전국시대를 활짝 꽃 피웠다.

    궁예는 견훤과 여러 면에서 달랐으나 군사적 능력만큼은 견훤에게 전혀 뒤지질 않아,
    나주 점령이라는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며 밀리던 전황을 뒤집고 우세를 확보하였다.
    나주 상실로 인해 견훤이 받은 타격은 엄청났는데,
    나주라는 지역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지정학적인 이점의 상실뿐만 아니라,
    배후에 독 오른 적을 남겨둠으로써 전력을 한 곳에 모으지 못하고 항상 두개의 전선을 유지해야 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게 된 것이 가장 뼈아팠다.
    창업 초창기에 나주지역의 호족들을 회유하지 못하고, 강제 복속한 것이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궁예.
    참으로 사나운 중이었다. 
    이 중 같지 않은 중과의 싸움이 점입가경을 치달을 때,
    왕건이라는 또 다른 걸출한 인물에게 궁예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난세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왕건과도 서로 펀치를 주고받으며 쟁패를 이어갔으나,
    궁예보다는 아무래도 좀 편했는지 견훤은 다시 우위에 설 수 있었고, 신라를 속국화하며 절정에 올랐다.
    그러나 이놈의 눈 먼 천명이 이번에는 왕건을 찾아갔는지,
    뜻밖에 아들들의 반란을 만났고, 이 패륜에 대한 분노는 영웅을 필부보다 못하게 만들었다.
    견훤은 아버지 아자개가 자신을 버리고 왕건에게 간 것처럼, 아들을 버리고 왕건에게 투신하였으며,
    왕건 군의 선두에 서서 아들을 치는 기막힌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이미 병든 70 객이었으니 무용이야 보잘 것 없었을 것이나, 카리스마는 여전해서, 
    그를 마주 대한 후백제군은 공황상태에 빠졌고, 도망자가 속출하였다고 한다.
    이 지경이니 싸움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고, 그저 평범한 재능밖에 없었던 아들 신검은 속절없이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라가 망하였다.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아들의 한심한 작태는 병든 노인을 더욱 절망하게 하였고,
    죽음으로 이끌었다.
    견훤은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어져 독살 당한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독살이건 뭐건,
    평생 자기 손으로 세운 나라를, 자기 손으로 부숴버린 꼴이 된 견훤의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였을 것이다.

    공수래 공수거.
    한바탕 꿈을 꾸었나 보다.
    난세라는 꿈을.

    [칼럼]청소년이 우리 사회에 대해 참여하는 것이 잘 이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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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박정우 칼럼리스트

    [수완뉴스=박정우] 2018년 11월 21일 국회 본회의에서 청소년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수정 가결되어 통과됐다. 이는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송희경 의원(자유한국당·비례대표)이 대표 발의한 법안으로 주요 내용으로는, 여성가족부 산하 청소년정책위원회 민간위원 구성 시 청소년을 반드시 포함하도록 하였으며, 위촉되는 민간위원의 비율을 각각 전체 위원의 5분의 1 이상으로 하도록 명시하였다. 또한 청소년 위원이 새롭게 포함됨에 따라 위원회의 위원 정수를 기존 20명 이내에서 30명 이내로 확대하였다.

    참고로 여성가족부 청소년정책위원회는 청소년기본법 제10조에 의거하여 청소년정책에 관한 주요 사항을 심의ㆍ조정하기 위한 기구로, 여성가족부장관을 위원장으로 13개 정부 부처 차관 및 민간위원이 참여하는 위원회이다.

      필자도 이 개정안 통과 과정에 깊이 관여한 사람으로서 이번 개정안은 정부의 청소년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청소년들의 참여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정책 당사자의 의견을 실제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보다 실효성 있는 정책을 마련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법률안이 수정 가결되다 보니깐 예를 들어, 민간 위원을 공개 모집하거나 청소년정책위원회를 국무총리 산하로 격상하는 등의 내용이 빠진 채 원안보다는 내용이 퇴색했다는 점이다.

      청소년 기본법 제5조의2(청소년의 자치권 확대) ①은 이렇게 규정되어 있다. “청소년은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으로서 본인과 관련된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마찬가지로 ③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청소년과 관련된 정책 수립 절차에 청소년의 참여 또는 의견 수렴을 보장하는 조치를 하여야 한다.” 라고 규정하며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청소년을 우리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으로서 청소년과 관련된 정책 수립과정에서 청소년의 참여를 보장하여야 되는 의무를 지고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를 고려해볼 때 청소년이 여성가족부의 청소년정책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여성가족부는 청소년 정책에 대해 청소년들의 참여 절차를 보장해야 된다는 점에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2015년 이 위원회가 생긴 이래로 청소년이 단 한번도 이 위원회에 위원으로 위촉되거나 청소년이 위원회 회의에 참석해서 청소년 정책과 관련해서 발언 한 적이 없었다.

      그나마 국회에서 청소년기본법이 개정되어 이 위원회에 청소년이 민간위원으로 참여가 가능하게 되면서 올해 3월부터 제 3기 청소년정책위원회에는 청소년 위원이 위촉이 되어서 이러한 불합리한 상황은 없어지게 될 예정이다.

      그럼에도 아직 현실은 정부 부처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청소년과 관련된 정책 수립과정에 청소년의 참여 보장은 미약하다. 오히려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자신들의 의무를 다 못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렇기에 앞으로 청소년의 사회 참여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으며, 청소년이 청소년 관련 정책의 수립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몇가지 개선 사항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정부(여성가족부)의 「청소년 보호법」에 따른 청소년보호위원회나 「학교 밖 청소년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른 학교 밖 청소년 지원 위원회나 지방자치단체의 「청소년 기본법」에 따른 청소년 육성 위원회 등 청소년 관련 정책의 심의ㆍ협의ㆍ조정 등을 위한 위원회ㆍ협의회 등에 청소년을 반드시 포함하여 구성ㆍ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이를 청소년의 정책 수립 과정에서 참여 보장을 위한 필수적 조치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청소년 기본법 상의 청소년 나이가 만 9세에서 만 24세까지인데 이는 최근 국회에서 통과 된 청년기본법의 청년의 나이인 만 19세에서 만 34세까지와 겹친다. 실질적인 청소년의 사회 참여를 보장하고 청소년과 청년 정책의 중복을 피함으로써 정책의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청소년의 나이 기준을 만 18세까지로 조정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세 번째는 청소년의 사회 참여 관련해서 민주시민 교육 등 실질적인 청소년의 사회 참여에 도움이 되는 교과목의 시수를 늘리고, 교육 내용의 다양화를 통해 청소년들의 사회 참여가 실질적으로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청소년들이 스스로 인식하게 만듦으로서 청소년의 사회 참여 활성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는 청소년의 실질적 참여에 따른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변화를 청소년들에게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필자가 청소년 관련 활동을 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아무리 좋은 의견을 내도, 의견은 의견으로 끝난다는 점이다. 이를 고려할 때 우리 공동체는 청소년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수준에서 끝날게 아니라 더욱 더 청소년의 의견을 우리 사회에 반영하고 이에 따른 변화를 청소년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청소년은 미숙하다는 우리 사회의 눈길 어린 시선을 바꿀 필요가 있다. 필자도 청소년 활동을 하면서 이러한 시선을 겪은 적 있어서 그런지 누군가를 함부러 미숙하다고 하는 것 그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이나 같을 것이다. 앞으로 청소년들이 미래 사회의 주역이라는 건 필자를 포함한 어른 세대에서는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를 고려할 때 우리 사회는 앞으로 청소년을 우리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대우 할 수 있는 관용이 필요하다.

    박정우 칼럼리스트  / 법제처 국민법제관, 여성가족 분야

    후백제 : 견훤(1), 난세를 열고 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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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7년(경문왕 7년)에 태어났다.
    당시는 자연재해로 전국이 몸살을 앓고 있는 시기였으나, 아버지가 부농이었기에,
    계모와 그 자식들에게 구박은 좀 받았어도 배는 곯지 않았는지, 체격이 남달리 컸다고 한다.
    젊은 견훤은 능력 있고 반항적인 젊은이답게, 찌질하게 집안 재산을 놓고 동생들과 툭탁거리는 대신,
    대처로 나가 운명을 시험하였다.
    별 연고도 없이 상경한 몸 좋은 젊은이는 자연스레 군문으로 향했고, 곧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는데,
    그의 남 다른 기상은 무기력하고 혼란스러웠던 진성여왕기에 더욱 빛을 발하여 비장으로 승진하였다.
    비장은 장군 예하의 부장쯤이므로, 그의 형편없는 골품으로는 거의 최고위직에 가까웠을 것이다.

    무역의 요충지, 서남해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해적들과 반항적인 호족들을 때려잡으라는 명을 받고,
    서남해 방수가 되어 경주를 떠났는데,
    경주를 떠날 때 데리고 간 병사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신라 사정 상 많은 병사를 배정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서남해에서 근무할 때는 창을 베게 삼아 잤다고 하는데,
    이러한 그의 성실성과 용감성에 감명을 받아서인지, 이르는 곳 마다 사람들이 호응하여 보름도 안 되는 사이에 따르는 무리가 무려 5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강력한 군사력을 손에 넣은 견훤은,
    892년(진성여왕 6년), 마침내 몸을 일으켜 무진주(전남 광주)를 공취하고 세력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공교롭게도 아버지 아자개도 이 시기에 세력을 일으켰는데, 이에 자극받아 서둘렀다는 설도 있다.
    900년(효공왕 4년), 완산주(전주)에 무혈 입성한 후 도읍을 옮겼고,
    의자왕의 복수를 명분으로 백제왕을 칭하였다. 중국에 사신도 보냈고.
    이듬해에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고, 대신 아직 복속하지 않은 나주 남쪽의 연해변을
    공격하였다.

    양길의 수하에 있던 궁예가 마침내 독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우자,
    배신당한 양길에게 비장 벼슬을 내리고 회유하였으나,
    형식적으로나마 복속했던 양길은 궁예에게 허무하게 패하여, 천하 대신 궁예라는 호적수만을 남겨주고 죽었다.
    양길을 꺾은 궁예는 실력을 갈고 닦아 903년 나주로 향하였고,
    견훤에게 반항적이었던 호족들의 협조를 받아 견훤의 턱 밑에 비수를 들이 밀었다.
    인후와 같이 중요한 나주를 잃은 견훤은 탈환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으나 결과는 영 신통치가 않았고, 909년, 다시 나타난 궁예의 부하 왕건에게 결정적으로 패하였다.
    그래도 미련을 못버리고 910년, 나주를 10일간 포위 공격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그리고 912년에는 덕진포 싸움에서 친히 군사를 이끈 궁예에게 패하였다.
    참으로 사나운 중이었다.
    당대 최강의 군사력을 가지고도 안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나주에서 이렇게 힘을 쓰지 못한 이유는,
    나주의 호족들이 적대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민심을 얻지 못하면 되는 게 없다.

    918년, 왕건의 쿠데타로 궁예가 피살되었고 드디어 난세 종결자 고려가 개국하였다.
    견훤은 호적수 궁예의 퇴장을 반기고 왕건과 화친하였는데,
    아마도 고려를 평화롭게 흡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나, 오산이었다.
    왕건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궁예의 세력을 포섭하였고, 견훤의 아비인 아자개마저 복속시켜 버린 것이다

    아자개.
    참으로 특이한 인물이었다.
    농부에서 한 지역의 패자로까지 성장한 것을 보면 능력이 뛰어났던 인물임에는 틀림없고,
    자식들도 딸을 포함해서 모두 출중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견훤의 세력이 더 컸음에도 불구하고 아들과 합칠 생각을 하지 않고 왕건에게 복속하였다.

    아버지가 뭔 짓을 하건,
    왕건과 화친하는 동안 힘을 기른 견훤은 920년 1만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대야성을 함락시켰는데,
    이는 첫 공격 이후 무려 19년 만에 숙원을 이룬 것으로, 신라의 목숨줄을 끊어 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에 고무된 견훤은 내친 김에 진례성까지 공격하려 하였으나,
    신라는 왕건에게 SOS를 날렸고,
    견훤에게 신라를 통채로 줄 수 없었던 왕건은 즉각 구원에 나섰는데,
    견훤은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고, 여기에서 왕건과 피튀기며 싸워봐야 별 이득이 없다고 판단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물러나 왕건의 반대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공주로 진출하였다.

    924년 7월, 아들 신검에게 조물성 (김천)을 치도록 하였으나 실패했고,
    고려와 화친하였다.
    이듬해에는 친히 기병 3천으로 조물성을 공략하였으나, 왕건 역시 직접 정예병을 이끌고 나섰기에
    결국 화의하였는데,
    화의의 조건으로 서로 볼모 교환하기로 하여,
    견훤은 자신의 조카(혹은 사위) 진호를 인질로 보냈고 왕건은 사촌동생 왕신을 인질로 보내었다.
    그러나 채 일 년도 못되어 진호가 죽어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하였고, 이에 분노한 견훤이 고려의 책임을 물어 왕신을 죽여 버리는 바람에 화의는 깨져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왕건이 열 받아 분노의 공격을 퍼부었고 대야성을 빼앗아버렸다.
    고려의 공격 강도가 심상치 않자,
    견훤은 환갑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진하여,
    신라의 근품성을 빼았고 영천을 습격하였으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군사를 돌려 서라벌로 진군하였다.
    자기 목숨 줄을 놓고 으르렁거리는 두 맹수의 싸움을 넋 놓고 바라보던 신라는 돌연한 공격에 화들짝
    놀라 고려에 구원요청을 하였고,
    이에 왕건은 친히 구원병을 이끌고 급히 서라벌로 향했으나,
    이미 때가 늦어,
    궁성을 점령한 견훤은 경애왕에게 항복의 예를 받은 후 자살하게 하고, 김 부를 옥좌에 앉혔으며,
    왕궁을 약탈하여 진귀한 보물들과 병장기를 빼앗았고,
    왕의 동생 효렴과 재상 영경 및 귀족 자제들과 실력 있는 장인들을 끌고 떠나버렸다.
    열받은 왕건은 철수하고 있는 백제군의 후미를 급습하기 위해 정예 기병 5천명을 이끌고
    대구 팔공산으로 향했으나,
    백전노장 견훤의 역 매복 작전에 걸려 참패하였고, 왕건 자신도 신숭겸의 희생 덕분에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공산 전투이다.
    견훤은 이후 승승장구하며 그 영역을 오늘날의 충북, 경북 일대에까지 넓혔고, 왕건에게 빼앗겼던
    나주도 20년 만에 탈환하여, 명실상부한 한반도 최강자가 되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62세.
    견훤은 이때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다 늦게 인생의 절정을 맞은 견훤은 경상도에서 고려의 세력을 완전히 지우기로 마음먹고,
    929년 3천 명의 고려군이 주둔해있는 고창(안동)을 포위하였다.
    분위기상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았으나,
    고려에는 유금필이라는 명장이 있었고, 견훤의 서라벌 만행에 분노한 안동 호족 삼태사가 있었다.
    양측은 고창의 병산에서 맞붙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고창 토착세력의 고려 지원과 희대의 명장 유금필의 활약에 밀려,
    8천명이나 되는 병력을 잃으며 참패하였고, 고창 일대의 신라 30개 군현이 일제히 고려에 투항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 고창전투의 여파는 생각보다 더 대단하여,
    속국으로 만들었던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나주도 다시 고려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며,
    후백제에 속했던 일부 호족들의 이탈도 시작되었다.
    이 꼴을 본 견훤은 심기일전하여 수군으로 반격을 시도하였는데,
    수군력의 우위를 자부하던 왕건의 방심을 이용한 이 전략은 멋들어지게 성공하여,
    염주, 백주, 정주 등에 정박해있던 고려의 선박 1천여 척을 불 태우고 300여 필의 군마를 약탈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렇게 서로 펀치를 한 번씩 주고받은 후,
    견훤은 934년,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운주에서 다시 고려군과 맞붙었으나,
    이번에도 천적 유금필에게 유린당하며, 2/3의 병력을 잃고 측근 장수들이 포로가 되는 참패를
    당하였다.
    이 후, 천하 쟁패의 추는 고려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공주 일대의 30군현, 동해연안의 110여성이 고려에 투항하는 등 호족들의 이탈도 심화되었다.

    마치 결승전 같았던 운주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온 늙은 견훤은 후사를 생각하였고,
    자수성가한 노인들이 대개 그러하듯, 자신의 기준에 맞는 넷째 아들 금강을 후계자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아버지 눈에는 안 찼어도, 나름의 헌신을 했던 맏아들 신검이 강력하게 반발하여 무산되었고,
    결국 금산사에 억류되고 말았다. 금강은 살해되고.
    이 분통터지는 일들은 자부심 강한 늙은 아버지의 이성을 마비시켰고,
    젊은 시절 그토록 원망스러웠던 자기 아버지가 한 것처럼, 왕건에게 의탁해 버렸다.
    아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알다가도 모를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일 것이다. 특히 난세에는.
    왕건은 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을 환대하였고,
    맛있게 요리하여 신검을 꺾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 하였다.
    견훤은 후백제가 망한지 겨우 며칠 만에 황산 근처의 사찰에서 등창으로 세상을 떠났다.
    독살 되었다는 설도 있다.
    향년 70세, 936년의 일이었다.

    상주 촌구석에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나,
    맨주먹으로 상경하여 스스로의 노력으로 비장의 자리에 올랐고,
    서남해로 발령을 받은 후, 해적들을 비롯한 각종 도적, 호족들을 제압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천년 신라의 심장을 유린하고 고려를 몰아붙여 한반도 최강자가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창업국가들처럼 후계자 문제가 발목을 잡았고, 결국 주적 왕건에게 투항하여,
    자신이 세운 나라를 손수 무너뜨렸다.
    참으로 파란만장하고 영욕이 교차한 인생이었다.

    한나라의 창업주답게 탄생설화가 존재하는데, 그는 기둥만한 지렁이의 자식이었다고 한다.
    지네설화의 변종인데,
    지네설화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무수히 발견되는 설화로서, 아마도 견훤이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나온 이야기일 것이다.
    그 외에 호랑이 젖을 먹고 컸다는 설화도 있는데, 이는 그의 용맹성을 상징하는 것이겠고.

    신라 : 56대 경순왕, 신라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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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부
    피살된 경애왕과는 6촌간으로 이찬 효종의 아들이고 헌강왕의 외손자이다.
    견훤에 의해 임명되긴 하였으나,
    어쨌든 김씨이므로 박씨에게 넘어갔던 왕통을 되찾은 의미가 있다.
    이러한 까닭에,
    경애왕 시기 김씨 중심의 진골귀족들이, 친 고려파인 박씨 왕에 대항하여 친 백제파를 구성하였고,
    이들이 견훤과 내통하여 박씨 왕을 죽이고 김씨를 임명하게 하였다는 설이 존재하는데,
    그간 골품귀족들의 골통스러움에 미루어 가능성이 충분한 이야기기는 하나, 
    물증이 없다.

    927년 즉위하였는데,
    견훤은 지가 세운 왕인데도 봐주지 않고, 연속적으로 변경을 침범하여 성을 빼앗고 곡식을 베어갔다.
    이에 맞선 장수들은 계속 패배하고 항복하고.
    결국 신라는 견훤의 식량 창고 겸 화풀이 대상으로 전락하였으며, 영토도 옛날 사로국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이대로 망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상대적으로 신라에 우호적이었던 고려가 후백제를 누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고창전투에서 왕건이 크게 승리하였다는 낭보가 날아들었다.
    이후 신라 조야의 민심은 유화책을 쓰는 고려 쪽으로 크게 기울었고,
    931년 왕건이 친히 경주를 방문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신라의 호족들이 모두 고려로 귀부하였다.
    그리고, 신하와 백성이 없는 왕을 왕이라 할 수 없으므로, 왕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천년사직을 들어 고려에 투항하였다.
    귀부 당시 아들 마의태자를 비롯한 일부 신하가 극렬히 반대하였다고는 하나, 별 의미 없었고.
    935년 11월의 일이었다.

    약 8년간 근무하고 은퇴한 경순왕은 당시 30대 후반의 나이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퇴직금으로 왕건의 두 딸을 하사받고, 벼슬도 받고, 땅도 받고… 온갖 특혜를 받았으며,
    고려 초의 혼란한 정국에 개입하지 않고 몸을 사린 덕에, 80 너머까지 장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히 눈치보기의 달인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이 양반은 죽어서 희한하게도 무속신이 되어 지금까지도 무당밥을 받아먹고 있다.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이러한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해 준 견훤에게 마음 속으로나마 고마워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자손들인 경주 김씨는 고려의 주요 귀족 가문이 되어 대대손손 떵떵거렸는데,
    그 중 유명한 자들로는 김방경, 김시민, 김구, 김일성 등이 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도 그의 자손이었는데, 그 덕분에 김부식의 살벌한 유교적 명분론에 난도질을
    당하는 것도 피했다.

    아주 운이 좋은 양반이었다.

    신라 : 55대 경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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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위응, 신덕왕의 둘째 아들로서,
    상대등을 지냈고, 경명왕 사후 조카들이 어리다는 이유로 형의 뒤를 이었다.
    조카들이 8형제나 되었으므로 맏이는 제법 나이를 먹었을 것이니,
    섭정을 몇 년하고 친정을 하게 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상당한 실력과 야심을 지닌 인물이었던 듯하다.

    924년 즉위 후 신궁에 제사도 지내기 전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동맹을 맺었는데,
    이듬해에 고울부 장군 능문이 고려에 항복하여 영토가 또 줄었다.
    이 해에는 왕건과 견훤이 서로 인질을 교환하며 화친하여 잠시 천하가 조용하였으나,
    다음 해에 왕건에게 가 있던 견훤의 인질이 죽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이에 열받은 견훤이 고려의 인질을 처형하자,
    이번에는 왕건이 열 받아 견훤이 점령하고 있던 대야성을 함락시키는 등
    천하가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경애왕은 고려와 연합하여 후백제를 공격하며 재기를 꿈꾸었으나,
    진주 일대의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하여 맥이 빠져 버렸고,
    분노한 견훤의 침략까지 받아 포석정에서 피살되고 말았다.
    재위 4년차인 927년이었다.

    견훤은 욍건과 싸우며 북진하던 중 갑자기 방향을 돌려 서라벌을 공격했다고 하는데,
    왕건의 동맹노릇을 하는 같잖은 신라를 먼저 정리하고자 하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놀라 왕건에게 구원을 청했고 왕건은 급보를 받자마자 친히 구원병을 이끌고 달려 왔으나,
    이미 늦어 경애왕이 사망한 후였다.
    분노한 왕건은 철군하는 견훤의 뒤를 쫓았으나, 팔공산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비참하게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견훤이 서라벌로 쳐들어왔을 때 경애왕은 비빈들과 함께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는 중이었는데,
    그 꼴을 본 견훤은 혀를 끌끌 차며 경애왕에게 자살을 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빈들을 모조리 강간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고려의 악의적인 왜곡일 것이다.
    포석정은 왕실 놀이터라기보다는,
    주변에 나정, 신궁 등 성지가 많고 절도 있는 일종의 피신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경애왕의 이전 행적이나 당시 기후 등을 고려할 때,
    포석정에서 술잔을 띄우고 논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모종의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비빈을 강간했다는 부분도 이해하기 곤란하다.
    환갑이 넘은 견훤이, 자기가 거느린 전라도 미녀들로도 벅찼을 텐데, 위험한 적지에서 다 늙은 적국의 왕비를 강간했을까?
    눌러 살 것도 아니고 왕건 때문에 바로 철군해야하는데, 장군들 오입까지 챙겨주며 그 짓을 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믿기 힘들다.

    다음대 경순왕은 김씨이고 견훤이 세운 괴뢰였으므로,
    경애왕이 박씨왕의 마지막이자, 실질적인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