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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4일 오후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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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페이지 67

    신라 : 43대 희강왕, 자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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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제륭, 원성왕의 증손으로 김헌정의 아들이다.
    흥덕왕 사후, 숙부 김균정과 왕위를 놓고 대립하였는데,
    균정은  아들 우징, 조카 예징 그리고 무열왕계인 김양의 지지를 받았고,
    제륭은 시중 김명, 아찬 이홍, 그리고 배훤백의 후원을 받았다.
    양자가 왕위를 놓고 협상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국 서로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그 와중에 균정이 활에 맞아 죽으면서 피비린내 나는 끝장을 보고야 말았다.

    836년 말 왕위에 올라, 김명을 상대등에, 이홍을 시중에 임명하였으나,
    뭘 해보기도 전인 838년, 뭐가 불만이었는지 이 두 공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희강왕은 측근 왕족들과 귀족들이 살해되어 더 이상 희망이 없자, 궁궐에서 목을 매어버렸고.
    1년 남짓의 재위, 참으로 덧없는 일생이었다.

    희강왕이 우리 역사에 몇 안되는 자살한 임금들의 대열에 합류한 후,
    피가 피를 부르는 복수극이 전개되어, 단명하는 왕들이 속출하는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직계를 중용했던 원성왕, 이런 일들을 상상이나 했을까?

    신라 : 42대 흥덕왕, 장보고 등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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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수종 (경휘), 김인겸의 삼남으로, 큰 형 소성왕의 동생이자 사위가 된다.
    작은 형 헌덕왕과 함께 조카이자 처남인 애장왕을 죽였고,
    이찬, 상대등을 거쳐 부군(부왕)에 책봉 되었다.

    826년 헌덕왕이 사망하자 조카들이 있었는 데도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무서운 숙부였나 보다.
    그런데 즉위 2달 만에 조카이자 아내인 장화부인이 사망하였다.
    조카들 킬러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아내는 사랑하였는지, 크게 슬퍼하였고,
    후궁이 있었는데도 이후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아 후사를 보지 못하였다 한다.
    왕비가 남동생을 죽인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듬해에 신궁에 제사 지내었고 당의 책봉을 받았으나,
    헌덕왕을 괴롭혔던 자연재해는 왕이 바뀌었다고 봐주지 않아, 큰 가뭄이 들었다.
    3년에는 민족의 영웅 장보고에게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게 하는 혜안을 보였으며,
    빨리 부자가 되게 해준다며 혹세무민하는 요사스러운 놈을 먼 섬에 귀양 보내었다.
    그리고 당에서 차의 씨앗을 수입하여 지리산 자락에 심게 하였다.
    확실히 흥덕왕은 형보다는 나은 인물이었다.

    7년에는 봄, 여름에 가뭄이 크게 들어 왕이 정전을 피하고 음식도 줄이는 등 근신하였으며, 기우제를 지내었다.
    그러자 하늘도 그 정성에 감복하였는지 비를 내려 주었는데,
    안 되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이놈의 비가 와도, 주책맞게 너무 오는 바람에 홍수가 났고, 농사는 결국 흉작이 되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도적이 되어 살길을 구할 수밖에 없었고.
    8년에도 큰 기근이 들어 각지에 사자를 파견하여 곡식과 베를 하사하며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이래 저래 많이 힘들었는지 시조묘를 배알하기도 하였으나, 역병까지 덮쳐 속수무책이 되었다.
    그래도 왕권강화에는 힘을 기울여 9년에는 김우징을 시중으로 삼았고, 군대를 사열하였으며, 남쪽을 순행하며 물품을 하사하였다.
    10년에 막내 숙부 예양의 아들인 김균정을 상대등으로 삼았고,
    동생 충공의 아들 김명을 시중으로 삼아 신라 후대의 피비린내 나는 왕위 쟁탈전의 씨를 뿌렸다.
    836년, 재위 11년째에 사망하여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향년 60세

    형 헌덕왕이 망쳐 놓은 나라를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러나 연속되는 자연재해에는 속수무책이었고,
    민생을 돌보기 위해 내놓은 대책이란 것들도,
    의식주나 생활용품을 골품에 따라 규제하겠다는 따위의, 근본적인 해결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죽은 아내에 대한 순애보로 후사를 남기지 않아,
    신라 하대의 고질인 왕족 간 왕위 쟁탈전에 기름을 부은 것 또한 실책이라면 실책일 것이다.
    그래도 근신할 줄도 알았고, 나라 안를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위무하는 등 기본 자질은 갖춘 왕이었다.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여 중계무역을 활성화 하였고,
    지리산을 차 재배 단지로 만들어, 차 문화 확산에 기여하는 등의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증하였다.

    신라 : 41대 헌덕왕, 어리석은 인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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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언승, 김인겸의 차남으로 소성왕의 동생이다.
    할아버지 원성왕 시절, 제공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고,
    시중, 이찬, 병부령 등을 역임하며 실력을 키웠다.
    조카인 애장왕이 즉위한 후에는 섭정이 되었으며 이어 상대등에 올라 권력의 정점에 섰다.
    시중자리에 있던 친동생과 협력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애장왕이 친정을 하며 견제를 시도하자, 809년 조카 둘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애장왕이 병사하였다고 속이고 당의 책봉을 받았으며, 이듬해에 신궁에 제사 지내었다.
    4년에 숭정을 발해에 보내어,
    대인수라는 명군을 만나 중흥기를 구가하는 발해의 사정을 살피게 하였다.
    6년, 7년, 8년 연속된 자연재해로 기근이 발생하여, 나라 안에 도적이 들끓었고,
    11년에도 초적이 일어나는 등 뒤숭숭했는데, 나라 밖 사정도 좋지 못하여,
    당에서 이사도의 난이 일어나는 바람에 당의 파병요청에 응하여 3만의 토벌군을 파병해야 했다.
    12년, 13년에도 연속 기근이 들어 자손을 팔아 연명하는 자들까지 있었는데,
    다음 해 14년에 그 유명한 김헌창의 반란이 일어났다.

    김헌창은 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명주군으로 물러나 있던, 무열왕계의 좌장 김주원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정에 참여하였고,
    시중의 자리에도 여러 번 오르는 등 정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헌덕왕이 녹진의 인사원칙에 따라 중앙 요직에는, 무열왕계와 같은 잠재적 경쟁자들을 배제하고,
    자기 직계 자손을 비롯한 측근들만을 등용하는 정책을 시행하였으므로,
    김헌창도 무진주 도독, 청주도독, 웅천주 도독 등으로 계속 전보되었다.
    여러 가지로 불만이 많았을 김헌창은, 웅천주로 전보되었을 때 더 이상 못참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마침 연속되는 자연재해 및 기근으로 인해 팽배해 있던 사회불안과 맞물려,
    순식간에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김헌창은 한 차례 거병으로,
    자신이 도독으로 있던 웅주를 중심으로 무진주(광주와 전남), 완산주(전주와 전북), 청주, 사벌주(상주와 경북 서북 대부분)를 장악하였으며,
    국원경(충주), 서원경(청주), 금관경(김해)의 사신(장관) 및 여러 군, 현의 수령들을 복속시켰는데,
    이는 백제의 전성기 시절에 맞먹는 영토를 확보한 셈이었으니 그 호연지기가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이에 나라를 칭하고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이 전쟁은 단순한 반란이 아닌 통일을 위한 국가 간 전쟁이라고 선전하였으나,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는 실패하여,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명주군국과 연계를 맺는 데는 실패한 것이 뼈 아팠다.
    장웅에게 영천 싸움에서 패하며 기세가 꺾이기 시작하였고, 삼년산성이 있는 보은 싸움에서 결정타를 맞았다.
    성주 전투 등 각지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웅주로 몰렸고, 웅진성에서 농성하였으나 결국 함락되어,
    약 1개월에 걸친 반란의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고, 김헌창은 자살하였다.
    일장춘몽이었다.

    17년에는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북한산주에게 진압되었다.
    그 후에도 김범문은 미련을 못버리고 다시 한 번 봉기하였으나, 이건 그냥 발악 수준이었고.
    이후 무열왕계의 후손들은 진골에서 6두품으로 강등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무진주에서 머리 2, 몸 2, 어깨 4의 아이가 태어났다고 하는데.. 샴쌍둥이이었나 보다.
    이 해에 발해의 남하에 대비하기 위하여 대동강 가에 300리 장성을 쌓았고,
    이듬해인 826년에 사망하여 굴곡진 인생을 마쳤다.

    18년간의 재위였다.
    생기발랄한 조카를 죽이는 패륜을 저지르고 왕위에 올랐으나,
    자연재해와 기근, 그리고 반란에 시달리느라 주름 필 날이 없었다.
    대외 여건 또한 썩 우호적이지는 않아 없는 살림에 성을 쌓아야 했고 파병도 해야 했다.
    이러니 민생은 도탄이었고 산에는 산적, 들에는 초적, 해안가에는 해적이 창궐하였는데,
    일본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신라구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여기에 김헌창의 반란이라는 초유의 전국적 단위 반란을 만났고,
    조기에 진압하지 못하는 바람에, 전국토가 초토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음은 물론,
    국가 기간 방어 시스템까지 무너져, 귀족들의 사병이나 화랑 집단에 의지하여 겨우 진압하였는데,
    이는 결국 후대에 장보고와 같은 지방 호족세력이 난립하게 되는 토양이 되었다.

    나라를 이 꼴로 만들려고 조카들에게 그 몹쓸 짓을 한 것…은 아니겠으나.
    참으로 어리석은 게 인생사라 아니할 수 없다.

    신라 : 40대 애장왕, 안타까운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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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청명, 소성왕의 아들로 서기 800년 13세에 즉위하였다.
    너무 어린 나이였으므로 숙부 언승이 섭정하였고,
    원성왕계의 왕통을 확립하기 위한 언승의 의도였겠지만,
    즉위 이듬해에 무열왕과 문무왕은 따로 분리시키고, 태조부터 애장왕의 고조까지 모시는 오묘를 새로이 구성하였다.
    아무튼 이로서 편법적이지만 황제국을 의미하는 7묘가 완비되었다.

    3년 차에 신궁에 제사지내었고 가야산 해인사를 창건하였다.
    5년에 알천 가에서 열병하며 친정을 준비하였고,
    6년, 친정을 시작하여 공식 20여조를 반포하는 등 율령체제를 확고히 하였다.
    이때 관제 개혁도 같이 시행하였다 하는데, 18살 청년 군주의 의욕적인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7년에 사찰 창건과 불사에 대한 금령을 제정하여, 
    그 동안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폐단이 심해지던  불교계에도 경종을 울렸다.
    자신의 지지 세력일 지라도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순수함이 느껴진다.
    8년에 무열왕계인 김헌창을 시중으로 삼아 호랑이 같은 숙부들을 견제하는 패기만만한 모습을 보였고,
    9년에는 내친 김에 지방행정구역도 개편하여,
    군, 읍의 경계를 나누어 정하는 등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갓 스물 넘은 청년 군주의 의욕적인 정치가, 
    그 동안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숙부들을 자극하였는지, 809년, 동생과 함께 제거 되었다.
    재위는 10년, 22살 나던 해 7월이었다.

    묘호에 슬플 애자가 들어가 그저 불쌍하기만 한 인생을 산 것 같으나,
    나름 패기만만하고 의욕적인 청년 군주였다.
    다만 순수함과 패기만으로 상대하기에는,
    원성왕의 독특한 왕권강화책으로 어린 나이부터 국가 요직을 경험한,
    노회한 숙부들이 너무 벅찬 상대였다는 것이 비극이었다.
    세상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부족하고,
    자기 세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소년왕이 처음부터 전제 군주의 위엄을 갖추기는 무리였을 것이므로, 
    애장왕의 의욕에 찬 왕노릇은,
    그 동안 정권을 담당해 왔던 호랑이 같은 숙부들 눈에는 가소로운 철부지의 객기 정도로 비치는 것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갖잖아도 왕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파멸적인 잠재적 위험 때문에 인내는 길지 않았고, 결국 세상물정 모르는 젊은이의 도전은 숙부들의 한 방에 무너져 슬플 애자를 얻고 말았다.
    소성왕이 몇 년 만이라도 더 살아,
    이 싱싱한 젊은이가 숙부의 섭정를 받지 않고,
    바로 친정을 하여 개혁을 완수하였더라면 어쩌면 명군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풀만 무성하여 더욱 슬픈 애장왕, 애잔하지 않을 수 없다.

    신라 : 39대 소성왕, 덧없는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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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준옹, 원성왕의 장자였던 인겸의 큰아들로서,
    원성왕의 아들들이 다들 병으로 일찍 죽는 바람에 손자가 왕위를 이었다.

    원성왕의 독특한 왕권강화책인 직계중용방침에 따라,
    어려서부터 나랏일을 하여, 대아찬, 시중, 병부령 등을 거쳤고,
    태자가 된지 3년 만인 798년에 왕위에 올랐다.
    왕이 되기 전에 다양한 경험을 쌓았고 태자로 있던 기간도 적당하여, 나름 준비된 왕이었으나,
    아버지를 닮아 몸이 약했는지 2년 만에 병으로 사망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재위 기간이 짧아 업적이랄 게 별로 없으나,
    청주 거로현을 국학생의 녹읍으로 삼아 일종의 장학제도를 마련한 것이 눈에 띤다.
    다들 당으로 유학을 가서 국내 교육이 공동화되는 것이 몸이 아픈 중에도 안타까웠나 보다.
    그 외에는 코끼리 같은 짐승이 나타났다거나 흰 사슴, 흰 까마귀, 2m정도 크기의 인삼 발견 같은 자연 다큐멘타리류의 기사 정도이다.
    800년에 왕자를 태자로 봉하고 덧없는 일생을 마쳤다.

    소성왕이 너무 일찍 죽는 바람에 왕위를 둘러싼 신라 후대의 혼란이 본격적으로 막이 오른다.

    신라 : 38대 원성왕, 하대 왕통의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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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경신, 내물왕 10세손이며, 일길찬을 지낸 김효양의 아들로서,
    무열왕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새로운 왕통의 시조이다.
    혜공왕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김 양상과 함께, 경덕왕의 관제개혁을 폐지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김지정의 난을 진압하면서 혜공왕을 죽이고, 김 양상을 선덕왕으로 세웠으며,
    선덕왕 사후 무열왕계인 김주원의 반발을 억누르고 왕위에 올랐다.

    785년에 즉위한 후 정통성 확보에 몰두하여,
    경덕왕, 성덕왕, 선덕왕 아버지의 사당을 모조리 허물고,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증조부의 사당을 세웠으며,
    내물왕, 무열왕, 문무왕 및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묘를 국가 5묘로 새로이 지정하였다.
    계통이 다른 무열왕과 문무왕을 그냥 둔 것이 좀 의외이긴 하지만,
    이미 민간에서 거의 신급으로 취급 되고 있으며, 불천지위로 선포되어 있는 상태인 이들을 없애는 무리를 하는 것 보다는,
    평범한 귀족이었던 자신의 부친과 조부를 이들과 동급으로 만드는 것이,
    새로운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데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던 듯하다.
    아무튼 이렇게 정통성을 확보한 후, 사신을 당에 보내 관계개선을 모색하였고,
    기근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돌보았다.

    3년에 신궁에 제사 지내었고
    4년에 그 유명한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여 본격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6년에는 벽골제를 증축하는 등 농업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애썼고, 발해에도 사신을 보내었다.
    7년에 왕태자인 장자 인겸이 죽었고, 제공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처리를 잘하였는지 장손인 준옹을 시중에 임명하는 등 흔들림 없는 왕권을 과시하였다.
    8년에는 둘째 아들 의영을 태자로 삼았고 셋째 손자 숭빈을 시중에 임명하였으나.
    10년에 태자 의영이 사망하면서 후계가 손자들 대로 이양되었다.
    둘째 손자 언승을 시중자리에 앉히며 손자들을 본격적으로 등용하였고 봉은사를 창건하였다.
    이듬해에 큰손자 준옹을 태자로 봉했다.
    12년에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규휼하였고, 시중 자리에 있던 손자 언승을 병부령으로 삼았다.
    재위 14년째인 798년 서거하여 괘릉에 묻혔다. 묘호는 열조.

    괘릉이라는 괴상한 이름이 붙은 이유는, 능을 조성한 자리가 본래 절의 연못이 있던 자리인지라,
    묫자리에 물이 차오르는 바람에, 양쪽에 관을 걸어 유골을 안치하였으므로,
    걸 괘자를 써서 괘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물 나오는 자리는 최악의 흉지라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어찌 되었건 괘릉은 신라의 왕릉 중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능 중의 하나로서,
    능 입구의 석상과 석주가 볼만하다.

    원성왕의 13년간의 치세를 보면, 기근과 싸우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애쓴 것이 대부분으로,
    난맥상으로 악명 높은 신라 하대의 출발치고는 나쁘지 않다.
    원성왕은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독서출신과라고도 하는 국가시험 제도로서,
    성적에 따라 상,중,하 3등급으로 나누어 채용 기회를 차등적으로 부여하는 일종의 과거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골품 귀족들의 관직 독점을 견제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원성왕의 고뇌가 담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국사 관련 각종 시험에 단골로 출제되는 대표적인 업적이니 잘 알아두는 것이 좋다.

    원성왕은 독서삼품과로 귀족들을 견제하면서, 상대등, 시중, 병부령 등 권력의 핵심이 되는 관직은 자신의 손자들을 비롯한 직계왕족들이 독점하게 하였다.
    이게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는 기여하였을지 모르나,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애들을, 처음부터 너무 고위직에 배치하여 일의 능률이 떨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고,
    고위직을 경험하며 세력을 키운 애들이 나중에 왕권에도 욕심을 부리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원성왕은 외왕내제를 더욱 강화하여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김주원을 달래기 위해 그를 명주군왕으로 봉한 것도 그 맥락이었다.
    경덕왕, 혜공왕의 전제왕권 강화에 그토록 극렬히 저항했던 원성왕의 변신이 생경하지만,
    당이나 일본 같은 외부요인들도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정권도 안정되어 있었으므로,
    기근만 없었다면 백성들도 살만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선덕왕이 시동을 건 신라 하대가 달리기 시작했다.

    신라 : 37대 선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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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대 선덕왕

    김양상, 내물 마립간의 10세손이며, 미실의 연인, 사다함의 증손이다.
    어머니는 성덕왕의 딸인 사소부인으로. 혜공왕의 고모가 된다.
    선덕여왕과 시호가 같아 혼동할 수 있으나 한자가 다른데, 당시에도 발음이 비슷하여 문제가 되었는지,
    삼국시대 여자 선덕왕을 선덕여왕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경덕왕 말년에 정계에 두각을 나타낸 후 만월부인의 섭정 치하에서 승승장구하였으며,
    혜공왕 10년(774년) 상대등에 올랐고, 귀족세력의 대표가 되었다.
    전제 왕권을 복원하려는 혜공왕과 대립하였고, 왕당파 김지정의 난을 김경신과 함께 진압하였는데,
    그 와중에 혜공왕이 피살되자 혁명 동지 김 경신의 후원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780년의 일이었다.

    즉위 후 김경신을 상대등으로 삼아 혁명정부를 구성하였고,
    이듬해에 신궁에 제사지내었으며 패강진을 개척하였다.
    패강진은 대동강 이남의 평안도 지역으로,
    당시까지도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었으므로, 
    이 지역을 손에 넣어 배후 세력화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신라는 삼한통일 이후 무려 100년 만에 이 지역의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어찌되었건 영토 확장의 업적은 남긴 셈이다.
    하지만 곧 병이 들었고 혁명 동지 김경신에게 양위하려 하였으나,
    무열왕계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는지 무산되었다.
    이듬해인 785년, 당의 책봉을 받았으나 병이 더욱 깊어져 사망하였고, 화장하여 동해에 뿌려졌다.
    재위 기간은 5년, 고작 이정도 영화를 바라고 사촌에게 그 몹쓸 짓을 했나 싶기도 하지만 권력의 속성이 그러한 것을 어찌하랴.

    전 왕들과는 다르게 당의 책봉이 상당히 늦었고,
    그 전까지 심했던 일본과의 갈등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약간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데,
    역사상 신라는 일본과 가까워 교류가 많았고 연오랑 세오녀 설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정치적인 관계도 밀접했다.
    따라서 원래 신라는 친일파 내지 지일파가 주류였는데,
    삼국대립이 격화되면서 일본은 백제에 올인하였고, 당은 신라를 전폭적으로 지원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무열앙을 대표로 하는 친중파가 세력을 얻었을 것이다.
    국가 위기상황이었으므로, 친일파라 해도 이에 대해 별 불만이 없었을 것이나,
    상황이 바뀌어 주적이 중국인 나당전쟁을 치르게 되자,
    다시 배후에 위치한 일본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을 것이고, 친일파들의 역할 또한 증대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당전쟁 이후,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친중파가 득세하여 일본 무시전략으로 일관하자,
    그동안 일본과의 외교를 담당했던 친일파들은 입장이 곤란해졌을 것이고.
    이에 대한 반발 및 갈등이 혜공왕기의 수많은 반란들로 표면화된 것은 아닐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선덕왕의 쿠데타는 친일파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물론…….아닐 수도 있다.

    신라 : 36대 혜공왕, 중대의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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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건운, 40대 초반에 서거한 경덕왕의 아들로, 765년에 불과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모후가 섭정하였고 즉위 이듬해에 신궁에 제사 지내었다.
    4년 차에 첫 번째 반란인 대공, 대렴 형제의 난이 일어났고,
    그로부터 3년 뒤인 재위 6년에는 김유신의 자손인 김융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김유신의 자손들이 핍박을 받았는지, 김유신의 영령이 미추왕릉을 찾아가 민원을 제기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11년은 반란의 해였는지 김은거가 반란을 일으켰고, 두 달 뒤엔 염상, 정문이 반역을 꾀했다.
    12년에는 상대등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 등이 주도하여 경덕왕의 개혁을 취소하자,
    나름 위대했고, 자신을 끔찍이도 아꼈던 아버지의 업적이 물거품이 되는 게 어린 마음에도 안 좋았는지,
    감은사에 제를 지내었고 이어 국학의 강의를 들었다.
    또한 오묘를 손 봐, 쫓겨난 진지왕과 실제로 왕위에 오른 적이 없었던 문흥왕 김용춘의 신위를 옮기고, 그 자리에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성덕왕과 경덕왕의 신위를 모셨으며,
    무열왕과 문무왕을 불천지위로 선포하였다.
    이로서 어찌어찌 7묘가 되어, 황제국의 구색을 갖추었다.
    이는 이제 성년에 도달한 자신의 정통성을 드러내 보이고 친정을 시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후의 기록을 보면 친정 시도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13년에는 고종 사촌이기도 한 김양상과 갈등이 더욱 심해졌고.
    14년에 마침내 친정을 실시하였으나 실권은 여전히 모후와 김양상에게 있었던 듯하다.
    그래도 꾸준히 왕권 강화를 모색하여 같은 무열왕의 후손인 김주원을 시중으로 임명하였고.
    15년에 백좌법회까지 열었으나 김양상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듯하다.
    16년에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켜 김양상, 김경신이 진압하였다는데,
    엉뚱하게도 왕과 왕비가 살해 되었다.
    왕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김양상에게 제거된 것이 아닐까 한다. 780년의 일이었다.

    경덕왕이 그토록 기다린 아들이었으나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일찍 죽는 바람에,
    애가 고생만하다가 제명에 못 죽었다.
    모후라도 성덕왕의 모후인 신목왕후처럼 제 역할을 해 주었다면 좀 나았을 것이나,
    만월부인은 개념이 없었는지 아니면 의도적이었는지, 귀족 세력만 잔뜩 키워 놓았다.
    귀족세력의 대표는 다음 대에 왕위에 오르는 상대등 김양상으로,
    이 야심찬 인물이 만월부인의 묵인 하에 세도를 휘둘렀기에 왕의 권위는 형편없이 추락하였고,
    이에 따라 수많은 반란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혜공왕이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사치와 쾌락만을 추구하였으며, 원래 여자로 태어날 팔자라서 여성 취향이었다는 등 별의 별 악평이 많으나,
    8살이라는 요즈음으로 치면 초등학교에 입학 할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왕위에 올랐으므로,
    제대로 된 훈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반란으로 왕위를 빼앗기고 죽었으므로, 찬탈자들에 의한 왜곡도 많았을 것이다.
    안쓰러운 아이였다.

    어찌되었건 이로써 영광스러운 신라의 전성기, 중대가 끝났고, 무열왕의 직계 왕통이 단절되었으며,
    난맥상의 신라 후대가 시작되었다.

    신라 : 35대 경덕왕, 신라의 마지막 명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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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헌영, 성덕왕의 셋째 아들로,
    형인 효성왕이 후사도 없이 2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사망하여 왕위에 올랐다.
    아마도 김순원이 이러한 사태를 예견하고 경덕왕을 태제로 삼게 한 듯한데,
    정권 막후 실세였던 외척들이 권력을 놓지지 않기 위해 꾸민 심모원려이겠으나,
    권력의 도구로만 이용되었을 그 딸들의 비애와,
    그 사슬에 숨 막혀했을 효성왕, 경덕왕 형제의 고뇌가 느껴져 씁쓸하다.
    즉위 당시 왕비는 김순정의 딸이라는데,
    김순원, 김순정, 둘이 형제가 아니었을까?

    742년 왕위에 올랐고,
    그 해에 일본에서 사신이 왔으나, 애들이 싸가지가 없었는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듬해에 당의 책봉을 받았고 현종이 직접 풀이한 효경을 선물로 받았다.
    왜 하필 효경이었을까?
    외척들에게 시달리는 동방의 아이들이 불쌍해서 아비의 마음으로 선물한 것은 아닐까?
    아무튼 이에 고무되었는지, 아니면 정치적 상황이 변했는지는 모르지만,
    김순원이 짝 지워준 조강지처를 내치고 김의충의 딸을 왕비로 들였다.
    효성왕이 당했던 것을 반대로 되갚아준 셈이었다.
    이후 당에 더욱 밀착하였으며, 자신감이 좀 붙었는지 그 다음 해에 신궁에 제사 지내었다.
    4년에 사정부, 소년감전, 예궁전 등 좀 북한 냄새가 나는 명칭의 기관들을 설치하여 왕권을 강화하였고, 자연재해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돌보았다.
    10년에 불국사를 완공하였다.
    12년에도 일본에서 사신이 왔으나 접견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일본 무시전략인데,
    이에 열 받은 일본은 신라 침략 계획을 세우고 500여척의 배를 준비하며,
    발해에게 협공을 요구하였으나,
    발해는 예전의 신생 소국이 아니라 이미 만주를 지배하는 강국으로서, 문왕이라는 걸출한 임금을 맞아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후예이자 천손임을 자임하는 외왕내제의 국가였으므로,
    일본에 대해도 이제까지의 외교적 수사를 버리고 자존심을 세우는 상황이였다.
    신라를 남북에서 협공하자는 일본의 요구는 발해에게는 뜬금없는 이야기였고,
    국가 이익에도 맞지 않았으므로, 그냥 무시하였다.
    일본만의 단독 침공은 애초부터 무리였으므로 난감하였을 터인데,
    침공을 계획했던 최종 책임자는 그 동안 신라에 쌓인게 많았는지, 단독으로라도 공격하자고 고집을 부렸으나,
    이넘은 국내 정쟁에서도 현실감이 없었는지 결국 정적에게 피살되었다.
    이렇게 되고나니 왜에서 더 이상 신라 침공을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이에 따라 침공계획도 흐지부지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역사의 고비마다 고개를 드는 쪽바리들의 정한론이 시작된 시기였다.

    16년에는 관리 비용이 많이 드는 녹봉제를 없애고 상대적으로 간편한 녹읍제를 시행하여 국가 운영비를 절감하였고,
    제도·지명·관직 등을 당나라식으로 개편하는 한화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여 왕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듬해에는 휴가일수가 60일이 넘은 관리를 해임하는 등 직무감찰을 강화하여 경비를 절감하였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왕자의 출생이라는 경사가 있었다.
    이후에도 자연재해와 싸우며 유교이념에 의한 통치를 계속하였다.
    762년 23년간의 재위를 마치고, 40대 초반의 아까운 나이로 서거 하였다.
    틀림없이 많이 사랑했을 8살짜리 아들이 눈에 밟혀 저승가는 발걸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경덕왕은 형처럼 외척 세력에게 휘둘리지 않고,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여
    수많은 자연재해에도 불구하고 신라를 융성하게 하였다.
    불국사를 비롯한 여러 절을 지었고 황룡사의 종을 주조하였으며, 성덕대왕신종이라 불리는 봉덕사 종의 주조를 시작하였다, 
    이는 불교세력을 이용하여 진골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강하였으나,
    어찌되었건 불교가 융성하였고 향가 작가이기도 한 월명사, 충담사 등이 이름을 얻었다.
    당나라와 교역을 활발히 하였고 산업 발전에도 힘썼으며, 영토도 확장하여 이 시기에 비로소 황해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
    역대 최강, 최고의 전성기였다.
    좀 더 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신라의 마지막 명군이었다.

    왜들 그러는지 알 수는 없으나 신라 전성기의 임금들은 다들 일찍 죽었다.
    그 바람에 전성기가 오래가지 못하였고,
    귀족세력의 대두를 막을 길이 없어 후대의 혼란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장수왕 정도까지 바라지는 않더라도,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만이라도 살아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울 따름이다.

    신라 : 34대 효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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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대 효성왕

    김 승경, 성덕왕의 둘째 아들로서 질풍노도의 시기인 16 ~ 7세 정도에 즉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처럼 모후의 섭정을 한 3 ~ 4년 받았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모후인 소덕왕후는 동생인 경덕왕을 낳고 바로 죽어 버리는 바람에 그러한 복도 없었다.

    아버지 성덕왕의 뒤를 이어 737년에 왕위에 올라,
    즉위하자마자 당의 책봉을 받았고 도덕경을 하사 받았는데,
    도덕경에서 뭔 가를 얻을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고, 그저 당의 호의를 받은 것으로 만족하였을 것이다.
    즉위 3년째에 첫 부인 박씨와 이혼하고 김순원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하는데,
    모후인 소덕왕후도 김순원의 딸이므로 이모를 왕비로 맞이한 것이다.
    원래 족보가 엉망인 신라왕실이므로 이 정도면 못 봐줄 정도는 아닌데,
    문제는 결혼 두 달 만에 동생을 태제로 삼은 것이다.
    이제 갓 20에 도달했을까 말까인 신왕이 새 장가까지 갔는데 동생을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게 이해하기 참으로 난망하지만,  
    아무튼 뭔가 속 사정이 있었으려니 하고 넘어간다 해도,
    이듬해에는 왕이 총애하는 후궁을 왕비 일족이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자, 후궁의 아비가 반란을 일으켰다.
    태제를 임명할 때는 가만히 있던 왕비 일족이, 왕이 총애한다고 후궁을 잡아 죽였고,
    후궁의 애비는 그에 대한 복수를 암살이 아닌 반란으로 하였다…..는 이야기인데,
    왕비의 일족이라면 김순원이 두목일 것이고,
    이 김순원이 효소왕 때 반란과 연루되어 파직되었고,
    성덕왕에게 딸을 후비로 들여보내었던 그 김순원이 확실하다면.
    그는 전 왕과 현 왕 모두에게 장인이면서,
    현 왕과 다음 왕 모두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이자겸의 대선배 쯤 되는 막강한 외척이므로,
    당대의 실세였을 것이고 태제 임명을 비롯한 효성왕기에 발생한 모든 사달의 원흉일 것이다.
    진실은 항상 안개 저 편에 있으므로 뭐가 뭔지 알 수는 없으나,
    뭐가 되었건 효성왕 주변이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겠다.

    재위 6년째인 742년 5월에 사망하여, 짧은 인생을 마쳤는데,
    모후의 이른 부재가 애를 이렇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천성적으로 몸이 약했는지는 모르지만, 
    아직 훈육과 보호가 필요한 나이에 왕이 되어,
    외척 세력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제 명대로 못 산 것이 아닌가 하여 보기에 안쓰럽다.

    시호가 孝成인데, 무슨 효를 이루었는지도 모르겠다.

    신라 : 33대 성덕왕, 전성기를 이어간 명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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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흥광,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서 효소왕의 아우이다.

    702년, 형이 16세에 사망하는 바람에 불과 10대 초반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데,
    애가 어리므로 별수 없이 모후 신목왕후가 또 섭정하였다.
    2대에 걸쳐 섭정을 하며 아들들을 지켜낸 신목왕후의 정치력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으나,
    아무래도 정정이 불안하였는지, 대사면령을 내리고, 관리들의 직급을 올렸으며, 조세를 면제하는 등
    선심정책을 남발하였다.
    2년차에 신궁에 제사 지냈고 선대에 이어 당에 조공하였다.
    이후에도 수시로 조공하였으며 김인문 사후 중단되었던 숙위도 부활하는 등 당과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였다.
    일본과의 관계도 아직은 괜찮았는지 무려 204명에 달하는 일본의 사신을 받기도 하였다.
    즉위 4년차에 장가를 갔으며, 기근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진휼하였고, 부유한 나라의 임금답게,
    이후에도 나라에 기근이 들 때마다 곡식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7년차부터 친정을 하여 길고도 길었던 왕권 공백기를 마감하였다.
    재위 11년, 출가한 김유신의 미망인을 부인으로 봉하고 곡식을 지급하였다.
    호국영령을 위로한 셈인데, 이때부터 왕 노릇을 제대로 하였는지,
    이듬해에 당 현종에게 책봉을 받았다.
    이 해에 중앙관료기구를 정비하는 등 왕권강화에 시동을 걸었다.
    15년에 조강지처라 할 수 있는 성정왕후를 출궁시켰는데,
    합의 이혼이었는지 살 집도 마련해주고 재물도 풍족하게 주었다고 한다.
    19년에는 파직되었던 김순원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김순원의 등장이다.
    해동제국기에 의하면 이 시기에 일본의 서쪽 변방을 쳤다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20년에는 발해의 팽창에 맞서 북쪽 국경에 장성을 쌓았고,
    21년에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하는데,
    실제로 지급한 땅은 얼마 안 되고 대부분은 기왕에 백성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한 것이므로,
    정전제 고유의 이념 구현이라기보다는 세금 징수가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경주 동남쪽에 성을 쌓아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일본과 갈등이 심각해진 듯하다.
    22년에는 당에 미녀를 바쳤으나 반품되었고.
    27년에 사상 처음으로 상대등을 해임하여 전제 왕권의 위엄을 보였다.
    30년에는 동쪽 해안으로 쳐들어온 일본의 병선 300척을 격퇴하였고,
    가을에는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제 멋에 겨운 섬나라 개구리들에게 천하가 넓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32년에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에게 대아찬을 제수하고 명마 한 필을 하사하였으며,
    백관들의 지침서인 백관잠을 지어 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였다.

    이 시기 발해의 무왕에게 두들겨 맞던 당 현종이 신라에게 발해 공격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현종은 604명의 객사를 보내는 한편 김윤중을 장군으로 임명해달고 했다고 한다.
    성덕왕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5만이나 되는 군사를 일으켰는데,
    전쟁을 해보기도 전에 폭설을 만나 길이 막히고, 얼어 죽는 병사가 반을 넘기는 바람에 철수했다고
    한다.
    아마도 전쟁의 의지가 부족했을 것이다.
    발해가 훌륭한 방파제의 역할을 해주고 있는데 뭐 하러 원수를 만들겠는가?
    어찌 되었건 이때부터 당은 신라에게 발해의 견제를 맡겼고, 그 대가로 대동강 이남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인정하였다.
    648년 김춘추와 이세민의 분할 약정 이후 무려 87년 만이었다. 하여튼 이 뙤놈들.
    35년에는 확보한 평양과 ·우두의 지세를 살펴보게 하였고.
    재위 36년 만에 40대 후반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선왕 효소왕이 어린 아이라 10년간 아무 일도 못하였고,성덕왕 또한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므로, 모후인 신목왕후가 두 어린 아들들을 돌보느라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신목왕후는 요석공주의 딸이었다는데,
    신문왕이 나라 셋팅 뿐만 아니라 마누라 셋팅도 잘한 셈이나, 어쨌든 거의 20년 동안 왕권이 공백인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러한 장기간의 공백은 야심가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불만 세력들을 충동질할 개연성이
    충분하였으나,
    국운 융성기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신목왕후가 대단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큰 혼란 없이 청소년기를 보내고 성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 성덕왕의 행운이었다.

    충분한 준비기를 거친 후 왕 노릇을 시작한 성덕왕은,
    안정된 상황에서 각종 제도의 정비와 더불어 정전제까지 실시하는 등 모범적인 전제왕권국가를
    구현하였고, 국가 운영을 본 궤도에 올릴 수 있었다.
    숙명적인 당과의 관계는 발해의 융성 덕분에 이전 전쟁으로 인한 갈등이 완전히 소멸되어,
    나당 동맹에 버금갈 정도로 친밀하였다.
    같은 뿌리라도 할 수 있는 발해와는 그저 소 닭 보듯 하였고 당의 요청에 의한 한 차례의 출병 말고는
    충돌이 없었다.
    한반도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일본과는 서로 외왕내제의 체제였으므로 자존심 싸움을 지속하였는데,
    나당 전쟁기에는 배후의 위협을 두려워한 신라가 저자세를 취하여 왜놈들의 허영을 잔뜩 채워주었으나,
    이제 겁날게 없고 국력에 자신이 생긴 신라는, 왕성국을 칭하며 일본에게 번국을 강요하였다.
    당연히 일본은 격렬하게 항의하였으나, 무시로 일관하였고 쳐들어오면 격퇴하였다.
    이러한 무시전략은 후대로 이어졌고,
    열받은 일본은 이후 본격적인 신라 침공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겼으나,
    발해의 비협조로 무산되었다.

    다행히 오래 재위하여 자칫 혼란에 빠질 수도 있었던 나라를 안정시켰고,
    국력을 확충하여 후대까지 전성기를 이어가게 만들었다.
    명군이었다

    신라 : 32 대 효소왕, 초딩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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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이홍, 신문왕의 아들로 6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16세에 사망했다.
    어린아이가 정무를 살폈을 리는 없으므로 재위 기간 내내 모후가 섭정하였을 것이다.

    692년, 40대 정도일 것으로 추정되는 아까운 나이에 서거한 아버지의 뒤를 이었으며,
    재위 3년에 신궁에 제사 지내었다.
    이무렵 김인문이 당에서 66세의 나이로 죽었다.
    4년에 서시전과 남시전을 설치해 각각 서시와 남시를 관할케 했다.
    7년에는 일본으로부터 조공을 받았고, 발해가 건국하였다.
    이듬해에 당과 화해하며 조공했는데, 발해의 건국 덕분에 측천무후를 설득하기 쉬웠을 것이다.
    9년에 이찬 경영의 모반을 진압했으며, 이와 연루된 중시 김순원을 파직했다.
    그리고 재위 11년 만에 사망했다.

    진평왕의 옥대 장식이 실제 용임을 간파하고 하나를 연못에 넣어 용이 승천하는 것을 목격했다고도 하고,
    잠시 잃어버렸었던 만파식적을 되찾아 만만파파식적이라고 개명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총명한 아이였던 것 같기는 한데,
    너무 일찍 죽어, 왕노릇이 뭐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모후와 대신들이 하자는 대로 하며 살았을 것이므로,
    아버지 신문왕이 노심초사하여 확립한 왕권은 무용지물이었을 것이고,
    귀족세력의 대두도 막지 못했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측천무후가 죽은 효소왕을 위해 정무를 2일간 보지 않았다고 하는데, 왜 그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