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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1일 오전 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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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페이지 64

    고려 : 3대 정종, 천둥에 놀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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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은 왕 요, 야심만만하고 강인한 성격이었다 한다.  
    총 25남 9녀에 달하는 태조의 자녀 중 세 째 아들이고, 
    충주의 대 호족 유 긍달의 외손이자 후백제의 투항 세력을 대표하는 박영규의 사위였다.
    신명순선왕후의 5남 2녀 중, 요절한 형을 대신한 실질적인 맏아들이었으며, 
    친누이 낙랑공주가 경순왕과 결혼하여 신라 왕실과는 사돈 간이었다.
    혜종과는 달리 든든한 배경을 지닌 로열 패일리였던 셈이다. 

    945년 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왕 규를 비롯한 선왕의 측근 세력을 쓸어버렸고, 
    왕식렴의 서경 세력과 동맹을 확실히 하였으며, 
    개국사의 불사리 봉헌에 참여하였고, 경전 간행을 위한 보를 설치하는 등 불교 세력과도 손을 잡았다. 
    그러나, 
    정권 찬탈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여러 세력들과 직, 간접의 원한을 맺게 되었고, 
    정통성이 심하게 훼손되는 바람에 민심은 물론 제 호족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 것이 뼈아팠다.

    야심만만한 젊은 왕은 호족들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는 잠재적 위협이기도 했으므로, 
    약한 왕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호족연맹체국가 고려의 특성상.
    왕당파들을 제외한 다른 호족들은 정통성에 문제가 있는 왕을 거침없이 비판 내지 비난을 했을 것이고, 
    이러한 불경에 열이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든든한 배경에 더해 강력한 동맹까지 가지고 있던 젊은 왕은 근본적인 국가개혁을 원하였고, 
    그 일환으로 서경 천도를 기획하였다.

    천도란, 
    국가의 명운이 걸려 어쩔 수 없이 시행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체제를 개혁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거창한 국책사업이므로,
    원활한 시행을 위해서는,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누를 수 있는 뛰어난 정치력뿐만 아니라, 
    이주해 갈 도시의 기본 인프라 및 방어시스템 구축을 위한 재정적 능력 또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말 그대로 천시, 지리, 인화를 고루 갖추어야 가능한 지난한 사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야심과 능력을 갖춘 탁월한 군주라 할지라도,
    막대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여 함부로 시도하지 못하는 고난도의 일인데,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지 얼마 안 되는 20대 초반의 젊은 왕이…
    무리였다.

    즉위 이듬해에 개경에서 역부를 뽑아 서경으로 보내며 사업에 시동을 건 정종은,
    서경 주변의 성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는 한편 궁궐 공사를 독려하며,
    새 수도 건설에 올인하였다.
    왕이야 첫 사업이자 정권의 명운을 건 일이었으니 죽기 살기로 매달렸겠지만.
    자고로 부역 좋아하는 백성 없고, 세금 좋아하는 귀족 없는 법, 
    부역을 직접 담당해야 하는 개경과 서경의 민심은 악화 되었고, 
    대부분의 재정을 감당해야 하는 지지 세력들의 불만이 고조되었으며, 
    기득권을 빼앗길 것이 확실시 되는 개경세력 등은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결국 왕식렴을 제외한 나머지 제 세력들을 모조리 반대파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거란이 침공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실 거란의 침공 위협은 자초한 면이 크다.
    태조의 과도한 대 거란 적대 정책도 한몫했겠지만, 
    정종이 즉위 초부터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서경 천도를 천명하고 온 나라를 들쑤셔  놓았으니, 
    거란이 가만히 있었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고려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그들 고유의 팽창 의지였는 지는​ 알 수 없으나,
    거란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뭐가 어찌 되었건, 
    본격적인 외부의 위협은 정권의 자격을 시험하는 의미 또한 지니므로, 진지할  필요가 있었기에,
    정종은 사신을 보내 거란을 달래는 한편, 
    방어를 위한 성을 쌓고 30만의 병사로 광천사 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거란과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겉 보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원래 왕권이 별 볼 일 없는 고려에서, 서경 천도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는 어수선한 상황인데…
    30만은 좀 과했다.
    유지, 관리할 ​능력이 없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러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휘권을 호족들에게 넘겼는데, 
    호족이란 기본 속성상 나라의 안위 보다는 가문 또는 세력의 안위를 우선시 하는 족속들이므로, 
    재정 지원도 안 되는 조직을 알뜰히 관리해 줄 인간들은 없었고..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결국 실익도 없이 임금의 권위만 손상시키고만 셈인데,
    결과론이지만​ 이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천도 계획을 중지하고,
    역량을 총동원하여 소규모 친위 군사 조직을 만드는데 집중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정종은 948년 동부 여진에서 보내온 공물을 검열하던 중 갑작스러운 우뢰와 천둥소리에 놀라 
    경기에 들었는데,
    계속 병석에 있다가 25살 나던 949년에, 
    왕식렴이 죽자 아들의 목숨을 보장해 준다는 조건으로 동생 왕 소에게 왕위를 넘기고 죽었으며,
    왕이  죽었다는 소식에 서경의 역부들은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정종의 죽음은 혜종보다 더 어색하다.
    혁명으로 권력을 얻은 24살의 팔팔한 젊은이가 천둥소리에 병을 얻었다는 기록은, 
    탁하니 억하고 죽더라는 옛날 헛소리를 생각나게 하는 믿기 힘든 이야기이다.
    또한 그 대단한 왕식렴이 그냥 죽었고, 
    왕은 친동생에게 아들의 목숨을 구걸하였으며 그 후 바로 죽었다는 것도 이상하다.
    이러한 믿기 힘든 기록들은, 정종이 반대 세력과의 투쟁에서 패배하였음을 시사한다고 할 것이다.

    기록의 이면을 대강 추리해 보면,
    우뢰와 천둥은 두 세력의 충돌을 상징하고, 
    그 충돌의 결과는 왕당파의 중심 인물격인 왕식렴의 제거였으며, 
    아들의 목숨 구걸과 양위는 정종의 항복 선언이었을 것이다.
    정종 사후 평양 역부들이 만세를 불렀다는 것으로 보아 왕의 죽음도 자연사로 보이지는 않고.
    뭐가 어찌 되었건, 씩씩하고 늠름했던 혜종을 병약하고 어리석은 인물로 만들었던 정종이, 
    그 저돌적이고 야심만만했던 삶과 다르게, 고작 천둥소리에 놀라 인생을 마감한 졸장부로 묘사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4년 간의 재위였는데, 
    고작 이 정도 해먹으려고 형을 그토록 핍박하고 수 많은 사람들을 죽였나 싶기도 하지만,
    쿠데타의 과정 중에 일부 호족세력들의 재편이 이루어졌고, 
    서경 천도를 추진하면서 귀족들을 압박하여 왕권을 강화시킨 측면도 있다.

    태조가 나라를 얻기 위해 뿌렸던 씨를 자식들이 거둔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과응보, 자업자득, 권력무상, 공수래 공수거…

    *왕식렴

    태조의 사촌 또는 6촌 동생이라고 한다. 
    뭐가 되었건, 태조가 이복형제도 없는 외아들이었으므로 친동생과 다름없는 가까운 친척이었다.
    왕 륭 일가가 궁예에 투항할 때 행동을 같이 하였으며, 태조의 쿠데타에도 일익을 담당한 듯하다.
    태조가 평양을 수복한 후 그 관리를 맡았으며, 이후 청천강까지 영토를 넓혀 신임을 얻었다.
    북방은 태조의 기반이자 배후로서 극히 중요한 지역이었으므로, 그 관리를 총괄하는 왕 식렴의 정치적 위상 또한  대단했을 것이다.
    통일 전쟁에도 깊숙이 관여하였으며, 유 금필 등의 공신 또는 호족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도 한 듯하다.

    기반이 미약하여 호족들을 통제하기 불가능했던 혜종은,
    또 다른 호족 왕 규와 제휴하여 왕권을 유지하고자 하였고,
    왕 규는 가장 큰 위협인 정종 형제를 제거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사연이야 어떻든 겉보기에는 정권을 잡은 외척이 왕실을 핍박하는, 전형적인 세도정치의 모습이었으므로,
    왕실의 어른인 왕식렴이 보기에 영 마땅치 않았을 것이고, 
    정종 형제의 반격으로 쟁투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혜종보다는 정종이 왕실을 위해 낫다는 판단을 한 듯하다.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왕식렴의 개입은 정쟁의 교착 상태를 일거에 깨뜨렸고,
    혜종의 갑작스러운 병사와 왕규의 어설픈 반란 시도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역사의 기록을 만들었다.

    정치의 전면에 나선 왕식렴은 정종을 왕위에 올린 후,
    나라의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 자신의 근거지인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고자 하였는데,
    천도는 난맥상인 고려의 지배체제를 일거에 바꿀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기는 했으나,
    그만큼 위험 부담이 큰 사업이기도 하였다. 
    예상대로 수 많은 난관들이 발목을 잡았는데, 
    결정적인 장애물은 민심의 이반과 호족들의 비협조 내지 반발이었고, 
    결국 정종의 이상한 발병과 왕 식렴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추진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정종의 발병 원인이 천둥소리라는 황당한 이유인 것으로 보아,
    왕식렴도 곱게 죽은 것은 아닌 듯한데,
    평양의 공사 현장에서 아들이 죽는 바람에 상심하여 죽었다는 설도 있으나, 
    그보다는 독살이나 암살 같은 보다 은밀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혜종기가 왕 규의 시대라면 정종기는 왕식렴의 시대라 할 만 한데, 
    왕 식렴의 기존 위상과 강력한 군사력은 정통성이 빈약한 정종을 떠받치는 힘이었으므로, 
    그의 위세는 혜종기의 왕 규를 능가하였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서경 천도가 이루어졌다면, 
    원래의 의도와는 별개로 왕 식렴을 종주로 하는 왕조를 여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았을 것이고. 
    이는 또 다른 난세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기존 호족들은 물론 또 다른 야심가인 광종을 자극하였을 것이고, 
    혜종기를 방불케 하는 쟁투를 불렀을 것이다.
    싸움의 결과는 광종의 승리였고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었으므로, 
    왕 식렴과 정종은 광종이 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왕식렴,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다 간 난세인이었다.

    고려 : 2대 혜종, 한심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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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 혜(惠),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으나,
    중국놈들은 암군이거나 왕위를 빼앗긴 임금을 모욕하기 위해 이 글자를  사용하는데, 
    한심한 인간쯤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충혜왕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 수준을 넘어가는 인간말종에게는 양(煬)자를 쓰는데, 
    불효막심, 허랑방탕, 음란무도, 후안무치, 가렴주구, 인명경시.. 등등 온갖 나쁜 짓을 다 했다는 뜻으로,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던 수양제 양광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양광의 시호는 원래 ‘명’이었으나,
    수나라의 멸망 후, 이 인간에게 원한이 많았던 당의 건국 세력들이 ‘양’이라고 불러 비하하였는데,
    이렇게 비하한 데에는, 전 황조를 깎아내려 반란을 일으킨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을 것이나, 
    틀린 소리도 아니었으므로 후대의 공감을 얻어 시호처럼 되어 버렸다고 한다.
    혜종은 기질이 호탕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지혜와 용맹이 뛰어난 멋진 태자였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2년 남짓밖에 왕 노릇을 못했으며, 죽어서도 ‘혜’자를 받아야 했을까? 

    휘는 무, 25남 9녀에 달하는 태조의 자식들 중 맏이이다.
    나주 미인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로, 태조의 의지로 태자에 책봉되었고, 
    고귀한 신분임에도 통일 전쟁에서 맹활약하여 일등공신이 되었다.
    장자 상속에 대한 태조의 신념은 통일 후에도 변함이 없어, 후계구도에 흔들림이 없었고,
    943년 태조가 26년간의 재위를 마치고 서거하자 그 유명을 받아 즉위하였다.
    명분이나 자질, 나이, 태조의 심중 등, 무엇 하나 결격 사유가 없는 완벽한 후계자로서 왕위에 올랐으나, 막상 왕 노릇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조정은 이미 너나없이 외척, 공신인 거대 호족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고, 나름의 지분을 가진 이들은 방자한 행동을 넘어 불경도 서슴지 않았는데,
    얼굴에 주름살이 많다며 주름살 대왕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그 주름살이 많은 이유가 태조와 오씨 부인이 정사를 나눌 때 돗자리에 질외 사정을 했기 때문이라는 망측한 소문까지 퍼뜨렸다.
    태조의 호족 우대 및 화합 정책의 부작용이자, 창업국가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황었는데, 
    이러한 기막힌 상황을 타파하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숙청이 필요하였으나, 
    적몰되다시피 한 외가는 논외고, 처가의 무력도 별 볼일 없었으며,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세력이라고는 아버지의 마지막 배려인 고명대신들 밖에 없었던 당시 혜종에게,
    칼바람을 동반한 왕권강화는 택도 없는 일이었다.

    태조는 경기도 광주의 대호족 왕규와 우직한 친위 무장 출신 박술희에게 유명을 남겨,
    애틋한 연인의 소생이자 맏아들인 혜종의 안위를 부탁하였는데,
    왕 규는 수도 인근에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태조에게 두 딸을 시집보낸 외척으로,
    태조의 신임이 두터운 사람이었으나, 군사적 기반은 다른 호족들에 비해 약했다.
    반면에 박 술희는 궁예의 호위병에서 출발하여 대신까지 된 사람이므로,
    그 충성심과 군사적 능력만큼은 출중했을지 모르나, 
    대 호족들을 상대할 만한 정치적 능력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태조는 장단점이 서로 다른 이 둘을 묶어 혜종을 보필하게 함으로서, 
    아들이 안전도 보장받고, 세력 간에 조화를 이루어 화합의 치세를 열어가길 바랐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자상한 아버지의 고심에 찬 배려였으나,
    태조와 달리 혜종이 상대해야 할 적들은 외부의 도적놈들이 아니라, 든든한 외가의 지원을 받는 같은 피를 나눈 이복형제들이었다.
    이 내부의 적들은 다루기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아버지 시대의 적들 보다 훨씬 더 위험하였다.

    혜종의 최대 정적은 충주 유씨의 외손들인 왕 요(정종), 왕 소(광종) 형제였는데,
    야심가였던 왕 요는 동생 왕 소와 함께, 왕의 대리인 격인 왕 규와 즉위 초부터 대립하였고,
    1년여 만에 반란 혐의로 피소되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게 숙청의 신호탄이 되어 외척, 공신들이 줄줄이 멸족되고 왕권이 대폭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나, 
    멸족은 커녕 왕 소가 부마가 되며 더 기세등등해졌다.
    이에 실망한 왕 규는 왕을 갈아치우고 자신의 외손인 광주원군을 세우기  위해,
    박술휘를 귀양 보내었으며, 혜종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였다고 하는데,
    첫 번째 암습 시, 혜종은  침실로 침입한 자객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맨손으로 때려잡으며 무골로서의 위용을 드러내었고, 
    두 번째에는 왕 규가 손수 군사들을 이끌고 벽을 뚫고 들어갔으나, 최지몽의 제보를 받아 미리 피했다고 한다.
    그런데 왕 규는 왜 벽을 뚫고 들어갔을까?
    암살은 은밀함이 생명인데, 군사들을 대동하고 궁궐을 침입한 것으로도 모자라, 벽을 뚫으며 소란을 피운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리고 그 정도 소란을 피웠으면서도 왜 근처를 수색하지 않았을까?
    또한 제보자라는 최지몽은 이후 행적으로 보아, 왕 요의 측근이 분명한데 왜 이 자가 혜종을 도왔을까?
    뭐가 어찌 되었건 이러한 상황 전개는 혜종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결국 병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는데,
    극심한 스트레스에 의한 발병과 사망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전쟁 영웅이자 맨손으로 칼든 자객과 격투를 벌일 정도의 기백을 갖춘 혜종이 그렇게 쉽게 무너졌을까?
    혜종은 말년에 아첨배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신하들이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그만큼 위험했었다는 뜻도 되므로, 사망 또한 정상적인 죽음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혜종은 기 한번 펴보지 못하고 시달리기만 하다가, 
    2년 4개월여의 짧은 재위를 마치고 945년 사망하였는데,
    혜자 묘호를 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절손까지 되었다 하니, 안습이 아닐 수 없다. 

    *왕 규 (함규)

    경기도 광주의 대호족으로 개국공신이며 사성 왕씨이다.
    태조에게 딸 둘을 바쳐 왕자를 생산하게 하였고, 박 술희와 함께 태조의 유명를 받은 고명대신이며,
    혜종에게 나머지 딸을 후궁으로 들인 2대에 걸친 외척이었다.

    외가와 처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던 혜종에게 왕규는 새로 생긴 든든한 처가였으므로, 
    왕 규는 자연스레 왕당파의 수장도 되었을 것이다. 
    명목만 놓고 본다면 당대에 그를 능가하는 스펙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인데,
    이렇게 능란한 처세로 난세를 살아오며 남부러울 것 없게 된 왕 규가,
    어리석은 야심을 품고 실익도 명분도 없는 반란을 획책했다는 것이 왕 규의 난이다.

    정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945년(혜종 2) 왕 규는 야심을 품고,
    임금의 이복동생 요와 소가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무고하였으나, 
    임금은 거짓말임을 알고 더욱 동생들을 사랑하였고,
    또한 점복에 밝은 최지몽이 하늘의 별을 보고 나라에 역적이 일어나겠다고 하니, 
    임금은 왕 규가 자기 동생들을 해치려는 징조로 짐작하여, 소를 부마로 맞이하여 집안을 튼튼하게 해 주었다.
    그러자 왕 규는 외손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려고, 
    밤중에 임금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심복을 몰래 들여보내 죽이려고 하였는데,
    임금이 마침 잠이 깨어 한 주먹으로 이놈을 때려죽인 후 사람을 불러 끌어내게 하여 실패하였다.
    그런데 왕은 이 엄청난 일을 문제 삼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하루는 임금이 몸이 편치 않아 신덕전에 있었는데,
    최지몽이 아뢰기를 장차 변이 있을 것이니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몰래 중광전으로 옮겼는데.
    그날 밤에 정말 왕 규가 심복들을 거느리고 벽을 뚫고 침입하였고,
    임금이 그 자리에 없자,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최지몽에게  “너의 수작이 아니냐?”라고 물었으나,
    최 지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임금도 이를 불문에 붙였다 한다.
    그해(945년)에 혜종이 세상을 떠나고 동생 요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정종인데,
    혜종을 살해하려다 실패했던 왕 규는,
    재빨리 정종의 명령을 사칭하여 왕실에 충성한 박 술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 규의 동태를 전부터 알고 있던 정종은,
    혜종의 병이 위독하자 서경의 수비대장 왕식렴과 미리부터 연락을 해두었고,
    왕 규가 난을 일으키자 왕식렴이 군대를 이끌고 서울(개성)에 들어와 정종을 호위하니,
    왕 규는 감히 움직이지 못했고, 
    이에 왕식렴은 왕 규를 붙잡아 갑곶에 귀양 보냈다가 사람을 보내 죽여 버리고, 
    그의 일당 3백여 명을 처형하였다.
    … 라는 것이 왕규의 난이다.

    이 기록들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왕 규는 왕족을 무고하는 중죄를 지었는데도 별 일 없을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지닌 당당한 세도가였고, 최지몽은 천기를 읽는 도인으로 반란 전문 예언가였다.
    혜종은 까짓 암살쯤은 자신의 무용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 정도로 생각하는 쿨가이였고, 
    이복동생들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이 쿨가이가 안타깝게도 명이 짧아 사망하자, 
    신하들은 그의 어린 아들은 어떻게 되든 말든, 이복 동생을 왕위에 올려 그의 뜻을 기렸는데,
    벽을 뚫고 암살을 하겠다는 발상을 할 정도의 터프가이 왕 규는, 
    귀양 가 있어서 대국에 전혀 영향을 줄 수 없는 동료 고명대신 박 술희를 왕명 사칭까지 해서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미리 준비하고 있던 왕식렴이 눈을 부라리자 꼼짝도 못하고 얌전히 있다가 멸문당하였다.
    ….는 이야기인데, 아닐 것이다.

    왕 규의 난은 승자의 기록이고, 실제로는 왕식렴의 난이라는 말이 있다.
    왕 요와 왕식렴의 난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으나, 
    뭐가 되었건 왕 규가 난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기록의 이면을 추측해 보면,
    야심가는 왕 규가 아니라 왕 요 즉 정종이 되므로, 
    945년 왕 규의 고변은 무고가 아닌 사실이고, 정종 일파에 대한 왕당파의 선전포고라는 의미가 된다.
    이 고변을 계기로 정종을 지지하는 충주 유씨 세력과 왕 규를 비롯한 왕당파 간에 전쟁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암투가 있었으나,
    왕당파가 밀렸고, 결국 유야무야되고 말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최지몽이 정종의 사자로 파견되어 천기를 읽는 도인 행세를 하며 은근한 협박을 하자, 힘으로 안되는 왕당파는 왕 소를 부마로 삼아 적 분열을 노리는 등, 왕이라는 프리미엄을 사용하여 반격을 하였고,
    이에 정종은 혜종을 암살하여 싸움의 종지부를 찍으려 하였으나, 
    혜종의 놀라운 무용과 벽을 뚫는 왕 규의 기민한 대처로 실패하였다.
    이러한 연속된 암살 시도는 왕당파의 경각심을 불러, 혜종 주위에 인의 장막을 치게 만들었는데, 
    이러한 교착상태로 시간을 끌게 되면 현직 왕이 유리해 질 것이 뻔하였므로, 
    상황 타파를 위해 정종은 서경의 군벌 왕식렴을 끌어 들였고,
    왕식렴은 개경으로 들어오자마자 혜종을 제거하고 정종을 옹립하였다.
    왕당파는 이러한 반역에 당연히 반발하였으나, 
    왕식렴이 왕당파의 행동대장격인 박술희를 우선 제거하고 무력으로 밀어 붙이자,
    왕 규는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해보고 패배하였고,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말았다….
    가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진실은 항상 역사의 장막 안에 있다. 

    고려 : 유 금필, 상승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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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주 출신이라고 한다. 
    우리역사에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상승장군으로,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대군을 향해 망설임 없이 돌진하여 적장의 목을 따버리는 여포 같은 장수였다.
    일기토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다. 

    태조의 치세 초반에 서경을 확보하는 등 북방을 개척하여,
    발해유민의 유입의 발판이자 통로가 되게 하였는데,
    이때 여진족 추장들을 능란하게 다루어 대 추장으로 불릴 정도였고, 
    북방이 안정된 후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여 옥천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무찔렀으며,
    전투가 끝나자 마자 태조와 견훤이 직접 겨루는 조물성으로 이동하여 불리한 전황을 바로 뒤집었다.
    견훤은 유 금필이 도착하였다는 말만 듣고도 전의를 상실하여 화친했다고 한다.

    태조는 공산전투에서 패배한 후 전장의 주도권을 잃었고, 이어진 삼년산성 전투에서도 패하여 쫒기게 되었는데,
    축성작업을 감독하고 있던 유금필은 이 첩보를 입수하자마자 신속하게 이동하여 후백제군을 패퇴시키고 태조를 구원하였으며,
    고창 전투에서는 지방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3천여의 군사로 후백제군 8천 여를 살육하기도 하였다.
    고창 전투의 승리는 고려가 다시 전장의 주도권 잡게되는 획기적인 전공이었으나, 
    호사다마였는지 당시 고려 조정의 주류였던 패서계의 견제를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살이 중에도 왕을 원망하지 않고 충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견훤이 고창전투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수군으로 공격을 하자,
    의병을 조직하여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의 수군을 격퇴하였고, 그 공으로 복직되었다.
    후백제가 개경을 공격한 후 여세를 몰아 6년 만에 서라벌로 진군하자 태조는 다급하게 유금필에게 구원을 명하였는데, 
    군사를 모을 시간이 없자 단지 80 여명의 결사대만을 조직하여 출발하였고, 
    신검의 대군과 조우한 유금필은, 이 소수의 군대로 돌격하여 패퇴시킨 후 서라벌에 입성하였다.
    서라벌을 안정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신검군과 맞붙었으나,
    이번엔 아예 박살을 내고 적장 일곱을 사로잡아 버렸다.
    이런 어벤져스급 활약에 태조는 감격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운주전투에서도 직접 선봉에 서서 견훤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으며 적의 수뇌부를 사로잡았다.
    견훤에게 빼앗겼던 나주를 재탈환한 것도, 금산사에서 탈출한 견훤을 맞이한 것도 유금필이었고,
    통일전쟁의 대미라 할 수 있는 일리천 전투에도 말갈병을 이끌고 참가하여 승리에 공헌하였다.
    그리고 941년, 승리의 영광으로 점철된 인생을 마쳤다.

    태조의 에이스로서 무패의 전적을 자랑한다.
    태조가 고비를 맞을 때마다 바람같이 나타나 구원하였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싸우기만 하면 무조건 이겼으며, 중요한 싸움에서는 더 크게 이겼다.
    가히 고려의 가르친링이라 할만하다.
    무용만 높은 것이 아니라 충성심도 대단하여 태조의 오른팔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
    태조가 누린 여러 가지 복중에서도 큰 복이었다.
    태조는 유금필의 딸를 제 9비로 맞이하였고,
    유금필의 자손은 비록 죄를 지었다 해도 문제 삼지 말고 중용하라는 유시를 남겼다고 한다.

    유 금필, 척 준경, 이 의민, 이 성계…싸우면 무조건 이기는 고려 맹장의 계보라 한다.

    고려 : 태조 왕건(3), 투자 유치의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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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는 그다지 강한 임금이 아니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세력을 키운 것이 아니라,
    궁예가 고생 고생하며 만들어 논 것을, 한밤중에 담을 넘어 삼켜버린 것이었기 때문에, 친위 세력이 강할 수 없었고,
    쿠데타에 동조했거나 인정한 세력들도 진심으로 복종했다기 보다는 상황논리에 굴복한 것이었으므로, 언제든 적으로 돌변할 수 있었다.
    민심 또한 불안하여 쿠데타 이후 세금을 낮추고 흑창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나, 철원은 여전히 불온하였다.
    이렇게 위, 아래 모두 편치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이들의 반란 또는 분리를 막고 적극적인 협조를 받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였는데,
    그 특단의 조치라는 것이 철원을 탈출하여 본거지인 송도로 도망을 가는 한편 장가를 많이 가는 것이었다.
    29명의 부인이라는, 많은 혼인 동맹 이 필요했다는 것은 태조의 입지가 그만큼 취약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다.

    뭐 하나 맘 편한 구석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던 태조는,
    즉위 이후 서경을 개척하는 등 북진정책 을 꾸준히 시행하였는데,
    이는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명분상의 이유도 있었겠으나,
    정권의 배후세력 확보라는 보다 절박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느닷없이 전투 전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발해의 유민 이 유입되어,
    부실한 친위 세력을 보강해 주는 한편 통일 전쟁을 거들어주었다.
    이는 그간의 북진정책이 결실을 맺은 아주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자고로 유, 이민 집단이 날 설고 물 설은 땅에 제대로 적응하기까지는, 태생적인 이질적 요소로 인해 많은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법이고, 
    용병 비슷하게 생활해야 했던 발해의 유민들이라면, 
    나라 잃고 남의 나라 땅에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자괴감을 비롯한 내부갈등 및 구성원들의 적응의 정도 차이 등등, 수없이 많은 문제들로 고용주인 태조를 괴롭혔을 것이다.
    발해 유민들은 훌륭하기는 하나 다루기는 힘든 무기라고 할 수 있었다.

    대 거란 정책을 보면,
    신생 소국 주제에, 칼 한 번 맞대지 않은 이웃의 강대국에서 처음 온 사신을 귀양 보내고,
    선물인 낙타를 만부교에 매어 굶겨 죽이는 등 필요 이상으로 적대적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이 정신 나간 짓은 나중에 거란의 대규모 침입의 명분이 되었으므로, 태조의 외교적 실책이 분명하였다.
    그런데, 
    친화력의 달인이고, 천년 신라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주어담을 정도로 탁월한 외교적 감각을 소유한 태조가, 이러한 이상한 짓을 한 이유가 뭘까?
    뭔가 거란에 대단한 유감이 있어야 설명이 가능한데,
    한반도 밖은 커녕 대동강도 한 번 넘어 본적 없는 태조가 거란과 따로 원한을 맺었을 리는 없고,
    태조의 세력 중 거란에 원한이 있는 집단은 발해 유민이 유일하였고, 나머지 세력들은 그저 강건너 불구경이나 하는 정도였을 것이므로,
    아마도 발해 유민들의 민원 때문에 마지 못해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자세한 사연이야 잘 모르겠으나,
    이러한 사실들은 발해 유민들이 그리 맘 편한 친위 세력이 아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이었던 태조는 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했으나,
    당대의 주류였던 호족들의 입장은 또 달랐을 것이다. 
    왕이 못될 바에는 누군가에게 의탁해야 하는데, 당시 선택지는 태조와 견훤 두 곳이었다.
    바로 이웃한 경우는 별 수가 없었겠지만,
    양 세력의 경계지점에서 서식하고 있었거나, 상당한 힘으로 독자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호족들은 선택을 해야 했는데,
    선택은 복잡한 손익 계산이 따르므로 항상, 누구에게나 어려운 것이지만,
    당시와 같은 난세에는 자신은 물론 처자식 그리고 일가친척들의 안녕과도 직결되므로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선택지 두 곳 모두 장단점이 있었고.
    경순왕처럼 둘 사이에 결판이 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운 좋은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미리 선택을 해야 했을 것이다.

    선택을 할 때 최우선적인 고려조건은 물론 생존이었겠으나 그에 못지않게 투항 후의 입지도 중요했을 것인데,
    무장의 카리스마를 지닌 견훤에게 복속한다는 것은, 일인지배체제에 편입되어 부하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을 것이고,
    반면에 많은 호족들과 연합하여 세력을 키운 태조는 주식회사의 대표 비슷하였으므로, 그에게 복속하는 것은 일종의 지분 투자와 같았을 것이다.
    태생적으로 독립적 성향인 호족들에게는 고려가 끌리는 투자처였을 것이나, 문제는 승리를 확신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태조는 고위험 고수익의 위험자산이었던 것이다.
    반면 견훤에 비해 열세였던 태조 입장에서는 지분으로 배당이나 받으려 하거나, 여차하면 말을 갈아타려고 하는 소극적인 호족들 보다는,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생사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호족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양측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결과가 혼인 동맹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이렇게 재산에, 사병에, 딸까지 바친 투자에서 성공하여 나름의 지분을 확보한 호족들은,
    그들 나름대로 기세가 등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들어갈 때 다르고 나갈 때 다른 것이 인지상정이니, 성공한 태조는 이들과 생각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호족들의 준동을 방치해서는 새로운 난세가 시작될 수도 있었는데,
    명태조 주원장처럼 안면몰수하고 사그리 때려잡을 수도 없었던 태조는,
    유력가문의 자제들을 일종의 볼모로 하는 기인 제도를 통하여, 호족들을 견제하고 반란을 억제하였으며,
    공신이나 중앙의 고관을 그 출신 지방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부호장 등의 향직들을 다스리게 함으로써, 일종의 연대책임을 지게 하는 사심관 제도 지방통제의 방편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정도로 지방 세력들을 제대로 통제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호족들의 사병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로 인하여 고려는 호족 연합체 국가로 출발하였고, 
    중앙집권과는 인연이 없는 귀족 중심의 봉건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고려 : 태조 왕건(2), 정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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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의 일생을 살펴보면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우선 당대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돈 많은 호족 가문의 영특한 맏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이 가장 훌륭한 운일 것이고,
    늠름한 외모, 훌륭한 품성 그리고 최고의 교육이라는 엄친아의 3요소를 두루 갖추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운일 것이다.
    비록 좀 위험하기는 했어도, 당대의 영웅 궁예 밑에서 전쟁을 배우고 국정 운영의 노하우를 배운 것도 남들은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이었고,
    궁예가 왕권을 강화하며 부린 광태로 인해, 주군 살해라는 치명적인 오점이 희석되어,
    쿠데타 이후의 혼란을 성공적으로 수습할 수 있었던 것도 운이라면 운일 것이고,
    하필 이 시기에 발해가 멸망하여, 전문 전투 집단이라 할 수 있는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몰려들었고,
    이들이 태조의 힘이 되어 줌에 따라, 쿠데타 이후 자칫 와해될 수도 있었던 고려에 응집력을 선사하였다는 것 또한 천운이었다.
    남들은 하나도 힘든 운을 겹으로 소유하여 천하의 주인이 되었지만,
    이로써 불행 끝 행복 시작은 물론 아니었다.

    태조의 천하는 이질적인 여러 계파로 이루어져 있었다.
    발해계, 신라계, 후백제계, 태봉계, 여타 잡세력 등등, 마치 잡탕과도 같은 이 제 세력들을 모두 끌어
    모은 태조의 능력이 놀랍기는 하지만,
    통일 후 이들의 조화를 유지하며 국가를 운영해 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29번의 혼인을 통해 여러 호족들을 인척관계로 묶고 통제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혼인 가능한 딸 자식이 없는 호족들도 있었고,
    첫 번째 부인 유씨는 태조가 입신하기 전에 맞이한 부인이었으며,
    혜종의 모후가 되는 둘째 부인 오씨는 한미한 가문이었고, 호족 출신이 아닌 후궁들도 있었다.
    이는 태조가 부인을 정략적인 관점에서만 맞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29명은 너무 많다.
    이쯤되면 부인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외척의 희소성이 없어지므로, 별 다른 신분상의 특혜나 특권을 기대하기 힘들어 지게 되는데, 
    이는 외척의 발호를 예방하는 순기능도 있었겠지만, 반대로 왕실을 보위하여 정권을 공고하게 해주는 역할 또한 기대하기 힘들어진다.
    만일 혼인으로 국가의 응집력을 높이려 했다면 유력 가문 서넛과 혼인하는 것으로 끝냈을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당사자들이나 알 것이나,
    뭐가 어찌되었건 태조의 혼인 동맹을 비롯한 각종 호족 유인책들은, 견훤과 자웅을 겨룰 때는 여러 가지로 이로움이 많아서, 
    신라처럼 견훤이 피 흘리며 겨우 얻는 것들을 거의 거저 주우며 쾌재를 부를 수도 있었으나,
    막상 전쟁이 끝나고 통일이 되고 보니 보통 문제가 많은 게 아니었다.

    나름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호족들은 통일 이후, 기존의 세력을 더욱 키우고자 하였고, 
    왕의 장인이라는 타이틀까지 가지고 있던 자들은, 자기 지역의 왕의 대리인 내지는 완벽한 영주 노릇을 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리되면 전국이 소 단위의 왕국으로 쪼개지는 꼴이 되어, 또 다른 난세를 불러올 가능성이 있으므로,
    뭔가 대책이 필요했을 것인데,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29 이나 되는 외척 가문은 너무 많았기에 그 가치가 희석되어,
    한 두 가문의 일방적인 독주를 막는 효과는 있었을 것이고,
    산전수전 다 겪었고 그 능력 또한 출중했던 태조의 생전에는 호족들이 왕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기에, 그럭저럭 나라가 굴러갔으나, 다음 대는 문제가 달랐다.

    혜종의 모후가 되는 장화왕후 오씨와의 로맨스는 유명하긴 하지만,
    본디 오씨 가문은 나주에서 그리 큰 호족이 아니었고,
    그나마 견훤이 인생 후반기 대공세로 나주를 함락시켰을 때 집안이 적몰되다시피 하여, 
    세력은 고사하고 가문의 존립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이었으므로,
    장화왕후와 그 소생인 왕자 무에 대한 지원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런데도 태조는 힘 있는 외척의 세도를 걱정하였는지,
    아니면 맏아들을 제꼈다가 나라가 결단 나버린 견훤의 교훈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장자상속을 일찌감치 선언하고 외가가 거덜나버린 무를 태자로 삼았다. 
    25남 9녀라는 엄청난 수의 자식들을 보유하고 있던 태조에게, 자식 하나하나가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무는 연애결혼으로 태어난 자식이자 전체 맏아들이었으니 아무래도 더 애틋하였을 것이고,
    타고난 무골로 몸도 튼튼하고 통일 전쟁 시 전공도 제법 되는지라, 아버지로서는 흐뭇하였을 것이니,
    왕위를 물려 주어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싶었던 듯하다.
    대호족들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왕자들을 보유하고 있던 외척들은 생각이 달랐다.
    중국의 예를 보더라도, 나라가 안정되어 갈수록 왕권은 강화되고 호족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될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토사구팽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왕위를 둘러싼 각축이 충주 유씨를 비롯한 거대 세력들 간에 시작된 것이다.
    다른 의미의 난세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왕위 계승전에서는,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대리전도 치러줘야 하는 외가의 힘이 절실하나,
    태자 무에게는 그러한 외가가 없었다.
    아버지도 걱정이 되었는지 왕규와 우직한 골수 무장이자 충복인 박 술희에게 태자를 부탁한 모양이나 결과적으로는 너무 안일하였다.
    왕위 계승은 왕권이 신성시 되는 안정적인 왕실에서도 툭하면 사단이 나는 아주 위험한 일인데,
    기세등등한 호족들 간의 균형을, 왕의 권위보다는 태조의 능력으로 겨우 맞추고 있었던 안정과는 거리가 먼 개국 초창기의 상황에서, 
    제대로 된 대책을 세웠어도 시원찮을 판국에,
    그 정도 조치로 세상 경험이 많지도 않고 배경도 보잘 것 없는 젊은이가 무사히 왕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그 안이함이 놀랍다.
    늙어서 감각이 많이 무뎌졌었나 보다.

    태조는 훈요십조를 남겼다고 하는데, 자식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으나 그런 몇 줄의 글 보다는 좀 더 실제적인 것을 남겨 주었어야 했다.

    고려 : 태조 왕건(1), 난세 종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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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악의 해상 호족 왕륭의 맏아들이었다. 
    한 나라의 창업자답게 탄생설화가 존재하는데,
    태양이 겁탈하고, 지렁이가 덮치고 하는 이상 망측한 것이 아니라 좀 학술적이다. 과학적이지는 않다.
    풍수의 대가 도선 대사가 집터를 잡아주었는데,
    이사한 후 어머니 한 씨에게 태기가 있었고, 터가 좋았는지, 돈이 많아서였는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그냥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무사히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였더란다.
    아기가 태어날 때 신비한 광채와 자줏빛 기운이 방 안 가득 빛나고 하루 종일 뜰에 서려 있었다는데,
    이 괴상한 빛이 갓난아기의 시각 발달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나.
    총명과 슬기가 남달랐고, 용모도 훤칠한게 장부다운 기상을 두루 갖추었다고 한다.
    그리고 17살 부터는 남의 집터나 잡아주고 다니던 석학 도선대사에게 군사학과 천문학, 제례법 등을 배웠다. 그는 당대의 엄친아였던 것이다.

    이렇게 시대가 필요로 하는 능력과 배경을 골고루 갖춘 이 아름다운 청년은,
    약관의 나이에 당대의 영웅 궁예의 휘하에 들게 되었고, 명성과 기대에 걸맞게 맹활약하였다.
    궁예의 수족이 되어 전쟁을 수행할 때는,
    싸울 때마다 연전연승하여 궁예의 세력이 한반도 중부까지 확장하는데 기여하는 한편,
    가문의 전공을 살려 후백제와 해상에서 대립하였다.
    903년에는 궁예의 뜻을 받들어 나주를 점령하였으며, 견훤의 근거지인 전라북도까지 공격하였다.
    이 패기 넘치는 멋진 청년은 나주 공략전을 수행하면서 일만 한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하며 버들잎을 띄워주는 방년 17세, 오씨 성의 어여쁜 아가씨에게 애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나주 점령 이후에도 경상도와 전라도 곳곳에서 싸워 승리하였고, 
    913년, 마침내 문무백관의 최고 우두머리인 문하시중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는데,
    승승장구하며 탄탄대로를 달리던 왕건은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는 시중이 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다른 세력들의 견제와 더불어, 왕권강화에 혈안이 되어있던 궁예의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궁예의 충성 시험은 최 응의 기지로 어찌어찌 넘겼으나,
    언제 다시 숙청의 칼날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같은 고민에 빠져있던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권유와,
    당시 같이 살고 있던 신혜왕후 유씨의 격려에 힘입어 한밤중에 궁궐의 담을 넘었다.
    궁예는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해보고 꼴 사납게 철원을 탈출하였고,
    토끼몰이를 당하다 객사하여, 자신의 관심법이라는 신통력이 뻥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918년 42살의 나이에, 궁예를 제거하고 왕 자리를 꿰찬 것까지는 좋았으나 시련도 시작되었다.
    쿠데타 성공 4일 만에 첫 반란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겼고, 청주 출신들의 연속적인 역모에 시달렸으며, 철원 주민들의 적대적인 시선 속에 좌불안석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왕이고 뭐고 일단 살아야겠기에 본거지인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고,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여 각지의 호족들을 포섭하기 시작하였다.
    장가를 많이 갔다.
    그러나 궁예가 남긴 그림자는 깊고도 넓어서,
    웅주(공주) 이흔암과 명주(강릉) 김순식의 반발과 항거라는, 참으로 두려운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청주 출신들의 역모와는 다르게,
    이흔암은 공주성이 후백제로 귀순하는 것도 방치한 채 상경하여 은밀히 세력을 모았는데,
    이러한 교묘한 항거 덕분에,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상황이 한동안 계속되었고, 
    비밀경찰 조직을 운용해서야 겨우 때려잡을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견훤의 아비인 상주의 아자개가 왕건에게 귀순하였다는데,
    다 늙은 영감이 무슨 영화를 바라겠다고 아들 가슴에 못을 박나 그래..
    이흔암을 제거하는 것도 피곤하고 성가신 일이었으나, 진정한 골칫거리는 명주였다.
    김순식은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던 다른 호족들과는 달리, 
    궁예와 가치관을 공유하는 친구로서 진정한 동맹이었고, 영원한 후원자이자 창업 동지였으므로,
    궁예를 살해한 왕건에게 진심으로 분노하였다.
    김순식의 개인적인 분노야 그렇다지만,
    문제는 김순식이 도사리고 있는 명주의 지정학 위치와 그의 군사력이었는데,
    견훤에게 나주만큼이나, 명주는 고려의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치명적인 지역이었고,
    군사력 또한, 전통적으로 영동지방의 중심지였던 명주답게 지역의 맹주급이으므로,
    만일 김순식이 궁예의 복수를 명분으로 봉기하여,
    견훤과 연계를 맺고 철원 방면에서 공격을 가했다면, 고려는 시작하자마자 망했을 것이다.

    이렇게 왕건이 안팎으로 불안하던 시기는,
    반대로 견훤에게는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나,
    그 동안 사나운 중에게 시달리느라 지쳐버린 견훤은,
    그저 궁예의 몰락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는지, 
    왕건에게 축하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고, 몇 번에 걸쳐 신하들 간의 교류를 추진하는 등 뻘 짓을 하였다.
    자기 딴에는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돌보고,
    중국, 일본 등과 외교 관계를 강화하면, 
    자연스럽게 한반도를 대표하는 정부로 인정받을 수 있고,
    천하도 손 쉽게 통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나, 만고의 지 생각이었다.
    당대의 기린아 왕건은 아직 출발도 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920년 견훤이 대야성(합천)을 함락시키자,
    신라는 후백제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옛날 삼국시대에 당나라에 한 것처럼,
    고려를 향해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대었고, 경상도 북부 지역의 신라 호족들 또한 후백제가 아니라 고려에 투항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견훤이 피를 흘려가며 겨우 얻는 것을 왕건은 그냥 줍는 꼴인데, 이러한 양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내부를 안정시키고 힘을 비축한 왕건은 925년 조물성으로 출정하여 후백제군을 축출하면서, 견훤과 본격적인 쟁패에 돌입하려고 하였는데,
    막상 붙어보니 서로의 힘이 비등하여 일단 물러섰다.
    견훤도 ,왕건이 궁예만은 못해도 제법 만만치 않은 적수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서로 인질을 교환하고 화의하였는데,
    견훤은 아내의 친족인 진호를 고려에 보냈으며, 왕건은 사촌 동생 왕신을 후백제에 보내었다.
    왕건 입장에서는 이 시기부터 발해의 유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였으므로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았을 것이고, 
    견훤은 견훤대로 기왕 대야성을 점령한 김에 신라를 마음껏 두들기고 싶었을 것이다. 
    후방의 나주도 걱정되었을 것이고.
    이렇게 서로 다른 꿈을 꾸며 당분간 제 갈 길을 가려고 하였는데,
    불과 6개월 만에 송악에 있던 진호가 덜컥 죽어버리는 바람에 다시 엉망이 되고 말았다. 

    견훤은 왕건이 진호를 죽였다고 펄펄 뛰면서, 왕신을 죽여 버리고 기세등등하게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다시 맞붙은 왕건은 예전의 왕건이 아니었다.
    견훤에 비해 다소 손색이 있던 왕건의 군사력은,
    925년 9월부터 본격화 된, 발해 유민의 유입으로 이미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어있었던 것이다.
    300년이나 지난 일이라 좀 어색하긴 하지만,
    평양을 보유하고 있는지라,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할 수 있었던 고려는,
    진정한 고구려의 후예랄 수 있는 발해가 허무하게 멸망한 후, 
    나라야 망하든 말든 권력투쟁에 여념이 없다가, 졸지에 갈 곳이 없어진 발해의 귀족들이나 무사들에게 안성맞춤의 도피처가 되어 주었고,
    발해에 있을 때부터 전쟁이 주 업무였던 이 유민들은 왕건의 즉시 전력이 되어, 부족한 군사력을 보강하는데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왕건으로서는 횡재를 한 셈이었다.

    전력이 크게 보강된 왕건은 왕신의 죽음에 대한 분노를 마음껏 터뜨렸다.
    왕건은 대야성을 함락시키는 등 심상치 않은 기세를 드러내었는데,
    이에 고무된  신라의 경애왕은 강해진 고려와 동맹을 맺고,
    미약하나마 군대를 파견하여 고려와 연합군을 구성하였다. 신라는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정치력은 좀 떨어질지 몰라도 군사적 능력만큼은 왕건보다 한 수 위였던 견훤은 이 꼴을 보고,  
    고려와 본격적인 쟁패 이전에 신라를 정리하기 위해,
    환갑의 나이임에도 직접 군대를 통솔하고 서라벌을 급습하였다.
    견훤의 허를 찌른 공격에 당황한 왕건이 친히 구원병을 이끌고 급히 달려갔으나,
    이미 경애왕은 변변한 저항도 못해보고 살해된 뒤였고,
    김 부를 왕위에 올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견훤은 전리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말머리를 돌린 뒤였다.
    열 받은 왕건은 추격을 하였고,
    딴에는 퇴로를 차단한다고 팔공산으로 향했으나,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견훤에게 간파당하여 역관광을 당하고 말았다.
    이끌고 갔던 5천의 기병은 거의 전멸하였고, 왕건 자신도 신숭겸의 희생 덕분에 겨우 구사일생하는 치욕을 맛보아야 했다.
    이로써 신라는 후백제의 속국이 되다시피 했고, 경상도 서부 일대가 견훤의 영향권 내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견훤은 여세를 몰아 20년 전에 궁예에게 빼았겼던 나주까지 수복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로써 견훤이 다시 전장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으나, 태조는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새로이 한반도 최강자 된 견훤이, 뛰어난 군사지도자이기는 했으나 훌륭한 정치가는 못되었는지, 점령지역의 인심을 잃는 우를 범한 것이다. 
    자신들을 아무 때나 털어갈 수 있는 식량창고 쯤으로 생각하는 견훤에게 넌더리가 난 경상북도의 호족들은 대거 고려로 귀순해 버렸고,
    견훤에 의해 왕이 된 경순왕 또한 친 고려를 표방하였다.
    이러한 정세 변화와 더불어 발해의 유민들 또한 꾸준히 유입되어, 고려는 다시 체력을 비축하게 되었고,
    930년 고창(안동)전투에서 승리하여, 그 동안의 열세를 만회하기 시작하였다.
    이 전투는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를 생각할 정도로 비관적이었으나,
    희대의 명장  유금필의 활약과, 고창의 호족 김선평, 권 행, 장정필 등 소위 안동 삼태사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고려군은 8천의 후백제군을 거의 전멸시키며 승리하였다.
    이는 이전 나주 공략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왕건의 친화력이 올린 또 한 번의 개가였다.
    삼태사는 각각 안동 김 씨, 안동 권 씨, 안동 장 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고창 전투의 승리 후 경주를 방문한 태조는 경순왕을 비롯한 신라 제 세력들을 모두 확고한 친 고려파로 만들었고,
    그 여파로 강릉과 울산의 110여개 성이 고려에 투항하였으며, 나주도 도로 빼앗아, 견훤의 목줄을 다시 쥐었다.
    전쟁의 주도권을 되찾아 온 것이다.
    이후에도 견훤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이어갔으나, 
    뜻밖에도 견훤이 아들에게 쫓겨나 고려로 귀순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태조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였고, 상보(어르신)라고 부르며 우대하였는데,
    이 꼴을 본 눈치 보기의 달인 경순왕도 뒤질세라 항복하였다.
    이로서 명분이란 명분은 모조리 움켜지게 된 태조는,
    견훤이 귀순한 이듬해인 936년,
    친히 출병하여 후백제의 패륜아 신검을 토벌하여, 후삼국시대라 칭해지는 난세를 끝장 내었다.
    발해 유민을 포함한 민족 국가 KOREA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견훤.
    다른 것은 몰라도 친화력만큼은 문제가 많은 인간이었다, 
    이해관계가 얽힌 호족들이야 그렇다 쳐도 아버지에 이어 아들까지 적이 되었으니,
    일의 성패를 떠나 인간적인 고뇌가 많았을 것이다.

    태조는 고구려 유민의 후예라 하는데, 살던 동네가 송악이니 그렇게 우길 수도 있겠으나,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0년 가까이 되었고, 고증할 만한 문서도 없으니,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좀 거시기하다.
    6대조 강충은 집에 천만금을 쌓아놓고 사는 엄청난 부자였고, 
    조부 작제건은 당숙종의 사생아라고 하는데, 이건 뻥일 것이다.
    아무리 명분이 중요해도 증조모를 불륜녀로 만드면 쓰나? 
    부친 왕륭(용건?)은 배를 타고 다니며 장사를 했다고 한다.
    대대로 앞 글자가 다른 것으로 보아 성씨를 쓰는 전통의 귀족가문은 아니겠고, 
    해상 무역으로 부와 세력을 쌓은 평민 출신의 졸부가문이었을 것이다.
    고대의 해상무역은 반 해적질이므로 청해진 계열과도 어떤 식으로든 연계가 있었을 것이고. 
    뭐가 어찌 되었건 난세에 훌륭하게 어울리는 가문이었다.

    온 집안의 관심과 기대 속에 무럭무럭 자란 아들이,
    꼴불견의 다른 부잣집 아이들과는 달리 영특하고 늠름하였던지, 아버지는 최고의 교육을 베풀었고,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여 궁예에게 투항한 뒤에도,
    전 재산을 들여 아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였다.
    세상 모든 아버지들이 그러하듯, 명문 귀족 가문에 비해 아무래도 손색이 있는 자신의 가문을,
    자식을 통해 업그레드시키고 싶은 욕심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손을 잡고 나타난 왕건은 부모 잘 만나 허우대만 멀쩡한 그냥 도련님이었을 것이므로, 
    자수성가한 궁예에게 처음부터 높이 평가받지는 못했을 것이나,
    교육 잘 받은 이 젊은이는 선입견과는 다르게 난세에 꼭 필요한 탁월한 전쟁수행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후 처리면 전후처리, 일반 행정이면 일반 행정, 나무랄 데가 없었다.

    군주에게 필요한 것들을 고루 갖추어, 신임과 총애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던 이 엄친아는,
    시간이 지날수록 호족들의 중심인물이 되어갔을 것이나, 
    무릇 강한 신하는 군주의 악몽인 법이고, 근본 자체가 다른 왕건은,
    자신만의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던 궁예에게는 더욱 맞지 않는 신발이었을 것이다.
    최대위기는 궁예가 말도 안 되는 독심술로 반역을 추궁할 때였는데,
    당시의 대화를 보면 궁예가 태조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중간에 마음을 바꾼 듯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궁예가 왜 빼어든 칼을 도로 꼽는, 일생일대의 패착을 두었을까 하는 의문도 들지만,
    그 이유가 뭐였든, 궁예의 마음속에 태조를 아끼고 신뢰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적에게서 조차 신뢰를 받는 특이한 성품은 이후에도 고비마다 계속 위력을 발휘하였는데,
    견훤이 왕을 만들어 줬던 눈치왕 경순왕은 말할 것도 없고. 
    아자개는 아들이 왕노릇을 하고 있는 후백제가 아니라 그 경쟁자인 고려에 귀순했고,
    견훤 본인도 말년에 아들에게 쫓겨나자 필생의 적수였던 태조에게 의탁하였다.
    참으로 기가 찰 일이지만, 어쨌든 이 특이한 성품이,
    군대를 부리는 능력은 견훤에 못 미쳤고,
    군신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는 궁예에 비해 한참 부족했던 왕건이라는 인물이,
    당대의 걸출한 영웅들을 모조리 꺾고, 발해의 유민까지 흡수하여,
    한민족의 중시조가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발해 : 15대 대인선 왕, 너무도 허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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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세기 초의 동아시아는 격동 그 자체였다.
    신라는 후삼국으로 분열되어 서로 치고 받느라 정신이 없었고,
    당나라는 황소의 난 이후 주전충에게 나라를 빼앗겨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동안 당나라에 눌려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던 거란은, 야율아보기라는 걸출한 영웅을 만나 무섭게 팽창하고 있었고.
    천하를 뺑 둘러보아도 어디 한 군데 조용한 곳이 없는 그야말로 난세였다.

    이 격동의 10세기 초에 즉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은 거란의 팽창에 두려움을 느끼고, 이웃한 여러 나라와 힘을 합쳐 거란을 막고자 하였으나,
    하나같이 제 코가 석자라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도 20년 가까이 거란의 준동을 어찌어찌 막으며 버텨왔으나, 924년, 요동 전투의 승리를 끝으로 운이 다하였다.

    925년 12월 21일,
    거란은 지난 요동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20여 년 동안 아무리 두들겨도 꿈쩍도 않는 요동방어선은 내버려두고,
    부여부를 직공하여 포위 3일 만에 함락시켰다.
    당황한 왕은 주변을 닥닥 긁어모은 군사 3만을 노상에게 주어 거란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노상은 맥없이 패하며 왕의 마지막 밑천을 날려버렸고,
    거란은 단숨에 수도, 상경용천부을 포위하였다.
    왕은 백성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리고 결사항전 의지를 표명했으나, 백성들은 단체로 피난을 떠났고.
    포위된 지 4일, 거란과 전투가 시작된 지 불과 15일 만인 926년 1월 14일,
    왕과 300여 명의 신하들은 변변한 저항도 못해보고 야율아보기에게 무릎을 꿇었다.
    야율아보기는 왕을 처음엔 정성껏 대접했으나, 
    성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였고 발해가 다시 저항하자, 
    열 받은 야율아보기는 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왕과 왕후를 거란 본토로 끌고 갔는데,
    왕과 왕후에게 각각 지들 부부가 탄 말의 이름인 오로고와 아리지라고 부르며 모욕했다고 한다.
    21년간의 재위였다.

    융성했던 발해가 어째서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 것일까?
    수도와 인접해있어서 전략적 중요성이 매우 높았던, 부여부의 함락이 패전의 결정적 이유라는데,
    지리적 요건 상, 요동이 대당 요새라면 부여부는 대 거란 방어기지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는 당이 맛이 간 상태였기 때문에 요동도 대 거란 방어 임무를 주로 수행했을 것인데,
    왜 발해는 주력을 요동에만 모아두고 부여부의 방비를 그렇게 허술하게 했을까?
    그리고 부여부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요동의 주력들은 뭘 하고 있었기에,
    왕은 요동의 군사들을 움직이지 않고 수도의 병력을 빼어 노성에게 주었던 것일까?
    또한 왕은 결사항전의지를 불태우고 성은 포위되었는데, 백성들은 어떻게 단체로 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
    거란과 사전교감이 있던 유력자가 왕명을 거역하고 백성들을 빼돌린 것은 아닐까?
    그리고 5경 62주를 자랑했던 발해였는데, 나머지 지역들은 수도가 함락되는 동안 뭐하고 있었을까?

    15대 228년의 역사를 가진,
    나름의 강국 발해가 이렇게 허망한 최후를 맞이한 이유로는,
    대현석 왕 시기부터 이어온 귀족들의 권력다툼 및 분열, 흑수말갈을 비롯한 말갈 제 부족들의 반발,
    백두산 화산 폭발 등의 자연재해, 민심이반 등이 거론되는데, 
    한,두가지 원인 때문이라기보다는 위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합되어, 거란과의 싸움에 힘을 효과적으로 결집시키지 못한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발해는 고구려처럼 진을 다 빼고 끌만큼 끌다가 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잔존세력을 남겼는데,
    이들 중 일부는 고려에 귀부하여 왕건의 든든한 무력기반이 되었고, 통일 전쟁에 기여하였다.
    이것이 고려가 발해를 흡수하였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으나,
    대부분의 백성들과 다수의 세력들은 만주에 남았고, 고려와 관계없이 200년의 세월동안 줄기차게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일 이 시기에, 한반도에 통일된 세력이 있어서, 옛날 광개토대왕이 신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거란을 막아내고 발해를 보호국으로 삼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든다.

    대인선 왕.
    정신없는 시기에 왕 노릇하느라 고생이 많았을 것이 분명하나. 
    내치, 외치의 기록이 거의 없어 동정조차  받지 못하는 비운의 왕이다.

    발해 : 14대 대위해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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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위 기간이 12년인데,
    알려진 바가 발해왕 중 가장 적다.

    누락되었다가 20세기에 등재 되었는데,
    누구의 자식인지, 언제 즉위하였는지도 모르고,
    다음 대 대인선 왕과의 관계도 확실하지 않다.

    발해 : 13대 대현석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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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건황 왕의 아들이고, 재위기간이 24년이다.
    24년 동안 뭔 짓을 했는지,
    이때를 기점으로 중앙귀족들의 권력투쟁이 심해지고 발해에 망조가 들기 시작하였다.
    발해사에는 누락된 왕이 많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 기간 동안  여러 왕이 교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인수, 대이진, 대건황으로 이어진 60 여년, 이 평온과 영광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발해 : 12대 대건황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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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년 동안 재위했는데,
    당과 일본에 사신을 보낸 기록 말고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발해 : 11대 대이진 왕, 최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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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 왕의 시호를 기록한 신당서의 발해국기가 대이진 왕 시기에 작성되었고, 
    그 이후의 문서에는 시호가 기록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대이진 왕 이후부터는 시호를 모른다.

    아버지 대신덕이 일찍 죽어, 선왕의 손자로 옥좌에 앉았다.
    아들들을 당나라에 수차례 파견하는 등 당의 문화를 적극 수용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5경15부 62주로 이루어진 행정구역의 확정과 중앙집권적인 행정 제도를 확립하였다.
    발해를 율령제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고,
    군사 기구를 발전시켜 모병제에 의한 상비군을 편성하는 등,
    할아버지의 업적을 발판 삼아 발해를 크게 융성시켰다.
    인구도 발해 역사상 가장 많은 약 300만이었다고 한다.
    이때가 발해의 최전성기였을 것이나 아쉽게도 기록이 별로 없다.

    장성한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 동생 대건황이 뒤를 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건 걸까?

    발해 : 10대 선왕, 최전성기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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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 인수, 대 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의 4세손이다.
    대 조영의 직계후손들이 권력투쟁에 골몰하며 상잔하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정권을 잡았는지, 
    아니면 실력으로 정권을 탈취했는지는 모르나,
    발해 왕가의 계보를 바꾸었고 쇠퇴기의 나라를 부흥시켜 해동성국으로 만들었다.

    발해가 날 새는 줄도 모르고 권력 노름에만 몰두하고 있던 20여 년 동안, 
    무왕, 문왕기에 복속 되었던 세력들 중 일부는 독립하거나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우루, 월희, 흑수 같은 세력이 큰 말갈 부족들은 당나라에 직접 조공하였고, 
    요동에는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는 세력이 자리를 잡았으며,
    대동강 이북지역도 반독립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쇠퇴기에 접어든 국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선왕은 즉위하자마자 정복활동을 벌여,
    호랑이 없는 산에서 왕 노릇을 하던 말갈들을 때려잡기 시작하였는데,
    우루, 월희의 지역에는 군현을 설치하였고, 흑수말갈에 대한 영향력도 회복하였으며,
    요동의 소고구려도 병탄하여 군현을 설치하였고, 대동강 이북지역도 회복하였다.
    2년 만에 아무르 강 유역에서 요동반도, 대동강에 이르는 지역까지 평정하여, 발해의 판도를 문왕시기로 되돌려 버린 것이다.
    반면 당과는 교역을 더욱 활성화하였으며,
    당 헌종의 번진 토벌 시, 평로치청번진의 구원요청을 무시하는 등 군사적으로 엮이는 것을 피하고, 평화기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5경 15부 62주를 완전히 정비하였다.
    마치 문왕의 환생을 보는 듯하다.

    군제도 개편하여 좌우삼군, 120사 및 임금을 지키는 금군인 좌우신책군 등을 설치하였다.
    이는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이기는 하였을 것이나,
    왕의 비명횡사로 인한 정정 불안을 방지하는 효과도 분명 있었을 것이고, 
    대외 팽창으로 넓어진 영토에 걸맞는 군 조직을 갖춤으로서 사회에 안정감을 주기도 하였을 것이다..
    재위 12년 동안 초기 2년을 제외한 나머지 기간 동안은 내정에만 집중하였으므로,
    많은 업적이 있었을 것이나, 아쉽게도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아마도 흐트러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반발세력을 잠재우고, 이탈 세력을 때려잡고 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었을 것이다.
    그 사이 사이, 당과 일본에 사신도 보내고, 교역도 활성화 시키고, 학문도 진흥시키고, 유학생도 보내고.

    창업에 버금가는 힘든 일이었을 것이나,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발해의 최전성기를 활짝 연 임금이었다. 연호는 건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