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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0일 오전 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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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페이지 63

    고려 : 11대 문종, 고려의 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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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 휘
    김은부의 둘째 딸 원혜왕후의 소생이다.
    원혜왕후는 언니와 함께 현종에게 시집갔으나, 결혼한 지 10여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만 비운의 여인이었다.
    현종은 왕자를 둘씩이나 생산한 첫째 아내가 사망하자, 
    아들을 더 낳고 싶은 욕심인지 아니면 남겨진 어린 자식들에 대한 배려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 시집 안 간 처제를 마저 입궁시켜 세 자매를 모두 취하는, 당시로는 일반적이었으나,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상당히 변태적인 남자의 로망을 실현하였는데,
    김은부의 딸들은 이상하게도 명이 짧아 남편이 죽기 전에 모두 사망하였고,
    현종마저도 그간의 고생이 무색하게 불과 40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그들의 자식들은 어린 나이에 의지할 곳 하나 없던 아버지의 팔자를 그대로 이어받게 되어,
    정치 상황에 따라서는 아버지처럼 목숨부지하기에 급급한, 가련한 신세가 될 수도 있었으나,
    다행히 당대에 고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아버지의 전우들 중에는 별다른 야심가가 없었는지,
    문종의 이복형들은 비록 상징적인 역할에 불과했을 것이나, 각각 16, 17세라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무난히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초창기 로마 원로원처럼 모범적인 귀족정이 구현된 시기였던 셈인데,
    당대 귀족들의 인품이나 식견이 다른 시대와 다르게 유달리 뛰어났던 덕분…은  아닐 것이고.
    현종기 거란의 침입과 격퇴 과정을 거치며 형성되었고, 
    이후 지속된 거란의 위협에 대처하면서 유지 강화된 당시의 건강한 정치 문화가,
    연속된 소년왕의 등극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발생할 수도 있었던 혼란을 방지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사망한 정종은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복동생에게 양위를 하였는데,
    현대적 관점이라면 나라의 안정적 운영을 위한 당연한 조치로서 그렇게 안하는 것이 더 이상하겠지만,
    혈통을 중시하던 당시 왕가의 관행으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는 남다른 형제애와,
    핏덩이가 등극함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염려한 정종의 우국충정이었을 수도 있고,
    당시 고려의 주인 격이었던 문벌 귀족들의 의지였을 수도 있으나,
    뭐가 되었건 고려의 정치적 환경이 절대 왕권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 또한 의미한다 하겠다.

    어려서 부터 활쏘기와 학문을 좋아했으며, 
    이복형 정종의 사랑과 신임을 받아 왕실의 출납을 담당하는 내사령의 지위에 있었던 문종은 ​1046년, 28살이라는 딱 좋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는데,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어리둥절한 얼굴로 귀족 할아버지들의 눈치만 살펴야 했던 이복 형들의
    처지에 비하면,
    남자로서 신체적 능력이 최고조에 달하고, 세상 물정에 대한 식견도 상당히 갖춘 나이에 즉위하여, ​
    조정의 한 축으로 바로 기능할 수 있었던 문종은 상당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행운을 바탕으로 귀족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이상을 펼치게 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평화기의 특권층들은 사치와 낭비를 일삼고 죄의식 없이 전횡을 부리는 것이
    일상이고,
    고려도 사회가 안정되어 감에 따라 이러한 독버섯들이 자라기 좋은 토양이 되었으므로,
    이에 대한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했으나,
    왕권이 약했던 만큼, 이는 거란하고 전쟁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활력을 유지하고 건강하게 발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였으므로,
    의식 있는 신왕의 시선이 이들에게로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그 첫 번째 회초리를 맞은 것은 윤경회였다 .

    윤경회는 불경을 서로 돌려가며 읽는 의식으로 이게 무슨 문제일까 싶지만,
    무릇 모든 행사에는 돈이 들고, 재원의 조달과 집행 과정에서 잡음이 생기기 쉬운 법인데,
    당시에는 전국의 각 주, 부, 군, 현에서 서로 경쟁적으로 윤경회를 성대하게 치르는 바람에,
    이 행사는 비리의 온상이자 백성들을 착취하는 수단이 되어 있었다.
    문종은 윤경회 자체를 손대지는 않았지만 놀이화는 엄격히 금하였으며,
    내친 김에 최 충에게 명하여 율령과 출판 그리고 결제 시스템을 손보게 하였다.
    사치와 낭비로 백성들의 부담이 크니 근검절약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라는 것이었으니,
    나무랄 데 없는 명분이요 적절한 조치였으나,
    그건 고생하던 백성들의 입장이었을 뿐이고, 꿀단지를 뺏긴 쪽에서는 아무래도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문종은 ​솔선수범하여 몸소 검소한 생활을 실천함으로써 이들의 입을 막아 버렸다.
    정치가 뭔 지를 아는 양반이었다.​
    이듬해에는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 모순된 율령들을 손보았으며,
    사형수들은 세 번의 심사를 거치게 하는 삼복제를 시행하게 하였다.
    이러한 공정함을 추구하는 형벌 개념은, 나중에 죄수 심문시 3명의 형관을 입회하게 하는 삼원신수법을 낳았고, 고려를 선진적인 사법체계를 가진 나라로 만들었다.

    ​귀족들에게 견제구를 날림과 동시에 애민하는 왕으로서의 이미지까지 구축한 문종은은 역대 고려왕들의 숙원인 지방제도를 본격적으로 손보아,
    기존 12 주, 절도사 제도를 폐지하고 5도호부 75도로 나누어 안무사를 배치했으며,
    이후 4도호부 8목 56지주 56군사 18진장 20현령으로 다시 개편하여 지방 지배력을 높였다.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중앙의 권력을 공고히 함으로써 자연스레 왕의 권위를 높이는 전략은,
    왕권 강화가 당면의 목표인 고려왕으로서는, 탁월한 수순이요 최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역대 언제나 왕권의 대척점에 서 있었던 문벌 귀족들에게는 적신호가 켜진 것이었다.
    문종은 심기가 불편했을 이들을 달래기 위해,
    5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상속이 가능한 일정량의 토지를 지급하는 공음전시과를 시행하였는데,
    공음전시과는 나중에 경정전시과로 개정되어 고려 멸망 시까지 지속되었다.
    고려 관리들의 봉급체계를 완성한 것이다.
    이렇게 귀족들에게 당근을 물린 문종은 본격적인 애민 정책을 실시하였다.
    재면법과 답험손실법을 제정하여 천재지변 등으로 손실을 입은 농민들의 시름을 덜어주었고,
    땅의 등급에 따라 세금의 차등을 두는 전품제를 도입하여 농민들의 세부담을 현격하게 줄여주었다.
    온 백성이 임금님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그동안 왕들의 보호자이자 아버지 역할을 해왔던 문벌 귀족들에게 은혜를 갚고,
    백성들까지 어루만진 문종은 본격적인 왕권 강화에도 시동을 걸었다.

    역대 한반도의 왕들이 귀족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즐겨 사용한 방법은 불교세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는데,문종 또한 최충을 비롯한 문신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경 인근에 흥왕사를 창건하여 그 유구한 전통의 맥을 이었다.
    절 하나 짓는다고 왕권이 강화되면 얼마나 될까 싶지만,
    흥왕사는 경복궁만한 면적에 ​2800여 칸의 건물을 배치한 규모가 거의 왕궁 수준의 절이었고,
    유사시 승병으로 돌변할 수 있는 상주인원만 수천 명, 거기에  주변을 성벽으로 둘러싸기까지 하였으니,
    비록 겉모습은 절이었으나 막강한 친위세력이 상주하는 개경인근의 거대 요새나 다름없었다.
    문종은 금, 은을 시주하여 나중에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지는 화려한 금탑을 조성하게 하였는데,
    이는 평소 근검절약을 강조하며 검소한 생활을 했던 그의 국정 방침과는 배치되는 것이었고, 
    경건한 신앙심을 표현했다 해도 과한 양이었다.
    왜 그랬을까?
    문종의 의도가 뭐였든,
    압도적인 부의 상징인 금탑주위를 돌고 있는,
    호국사상 및 왕즉불 사상으로 무장한 수천명의 중들에게 귀족들이 받는 압박감은 상당하였을 것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의 출현이었다.​
    이 요새의 첫 번째 주지는 문종의 넷째 아들 대각국사 의천이었고,
    의천은 교선 양종의 통합을 추진하여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문종은 불교만을 편애한 것이 아니라 유학도 장려하여, 일명 해동공자 최 충의 적극적인 협력 또한
    받을 수 있었는데,
    이 시기에 성립된 최충의 9 재를 비롯한 사학 12도는 나중에 공교육을 무너뜨리고,
    족벌이 판치던 고려사회에 학벌이라는 병폐를 추가하게 되지만 ,
    뭐든 처음에는 긍정적인 면이 많으므로 문치의 시대를 이끄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문종은 평화기에 소외되기 쉬운 무장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아,
    상장군의 직급을 6부의 상서보다 높게 배분하여 그들의 충성도 이끌어 내었다.
    가히 조화와 균형의 달인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그리도 빈번했던 자연재해도 뜸하였는지,
    나라의 창고에는 해마다 곡식이 늘어나고, 백성들은 풍요로웠으며,
    상업도 발달하여 개성에 이슬람 상인이 급격히 늘었다고 한다. Korea가 만방에 알려진 시기였다.

    빼어난 내치는 자연스레 국방력 강화로도 이어져,
    철모르고 준동하는 여진 촌놈들은 매로 다스려 대국의 위엄을 보였으며,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리고 압록강에서 깔짝대는 거란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송과 단독으로 수교하여, 거란의 어쭙잖은 종주권 타령을 잠재웠다.
    명실상부한 동북아의 균형자로 등극한 ​것이다.
    선대부터 내려온 투쟁의 종지부를 찍고 고구려 장수왕기에 버금가는 외교적 위상을 누렸으니,
    감개무량하였을 것이다.

    ​내, 외치를 가리지 않는 흠잡을 데 없는 왕의 통치라 하더라도,
    모두가 만족하는 이상 사회는 아니므로 불만세력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고, 반란모의도 있었는데,
    시대의 대세는 이들의 움직임을 모의에 불과한 찻잔 속의 태풍으로 만들었고,
    수년이 지나 사후 보고를 받게 된 문종은,
    버르장머리 없는 주동자 거신만 죽여 버리고 나머지는 가볍게 처리하여,
    법치가 이루어지는 태평성대임을 만방에 과시하였다.

    ​문종 치세의 부정적인 면으로 많이 회자되는 것은, 문벌 귀족의 세력 강화, 사학의 창궐, 외척 세력의
    전횡 등인데,
    태생적으로 호족 연합체 성격이 짙었던 고려는, 절대 왕권과 인연이 없었기에,
    광종을 제외한 왕들은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조정자의 역할을 벗어나기 힘들었으므로,
    이러한 고려의 한게를 고려하면, 문종은 모범적인 고려왕이었고 왕권도 강한 편이었다.​
    사학은 사승을 만들고 그렇게 굳어진 관계는 학파를 만들기도 하는데,
    이는 학문의 발달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다지 나쁠 것이 없으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스승과 제자로 이어지는 배타성이 강해,
    국가적 위기 상황이 아닌 평화기에는, 임금의 명령보다는 제 스승의 뜻을 무겁게 여기고,
    대국적 관점 보다는 자파의 이익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단점 때문에 역대 의식 있는 왕들은 모두 공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는데,
    거의 언제나 실패하였다.​
    따라서 사학의 창궐은 고려를 배부르고 등 따습게 만든 문종의 실책이라기 보다는,
    공자의 사설학원에서 출발한 유교의 속성에서 비롯된 면이 크다고 할 것이다.
    문종은 아버지처럼 세 자매를 동시에 아내로 맞아들여 경원 이씨를 강력한 외척 세력으로 만들어 주었는데, 세 자매가 모두 미인이었기 때문에 그랬을…..리는 없고, 
    아버지처럼 취약한 왕권을 보완하기 위해 몰아주기를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외척세력은 어느 왕조에서나 쓰기에 따라서는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었는데,
    경원 이씨 세도의 첫 번째 주자인 이자연은 후대와 다르게,
    최충과 더불어 문종의 든든한 국정 파트너이자 문치의 시대를 여는 주역으로서,
    정권을 안정시키고 나라의 발전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37년간을 재위하며  고려의 황금기를 이룩한 문종,
    그의 장수는 당시를 살아간 백성들의 홍복이었고,
    고려가 500년 가까운 역사를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세종대왕이 따로 없는 위대한 임금이었다.

    프레스콜 질의응답으로 알아보는 대한민국 최초 시즌제 뮤지컬<셜록홈즈:사라진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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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이승연 문화전문기자] <셜록홈즈>는 원작자가 만든 고유의 인격과 독특한 매력을 유지하는 불사조 같은 캐릭터면서도 그 안에서 다양하게 재창조되며 지금까지도 다양한 장르로 재창작 및 변환되며 명작의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다.  6년 전인 2014년 트라이 아웃 공연 <셜록홈즈2: 블러디 게임>에서 당시 아쉬웠던 부분을 수정하고, 드라마를 극대화해 줄 새로운 넘버를 추가하여 본격 스릴러 장르로 돌아왔다. 뮤지컬 셜록홈즈를 봐야 하는 이유로는 창작 뮤지컬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의 높은 퀄리티’와 ‘한국 최초 시즌제 뮤지컬’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사진=이승연 문화전문기자

    지난(2월 20일) 오후 서울에 위치한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열린 프레스콜에서 이승헌, 김찬호, 이주광, 권민제, 정명은, 송용진, 안재욱, 이영미, 여은, 이지훈, 산들, 켄, 김법래, 지혜근 배우가 참석했다. 넘버시연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안재욱 배우는 “사랑받는 캐릭터에 있어서 부담감은 있었지만, 책, 영화, 드라마등 많은 매체를 통해서 작품을 접해왔다. 뮤지컬을 위해서 다시 보진 않았고 나만의 셜록을 만들려고 했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만의 셜록홈즈 표현 방법으로는 “당연하게 사건 해결은 명석한 두뇌로 홈즈답게 했겠지만 유쾌함과 진지함과의 대비를 보여주려고 했다. 늘 밝거나 어두운 게 아니라 심리를 보여줄 수 있는 구성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잘하면 될 거 같다.”라며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배우 안재욱은 지난 2월 뮤지컬 ‘영웅’ 출연 중 음주운전에 적발돼 면허 정지 처분을 받은 적 있다.

    사진=이승연 문화전문기자

    송용진 배우는 초연과 지금과 달라진 점에 대한 질문에 “신체 나이가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깊은 연기력”에 대해서 언급했다.  뮤지컬 <셜록홈즈>에 대해서 어려운 점에 대한 질문에는 “모호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연극도 아니고 책도 아니고 뮤지컬이다 보니까 음악이 빠른 넘버로 해결을 하므로 최대한 이해할 수 있게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소감을 전했다. “20년을 하다 보니까 송용진의 대표작품 하면 헤드윅이라는 타이틀이 있었는데 <셜록홈즈>는 처음부터 계속 애착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같이 늙어가고 싶은 작품”이라는 마음을 표현했다.

    이휘준 배우는 클라이브 역의 맏형으로서의 매력을 묻는 질문에 “홈즈와 재치있고 야망 있고 패기 있는 점과 경찰로 능수능란하고 노련한 모습이 클라이브의 매력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전했다. 또한 “젊은 두 친구의 어린 점을 본받고 비슷하게 가려고 건강, 체력을 위해서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사진=이승연 문화전문기자

    여은 배우는 자신과 왓슨의 닮은 점을 묻는 질문에 “왓슨은 엄청나게 똑똑한 캐릭터인데, 사실 닮은 점은 거의 없는 거 같다.  하지만 저의 왓슨은 발랄하고 톡톡 튀는 곳이 있다.”고 했고 가수 여은이 아닌 뮤지컬 배우로서의 매력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과 많은 시간을 관객과 보낸다는 것을 꼽았다. 

    이주광 배우는 만약 자신이 에드거라면 같은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할 거 같다. 왜냐하면 한사람의 인생을 포기하면서 사랑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연기를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다.”라는 소감을 전했다. 초연을 했을 때 두 번째 공연과 아쉬운 점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6년 전에 초연은 원캐스트인 반면 이번 작품은 어떻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가 연출과 작가가 의도한 대로 누가되지 않도록 어리게 연기하려고 했다. “며 “다른 에드거 들과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고 연기에 대한 소감을 전했다. 

    김찬호 배우는 160분 동안 가슴 아픈 에드거가 된 것인데 공연 후에 많이 울어서 눈이 아프고 장면에 많이 출연하지 않는데 그 순간순간이 소중해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고 전했다. 

    앞이 안 보이는 마리아 역을 하고 있는 정명은 배우는 이번 공연의 어려움에 대해서 마리아가 정말 사랑이 많은 캐릭터고 그 사랑을 나눠준다는 것 자체가 숙제인 것 같다. 많은 사랑을 나눌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드러냈다. 

    초연에 출연한 배우인 이영미 배우는 뮤지컬 <셜록홈즈>는 탐정물이고 그 사건의 수위가 높은 것이 특징이었다면 이번에는 수위조절을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며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뮤지컬로 다시 돌아왔다며 달라진 부분을 말했다. 그리고 “초연 때는 원캐스트였는데 이번에는 풍성해졌고 다양하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열심히 준비했으니 많이 봐달라.”는 소감을 전했다.

    사진=이승연 문화전문기자

    한편 뮤지컬 <셜록홈즈: 사라진 아이들>은 2원 15일부터 4월 19일까지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된다.

    이승연 문화전문기자

    고려 : 10대 정종, 거란에 판정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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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 형
    묘호의 발음이 3대왕과 같아 혼동이 되지만 한자도 다르고, 발음도 당시에는 구별이 되었을 것이다.
    명이 짧아 20을 못 넘기고 요절한 친형의 뒤를 이어 17세라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왕위에 올랐다.
    1034년이었다.

    사춘기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형 못지않게 똑똑했기에, 열여섯에 시작한 형처럼 바로 친정을 시작하였다…는데, 그럴 수도 있지만,
    당시의 정치 지형이 한 사람이 독주할 수 없는 집단 지도체제 비슷하게 되어 있어서,
    전례도 있는데, 새삼스럽게  섭정을 이야기할 간 큰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고려는 3년 만에 또다시 어린아이가 옥좌에 오르는 얄궂은 상황이 되었고,
    이로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귀족들의 입지는 더할 수 없이 탄탄하게 되었지만,
    짧은 기간에 연속해서 어린 아이가 왕위에 오르고 친정을 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불안하였는데,
    멋도 모르고 옥좌에 앉은 어린 왕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런데, 거란에서는 정변이 일어나 섭정을 받던 흥종이 어머니를 쫒아내고 친정하는 일이 벌어졌다.
    섭정해줄 어머니가 없어 불안에 떨며 어린나이에 친정을 해야했던 덕종 형제와, 어머니가 지나치게
    표독스러워 넌더리를 낸 거란 흥종, 누가 더 괴로웠을까?

    아무튼, 이로서 아들 대로 이어진 양국간 투쟁의 막이 올랐으나,
    고려의 주적은 거란이었지만, 거란의 주적은 아무래도 북송이나 서하가 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성종 사후 혼란을 거듭하고 있던 거란으로서는,
    이들을 누르기에도 힘이 벅차 고려와 갈등을 지속할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거란은 정종 즉위 이듬해에 사신을 보내어 그 동안의 적대관계 청산 및 예전 관계의 복원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현종 말년의 명목상의 주종 관계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이므로, 그다지 무리한 요구라고 할 수는
    없었고,
    고려 또한 연속된 어린 왕의 등극으로 그리 편안한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못이기는척 응해도 손해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형처럼 거란 공포증이 없는 정종과 어린 왕을 돌보며 나라를 운영하는데 이골이 난 고려의 중신들은,
    거란이 억류중인 고려 사신 6명의 송환과 압록강의 다리를 철거하기 전까지는 택도 없다며 거부하였고,
    서북로에 성을 쌓으며 으르렁거렸다.

    덕종에 이어 그 동생에게 또 한 번 망신당한 꼴이 된 흥종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뜬금없이 수군을 동원하여 압록강 유역에서 무력시위를 하였으나,
    당대 최강이라는 궁기병 수십만의 침략에도 당당히 맞섰던 고려에게 그 정도로는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아버지 때와 달리,
    말을 들어먹지 않는 서하, 북송 등과 치고 받기에도 바빠, 시급히 배후를 안정시켜야 했던 흥종은,
    도대체 굴복이라는 것을 모르는 고려에 난감할 수밖에 없었는데,
    배 몇 척으로 뭘 어찌해 볼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고,
    괜히 섣불리 건드렸다가 열 받은 고려가 고토회복이라도 외치고 몰려나오면 대책이 없으므로,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고려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고 강화를 체결하였다.

    ​대를 이은 투쟁에서 판정승을 거둔 정종은 어느덧 성인이 되었는데,
    비록 거란과의 관계는 복원되었으나 언제 또 생트집을 잡고 집적댈지 모르므로,
    형이 거의 완성했던 천리장성을 마무리하는 등 국방에 만전을 기하는 한편 내치에 힘을 기울였다.
    지진, 가뭄 등의 자연재해가 덮칠 때는 반찬 수를 줄이는 등 백성들의 고달픔을 외면하지 않았고,
    우리 역사상 최초로 예송논쟁을 이끄는 등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애쓰기도 하였으며,
    예학관련 서적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
    생존을 위협하던 내외의 갈등이  사라지고 이제 좀 먹고 살만 해졌으니, 예의를 좀 차리고 질서 있게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므로, 
    타자와의 관계 설정을 의미하는 예의는 사람 사는 세상에 꼭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인권의 개념이 없던 시대에 관계란 힘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므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의는 강자의 입맛에 맞게 구성되어 그들의 기득권 유지에 기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특히 유학의 ‘예’는 ​망해 버린 주나라를 모형으로 하는 복고적인 것이므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고,
    종종 반동적인 경향을 띠게 되기 쉬웠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적 시각을, 갈데없는 중세인인 정종에게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고,
    혼란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질서 있고 조화로운 시대로 나아가가게 하는 것이 그의 시대적 소명이기도 하였으므로,
    영명하였으나 시대의 자식일 수밖에 없는 그는 나름의  이상사회를 제시하는 유학의 ‘예’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노비종모법을 제정하여 대대로 노비들의 한을 만들었고,
    5역·5천·불충·불효한 자와 향 ·부곡인 ·악공 ·잡류들의 자손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금지하여 신분의 경직화에 기여하였으며,
    장자상속과 적서의 구별을 법으로 제정하여 유교적 가부장권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보수적인 법안들로 사회는 안정되었고 고려는 평온의 시기로 진입하였으나,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는 오히려 악화된 면이 많았다.
    결국 거란과의 오랜 투쟁을 통해 명과 실을 함께 갖추게 된 문벌 귀족들만 살판나게 된 것이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거란과의 대를 이은 투쟁을 마무리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며,
    전성기를 이어간 정종은,
    형보다  10년 더 산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중병이 들었는데,
    자식들이 어려서 그랬는지 아니면 형제애가 남다른 집안이라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형처럼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서거하였다.
    명군이었다.

    ​왜들 그렇게 서둘러서 가는지 원.

    고려 : 9대 덕종, 똘똘한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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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 흠.
    위대했던 아버지가 40세가 되던 1031년, 저승사자의 이른 방문을 받는 바람에,
    요즈음이라면 학원 다니느라 바쁠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야 했다.
    이 나이면 거란의 동갑나기 흥종 처럼 모후가 섭정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이 소년은 워낙 어린 시절부터 똑똑하고 결단력이 뛰어나 바로 친정을 하였고 선정을 펼쳤다….는데,
    그 내막을 자세히 알 수야 없겠지만,
    외척 세력의 수장격인 외조부 김은부는
    긴박했던 몽진 길에서 불과 며칠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바보들에게 시달리던 현종에게,
    유일하게 왕 대접을 해주었던 공주 절도사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 하루의 고마움을 잊지 못했던 현종은 그의 딸 셋을 모두 왕후로 맞아들였는데,
    그 딸들은 기특하게도 줄줄이 아들을 낳아주어 아버지의 등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러나 호족 출신이 아니었기에 그 세력 자체는 별 볼일 없었는데, 그나마 일찍 죽어버렸고,
    그 딸들도 명이 짧아 이미 사망한지라 덕종 즉위 시에는 마땅히 섭정을 할 만 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홍안의 소년이 친정을 해야 했던 진짜 이유였을 것이다.​​
    그래도 찾으려고 하면 못 찾을 것은 없었을 것이나,
    당시의 정치 지형 상 누구 한 사람이 독주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는지,
    어떤 의미에서는 도박과도 같은, 16살짜리 왕의 친정이 당연시 된 듯한데,
    비록 불안한 출발이었으나,
    다행히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중신들은,
    입지전적 인물인 현종과 더불어 고락을 같이한 전우들이자, 새로운 고려를 만들어 낸, 능력 있는 인물들이었고,
    왕이 된 아이도 상당히 똑똑했기에 큰 무리 없이 나라가 굴러간 듯하다.
    그런데​ 현종이 승하하자 공교롭게도 평생의 적수였던 거란의 성종도 바로 따라 죽어,
    그들의 투쟁은 이제 16살짜리 아들들에게로 이어지게 되었다.

    ​* 거란 성종 .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라 대단한 어머니로부터 착실히 천자 수업을 받았고,
    자신의 능력 또한 출중하여, 조폭 같은 유목민 출신들이 제멋대로 설치던 거란의 조정을 일신하였으며, ​영토를 넓히고 법치를 확립하였다.
    이렇게 거란의 국가체제를 완비한 영명한 군주였으나, 유독 고려에만은 힘을 쓰지 못하여 명목상의
    종주권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는 무려 49년간 재위하며 거란을 명실상부한 황제국 요로 만든 명군이었으나, 
    말년에는 긴장의 끈이 풀렸는지 향락에 탐닉하였고, 당뇨 합병증으로 오래 고생하다가 사망하였다.

     ​거란 조정은 나름 위대했던 저희들 천자가 사망하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압록강 유역에 부교를 설치하고 보루를 쌓았는데,
    이에 고려는 문상도 할 겸 사신을 파견하여 부교의 철거와  억류중인 고려인들의 송환을 요구하였다.
    거란은 지들 천자의 성스러운 장례를 아랑곳하지 않는 이 발칙한 고려의 요구에 묵살로 응답하였고,
    고려는 거란의 천적답게  외교 단절에 준하는 조치를 취하고 변경의 요새를 손보더니,
    내친김에 압록강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정면 승부를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러한 고려의 움직임에, 또 고래 싸움에 끼일 위험에 처한 동 여진인들이 고려로 투항하기 시작하였고, 성종 사후 혼란에 빠진 거란 조정을 피해 거란인들까지 고려로 투항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거란 조정은 고려에 항의하고 천리장성 축성의 중단을 요구하였으나,
    이번에는 고려가 묵살 하였다 .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이러한 갈등은, 
    명목상이긴 해도 종주국의 입장인 거란에게 더 큰 부담이었으므로,
    황제국의 체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내부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거란은 결국 군대를 움직여 동쪽 끝인 정주로 침입하였다.
    비록 새로운 침공로이긴 했으나,
    거란의 침입이라면 이골이 난 고려군은 이놈들을 가볍게 격퇴하였고, 천리장성 축성에 박차를 가하여
    1년 사이에 대부분의 성을 완성하였다.

    덕종은 거란의 동갑나기와 툭탁거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치에도 제법 업적을 남겼는데,
    과거시험인 국자감시를 시행하여 지방인재 등용의 폭을 넓혔으며,
    현종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한  7대 실록을 완성하는 등,
    중, 고생정도의 어린 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왕 노릇을 썩 잘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명이
    짧았다.
    20살을 서너 달 남겨놓고 병이 들었는데, 끝내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였고,
    자식이라고는 젖먹이 딸들밖에 없었으므로, 동복 동생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재위는 고작 3년, 애석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 : 거란의 3차 침입, 귀주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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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3 차 여요 전쟁

    2차 여요전쟁이 마무리된 후,
    오랜만에 임금다운 임금을 맞이한 고려 조정은 전후 복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양 규에게 집 나간 개새끼 취급을 받았던 거란 하늘의 아들도 정신이 없었는지 한동안 조용하였는데,
    한 2–3년 지나 좀 살만해지자 다시 고려를 찝쩍대기 시작하였다.
    2차 침입 시 철군의 명분이었던 현종의 친조를 요구한 것인데,
    왕의 친조는 완벽한 속국을 의미하므로, 당시의 양국 관계상 가당치도 않은 요구였다.
    따라서 고려는 이 핑계 저 핑계로 왕의 입조를 거부하였고,
    이에 열 받은 거란 천자는 친조를 안 하려면 강동 6주를 반환하라고 생떼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강동 6주는 고려가 복속을 조건으로 권리를 인정받은 지역이므로 이놈들의 요구가 아주 억지는 아니었으나,
    이미 전쟁까지 치른 마당에 옛날 조약을 들먹인다는 것은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었다.
    아무리 지 편한 대로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게 천자라고 불리는 족속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라 하더라도, 나름 영민하다는 평을 듣고 있던 거란 성종이 이 정도 이치를 몰랐을 리는 만무하므로
    결국 다시 한 번 붙어보자는 이야기였다.

    고려의 조정은 파국만은 피하기 위하여, 
    비록 친조는 안했어도 열심히 사신을 보내어 마음에도 없는 충성 맹세를 해대었으나,​
    이미 마음이 콩밭에 가있던 전직 닭 쫒던 개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점점 전운이 짙어지자, 
    고려는 송과의 관계를 복원하는 등 또 한 번의 경천동지에 대한 대비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미묘한 시기에 고려에서 발생한 최초의 무신정변은,
    거란의 천자를 살점이 두둑한 뼈다귀를 발견한 배고픈 개새끼처럼 만들었으나,
    내공 충만한 고려의 명군 현종에게 그 정도의 변괴는 자신의 절대권을 확립하는 계기가 될 뿐이었다.
    내정의 자신감은 외교의 자존심으로 나타났고, 마찰로 이어져, 양국관계는 서로 마주보며 달리기 시작한 기차와 같은 형국이 되었다.
    강동 6 주를 둘러싼 국경지역의 충돌은 연례행사처럼 되풀이 되었고,
    지루한 소모전이 이어지던 현종 9년, ​마침내 대규모 전쟁이 불을 뿜었다.

    1018년 12월, 거란의 소배압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었다.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평양성의 수호자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단호히 맞섰는데,
    강감찬은 양규의 얼이 깃든 흥화진에서 강물을 막았다가 일시에 터뜨려 태반을 수장시켜버렸다……가 아니라, 수공으로 한겨울에 갑자기 불어난 물에 당황한 거란군을 기병으로 요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 전투는 귀주대첩이 아니라, 흥화진 대첩이라고 불리는 3차 침입의 첫 싸움으로,
    대세에 영향을 줄 정도의 승리는 아니었고, 본격적인 전투를 앞둔 양군의 상견례 수준이었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는지 아니면 첫 싸움부터 물을 잔뜩 먹어 열 받은 소배압의 단독 판단이었는지는 모르나, 거란군은 강동 6주는 들르지도 않고 바로 개경으로 직행하였다.
    저항이 심한 곳은 우회하여 적의 종심을 타격하는 유서 깊은 유목민 군대의 전략을 또 써먹은 것으로,
    창의력 없는 종자들의 무식한 전법이기는 하였으나, 이놈들의 참으로 무식한 기동력과 결합되면,
    가공할 파괴력을 나타내는 전법이기도 하였는데,
    강감찬은 별동대를 파견하여 이놈들을 각지에서 요격하며 만만찮은 피해를 강요하였으나,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내달리는 이 소 같은 놈들을 저지하지는 못하였다.
    이래서야 개경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므로, 몽진이라면 치를 떠는 현종을 위해, 
    역대 언제나 한반도 최강이었던 동북면 병력을 개경 수비을 위해 파견하였고,
    일 만의 철기병을 파견하여 거란의 후위를 끊고 견제하게 하였다.
    그동안의 시련으로 명군의 풍모를 확실하게 갖추게 된 현종 또한,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심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유서는 깊으나 역시 무식하기 짝이 없는, 정주민 전통의 청야전술을 사용하여, 
    개경 주변을 폐허로 만들고 식량의 씨를 말려버린 후 개경의 문을 닫아버렸다.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며,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돌격 앞으로만 외치며 달려온 소배압 앞에,
    젖과 꿀이 흐르는 빈집이 아니라 의외로 방비가 단단해 보이는 개경이 나타났다.
    이리 재고, 저리 찔러보았으나 개경은 요지부동이었고.
    한 달 넘게 쌀 한 톨 없는 폐허 위를 배회하던 소배압은 나름 기만전술을 쓴답시고, 
    퇴각을 위장하여 고려군을 안심시킨 후 빈틈을 노리고자 하였으나,
    이미 완전히 명군이 된 현종은 이를 간파하였고,
    자신의 근위병까지 차출하여 거란의 척후병을 몰살시켜 버리는 철벽방어를 보여 주었다.
    결국 쓰레기통을 뒤지다 엉덩이를 차인 똥개 꼴이 된 소배압은 별 수 없이 철군 길에 올랐고,
    이에 따라 거란군의 운명은 민족의 위인 강감찬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

    강감찬은 요격을 위해 흩어져 있던 기병들은 물론이고 어중이와 떠중이를 포함한 잡병들까지 닥닥 긁어모아 총 20만 여의 병력을 귀주로 집결시켰다.
    거란군에 대해 일단 수적 우위를 확보한 것이었으나,
    불과 십 수 명의 기병이 수천으로 구성된 보병부대를 패퇴시키기도 하던 시대였으므로,
    비록 상가집 개꼴이 되긴 하였으나, 
    전투로 단련된 10만에 가까운 거란 궁기병은 막강한 전력이라 할 수 있었고,
    고려군은 훈련이고 뭐고 없는 잡병들이 상당수 포함된 보병 중심의 군대였으므로,
    수적 우위가 전력의 우위로 바로 연결되지는 못하였다.
    농성전이라면 숫자가 많은 쪽이 유리할 수도 있으나, 굶주린 소배압이 공성을 할 리는 없었고,
    그냥 통과해버리면 기껏 길목을 막은 의미가 없으므로,
    강 조의 데자뷰 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강감찬은 고민 끝에 모처럼 잡은 승기를 놓지지 않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최대한 유리한 지형을 선택하여 귀주성 앞에 포진 하였다.
    배고파 죽겠는데, 겁도 없이 회전을 걸어오는 고려군을 본 거란군은 주저 없이 달려들었고.

    2차 침입 때의 경험도 있고 해서, 
    또 한 번 굶주린 늑대와 양떼의 싸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강감찬은 강 조와 달랐다.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며 적의 돌파를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적을 압도한 것 또한 아니었으므로, 
    죽을 힘을 다해 돌격하고 이를 악물고 격퇴하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수일간 반복되었는데,
    이러한 격전에 서로 어지간히 지쳐갈 즈음 갑자기 철기병 일 만이 나타났다.
    이들은 거란군의 후미를 끊고 견제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김종현의 특임부대였는데,
    그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다 이제야 나타났는지는 모르나,
    나타나자마자 30만이 뒤엉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는 전장으로 돌진하였고,
    원래 임무 그대로 거란군의 등짝을 쪼개버렸다.
    팽팽한 국면에서 철기병 일만은 엄청난 변수였으며, 
    이들의 활약을 본 고려군은 총돌격을 감행하여 적의 주력을 두들겼다.
    이 앞뒤의 공격에 거란의 진형은 무너져 버렸고, 각개격파 당하기 시작하였는데,
    쓸데없이 배수진을 치고 있었던 관계로 퇴로마저 막힌 거란군은,
    강민첨에 의해 토끼몰이를 당하였고, 반령 벌판에서 포위되고 말았다.
    이어진 섬멸전에서 거란은 최고 지휘관 상당수가 전사하였고, 시체로 벌판을 뒤덮었으며, 
    수많은 포로들을 남긴 채 ​불과 수천 명만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0만의 거란 궁기병이라는 당대 최강의 전력을 회전으로 궤멸시키며,
    강 조의 패배를 완벽하게 설욕한 ​고려군, 이 순간만은 세계 최강의 군대였다.​
    지 좋을 대로만 생각하는 거란의 하늘이라도 이번만은 간담이 서늘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살수 대첩,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그 이름도 찬란한 귀주대첩이다.
    이 위대한 승리로 고려와 거란과의 전쟁은 사실상 마감되었으며 이후 동북아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고려의 전성기가 활짝 열렸다.

    고려 : 거란의 2차 침입, 최악의 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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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 차 여요전쟁

    거란은  1차 여요전쟁으로 배후를 안정시킨 후 초원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송을 윽박질러 전연의 맹을 맺고 연운 16주를 완전한 영토로 만들었다.
    그런데 거란이 천하의 패권을 잡아가는 동안 고려는,
    사련에 빠져 자신의 불가능한 꿈에 올인한 천추태후와, 자신만의 독특한 사랑에 빠져 정사를 내팽개친 목종이 연일 써대는 저질 막장 드라마로 영일이 없었다.

    1009년 거란 성종의 어머니 소태후가 죽었다.​
    소태후는 천추태후와 유사점이 많은 여인이었다.
    우선 죽은 남편의 묘호가 경종으로 같고,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으며,
    아들의 치세 초반 섭정을 하며 내연남을 정부 요직에 등용하였고,
    정치적 야심이 강해 아들이 장성한 이후에도 정치의 전면에서 활약하였으며,
    외교에 출중한 능력이 있었고 효자 아들을 둔 것까지 닮은꼴이었다.
    그리고 두 여인의 치세 이후에 양국이 각각 전성기에 진입한 것 또한 공교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소태후는 자신의 뛰어난 업적뿐만 아니라, 아들이 명군 소리를 듣는 덕분에 후세까지 불세출의 여걸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반면,
    천추태후는 강 조의 쿠데타로 몰락하였기에,
    대부분의 업적은 묻히고 구설, 악행 그리고 아들 목종의 난행 등이 부각되어, 
    자식과 나라를 망친 악녀가 되어 버렸다는 아쉬움이 있다.

    위대했던 만큼 엄격했던 어머니가 사망하여, 본격적인 단독 치세를 시작한 거란 성종에게,
    비슷한 성격의 어머니를 둔 고려 목종이 신하에게 시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성종은 크게 분노하였고 징치를 결심하였다고 하는데,
    현대의 관점이라면, 힘 좀 있다고 중뿔난 내정간섭이나 해대는 성질 더러운 폭군쯤으로 간주되어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당시의 거란은 송의 조공을 받을 정도의 패권국이었고, 명목상 고려의 종주국이었으므로,
    제후국에서 발생한 패륜을 묵과하기 곤란한 점이 있기는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왕은 완전한 외번 신하가 아니라 형식에 불과한 제후였으므로,
    내정의 문제를 외교적 수단을 비롯한 간접적인 방법이 아니라,
    국력을 총동원하여 직접 침략을 한다는 것 또한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외교와 협상의 달인이었던 어머니 소태후에게 서른 살 너머까지 시달렸으며,
    나중에 거란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성종이,
    감정에 치우쳐, 앞뒤 재지 않고 국가 중대사를 결정할 리는 없으므로,
    뭔가 복잡한 사정이 저간에 깔려있었을 것이다.

    거란은 소태후의 활약으로, 전연의 맹을 맺고 국경을 확정하여 송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였으나,
    이는, 더 이상 대륙으로 진출하는 것 또한 막혔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어머니의 그늘에서 막 벗어난 30대 중반의 능력 있는 군주 성종이,
    마지막 미결정지라 할 수 있는 한반도 쪽을 주목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1차 여요전쟁에서 군신 관계를 맺기로 했던 고려는,
    개국 이래의 적대정책을 고수하며 친송 기조를 바꾸지 않았고,
    거란의 턱 밑에 강동 6주라는 난공불락의 요새지대를 설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래 그곳에 살고 있던 발해의 후예 여진에게 종주권을 행사하고 있었으므로,
    발해를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 거란의 입장에서는 이래저래 심기가 불편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가연성 물질이 즐비한 양국 사이에 불씨를 던진 것은 여진이었다.

    고려가 영토로 편입한 지역은, 원래는 여진의 땅이었으므로,
    원주민 입장에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이 불만의 땅에 철벽의 요새지대를 설치한 서 희의 업적이 놀랍긴 하지만,
    모두가 그런 식견과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니므로 언제라도 갈등이 표면화될 수 있었는데,
    혁명으로 정권이 바뀌자, 혁명 정부 특유의 과격함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무력을 사용해야 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해진 모양이었다.
    그런데 여진부락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자, 고려군을 이끌었던 하공진은,
    패전을 만회한답시고 고려에 조회하기 위해 내부해 있던 여진 추장 일행을 학살하는 정신나간 짓을
    저질렀고,
    이에 열 받은 여진이 거란에 복수를 청원하는 와중에 강 조의 정변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었으므로, 거란은 2차 침입의 중요한 명분을 얻은 것이고,
    이에 협조한 여진은 복수도 하고 서식지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1010년  11월, 거란 성종이 기세도 등등하게 압록강을 건넜다.
    말 타고 활 쏠줄 아는 놈들은 거의 다 끌고 왔는지, 거란에서 동원한 인원만 40만, 
    여기에 원한에 사무친 여진의 병력이 추가 되었다고 한다.
    하늘을 대신하여 흐트러진 천하의 공도를 바로잡는 거창한​ 무대의 막이 오른 것인데,
    ​이 무대의 고려 쪽 첫 등장 인물인 양 규는 거란의 하늘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대군이 도착하기만 해도 천하가 앙복할 것이라 기대해마지 않았을 거란 성종은 감히 천군을 몰라보는 소국의 촌뜨기가 어이없고 답답했을 것이나,
    어리석은 백성에게 깨우침을 주는 것도 천자의 도리이므로,​ 양 규에게 천하의 넓음과 천자의 위엄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직접 대군을 휘몰아 공격을 퍼부었다.
    그런데,
    머쓱하게도 흥화진은 난공불락의 강동6주라는 명성에 걸맞게 7주야가 지나도록 요지부동이었고,
    천명을 받은 대국의 천자는 첫 싸움부터 한 줌도 안 돼 보이는 요새 앞에서 애들하고 툭탁거리는 한심한 신세가 되었다.
    이 꼴로 세월만 보내다가는 천자의 위엄이고 나발이고 다 물 건너간 형국이 되기 십상이므로,
    난처해진 성종은 무로대에  20만을 남겨 무엄한 홍화진을 고립시킨 후, 
    고려의 주력이 머무르고 있는 통주로 남하하였다.

    당시 통주에는 독재자 강 조가 고려 전역에서 긁어모은 30만 대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약 20만으로 추정되는 거란군이 몰려들자 성을 나와, 당당하게 진을 펼치고 대적하였다.
    병력 수도 더 많고, 전장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었으므로 나름 타당한 결정이라고 우길 수 있었을 것이다.
    초반에는 대기병 장비와 지형을 적절히 이용한, 교과서적인 진이 위력을 발휘하여 제갈공명처럼 승리할 수 있었으므로,
    강조를 비롯한 고려군 수뇌부는 적의 전투력이 소문보다 대단하지 않은 것으로 착각하였고,
    조조의 팔문금쇄진을 능가하는 자신들의 위대한 진을 이용하여 적을 궤멸시킬 꿈에 부풀었으나,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거란의 파상 공세는 야전의 경험이 별로 없었던 고려군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강력한 것이었다.
    결국 기병의 돌파에 이은 후미차단 그리고 각개격파라는 고색창연한 수법에 알면서도 당하고 말았는데,
    설상가상으로, 장기(or 바둑)를 두며 여유를 부리던, 강 조를 위시한 수뇌부 전원이 포로가 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기병들에게 포위된 고려 병사들은 자기 목숨은 지가 알아서 챙겨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통주성으로 가는 퇴로는 이미 차단되었으므로, 
    곽주를 향해 열린, 유일한 탈출로를 이용하여 도망치기 시작하였으나,
    무질서하게 패주하는 보병은 기병의 손쉬운 먹이에 불과하였고, 완함령에서​ 곽주군에게 구원될 때까지 3만이 넘는 고려군이 학살당하고 말았다.
    반면 통주성의 주민들은 눈앞에서 30만 대군이 궤멸되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하였으나,
    고려군의 등뼈라 할 수 있는 중랑장들이 궐기하여 주민들과 함께 성을 지켜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고려로서는 기적 같은 일이었으나, 대국의 천자는 기가 찼을 것이다.

    30만이나 되는 주력을 박살냈는데도 떨어질 생각을 안하는 통주성을 바라보며 분통을 터뜨리던 천자는 별 수 없이 고려의 패잔병들이 도망친 곽주로 말머리를 돌렸다.
    홍화진에 이어 통주까지 패스할 수밖에 없었던 거란은, 체면도 체면이지만, 보급문제가 심각해졌다.
    거란군은 전원 기병이고 보급을 담당하는 부대가 따로 있어서, 보급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롭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한계가 있었고,
    워낙 대병이다 보니 계속 길바닥에서 보급을 해결하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속사정이 있는 거란은 곽주성을 향해 사력을 다해 달려들었고, 
    이들의 사나운 기세에, 방어사 나리는 기겁하여 한밤중에 도망가 버리는 한심한 작태를 연출하였으나,
    완함령의 영웅 신영한을 비롯한 나머지 무장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며
    고려 무인의 기개를 선 보였다.
    그러나 눈물겨운 분전에도 불구하고 현격한 전력의 열세는 극복하기 힘들었는지, 통주성에 이은 또 한 번의 기적을 이루지는 못하고,
    결국 대부분의 무장들이 전사하면서, 강동 6주의 요새 중 유일하게 함락되는 비운을 맛보고야 말았다.
    어쨌든 고려에 침입한 이래 처음으로 근거지를 마련하게 된 거란의 하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서경을 향해 진군할 수 있게 되었다.

    서경, 옛 고구려의 수도이자 현 북한의 수도.
    참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땅인데,
    당시에도 북방 최대의 도시이자 군사적 거점으로서 다물의 비원이 깃든 고려의 제 2수도였다.
    서경이 지닌 군사적, 정치적 의미가 막중하였으므로,
    고려 조정은 시간을 끌기 위해 거짓 항복을 하는 한편 동북면 주둔군을 투입하기로 결정하였고,
    명령을 받은 탁사정과 지채문은 즉시 서경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서경의 수뇌부는 곽주가 함락된 지 3일 만에 거란이 서경 인근으로 육박해 들어오자,
    하는 일 없이 자리만 높은 놈들이 늘 그러하듯이, 
    신속하게 자체적으로 항복을 결정하고 항복 문서를 거란으로 보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지채문은 분기탱천하여, 즉시 항복 사절을 추격하여 살해하고 항복문서를 불태웠으나,
    이와 관계없이, 대국의 천자는 이제야 정신을 차린듯한 고려 조정의 거짓 항복을 믿고,
    제멋대로 서경 유수를 새로 임명하는 등 접수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를 알 리 없는 지채문은 뒤 이어 도착한 탁사정의 대군과 합세하여 서경의 혼란을 진압하였는데,
    바로 다음 날 서경을 접수하기 위한 거란의 선발대가 도착하였다.
    탁사정의 새로운 서경군은 멋도 모르고 희희낙락하는 이넘들을 몽땅 도륙하였고,
    이러한 상황 반전이 있는지도 모르고 유유자적 뒤 따르던 신임 유수의 본대마저 몰살시켜버렸다.
    마치 잘 짜여진 각본처럼,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난 탁 사정에 의해 서경이 구원된 셈이었는데,
    만일 탁사정이 단 하루만이라도 늦게 도착하였다면, 거란이 서경을 접수했을 공산이 크고, 
    그랬더라면 ​이후의 전쟁 양상 또한 크게 달라졌을 것이므로, 
    우리 입장에서는 하늘이 도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나,
    농락당한 꼴이 된 거란 하늘의 아들은 크게 노하였고, 총공격을 명하였다.
    분노한 거란의 공격은 당연히 거칠었으나,
    서경의 구원자 탁사정은 마치 여포처럼,
    안에서 방어만 하기 보다는 성을 나가 요격하기 위하여 주력을 이끌고 서쪽문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군.민 모두 기대에 차서 주시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인간이 성문을 나가자마자 무엇을 보았는지,
    거란군 방향이 아닌 남쪽을 향해 돌진하였고 그길로 도주하고 말았다.
    이게 무슨 신출귀몰한 작전인가 하고 어리둥절해 하던 거란군은 이내 별 것이 없음을 알았고,
    탁사정을 비웃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성에 대한 공격을 다시 시작하였는데,
    덕분에 양동작전을 위해 동문으로 나갔던 대도수만 집중공격을 받아 포로가 되고 말았다.
    1차 침입 때에 소손녕을 혼내 주었던 ​발해 왕자 출신의 맹장이,
    별 이상한 인간 때문에 망국의 원수 거란에 포로가 되었으니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까?​
    탁 사정, 이놈의 뇌구조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하루 만에 지휘부와 주력군이 증발하는 황당한 사태에 직면한 서경의 백성들은 패닉상태가 되었으나,
    다행히 강민첨 등 중간급 간부들이 정신을 차리고 분전하여 간신히 함락을 막을 수 있었다.
    통주에 이어 고려군의 허리가 위력을 발휘한 쾌거였고, 고려에게 주어진​ 또 한 번의 천운이라 할 수 있었으나,
    닭 쫒던 개꼴이 된 거란의 천자는 고려의 하늘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한편, 여전히 거란 하늘의 의지에는 별 관심이 없던 흥화진의 양규는, 항복하라는 대국 천자의 지엄한 명령을 가볍게 묵살하고,
    정예라고는 하나 단 700 기에 불과한 병력을 이끌고 곽주를 탈환하는 기염을 토하였으며, 통주까지 작전구역을 넓혀 나갔다.
    양 규가 이 난리를 치는데도 무로대에 남았다는 20만은 찍 소리도 없었던 것으로 보아,
    이넘들은 전사들이 아니거나 일차 침입 때처럼 허풍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징기스칸도 전투병력이 20만을 넘지 못했고, 대륙을 집어삼킨 청도 20만 정도였는데, 거란 주제에​ 40만은 아무리 봐도 무리이다.
    40만이든 20만이든, 서경 함락에 실패하고,
    고려 내 유일한 근거지인 곽주마저 상실한 거란의 하늘은 울고 싶었을 것이다. 

    ​분통이야 터지지겠지만, 이러한 상황 전개는 거란의 위기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제 정신이 박힌 최고 지도자라면 철군을 심각히 고려하거나, 아니더라도 최소한 확전을 막고 협상을
    시작했어야 하지만,
    엄마의 치마폭에서 놓여난 지 얼마 안 되는 이 젊은이의 뇌 구조는, 아직 그러한 냉철한 판단을 할 만큼 성숙하지는 못하였는지,
    서경을 방치한 채 개경을 향하여 남하하라는, 열받은 감정을 따르는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딴에는 저항이 심한 곳을 우회하여 적의 종심을 타격하는 유목민 군대의 유서 깊은 전략을 택한 것이었는데,
    그러기엔 보급선이 너무 길어져 있었다.

    이 꼴을 본 고려의 조정은 강감찬 등의 주장으로 끝까지 항전할 것을 결의 하였으며,
    전쟁에 별 도움도 안 되면서 괜히 어정대다 포로라도 되면 아주, 매우, 많이 골치 아파지는, 
    아직 어리버리한 미래의 명군 현종을 개경에서 치워버리기로 하였다.
    군사적으로는 상대의 무리를 응징하는 타당한 전략이었으나,
    멋도 모르고 왕위에 올랐던 현종에게는 고생문이 활짝 열린 결정이었다.
    여러가지 전략적 실패를 거듭했지만 기동력 하나는 아직 쓸 만한 거란군은, 지들 천자의 명이 떨어지자 바로 개경으로 쇄도해 들어왔으므로,
    현종은 화급하게 개경을 떠나야 하였고, 미래의 위인 강감찬 각하도 일단 지 목숨부터 챙겨야 했다.
    어리버리한 왕과 그의 왕비들은 서경에서 활약했던 중랑장 지채문을 비롯한 약 50여 명으로 수행단을 꾸릴 수밖에 없었고,
    이 초라한 행렬이, 나름 고생했다는 선조의 몽진과는 비교도 안되는 우리 역사상 가장 비참한 몽진
    주연배우들이 되었다.

    새해를 3일 남긴 한겨울의 추운 밤, 미래의 명군 현종은 지채문의 호위 하에 개경을 출발하였다.
    밤새 걸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음 날 경기도 연천 지역의 단조역에 도착하였는데,
    먹을 것도 주고 바꿔 탈 말도 준비해주어야 할 역졸들이 단체로 미쳤는지, 임금님을 향해 활을 쏘며 덤벼들었다.
    이 비적으로 돌변한 역졸들은, 역전의 용사 지채문이 활약하여 물리칠 수 있었으나,
    완전 진압할 능력도 겨를도 없었으므로 일단 남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리하여 창화현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번엔 웬 고을 향리 한 놈이 나타나 이죽거리며 조롱을 하더니, 밤에 습격을 해오는 기가 막힌 일이 발생하였다.
    이 공격에 측근, 환관, 궁녀 할 것 없이 죄다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임신한 왕후를 비롯한 몇 명만 남게 되었었는데,
    다행히 지채문이 고군분투하여 겨우 창화현을 벗어날 수 있었다.
    구사일생하여 한숨 돌리고 있던 무늬만 임금인 현종 앞에, 이번엔 치사하게 여진의 추장들을 살해하여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죄로 귀양을 갔던 하공진이 나타났는데,
    반란을 일으켰다는 풍문과는 다르게 하공진은 그동안 반성을 많이 하였는지, 불안해하는 임금 일행을 안심시킨 후 사신을 자청하였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닌 현종은 하공진을 보낸 후 남쪽으로 도주를 계속하였는데,
    임금의 표문을 가지고 사신의 자격으로 북쪽으로 향하던 하 공진은 얼마 가지 않아 거란군의 선봉을
    만나게 되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하공진은 그놈들을 설득하여, 추격을 멈추고 개경으로 되돌아가게 하였는데,
    만일 이때 사신이 가지 않았거나, 
    갔더라도 거란의 선봉이 사신의 말을 듣지 않고 추적을 계속하였더라면,
    불과 십수 리 앞에 있었던 현종은 속절없이 포로가 되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휘종이 포로가 되었던 송나라 꼴이 나거나, 그도 아니면 발해 꼴이 되었을 것이다.
    하 공진이 나타났던 하루, 참으로 긴박하였다.
    거란 하늘의 아들은, 
    고려왕이 이미 남쪽 수 천리 밖으로 달아났다는 하 공진의 말에 속아, 왕을 잡아 전황을 뒤집기는 글렀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유목민 종자들의 관습대로 3일간 개경을 약탈한 다음 철수하였다.
    지놈들이야 관행이었겠지만, 새해 벽두부터 겁탈당한 개경 백성들은 이가 갈렸을 것이다 .

    현종은 병 주고 약 준 하공진 덕분에 기사회생하였으나, 
    당시에는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지 당연히 몰랐으므로 무조건 남쪽으로 내달렸는데, 
    길은 여전히 평탄하지 않았다.
    안성에 도착했을 때는 수행하던 유종이라는 놈이, 지 고향이라고 멋대로 왕의 말안장을 뜯어
    마을 사람들에게 선물하였고,
    천안에 이르러서는, 그동안 최측근을 자처하던 김응인과 유종이 행렬에서 이탈하여 사라지고 말았다.
    이 지경이 되면 왕으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이 올만도 한데,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한 현종은 꿋꿋하게 도주를 계속하였다.
    왕은 공주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으나, 전황이 어찌되어 가는지 알 도리가 없었으므로,
    일단 임신한 마누라만 친정으로 가게 한 후 바로 남쪽으로 향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건 왕 생각이었고,
    이번에는 대접도 못 받고 이어지는 강행군에 열 받은 호송 병사들이 종군거부를 일으켰다.
    종군거부는 반역에 준하는 중죄이므로 성질대로 한다면 바로 참형으로 다스려야 마땅할 것이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지채문의 권유대로 벼슬을 올려주는 것으로 무마하고,
    길을 재촉하여 전주 땅에 이르렀는데, 이번에는 전주 절도사가 습격을 해왔다.
    이놈이 왜 습격을 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아주 나쁜 놈은 아니었는지 아니면 좀 모자란 놈이었는지,
    현종 일행에게 인질로 잡혔고, 이놈을 방패삼아 전주지역을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개경을 탈출한지 보름 만에 나주에 입성하였고,
    비로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태조에게 행운의 땅이었던 나주는 그 후손인 현종에게도 행운을 주었는지,
    나주에 머문 지 3일 만에 거란이 개경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충분한 휴식과 지원을 얻은 현종은 드디어 제대로 된 임금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왕의 첫 걸음은 전주로 향하였고, 며칠 전의 싸가지 없던 놈들을 물고를 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7일간 머무르며 관제개혁을 단행하여 강조의 권력기반이었던 중대성을 폐지하고 중추원을 복원시켰다.
    다음엔 공주로 행차하여  6일간 머물렀는데,
    김은부의 딸 둘을 왕비로 맞이하여, 몽진 길에 유일하게 왕 대접을 해주었던 그의 호의에 보답하였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여러 가지 인사 조치를 단행하였다.
    왕의 귀환이었다.​

    한편 하공진에게 속아 , 또 닭 쫒던 개꼴이 된 거란 하늘의 아들은 별 소득도 없이 철군을 시작하였는데, 전략적 실패는 가혹한 대가를 요구하였다.
    거란의 하늘에는 항상 , 언제나 , 늘 관심이 없던 양규를 비롯한 고려의 무인들은,
    대국의 천자를 복날 나돌아 다니는 떠돌이 개새끼 취급을 하여, 뒤통수, 앞 통수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양 규는 귀주별장 김숙흥과 함께 무노대, 여리참, 애전 등지에서 크고 작은 7차례의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하였는데,
    이들의 등쌀에 거란은 강동6주의 다른 성들은 건드려 보지도 못하고 본국으로 회군하는 수밖에 없었다.
    양규를 비롯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 고려의 영웅들은,
    풀죽은 강아지 마냥 꼬리를 내리고 철수하는 거란의 주력에게 마지막까지 달려들었고,
    가열차게 공격하다가 마침내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하마터면 주력이 몰살당할 뻔 했던 거란의 하늘은 뒤도 안돌아보고 줄행랑을 치고 말았고.
    양 규, 이 순신 못지않은 민족의 위인이었다.

    ​2차 침입으로 거란은, 엄청난 물자소모는 물론이고,
    끌고 갔던 전사들이 너무 많이 죽는 바람에 관원의 수가 부족해질 정도의 피해를 입으며,
    명목뿐인 고려의 항복과, 고려와 송의 연합저지라는 1차 침입 때의 성과를 재확인 하였고,
    고려는 양 규 등의 활약으로 영토를 보전할 수는 있었으나, 
    서북지방과 개경이 초토화되었고, 엄청난 인명과 물자가 소모되었다.
    결국 거란과 고려 양쪽 모두 소득도 없이 피만 흘린 꼴이었으므로,
    만일 소태후가 살아있었다면, 명군 아들이고 나발이고 회초리를 들고 날뛰었을 것이다.
    한편 이 싸움에서 조연을 담당했던 여진은,
    닭 쫒는 개의 뒤만 따라다니다 고래 싸움에 끼인 형국이 되었고,
    삶의 터전이 난장판이 되는 바람에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 중 고려로 흘러들어온 사람들은 천민이 되어 대대손손 조상의 잘못된 선택을 한탄하게 되었다 .

    거란의  2 차 침입, 승자는 없고 패자만 남은 미완의 전쟁이지만,
    굳이 위안을 찾자면, 현종이라는 불세출의 명군을 탄생시키는 데 밑거름이 된 전쟁이었다.
    ….정도가 아닐까?

    고려 : 8대 현종, 위대한 임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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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헌정왕후는 불행한 사랑을 한 여인이었다.
    남편 경종이 사망한 후 돌 볼 자식도 없이 궐을 나가야 했던 젊은 그녀는,
    외로웠는지 아니면 심심했는지, 그만 이웃에 살던 숙부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는데,
    이 숙부가 유부남이었다.
    현대적 관점이라면 유부남이 아닌 숙부와의 사랑만으로도 갈 데 없는 패륜이지만,
    당시의 관습으로는, 자랑스러울 것까지는 없겠지만 그다지 큰 흉이 되지도 않는 일이었으므로, 
    여염이라면 그냥 저냥 만나서 살다가 사실혼 관계를 인정받으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교적 국가질서 확립을 국정철학으로 삼았던 현왕의 여동생이자, 태후라는 그녀의 신분이 
    발목을 잡았다.
    그런데 이놈의 사랑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 
    숨어서 먹는 열매가 더 달콤한 것처럼 하지 말라면 더하고 싶어지는 습성이 있는지라,
    이 고귀한 신분의 연인들도, 헤어나지 못하고 위험한 관계를 지속하다가 덜컥 임신이 되고 말았다.
    비록 혼외 관계이기는 했으나 어쨌든 왕가의 경사이고, 둘 다 권력과 재력을 겸비하였으므로,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을 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남들이야 뭐라고 하든 자신들만의 세상에서 단 꿈에 젖어 행복하였는데, 그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난데없이 집안 종놈이,
    남 다른 정의감을 지녔는지 아니면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기지까지 발휘하여 성종에게 상전의 불륜을 제보하는 바람에 발각되고 만 것이다.
    결국 두 사람 만의 아름다웠던 사랑은 세상에 노출 되어, 왕실의 권위에 먹칠한 패륜이라는 낙인으로 탈바꿈되었고,
    온갖 비난을 다 뒤집어 써야 하는 쓰라린 상처가 되고 말았다.
    결국 숙부이자 연인인 유부남 왕 욱은 유배를 가게 되었고,
    상심한 헌정왕후는, 
    사랑의 결실을 무사히 세상에 내보내기는 하였으나,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여,
    고려판 신파 소설을 완성하였다.

    왕 순은 태어나자마자 죄인의 자식에, 어미 없는 자식으로도 부족해 왕실의 치부까지 된 것인데,
    어려서야 몰랐겠지만 철이 좀 든 다음에 생각해 보면 기가 막혔을 것이다.
    도덕군자 성종은 고아나 다름없는 그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아버지와 살 수 있게 해주었으나 그것도 잠시,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사망하는 바람에,
    결국 천애고아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왕족의 팔자는 서민과는 뭐가 달라도 다른 법이고, 부모의 행실은 미워도 애는 죄가 없으므로, 
    성종은 그를 궁궐에서 자라도록 배려하였고 친자식처럼 돌봐주었다.
    덕분에 왕 순은 부모 슬하에서 자라는 것만은 못해도, 외삼촌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럭저럭 평온하게 자랄 수 있었으나,
    성종 사후 목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인생은 다시 꼬이기 시작하였다.
    어머니처럼 사랑에 눈이 먼 이모 천추태후는, 
    큰아들 목종이 게이인 관계로 후사를 보기 어렵게 되자, 둘째를 왕위에 올리려 하였는데,
    문제는 이 둘째가, 재회한 연인 김치양과의 사랑의 결실인지라, 왕씨가 아니라 김씨라는 사실이었다.
    천추태후가 아주 야무진 꿈을 꾼 것인데,
    반면 왕 순은 비록 사생아이기는 했으나, 
    왕 건의 피를 겹으로 받아 유전자 일치율이 37.5%에 달하였고, 
    어려서 고생을 많이 한 애답게 철도 일찍 들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예의 바르고 똑똑하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부모 없는 자식은 똘똘한 것도 죄가 되는지, 
    냉혹한 이모는 이 불쌍한 조카가 자신의 가능성이 희박한 꿈의 최대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였고,
    일찌감치 권력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강제로 머리를 깎게 하여 신불사로 출가시켜 버렸는데,
    목종의 난행으로 자신도 믿지 못하던 꿈이 점점 가까워지자, 조카의 존재 자체를 말살시키고자 하였다.

    왕 순은 팔자에 없는 중노릇을 하는 것으로도 부족해, 연속되는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는데,
    자신만의 독특한 사랑에 빠져 정사를 내 팽개친 효자 목종마저도, 
    다음 대 왕위가 김씨에게 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고귀한 인물의 고난에, 의협심을 자극받은 신불사 중들의 적극적인 보호 덕분에, 
    천추태후의 암살 시도는 번번이 빗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매번 위기를 넘겨야 했던 왕 순으로서는 서럽고도 분통터질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다 결국 죽겠다는 그의 절규는 목종의 마음을 움직였고,
    세상만사 귀찮은 목종은 강조에게 왕 순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는데,
    그 동안 알뜰하게 망가진 나라 시스템은 명령의 전달과 시행에서 혼선을 일으켰고,
    갈팡질팡하던 강조가 어떨결에 쿠데타를 일으키는 바람에 졸지에 왕이 되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1009년의 일이었다.

    우리나라 왕들의 등극 호발 연령인 낭랑 18세에 왕위에 오른 현종은 처음에는 당연히 허수아비였는데, 허수아비건 뭐건 이모의 마수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을 것이나,
    그 기간은 아쉽게도 짧았다.
    즉위 이듬해에 거란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입해온 것이다.
    닥닥 긁어모은 30만의 대병을 가지고 기세등등하게 출병했던 독재자 강조는,
    어쭙잖은 제갈공명 흉내를 내다가 대패하였고, ​개경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현종은 별수 없이 몽진길에 올랐고,
    각지의 호족들에게 온갖 괄시와 천대를 받으며 나주까지 도망을 하였는데,
    시련이라면 이골이 난 그도 이가 갈렸을 것이나, 질긴 명줄 하나는 타고난 팔자였다 .
    친정을 한 거란의 성종은, 
    원정 기간이 길어지면서, 양규 등 게릴라들의 기승에 보급선이 위협을 받게 되자,
    진흙탕 속에 숨은 미꾸라지보다 잡기 어려운 현종을 포기하고, 고려의 형식적인 항복을 받은 후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현종으로서는 피난하는 동안 싸가지 없는 호족들에게 시달리느라 열불은 났었지만, 어찌되었건 죽지 않고 무사히 개경으로 복귀한 덕에,
    영토를 한 뼘도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강조가 없는 조정을 장악할 수 있었다 .
    조실부모하고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기만 했을 뿐, 
    왕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가 얼떨결에 왕이 된 후,
    바로 전란을 만나 우리 역사상 가장 비참한 몽진을 한 것밖에는 경험이 없는 그에게, 처음부터 제대로 된 왕 노릇을 기대한 다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친정 초반, 이기적이고도 탐욕스러우면서 노회하기까지 한 문신들의 술수에 놀아나는 바람에,
    군인들의 봉급이랄 수 있는 영업전을 빼앗아 문신들을 위한 전시과로 돌려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문신들이 다 도망간 고려에서 피를 흘리며 거란과 싸웠던 무신들은 당연히 분노했고 정변을 일으켰다. 고려 최초의 무신란이었다.
    자칫 후대 무신정권 시기의 왕들처럼 허수아비 왕이 되어 버릴 수도 있는 위기였으나,
    그러기엔 그동안 살아온 그의 인생이 녹녹치 않았다.
    음모가 난무하는 험난한 강호생활을 견딘 그의 내공은, 간단한 술수로 김훈, 최질 등 무신  19명을 척살해 버렸고, 그 마무리 또한 깔끔하였다.
    1015 년의 일이었다.

    한편 고려왕의 친조와 강동 6주 반환을 끊임없이 요구하던 거란 성종은 고려 내부의 혼란을 감지하고 재차 침입을 준비하였는데,
    비록 전통의 대국이자 우방국인 송이 거란의 눈치를 보느라 고려에 대한 지원을 거절하였으나,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현종은 내정을 다지고 군대를 확충하며 전쟁의 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1018년 드디어 거란이 대규모로 침입해왔으나,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고려는 강동 6주를 근거로 북방을 굳건히 지켰고,
    고려의 주력에 막힌 거란은,
    우회하여 적 종심을 깊숙이 타격하는 유목민 특유의 상투적이나 위력적인 전술을 사용하여 개경을 위협하였다.
    강감찬은 이에 적의 후위를 공격하여 적의 보급선을 잘랐고,
    현종은 철저한 청야전술 및 자신의 근위 병력까지 차출하는 기민한 대처로 개경을 지켜내었다.
    죽으면 죽었지 또 한 번의 몽진은 못한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굶어 죽을 지경이 된 소배압은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고,
    역사상  비자발적 철수를 해야 했던 군대들 대부분의 운명처럼, 길목을 지킨 강감찬의 고려군 주력을 만나 포위 섬멸되었다 .
    이것이 우리 역사에서 그 이름도 찬란한 귀주 대첩이다 .
    1019년의 일이었다.

    귀주대첩 이후 동북아에는 오랜만에 평화가 찾아왔다.
    고려에게 혼쭐이 난 거란은 송을 침략할 여력을 잃었고, 
    거란 공포증이 있는 송은 현실 안주를 택하였으므로, 고려, 거란, 송의 삼국정립 시대가 시작 된 것이다.
    이러한 우리 민족 주도의 국제 정세 및 평화는 고구려 장수왕기 이후 실로 오랜만에 출현한 것으로서, 결과적으로 고려뿐만 아니라 대륙, 만주를 모두 아우르는 전쟁 없는 시대를 열었다.
    이로써 천하의 모든 생령들은 제 명을 누리며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고,
    고려는 전성기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현종은 내정에도 업적이 많은데,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 주변에 나성을 축조하여 외침에 대비하였고,
    군마의 수를 늘리기 위해 감목양마법을 시행하는 한편,
    어려운 나라 재정에도 불구하고 무관에 대한 대우를 높였으며,
    24절기의 하나인 망종에 전몰자를 위한 국가제사를 시행하였다.
    현대에도 망종을 현충일로 삼아 호국 영령을 위로하고 있다.
    개경을 확장하여  5부  35방  314리로 정비하였으며,
    경기제를 실시하여 개경부 인근의 군현을 직접 다스렸고,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5도, 양계, 4도호부, 8목을 정비하였다.
    향리의 명칭을 호장, 장으로 바꾸었고,
    향리 자제에게 과거 응시 자격을 부여하는 주현공거법을 실시하여, 지방에 대한 중앙 통제력을 높였다 .
    조세의 균등을 기하고, 권농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주창수렴법을 실시하여 빈민을 구제하였고,
    전몰자 유족의 생계를 위하여 구분전을 지급하였다.
    면군급고법을 시행하여 노부모를 모시고 있은 자들의 군역을 면제하였다.
    현화사를 건립하고 연등회와 팔관회를 전면 부활하였으며,
    초조대장경의 조판을 시작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문묘종사의 선례를 만드는 등 유학 진흥에도 신경을 썼다.
    거란의 침략 중 소실된 태조 ~목종까지의  7대 실록을 다시 편찬하기도 하였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후대에게 영광스러운 조국을 남겨준 불세출의 명군 현종은,
    1031년 40세를 일기로 정말 아까운 나이에 서거하여 22년간의 재위를 마쳤다.
    슬하에 5남  8녀를 두었는데, 고려 전성기의 세 임금, 9 대 덕종, 10 대 정종 그리고  11 대 문종이 모두 그의 아들들이었다.

    ​ 하늘은 큰일을 맡기기 전에 엄청난 시련을 준다는 맹자의 말에 잘 어울리는 위대한 임금이었다.

    고려 : 7대 목종, 게이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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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 송, 헌애왕후의 소생으로 경종의 유일한 아들이었으나,
    경종이 사망했을 때 2살 남짓의 어린 아이에 불과하여 왕위를 잇지 못하였다.
    이러한 경우, 보통은 왕위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요소로 간주되어 압박과 설움 속에서 살기 쉬우나,
    도덕군자 성종은 왕 송을 친자식처럼 길렀을 뿐만 아니라 왕위까지 물려주었다.
    당숙 겸 외삼촌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을 때가 낭랑 18세,
    광개토대왕과 즉위 나이가 같으나, 그 인생은 판이하였다.

    997년 즉위한 후 아버지 경종의 몇 안 되는 업적 중의 하나인 전시과를 개정하였고, 
    지방을 순시하였으며, 빈민 구제와 민생 안정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국방에도 신경을 써서, 서경의 권위를 복구시켰고,
    요의 침략에 대비하여 성을 수축하였으며 군제를 개편하였다.
    이 정도 임금노릇이면 다 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머니가 보기에는 아니었는지, 
    헌애왕후는 목종이 어리다는 이유로 섭정을 하면서 정사에 간섭하였다.

    헌애왕후는 경종 사후 궁궐 밖 천추전에 기거하였는데,
    목종의 즉위로 태후가 되면서 천추태후라는 별칭으로 불리었다.
    이 여인은 중노릇을 하던 김치양과 간통사건을 일으켜,
    왕실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성종의 체면을 구기는데 일조를 했던 바로 그 여인으로서,
    성종 기에는 친 오빠 성종이 무서워 은인자중하는 신세였으나,
    아들이 왕이 되고 자신이 섭정이 되자 겁나는 게 없어졌는지,
    김치양을 요직에 등용하여 자신의 수족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못 다한 사랑을 마음껏 불태웠다.
    난데없는 새 아버지가 등장하여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는 바람에,
    10대 후반의 팔팔한 나이에 허수아비 꼴이 된 목종은 사람이 착한 건지 못난 건지,
    김치양을 끝내 잘라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처럼 사랑에 올인하여, 정사는 돌보지 않고 방탕과 쾌락만을 탐닉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대상이 황당하게도 동성이었다.

    목종은 자신의 애인들을 제외한 인물은 만나려 하지 않았으므로, 애인 둘은 자연스레 조정의 실세로 떠올랐고,
    김치양계와 더불어 조정의 양대 축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대단한 비젼을 가진 인물들이 아니라 그저 잘생긴 외모를 가진 필부에 불과했으므로, 국가가 산으로 가든 강으로 가든 관심이 없었다.
    태후의 애인과 왕의 애인들에게 장악된 조정은 혼란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었으므로,
    나라꼴은 점점 더 엉망이 되어 갔고….
    정치에 관심 없는 동성애자 국왕, 혈통 중심의 왕조국가에서 이보다 더 곤란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목종이 자식을 남길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천추 태후는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올리겠다는 야심을 품게 되었는데,
    곤란한 점은, 둘째 아들이 김 치양과의 사랑이 맺은 결실이라, 왕 씨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는 국가의 근본을 뒤흔드는 엄청난 일이었으나, 천추태후는 야심차게 밀어붙였고,
    사전 공작으로 다음 왕위 계승권자인 대량원군을 제거하고자 하였는데,
    대량원군 왕 순은 헌정왕후와 안종 왕욱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으므로 천추태후의 친조카였다.
    사랑에 눈이 먼 태후는, 부모 없이 자란 친조카의 불쌍한 사정 따위는 관심이 없었고,
    애가 똘똘하다는 이야기를 듣자 제거해야 할 정적으로 간주하여,
    신불사로 출가시켜 강제로 중을 만들었고, 자객을 수차례 파견하여 후환을 없애고자 하였다.
    왕 순은 이러다 죽겠다고 S.O.S를 날렸고,
    이를 안 목종은, 적의 적이라는 개념이었는지 아니면 왕 씨의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사명감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왕 순을 궁궐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서경의 강 조에게 궁궐을 숙위하라고 명하였다.

    왕명을 받들어 개경으로 오던 강 조는,
    명령이 조작된 것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듣고 서경으로 되돌아갔으나,
    이미 왕이 사망했으며 조정이 김치양 일파에게 장악 되었다는 부친의 편지를 받게 되자.
    역적을 토벌하고 왕통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군사 5천을 이끌고 개경으로 향하게 되었는데,
    수도 인근에 이르러서야 왕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잘못된 정보였던 것이다.
    반역을 토벌하기 위해 왕명도 없이 이 많은 수의 군사를 이끌고 왔는데,
    반역은 없었고, 오히려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오해받기 딱 좋은 꼴이 되어 버렸으니 참으로 난감했을 것이나,
    강조는 무장답게 이왕 뽑은 칼을 그냥 휘둘러 버렸다.
    순식간에 개경을 장악한 강조는 목종을 폐위한 후 왕 순을 왕으로 세웠는데,
    이때 왕이 되라는 추종자들의 아첨을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한다.

    나라가 죽을 쑤던 밥을 쑤던,
    애인들과의 사랑에만 몰두하였던 목종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나,
    방탕에 찌든 게이 왕의 정신 건강을 보살펴줄 만큼 상황이 한가하지는 못하였고,
    생명도 보장해주지 않았다.
    목종은 두 애인, 어머니 천추태후 등과 함께 황주로 유배가던 도중, 강조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 되어,
    우리 역사상 정사에 등장하는 첫 게이왕이자,  
    고려 최초의 폐위된 왕이라는 썩 명예롭지 못한 기록을 남긴 채,
    1009년, 향년 30세로 12년간의 재위를 마쳤다.
    그는 유배 길에서도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고 극진히 모셨다 하는데,
    즉위 초반의 의욕 넘치던 모습에 비해 그 최후가 너무도 초라하고 비참하여,
    비감하지 않을 수 없다.
    김치양은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고, 패거리 40여명도 척결되어 조정에서 일소되었으며, 
    천추태후는 유배지 황주의 궁에 연금되었다.
    그녀는 66세로 죽을 때까지 20여년을 더 살았다고 하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자기 때문에 모두 죽었고, 자신마저 영어의 처지가 되었으니, 
    그 절망과 회한의 눈물이 얼마나 많았을까?

    고귀한 여인의 빗나간 사랑과 그에 따른 치정 그리고 그 일가의 비참한 종말, 
    비극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 : 거란의 1차 침입, 서희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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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 차 여요전쟁

    거란족은 4세기경부터 내몽고 일대에 거주했던 북방종족으로, 
    선비족의 일파로 보이는데,
    분파한 이래 중국과 초원의 패자, 그리고 고구려, 발해 사이에 끼여, ​
    상황에 따라 이리 복속하기도 하고, 저리 채이기도 하는 참으로 한심한 신세였다 .
    이 안습의 종족에 서광이 비추인 것은 10세기 초였는데,
    야율아보기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 분열을 일삼던 거란의 제 부족들을 통합하였고,
    세력을 키워 ​초원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순식간에 발해를 멸망시키고, 북중국까지 집어삼키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들이 세운 요나라는 막강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당대의 패자로 군림하긴 하였으나, 
    유목국가의 한계로 인해 정복한 영토 모두를 실효지배하지는 못하였다.

    ​고려는 무슨 배짱인지 건국 초기부터 거란을 배척하면서 중국 세력하고만 어울렸는데,
    중원의 역대 패자들 또한  거란의 배후에 있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고려와 협력적 관계를 맺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목국가의 한계를 극복하고 거란을 전성기로 이끈 영명한 군주 거란 성종이 982년 등극하여,
    고려의 방파제 역할을 하던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고려에 사대의 예를 요구하였다.
    어찌 보면 충분히 예측 가능하고, 당연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요구였으나,
    우리의 영명하신 성종 폐하와 그 떨거지들은 국제 정치와는 담을 쌓고 살았는지, 개뿔도 없으면서 여전히 배짱을 부렸으므로,
    송과 본격적인 대결을 앞두고 있던 거란은,
    배후에서 일관성 있게 적대적인 고려가 기가 차기도 하고,신경도 쓰이고 해서,
    이 참에 확실히 결판을 내기로 결심하였다.

    ​993년, 10월 소손녕이 약 10만 정도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여,  봉산에서 고려군을 격파한 후 항복을 요구하였다,
    고만 고만한 호족들끼리 툭탁거리는 것이 전쟁의 전부였던 고려에서, 본격적인 국제전은 조야의 혼을 빼 놓았고,
    80만 대군이라는 소손녕의 과장 광고는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전의를 상실케 하였다.
    ​항전론은 아예 없었고, 전면 항복이냐 아니면 영토를 일부 내어주고 강화를 하느냐 하는,
    항복론과 할지론이 서로 싸우는 실정이었는데,
    서희는 항복도 할지도 없는 강화를 주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서 ​희의 외로운 주장은 메아리가 없었고,
    서경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할 때, 마침 안융진에서 대도수와 유방이 승리했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전쟁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소손녕은 더 이상 전투를 확대하지 않고 회담을 줄기차게 요구하였는데,
    이러한 상황 전개는 서 희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었고, 
    조정은 드디어 회담에 응하기로 공론을 모았으나,
    죽을지도 모르는 회담에 대표로 나갈 신료들은 없었으므로,결국 서 희가 유일한 대표로 회담에 나서게 되었다. 성종 임금님은 멀리까지 배웅하며 눈물의 전송을 하였고.
    서희와 소손녕의 회담은 널리 알려진 대로 당당하고 자주적인 실리외교의 전형을 보여주었으며,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알찬 결과를 얻게 되어 서희를 민족의 위인으로 만들었고,
    단 한 차례, 단위부대조차 지휘해 본 적 없는 서희를 장군으로 불리게 했다 .

    ​서희의 업적은 강동  6주를 얻었다는 것인데,
    강동 6주는 현재 평안도 일대의 지역으로 당시에는 여진족들이 거주하는 땅이었다.
    서 희는 거란과 친교를 맺을 수 없는 이유로 중간에 끼어있는 여진족 핑계를 대었고,
    소손녕은 땅 보다는 배후의 안전이 목적이었으므로,
    거란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남의 땅이나 마찬가지인 강동 6주를 마치 선심 쓰듯이 고려에 이양하였다.
    발해의 유민으로서, 강동 6주의 실질적 주인이었던 여진족에게는 기가 막힐 일이었겠으나,
    힘의 논리가 그러하니 어찌하겠는가?
    고려는 평안도 일대를 개척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고, 거란의 철수를 이끌어 내는 결과를 얻은 반면,
    거란은 송과의 한 판 대결이라는 메인게임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병력을 엉뚱한 곳에 소모하는 미련한 짓을 하지 않고,
    고려와 송과의 관계를 끊었을 뿐만 아니라, 남의 땅인 강동 6주를 이용하여 고려와  여진이 서로 치고 받게 만들었고,
    사대의 예까지 받기로 하였으니, 
    결과만 놓고 본다면 거란이 더 많이 챙긴 회담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회담은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외교전이기도 한데,
    당시의 고려에서는 ​국가의 명운이 걸린 일이 되어야 했을 정도로,
    국제적인 안목을 갖추고, 나라를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외교관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 드물었다.
    다행히 서 희가 거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여, 당당하고 영리하게 대처한 덕분에 위기를 넘기고 강동 6주를 챙기는 소득을 얻기는 하였으나,
    전체적인 일의 진행과정은 매끄럽지 못했고, 이후 유사한 위기가 발생했을 때 비슷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서 희의 진정한 업적은 회담의 타결뿐만이 아니라 명목상 우리의 영토가 된 강동 6주를 실제로 개척한 것이었다.
    강동 6주는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구성/귀성 ), 곽주(곽산)를 말하는데,
    서 희의 노력으로,
    원래 험한 지형인 이 일대가 방어시설까지 갖추게 되자, 강동 6주는 난공불락의 요새지대가 되었고,
    이후 이어진 국가의 위기 때마다 북방 방어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거란의 1차 침입은 ​변변한 전투는 별로 없었어도,
    서희라는 위대한 인물을 탄생시키며 새로운 영토를 주었고,
    취약한 국가 시스템을 확인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 : 6대 성종, 고려를 완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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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 치, 일찍이 조실부모하여 할머니 신정왕후의 손에 자랐으나, 영특하여 공부를 잘했고 도덕군자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성장환경이 불우하여 일찍 철이 들었나 보다.

    ​981 년 경종의 양위를 받아, 충과 효를 국정의 모토로 삼았고, 아버지 왕욱을 대종으로 추존하여 정통성을 세웠다.
    이듬해에 유명한 최승로의 시무 28 조를 받아들였고, 행정 개혁을 단행하여 백관의 칭호를 개칭하였다,
    다음해에는 3 성·6 관, 칠시, 사헌부, 중추원 등을 설치하여 중앙 관제를 정비하였으며, 
    12 목을 설치하여 지방 통제를 시작하였고,
    송에 사대외교를 펼치는 한편 천제에게 제사하는 원구단을 설치하여 외왕내제를 강화하였다.
    10년 여를 밤낮 없이 일한 덕분에 고려는 면모를 일신하였고 제법 틀이 잡힌 나라가 되었으나,
    재위 11년째부터 시련이 시작 되었다.
    여동생들인 헌애, 헌정 두 왕후의 추문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두 여인은 선왕 경종의 후비들로서 모두 간통사건을 일으켰는데,​ 
    그 중 헌정왕후는 사생아까지 출산하였다.
    여염의 일이라면 둘 다 과부였고, 
    과거에는 성도덕이 보다 분방하였으므로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 치부할 수 있었겠으나,
    둘 다 태후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는 성종이 유교적 가치 실현을 국정개혁의 철학적 기반으로 삼아 개혁을 추진하던 시기였으므로,
    이러한 추문은 왕실의 도덕성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시련은 이듬해에 발생한 위기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였다.
    고려의 상시적 위협 요소였던 거란이 드디어 침입해 온 것이다.
    성종은 안주까지 나아가 ​대적하였으나, 
    적의 군세에 비해 준비가 워낙 미흡하여 싸울 엄두를 낼 수 없었고,
    중신들도 할지론과 전면 항복론으로 나뉘어 언쟁만을 벌일 뿐 대책이 없었는데.
    다행히 성종에게는 희대의 외교가 서 희가 있었다.

    서 희는 생명을 위협하는 상대와 당당히 협상을 하여,
    송과 외교를 단절하고 거란을 상국으로 섬기는 대신,
    당시에 여진족이 살고 있던 압록강 동쪽 땅, 강동  6주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겉보기에는 거란에 굴복하였고,
    영토로 인정받았다는 강동 6주도 실질적으로는 여진족의 땅이었으므로,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명목상의 외교관계 인정만으로 강대한 적을 물러나게 하였고 추후 영토확장의 명분까지 얻은 것이므로,
    협상 실패로 나라가 초토화 되고 거란의 속국이 되어 버리는 경우와 비교해 본다면,
    서 희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후주 출신들을 중용하는 광종의 정책에 반발했던 서 필을 숙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서 희를 중용했던 광종의 혜안이 고려를 위기에서 구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서희 덕분에 최대의 위기를 넘긴 성종은 ​ 정신을 추스르고 다시 개혁에 매진하였다.
    6관을 상서 6부로 개편하였으며, 지방 행정 구역을 10도·12 주로 나누었고, 
    지방의 중소 호족들 향리로 편입하여 통제하였다.
    과거제도를 강화하였고 서울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학문과 농업을 장려하여 광종의 꿈을 실현시켰고,
    유학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훈요십조에도 나와 있는 팔관회, 연등회 등을 폐지하였는데,
    이는 조선조처럼 숭유억불정책을 시행한 것이 아니라, 
    불교의 폐단시정을 명분으로 삼아, 재정을 절감하는 등의 실리를 얻고자 했던 정책이었다.

    ​이렇게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던 성종은  997년 과로가 원인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쓰러졌는데,
    그 간의 각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없어,
    자신에게 양위했던 선왕의 뜻도 기릴 겸, 경종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서거하였다.
    향년 38세, 재위는 16년이었다.

    아버지 왕 욱이 광종의 이복동생이었고 자신이 광종의 사위였으므로 선왕 경종과는 사촌 간이자 처남 매부 사이였는데,
    여동생 둘이 경종의 후비가 되는 바람에 서로 처남이자 매제가 되는 망측한 족보를 가지게 되었다.
    태조의 족내혼 정책 덕분에 초기 고려 왕실의 족보는 대부분 이 모양이었으므로 특별할 것은 없고,
    광종의 사위라는 신분이 왕통을 잇는데 가장 큰 힘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위 상속이 일반적이던 시절도 있었으나, 당시만 해도  부자 상속이 상식인 시대였으므로,
    힘으로 빼앗은 것도 아니면서 선왕의 아들이 살아있는상태에서,
    전 전대 왕의 사위라는 명분으로 왕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모양새가 나빴고,
    자신이 평생 추구했던 유교적 도덕률에도 맞지 않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들이 없어 정통성이 있는 당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므로,
    왕 송이 다음 대에 무슨 짓을 할지 몰랐던 성종으로서는, 마음만은 홀가분했을 것이다.

    ​당시는 광종의 무차별적인 호족 탄압 정책으로 왕을 대두목쯤으로 여기던 호족들은 대부분 소멸되었고,
    서희의 집안처럼 나름 역량 있고 왕권에 순응하는 몇몇 가문 만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또한 경종도 일종의 보복법을 시행하여 광종기에 세도를 부리던 일부 밉상들을 제거하였으므로,
    성종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황에서 남아 있던 귀족들과 더불어 나라를 정비할 수 있었다.
    비록 정통성이 부족하여 신하들의 주장을 상당부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요구대로 노비환천법 등을 시행하는 바람에 문벌 귀족들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어, 
    이후 고려가 문벌 중심의 봉건국가가 되어 버린 아쉬운 점이 있으나,
    국가 체제는 삼성 6부제의 완성 및 지방통치 제도의 확립 등으로 이전 시대에 비할 수 없게 안정되었다. 
    고려 전기의 국가 시스템이 비로소 완성된 시기였다.

    성종은 국가의 제도와 문물을 확립한 임금이라는 뜻의 묘호라 한다.
    거란의 침입이라는 국난을 극복하였고, 
    나라를 위해 근면 성실하게 노력하다가 아까운 나이에 서거한 그의 일생에,
    참으로 잘 어울리는 칭호라 할 수 있다.

    ​명군이었다.​

    고려 : 5대 경종, 전시과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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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 주, 광종의 맏아들이자 외아들이었다.

    광종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꼬투리만 잡히면 처형을 하였는데,
    단순히 사람 죽이는 재미로 그런 것은 아니고,
    연이은 참소에 피아를 구분하기 힘들게 되자, 이놈이나 저놈이나 어차피 호족이고,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기는 매한가지였으므로 옥석구분 없이 없애버렸을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만은 없었던 호족들은 왕의 교체를 생각하였을 것이고, 
    교체한다면 명분이 클수록 좋았을 것이므로,
    최고의 명분을 가지고 있던 비운의 왕태자들인 혜종의 아들과 정종의 아들이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들은 결국 광종에 의해 처형되었다.
    경종 또한 비슷한 이유로 아버지의 의심을 받게 되었는데,
    그 똑똑했던 광종이 어린아이에 불과한 자기 아들이 역심을 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리야 없지만,
    마누라인 대목왕후까지 호족들의 편을 들던 당시의 정세가, 아들까지도 위험인물로 취급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경종은 동생인 효화태자가 요절하여 외아들이 되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으나,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볼 때마다 윽박지르고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게 하는,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 곁에서 불안에 떨며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975년, 위대했으나 무시무시했던 아버지 광종이 저승사자와 함께 먼길을 떠나자,
    스물한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 또한 아버지 치세에 고생했던 피해자들 중의 하나였으므로, 
    호족들의 분노에 공감하는 바가 많았는지 호족 출신들을 우대하였고, 
    그들의 요구대로 일종의 보복법을 만들어 무고당한 자들의 한을 풀게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쪽이 무고를 당하여 왕족들이 살해당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아버지의 치세나 별반 다를 게 없는 꼴을 본 경종은 보복법을 취소하였고, 
    전권을 휘두르던 왕 선을 숙청해 버렸다. 만만찮은 청년이었다.

     22살이 된 젊은 왕은 중원 외교를 중시할 수밖에 없는 한반도 왕조의 숙명에 따라 송과의 외교에 주력하였으며, 전시과를 최초로 실시하였다.

    *전시과.

    소작료를 받아먹는 전지와 땔감을 얻을 수 있는 시지를 지급하는 과전이라는 뜻으로,
    전, 현직 관리에게 관품에 따라 차등 지급한 일종의 봉급이었고, 원칙적으로 상속은 금지되어 있었다.
    태조의 역분전을 계승한 제도로서 후대에 개정 전시과, 경정 전시과 등으로 변천하며, 
    무신란으로 폐지될 때까지 고려 토지제도의 기본 개념이 되었다.

     3 ~ 4년 정상적인 왕노릇을 하던 경종은 말년에  정치에 뜻을 잃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다가 병을 얻고 말았는데,
    회복될 가망은 없고 아들은 어리고 하여 고민이 많았는지, 도덕군자라는 소리를 듣던 사촌 동생에게 
    왕위를 넘겼고,
    양위 후 치료에 전념하였는지 아니면 하던 짓을 쭉 계속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 달 만에 향년 27세로 사망하였다.
    981년, 재위는 6년이었다.

    경종은 아버지의 훈육이 부족한 상태로 왕위에 오른데다가,
    아버지 치세의 후유증을 치유하느라 대부분의 정력을 소비해야 했는데,
    가뜩이나 감정이 좋지 않았을 아버지였기에, 그 뒤치닥거리에 일찌감치 실증을 내어버린 감이 없지 않아 있으나,
    그래도 먹고 사는데 기본이 되는 토지제도를 제대로 손질하여 시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후계자를 선정하여 고려를 안정시킨 보이지 않는 업적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죽은 아버지에 대한 때 늦은 반항으로 방탕에만 빠져들었던 철모르는 
    젊은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무서운 아버지에게 제대로 된 사랑 한 번 받지 못하고 시달리기만 하다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스러져간 경종, 
    안쓰럽다.

    고려 : 4대 광종, 제 2의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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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은 왕 소, 천둥에 놀라 죽었다고 기록된 친형의 뒤를 이어 949년 왕위에 올랐다.
    혼란스러웠던 이복형과 친형의 치세를 온몸으로 겪었던 광종은 형들의 전철을 밟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우선 나라의 안정에 주력하여 공신들의 표준 녹봉을 정하는 등 호족들을 다독였고, 성을 쌓아 북방의 위협에 대비하였다.
    필요한 조치들을 시행하고, 자신의 정치력 배양에도 힘쓰며, 이후의 정국을 구상하던 중, 
    951년 후주가 중원의 맹주로 부상하자, 
    그동안 사용해 오던 독자적인 연호를 버리고, 후주의 연호를 따르는 등 대중원외교를 강화하였다.
    후주 또한 거란의 배후에 있는 고려의 지정학적 위치를 중시하였는지, 고려와 정식 외교 관계를 맺고 친밀하게 대하였다.
    후주와의 잦은 교류는 왕권 강화를 모색하고 있던 광종에게 영감을 주었고 인적 자원을 제공하였다.

    953년에는 승려 겸신을 국사로 봉하여 화엄종을 왕실 종파로 만들었고, 부모를 위해 절을 지었으며, 
    균여대사의 성상융회 사상을 받아들였다.
    성상 융회는 화엄종과 법상종을 서로 합치자는 것인데, 
    두 종파의 교리상 미묘한 차이야 알 바 없으나, 
    개략적으로 `하나는 전체이고 전체는 하나`라는 화엄원리는 언제든 전체주의적인 정치사상으로 변질이 가능하였고, 
    모든 것은 마음에서 출발하고 세상은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법상종의 교리 또한 왕을 정점으로 하는 전제국가 건설에 걸림돌이 될 리 없었으므로,
    성상융회는 전제적 왕권을 꿈꾸는 광종의 입맛에 맞았을 뿐만 아니라,
    두 종파의 신봉자들인 중소호족들과 일반 백성들을 친왕파로 만드는 보너스도 기대할 수 있었으므로, 
    오매불망 왕권 강화를 원했던 광종에게 두 종파의 융합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이렇게 백성들의 정신세계까지 보살핀 왕은 제위보를 설치하여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을 구호하였다.
    그동안 전쟁과 잇따른 정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심신 모두를 다독인 셈이므로, 
    여기까지의 행적만 보면, 성군으로 칭송 받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한 5년 정국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다독이며 힘을 기르던 광종은, 
    956년 후주 출신 개혁가 쌍기와 그 동반 귀화인들을 전격적으로 등용하면서 본색을 드러내었다.
    쌍기의 진단은 ‘왕보다 힘이 쎈 이미 문벌화 된 귀족세력들이 만화의 근본’이라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였으나, 
    그 처방만은 확실했다.
    쌍기는 문벌들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인 노예에 주목했고, 노비안검법이라는 직격탄을 날렸다.

    노비안검법은 전쟁으로 포로가 되었거나, 빚에 의해 노비가 된 자들을 원래의 신분으로 되돌려준다는 상당히 정의롭고 인도적인 모양새를 갖춘 법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 수준에서 원래의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방법이 별로 없었고, 
    원래의 시행 목적이 사회정의 보다는 문벌 귀족세력의 약화였으므로,
    노비가 관청에 찾아와서, ‘나는 원래 양인이었노라’고 신고만 하면 바로 양인이 될 수 있었다.
    정의고 인도고 나발이고를 떠나,
    대부분의 생산을 노예의 노동력에 의지하던 시대에, 노비의 상실은 기존 질서의 몰락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으므로, 
    노비 소유자들은 대부분 불만을 표시했고, 가장 많은 노비들을 소유하고 있던 문벌 귀족들은 격렬하게 반발하였는데,
    조정관료들 또한 대부분 문벌귀족가문 출신이었므로, 격렬한 성토는 물론 사직서를 던지기 일쑤였으나,
    왕은 이들의 공백을 귀화인들로 채우며 물러서지 않았고, 반란의 움직임이 보이는 족족 군대를 보내 토벌하였다.
    반발이 있든 말든 작심하고 밀어 붙인 결과 노비안검법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문제는 해방된 노예들의 생계였다.
    당시 사회 경제 수준에서 해방된 노예들에게 일자리까지 챙겨 줄 수는 없었고,
    놀고 먹어도 되는 복지 사회는 꿈도 꿀 수 없었으므로, 
    먹고 살 길이 막막했던 해방자들은 별 수 없이 소작인이 되었고, 도로 노예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예나 다름없어도 양인은 양인이므로, 국가는 조세와 부역 그리고 군역을 부과할 수  있었고, 이는 고스란히 귀족들의 부담이 되었다.
    노예들은 좋다가 만 감이 없지 않아 있으나, 
    귀족들의 사병과 수입은 대폭 감소하였고, 국가의 세수와 병졸들의 숫자 등은 크게 증가하였으므로, 
    왕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된 셈이었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의 여세를 몰아 사병 혁파까지 밀어붙였으나 호족들의 반대로 무산 되고 말았는데,
    당시 고려 사정에서 사병을 완전히 없애고, 정부의 힘만으로 전국의 치안, 방어 등을 담당하기에는 무리였으므로,
    왕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을 것이고 크게 미련을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귀족들이 중요한 정치적 승리를 거둔 것 또한 사실이었으므로,
    귀족들은 이러한 승리에 고무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왕에게는 오래전 부터 준비해 온 진정한 노림수가 따로 있었다.
    큰 비용 안 들면서 명분 확실하고 효과는 뛰어난, 과거제가 왕이 준비한 다음 한 수였던 것이다.

    과거제는 동양에만 존재했던 인재 선발 시험으로서, 
    개인은 자아실현, 국가는 우수 인력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획기적인 제도이다.
    운용하기에 따라서는 국가를 환골탈태시킬 수도 있는, 군주에게 아주 편리한 제도인데,
    이렇게 좋은 제도가 서양에서는 끝내 출현하지 않았고, 동양에서도 고대에는 정착하기 힘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과거를 비롯한 모든 공개 채용 시험은 기본적으로 평등이라는 이념을 바탕에 깔고 있으므로, 
    기득권 세력에게는 불편한 제도이다.
    대를 이어 기득권을 이어가려면 우선 과거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응시자는 많고 합격자는 적으니 우선 자식들이 공부를 잘해야 했다. 
    좋은 선생 구해서 신경 안 쓰고 공부만 하게 해준다 해도 애가 머리가 나쁘면 안 되고, 
    군주가 원치 않는 세력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수단으로 악용할 수도 있었다.
    또한 시험에 통과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군주에게 충성하는 집단이 되어,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는 기능을 하기 쉬웠으므로, 
    기득권세력에게는 족쇄나 다름없는 제도였다. 
    족쇄를 반기는 바보는 세상에 없으므로 시행을 위해서는 군주의 정치력이 가장 중요하였을 것이다.

    고려 초의 호족 공신들은 하늘의 아들 보다는 대두목이 훨씬 만만하고 편한, 
    무장 출신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왕권을 신성시하고 군신간의 질서를 강조하는 유학의 이념과는 잘 맞지 않았다.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고.
    광종은 과거제 시행을 계기로 고려 방방곡곡에서 학풍이 크게 일어나기를 바랐다 하는데,
    이는 조폭 연합체와 같은 나라꼴을 환골탈태시켜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당시 호족들에게는 정체성을 바꾸라는 요구나 다름없었으므로, 
    과거제의 도입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종기의 천도 계획을 능가하는 파괴력 있는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958년, 중원의 혼란을 피해 몰려든 귀화인들로 조정을 채워 친위세력을 구축한 후,
    쌍기를 지공거로 하는 진사, 명경, 복업과를 실시하여 7명을 선발하였는데,
    비록 선발 인원은 조촐하였으나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므로, 
    호족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친위대로 궁궐을 둘러싸 신변을 보호하였고 한다. 
    960년, 관료들의 복식을 제정하여 새로운 관료체제의 탄생을 내외에 알렸고, 
    군부를 개편하여, 군부 내 호족세력을 대폭 해임, 파면하였다. 
    또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개경을 황도로 칭함으로써, 자신이 황제와 같은 절대권자임을 
    신하들에게 주입시켰다.​
    이렇게 강화되어가는 왕권에 귀족들은 당연히 저항하였으나 이미 달리기 시작한 기차였다.

    광종기를 특징짓는 공포정치는 역모의 고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첫 사건은 친국을 하여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끝을 내었으나 이후 참소가 줄을 이었고, 
    감옥이 가득차서 임시옥사를 설치할 지경까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누가 적이고 아군인 지를 구별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된 광종은 공신들을 관직에서 내쫓아 버렸고,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을 숙청, 처형하였다.
    이러한 살벌한 숙청은 정세를 더욱 불온하게 하였고 왕의 의심은 더욱 깊어지게 되어, 친족들도 벼락을 피해가지 못하였다.
    차기 왕위를 노릴 수 있는 혜종과 정종의 아들들이 처형당하였고, 평소에 행실이 좋지 않았던 이복동생 효은도 처형하였으며,
    심지어는 친아들마저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칼 밥이 되어야 했던 귀족들이나, 휘두르는 왕이나, 서로 지옥이었을 것이다.

    광종은 961년 궁궐을 증축하기 위해, 당숙인 왕 육의 사저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 속사정이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시절이 하수상하니 방비에 신경이 쓰이기도 하였을 것이고, 
    기왕에 개경을 황도라고 선언하였으니 그에 걸 맞는 규모의 궁궐도 필요하였을 것이다. 
    뭐가 되었건 왕 육의 사저에 이어하고 있는 동안은, 
    공격적인 숙청을 자제하고, 새로이 중원의 패자가 된 송과의 외교에 주력하였으며, 
    귀법사를 창건하고, 제위보를 설치하는 등 불교세력과 민심을 다독였다.

    964년 증축이 끝나 궁궐로 환궁한 왕은 호족들의 불만 사항을 청취하고자 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박 수경의 아들들이 정책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불만을 과격하게 표현하였는지, 아니면 꼬투리를 잡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왕은 분노하여 박수경의 아들들을 처형해 버렸다.​ 
    이 꼴을 본 박수경은 상심하여 병사하였고.
    가문이 결딴 나고 말았다.
    평주의 호족 박씨 가문은 광종의 주요 정치기반 중 하나였으나, 
    호족으로서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제거되어 권력의 무상함과 비정함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왕은 내친 김에 혜종비와 정종비의 친정아버지인 청주의 호족 김긍률도 숙청하는 등 공포정치를 이어갔는데,
    이후로도 도전하는 세력은 누구를 막론하고 숙청하였으며, 술자리의 말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승로에 의하면, 숙청이 얼마나 철저하였는지 경종 즉위 시까지 살아 남은 공신가의 사람은, 
    태조의 삼한공신 3200 중 40여명에 불과 하였다고 한다.
    과장이 좀 섞였을 것이다.

    975년 여름 재위 26년 만에 향년 51세로 서거하였다.

    광종비 대목왕후 황보씨는 광종의 이복누이였다.
    성씨가 다른 것은  출생의 비밀 때문이 아니라. 
    태조가 자식들에게 성씨를 부여할 때 아들들은 왕씨로, 딸들은 어머니의 성씨를 따르게 하였기 때문에, 태조의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의 딸은 황보씨가 된 것인데,
    이 황보씨가 족내혼으로 이복 오라비와 결혼하였고, 남편이 덜컥 왕이 되는 바람에 졸지에 황보씨 왕후가 된 것이다.

    족내혼은 가문의 부와 권력의 누수를 방지하기 위해 같은 가문 사람들끼리 결혼하던 고대의 풍습이었고, 모계의 전통이 강했던 신라에서는 흔한 일이었으므로,
    그냥 왕씨로 통일해도 되었을 텐데 태조는 왜 이리 해괴한 일을 벌였을까?
    노골적인 신라 왕실의 근친풍습이 중국을 비롯한 북방의 관습과 달랐고, 
    원래 힘 센 놈들은 지들이 선진문명이라고 우기는 법이므로, 중국 놈들은 신라의 근친혼을 야만적이라며 멸시하곤 했다. 
    미약한 왕권을 그나마 유지하고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는 근친혼만한 게 없는데, 
    되놈들은  경멸을 해대니 별 수 없이 눈 가리고 아웅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이야기이다. 아닐 수도 있다.
    속사정이야 뭐가 되었건 ​고려는 이러한 고심이 필요할 정도로 왕권에 비해 호족들의 세력이 막강한 나라였다.

    태조는 대단한 능력의 창업 군주였으므로, 
    각지의 기세등등한 호족들을 달래고 어르면서 끌고 나갔으나,
    이 또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저 장악력이 있는 대 두목 정도의 권위였다.
    정비 6 , 후비 23 … 총 29명의 왕후들은  태조의 미약한 왕권을 가려주는 장식들이었으나, 
    이는 뒤를 이은 자식들에게는 가시 면류관에 다름없었고, 
    기세등등한 호족들에게 둘러싸인 옥좌는 찬란한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벼랑 끝에 마련된 위험천만한 자리였다.
    이 위험한 옥좌는 늠름한 기상의 혜종을 어리석고 병약한 왕으로 만들었으며, 
    저돌적이고 야심찬 성격이었던 정종을 천둥에 놀라 죽어버리는 졸장부로만들었다. 
    광종도 빛나는 왕이 아닌 미친 왕이 될 수도 있었다.
    따라서 광종에게 개혁이란 왕의 권위니 이상적인 사회니 하는 한가한 형이상학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되는 절박한 실존의 문제였다.
    조폭 연합체 비슷한 체제 하에서, 멍하니 있다가는 이복 형 혜종처럼 어느 놈 칼에든 맞아죽을 위험이 높았고, 그렇다고 서두르다가는 친형인 정종 꼴이 나기 쉬웠으므로, 
    무언 가를 하긴 하되 신중해야 했고 확실한 방법이어야 했다. 
    즉위 초반 정관정요를 읽으며 방법을 모색하던 광종은, 후주의 사신단에 딸려온 쌍기를 만나면서 확실한 개혁의 밑그림을 그리게 된 듯하다.

    *후주

    곽위의 쿠데타에 의해 건국된 나라로서 5대 16국 시대의 마지막 왕조이다.후주의 2대 황제인 세종은 당대 최고의 명군이라 불릴 정도로 유능하여, 중원을 거의 통일하였고, 
    한족의 비원이랄 수 있는 연운 16주까지 되찾는 기염을 토하였으나, 불행히도 명이 짧아, 7살 어린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7살짜리가 나라를 지키기에는 후주의 연륜이 너무 짧았기에, 송 태조 조광윤에게 나라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후주는 그 위세가 무색하게, 3 대, 9년이라는 짧은 존속기간을 가진 단명 국가가 되었으나, 
    통일 왕조인 송의 전신으로서 중원뿐만 아니라 고려에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광종은 즉위 초반 부터, 그들의 건국과 놀라운 팽창 그리고 소멸을 오롯이 지켜볼 수 있었고, 
    그 혼란 덕분에 인재들을 영입할 수 있었으며, 
    그들이 난리 치는 바람에 거란이 고려 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못하는 등 짭짤한 부수입을 많이 건질 수 있었다.
    후주는 광종의 멘토인 동시에 후원자였던 셈이다.

    쌍기는 후주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인물로 보이는데, 건국 사업으로 한창인 제 나라를 놔두고 왜 고려로 왔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고려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이상을 실천하는데 더 적합한 무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대륙을 쓸어가던 당시 후주의 사정 상 학자보다는 무장이 더 우대를 받았을 것이므로,
    무식한 칼잡이들의 비서나 뒤치다꺼리 담당 관리를 하느니,
    정복의 시대를 끝내고 내치를 다져나가던 고려에서 개혁을 주도하는 왕의 측근으로서, 지식인 대접을 받으며 사는 것이 백번 나은 삶이었을 것이다.
    뭐가 되었건 이해가 일치한 광종과 쌍기는 호족들을  때려잡고 나라의 시스템을 확 바꾸어야 한다는 목표에 합의하였고,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노비안검법에 이어  과거제를 시행하였다.

    과거는 주로 유교 경전에 대한 암기력과 문장력을 측정하였으므로 통과하기 위해서는 유학을 공부해야 했는데, 
    유학은 그 창시자인 공자의 신분에서 알 수 있듯이 대 귀족들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실무를 담당하는  사대부들을 위한 학문이었다.
    따라서 그 이념은 천명을 받은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신분적 위계질서였고,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공자 생존 당시의 대 귀족들과도 상성이 맞지 않았으나, 
    호족들과는 상극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으므로, 호족들의 반발은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 반발을 누르고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책사의 역할이 중요하였는데,
    쌍기는 이 역할에 안성맟줌인 인물이었다.

    쌍기는 광종의 기대에 걸 맞게 시기에 맞는 정책을 입안하였고 적절한 인물을 추천하는 등 맹활약하였는데, 
    과거제를 시행하기 전에 노비안검법으로 호족들의 힘을 뺀 것은 쌍기의 비범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할 것이다.
    노비 해방으로 경제적, 군사적 기반에 타격을 받은 호족들은 중요 고비마다 힘을 쓰지 못해 과거제를
    내주고 말았을 뿐만 아니라, 
    후주의 몰락과 함께 대거 귀화한 중국의 지식인들이 조정을 장악하는 것도 막지 못해 주요 저항수단을 
    잃었고 힘을 결집시킬 수도 없었다.
    광종은 약화되고 분열된 호족들을 각개 격파하며 대망의 개혁을 완수하였으며, 
    건국 수준의 위업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이 제 2의 건국의 일등공신은 광종의 장자방 또는 제갈량이라할 수 있는 쌍기였다.

    광종의 개혁은 후속 조치의 미비로 후대에 원상복귀된 것이 많다는 비판이 많으나, 
    개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과거제는 계속 시행 되었고 조폭두목 같은 호족들도 대부분 제거되어 나라꼴이 일신되었다.
    비록 그 살벌한 숙청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중심으로 귀족 국가가 형성되어,
    고려는 여전히 절대 왕권과 인연이 없긴 했으나, 
    광종 이전의 조폭 시절보다는 분명 진일보한 사회였고, 백성들이 살기에도 한결 편한 세상이었다.
    광종과 쌍기에게 민주주의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광종.
    고려의 400년 역사를 가능케 한 진정한 명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