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 to top
ENGLISH 中文 日本語
20.8 C
Seoul
2025년 8월 10일 오전 5:49
More
    블로그 페이지 62

    고려 : 무신들의 시대, 늙은 권력자 정중부

    0

    무인들의 대부로서 정변을 진두지휘 했던 정중부는 벼슬이 계속 높아졌으나,
    칼든 젊은 놈들이 하도 설쳐대는 통에 실권이 없는 속빈 강정 꼴이 되고 말았는데.
    기특하게도 아들놈이 그 지독스럽던 이의방을 잡아준 덕분에 70이 다 된 나이에 명실상부한 집권자가 될 수 있었다.

    살육밖에 모르던 과격한 놈들을 대신하여 원숙한 나이에 새로이 집정이 된 정중부가 국가를 위해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안은,
    현재 진행 중인 조위총의 반란과 그로 인해 들떠버린 민심 그리고 피폐해진 민생 등이었을 것이나,
    나이만 많았지 국정 철학이니 사명감이니 하는 것들은 죽은 젊은 놈들 못지않게 빈약했던 그는,
    우선 자신의 권력을 공고화 하는데 열을 올렸다.

    조위총의 난은 정치 투쟁이라기보다는 묘청의 난 이후 소외되었던 서경 지역의 지역민들이
    차별에 항거하여 일어난 민란의 성격이 강했고,
    이의방이 개경에 근근이 남아있던 서경 출신들을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도륙하는 바람에
    악화된 면도 있었다.
    따라서 명종은 이의방이 암살 된 것을 기화로 조위총을 회유하려고 하였으나,
    조폭같은 무신들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허수아비 왕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조위총은
    항거를 계속하였다.
    별 소득도 없이 임금의 체면만 손상되고 만 것이다.

    정중부는 기왕에 이의방이 준비한 병력이 있으므로 윤인첨과 두경승에게 토벌을 명하였고,
    무용이 이의민 못지않았던 두경승은 도중에 걸리적거리는 놈들을 때려잡으며 진군하여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평양성은 여전히 난공불락이었으므로, 윤인첨은 지구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는데,
    반면 성에 갇혀 줄어드는 창고의 식량을 공포의 눈으로 바라만 봐야했던 조 위총은,
    항복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의종이 신하들에게 시해되었음을 알리고, 
    원병을 청원하였다.
    이는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었고, 
    금의 입장에서는 고려를 집어삼킬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셈이었으나,
    빠른 성장만큼이나 빠르게 보수화, 문약화 되어 버린 금은,
    이제 열살 남짓한 테무진이 뛰어다니는 몽골초원과 남송에 신경쓰느라 고려를 침입할 여력이 없었기에, 조위총의 사신을 그냥 고려로 압송해 버렸다.
    대신에 해적인지는 모르겠으나 금나라의 배 백여 척이 동해 쪽으로 침입하여 노략질을 했다고 한다.

    아무튼 나라꼴이 말이 아니게 된 상황이었는데, 이 와중에 남쪽에서는 망이, 망소이의 난이 일어났다
    공주의 명학소에서 숯을 구어 먹고 살던 망이와 망소이는,
    고려의 신분 질서가 흔들리고 잦은 변란으로 사회의 혼란이 지속되자,
    기회라고 생각하였는지 굶주린 무리들을 모아 봉기하였다.
    향, 소, 부곡은 그 기원이 정확하지는 않으나 신라 시대부터 존재했던 유구한 전통의 천민집단으로서,
    주로 전쟁 포로, 유민, 반역자의 자손들을 모아 살게 한 마을들을 그렇게 불렀고, 
    반란이 일어났던 지역을 통째로 강등시켜 만들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 주민들은 신분은 양인이나 천민처럼 살아야 하는 신세였다.
    두 망망이들이 거지떼들을 모아 일으킨 반란은,
    이러한 구조적 모순에 시달리던 주민들의 호응을 받아,
    전통적 요충지 공주를 점령하고 이어 예산현까지 위협하는 기염을 토하였는데,
    조정의 정중부 일당은 조위총에게 진을 다 빨려 진압할 능력이 없었는지,
    명학소를 말 잘 들으라는 뜻의 충순현으로 승격해주고 수령을 파견하여 회유하였다.
    얻을 것을 다 얻은 남쪽의 두 망망이들이 잠잠해지자,
    서경 공략군도 힘을 냈는지 두경승이 인육으로 허기를 달래고 있던 평양성을 공격하여 깨뜨렸고,
    조위총을 잡아 효수하였다.
    나라에 막대한 해악을 끼쳤고, 정중부를 실권자로 만들어 주기도 하는 등, 
    실로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던 조위총의 난은 2년 만에 해결 국면으로 넘어갔으나,
    남쪽은 사정이 달랐다.

    뒷간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것이 인간의 일반 심리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비열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비열함이 이미 생리가 되어 버린 조정의 무신들은 천한 놈들에게 굴복했던 것이 영 마음에 안 들었던지, 상황이 좀 편해지자 반란의 주동자들을 잡아 처벌하고자 하였다.
    두 망망이들은 당연히 길길이 뛰었고 재 봉기하였으나,
    북쪽을 해결하여 한 숨 돌리게 된 조정은 대군을 동원하였고, 
    봉기군은 잠깐 기세를 올린 것을 끝으로 결국 진압되고 말았다.
    충순현으로의 승격은 없던 일이 되었고, 항복한 두 망망이는 청주목에 수감 되었다는데,
    마치 녹두장군의 운명을 보는 듯하여 애잔하다.

    어찌 되었건 긁직한 반란을 두 건씩이나 해결한 정 중부 도당들은 이제 마음 놓고 권력을 탐하였는데, 이미 고희를 넘긴지 몇 년 된 정 중부는 남 보기에 좀 그랬는지 치사를 하여 막후 조정자로 물러앉았다.
    따라서 조정의 권력은 이의방 살해의 공신인 아들 정 균과, 장인과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는 정중부의 사위 송유인이 나누어 행사하게 되었다.
    일종의 세대교체를 한 것인데, 그래봐야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권력의 남용과 부정부패는 더 심해졌고 서경 지역의 소요사태는 툭하면 일어났으며, 
    전국적으로 도적이 들끓어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늙은 매부와 권력투쟁에 여념이 없던 정 균은 이미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마가 되어 권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국의 공주를 둘째 부인으로 삼겠다는 발칙한 그의 생각은 조야의 엄청난 역풍을 만났고,
    청년 장수 경대승의 분노를 사고 말았다.

    경대승은 무사 30여명을 동원하여, 대궐에서 궁녀들을 희롱하다 자빠져 자고 있는 정 균을 살해한 후, 금군을 동원하여, 송유인 부자와 민가에 숨어 있던 정중부를 체포한 후 목을 따버렸다.
    1179년의 일이었다. 
    74년간의 정중부 인생, 참으로 영욕이 가득하였다.

    고려 : 무신들의 시대, 포악한 이의방

    0

    본관이 전주로, 이 성계의  6대조 백부가 된다고 하는데,
    아버지가 대장군이고 어머니가 정승집 딸이었으므로 천한 신분은 아니었으나,
    고려의 뿌리 깊은 무신차별은 그를 분노하게 하였고 혁명가로 이끌었다.

    한 뇌가 지랄을 떨 때 그의 직책은 이 고처럼 견룡행수로서 하급 지휘관에 불과하였으나,
    친위군인 견룡군 병사들을 실질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에 정변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
    정변의 발의자 중 한 사람이었던 그는,
    이 고, 채 원등과 함께 칼을 들고 혁명의 실무를 수행하면서,
    문신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들은 서리까지도 죽여야 한다는 등의 과격한 주장들을 쏟아내었다고 하는데,
    그 공인지, 명종이 즉위한 후  벽상공신이 되었고 고속 승진하여 정권의 정점에 근접하였다.
    그러나 같은 공로로 공신이 된 이 고에 비해 실제 권력에서는 약간의 손색이 있었는데,
    다행히 또 다른 혁명 동지 채 원의 도움을 받아 이 고를 제거하고 명실상부한 집권자가 될 수 있었다.

    이의방, 이고 등과 함께 무신정변을 주도했던 채원은, 
    의종이 정중부를 암살하려고 하자 의종을 시해하려고 했던 인물로서,
    면밀한 사고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인간형이었던지 벽상 공신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는 혁명동지들의 갈등의 중간에 끼어 고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이의방의 편을 들어 공을 세웠는데,
    사후 보상이 만족스럽지 못했는지, 다시 이 의방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제거되었다.

    노 장군들과 이 고에 이어 채 원까지 제거하여 내부 권력 투쟁을 마무리 한 이의방은,
    정중부가 얼굴 마담으로 있는 중방을 막부로 삼아 본격적인 무인집정 시대를 열었고, 
    의종의 애첩이었던 미인 무비의 사랑까지 얻어,
    남자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인생 최고의 상태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그가 구축한 이 생소한 체제가 안착하기에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여,
    수 많은 바란들이 뒤를 이었다.

    김보당은 명종 즉위와 함께 간관으로 등용된 무신 정권에 협조적인 문신이었는데,
    칼 든 자들의 세상에서 간관들의 처지는, 정변 이전의 무신들처럼 형편없었기에,
    여러 가지 비애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비정신의 총화라는 간관의 긍지를 잃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김보당은 겁도 없이 정권의 실세인 의의방의 형 이준의 등의 무신들을 탄핵하였는데,
    무신들의 하는 짓이야 뻔하였으므로,
    김보당의 말이, 말이야 맞는 말이었지만, 명종에게는 그의 손을 들어줄 힘이 없었다.
    얻은 것도 없이 칼든 놈들의 원한만 사게 된 김보당은 여러번의 좌천을 거쳐 동북면 병마사가 되었는데,
    이래저래 열받은 김보당은,
    무신정권 타도와 의종의 복위라는 다소 반동적이기는 하나 파괴력 있는 슬로건을 들고,
    병법에 밝은 고려의 문신답게 동서남북을 아우르는 큰 그림을 그렸으며,
    현 정권의 아킬레스건인 의종을 확보하여 경주에 제 2전선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군사적인 능력은 별로였는지 이의방이 보낸 이의민과 박존위에게 패하였고,
    생포되어 개경 저잣거리에서 목이 잘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이 자가 죽으려면 곱게 죽을 노릇이지 죽기 전에, 고려의 모든 문신들이 자신의 동조자라고,
    반란을 정당화하는 바람에 애꿎은 다른 문신들까지 대량으로 학살되었다.
    의종도 금강야차라 불리던 이의민에게 등뼈가 꺾여 살해 되었고.
    민폐가 많은 인생이었다.

    정치력이 별 볼일 없었던 무신들에게 의종은 심복지환이나 다를 바 없었으므로, 제거가 필연이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 시대에 왕이 가지고 있던 상징적 의미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서, 왕의 시해는 엄청난 역풍을 만나게 되었다.
    특히 역대 왕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왕실의 친위 예비 세력으로 양성되곤 했던 사원 세력은,
    이에 크게 반발하였는데,
    교종의 전통적인 왕즉불 사상으로 보면,
    절을 열심히 지어 주던 의종을 참살한 무인들은 부처에게 해를 입힌 마구니와 다를 바 없었으므로,
    그들은 마도척결을 기치로 궐기하였다.
    귀법사의 승려 100여 명이 북문으로 침입한데 이어, 약  2000여 명의 중들이 떼 지어 성문을 공격하는 일이 발생하자,
    열 받은 이의방은 개경 인근의 절들을 초토화시켜버림으로서 친왕 세력들에게 경고하였는데,
    그 경고가 무색하게 이번에는 그동안 얌전히 있던 서경유수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켰다.

    조위총은 의종 말에 병부상서를 지내다 서경 유수로 나가 있던 인물로서,
    무신 정변이라는 경천동지할 만한 사태가 일어나든, 김보당이 웅대한 전략을 세우든 말든,
    나 몰라라 하며 요충지 서경에서 쥐 죽은 듯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의종이 살해되자 갑자기 격문을 돌리고 반란을 주동하였는데,
    얼핏 보면 왕을 시해한 간악한 무리들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떨쳐 일어난 의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기엔 그동안의 행적이나 그 이후의 행동들이 별로였다.
    좀 삐딱하게 해석을 해보면,
    군사력이 밀집되어 있는 북쪽 지방의 특성상 서경은, 약간의 능력만 있으면 누구라도 제 2의 김보당이 될 수 있는 지역이었고,
    김보당의 난이 끝난 후 대뜸 개경의 문신들부터 학살했던 것처럼,
    행동에 정통성이나 정당성 같은 정치적 명분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으려 해도 없는 개경의 무신들이,
    북쪽의 문신들을 곱게 놔둘 리는 없었고, 뭔가 조치를 취할 것이 분명한데, 
    그 조치라는 것이 우호적일 리는 만무하였다.
    따라서 조위총은 이에 위협을 느꼈고, 자구책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닐까 하는데,
    자세한 속사정이야 뭐가 되었건,
    서경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만 하면 바로 호응하는 경향이 있는 절령 이북의 성들을 접수하여 기세를
    올린 조위총은,
    이의방이 파견한 윤인첨을 급습, 대파하였고 개경까지 육박하여 역사를 이루는가 했으나,
    최고 지도자 보다는 장군에 더 잘 어울리는 이 의방이,
    그 시기까지 조정에 근근이 남아 있던 서경 출신들을 마저 도륙한 후, 직접 출전하는 바람에 대패하고 말았다.
    이의방에게 쫓겨 되돌아간 조위총은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농성을 시작하였고,
    북방의 요충 서경은 언제나처럼 쉽사리 함락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기세등등했던 이의방은 추위에 떨며 성 주위를 뱅뱅 돌 수밖에 없었고,
    빈틈을 노린 조위총의 공격에 패배하여, 엉덩이를 걷어차인 똥개처럼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위총 아들의 목이나마 들고 갈 수 있었기에 최소한의 체면치레는 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어쨌든 패전이므로 집권자가 직접 출전한 토벌전에서 받은 성적표 치고는 초라하였는데,
    한 배를 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명종은, 이의방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는지,
    그를 좌승선으로 승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의 딸을 며느리로 맞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다.

    태자의 장인이 되어 더욱 권력이 강화된 이의방은 자신의 콧등을 물어 뜯은 조위총을 끝장내기 위하여 대대적인 토벌군을 준비하였는데,
    그동안 이의방의 전횡을 눈꼴시게 바라보던, 얼굴마담 정중부의 아들 정균은 이의방이 조위총마저
    토벌하고 나면 더 이상 그 위상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 자명하였으므로,
    조위총이야 어찌 되든 일단 이의방을 제거하려 하였고, 마침 기회가 생기자 조참이라는 중을 시켜
    암살해 버렸다.

    무비가 꿈자리가 사나우니 오늘 만은 나가지 말고 집구석에 쳐 박혀 있으라고 했다던데…
    아무튼 그의 4년 남짓한 영화는 이렇게 어이 없게 끝나고 말았다.

    고려 : 무신들의 시대, 개막

    0

    무신정변의 세 주역 중 하나인 정중부는 인종 때 군적에 올랐다는 것으로 보아 귀족과는 거리가 먼
    신분이었던 듯한데,
    풍채가 비범하여 금군에 발탁되었다고 한다.
    그는 풍채뿐만 아니라 사람을 끄는 매력도 있었는지,
    장교가 된 후에 그 유명한 수염사건의 여파로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김부식과 원한을 맺었어도,
    인종의 비호를 받아 무사할 수 있었고,
    초기에 문신들과 첨예하게 대립했던 의종도 정중부를 신임하여,
    고과점수가 썩 높지 않은 그를 강화된 친위군의 수장으로 만들었으며 상장군까지 시켜주었다.
    이렇게 두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60대 중반까지 살았으므로, 
    자기 인생에 별 불만이 없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뿌리 깊은 무신 천대의 전통은 그를 정변의 지도자로 내몰았다,

    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왕과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괴로워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올라 탄 호랑이에게 물려 죽을 수 없었던 정중부는 의종을 폐위시켜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명종을 즉위시킨 후 문하평장까지 고속 승진한 그는 이의방, 이 고와 함께 벽상공신으로 추대되어,
    공신각에 초상이 걸리는 광영까지 맛보았으나,
    실권은 이 고, 이의방 등의 젊은 과격파에게 있었으므로 또 하나의 얼굴마담에 불과한 처지였다.

    막부 정치가 본격화한 명종 초기, 정권의 주도권을 쥔 사람은 이 고였다.
    그는 무신 정변을 실질적으로 기획, 실행한 인물로서, 주저하는 정중부를 끌어들여 명목상의 지도자로 추대하였으며,
    보현원에서 문신들을 가장 많이 살육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추진력 덕분인지 그는 무신정변의 3공신 중에서 추종자을 가장 많이 거느렸다고 하는데,
    능력보다 간이 더 컸는지 아예 왕조를 바꾸고자 하였다.

    왕은 자기가 하겠다고 대놓고 주장하지야 않았겠으나,
    세를 모으다 보면 의도가 새어나갈 수밖에 없었고, 적과 동지를 떠나 그에 대한 반감이 심하였는데,
    특히 구 체제에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대장군 한 신 등의 노장군들은 더 크게 분노하여,
    이 근본도 모르는 놈을 단매에 때려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노익장을 과시해 보기도 전에 발각되었고, 이 고의 동지 이 의방에게 제거되고 말았다.

    중방에 앉아 미주알 고주알 잔소리를 늘어놓던 노인네들은 이렇게 제거되었으나,
    이 고가 꿈을 이루려면 최대의 협력자이자 경쟁자인 이의방이라는 산을 넘어야 했는데,
    이의방의 능력 또한 이 고 못지 않았으므로 정면대결 보다는 암살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믿었던 동지 채 원은 이 고보다는 이의방과 더 친했던지 이 치명적인 정보를 누설하였고,
    열받은 이의방은 궁문을 나서는 이 고를 쇠몽둥이로 때려죽여 버렸다.

    개막전의 주인공 이 고는 이렇게 허무하게 유명을 달리하였으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달리기 시작하였고, 우리 역사상 희귀한 막부정치의 시대가 활짝열렸다.

    고려 : 19대 명종, 완벽한 얼굴 마담

    0

    왕 호
    인종의 3째 아들로서, 위로 형이 둘씩이나 있었으므로 옥좌와는 좀 거리가 있는 신분이었으나,
    사람 팔자는 알 수가 없어서, 
    둘째 형 대량후가 큰 형에 의해 일찌감치 무력화 되었고,
    1170년 무신 정변으로, 놀기 좋아하던 큰 형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나이 40에 느닷없이 왕좌에 앉혀졌다.

    무신 정변은 어떤 고상한 이념이나 포기할 수 없는 가치 따위를 수호하기 위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다분히 우발적으로 시작되어 기존 질서의 무차별적 파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혁명 주체들은 호랑이 등에 올라탄 형국이 되었는데,
    기르던 개에게 뒤꿈치를 물린 꼴이 된 의종은 성격대로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정중부를 암살하려고 하는 등,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 배은망덕한 놈들에게 철퇴를 내리고 왕권을 되찾으려고 하였으므로,
    혁명주체들은 지들이 살기 위해서라도 의종을 폐위하고 신왕을 옹립하는 수밖에 없었다.

    권력을 내려놓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무신들에 의해 방패막이로 고용된 얼굴마담에 불과하였으므로,
    이러한 자신의 한계와 역할을 잘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명종은 단 한 번도 실권을 탐내지 않았고, 주인이 누구로 바뀌든 그에게 순응하였다.
    덕분에 대궐 밖에서는 피가 강이 되어 흐르는 참극이 되풀이 되었어도,
    때늦은 사랑타령과 손자들의 재롱 속에 세월을 보낼 수 있었고, 고희를 넘겨서까지 장수할 수 있었다.
    말년에 최충헌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창락궁에 유폐된 뒤에도,
    형 의종과 달리 환경에 쉽게 적응하였는지,
    그 상태로 오년을 더 살다가 ​1202년 이질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향년 72세, 27년간의 재위였다.​

    고려 : 18대 의종, 끔살되다

    0

    왕 현
    어려서부터 놀기를 좋아하여 부모에게 걱정을 많이 끼치는 자식이었다고 한다.
    아들이 하나라면 모를까 다섯이나 되었으므로,
    엄마는 반항기 많은 맏아들 보다는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둘째에게 마음이 더 갔던 모양이나,
    정정불안이라면 신물 나게 겪었던 아빠와 유교적 명분론을 강력히 주장하는 스승의 지원에 힘입어, 1146년 왕되기 딱 좋은 나이인 20세에 왕위에 올랐다.    

    평생 무력감에 치를 떨었던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 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역대 고려왕의 화두이기도 한 왕실의 권위 확립과 왕권의 강화를 위해 노력한 듯한데,​
    당시 조정은 언제나처럼 문벌 귀족들이 강고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고,
    전대에 있었던 묘청의 난으로 왕의 입지가 극도로 축소되어 버린 상황이었으므로,
    갓 성년에 도달한 청년왕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시작도 해보기 전에 좌절하기에는 인간 왕 현이 가지고 있는 반항기가 녹녹하지 않았다.

    시문에 능하고 활 잘 쏘고 승마, 격구 실력도 상당했다는 그는, 왕위에 오른 후 전공을 살려
    무신들과 친하게 어울렸으며,
    정중부, 이의방, 이 고, 이의민 등의 인재를 발탁하여 친위군을 강화하는 한편,
    말 잘 듣는 환관들과 궁 안에 상주하며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일종의 비서관인 내시 등의
    인물들과 친분을 쌓아 친위세력을 구성하였다.
    그의 놀기 좋아하는 성품이 한 몫 하였을 것이다.
    비록 인재풀이 협소하여 구성 인물들의 질은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나으므로,
    이 정도로 시작하여 겸손하게 정치를 배우고 힘을 길렀더라면, 아버지 보다는 훨씬 좋은 환경에서
    왕노릇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반항기가 많은 천성 탓인지, 아니면 어머니의 반대로 즉위에 어려움을 겪었던 자격지심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의종은 그렇게 사려 깊은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신분이 낮은 자들과 어울리며 격구에 심취하고 환관들을 우대하는 등 유학자들이 싫어하는 짓을
    빠짐없이 하는 제자를 본 정몽주의 선조 정습명은
    폭풍 같은 잔소리를 쏟아내며 고명대신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려고 하였고,
    간관들 또한 자신들의 권리와 의무에 충실하여 왕의 행동에 여러 가지 제동을 걸었는데,
    부모 말도 안 듣던 애가 왕까지 되어 남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들을 리 없었으므로,
    곳곳에서 파열음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 
    신하들은 시위 및 출근투쟁을 불사하며 왕의 의지를 꺾고자 하였고, 마음에 들지 않는 왕의 측근은 기어이 축출하였으며,
    반란이라도 발생하면 왕의 실책이라고 꾸짖기도 하였다.
    좀 과한 면이 없지 않으나​ 그렇다고 틀린 소리도 아니었으므로 좀 반성하고 개선책을 찾고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왕은 이게 다 왕권이 약해 신하들이 임금을 업신여겨서 발생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는지,
    왕도 태업 및 파업으로 신하들에게 맞서는 한편, 친위세력을 더욱 강화하여 그들하고만 어울렸다.
    하지만 친위세력이라고 해봐야, ​
    왕과 이상을 공유하고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그런 거창한 인물들로 구성된 집단이 아니라,
    그저 배짱이 맞고 아첨에 능한 인물들이 주를 이루었으므로, 별 대책 없이 그저 놀기만 하였을 것이다.​
    격구 광이었다고 하니 격구 스타플레이어들과 술이나 한잔하며 신세타령이나 하지 않았을까?
    비록 방법은 찌질하였지만 줄기차게 신하들과 투쟁을 이어가던 의종은 제법 내공이 쌓였는지,
    스승 정습명을 조정에서 축출하는 뜻밖의 개가(?)를 올리게 되었다.
    정습명으로서는 제대로 된 왕을 만들겠다는 인종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제자에게 애프터 서비스를 좀 과할 정도로 베푼 것이었으나,
    이 못된 제자 놈은,
    정습명 또한 문벌 귀족의 일원이므로 왕을 무시하여 그리하는 것으로 받아들였… 는지는 모르겠으나,
    스승의 질책에 넌더리를 내버렸고, 같잖은 정치력을 발휘하여 제 복을 걷어차 버렸다.​
    정습명은 이렇게 어떨결에 조정에서 밀려난 후 분사하였으나,
    왕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야 말겠다는 간관들의 남다른 신념은 여전하여, 사사건건 왕의 행동에
    제동을 걸었고, 그 좋아하는 격구 관람을 중지시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왕도 제법 노련해져 간관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몇 년 후 시중자리에 있던 외조부 임원후마저 사망하면서, 더 이상 조정에 임금을 제어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신하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의종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저하고 싶은 짓을 마음껏 하게 되었고.

    ​왕은 우선 모후 공예태후를 절간에 안치시키는 한편, 왕위를 놓고 다투었던 동생 대령후를 유배시키는 정치보복을 하였고,
    측근들을 대거 등용하여 소망하던 왕권을 강화한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을 살피고 ​제도를 개혁하여, 미래의 먹거리 창출을 위해 힘을
    쏟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닮았는지 풍수, 도참, 점복에 빠져 들었으며, 
    열심히 절을 지어 외형상으로나마 불교세력을 복원시켜 주었고, 무엇보다 사치와 향락에 탐닉하였다.

    문벌 귀족들 ​은 혀를 끌끌 차기는 하였겠으나, 내 새끼도 아니고,
    왕이 그저 놀기나 좋아할 뿐, 무슨 대단한 이상을 가지고 귀족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개혁 따위를
    실천하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스승이나 외할아버지처럼 책임감이나 애정 따위가 있었을 리 만무한 그들은,
    ​괜히 나서서 욕먹고 가문을 위험에 빠뜨리는 짓을 하기 보다는 그냥 방치하였다.
    국가 원로들의 방관 속에 소원하던 권력을 손에 쥐기는 하였으나,
    그 왕권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몰랐던 철없는 왕은 그저 놀기만 하였고,
    역시 아무 생각이 없었던 그의 추종자들은,
    호가호위하며 매관매직과 부정 축재에 열을 올리게 되었는데,
    이렇게 한 몇 년 지속되자 동북아의 부국 고려는 안으로부터 골병이 들게 되었고, ​
    배부르고 등 따습던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옛 이야기가 되었다.
    부역 나간 남편의 배를 채우기 위해 머리칼을 팔아야 했던 여인네의 이야기가 생겨난 것도 이 시대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의종은 간관들과의 약속대로 격구 관람을 안 하는 대신, 주변에 모인 쓰레기들과 어울려 시를 지으며 놀자판을 이어갔는데,
    이렇게 되자 시 짓는 재주가 있을 리 없던 왕년의 스타플레이어 출신 무신들은 졸지에 실직 아닌 실직 상태가 되어,
    단순 호위병이나 잔치 심부름꾼의 역할을 해야 하는 한심한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이놈의 잔치가​ 하루가 멀다 하고 열렸을 뿐만 아니라, 경치 좋은 곳들을 찾아다니며 놀았기 때문에 이동 거리가 만만치 않아,
    호위를 담당하는 무신들은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고 하니, 욕 나왔을 것이다.
    당시 내시와 환관들의 권력은 아주 강력하여 왕명이 고자에게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들은 특별한 능력이나 업적 없이 그저 아첨으로 부와 권력을 손에 넣은 저렴한 인격의
    소유자들이었으므로 겸손이라는 것을 몰랐고 그 권력의 행사도 치졸하여,
    왕의 권력기반의 한 축을 이루는 무신들을​ 공공연히 무시하는 짓을 다반사로 하였다.
    의종도 문, 무신간의 갈등이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던 듯하나​, 늘 그렇듯이 별 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았고,
    무신들의 분노는 임계점을 향해 끓어오르고 있었다.

    1170년 가을 악동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놀다가 마지막 놀이터를 보현원으로 잡은 의종은, 
    그동안 시 짓기 놀이에서 소외되어,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끌려만 다니느라 열을 잔뜩 받은 무신들이 신경 쓰였는지​,
    출발하기 직전 갑자기 일종의 무술 경연 대회인 수박희를 열어 무인들을 위로하고 새로운 인재도
    발굴하고자 하였다.
    일종의 보상이었으므로 모두가 즐거워 했 …는지는 알 수없으나, 
    오랜만의 무신들만을 위한 잔치라 계급장 떼고 모두 참가하였는지,
    대장군 이소응도 출전하였는데, 
    이 반백이 넘은 장군 각하는 마음만 청춘이고 몸이 안 따라주어 그랬는지 아니면 대회의 흥을
    돋우기 위해 그리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
    새카만 후배인 젊은 군졸에게 쫓겨 도망가는 희극적인 상황을 연출하였다.
    매우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으므로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웃고 즐겼을 것이나,
    이 운명의 날, 
    주연을 맡게 되는 젊은 문신 한 뇌는 내기를 걸었다가 졌는지 아니면 무신들을 위한 잔치가 아니꼬와
    주사를 부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갑자기 아버지뻘인 대장군의 앞을 가로막고, 뺨을 때리며 욕지거리를 하였다.
    머리가 허연 대장군은 섬돌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렸고.
    대장군은 품계가 종 3품으로 정 3품 상장군의 바로 아래 자리이므로 요즘으로 치면
    별 서넛 단 군단장 쯤 되는 지위이고,
    평소에 임금과 허물없이 지내는 문신인 5품관 내시는 실세  청와대 비서관 정도라 할 수 있으므로,
    이는, 겁 대가리 없는 젊은 청와대 비서관 놈이 연세 지긋한 군단장의 따귀를 날린 것과 비슷한
    기막힌 상황이었다.
    이런 아연실색할 만한 장면을 보고도 개념 없는 의종은 한 뇌를 질책하기는커녕,
    주변의 문신들과 함께 박장대소를 하며 즐거워하였고.
    이 꼴을 본 무신들은 당연히 크게 분노하여 이의방, 이 고 등은 칼까지 뽑으려고 하였으나,
    상장군 정중부는 일단 자제를 시키고, 한 뇌의 멱살을 잡아 임금 앞에 패대기쳐 버렸다.
    정중부의 당시 나이가 60대 중반이었다고 하는데,
    한 뇌가 약골이었던 모양이다.​
    사태가 이쯤 되자 멍청한 왕도 심각성을 눈치 챘는지 정 중부를 좋은 말로 달랜 뒤 보현원으로
    출발했다고 한다.
    분위기가 이랬으면 나들이고 뭐고 일단 집구석으로 돌아갈 노릇이지, 평소에도 자주 가는 보현원에
    뭐 주어 먹을 게 있다고,
    아무튼 이것이 의종의 마지막 패착이었다.

    차별에 대한 불만으로 이미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던 정중부, 이의방, 이 고 등 무신들은
    낮에 있었던 싸대기 사건으로 더욱 확실한 명분을 얻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칼을 뽑아 보현원까지 수행했던 문신들의 목을 따버렸다.
    싸가지 없는 한 뇌는 이 고에 의해 왕 앞에서 목이 잘렸고,
    예전에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 무신들을 모욕했던 또 하나의 싸가지이자 당대의 실세였던,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은 살육의 현장인 보현원에서는 어찌어찌 탈출하였으나,
    반격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그냥 대책없이 개경 인근의 산에 동생과 함께 숨어 있다가
    하인 놈의 밀고로 발각되어 육신이 분리되었다.
    죽은 지 오래 된 김부식도 무덤에서 끌려나와 부관참시 되었고.
    의종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셨다고 하는데,
    칼 든 놈들 대부분이 손수 발탁하여 키운 금군들이고,
    그들의 수장 정중부는 2대에 걸쳐 왕의 총애를 받으며 무관 최고위직인 상장군까지 오른
    측근 중의 측근이었으므로,
    지금이야 성질나서 저 지랄이지만, 나중에 잘 달래주면 수그러들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했 …는지는 모르겠으나,
    뭐가 되었건 그의 무신경이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

    무신 정변은 무슨 거창한 이념보다는 처우에 대한 불만, 원한 등이 쌓인 금군들에 의해 촉발되었고,
    그들보다 더 못한 처지였던 다른 무신들과 일반 병사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 추진력을 얻은 일종의 군란이었으므로,
    그 주체들도 정권을 잡기 위해 체계적으로 움직이기 보다는 문신들에 대한 증오를 무차별적으로 
    표출하였다.
    반면 문신들의 대응은 김돈중의 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어이없을 정도로 찌질하였는데,
    정변이 워낙 전격적으로 발생하였고,
    다른 부대의 무신들 및 일반 병사들은 물론 김돈중의 하인처럼 하층민들까지 폭발적으로 호응하여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명분 싸움이 아닌 일방적인 살육을 당하는 바람에 속수무책이었다….라고 해석하기엔,
    그동안 고려를 지배해 왔던 그들의 명성이 너무 무색해진다.
    잘 이해가 되진 않지만 어쨌든,
    신화와 같던 문신 체제가 의외로 허약하다는 것을 알게 된 군란의 주체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과감하게 혁명으로 나아가,
    이래저래 거추장스러운 의종을 폐위하여 거제도에 안치시켰으며,
    문신들을 옥석을 가리지 않고 말살시켜 버렸다.

    우리 역사에서 예를 찾기 쉽지 않은 이러한 지배세력의 완전한 교체는 체제의 변혁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임금의 지위는 얼굴마담으로 고착되었고, 
    칼끝에서 정권이 창출되는 본격적인 중세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는데,
    자신들의 삶을 팍팍하게 만든 문신들의 몰락을 통쾌하게 바라보며 대리만족을 즐겼던 백성들은,
    적나라한 폭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중세의 야만성에 그대로 노출되어 구관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거제에 귀양 가 있던 의종은,
    무신들에게 항거하여 김보당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경주로 이동하여 재기를 꿈꾸었으나,
    이의민에게 패하여 그대로 연금 되었으며,
    제 2의 김보당의 난을 두려워한 혁명주체들에 의해 얼마 후 처형되는 신세가 되었다.
    마지막 술잔을 올린 이의민은 필살기인 등뼈 꺾기를 시전하여, 천민인 자신을 발탁하고 중용하였던
    옛 주군의 목숨을 거두었는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껄껄껄 웃었다고 한다.
    고려가 건국된 지 255년째인  1173년의 일이었고,
    고려 전기의 마침표가 찍힌 날이었다.

    향년 47세, 24년 6개월간의 재위였다.

    고려 : 17대 인종, 요승 묘청

    0

    왕 해, 이자겸의 둘째딸 순덕왕후의 장남으로,
    1122년 아버지 예종이 고려왕들의 평균 사망 나이인 45세에 서거하였을 때, 14살에 불과한
    어린아이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린 군주는 정정불안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절대왕권과 인연이 없던 고려는 그 위험도가 더 높았으므로, 태조는 훈요십조를 남겨 이를 경계한 바
    있었고, 
    그의 자손들도 그 취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는지, 고려 왕실에서 형제상속은 드문 일이 아니었는데,
    예종은 그냥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어버렸다.
    이는, 그동안 형의 눈치만 보았으나 그래도 설마 하던 동생들에게는 만행에 가까운 처사였으므로,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정정이 불안해지는 것은 거의 필연에 가까웠는데,
    특유의 카리스마로 나라를 이끌며 고려 황금기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꽃 피웠던 나름의 명군 예종은
    이러한 사태를 예측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인주 이씨를 외척세력으로 복원시켜놓은 바 있었다.​
    인주 이씨의 좌장 이자겸은 외손자가 어리다는 이유로 즉위에 어려움을 겪자, 
    외척 본연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명감…. 보다는 자신의 이익이 우선이었겠으나,
    독단으로 인종을 즉위시킨 후 권력 투쟁을 전개하여 여타의 불만 세력들 제거하였다.
    이로써 예종의 마지막 의도는 관철되었고, 자신은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으므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으나,
    영원한 고려의 대주주인 문벌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눈꼴시고 아니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자겸은 정란 공신급의 외척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구축할 수 있었으나, ​
    자신의 힘의 원천인 둘째딸이 이미 사망한 상태였으므로, 
    어린 왕이 어떻게 성장하고 누구에게 장가를 가느냐에 따라, ​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일종의 공백기 권력이라는 한계 또한 가지고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줌의 권력이라도 노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권력자들의 속성이고,
    이자겸처럼 이미 한 번 몰락을 경험했던 자들은 그러한 경향이 심하였는데,
    이자겸이 골똘히 생각했는지까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외척질이 가장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남아 있는 셋째 딸과 넷째 딸도 왕비로 만들어 죽을 때까지 권력을 유지하고 하였다.
    현대에서도 인기 있는, 소위  정략결혼을 추진한 것이므로, 그 자체만으로는 새로울 것 없는
    상투적인 권력 강화 수법이었겠으나,
    이 경우는 인종의 모후가 이자겸의 둘째딸이었으므로, 
    친 이모들이 조카와 결혼하는 것이 되어, 촌수 계산만으로도 머리가 상당히 복잡해지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자겸으로서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적들의 의표를 찌르는 회심의 한 수라고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개 족보에 가까운 당시 왕실 결혼관습으로도 해괴한 일에 속하였으므로,
    이자겸을 제외한, 일반적 소양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희대의 괴사가 되었을 것이다.
    뭐가 되었건 ​이 자겸은 자신이 가진 실력을 총동원하여,
    문벌귀족들의 공격과 결혼 당사자들의 민망함을 누르고 이를 관철시키고야 말았는데,
    조정의 권신들에게야 그냥 정치싸움이었겠지만, 막상 결혼을 해야 했던 당사자들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어찌 되었건 이로써 이 자겸의 권력은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가 되었고,
    더불어 인주 이씨의 세도정치도 본격적인 막을 올리게 되어,
    이자겸의 일곱 아들들은 정계와 종교계를 막론하고 요직을 차지하여 국정을 농단하였고,
    그와 조그마한 연줄이라도 있는 자들도 모두 한 자리씩 차지하여 떵떵거리게 되었으며,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일상이 되었음은 물론 왕실의 권위가 공공연히 무시되는,
    세도정치의 전형적인 부작용이 나타게 되었다.

    ​이 꼴을 본 18세 질풍노도의 소년왕은 크게 분노하였고,
    이 자겸에게 소외된 다른 귀족들과 연합하여 성급하게도 친위 쿠데타를 꿈꾸었으나,
    여진 정벌의 히어로 척준경까지 포섭하고 있던 노회한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의 상대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친왕파는 선제공격에도 불구하고 척준경의 무력에 무너져버렸고,
    궁궐은 불타올랐다.
    잘 곳마저 없어진 왕은 사춘기 소년답게 금방 의기소침해졌는지,
    제 발로 외갓집으로 걸어가 맥없이 백기 투항하고 양위를 제안하였다고 한다.
    이 자겸의 완승이었다.

    인종의 양위제안을 받은 이 자겸은 왕이 될 꿈에 부풀게 되었고,
    18자 위왕설을 퍼뜨리는 등 왕이 되기 위해 움직였고, 결국 인종을 독살하려고까지 하였으나,
    이제는 서방님이 된 조카의 고난이 안쓰러운 이모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방해하여 아버지를 좌절시켰다고 하는데…..다 믿기는 어렵다.
    전쟁의 당사자인 적국의 왕도 죽이지 않고 통치에 이용하는 것이 정치의 상례인데,
    이미 양위 의사를 밝힌,
    가치 높은 볼모나 마찬가지인 인종을 죽여 무슨 이득이 있다고,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이자겸이
    그런 짓을 하려고 하였을까?
    선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
    진실이야 알 길이 없으나,
    이자겸의 왕 되기 작전은 곳곳에서 암초를 만나 삐걱거렸던 모양인데,
    설상가상으로 무력 담당 척준경과 사이가 벌어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하인 놈들끼리 싸우는 도중,
    이자겸의 하인들이 주둥아리를 잘못 놀려 척준경을 분노케 한 것이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데,
    뭔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된 것도 아니고,
    왕좌를 노리는 사람이 그만한 일로 거사를 일으키기도 전에,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전력을 날렸을까?
    자세한 속사정이야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건 시련을 겪어 한층 성숙해진 소년은 적 분열이라는 호기를 놓치지 않고,
    척준경을 포섭하는 만만찮은 정치력을 발휘하였다고 한다.
    말을 바꾸어 탄 척준경은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던 이자겸을 선제공격하여, 
    전의를 상실한 적들을 제압하고, 이자겸을 잡아 왕 앞에 무릎을 꿀리는 명성에 걸 맞는 위용을
    보여주었다.
    여포를 빼앗긴 동탁 꼴이 난 이자겸은 자신의 반역 의지를 극구 부인하고, 드높은 충성심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고 하는데,
    그 말이 먹혔는지 아니면 인종이 묘호대로 어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나, 예상과 달리 극형을 면하고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자겸은 귀양살이 중 그 지방의 말린 조기를 인종에게 진상하면서,
    비굴하지 않겠다는 뜻의 굴비를 적어 올려 영광굴비의 어원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으나,
    뻥이라 한다.

    부녀의 천륜보다는, 조카와의 부부의 정을 따랐던 이모 둘은 비록 폐비가 되기는 하였으나,
    저택과 노비 등 위자료를 넉넉히 받는 호사를 누렸다고 하는데,
    이 부녀들을 배출했던 인주 이씨 가문은 별로 운이 좋지 못하여 그야말로 철저히 몰락하였으며,
    이후 역사에서도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런데 이자겸, 그가 과연 왕조교체를 꿈꾸었을까?

    ​한편 이자겸 타도의 최고 수훈갑 척준경은 공신각에 초상이 올라가는 광영과 함께 세도가가 되었으나, 그 기간은 짧았고, 서경파 정지상의 탄핵을 받아 고향으로 유배되었다.

    ​*척 준경.
    경이적인 무예로 국가를 위해 많은 공을 세웠으나,
    무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남의 칼의 되어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끝내 버려지고만
    비운의 무장이었다.
    그를 보며 그의 후배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이 자겸을 때려잡고 비로소 제대로 된 왕 대접을 받게 된  18세의 인종, ​기뻤을까?
    아직 어린 나이었으니 철모르고 좋아했을 수도 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호랑이가 사라진 산에는 늑대가 출몰한다는 냉엄한 현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자겸의 난은 정권상층부에서 지네들끼리 지지고 볶은 일이었으므로,
    당시의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저  `카더라` 수준의 저녁 술 안주감에 불과하였을 것이나,
    정치적으로는,
    외척과 문벌 간의 한판 대결에서, 태생적으로 왕권의 대척점에 있을 수밖에 없는 문벌 귀족들이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심각한 의미가 있었다.
    이는 왕의 처지가 더 악화되었다는 뜻도 되므로,
    한참 예민한 시기의 소년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무척이나 그리웠을 것이다.

    묘청은 이자겸의 난이 끝나고, 
    소년 왕이 폐허 위에서 망연자실하며 서있던 시기에 출현하였는데,
    이 출신이 모호한 인물은 조정의 비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정지상 등에게 접근하여,
    개경의 지덕이 쇠하였으니 서경으로 천도해야 한다는 요설을 늘어놓았다.
    음양비술에도 조예가 있었다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 중의 하나였던 정지상이,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에 속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천도는 기존의 정치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수단이므로 이전에도 툭하면 추진된
    바가 있었고,
    당시에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손해 볼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지상은 이 달변의 인물을 왕에게 소개하는 우를 범하고야 말았다.
    정지상 등의 비주류는 옮기기만 하면 천하가 저절로 앙복할 것이라는 등의 헛소리에 대한 믿음보다는 현실적인 정치공학적 의도가 강하였겠지만,
    이자겸의 난 한복판에서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며 한 목숨 지키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했고,
    결국 믿을 놈 하나 없이 홀로 남겨졌다는 자괴감에 시달려야 했던 소년 왕에게,
    뭔가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언변 좋은 도인은 메시아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아직 인생이나 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나이의 외로운 소년은,
    묘청을 자신의 처지를 긍휼히 여긴 열성조께서 보내주신 인물로 확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묘청을 왕사로 삼고 그가 하자는 대로 하였으므로, ​
    서경파는 조정에서 상당한 힘을 갖게 되었다.

    묘청은 이적을 조작하는 등의 치졸한 수법으로 아직 어린 왕을 홀리며 서경천도를 추진하였고,
    서경에 궁을 건설하고 성을 쌓게 하는 등 중요한 정치적 승리를 몇 차례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경 천도를 추진할 때마다 문제가 되었던 과중한 부역으로 인한 백성들의 불만과
    기존 개경세력들의 반발이 발목을 잡았다.
    대 역사를 시행하다 보면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발생되는 각종 사건 사고는 ​묘청을 궁지에 몰아넣었고, 모면을 위해 남발하는 요설들은 반복될수록 약발이 떨어져 갔다.
    적들에게는 조소의 대상이 되고 우군마저 의심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으로 몰린 묘청은,
    특단이 대책으로, 임금을 서경으로 모셔 황제국을 선포하고 천도를 기정사실화하려고 한 듯하나,
    이 또한 개경세력들의 저지로 무산되었다.
    이쯤 되면 ​천도는 물 건너간 것이고 실각 또한 피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일반적인 도인이라면 심산유곡으로 물러나 심신을 닦는 것이 정상이었을 것이나,
    이 기이한 인물은 포기하기는커녕 후세의 단재 선생을 감복시킬 ​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추종자들을 모아 서경을 국도로 하는 황제국을 선포한 것이다.​

    ​국호는 대위, 연호는 천개, 국시는 금나라 정벌. 군대는 강아지 이름 비슷한 천견충의군.
    즉 위나라를 만든 것인데,
    군대 명칭의 뉘앙스나 황제의 자리를 비워둔 것 등으로 보아 인종을 황제로 받들기 위한
    일종의 친위 쿠데타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찌 되었건 반란을 일으킨 묘청은 순식간에 자비령 이북을 장악하였고,개경을 급습하여
    왕을 확보하려고 하였으나,
    대부분의 허를 추구하는 인간들이 그러하듯이 실제적인 능력은 별로 없었는지, 
    시행을 하지는 못하였다.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알려진 개경은 발칵 뒤집혔고,
    개경 문벌세력은 이번 기회에 반대파를 박멸하고자 하였으므로, 
    어느덧 다 자라 20대 후반이 된 젊은 왕은 다시 볼모신세가 되었다.
    대군을 이끌게 된 김부식은 개경에 남아있던 정지상을 비롯한 서경파들을 도륙한 후 
    서경으로 진군을 시작하였는데,
    위나라의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할 추종세력들은,
    의리도 없이 싸워보지도 않고 바로 항복을 하여 묘청의 영향력이 별 볼일 없음을 증명하였다.
    당황한 반란군은 내분이 발생하였고, 
    어이없게도 묘청의 목을 잘라 협상을 시도하였는데,
    김부식은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는지, ​묘청의 목을 가지고 온 사자를 투옥해 버렸다.
    이 꼴을 본 새로운 반란군 지도자 ​ 조 광은 성급하게 묘청을 죽인 것을 후회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기왕 죽을 몸 여한 없이 싸워나 보자며 대동강 가에 성을 쌓고 저항하였다.
    고려의 제 2수도이자 서북방 방어의 요충 서경은,
    명성 그대로 누가 보아도 상대가 안 되는 김부식의 대군을 맞아 1년여를 버티어 냈으나, 
    식량까지 만들어주지는 못하였으므로, 
    화살에 맞아 죽는 군사보다 굶어 죽는 군사가 더 많아졌고 결국 함락되었다. 
    조 광을 비롯한 반란군 지휘부는 모두 자결하였다.​
    김부식이나 조 광이나 군사적 능력이 별 볼일 없기는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묘청의 난의 개략적인 전모를 보면,
    시작과 진행과정 그리고 결말에 이르기까지 찌질하기 이를 데 없어, 
    도대체 어느 부분이 신채호 선생을 매혹시켰는지 알 수가 없는데,
    오히려 이 사건 이후 서경의 지위 격하와 함께 조정에서 서경세력이 씨가 말라버렸고, 
    사원세력도 정치에 노골적으로 관여하기 힘들어짐에 따라,
    영원한 여당, 문벌 귀족들에게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이 모두 소멸되고 마는 지랄맞은 상황이 되었으므로,
    골수 보수화 된 고려 조정에 이상주의자들이 발붙이기는, 고목나무에 꽃 피기를 바라는 꼴이 되었고,
    왕의 지위가 조정자에서 얼굴 마담으로 격하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진취적이며 자주적인 기상은 점차 사라지고, 현실안주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유학자들이
    기승을 부리게 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조선까지 이어지게 되었으므로,
    국권 상실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단재 선생의 입장에서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묘청의 난을 조선 일천래 제일 대사건이라고 높이 평가한 모양이나,
    묘청 그 자체는 아무리 봐도 그냥 요승이었다 .​

    ​어찌 되었건 나라는 안정을 찾게 되었고,
    인종은 다시 권신들의 틈바구니에서 눈치나 보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는데,
    그래도 체념하지 않고 예종의 아들답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 듯하나,
    친위세력의 씨가 마른 마당에, 
    전통적으로 야당 역할을 해왔던 서경세력 마저 사라진 조정에서,
    이자겸에게 양위했던 전력이나 묘청을 끝까지 편들었던 ​실책 등을 가지고 있는 젊은 왕이,
    기세등등한 문신 귀족들을 제어한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그나마 이 시기 정국을 주도했던 김부식이 오리지날 개경세력이 아니라,
    옛 신라계열 출신이라는 작은 틈바구니가 인종이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을까 ?

    ​김부식도 잘나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부침을 겪었는데,
    정치보복이 두려워 퇴직을 신청하자, 
    그마저 없으면 너무 외로워지는 인종은 그에게 우리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고,
    정치가나 군사전략가의 재능 보다는 학자로서의 능력이 뛰어났던 김부식은,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 유산인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인종의 유일한 치적을 만들어 주었다.​

    ​ 변변한 치적도 없이 한 평생 시달리기만 했던 인종은 38살이 되는 1146 년에 사망하였다.

    고려 : 윤관, 여진 정벌

    0

    윤 관은 과거에 급제하여 지공거까지 지낸 문신이었다.
    개국공신 윤신달의 후손으로 외가가 신라 왕가와 핏줄이 이어지는 귀족이었으나,
    상위 0.1% 문벌 수준은 아니었는지, 
    가문의 후광보다는 자신의 능력에 의존하는 삶을 살았고,
    이 전쟁 덕분에 후세에 장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윤 관이 활약한 시대는 동북아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때였는데, 그 바람의 진앙지는
    여진의 완안부였다.
    거란과 고려의 틈바구니에 끼어 이리 저리 채이며 안습의 삶을 살던 발해의 후예 여진족은,
    현종이 거란의 3차 침입을 막아낸 후 동북아의 정세가 차차 안정을 찾아가자, 
    알아서 고려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고,
    문종이 고려 최고의 황금기를 이룩하자 고려의 일부를 자처하며 군현제에 편입시켜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숙종기에 이르러,
    완안부에 뛰어난 지도자들이 잇달아 나타나며 국가의 틀을 잡아가기 시작하자,
    태도를 바꾸어 거란과 고려의 변경을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영원히 아래 자리에 있고 싶은 족속은 없으므로, 이러한 여진을 크게 탓할 바는 못 되나,
    이를 두고 볼 수만은 또한 없는지라, 
    거란과 고려의 조정은 여러 차례 소탕 작전을 펼치게 되었는데,
    한 번 불붙기 시작한 여진의 기세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아서,
    결국 동북아는 다시 힘과 힘이 맞붙는 격동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일종의 쿠데타로 집권했던 숙종은 자신의 존재 의미도 과시할 겸, 작심하고 두 번의 소탕 작전을 실행하였는데,
    결과는 대패였다.
    이래서야 체면도 체면이지만,
    패전과 정통성 부족이 엮이면 군왕으로서의 기반이 뒤흔들릴 수도 있으므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였는데,
    2군 6위 체제인 당시 고려군의 능력은 그간의 전적으로 보아 믿음이 가질 않았고,
    심복 윤 관은 기병 때문에 망했다고 주장하므로,
    숙종은 돈 많은 나라의 왕답게 거창한 군사조직 별무반을 탄생시켰다.

    별무반은 여진 정벌을 위한 거국적 조직으로,
    당시 고려에 살고 있던  20 세 이상의 모든 남자는 귀족, 평민, 중, 노비, 할 것 없이 모두 별무반에
    징집되었다.
    그 수가 30만에 달하였으며 그 중 말을 소유하고 있거나 다룰 줄 아는 자는 신기군으로 편제되었고,
    중들은 항마군이 되어야 했다.
    돈이 많이 드는 기병을 대폭 보강하고, 왕실의 최후 친위 예비세력인 승병까지 동원한 것으로 보아,
    전 재산을 들여 일생일대의 대사업을 꿈꾸었던 듯하나, 안타깝게도 실행 직전에 객사하고 말아, 
    바톤은 아들 예종에게로 이어지게 되었다.

    예종은 이들 중 일부를 추려 2군 6위의 정규군과 함께 1년간 군사훈련을 시킨 후 여진을 쳤는데,
    이때 동원한 인원은 17만 여명으로, 
    그동안 고려가 동원했던 3대왕 정종의 30만, 강조의 30만, 강감찬의 20만 등과 비교할 때 그다지
    많은 인원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훈련된 공격군이었고, 비록 수는 적었으나 해군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최선을 다해 준비한 전력임에는 틀림없었다.
    17만 대군을 이끌 원수는 대를 이어 확실한 충성심을 인정받은 윤 관, 부원수는 오연총이었으며, 
    당대의 용사 척준경이 종군하였고, 예종은 전선에서 가까운 서경에 머물며 공격군을 독려하였다.
    서경은 옛 고구려의 수도이자 고토회복의 의지가 담긴 고려의 제 2수도였으므로 그 상징하는 의미
    또한 심장하였다.

    ​1107년 여진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첩보를 입수한 윤 관은 겨울이 시작되는 음력 10월, 
    대망의 고토회복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었는데,
    정공법으로 바로 치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여진의 추장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푼 후 참살하는 기만책을 사용하였다.
    민족의 위인이 사용한 방법치곤 좀 치사하긴 하지만,
    숙종 부자의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인 대군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책임감이 지대하여 그리하였을 수도 있고,
    무인의 자부심 보다는 책략을 우선시 할 수밖에 없는 문사 출신이라 그랬을 수도 있다.
    윤 관이야 말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랬다 치고,
    속아 넘어간 여진의 경솔함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기는 매한가지인데,
    얘네들 속사정도 자세히야 알 수 없겠지만,
    ​아마도 음력 10월이면 함경도지방은 완전히 겨울이라,
    눈 덮인 산지에서는 보병이고 기병이고를 떠나 군대 자체를 움직이기 힘들므로,
    하던 전쟁도 멈추는 시기였고, 
    이전에 포로가 되었던 추장도 석방한다고 하니, 고려의 화친 제의를 지들 편한 대로 생각한 듯하다.
    뭐를 어떻게 생각했든,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추장들이 윤 관의 초대에 응하여 저마다 나름의 단꿈에 젖어 흥겨운 술잔을 기울였는데,
    이 잔치는 홍문지연이었고,
    이들은 유방과 달리 번쾌가 없어 피하지 못하여, 약 400여명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기만책을 성공시킨 고려군은 즉각 다섯 갈래로 나뉘어 파상적인 공격을 펼쳤는데,
    수뇌부가 몰살되다시피 한 여진은 조직적인 대응은 생각하지도 못하였고,​
    오만여의 주력군을 이끈 윤 관이 보동음성까지 쭉쭉 밀고 올라가자, 
    성을 의지하여 발악적인 저항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목숨을 도외시한 이들의 저항은 처절하였으나 결국 척준경의 무력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고,
    다른 방향의 공격군 또한 순조롭게 여진 부락들을 점령해 나갔다.
    이렇게 100여 촌락을 접수한 윤 관은 몽골라령 아래에 영주성을 쌓았으며, 화관령 아래엔 웅주성을, 
    오금림촌에 복주성을, 궁한이촌엔 길주성을 쌓았다.
    우리 입장에서는 수백 년 만에 고토를 회복한, 후세의 사가들이 감격에 몸을 떨 만한 사건이었지만,
    조상대대로 그곳에 살던 여진에게는,
    고려군이 유목민 전사들과 같은 약탈군이나, 징벌을 위한 일회성의 군대가 아니라,
    통치를 위한 점령군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으므로,
    사기를 당해 부모 죽고 사는 집까지 빼앗긴 꼴이 된 여진 전사들은 이가 갈리고 피가 거꾸로 솟구쳤을 것이다.
    맞아 죽으나 굶어 죽으나의 상황이 된 여진 전사들의 투쟁은 당연히 가열차게 전개되었고,
    고려군은 곳곳에서 고전하게 되었다.
    총사령관 윤 관도 가한촌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고립되었는데,
    당시 윤 관이 거느리고 있던 8000 여의 군사는 거의 죽거나 흩어져서 10여명만 남은 상태였고, 
    동행했던 부원수 오연총마저 화살에 맞아 사경을 해매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항복을 고려하는 것이 일반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나, 
    윤 관은 민족의 위인답게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고 끝까지 항전했…. 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전쟁 초기에 자신이 한 짓도 있고,
    앞으로 고려에서 살아가야 할 자손들도 생각해야 하므로, 항복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문사 출신이었으니 유언장의 문구 따위를 고민하지나 않았을까?
    아무튼 절체절명의 상황임에는 틀림이 없었는데,
    다행히 멀지 않은 곳이 있던 척준경이, 의리의 사나이답게 소수의 결사대를 이끌고 생사를 도외시한 채 구원의 손길을 뻗어 왔다.  
    이 희대의 무인은 구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 여진군이 스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하는데,
    참으로 믿기 힘든 무용이나 어쨌든 이 덕분에 윤 관은 구사일생할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척준경은 합문지후에 봉해지고, 윤 관과 부자의 연을 맺었으며,
    이후에도 많은 공을 세웠는데, 그의 능력은 석년의 유금필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윤 관의 여진 정벌은 중도에서 좌절되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윤관은,
    여진의 이를 악문 저항에도 불구하고, 침입 이후 석 달 만에 6성을 완공할 수 있었고, 
    3월에는 3개성을 더 추가하여 그 유명한 동북 9성을 완성하였다.
    9성 각각의 이름은 함주, 영주, 길주, 복주, 우주, 공험진, 의주, 통태, 평주 등인데,
    각각의 정확한 현재 위치는 논란이 많으나,
    뭐가 되었건 함경도 지방의 유일한 곡창, 함흥평야 일대는 확실히 포함하고 있었던 듯하다.
    두만강 위쪽으로 700리라는 설도 있으나, 인적도 드문 황무지에 성까지 쌓았을 것 같지는 않다.
    말뚝을 박았을 수는 있다.

    아무튼 우리 역사상 드물게 이민족을 정벌하여 영토를 확장한 경사 중의 경사였으므로,
    임금은 윤 관을 불러 포상하고 잔치를 열어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 젊은 나이에,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이는 발해멸망 이후 한반도 동북지방에서 근근히 살아가던 여진족에게는 마지막 밥줄이
    끊겼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므로,
    다른 건 다 참아도 배고픈 건 못 참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의 특성 상, 
    여진족은 강력한 생존권 투쟁을 전개하였다.
    고려군 또한 수백년 만에 되찾은 고토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지만,
    아무래도 절박함에서 차이가 있었을 것이고,
    그나마 의지가 되는 성 또한  위치가 별로여서 수비군이 고립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결국 구원하기도 지키기도 곤란한 나날이 이어지게 되었고, 
    그 소모되는 물자와 인명을 감당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2차 침입 때의 거란 꼴이 난 고려는 예정했던 식민 사업은 손도 댈 수 없는 상황이었고,
    여진의 또 다른 종주권자이자 아직까지는 동북아 최강자인 거란의 동향도 신경이 쓰이는데다가,
    함경도의 지세가 보통 험한 것이 아니어서,
    물자와 인력을 보내는 일 자체가 만만치 않았고 기간도 한정이 없으니, 걱정이 쌓여갈 수밖에 없었는데,
    여진족은 공격만 한 것이 아니라, 
    군을 물리기만 하면 이후로는 고려를 침입하지 않는 것은 물론 대대손손 부모의 나라로 섬기겠다고
    애원하는 등의 능란한 외교술을 사용하여, 가뜩이나 정신 사나운 고려에 갈등의 불을 질러 버렸다.

    자고로 생기는 것도 없이 사람만 죽어 나가는 전쟁 좋아하는 백성 없고, 자기 재산 축나는 것을 즐기는 귀족은 없는 법이니,
    철군의 여론이 힘을 받게 되어 젊은 왕은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었는데, 
    7월 오연총이 영주성에서 대패했다는, 울고 싶은데 뺨 때리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결정적인 한 방에 예종은 무너졌고, 철군을 명하였다.
    9개월 여 동안 총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빈손만 남은 격이니,
    후손인 우리의 입장에서도 일장춘몽의 허무감을 지울 수 없는데,
    혈기 방장했을 젊은 왕은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까?
    그러나 상대였던 여진은 상황이 달랐다.
    분열의 대명사였던 여진은 아골타의 완안부를 중심으로 통일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거란을 대치하는 동북아의 패자로 급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믿기 힘든 성장의 배경으로, 고려가 헌납한 꼴이 된 동북 9성이 거론되고는 있으나,
    국가의 성장과 발전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고 뭉쳐진 힘이므로, 다른 요인들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전쟁 초기, 사기를 당하여 수뇌부가 몰살된 것이 그들의 고질적인 분열을 치유하는데 도움이 되진
    않았을까?

    뭐가 되었건, 그들이 이룬 성과와 그들에게서 받은 모욕을 생각하면 당시의 철군 결정이 아쉽기도 하고, 정주 민족의 한계를 느끼게도 하지만,
    공연히 미적대다가 진창에 빠져 국력을 있는 대로 다 소모하고 되치기를 당하는 것보다는,
    일찌감치 포기하여 명목상이나마 명분을 챙기고,
    남은 전력을 보존하여, 여전한 동북아의 강국으로 대접받을 수 있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의미 없는 인명의 소모도 막았고, 왕권도 지켰고.

    좋다 만 전쟁이었으나 이 정벌 덕분에,
    금은, 거란과 달리 대제국이 된 이후에도 고려를 대규모로 침입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고려 : 16대 예종, 여진을 정벌하다

    0

    왕 우
    부왕 숙종이 객사하여 1105년 2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할아버지 문종처럼 남자로서 최고의 나이라고 할 수 있는 20대 후반에 왕위에 오른 것인데,
    금상첨화로 그의 손엔 아버지의 비원이 담긴 30만 대군이 쥐어져 있었다.

    예종은 아버지가 남긴 군대를 조련하여 1107년 17만 여의 대군으로 여진 정벌을 실행하였는데,
    윤 관의 작전이 좋았는지 아니면 여진이 설마하며 방심을 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초전부터 여진 추장들의 목을 베며 승승장구하였고 점령지에 성까지 쌓아,
    서희의 담판으로 권리를 인정받은 압록강 이동의 영토를 실질적으로 확보하였다.

    윤 관이 점령한 지역은 여러 이론이 있으나 함흥평야 일대는 확실히 포함된 듯하다.
    그런데 함흥평야는 함경도지방의 유일한 곡창지대로서,
    발해멸망 후 한반도 동북 지역에서 근근이 살아가던 여진족에게는 목숨 줄이나 다름없는 지역이었기에, 정벌이 아닌 점령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용사 척준경의 활약이 없었다면 총사령관인 윤 관도 그 곳에 뼈를 묻을 뻔 할 정도로 여진족의
    저항은 극렬하였고,
    요충지라고 쌓은 성들도 그다지 방어하기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어서 수 없는 함락의 위기를
    넘겨야 했다 .
    비교적 쉽게 요새화할 수 있었던 강동 6주와는 상황이 달랐던 것이다.

    초반의 성과에 취해, 윤 관에게 포상을 하는 등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던 고려 조정은 늘어나는 병사들의 희생과 전비에 당황하였는데,
    여진은 화전 양면책을 적절히 구사하며,
    동북 9성의 유지가 실익도 없이 정권에 부담으로만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예종은 별 수 없이 대를 이어 충성을 다하겠다는 립서비스에 위안을 찾으며 윤 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수를 결정하였다.
    막대한 물자와 인명을 소모하고도 영토는 한 뼘도 늘리지 못하고, 명목상의 종주권만을 챙겼던
    거란 성종 꼴이 난 것이었는데,
    거란과 달리 절대왕권과 인연이 없었던 고려의 태생적 한계 상, 예종의 처지는 거란 성종보다 훨씬
    더 안 좋았다.
    자칫 왕의 책임론이라도 불거지면,
    아버지가 역사의 오욕을 감수하며 겨우 확보했던 알량한 왕권마저 날려먹을 수 있는 위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예종에게는 친위대적 성격이 강하고 전투를 체험한 강한 무력과 튼실한 재정이 남아 
    있었으므로,
    일단 윤 관을 희생양으로 하여 대신들의 입막음을 한 후, 정면 돌파를 선호했던 숙종의 아들답게
    고려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다.

    자고로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수단으로는 교육만한 게 없으므로 예종은 교육에 주목 하였다.
    당시 고려는 최 충의 9재를 비롯한 사설 교육기관의 난립으로 공교육이 초토화 되어 국자감 폐지론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교육이 일부 특권층에게 독점되어 계급의 공고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의미였으므로,
    문벌 귀족들에 대한 견제와 왕권의 강화라는 누대 고려왕들의 화두도 해결하고,
    자신이 처한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관행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었다.
    예종은 9재를 모방하여,
    국학에 일종의 강의반인 7재를 설치하며 공교육 살리기에 시동을 걸었는데,
    그중 강예재가 무학 및 병법에 대한 강의였다.
    일종의 사관학교였던 셈인데,
    강의의 속성상 귀족들 보다는 소외계층에서 지원할 여지가 많았으므로 친위세력화하기가
    상대적으로 쉽고,
    군대의 중간간부를 다수 확보하여 국가 군사력 강화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으므로,
    가히 양수 겹장의 탁월한 한 수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사관학교 졸업생들을 위해 무과도 신설하였는데,
    상대적으로 시험이 쉽고 뽑는 인원이 많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일련의 개혁들이 향하는 방향은 누가 보아도 뻔하였으므로,
    오랫동안 고려의 주인 노릇을 해왔던 문신 귀족들은 고비마다 격렬한 반발을 하였으나,
    예종은 특유의 카리스마와 무력을 바탕으로 흔들리지 않았고,
    내친 김에 장학 재단인 양현고를 만들어 가난한 수재들이 맘 편히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였으며,
    청연각과 보문각이라는 학술 연구기관을 만들어 국립대학인 국자감의 권위를 높였다.
    또한 여진 정벌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서민층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아,
    일종의 약국인 혜민국을 설치하여 백성들에게 약을 무료로 나누어 주었고, 전염병 퇴치에도 힘을
    기울였다.
    현대 아악의 근본인 북송의 대성악을 들여와 신민들의 정서를 어루만지기도 하였고.
    예종이 이러한 거창한 사업들을 거침없이 벌일 수 있었던 것을 보면, 현종 이후 축적된 고려의 재정이 얼마나 충실하였던 가를 알 수 있다.

    사회개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예종은 화려한 팔관회를 열어 신민들과 잔치를 즐겼는데,
    예술적 소양도 풍부했던 왕은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쳐 왕건을 섬겼던 김 락과 신숭겸을 위한 향가,
    도이장가를 지어 신하들에게 왕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켰다.

    고려가 돈을 물 쓰듯 쓰며 전쟁의 후유증을 치료하고 있는 동안,
    여진은 완안부의 아골타에 의해 통일이 되어 이라는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분열의 대명사 여진을 통일시키고 단기간에 새로운 북방의 패자로 성장시킨 아골타의 능력이
    놀랍긴 하지만,
    구원으로 보나, 지정학적 위치로보나 고려가  감탄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입장이었으므로,
    예종은 천리장성을 보강하는 등 수성에 만전을 기하였는데,
    금은 천리장성의 보강에 신경질을 부리고, 외교문서에 고려를 아우로 칭하는 등 건방을 떨기는
    하였으나,
    이미 한 번 혼쭐이 나기도 하였고, 거란과 싸우기에도 바빴으므로 온건책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질서에 의한 평화였던 셈인데,
    고려는 좀 자존심이 상하기는 해도 그냥 적응하면 그만이었으나,
    욱일승천하는 금의 기세에 기반이 뿌리 채 흔들리고 있던 거란은 입장이 달랐으므로 ,
    이제까지의 고압적 자세를 버리고, 
    고려에 홍화진 이북의 의주를 제공하며 금 정벌을 위한 지원을 애걸하였다.
    그러나 고려입장에서는 거란이나 금이나 거기서 거기였으므로, 의주만 받아먹고 지원은 거절하였다.
    일종의 등거리 외교였는데, 거란으로서는 분통터질 노릇이었겠으나,
    후손인 우리 입장에서는, 뭐가 어찌되었건 이 사건 이후 서북방 방어의 요충 의주가 영원히 우리 땅이 되었으므로,
    상당한 외교적 성과였다고 평가할 만하다.

    당시의 국제적 상황은 나라가 망해가던 거란이 가장 괴로웠을 것이나,
    송, 요, 금, 3강을 머리에 이고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던 고려도 그리 편한 입장만은
    아니었을 터인데,
    머리 좋은 집안의 자손 예종은 이 복잡한 3차방정식을 성공적으로 풀어내었는지,
    당시 고려의 국제적 위상은 역대 최상이었다.
    송에서는 고려 사신을 국신사로 승격시켜 서하보다 높은 대우를 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거란이 맛이 간 상태였으므로, 사실상 최고의 대우였다.
    송은 고려 사신의 시 건방도 참을 수밖에 없었으며, 재정에 부담을 줄 정도의 심한 무역역조도 감내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는 인생을 살던 예종은 긴장이 풀어졌는지 말년에는 향락에 빠졌고, 
    종기가 발생하였는데,
    외과 수술과 항생제가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회복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향년 45세, 1122년이었다.

    17년간 재위하며 특유의 카리스마로 고려의 황금기를 이어간 예종, 명군이었다.

    고려 : 15대 숙종, 별무반을 편성하다

    0

    계림공 왕 희.
    문종의 세째 아들로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과단성이 있어 아버지의 칭찬을 많이 받고 자랐다고 하는데, 다들 영특했던 형제들 사이에서 유달리 귀여움을 많이 받았던 것을 보면,
    남다른 무언가가 있었던 모양이나,
    그게 무엇이든 문종이 당시로는 상당한 나이인 64세까지 장수하였고,
    위로 형이 둘씩이나 있었기 때문에 다음 대 왕위는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팔자인지라,
    원래 병약했던 큰 형이 즉위한지  3개월 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작은 형이 뒤를 이었는데,
    그 다음 대를 이어 가야 할 태자가 제 큰아버지를 닮았는지 어릴 때부터 골골하는 바람에,
    갑자기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고 왕위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부자 상속보다는 형제 상속이 주를 이루어왔던 고려 왕실의 관행상,
    그의 야심은 전혀 무리한 것이 아니었고 조야의 인심 또한 그러하였으나,
    나라를 순리대로 이끌어 평온무사한 고려를 만들었던 작은 형이 46세로 사망하면서,
    뜻밖에도 소아 당뇨병을 앓고 있는 11살짜리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하였다.
    이는 나름 훌륭한 정치가였던 선종이 행한 마지막 정치 행위라기엔 믿어지지 않는,
    무책임한 행동이었는데,
    설마 했을 계림공이 분노에 치를 떨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결과는 결과고, 어짜피 오래 살 애도 아니었으므로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선종이 이러한 선택을 한 이면에는,
    자랄 때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밉살맞은 동생보다는 똑똑해서 더 안쓰러운 자식에게 마음이
    가는 평범한 아비의 심리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왕위 계승이라는 고도의 정치행위에서 정치를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아무래도 계림공의 등극으로 가장 많은 손해를 보게 되는 인주 이씨의 심모원려가 작용했을 것이다.
    숙종은 다른 제왕들과 다르게 평생 단 한 명의 아내와 해로하였는데,
    이 행운의 여인은 왕자 시절 맞이했던 유씨로 인주 이씨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그의 위치가 왕위와는 거리가 있어 인주 이씨의 사정권 밖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데,
    뭐가 되었건 계림공이 왕위에 오르면 기존 외척 세력의 축소는 뻔한 상황이었으므로,
    권력의 속성상 인주 이씨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이를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을 어찌했는지는 모르지만, 
    인주 이씨는 누가 보아도 불합리한 11살짜리 난치병 환자를 왕위에 올리고, 섭정자리까지 확보하는
    기염을 토하였는데,
    문제는 당시가 인슐린이 없는 시대였다는 것이다.
    당뇨병이 왕을 가릴 리가 없으므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아이의 건강은 자라면서 점점 악화되기만 할뿐 호전될 기미는 없었고,
    급기야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꼴이 된 인주 이씨 좌장 이자의는 또 한 번의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헌종보다 더 어리고 튼튼한, 자기 누이의 소생 한산후 왕윤을 다음 대 왕위에 올려 가문의 무궁한 영광을 이어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세상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은 피차일반인지라,
    이자의의 거사를 탐지한 계림공은 궁궐로 병사들을 보내어, 옥쇄가 탈취되기 직전에 이자의를 척살하고 국정을 장악하였다.

    짧았지만 격렬했던 정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계림공은 국정을 장악한 지 삼개월 만에 양위를 받아 1095년 왕위에 올랐는데,
    계림공 입장에서는 원래 자기 자리를 찾은 순리일 수도 있겠으나,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 조카의 자리를 빼앗은 것 또한 사실이므로, 
    유교적으로는 어쨌든 패륜이었다.
    다행히 당시는 지랄 맞은 주자학의 창시자 주희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유교의 지배력이 그다지 크지 않던 시절이었으며,
    왕을 제 집 청지기처럼 취급하던 발칙한 외척의 그간의 행태 또한 좋은 명분이 되어 주었으므로,
    대부분의 신료들은 양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정치적인 혼란도 없었다.
    하지만 자랑스러운 일 또한 아니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조카가 일찍 병사하여,
    조선 시대의 세조와는 달리, 따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42세라는 느지막한 나이에 왕위에 올라,
    왕실의 영원한 멘토, 대각국사 의천의 지원을 받으며 왕권을 강화하였고,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능력들을 발현시켰는데,
    혼인으로 얽힌 문신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유학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6촌 이하의 근친혼을
    금지하였고,
    아우 의천의 제안으로 주화도감을 설치하고 해동통보를 비롯한 각종 주전들을 유통시켰다.
    남경에 주목하여 현재 청와대 자리에 궁궐터를 조성하였으며,
    기자 전래설에 따라 서경에 기자사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런데 조카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 왕 노릇을 하는 형이 부러웠는지,
    동생인 부여후 왕수가 다음 차례는 자기라는 듯이 공공연히 세력을 모으자, 괘씸죄로 잡아들여
    귀양을 보냈고,
    왕수는 귀양지에서 얼마 안 가 사망하였다.
    이는 자기가 한 짓과는 관계없이,
    동생보다는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은 제왕의 심리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라고 하겠다.

    어찌 되었건 그간 안일하게 보일 정도로 무사태평했던 고려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셈이었는데, 이 바람은 여진에도 불었는지 동여진이 오랜만에 침략을 해왔다.
    거란의 그 거창했던 침략도 물리쳤었고, 그간 착실히 국력을 쌓아 강국이라는 명성을 누리고 있던
    고려라면,
    이깟 북방 오랑캐의 침략 정도는 가볍게 격퇴했어야 정상일 터인데,
    그 동안의 평화가 너무 길었음인지, 
    고려는 뜻밖에도 요새라는 정주에서 패하였고, 이어진 윤 관의 여진 정벌도 실패하고 말았다.
    예전의 찌질했던 여진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리되면 체면도 체면이지만,
    그동안 선대가 힘겹게 이룩했던 동북아의 기본 질서가 무너지게 될 것이 뻔하므로,
    나름의 능력자 숙종은 근본적인 대책을 생각하게 되었고,
    윤 관의 의견을 받아들여 기병중심의 신기군, 보병중심의 신보군, 승병 중심의 항마군 등 도합  30만으로 별무반을 편성하여 여진의 뿌리를 뽑게 하였다.
    여진의 팽창을 억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이기는 했으나, 전성기인 당시 고려의 국력으로도 30만은 과하였는지,
    백성들 열 집에 아홉 집은 비었다고 할 정도로 징용과 징병의 피해가 심각했다고 한다.
    당시 인구에 대한 자료가 없어 정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전통적으로 인구 밀도가 높은 한반도의 특성상,
    30만을 징집했다고 해서 나라 전체가 공동화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전비와 인력을 제공해야 했던 문벌 귀족들의 불만을 대변하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과장이든 아니든 국력을 총동원한 것은 맞을 것이고,
    세금 좋아하는 부자는 없으므로 저항이 따르는 것은 필연적인 수순이었는데,
    절대 왕권과 인연이 없던 고려에서,
    정통성에 흠집도 있는 숙종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고.
    결국 그는 말년에 반란을 만나게 되었는데, 
    일단 진압은 하였는지,
    자기 치세의 백미가 될 여진 정벌을 위하여 서경에 있는 동명왕 묘를 참배하였다.
    하필 동명왕인 것으로 보아 이참에 고토의 회복까지 노리겠다는 당찬 포부를 대내외에 천명한 것으로 보이는데,
    모사는 재인이요 성사는 재천이라더니, 
    안타깝게도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병이 들어 수레 위에서 죽고 말았다. 1105년 향년 52세였다.

    10년 남짓한 재위의 마지막이 객사라는 것이 아무래도 석연치는 않은데,
    그의 죽음을 바라는 사람들이 내외에 깔려있는 상황이었으므로, 독살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도 든다.
    조카의 자리를 찬탈했다는 원죄로 인해 후대의 유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고
    조선의 세조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손을 써서 조카의 생목숨을 끊은 것도 아니었고,
    만일 이자의의 의도대로 되었더라면, 인주 이씨의 세도가 더 일찍 시작되어,
    유명무실한 왕권과 세도가의 사리사욕을 위해 존재하는 조정이라는 고려 후기의 한심한 상황이 일찌감치 펼쳐질 수도 있었다.
    또한 헌종은 단종과 달리 건강상 애초에 왕이 되어서는 안 될 아이였고,
    그대로 놔두었어도 어차피 얼마 더 살지 못할 운명이었으므로,
    숙종을 인면수심의 권력의 화신처럼 취급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하겠다.

    과단성 있는 성격의 소유자답게, 
    이자의를 제거하여 인주 이씨의 세도를 막고, 바로 왕위에 올라 정정 불안을 잠재웠으며,
    정체기에 접어들려던 고려에 새바람을 불어 넣어,
    그동안 구두선으로만 존재하던 고토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숙종,
    명군이었다.

    고려 : 14대 헌종, 소아 당뇨병

    0

    왕 욱
    어려서부터 영특했다던 그는 안타깝게도 소아 당뇨병 환자였다.

    *소아 당뇨병,

    말 그대로 어린 나이에 발병하는 당뇨병인데,
    당뇨병은 일종의 호르몬인 인슐린의 생산 또는 작용에 문제가 생겨 혈당이 조절되지 못하는 질환으로, 생산이 문제인 제 1형과 인슐린에 대한 세포의 반응에 문제가 생기는 제 2형으로 나뉜다.
    제 1형은 인슐린의 생산이 안 되는 것이므로,
    인슐린만 적절히 투입해주면 사는데 지장이 없어 인슐린 의존성 당뇨병이라고도 하는데,
    소아 당뇨병의 대부분은 인슐린 의존성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헌종은 제 1형 당뇨병 환자였을 가능이 높은데,
    유일한 치료제인 인슐린이 나타나기까지는 아직도 천년에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다는 것이 비극이었다.
    병의 기전조차 알 도리가 없던 당시 의학 수준으로는 제 아무리 명의라 하더라도,
    풀뿌리나 달여 먹이고, 
    가끔 침으로 온몸을 벌집으로 만드는 치료인지 고문인지 모르는 짓을 아픈 애에게 자행하였을 것이고, 도사라도 만나면, 수은을 먹여 중금속 중독을 추가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뭔 짓을 했건 당뇨 합병증은 빈천을 구별하지 않으므로,
    헌종은 병약한 유, 소년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11살이 되던 1094년, 나라를 무사태평하게 이끌어 오던 아버지가 서거하였다.

    제 한 몸 추스르기도 힘겨운 어린 소년이 고려의 지존위에 올라 동북아 균형자가 되었는데,
    나이로 보나 몸 상태로 보나 정상적인 왕 노릇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어머니 사숙태후가
    섭정을 하였고,
    인주(경원) 이씨 사숙태후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권력욕 때문이었는 지는 모르겠으나,
    섭정의 직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국정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당시 인주 이씨 좌장 이자의와 마찰을 빚었는지,
    아니면 이자의가 헌종의 숙부인 계림공 왕 희를 견제하기 위해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자의는 병약한 헌종을 대신하여 자신이 누이동생이기도 한 선종의 3비 원신궁주의 소생 한산후
    왕윤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로지 외척 인주 이씨 가문의 안전과 세력의 공고화만을 위한 계획이었으므로,
    이전부터 야심충만했던 계림공의 입장에서 보면, 
    왕이 될 기회가 물 건너가게 됨을 의미함과 동시에,
    지고무상한 옥좌의 주인이 외척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주객이 전도된 고려의 기막힌 현실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므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두 세력 간의 충돌은 필연이 되었는데,
    왕실과 외척세력을 각각 대표하는 두 거인의 싸움은 조정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이 난장판에서 정치 초년생인 섭정 태후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저 병약한 아들을 둔 불쌍한 과부에 불과한 신세가 되고만 사숙태후는
    이자의가 자객의 손에 살해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두 손을 들어 버렸다.

    무사태평한 세월을 보냈던 선종은 설마 이러한 상황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나,
    무심한 역사의 수레바퀴는 자기의 관성대로 굴러 계림공의 손을 들어주었고,
    고려의 조야는 모두 승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립무원이 된 12살짜리 소아 당뇨 환자에게 남아있는 선택지는,
    양위가 유일하였고.
    1095년 왕위에서 물러나 2년 여를 더 살다 14살에 병사하였다. 재위는 1년.

    왕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되는 아이였는데,
    어른들 욕심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마음고생만 하다가 명을 단축한듯하여 안쓰럽다.
    그 동안 부자상속보다는 형제상속이 더 잦았던 고려에서,
    나름 명군 소리를 듣던 선종이 왜 이러한 무리수를 두었던 것일까?

    고려 : 13대 선종, 평온무사

    0

    왕 운
    30년 가까이 태자로만 재직하던 형이 즉위한지 3개월 여만에 사망하여 얼떨결에 왕위에 올랐다.
    1083년 35세였다.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 큰 다툼이 없는 평화로운 시절이었고, 공연히 사람을 몰아세우는 형이상학도 미미한 상황이라,
    다들 생업에 몰두하였고 국제 교역 또한 활성화되었는데,
    고려는 거란, 송, 여진 등 전통적인 교역국 외에도 일본까지 포함하는 더 넓어진 시장을 주도하였다.
    동 시대를 살다간 송의 대표적인 시인 소동파는 5가지 손해를 들어 고려와의 교역을 반대하였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고려가 친송 일변도의 외교를 한 것이 아니라, 거란과 등거리 외교를 하며 실리를 챙기는 바람에,
    송의 재정에 지장을 줄 정도로 무역 역조가 심하여, 불만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거란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했던 송은, 거란 배후의 강국 고려의 역할이 절실하였기에,
    불리한 관행을 끝내 바꾸지 못하였고,
    거란 또한 영토적 야심을 포기하고,
    압록강에 시장을 설치하여 교역의 주도권이나마 쥐려고 하였으나, 고려의 반대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배상금까지 물어야 했다.
    당시에 고려를 방문한 송이나 거란의 사신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대국의 사신으로서의 위엄이나 허세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과분한 대접 또한 없었으며, 
    실수하면 망신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고려가 탄탄한 국력을 기반으로, 송과 거란의 전통적인 갈등관계를 이용하였으며,
    동북아의 균형자로서 확실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삼대를 이어가며 줄줄이 명군이 출현한 고려에서 특별한 문제라고는 기상 이변 정도였으므로,
    문물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노릇이었을 터인데,
    이 평온의 시대에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한 사람은 대각국사 의천이었다.
    의천은 문종의 네째 아들로서 11살에 승려가 되기로 자원하여,
    불심이 돈독했고 그 불심을 왕권강화에도 이용했던 차원 높은 책략가, 아버지를 기쁘게 하였는데,
    그의 은사는 김은부의 아들인 외삼촌 경덕국사 난원이었다.
    승속 양쪽 모두의 로얄 패밀리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의천은 아버지의 기대를 듬뿍 받으며,
    불과 13살의 나이에 승통이 되어 교종 최고의 지위에 올랐는데,
    그는 이에 자만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경·율·론 삼장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섭렵하였으며,
    불교의 각종 계파와 신라시대의 선교양종까지 두루 연구하여 불교학 연구의 대가가 되었고,
    외전인 육경과 칠략 등을 해석하기도 하였다.
    명실공히 당대 최고 지식인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이렇게 기특하고 믿음직한 아들을 둔 문종은 사상 최대의 절 흥왕사를 신축하는 등 자신의 의도를 구체화하였는데,
    이에 따라 의천은 권력과 지식이라는 인간사 최강의 양대 무기를 한 손에 거머쥐게 되었고, 
    그 명성이 사해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이에 거란 도종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의천을 초청하여 강론을 듣고 계를 받아 그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는 도종의 불심이 깊고, 대덕을 보는 혜안이 뛰어나 그리한 것….일 수도 있지만,
    천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거란 황제의 깊은 속이야 알 길이 없지만,
    정치인의 행동에서 정치적 의미를 배제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이므로,
    이는 당시 고려와 거란과의 관계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하겠다.

    의천은 자타공인의 지식인이자 대덕의 명성을 누리고 있었으나, 변방이라는 한반도의 질긴 열등의식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는지,
    역사상 언제나 선진국인 중국으로의 유학을 희망하였는데,
    당시의 복잡한 국제 정세와 국내에서의 막중한 자신의 역할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하다가,
    자신의 열렬한 후원자이자 강력한 족쇄였던 아버지와 큰형이 사망하자, 달랑 종자 하나만을 데리고
    송으로 떠나는 배에 몸을 실었다.
    이는 순수한 구도의 길을 가는 중으로서는 남다를 것이 별로 없는 행동이었으나,
    그는 중 이전에 왕자였고 이즈음에는 국제적 비중이 매우 높은 인물이 되어 있었으므로,
    그의 밀항은 당시의 동북아를 발칵 뒤집어 놓는 일대 사건이 되었을 것이고,
    줄초상을 치르고 예정에도 없던 왕이 되어 정신이 하나도 없던 선종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어주던 동생이 도를 닦기 위해 송으로 밀항하였다는 소식은 아마도 청천벽력과도
    같았을 것이다.
    선종은 급히 수행단을 꾸려 송으로 파견하였는데,
    당시 고려는 거란의 압력에 의해 송과 공식적인 관계를 단절한 상태였으므로,
    외교적으로 매우 복잡하였을 것이다.
    고려왕의 사랑하는 동생이자 고려 불교계를 대표하는 의천이, 밀항으로 유학을 왔다는 소식이 전해진 송의 조정은 발칵 뒤집혔을 것이나,
    송에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손해 볼 일은 아니었으므로, 송철종은 관리를 보내어 수행 인도하게 하였고, 친히 접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승 대덕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덕분에 대표적 반한파였던 소동파도 의천을 수행해야 했다고 한다.
    이렇게 의천은 천자의 관심 속에,
    시인 소동파의 자존심을 난도질하며 물 만난 고기처럼 마음껏 지식욕을 채워가고 있었으나,
    주지가 비어있는,
    마음의 의지처이자 왕실의 울타리인 흥왕사를 바라봐야했던 작은 형의 인내는 그리 길지 않아,
    의천은 2년여의 유학생활로 만족해야 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사이 의천은 천재답게 교,선 양종 통합의 수단으로 천태종을 재발견하고, 그 이론에 통달하였으며, 
    흥왕사로 복귀한 후,
    이를 강론하며 교종과 선종의 통합에 박차를 가하여, 유학을 후원했던 작은형을 흐뭇하게 하였다.

    천태종은 중국 수나라 때 탄생한 불교의 한 종파로서 삼국시대부터 수차례 한반도에 전해졌었고,
    광종도 천태종을 통해 불교의 통합을 시도했었다는 것으로 보아,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는 요소를 담뿍 가지고 있는 듯하나,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이 분파는 쉬워도 통합은 어려운 법인지라, 그저 이상에만 머물러 있었는데,
    의천은 그가 지닌 권력과 지식으로 강제적이고 일시적이긴 하나 통합에 근접하였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천태종으로 선종을 탄압하면서 절을 짓는 한편 열심히 경전을 찍어내었고,
    일명 속장경인 교장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선종은 아버지처럼, 불교를 친위 세력화하여 왕권의 기반으로 삼는 한편,
    국학에 공자의 제자인 72현의 벽화를 그리게 하고 그들에게 제사를 바치게 하는 등,
    유교의 발전에도 힘을 기울여, 유교와 불교의 조화로운 문화를 꽃피웠다.
    그리고 1094년 병을 얻어 향년 46세로 사망하였다.

    통치기간의 최대 이슈는 의천의 밀항사건이 아닐까 할 정도로, 평온무사한 11년간의 통치였다.
    영토의 확장도 없었고 눈에 띠는 제도의 개혁조차 없어,
    마치 문종기가 그대로 연장 된 듯한, 밋밋하고, 진취적인 맛이 없는 시대였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으나,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는 말처럼 번영을 그대로 계승 유지 발전시킨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백성들에게 예측 가능한 삶을 제공하여 생업에 몰두할 수 있게 한 선종, 훌륭한 정치가였다.

    고려 : 12대 순종, 바로 따라가다

    0

    왕 훈
    8살에 태자가 되어 37세에 즉위하였다. 1083년이었다.
    어려서부터 병약했다는데 효심만은 강하였는지,
    살만큼 살다간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병이 들었고,
    3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인생의 대부분을 태자로 살다 갔는데, 후사도 없어 동생이 뒤를 이었다.
    아버지 뒤를 바로 따라가서 순(順)종인가 보다.

    본래 몸 약한 자식이 착하다지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