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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7일 오후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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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 최우의 시대, 몽골의 3차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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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리타이가 화살에 꿰뚤려 사망한 후 만주의 정세는 어지러웠다.
    몽골을 열 받게 하던 풍운아 포선만노는 결국 살해되면서 만주의 동진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이듬해 1234년엔 개봉에서 애절하게 버티던 금 애종이 남송과 몽골의 연합 공격에 무너졌다.
    나라를 잃어 슬픈 애종이 자살을 선택하면서 강제로 임명했던 황제는 탈출에 성공하지 못하고 피살되어 단 하루 재위라는 진기록을 남겼다.
    시호도 없어 그냥 말제이다.

    윤관의 여진 정벌 이후에 신비로울 정도로 급성장하여 동북아의 패자로 군림했던 금나라는 인류역사상 최강의 군대라는 몽골군을 맞아 금방 망할 것 같으면서도 20여 년을 버티어내는 저력을 보여주었는데,
    그 죽지 않는 힘의 원천은 밥줄 남송이었으나,
    몽골은 그동안 이래저래 쌓인 게 많았던 남송을 회유하여 금과의 관계를 청산하게 만들었다. 
    고려도 덩달아 금과 관계를 끊었고.
    그리고 이것이 결정타가 되어 그동안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던 여진족을 만주의 핍박받는 족속으로
    되돌아가게 만들었다.
    몽골에게 남쪽 침공로를 제공한 남송은 군량도 주고 군대도 주었는데,
    남송군을 이끈 맹장 맹공은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며 금나라의 마지막 발악지 채주를 함락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예전 복송시절 금을 도와 요를 멸망시킬 때와 유사한 상황이었는데,
    또 다시 죽 쒀서 개를 줄 수 없었던 남송은, 
    몽골과 상의 없이 개봉에 20만 대군을 진주시켜,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3경 8릉을 수복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뒤통수를 맞은 꼴이 된 몽골은 기가 찼을 것이다.
    열 받은 몽골은 군대를 집결시켜 개봉의 남송군을 공격하였는데,
    제 아무리 대단한 맹공이라고 할지라도 농사짓다 끌려온 무지렁이들을 데리고 역대 최고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몽골군과 야전을 할 수는 없었고, 
    몽골에게 싹쓸이를 당해 폐허가 된지 오래인 개봉은 20만 대군을 먹일 식량이 없었으므로,
    시체를 뜯어먹으며 농성을 할 상황도 아닌 남송군은 결국 지리멸렬 패주하였다.
    개봉에 진주하기 전에 몽골과 국경협상을 했더라면 피할 수도 있었던 파국이었을지도 모르나,
    안타깝게도 역사는 제 관성대로 흘러 남송에게 또 한 번의 바보짓을 강요하였다.

    예전 금나라의 역할을 대치한 몽골 또한 지들 논리에 충실히 따라,
    1235년 쿠릴타이에서 남송에 대한 응징을 결의한 후 남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가는 길에 감히 몽골군 대장의 목아지에 바람구멍을 낸 고려까지 손보기로 하면서,
    한반도에도 지옥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오고타이는 제 놈이 남송을 치는 동안 놀고 있을 놈들에게 고려를 침공하게 하여 반란도 예방하고,
    고려도 혼내주는 양수겹장의 묘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235년 당올태가 별동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면서 시작된 3차 여몽전쟁
    매년, 총 3회에 걸쳐 4년간 진행되었다.
    침입 병력의 규모는 확실치는 않으나 주공 방향은 남송이었고,
    이듬해에 바투의 유럽원정이 시행되는 것으로 보아 엄청난 대군은 아니었을 것이고,
    1차 침입 때와 비슷한 3만 내외가 아니었을까?
    몇 놈이나 쳐들어 왔건, 이 침입으로 고려 전역은 피바다, 불바다로 변하였고전 국토가 유린되어
    사실상 폐허로 변하였다.
    최 우가 사용한 유일한 전국적인 전술인 청야 전술이 비자발적으로 완벽하게 이루어진 셈이었다.

    *청야전술
    을지문덕, 강감찬도 사용했다고 하는,
    우리 민족이 외침을 당했을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은 전술로서,
    견벽청야라고도 부르는 아주 몹쓸 전술이다.
    적이 쳐들어오면 생활 터전을 파괴하고 산성에 틀어박혀 적이 물러갈 때까지 저항하는 방법인데,
    적의 보급을 곤란하게 하여 스스로 물러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므로,
    집안에 쌀 한 톨도 남기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우물까지 묻어버린다. 
    집도 파괴하고, 들판의 익어가는 곡식은 싹 불태우고.
    그리고 산성으로 피신하여 적이 공격해오면 저항하다가 요행히 적이 물러가면 다시 돌아가는데,
    살던 터전은 청야가 되어 버렸으므로 다시 집짓고 우물파고 해야 한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라고 국가에 세금을 내는데,
    도리어 파괴를 하게 하는 국가의 책무를 저버린 전술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전술로 몽골군이 물러가면 승전했다고 최우와 그 일당들은 강화도에서 호화판
    파티를 하고 서로 칭찬을 해댔다고 하니, 기가 막힐 따름인데,
    삼차침입 때에는 약탈과 파괴가 너무도 심하여  이후의 침략에서는 따로 청야 전술을 쓸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고려 전체가 청야로 변해버린 것이다.
    몽골군이 고려의 전국토를 청야로 만드는 동안 최 우는 고려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최가의 가병으로
    제 집이나 지키게 하면서,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문화사업, 강화도의 식량자급을 위한 간척 사업 등을 하며 지냈다.
    강화도민은 밥버러지들을 위해 간척사업을 하느라 피똥을 싸야했고,
    몽골 놈들은 원흉이 있는 강화도는 쳐다보지도 않고, 살륙과 약탈에 열을 올리고 인종 청소를 하느라
    바빴다.
    몽골의 해군력이 약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금나라를 정복하면서 몽골은 해군력에서도 강국이 되어 있었으나,
    강화도를 점령하려면 상당한 희생이 필요할 것이므로 손쉬운 본토를 박살내면서 항복을 강요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침입의 진행을 보면,
    당올태는 초장에 북계를 유린하고 대동강 이남의 서해도를 박살내면서 경주까지 별동대를 진출시켰다.
    남송을 치러간 몽골의 주력군도 파죽지세로 남하여 유비의 도시 성도를 함락하였으며
    장강의 관문 양양의 접수를 목전에 두는 등 승전고를 울리느라 바빴다.
    1236년, 돌아갔던 놈들이 다시 내려와서 북계 서해도 뿐만 아니라 동계로도 진출하였고
    충청도, 전라도까지 유린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쩐 일로 최우가 정부군을 파견하여 개주에서 몽골군을 기습 , 성공하였는데, 
    하지만 그걸로 그뿐, 단발적인 공격은 전황을 바꾸지는 못했고 몽골군도 별 타격이 없었다.
    이에 최 우는 가병들을 총동원하고, 각지의 지방군들과 연계하여 총력 작전을 편…… 것이 아니라,
    강화도에 장경도감을 설치하고 팔만대장경의 제조를 시작하였다.
    지 놈은 안전한 강화도에서 잘 처먹고 잘 살 테니 몽골은 부처보고 막으라는 이야긴데,
    부처를 용병 취급하는 이 마구니 같은 놈에게 석가모니도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최 우가 그러거나 말거나 몽골 놈들은 1237년 또 내려와서 이번엔 경상도 쪽으로 방향을 잡아
    황룡사를 몽땅 불태워 버렸다.
    정부군이 있어야 야전을 하든, 유기적인 저항을 하든, 전략적인 싸움을 할 텐데,
    개주에서 한 번 공격한 걸로 체면 치례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최우는 강도에서 멀거니 황폐해져가는
    본토를 바라만 보았다.
    저항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전 국토를 방치한 채 강도에만 처박혀 있는 적국의 수뇌부,
    그리고 더 이상 약탈할 대상조차 없는 고려,
    몽골 놈들도 기가 찼을 것이다.
    난감해 하는 이넘들에게 비소로 고려의 항복사절이 오고, 몽골이 받아들이고, 철수하였다.
    1239년이었다.

    기왕 항복할 거면 황룡사가 불타기 전에 했으면 좀 좋았겠는가?
    아까운 관광자원 다 날리고, 백성들은 맞아죽고 찔려죽고 굶어죽고 강간당하고 끌려가고.
    이 와중에 국력을 기울여서 불경이나 파고 앉아 있었던 지식인 최우,
    여러 가지로 어이없는 짓을 많이도 하였다.

    몽골의 철군 조건은 왕의 입조였는데, 까짓 얼굴마담 쯤 그냥 보내버려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리되면 몽골에 진짜 항복하는 게 되어 최 우도 실각하게 될 가능성이 많으므로,
    나라와 백성보다는 항상 제 몸보신이 우선이었던 최 우는 몽골에 사기를 쳐서 왕족을 볼모로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고려 : 최우의 시대, 몽골의 2차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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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군이 물러난 후 최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왕도 아닌 독재자, 입지가 참으로 옹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몽골 놈들이 침입하고 약탈하는 와중에 삶이 초토화 되어버린 일반 백성들이 전쟁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사람들이었을 것이나, 그것을 마음 아파할 만한 인격의 최 우는 아니었고,
    대놓고 말은 못해도 불편한 심기를 어떤 식으로든 표현했을,
    재산상 피해를 많이 본 귀족, 호족들과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왕실의 시선이 가장 많이
    신경쓰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역사와 민족 앞에 책무를 다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며 용퇴를 하고 어쩌고… 했다가는 바로 죽을 것이 뻔하였다.
    살리타이는 고려의 강화요청을 받아들이면서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고,
    개경과 평안도 일대에 72명의 다루가치를 잔류시켜 내정간섭을 하였으므로,
    이 또한 친 몽골파라는 정파를 발생시킬 수도 있는, 걱정스러운 요소였을 것이며,
    지방의 초적들이나 반민들의 활발한 움직임도 우려스러웠을 것이다.
    이렇게 사면초가에 몰린 최 우는 다시 한 번 숙청을 단행하여 주변의 안전을 강화한 후 강화도로
    줄행랑을 놓았는데,
    무신정권이라는 것이 어차피 명분이니 정당성이니 하는 고색창연한 가치들하고는 인연이 없었고,
    비록 중앙군은 무력화 되었어도 고려 최강의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가병들은 더욱 강화되어
    있었으므로,
    최 우의 이러한 무책임한 선택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최 우는 살 집도 마련되지 않은 강화도로 고종을 끌고 갔는데,
    어찌되었건 천도이니,
    최가의 사병을 비롯하여 왕공 귀족 및 그 식솔들까지 족히 수만 명은 움직였을 것이다.

    강화도는 졸지에 수도가 되는 영광을 얻었으나,
    이주한 놈들이 다 높은 놈들이라,
    천민이 따로 없는 신세가 된 원주민들은 간척사업 , 축성사업 , 궁궐 수축 등 각종 부역에 동원되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가끔 수성전 화살받이 노릇도 해야 했다.
    미리 알았다면 죽었으면 죽었지 못 들어오게 했을 것이다 .

    이 꼴을 본 몽골은 바로 응징에 나섰는데,
    천혜의 요새지대 강동 6주가 무력화된 상태에서, 수도 개경마저 버리고 섬에 틀어박힌 고려의 꼬라지가
    우습게 보였는지,
    1232년 2차 여몽전쟁에서 살리타이가 끌고 온 병력은 꼴랑 1만의 기병이 다였다.
    그리고 이 1만에 고려는 다시 능욕 당하였다.

    살리타이는 홍복원의 인도 하에 개경, 남경을 함락하고 계속 남하하였는데,
    본토에 제대로 된 군사력이 없었던 최 우는 되지도 않는 청야작전이나 운운하며 그냥 방치하였다.
    이에 고무되었는지 살리타이는 기껏 1만에 불과한 병력에서 일부를 차출하여 선발대로 운용하는 여유를 부렸다고 하는데,
    많아야  2-3 천이었을 이 선발대는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없이 한반도를 유람하듯이 진격하여,
    고이 모셔져 있던 대구 부인사의 대장경을 불태워 버렸다.
    반면 살리타이의 본대는 경기도 광주에서 모처럼 제대로 된 저항을 만났으나,
    전략적 목표도 아니었고, 고려에 기동군이 남아있지도 않았기에 유목민 군대의 습성대로 우회하여
    남진하였다.
    이놈들이 어디까지 가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군량이나 약탈하려고 들렸던 처인 부곡에서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도 닦는 수련으로 활쏘기를 택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웬 승려 하나가 살리타이를 저격한 것이다 .
    목아지가 뚫린 살리타이는 징기스칸 정도의 운은 없었는지 죽어버렸고, 수장이 뒈져버린 몽골군은
    황당해 하다가 퇴각하였다.
    1만 가지고 그만큼 해 처먹었으니 별 미련은 없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2차 전쟁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는데, 최 우는 이때 움직였다.
    몽골군이 철수하자 최 우는 북계병마사 민 희에게 가병 3천을 주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홍복원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비록 본인은 놓쳤지만 그의 가족들은 사로잡았으며 북부 여러 주현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1만에 당한 것 치고는 피해가 너무 많았지만, ​
    적의 수장을 죽였고 잃었던 영토를 되찾았으니 어쨌든 승리는 승리였다.

    강화도 천도에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나,
    결과적으로 보면 최가의 보신만을 위한 쓰레기 같은 전략이었다.
    당시 고려에서 쓸 만한 전력들은 최가의 가병들밖에 없었는데 이것들이 모조리 강화도에 틀어박혀
    최 우를 비롯한 밥버러지들의 호위나 하고 있었고,
    가물에 콩 나듯이 전투에 참가한다고 해도 정규군 소속이 아니었으므로 지휘관들이 지휘권을 제대로 행사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당시의 고려는,
    베트남의 대몽항쟁 같은 지방군과 연계한 전국적 단위의 유기적인 저항 같은 고급스러운 작전은
    꿈도 못 꾸었고,
    각 성마다 자체적으로 발악적인 저항을 하다가 요행히 적이 우회해 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최 우와 그의 도당들은 그저 강화도나 지키면서 몽골 놈들이 실컷 분탕질 치는 것을 멀거니 바라만
    보다가, 돌아가면 세금이나 뜯으러 가는 조폭만도 못한 짓을 하였고, 
    백성들이 못 참고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득달같이 진압에 나서곤 하였다.

    거란의 침입을 방치하여 결과적으로 몽골의 침입까지 부르게 한 최충헌과,
    몽골과 싸우는 것 보다 지 백성 잡는데 더 혈안이었던 최우.
    부전자전이었다.

    *김 윤후
    승려였다고 한다.
    처인성 싸움에서 육박전에 종사하고 있던 그는, 싸움터에서 어정대던 살리타이를 저격하여 2차 전쟁을 끝내버렸고,
    이후 환속하여 5차 침입 때 또 한 번 몽골의 발목을 잡게 되는데,
    이 대단한 전쟁 영웅에 대한 최 우의 대우는 박하여, 명목상에 불과한 지위를 주거나 한직으로 내돌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홍 복원.
    우리나라의 역대 매국노 중 이놈만큼 나쁜 놈도 드물 것이다.
    애비, 본인, 자식, 손자, 자손, 모두 반란, 매국, 적의 주구 노릇에 종사하였다.
    애비는 강동성을 적에게 바쳤고,
    홍복원이는 1차 침입 때 서경을 자진해서 열고 몽골에 항복한 이래 고려를 무슨 철천지원수 대하듯
    하였다,
    민 희의 토벌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후에도 매 침입 때마다 몽골의 주구가 되었음은 물론,
    고려가 항복한 후에도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으며, 고려의 왕족들에게 적대하였다.
    홍복원이가 까불다 황제에게 맞아죽은 후에는, 그 아들 홍다구가 대를 이어 고려에 대한 패악질을
    일삼았고,
    그 다음 대를 이은 홍가들도 조상의 얼을 이어 받았는지 항상 고려입성론의 선두에 섰다.
    이렇게 대를 이어 가며 매국질을 한 가문은 역사상 드물 것인데,
    이 삼족을 멸해도 시원찮을 종자들의 후손에서 조선의 개국공신이 나오는 바람에,
    이놈의 자손들은 조선에서도 떵떵거리며 살았다.

    고려 : 최우의 시대, 몽골의 1차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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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기스칸 사후 다음 대칸이 누가 될 것인가는 예민한 문제였는데,
    소규모 떠돌이 양치기 생활에나 맞는 막내 상속을 제위에 적용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무리였고,
    중국처럼 장자상속을 하자니 첫째 주치는 징기스칸의 씨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죽어
    그 상속권이 아들 바투에게 있었다.
    그렇다고 혈통적으로 장자인 둘째가 잇자니 초원의 관습과 징기스칸의 정책에 정면으로 위배되었다.
    대칸은 원래 두목들 전체 회의인 쿠릴타이에서 선출되는 것이고 징기스칸의 유지도 그러하므로,
    옛날처럼 서로 치고받아 가장 쎈 놈을 가릴 수도 있었을 것이나,
    사방에 적이 널려있는 신생국 주제에 그런 짓을 했다가는 나라가 결딴날 것이 뻔하였으므로,
    징기스칸 사후 2년이 넘도록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시간만 끌게 되었다.
    이때 몽골이 쪼개졌으면 금은 몰라도 남송이나 고려는 그럭저럭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치열한 이합집산을 거쳐 세째 오고타이를 조정자로 선택하였다.

    1229년 쿠릴타이에서 합의에 의해 대칸으로 선출 된 오고타이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개봉으로 천도한 금나라의 명줄을 완전히 끊는 일이었을 것이나,
    당시 만주에는 고려보다 더 열받게 하는 동진국이 건재하였고, 금나라도 황하 이남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많이 회복된 상황였으므로,
    아버지처럼 강렬한 카르스마로 나라를 이끌 수 없었던 그로서는 이래저래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도 아무 짓도 안할 수는 없으므로 아버지의 정책도 계승하고 새로운 카리스마도 축적할 겸,
    막내 동생 톨루이와 합작하여 몽골의 국력을 총동원한 20만 병력을 이끌고 금나라 정벌을 떠나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만주가 신경쓰였는지,
    본대의 후위 역할도 하면서 만주지역을 장악할 별동대 3만을 따로 구성하였고,
    활을 잘 쏘아 징기스칸의 신임을 받았다는 잘라이르족 출신의 맹장 살리타이를 별동대의 수장으로
    임명하였다.
    살리타이의 직위가 점령지역에서 황제의 권한까지 행사할 수 있는 권황제였던 것으로 보아,
    오고타이는 만주니 고려니 하는 따위들은 살리타이에게 맡겨두고, 금나라와 싸우는데 집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1231년 제 1차 여몽전쟁의 막이 올랐는데,
    압록강을 건너 철주의 처절한 저항을 짓밟은 살리타이는 정주를 점령한 후,
    부대를 각각 1만씩, 본대 , 남로군 , 북로군으로 나누었고, 매국노 홍복원이 바친 안주로 진출하였다.
    남로군은 개경을 직공하고 북로군은 귀주성을 공격하게 한 후 자신은 안주에 머무르며 전쟁을
    조율하고자 한 모양인데, 그건 지 생각이었고,
    살리타이의 구상은 고려군의 분투로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하였다.
    귀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기세등등하게 출발했던 북로군이, 의지의 한국인 박 서와 희대의 용장
    김경손에게 발목이 잡힌 것이다.

    당시 귀주에는 5000여명 정도의 패잔병들이 몰려 있었던 모양인데,
    정주에서 분루를 삼켰던 김경손은 척준경에 필적하는 용맹으로 병사들에게 전투의지를 불어 넣었고,
    박 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리더쉽을 보여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북로군 1만의 발을 묶어 놓았다.
    또한 최 우가, 외적을 내륙 깊숙이 끌어들여 유리한 지형에서 영격하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작전에 따라 파견한,
    좌, 중, 우 3군으로 구성된 약 2만 정도의 중앙군이 동선령 고개에서 남로군과 야전으로 맞붙어
    승리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 겁 없는 중앙군은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하고 또 한 번의 귀주대첩을 위해 밀어 붙였으므로, 
    몽골군은 안주를 버리고 정주까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살리타이가 옛날 거란의 소손녕이 꼴이 난 것이다.
    당시 고려에 또 다른 서 희 장군이 있었다면?
    아쉬운 기회였다.

    정주에서 이를 갈았는지는 알 수없으나 그대로 맥없이 돌아갈 수는 없기에 
    몽골군은 재정비를 마치고 다시 안주의 안북성으로 몰려들었는데,
    지난 승전으로 고무되어 있던 일부 무장들이 몽골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했는지는 모르나,
    무능 꼴통의 대명사 대집성을 중심으로 조기 결전을 주장하는 바람에,
    멀쩡한 성을 놔두고 야전이라면 세계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몽골군과 성 밖에서 맞붙는 우를 범하였다.
    결국 보병 중심의 고려군은 간단한 유인책에 걸려 각개격파를 당하였고,
    전체 병력의 절반을 잃고 안북성에 고립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
    이 전투 이후 고려의 중앙군은 수세에 몰려 몽골군과 감히 야전으로 맞설 생각을 못하였고,
    개경이 포위되는 것을 멀거니 바라만 봐야했다.
    안북성에서 초전에 그렇게 참패하지만 않았더라면 이후 전쟁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

    ​고려의 중앙군을 무력화시킨 몽골군은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개경으로 몰려들었는데, 
    포위 하고 보니 ​개경은 그리 만만한 도시가 아니었다.
    그간의 수많은 외침 덕분에 성을 비롯한 방어 준비가 잘되어 있었고, 최 우의 가병 수만 명을​ 비롯한
    고려 최강 전력이 몰려 있었며,
    최가의 독재권이 확립된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적전 분열도 없었다.
    아직 귀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여 전력을 다 모을 수도 없었던 백전노장 살리타이는 ​
    자신 없는 공성전을 하기 보다는, 흥왕사를 불태우는 등 주변 지역을 초토화하는 전략을 택하였으므로,
    외적을 물리치는 것 보다는 자신의 신변 보호에 훨씬 더 열심이었던 최 우와 그 일당들은 상대적으로 
    편해졌으나,
    개경 밖의 백성들은 지옥을 맛보아야 했다.​

    경기도를 지나 충주까지 약탈 구역을 넓혀가는 몽골군을 본 최 우는 재추회의를 열어 항복을
    결정하였는데,
    진심으로 굴복했다기보다는 일단 눈앞의 불을 끄자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살리타이 또한 천하대세에 별 영향도 없는 고려에서 금쪽같은 전사들을 소모하기 보다는,
    명분과 실리를 챙기고 개선하는 편이 여러모로 좋았으므로,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하고 퇴각하였다.이렇게 해서 약 7개월에 걸친 1차 전쟁은 끝이 났으나,
    이는 끝이 아니라  지옥문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였다.

    고려 : 최 우의 시대,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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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기스칸이 호라즘 정벌을 떠나던 1219년, 최충헌은 풍악 소리를 들으며 저승사자에게 끌려갔는데,
    그의 치밀한 성격은 죽을 때도 여전하여 아들에게 야심가들의 준동을 경계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최 우는 최준문 등의 암살 시도를 피하고 대통을 이을 수 있었으나,
    만만치 않은 동생 최 향이 건재했고,
    어느덧 이십대 후반에 도달한 고종 또한 그동안 못했던 왕노릇을 하고 싶어 했으므로,
    최 우는 우선 몸을 낮추고 선정을 베풀어 조야의 인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2—3년 분위기 파악을 한 최우는,
    1222년 아버지처럼 아우를 제거한 후 각종 관직에 올라 집권자의 면모를 갖추고,
    성을 수축하고 흥왕사에 거액의 시주를 하였으며, 문신들의 등용 폭을 확대하는 등,
    신질서에 의한 통치를 시작하였다.
    평화 시에는 별로 할 일이 없는 무장들은 그게 불만이었는지 문신들을 척살하여 제 2의 난세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최 우는 최충헌의 아들답게 이를 사전에 탐지하여 저지하였고 끝까지 고집부리는 놈들은 죄다
    도륙해 버렸다.
    신품 4현에 속할 정도의 글재주와 정치적 감각 그리고 과단성까지 겸비한 최 우의 통치는
    오랜만에 고려에 안정감을 부여하였으므로, 새로운​ 평화기의 도래를 예상할 수도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당시는 세계 역사상 최대의 변혁기였고, 그 변화의 주역 몽골이 문 앞에 당도해 있었다.​

    ​몽골은 강동성 공략전에서 고려와 처음 만난이래, 
    무슨 구명지은이라도 베푼 듯이,
    간도 지방에 자리 잡은 포선만노의 동진국과 고려를 틈만 나면 뜯어 먹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우리보다 동진국을 더 괴롭게 했는지,​
    그들은 징기스칸이 서역에서 발목이 잡힌 틈을 이용하여, 몽골과 단교하였고
    고려와 함께 몽골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난처해진 최 우는 전통적인 등거리 외교를 펼 수밖에 없었고, 몽골은 고려에 사신을 직접 파견하였다.
    이때 사신으로 온 놈이  저고여였는데,​
    이 놈은 악덕 지주의 싸가지 없는 마름처럼 무례와 억지가 도를 넘었고, 횡포가 심하여 조야의 원망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당시의 만주 정세는, 매년 몽골의 침공을 받아 사망 직전으로 몰린 금나라의 발악과, 동진국의 발호로
    정신없는 상황이었는데,
    이 위험천만한 길을 지네 두목 쌈 잘하는 것만 믿고 거들먹거리며 지나다니던 저고여는,
    징기스칸이 끔직한 대학살을 자행하며 호라즘을 정복하고 서하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 위해
    숨고르기를 하던 1225년, 고려에서 삥을 왕창 뜯고 돌아가다가,
    압록강 부근에서 웬 비적 같은 놈들의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흉수가 밝혀지지 않은 이 사건은 고려와 몽골의 국교단절 사태로 이어졌으나,
    아직 금나라의 숨통이 붙어있었고 서하 또한 으르렁거리고 있었으므로 몽골의 직접 침공을 부르지는
    않았다.​ 

    ​​자택에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하고 정무를 보고 있던 최 우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 애비를 닮아 나라의 운명보다는 자신의 만수무강에 훨씬 관심이 많았고, 당장 전쟁이 일어날 상황
    또한 아니었으므로,
    징기스칸이 말에서 떨어져 죽던 1227년, 서방을 설치하고 도방을 강화하여 자택을 제 2의 조정으로
    만들었으며,
    총애하던 점쟁이 최산보가 희종 복위를 꾀하자, 희종을 강화도에서 교동도로 옮기는 한편 그 연관자들 수십 명을 도륙하였다.
    그리고 뭔 공인지는 모르겠으나 공신이 되었다.

    고려를 완전 장악한 최 우는 그제야 북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군사력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는데, ​지 애비처럼, 정규군이 아닌 사병집단인 도방을 대폭 확충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훈련도 시킬 겸, 민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민가 수십 채를 헐어 대규모 격구장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최 우가 나름의 준비 아닌 준비를 하던 1231년 드디어 운명의 몽골 침입이 시작되었다.

    몽골 : 징기스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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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북방의 패자들은 그 발상지가 어디든 몽골 초원을 기반으로 중국과 대립하였는데,
    패배하여 서역으로 쫓겨 난 세력들이 유럽이나 중동지역에서 친 난리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사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곳을 장악하거나 지배하는 자가, 최강의 무력을 보유한 세계 최강자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몽골은 원래 초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시베리아 삼림에서 살다가 초원이 정착한
    한 가난한 부족의 이름이었다고 하는데,
    이 별 볼일 없는 집단을 이루는 씨족들 중에서도 유난히 찌질했던 보르지킨 씨족에서 출현했던
    한 사내가 초원을 통합하면서,
    제 멋대로 살아가던 각 부족들을 하나의 문화 공동체로 묶었고 
    이들이 세계를 정복하는 바람에 ​몽골이 초원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고,
    초원의 각 부족들 내지 민족들은 몽땅 몽골족이 되었다.

    ​나중에 징기스칸이라는 공포와 위대가 혼재하는 이름을 남긴,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강자 테무진은, 
    우리나라에서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몇 년 전, 금나라가 몽골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아홉에 불과한 식구들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고 한다.
    노예로 전락했다가 탈출하기도 했고, 아내를 빼았기고 이리저리 쫓기기도 하였는데,
    어찌 어찌 세력을 얻어 마누라를 되찾고 보니 그녀는 이미 다른 놈의 씨를 임신하고 있었고.
    이때 얻은 아들이 나중에 러시아와 유럽의 정복자가 되는 바투의 아버지 주치이다.

    ​징기스칸이 몽골 초원의 지배자가 되는 과정을 보면 자신의 능력도 대단했지만 운이 따른 면도 많은데, 운이 없는 성공은 없으므로 그 또한 실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과정이야 어떠하든,
    평생의 지기이자 후원자였으며 실질적 상급자였던 의형제 자무카와, 오랫동안 보호자 역할을 해 준 
    옹칸을 누른 테무진은,
    최충헌이 희종에게 은문상국으로 불리며 막부체제를 왕성해 가던 1206년,
    쿠릴타이에서 징기스칸으로 추대되었다.

    100만 명 정도의 인구에 2000만 마리 정도의 가축을 보유한, 작고 가난한  이 나라의 이름은
    예케 몽골 울루스(큰 몽골 나라)였다.
    부족 간 납치와 몽골인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하고, 법치를 강조했으며, 
    완전하고 전면적인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고, 시베리아 부족과 위구르족까지 친족 관계를 확대하여
    부족이나 민족 전체 단위로 가족적 유대를 맺는 정책을 확립하였다.
    이렇게 내정을 다진 다음 해부터 서하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최충헌이 희종을 쫓아낸 1211년부터 금나라에 여러 차례 침입하였다.

    몽골 초원이 이렇게 성장하자 남송은 금을 없앨 최적의 기회로 생각하고 징기스칸을 지원하였는데,
    제 딴에는 전가의 보도 이이제이를 시전하여 양패구상을 노린 것이었겠지만,
    징기스칸은 금과  싸우다 말고 서역으로 정벌을 떠나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왕조를 박살내는가 하면, 
    머나먼 러시아를 공격하기도 하며 송의 애를 애태웠다 ,
    그동안 송을 착실히 뜯어먹던 서하를 공격한 것은 통쾌하고도 고마운 일이었을 것이나,
    서하가 너무도 무력하게 몽골의 속국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늑대를 쫓으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였다는 한탄을 하게 되었다.

    ​징기스칸은 탄탄한 몸집에 키가 크고 고양이 눈을 가졌으며 노년에도 흰 머리가 없었고 성욕이 대단했다고 하는데,
    천재형의 군사전략가라기 보다는 걸출한 정치가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던 듯하다.
    그는 세력이 보잘 것 없었을 때부터 신분을 따지지 않았고, 공평분배를 실시하여 인심을 얻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남다른 그의 성품이 거듭된 패배에도 불구하고 권토중래할 수 있는 정치적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칸이 된 후에도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발탁하였으며,
    고아나 과부등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복지시스템을 도입하였는데,
    전리품을 나눌 때도 매우 공평하여 부하들의 지극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본적이 없었던 평등 복지 사회에 초원의 사람들이야 당연히 열광하였을 것이나,
    이러한 사회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정치가라 하더라도 생산성이 낮은 몽골 초원에서 이를 이루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었을 것인데,
    그는 평시에는 거의 누더기 수준의 옷을 입었으며, 일반 병사와 같은 식사를 했다는 것으로 보아 검약을 생활화한 것 같으나,
    국가의 재원이 지도자 한 사람이 아껴 쓴다고 마련되는 것은 아니고, 흔한 가축들을 팔아 마련한다 해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약탈밖에는 답이 없는데, 
    국내는 법으로 금지시켰으니, 결국 국가 단위의 약탈이 주 수입원이었을 것이다.

    ​징기스칸은 하느님이 문명국인 중국의 사치와 오만에 실증이 나, 자신과 같은 야만인에게 그들을
    지배할 운명을 부여했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하느님은 물론 기독교의 하느님과 관계가 없는 텡그리를 말하고, 중국도 금나라를 말하는 것이었겠지만,
    고조선과 부여에서도 나타나는 북방민족 공통의 최고신인 이놈의 텡그리가 왜 하필 그때 나타나
    몽골놈들한테만 미소를 보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
    당시 몽골의 성공을 보면 지 놈들은 그런 마음이 들만도 했을 것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은 적을 추격해 쓰러뜨리고, 그들의 소유물을 독차지하여 그 여자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것이고, 
    그들의 말을 빼앗아 타고 다니고 그 여자들의 몸을 침대와 베개 삼아 노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진짜로 징기스칸이 이 말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참으로 적나라하고 야만적인 그러나 솔직한 수컷의 고백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입잔에서는,
    우상과 같은 징기스칸에게 언제라도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던 철없고 무식한 애들이
    이 따위 소리를 듣고, 뭔 짓을 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모골이 송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지들이야 즐거웠을지는 몰라도 당하는 입장에서는 피눈물이 날 일이었다.​​

    `우리는 똑같이 희생하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갖소 .
    나는 사치를 싫어하고 절제를 존중하오.
    나의 소명이 중요했기에 나에게 주어진 의무도 무거웠소.
    나와 나의 부하들은 늘 원칙에서 일치를 보며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굳게 결합되어 있소.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이름이 남게 될 것이오.
    세상에는 왕들이 많이 있소. 그들은 내 이야기를 할 거요 !”
    징기스칸이 남긴 말이라 하는데,
    결국 ‘모두가 공평하게 잘 먹고 잘 살자, 약탈해서.’ 이런 의미이다.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냄새가 나기도 하는 이 징기스칸의 이상은,
    당대의 몽골 젊은이들을 흥분시켰고 최강 군대의 일원으로 성장하게 했을 것이다.

    징기스칸은, 최우가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서방을 설치하여 문신 우대정책을 펴던 1227년,
    서하 2차 공략전을 친정하던 도중 야생마 무리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야생마 중에 원귀에 쓰인 놈들이 있었는지 얘들이 겁도 없이 징기스칸에게 돌진을 하였다.
    징기스칸이 이걸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타고 있던 말은 혼비백산하여 말 위에서 태어난다는 몽골족의 수장을 내동댕이쳐버렸다.
    쪽팔렸을 것이다.
    징기스칸은 개방성 골절을 입었는지 상처가 악화되어 승리를 목전에 두고 죽어버렸는데,
    이 고약한 노인네는 죽으면서, 애꿎은 서하에 풀 한포기 남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 유언은 철저히 집행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서하출신 장군의 기록 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전국의 백성들이 아니라 성에서 저항했던 사람들을 다 죽였다는 말일 것이다.

    ​생전에 정복하고 통치한 땅은  ​후세의 자식들이 통치한 지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작은 감이 있으나,
    몽골을 통합하여 군제를 정비하고, 야삭을 남겨 법령의 기초를 마련하는 등,
    그의 훌륭한 통치가 없었다면,
    징기스칸의 뒤를 이은 귀공자들은 정복을 확대하기는커녕 내분에 휩싸여 어느 놈의 칼에든 맞아
    죽었을 것이고,
    몽골족들도 목축과 도둑질을 겸업하는 조상들의 삶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징그럽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참으로 생각할 게 많은 인물이었다.​

    고려 : 최충헌의 시대, 23대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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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 철
    존재감이 희미한 강종의 아들로, ​
    징기스칸의 침략으로 금나라가 만주에 대한 지배력을 잃기 시작한 1213년,
    2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만주가 몸살을 앓든 말든, 
    고토에 대한 야망을 가지지도, 가질 수도 없었던 최충헌은 그저 집안 단속이나 하며 신생 막부체제의
    공고화에 주력하였는데,
    돈을 펑펑 쓰며 실질적인 왕 노릇을 하던 이 시기가 아마도 그의 평생에서 가장 평온하고 영광스러운
    황금기였을 것이나,
    아쉽게도 그 기간은 짧았다.
    1216년 거란족이 압록강 변에 나타나면서 고려도 동북아의 풍운에 휩쓸려 들어가게 된 것이다.

    현종에게 안습의 몽진을 강요하기도 했던 거란족은 금에게 멸망한 후 일부는 멀리 이란까지 달아나
    나라를 세우기도 하였지만,
    만주에 남아 금의 지배를 받던 부족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징기스칸이 나타나 철천지원수인 금나라를 마구 두들겨 패자, 자발적으로 몽골에 협조하였다.
    그러나 세상 일이 다 그렇듯이,
    용꼬리 보다는 뱀 대가리를 선호하는 자들도 있기 마련이어서,
    ​이런 자들은 야사불을 중심으로 일종의 힘의 공백 지역인 고구려의 비사성이 있던 징주에
    대요수국을 세웠다.
    처음에는 제법 흥기하여 포선만노의 정벌군을 물리치기도 하였으나,
    일 년도 못되어 몽골의 토벌군에게 패하였고, 근거지에서 쫓겨나 압록강 변까지 몰리는 신세가 되었다.
    돌아가 목이 잘리기 보다는 자립을 선택한, 포선만노가 간도 지역에 설립한 동진국에게 퇴로가 막힌
    이 거란의 잔당들은 고려가 만만해 보였는지 압록강을 건넜는데,
    총원이 가족 포함 9만이었다고 하니 전력이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고려를 점령하여 요나라를 이어가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었던 모양인데,
    강동 6주를 믿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국가의 운명 보다는 자신의 안녕에 훨씬 관심이 많았던 최충헌은 그냥 방치하였다.
    그러나 50년 가까운 중앙의 혼란은 변경의 방비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으므로,
    철벽의 요새지대는 옛 명성에 무색하게 거지 떼들의 공격에 무력하였다.

    의주를 지나 평양을 유린하고 개경 인근 까지 육박하는 거란군을 본 최충헌은 가병들로 자신과
    아들 최우를 호위하게 하였으며, 
    거란의 잔당들을 퇴치하기 위해 승병을 비롯한 군사들을 모집하였다.
    그런데 ​모집 과정에서 능력이 출중한 자들은 가병으로 돌리고 나머지는 정규군에 소속되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자신의 문객들 중 국가에 봉사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귀양을 보냈다고 한다.
    당대 고려 최강의 전력인 최가의 가병들은 유세떠는 데나 쓰고, 
    애꿎은 중들이나 끌고 가는 작태에 열 받은 흥왕사를 비롯한 사원 세력들은 이에 저항하였으나,
    막강 최충헌의 가병들에게 박살나버렸고.
    거란의 거지들은 자신들의 전력으로 개경 공략은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철원과 원주 방면으로 방향을 틀어 살육과 약탈을 지속하였다.
    이리 되자 인심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조야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게 되었으나,
    그동안 물불 안 가리고 구축했던 세력 덕분에 정권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는데,
    침입한 거란족도 김취려라는 걸출한 명장이 해결해 주어 최충헌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수염이 멋있었다는 김취려 장군은 언양 사람으로,
    능력도 부족하고 빽도 없어 최충헌의 도방에 들지 못한 무지렁이들을 이끌고,
    장남이 전사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분전하여, 영주, 박달재 등지에서 크게 승리하였으며,
    동북면 쪽으로 쫓겨 간 적도들이 군사를 보강하여 이듬해에 재침하자,
    이들을 강동성 고립시켰고 몽골군과 힘을 합쳐 함락시킨 후 그 유민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몽골군 사령관과 의형제를 맺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안정을 되찾은 최충헌은 말 안 듣는 놈들은 귀양 보내며 열심히 막부를 운영하다가,
    1219년 7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는 말년에,
    고종에게 받았던 왕씨와 궤장을 반납하고 죄수들을 사면하는 등의 약간의 선행을 베풀었고,
    자신의 죽음이 임박하자 하루 종일 풍악을 올리게 하여, 그 음악 속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스스로는 만족스러운 죽음이었을지 모르나 사관의 평가는 엄격하였다.
    “최충헌은 미천한 데서 몸을 일으켜, 나라의 정사를 오로지 하였다.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좋아하며 벼슬을 팔고 옥사를 흥정하였으며,
    심지어 두 왕을 내쫓고 조신을 많이 죽이기까지 하였다.
    크나 큰 악이 하늘에까지 뻗쳤는데도 목숨을 잘 보존하여 방안에서 죽었으니,
    천도를 알 수 없음이 이와 같은가 ” 라고 하였다.

    고려 : 최충헌의 시대, 22대 강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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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 오
    명종의 태자로 아버지가 폐위될 때 함께 쫓겨나 강화도에서 13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첫 부인은 이의방의 딸로서,
    정략으로 맺어지고 헤어진 사이였고, 결혼 기간도 10개월 정도에 불과했으나, 궁합이 맞았는지
    평생 그리워했다고 하는데,
    그건 그거고, 이 따위 섬에서 일생을 마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을 그 지경으로 만든 최충헌에게 딸을 첩으로 바치며 딴 마음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애썼고,
    다행히 용서를 받아,
    기나긴 유배 생활을 마치고 귀경한 뒤에도 의심을 받을 만한 행동은 아예 하지 않았는데,
    젊은 희종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성사 직전에 실패하는 바람에,
    60세라는 꽉 찬 나이에 느닷없이 왕으로 임명되었다.
    귀경한지 1년 만으로, 몽골이 금나라를 정벌하기 시작한 1211년이었다.

    초원을 넘어 불기 시작한 풍운은 대륙을 바야흐로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으나,
    아직 고려에는 직접적인 영향이 없었고,
    국제 정세에 관심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충헌은 그냥 하던 짓을 계속하여, 지겹지도 않은지 또 공신이 되었는데,
    나이 많은 강종은 세간의 예상대로 3년을 못 채우고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아무 의미 없는 재위였다.
    그리고 길고 긴 고난의 왕 고종이 뒤를 이었다.

    고려 : 최충헌의 시대, 21대 희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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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 영
    신종의 맏아들로 1204년, 24살의 풋풋한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데,
    혈기방장한 젊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최충헌에게 관작을 높여주는 정도밖에 없었다.
    희종 즉위와 함께 무려 46자에 달하는 관직을 부여 받은 최충헌은,
    곧바로 최고위 관직인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후작 위를 거푸 받았고,
    왕은 이 무시무시한 신하를 은문상국으로 부르며 존대하였다고 한다.
    최충헌 또한, 평상복으로 궁궐을 출입하는가 하면, 행차 시에는 일산을 받치게 하여,
    자신이 임금의 아래가 아님을 과시하였고.
    이렇게 최충헌이 희종을 신종보다 더한 하수아비로 만들며 막부 체제를 다져가는 동안,
    저 멀리 초원에서는 징기스칸이라는 희대의 거인이 주변 부족들을 통합하며 국가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최충헌은 동생 충수를 처단할 때 공이 많았던 외조카가 세력을 모으자,
    아킬레스건을 자른 후 귀양을 보내는 등 주변의 위협요소들을 제거하는데 게으르지 않았고, 
    미루어 두었던 공작 위에 올랐다.

    ​직위든 작위든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어진 최충헌은, 이규보 등을 등용하며 새로운 질서에 의한
    통치를 펼쳐 나갔는데,
    알콜 중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술을 좋아했고, 시를 잘 썼으며 거문고와 발명에도 소질이 있었다는
    이규보는 무신정변이 발발했을 때가 불과 3살이었고, 성장기 내내 난세였으므로,
    문신들의 세상이었던 과거를 그리워하며 무신들의 횡포에 분노했던 이인로 등의 선배들과는 다르게,
    어떤 놈이 정권을 잡든 세상이 빨리 안정되어 예측 가능한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무신정권 전반기의 혼란을 반영하듯 관로가 평탄치 않았던 그는, 시 한 수로 최충헌의 마음을 사로잡아 출세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최충헌의 통치에 협력하며 나름 잘 살았고,
    동국이상국집이라는 문집과, 서사시 동명왕편을 비롯한 다수의 기발한 시를 남겼다.

    ​최충헌은 철권을 휘두르며 고려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기 시작하였으나, 정통성이 아닌 실력으로
    승부한 자들의 숙명처럼, 승려들을 비롯한 그의 죽음을 바라는 세력들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암살 기도, 무고 등이 잇따르자, 
    최충헌은 기존의 친위 조직을 확대 개편한 교정별감을 만들어 국정 전반을 감시 감독하였는데,
    이 새로운 막부 체제는 얼마 안 지나 국가 시스템을 종속시켜 버렸기에, 임금은 완전히 빈 껍질이
    되어 버렸다.
    이로 인한 불만은 늘 하던 대로 달랠 놈은 달래고 아닌 놈은 때려잡았는데,
    이리되자 그동안 혈기를 누르며 무던히도 참아왔던 희종도 더 이상은 참지 못하였는지,
    만악의 근원인 최충헌을 제거하고, 정상적인 왕노릇을 해 보고자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거의 성사 직전에 실패하고 말았다.
    구사일생한 최충헌은 별 위협도 안되는 왕을 죽여 공매를 벌 생각이 없었는지, 그냥​ 폐위시켜
    강화도로 내 쫒았고.
    1211년의 일이었다.

    ​강화도에 유배 된 희종은 자란도 , 교동 등으로 내돌려지다가, 8년 만에 최충헌의 용서를 받아
    귀경하였으나,
    다시 최 우의 의심을 받아 귀경한지 8년 만에 다시 강화도로 쫓겨났고,
    1237년 57세를 일기로 교동도의 한 절에서 사망하였다.

    남자로서 의욕에 넘치고 최대 한도의 야망을 품을 수도 있는 나이에 왕위에 올라,
    고작 7년간, 최충헌의 비위나 맞추고 눈치를 보는 허수아비 왕 노릇을 하다가,
    무려 18년간 섬을 전전하며 귀양살이를 한 희종,
    그는 어떤 심정으로 바다를 바라보았을까?

    고려 :최충헌의 시대, 20대 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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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 탁
    인종의 막내아들로 셋째 형 명종이 최충헌에게 밉보여 쫓겨나자,
    요즘이야 한창 나이지만, 당시로는 곧 죽을 나이인 54세에 왕위에 올랐다.
    평생 왕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안했을 것이고, 형들 사는 것을 보면 그다지 부럽다는
    느낌도 없었을 텐데,
    운명은 의지나 능력과 무관하게, 인생을 슬슬 정리하기 시작해야 할 시기의 그를
    태풍의 한가운데로 밀어 넣는 짓궂은 짓을 하였다.
    복잡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호랑이등에 올라탄 형국인 최충헌은 퇴로가 없었으므로,
    신종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뒤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세력들을 최선을 다해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명종 폐위 전에 이미 사원 세력을 비롯한 반대파들을 상당수 숙청했던 최충헌은,
    신왕의 측근이 될 만한 자들을 모조리 쫓아내었고 환관들이 세력을 얻는 것을 경계하였는데,
    왕은 식수원마저 최충헌이 지정하는 곳을 사용해야 했다고 한다.

    집권 초기 최충헌은 정변의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종의 폐위 등 중요한 고비마다 강한 추진력을 보여 왔던 동생 충수와 권력을 양분하고 있었는데,
    동생이라는 이유로 형보다 항상 낮은 지위에 만족해야 했던 충수는 그게 싫었는지,
    태자의 장인이 되어 이러한 상황을 한 방에 역전시키고자 하였다.
    멀쩡한 기존의 태자비를 쫓아내야 하는 일종의 무리수이긴 하였으나,
    당시 그들의 힘이라면 못할 일도 아니었는데, 형의 생각은 달랐는지,
    최충헌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이에 반대했고, 결국 두 형제는 힘으로 부딪치게 되었다.
    각 1000여명씩 동원한 전투에서 패한 충수는 임진강 이남까지 쫒기다 추격군에게 피살되었고,
    동생까지 죽여 거칠 것이 없어진 최충헌은, 장래의 위협요소들을 숙청하며 절대 권력을 향해
    착실히 나아갔다.
    최충헌이 이렇게 개경에서 절대자가 되어가는 동안,
    고려는 칼끝에서 정권이 창출되는 중세의 특성과, 이의민이 뿌려 놓은 태생적 신분질서에 대한
    거부감이 복합되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신종 즉위 이듬해인 1198년 권력의 심장인 최충헌의 집안에서 신분 타파의 첫 깃발이 올랐는데,
    사노라고는 하나 허드렛일 보다는 칼 들고 설치는 일에 주로 동원됐을 가능성이 높은 노비 만적은,
    같은 처지의 공사노비들과 함께 혁명을 모의하였다.
    그가 동지들에게 했다는 연설의 요지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으랴, 잃는 것은 노비 문적이요 얻을 것은 공경대부니라’였다.
    근대적 평등 개념에 계급투쟁이론까지 가미된 선구적 인권선언이라고 아니할 수 없으나,
    안타깝게도 거사 당일 모인 동지들의 수가 너무 적었고,
    실행이 연기되는 바람에 불안을 이기지 못한 배신자까지 발생하여, 
    일망타진되고 말았다.
    체포된 100여 명은 사람이 아닌 천노이므로 화형이나 참형으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강에 던져 물고기 밥이 되게 하였고.
    당시 밀고자인 순정에게 준 상금이 은 80냥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아,
    최충헌에게 만적은 숭어를 따라 뛴 망둥이 정도로 인식되어,
    물고기들의 배나 채워주고 말 정도의 해프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발생한 신분타파 운동으로서 그 의미가 상당할 뿐만 아니라, ​
    후대 천민들의 정신 건강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최충헌 일당들이야 뭐라고 생각했건,
    다음 해에는 강릉과 경주 지역에서 민란이 잇달아 일어나 정신없는 망둥이들이 한 둘이 아님을
    보여 주었는데,
    최충헌은 까짓 사람도 아닌 것들의 망동쯤은 아래 것들이 알아서 처리하게 놔두고,
    자신은 정적 제거와 자파 세력 강화에 몰두하였다.
    이부상서에 이어 병부상서까지 겸임하면서 문무 관료들의 인사권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이 시기의 민란은 이의민의 영향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방에서 주로 일어났고,
    13세기가 시작되는 신종 3년에는 밀양과 최충헌의 식읍인 진주에서도 민란이 일어났는데,
    이 동네에서는, 향리와 연관된 복잡한 사연 때문에 수천 명이 사망하였고 인근 지역까지 파급되었다.
    이렇게 전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개경에서도 최충헌을 제거하고자 하는 음모가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므로,
    최충헌은 경대승처럼 사병집단으로 호위를 강화하고 권력의 원천으로 삼았다.
    막부의 시작이었다.

    고려 역사상 최대의 권신이 된 그는 열심히 매관매직 및 정실 인사로 자파의 세력을 키웠는데,
    경주에서 재차 반란이 일어나 신라부흥운동으로까지 발전하자, 토벌군을 파견하여 진압하였고,
    개경의 노비들이 인근 산에서 전투연습을 하자, 모두 물고를 내어 개경 물고기들의 배를 채웠다.
    반대파에 대한 숙청은 연례행사처럼 되풀이 되었고.
    이렇게 소란스러운 나라꼴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던 신종은 1204년 등창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고,
    태자에게 선위한 후 곧 사망하였다.
    향년 61세, 재위는 7년.

    壁上三韓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師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將軍上柱國兵部御史臺判事太子太師

    벽상삼한삼중대광 (정 1품) 개부의동삼사수태사(종 1품)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정 2품) 상장군(정 3품) 상주국(정 2품) 병부어사대판사(병부와 어사대의 장) 태자태사(태자의 스승)
    신종이 희종에게 양위한 후 최충헌이 받은 관직명이라 한다.

    당시에 기네스북이 없었던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고려 : 최충헌의 시대,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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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가 상장군이었고 외할아버지도 상장군이었으므로 최충헌은 귀족이었다.
    무신이 별 볼 일 없던 시대였으므로 음서를 통해 문신의 길로 들어섰는데,
    문벌 출신이 아니라서 그랬는지 하위직을 전전하는 신세였다고 한다.
    좌절의 나날을 보내던 22살의 어느 날,
    무신 정변이 발생하여 가뜩이나 짜증나던 문관 생활이 아예 주홍글씨가 되어 버리자,
    미련 없이 무관으로 전직해 버렸는데,
    이번엔 정변 참가자가 아니었기에 무반으로서의 삶도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그나마 변란이 자주 발생하는 격동의 시대를 만난 덕에,
    조위총 반란 진압 작전에서 이의민이나 두경승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두각을 나타내었고,
    이내 별장으로 승진하였으며, 지방관을 거쳐 경상 진주도 안찰사까지 될 수 있었다.

    지방관으로서 그는 서리들에게는 엄격하고 백성들에게는 너그러운 모범적인 목민관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앙 행정이든 지방 행정이든 난맥상의 극치를 달리던 시절이었으므로 이러 저러한 굴곡은
    피할 수 없었고,
    그 와중에 경주에 연고가 있는 이의민과 원한을 맺게 되었는지, 탄핵을 받아 군대에 복귀하였는데,
    하필 당대 집권자의 눈 밖에 났으니 출세는 물 건너갔고, 40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고작 섭장군직을
    받았다고 한다.
    나름 뼈대 있는 집안 출신에, 문신으로 출사할 정도로 유식했던 최충헌은,
    일자무식의 천출들이 활개 친 이의민의 통치 13년을 분노와 우국의 심정으로 보내야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울분의 세월을 살아야 했던 사람이 최충헌 하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1196년 최충헌이 48살이 되었을 때, 운명의 비둘기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의민의 개차반 아들 자영이 평민도 아니고 당당한 귀족의 일원인 최충헌의 동생 충수의 재산인 비둘기를 강탈하였고,
    이에 열받은 충수는 자영을 찾아가 거칠게 항의한 모양인데,
    이의민과 최충헌의 구원이 작용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영은 직위가 있는 귀족을 봐주지도 않고 볼기를 때린 후 이틀간 가두었다고 한다.
    충수가 받은 이러한 수모는 당시 비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귀족출신 무신들의 공분을 샀을 것이고
    최충헌에게 힘을 주었을 것이나 쿠데타의 전 과정이 자세히 전해지지는 않는다.

    최충헌은 동생과 함께 경남 합천까지 내려가 미타산 별장에서 쉬고 있던 이의민의 목을 베었고,
    백존위의 도움으로 군사들을 지휘하여 가병들을 동원한 이의민 아들들의 저항을 분쇄하였으며,
    숨어 있던 자영을 색출 처단하였다고 한다.
    이의민의 목이 저자거리에 효수되었다는 소식에 개경 인근의 사찰에서 봄놀이를 즐기다 혼비백산하여 귀경한 명종은,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늘 하던 대로 승자의 손을 들어 주었다.
    정변을 성공시킨 최충헌은 자영의 기첩인 전설적인 미인 자운선을 취하여 전리품으로 삼았고,
    이의민의 삼족을 멸하여 그가 살았던 자취를 세상에서 지워버리고자 하였다.
    천민 출신인 이의민에게 천대를 받아야 했던 분노가 대단하였던 모양이다.

    ​천민들의 영웅 이의민은 역사의 기록처럼 그렇게 형편없기만 한 지도자는 아니었던 듯하다.
    허수아비든 뭐든, 고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명종이 그에게 여전히 호의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고,
    그의 막역지우인 두경승 또한 건재했으며,
    천민 출신의 병사들이나 관료들도 은인이나 다름없던 이의민에게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최충헌은 예전 선배들이 한 짓을 되풀이 하여,
    반발을 하거나, 할 위험이 있는 인물들을 모조리 주살해 버렸다.
    출사했던 천민 출신들은 씨가 말랐을 것이다.​

    ​본격적인 정권 확립에 나선 최충헌은 명종에게는 봉사 십조를 올려 폐단의 시정과 임금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봉사 10조를 보면 구구절절이 훌륭한 문장이요 공자님 말씀이라 반박할 여지가 없지만,
    정상적인 왕정기에도 제대로 안 되던 것들인데, 평생을 허수아비로 일관하였고 자질 또한 형편없었던 명종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요구였다.
    건의한 최충헌도 그저 명분을 위한 것일 뿐, 별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선배들처럼 가는데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었는데,
    구악을 멸하고 새 시대를 열겠다는 쿠데타의 명분상,
    걸림돌이 될 게 분명한 거물 두경승을 속임수로 잡아 섬으로 귀양을 보내었고.
    이의민과 달리 왕의 재량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최충헌에게 반발하는 명종도,​ 별 힘은 없어도 구시대의 상징이므로,
    왕이 연로하여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궁색한 이유를 들어 폐위시켜 버렸다.

    고려 : 무신들의 시대, 최초의 천민 출신 집정 이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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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의민의 조상은 월남국의 왕자였다고 한다.
    왕위 쟁탈전에서 패배한 왕자는 중국으로 탈출했고 어찌어찌해서 고려까지 흘러들어온 모양인데,
    고려에서의 생활도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는지,
    그의 자손인 이의민의 아버지는 소금 장수로 연명하였다.
    상업이 발달했던 고려였으므로 소금 장수가 그리 나쁜 직업은 아니었을 것이고, 신분 또한 천민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으나,
    사원의 어여쁜  노비와 눈이 맞는 바람에 그 자식들은 종모법에 따라 갈 데 없는 천민이 되었다.

    삼형제의 막내였던 이의민은 8척 장신에 힘이 장사였다고 하는데,
    삼형제는 능력은 있으나 신분이 천한 젊은이들답게 사회에 불만이 많았을 것이고, 
    이러 저러한 사건 사고를 겪으며 자랐을 것이다.
    이들은 결국 대형 사고를 친 모양인데, 
    이의민은 두 형이 죽는 살벌한 고문에도 멀쩡히 살아남았고, 이를 눈여겨 본 안찰사 김자양이 경군으로 천거하였다고 한다.
    뛰어난 천품의 젊은이가 제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이 안타까운 자상한 목민관의 선행이었는지, ​
    아니면 모병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그리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수박을 잘하던 이의민은 이내 의종의 눈에 들었고 별장까지 승차하여 김자양을 흐뭇하게 하였다.
    천민이 이만큼 출세했으면 개천에서 용 난 것이나 진배없으므로 늙으신 부모님도 기뻐했을 것이고,
    그 또한 적성에 맞는 군무에 열심히 종사하며 나름 잘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무신 정변이 발생하였다.​
    정변 당시 그는 이의방이나 이 고보다 지위가 높았으나, 출신의 한계 때문인지 주동그룹에 끼지는
    못했는데,
    그 또한 세상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으므로 정변에 적극 동참하였고,
    그 동안 쌓인 울분을 마음껏 폭발시켰는지,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여 금강야차라는 별명을 얻었다.

    정변이 성공한 후에도 정권 쟁탈전을 벌이는 옛 부하들의 명을 받아,
    왕을 죽이라면 죽이고, 
    반란을 진압하라면, 눈에 화살을 맞는 악조건 속에서도 날뛰어야 했으나,
    다행히 타고난 용력과 무예가 출중하여 여러 번 공을 세울 수 있었고,
    상장군까지 진급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말단 군졸에서 시작하여 별을 네 개씩이나 단 계엄사령부 수뇌부의 일원이 되었으니,
    자신도 흐뭇하였을 것이고,
    당대 천민들의 영웅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천민출신 병사들의 절대적인 충성도 받았을 것이고.​
    전설에나 나올 법한 출세를 하고 정권에 일정 지분까지 확보한 이의민은,
    남들처럼 부정부패에 열중하며 행복한 삶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난데없이 경대승이 나타나 하늘같은 정중부를 효수하더니,
    바닥에서 출발하여 남들보다 훨씬 고생을 많이한 자신을 마치 구악의 화신처럼 취급하였다.

    경대승의 일차척결 대상에서 벗어나 가슴을 쓸어내렸던 이의민은, 이러한 경대승의 적대에
    당황하였을 것이나,
    그 동안 천민이라는 이유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하다가 이제 좀 살만해졌는데,
    웬 천둥벌거숭이 같은 젊은 놈의 이해할 수 없는 철학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맥없이 죽을 수는
    없었기에,
    일단 자택에 칩거한 후 사병들을 동원하여 방어막을 구축하였다.
    경대승 또한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비슷한 짓을 하였으므로,
    개경 시내에서 두 호랑이가 서로 마주 보며 으르렁거리는 형국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젊고 공세적인 경대승이 유리하였는지, 
    이의민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보따리를 싸서 고향 경주로 줄행랑을 놓았다.
    천민으로 출세하여 그만한 지위에 올랐고 상당한 부도 모았으니 별 미련은 없었을 것이다.
    경대승이 명종을 겁박하건 말건 그건 신경 쓸 일도 아니었고.

    개경에서야 천민으로 온갖 괄시를 받았지만 금의환향한 고향에서는 지역 유지 대접을 받았을 것이므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토벌에 대비하여 영향력 확대에 주력하는 한편
    어린 시절 동경의 대상이었던 호족질을 하며 제법 잘 살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경대승이 병사하였으니 아무 걱정 말고 귀경하라는 명종의 서신이 도착하였다.
    그러나 난세를 살아오며 다져진 그의 경험은 이를 쉽게 믿지 못하게 했고,
    정권에 대한 욕심도 그다지 크지 않았으므로,
    임금의 지엄한 명령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리되자 명종은 정권을 욕심내지 않는 그의 담백한 성품에 반한…… 것까지는 아니겠지만,
    사심 없이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은 이의민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조정과 중방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갈량을 삼고초려했던 유비마냥 이의민에게 매달렸다.
    이의민은 임금의 정성에 감복했다기 보다는 경대승이 죽은 게 확실하고, 왕의 말을 들어 손해 볼 일이 없다는 확신이 들자,
    보무도 당당하게 경대승이 초토시킨 무주공산에 입성하였다.
    명종은 이의민을 유일하게 믿을 만한 동지로 생각하였는지, 열심히 벼슬을 올려주고 공신각에 초상까지 걸어 주었다.
    이의민은 순조롭게 정권을 장악하여 최고 지도자가 되었고.

    이의민 개인으로 보면 그야말로 인간 승리요, 온 세상 모든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광영 중의
    광영이었을 것이나,
    까막눈에, 잘하는 게 싸움질밖에 없던 그는,
    재상의 위치에 올랐어도,
    비슷한 처지의 친구 두경승과 함께 대궐의 기둥과 벽을 부수는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었고,​
    자신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무신들의 문반직 겸임을 확대했으며,
    학식이 필요하여 무신들이 감히 넘보지 못했던 관직에도 무신들을 등용하였다.
    문신들은 말세를 한탄하였을 것이나 천민들이 다수 포함된 무신들은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위한 일에도 게을르지 않아,
    백성들의 재산을 수시로 수탈하였고, 양갓집 규수를 겁탈하는 취미도 만들었다.
    그의 가족들도 가장의 본을 받아 포악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으며,
    아버지 덕에 조정에 출사한 그의 아들들은 쌍도자로 불릴 정도로 민폐가 발군이었다고 한다.

    이의민을 불러들인 명종은 왕 되고 처음으로 제 목소리를 내게 되었는데,
    지도자의 자질이 없기는 왕이나 이의민이나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에,
    나라를 개혁하고 민생을 돌보고 하는 게 아니라,
    눈치 볼 사람도 없겠다, 마음 놓고 향락에 빠져들었으며,
    개뿔도 없이 아첨에만 능한 환관들을 비롯한 측근들에게 힘을 잔뜩 실어주었고, 그들의 권력 남용을
    방치하였다.​
    덕분에 경대승이 일부 복원시켰던 고려의 전통 질서는 다시 크게 흔들리게 되었으며, 
    전통적인 귀족들에게는 새로운 악몽이 시작 ​되었다.
    그러나 새로이 빼앗길 게 별로 없었던 천민들은 통쾌하였을 것이다.

    ​​ 명종과 힘을 합쳐 나라를 개판으로 만들며 행복한 삶을 이어가던 이의민은
    황당하게도 십팔자위왕설에 심취하여 왕이 될 꿈에 부풀게 되었고,
    집안에 두두리라는 귀신을 모시는 사당을 차려놓고 밤낮으로 빌었다고 하는데,
    끝없는 그의 욕심에 기가 막히기도 하지만, 
    집정이 되어서도 천민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던 그에게 고려는,
    아무리 성공했어도 항상 외국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므로 전혀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나름대로 자신의 꿈을 키워가던 그는 자신의 고향 근처에서 신라부흥을 기치로
    김사미와 효심이가 민란을 일으키자,
    두두리신이 응답한 것이라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들과 내통하며 반란의 성공을 기원하였고, 
    아들을 토벌대의 대장으로 삼아 군수품을 지원하는 등 반란이 성공하도록 나름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천민들이 주축이 된 효심이와 사미군은 정규군을 당해 내지 못하여 이의민의 꿈은 좌절되었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명종의 목을 취할 수 있었고, 
    인사권과 군사권을 한 손에 쥐고 있었던 이의민이 꼭 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써야만 했을까?
    당시나 이후에도 이에 대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던지,
    최충헌이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조작했다는 설도 있고,
    반란군에게 뇌물도 받았었다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내통이나 지원을 했다기 보다는,
    무지렁이들의 꿈틀거림이 안쓰러운 단순한 동정심이었다는 설도 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의민이 천민 친화적인 지도자였던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이의민의 몰락은 비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의민의 아들 지영이 최충수의 비둘기를 강탈하자, 열받은 충수가 형에게 일렀고,
    형인 최충헌도 같이 열받아 이의민의 목을 따 효수하고 삼족을 멸하였는데, 
    다행히 종손인 이우원이 정선까지 탈출하여 정선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투에선 용맹하고 정치에는 조심성 많던 이의민이, 
    그깟 비둘기 때문에 10년이 넘는 권세가 무색하게 간단히 몰락해버린 것이 참으로 어이없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귀족들의 나라 고려에서 천민이 그만큼 이루고 누렸으면, 별 여한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 드문 천민 출신 ​집권자.
    비록 그 끝은 ​ 비극이었으나 독특한 시대와 어울린 그의 분투와 성공은 당대 천민들의 귀감이었고,
    후대에 비참한 삶을 강요받았던 모든 이들에게 전설이 되기 충분하였다.

    고려 : 무신들의 시대, 이상주의자 경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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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의 유서 깊은 향리 집안 출신으로,
    무예와 용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일자무식의 다른 무신들과 다르게 천문에 취미가 있을 정도로
    상당히 유식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경 진은 무신 정변에 적극 참여하여 평장사까지 지낸 인물이었는데,
    뛰어난 자질과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어린 나이부터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그는,
    불과  21세에 친위군 대장인 견룡 행수에 임명되었고, 
    여러 번의 승진을 거쳐 정 4품 장군이 되었으며,
    본향 청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자 사심관이 되었다.
    사심관이 된 그는 대대로 물려오는 재산까지 국가에 헌납하는 등 상당한 의욕을 보였으나,
    일처리가 집권세력의 마음에 안 들었는지 얼마 안 되어 면직되고 말았다.

    뛰어난 능력의 자존심 강한 젊은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파면된  25세의 경대승은 현 정권에 대해 강한 비판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당시 정권을 담당했던 송유인과 정 균이 여러 가지 실정을 거듭하며 조야의 인심을 잃자,
    세상을 뒤집어 버릴 결심을 하게 되었다.
    발칙한 정 균을 제거하기 위해 정의의 칼을 뽑자, 
    옛 부하들과 금군병사들은 기꺼이 수족이 되어 주었고,
    팔불출이자 딸 바보인 명종은 소중한 공주가 정 균의 첩이 될 뻔한 위기에서 구해준 그에게
    무한 감사와 함께 신뢰를 보여 주었다.
    정 균을 제거한 후 송유인 등 정적이 되었거나 될 만한 자들을 모조리 도륙하였고,
    그냥 두었어도 곧 죽을 나이인 정 중부를 기어이 찾아내어 저잣거리에 효수하였다.
    마치 보현원 사건을 연상케 하는 이 사태에,
    조정의 권신들은 예전의 문신들처럼, 반격할 생각은 못하고 전전긍긍하기만 하였으므로,
    자칫 피 끓는 젊은이의 단순 테러로 끝날 수도 있었던 그의 의거는 본격적인 쿠데타가 되었다.

    쿠데타를 성공시킨  26세의 젊은이는 현 질서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고,
    의종 살해에 대해 적개심을 표출하였다.
    그러나 이는 주변 어른들의 기대에는 크게 어긋나는 짓으로서,
    정중부 덕에 살맛나는 세상을 맞이했던 무신들은 분노하였고,
    무신 정변의 최대 수혜자라고 할 수 있는 명종 또한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그는 명종의 입각제의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지위를 포기하고, 동지이자 수족인 무술고수 100여명과 함께 자택으로 물러나 버렸다.
    조정이나 군부에 막후 조종할 수 있는 세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임금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매우 위험한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지금까지 시도 된 적이 없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유지하며,
    고려 사회를 개혁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경대승은 도방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수족들을 비밀경찰처럼 운용하여, 반발세력들과 누가 보아도
    죽어 마땅한 놈들을 때려잡았고, 
    조정에 수시로 출몰하여 집정의 권한을 행사하였는데,
    심약한 명종은 아무런 제동을 걸지 못하였고,
    제 발 저린 데가 많은 권신들 또한 공연히 나서다 박살나는 수가 있으므로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이전 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대를 받게 된 문신들은 오히려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므로,
    그의 권력은 점점 강해졌고 도방은 초법적인 기관처럼 되어, 사회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도방은 공식적인 국가 기관이 아니었으므로,
    그 구성원들은 국가로부터 월급을 한 푼도 받지 못하였는데,
    일반적인 수장들과 달리, 
    경대승은 누대의 집안재산도 부정하게 모은 재산이라 하여 국가에 헌납할 정도로 축재에 무관심하였다. 따라서 가끔 명종이 상당한 하사품을 내려주었어도,
    그의 식솔들을 포함한 수족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침실까지 숙소로 제공하고, 
    한 이불을 덮고 자기를 마다하지 않는 수장에게 손을 벌릴 수 없었던 도방의 인원들은,
    그 동안의 비밀경찰 활동을 통해 반란의 위험이 있거나, 
    부정 축재한 인물들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므로,
    경대승의 묵인, 방조 하에 사회정화를 겸한 약탈로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그 동안 떵떵거리던 고위층들은 더욱 몸을 사리게 되었으나 일반 백성들은 환호하였다.
    이리되자 고려의 정국은 더욱 도방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조정은 추인기관 비슷하게 되었으며, 그동안 권력의 중심에 있던 중방은 무력하게 되었다.

    중방은 현종 때부터 있었던 무신 협의체 기구로서 고위 무관들이 모여 한담이나 나누던
    일종의 친목회 따위가 아니라,
    비록 그 위상은 낮았으나,
    무신들의 최고 의결기구로서 요즘으로 치면 합동참모본부와 비슷한 기관이었고,
    정변 이후에는 계엄 사령부와 같은 역할을 하던 권력의 중추였다 .
    따라서 이의방이나 정중부 같은 당대의 집권자들은 중방을 장악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그 권위를 이용하여 정권을 유지하였다.
    그 과정에서 중방의 고위 무관들 도한 일정한 권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를 바탕으로 집권자를
    견제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중방은 당대 무인들에게는 자부심과도 같은 기관이었고, 정중부는 무신들의 세상을 만들어준
    은인 같은 사람이었는데,
    경대승은 정중부의 처단에 이어 중방까지 무력화시켰으므로, 이는 무신들에게 상실감과 분노를 동시에 안겨주는 폭거였을 것이다.
    또한 중방의 권력에 의지하여 왕 자리를 유지하던 명종에게도 든든한 울타리가 무너졌다는 의미였을
    것이고.
    그러거나 말거나 경대승은 자신의 복고적이며 근본주의적인 철학과 현실적인 필요성에 따라,
    죽일 놈들은 죽이고 박살낼 놈들은 박살내 버렸으므로,
    그 서슬에 천하의 이의민도 고향인 경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명종은 명종대로 극도의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아마도 경대승의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켰을 것이다.

    신비와 공포를 적당히 혼합한 생소한 체제로 고려를 지배하던 경 대승은,
    그 위세가 무색하게 30살을 갓 넘기고 병사하고 말았는데,
    그 집권기간이 고작  4년이었고 후계자를 키울만한 나이도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그의 새로운 체제의 핵심인 도방은 그의 원수들에 의해 박살나 버렸고, 구성원들이 거의 참살되는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막나가던 무신정권에 물음표를 던지며, 투철한 신념으로 사회 정의를 위해 매진했으나,
    아직 경륜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젊은 나이에 집권한데다, 그나마 요절하는 바람에 그 기간도 짧아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그가 남긴 재산은 도방의 숙소로 사용하던 집 한 채와 쌀 몇 섬 그리고 약간의 말먹이 정도였다고 한다.

    우리 역사상 드문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이상주의자였다.
    명종은 혁명에 의해 추대된 허수아비 왕이었으므로,
    무신 정권 초창기에는모든 권력이 예전의 문벌 귀족들을 대치한 중방에 있었다.
    비록 집권자가 바뀐다 할지라도 이는 중방 내부에서 발생한 권력 투쟁의 결과일 뿐  
    왕의 역할이 바뀌지는 않았으므로,
    명종이야, 나라가 산으로 가든 어디로 가든, 그저 한 목숨 보존하며 왕 자리에 앉아 있을 수만 있으면
    그만이었는데,
    경대승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입장이 바뀌게 되었다.

    지지 세력도 별반 없는  26살 젊은이의 준동은 ,
    산전수전 다 겪은 중방 고관들의 눈에는, 혈기에 미쳐 날뛰는 중뿔난 망아지 정도의 가소로운 수준..은 아니었겠지만,
    대단한 파괴력을 지닌 혁명이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대승 또한 자신의 한계를 잘 알았을 것이므로. 
    조정이나 중방을 장악하려는 노력 보다는 자신의 신변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여,
    자택에 사병 집단인 도방을 설치하고 으르렁거렸으나,
    우리에 묶인 것도 아니었으므로 자신에 대한 반발세력이 나타면 수시로 튀어나가 물어뜯었다.
    또한 쿠데타의 주역인 금군의 병사들도 아직 궁궐에서 근무 중이었으므로,
    임금은 일종의 볼모가 되어 자신의 친위군인 금군의 눈치를 봐야하는 신세가 되었다.
    제 멋대로 정사를 농단하던 무리들은 몰살되었고.
    따라서 당시의 정세는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주체가 없는 묘한 상황이 된 것인데,
    마치 호랑이가 사라진 산을 휘젓고 싶은 늑대들이, 파수견이 사나워 숨죽이고 있는 것과 유사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경대승을 제거하려 해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도방의 장사들이 일당백의 워낙 뛰어난 무인들이라,
    실행 족족 실패하였고 역습을 받기 일쑤였다.
    살얼음판 같은 정국을 견디기 힘들었던 권신들은 결국 경대승을 집정으로 인정하는 일종의 정치적 타협을 하였으나,
    신변에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경대승은 여전히 자택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경대승은 세력이 미약한 집정이라는 한계 때문에 국정 전반을 장악하지는 못하였고 사정기관의 역할을 주로 하였으므로,
    일상적인 정무를 보던 문신들은 오히려 자율성이 강화되고 결제라인이 단순해지는 등, 업무효율이
    높아졌으나,
    문자가 딸려 복잡한 서류 업무는 꿈도 못 꾸고,
    가끔 서로 힘자랑이나 하며 주로 부정 축재와 권력 남용에 종사하던 중방의 고관들은
    도방의 등쌀에 개점 휴업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자 정치의 중심은 자연스레 중방에서 조정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이는 계엄이 해제되어 평시체제가 가동되기 시작했다는 의미도 가지는 것이어서, ​
    명종에게는 왕권이 강화되고 임금의 권위가 회복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으나,
    왕의 상황은 그렇게 편안하지 않았다.

    ​ 임금의 명보다는 제 수장의 명을 더 무겁게 여기는 조폭들의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명종은,
    자기를 지켜주는 것인지 감시하는 것인지 모를 금군들에 늘상 둘러 싸여 있었으므로,
    앞에서 굽실거리는 놈들의 주인을 생각하기에 바빴고,
    자기의 허리를 꺾어 죽일 가능성이 있는 놈을 찾기 위해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형처럼 죽을 수 없었던 그는,
    허리의 안녕을 위하여 경대승의 심기가 불편해지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였고,
    무슨 짓을 하던 토를 달지 않는 방법으로 경대승의 위상을 더욱 높여주었으며,
    도방 체제의 안착을  도왔다.
    따라서 ​젊은 나이에  자택에 고고하게 머물며 고려를 통치하는 경 대승은,
    백성들에게는 신비로운 존재로 비쳤겠지만, 권신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도방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시스템으로 인해,
    실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모호한 상태가 된 명종은,
    잦은 숙청과 자연적인 노쇠로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혁명동지들이 하나 둘 자신의 곁을 떠나고,
    경대승의 유일한 대항마라 할 수 있던 이의민마저 경주로 줄행랑을 치자,
    찬바람 몰아치는 벌판에 홀로 남겨진 춘래불사춘의 심정이었을 것이나,
    경대승에게는 임금을 어찌하겠다는 마음이 없었고,​ 왕실의 인척이 될 생각도 없었으므로,
    그냥 저냥 왕 노릇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는데,
    그 무섭던 경대승이 집권  4년 만에 어이없이 병사하자,
    그 동안 그의 발걸음 소리에도 경기를 일으키던 명종은 난생 처음 임금처럼 호령하며,
    도방의 인원들을 모조리 물고를 내버렸다.
    감히 왕을 공포에 떨게 했던 괘씸한 자들에게 추상같은 군주의 위엄을 보인 것인데,
    그러고 나서 보니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는 무식하게 힘만 쎈 권신들을 제어할 만한 세력이 주위에
    없었다.​
    없던 친위세력이 하늘에서 떨어질 리도 없고 사방에서 늑대소리는 들리고,
    새로운 두려움에 휩싸인 명종은 별 수 없이 저 멀리 경주까지 도망가 나름 잘살고 있던,
    힘 있는 혁명 동지 이의민을 불러들이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명종이 어리석었다기 보다는 그가 살아온 세월이 그만큼 엄혹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