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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5일 오후 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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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리 선생의 외동딸 김영주 씨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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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 박경리 선생의 외동딸이자 김지하 시인의 부인인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이 25일 오전 5시 30분에 향년 7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김영주 이사장은 서울출신으로 연세대와 연세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2001년 원주에 정착해 재단법인 토지문화재단 운영위원과 토지문화관장으로 활동했다. 2008년 박경리 선생 작고 후 재단의 이사장을 맡아 한국 문학 발전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발인은 27일 오전 9시 30분에 이뤄지며, 장지는 원주 서곡리 선영. 빈소는 원주세브란스 기독병원 장례식장 3층 특실에 마련되어 있다.

    고인의 유족은 남편 김지하 시인과 자녀 원보, 토지문화관장으로 재직중인 세희씨가 있다.

    고구려 : 4차 여수전쟁, 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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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차 여수전쟁

    양광은 귀국한 이후에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하여 일단 발등의 불은 껐으나, 이밀을 비롯하여 각지의 세력가들과 농민들의 반란에 시달려야 했다.
    이밀, 동이족 출신이라는데, 출신이 뭐든 수나라 귀족이다. 을지문덕이 고구려 귀족이 듯이.
    아무튼 이렇게 정신없는 와중에도 양광은 다시 고구려를 노렸는데, 수군 대장 내호아는 또 빌빌대면 양광에게 죽을까봐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여수전쟁 최초로 고구려의 방어선 상 주요 성 중의 하나인 비사성을 함락시켜 밥값을 하였다.
    그러나 너무 때 늦은 성공이었다. 수나라 내부의 반란이 갈수록 거세져 육군은 움직일 수도 없었는데, 수군만 가지고 무엇을 하겠는가?
    반면 양광 이 미친놈에게 지겹도록 시달린 고구려도 사망 직전이었으므로, 영양왕은 곡사정을 돌려보내고 형식상 귀부하는 형태로 수나라에 화친을 제의하였다.
    양광은 이를 받아들여 내호아에게 귀국 명령을 내렸고.
    고구려와 수나라 간의 전쟁은 완전히 끝이 난 것이다.
    곡사정만 불쌍하게 되어 처참하게 죽었다. 그러나 양광 이놈도 곱게 죽지는 못하여,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에게 피살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후 수나라는 내분에 휩싸여 멸망하였고, 당국공 이연 (당고조)이 당을 세워 통일 왕조를 이어갔다 .
    고구려 역시 4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인하여 국력을 크게 소진하였고,
    통일된 중국의 엄청난 국력을 신물 나게 실감하였으므로,
    수나라의 뒤를 이어 중원을 제패한 당나라와 화친을 맺는 등 중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은혜 혜(惠), 중국 놈들은 암군이거나 왕위를 빼앗긴 임금을 모욕하기 위해 시호에 이 글자를  사용하는데, 한심한 인간쯤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고려조의 혜종, 충혜왕이 이에 해당한다.
    이 수준을 넘어가는 인간말종에게는 쬐다, 바래다의 의미가 있는 양(煬)자를 쓰는데, 불효막심, 허랑방탕, 음란무도, 후안무치, 가렴주구, 인명경시 등등 온갖 나쁜 짓을 다 했다는 뜻이다.

    양광의 원래는 시호는 명이었으나, 수나라의 멸망 후 이 인간에게 원한이 많았던 당의 건국 세력들이 양이라고 불러 비하하였는데, 이렇게 비하한 데에는 전 황조를 깎아내려 반란을 일으킨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나, 틀린 소리도 아니었으므로 후대의 공감을 얻어 시호처럼 되어 버렸다고 한다.

    양광이에게 신물나게 시달린 우리 입장에서도 저 시호에 대해 딱히 불만을 가질 것은 없으나,
    양광이의 군사적 능력만은 역대 어느 정복 군주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비의 명을 받긴 했으나 동진을 공격하여 명줄을 끊은 당사자였으며, 아비가 조공으로 만족했던 당대의 강자 돌궐과 토욕혼을 군대를 동원하여 정복한 놈도 이놈이었다.
    또한 부견의 비수대전 참패에서도 알 수 있듯이 100만이 넘어가는 군대를 지휘 통제하는 것은 보통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양광은 2차 전쟁에서 무리없이 해내고 있다.
    그리고 살수 대첩은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 최고, 최대의 승전이나,
    양광이 입장에서는 별동대만 소실된 패배로서, 요동에서의 철수는 패주가 아니라 작전상 후퇴의 개념이 강하였다.
    따라서 바로 이어진 3차 전쟁에서는 단점을 보강하여 고구려를 절체절명의 상태로 몰아 넣었다.
    양현감의 반란이 아니었으면 고구려는 정복되었을 것이다.
    4차 전쟁 또한 비사성을 점령한 내호아가 들판에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나라이니 하루면 정복할 수 있다고 종전을 반대할 정도로 고구려는 피폐해 있었다.

    이 염병할 놈 때문에 죽어나갔던 그 많은 애꿎은 생령들의 명복을 빈다.

    고구려 : 3차 여수전쟁, 더 위험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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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여수전쟁

    2차 전쟁의 참패는 양광을 완전히 미친놈으로 만들었다.
    애비 수문제가 참담하게 실패했던 고구려 정벌을 성공시킴으로서, 
    천하 통일의 방점이자 최대의 치적으로 삼아, 차별성을 부각하고 황위 찬탈의 치부를 가리려고 했었는데,
    애비보다 더 커다란 실패를 맛보았으니 멀쩡했다면 더 이상했겠지만,
    패퇴 후 단 4개월 만인 613년 3월, 4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원정을, 그것도 친정을 감행한 것은 해도 너무한 짓이었다.
    수나라 백성이야 제 나라 임금이 미친놈이라 그렇다지만, 고구려 백성은 도대체 뭔 죄란 말인가?

    2차 침략의 실패를 교훈 삼은 양광은 3차에서는 장수들에게 자유 재량권을 부여하여, 고구려를 효율적으로 몰아붙였다
    왕안공이 이끌었던 선봉대는 신성을 고립시켰고. 본대는 요하를 도하하여 요동성을 공략하였는데,
    초반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요동성이 함락되지 않자, 포대 1백여만 장을 쌓고 이동식 망루를 이용하여 요동성을 내려다보며 공세를 펼쳤고,
    2차 전쟁 때처럼 별동대를 차출하여 압록강 인근까지 접근시켰다.

    요동성은 거의 함락 직전이 되었고 또다시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왔는데, 고구려는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수양제의 휘하에서 보급 임무를 담당하던 예부 상서 양현감이 과거의 원한과 수양제의 폭정에 불만을 품어, 친구인 이밀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수양제는 비밀리에 철군을 결정하였는데, 이때 양제의 측근 참모였던 곡사정이 고구려로 망명하여,
    반란 때문에 수나라 군대가 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고구려는 적의 후미를 공격하여 약간의 피해를 강요하였고.

    3차 전쟁, 고구려에게는 2차 전쟁 보다 더 위험하였다.

    훼손되고 단절된 한양도성 정동 순성길 750m 재건, 주말 한정 제한적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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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가 계획한 정동길 한양도성 순성길 연결사업 개요 (자료=서울시 제공)

    [수완뉴스=서울] 김동주 기자 서울시가 12월 1일부터 매주 주말 시민들에게 한양도성을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한양도성은 일제에 의해 가장 많이 훼손된 구간이자, 사유지로 인해 단절되어 그동안 돌아가야 했던 정동지역 한양도성 750m 구간의 잔존유구, 추정선 따라 보행로를 정비하고 신설해 주말 한정 제한적으로 개방하기로 했다.

    서울시는 ‘한양도성 순성길’ 숭례문 구간 중 정동지역의 돈의문터~창덕여중~이화여고~러시아대사관~소의문터 구간을 잇는 ‘역사탐방로’ 조성을 완료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정동지역 한양도성 순성길을 탐방하려면 배재어린이공원으로 우회해야했지만, 이번 역사탐방로 조성으로 일대를 막힘없이 걸을 수 있게 된다.

    서울시는 이 구간에 포함된 창덕여중, 이화여고 등 당사자들과 지속적인 협의 끝에 주말(토‧일요일)에만 제한적으로 개방하기로 하고, 12월1일부터 ‘한양도성 상시 해설프로그램’과 연계해 개방을 시작한다. 온라인 사전신청을 하면 해설사의 설명과 함께 정동지역의 한양도성 추정선을 따라 탐방할 수 있다.

    참고로 한양도성을 탐방하기 위해서는 사전예약이 필수이다. 탐방신청은 서울 한양도성 홈페이지(http://seoulcitywall.seoul.go.kr/index.do)와 종로구 문화관광 홈페이지(http://tour.jongno.go.kr/tour/main.do)를 통해 탐방 희망일 기준 최소 3일 전까지 신청하면 된다.

    서울시(한양도성도감)와 종로구(관광과)가 운영하는 ‘서울 한양도성 상시 해설프로그램’은 총 4개 구간이 있으며, 매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 출발한다. 정동지역은 숭례문을 출발해서 창의문에 도착하는 4구간(인왕구간) 내에 있다.

    이번에 사업이 완료된 구간은 학교라는 지역 특성을 감안하여 평일에는 탐방객들이 현재와 같이 배재어린이공원과 정동길로 우회하지만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해설사의 인솔을 통해 탐방객들이 이화여고와 창덕여중으로 한양도성 추정선을 따라 탐방할 예정이다.

    새롭게 개방되는 정동지역 한양도성 순성길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1915년에 소의문과 돈의문이 차례로 철거되면서 멸실된 구간이다. 한양도성 전체 구간 중 가장 많이 훼손된 곳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성교회 등 사유지, 창덕여중, 이화여고 등 학교시설로 사용돼 왔고, 이로 인해 이 일대를 탐방하려면 배재어린이공원으로 우회해야만 했다.

    한양도성 순성길은 총 6구간(백악/낙산/흥인지문/남산(목멱산)/숭례문/인왕산)으로, 총 길이는 18.6km이다.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안팎으로 걸으며, 주변의 경치를 즐겼던 ‘순성(巡城)’’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6개 구간은 ▴백악구간(창의문~혜화문, 4.7km) ▴낙산구간(혜화문~흥인지문, 2.1km) ▴흥인지문구간(흥인지문~장충체육관, 1.8km) ▴남산(목멱산)구간(장충체육관~백범광장, 4.2km) ▴숭례문구간(백범광장~돈의문터, 1.8km) ▴인왕산구간(돈의문터~창의문, 4.0km)이다.

    이에, 서울시는 ‘정동 역사재생활성화사업’의 하나로 `17년 6월 “정동지역 한양도성 순성길 연결사업”을 시작했다. 한양도성의 남아있는 성벽과 추정선을 따라 기존의 노후보행로를 정비하고, 보행로가 없는 곳은 새롭게 신설해 역사탐방로로 연결했다. 지난 11월 중순에 공사를 완료했다.

    소의문터~러시아대사관(250m)은 기존의 도로를 정비했다. 이화여고와 창덕여중으로 시민들이 탐방할 수 없었던 300m 구간은 공공보행통로를 새롭게 조성하고 바닥동판을 설치해 한양도성 순성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탐방객들이 알 수 있도록 했다. 이화여고 남문과 창덕여중 후문은 전통적인 느낌으로 디자인한 문으로 교체했다.

    또한 창덕여중 후문 주변에 남아있던 한양도성 성벽을 정비해 시민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했다. 창덕여중 후문~창덕여중 체육관 앞(110m) 구간의 보행로를 정비하고, 창덕여중 체육관~돈의문터(90m) 구간에는 끊어져있던 보행로를 신설해 기존 정동길과 연결되는 우회도로를 조성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번 사업으로 단절돼 있던 정동지역 한양도성 순성길이 연결됨으로써 정동지역의 역사적 장소성을 회복함과 동시에 시민들이 탐방로를 걸으며 한양도성에 대한 기억과 가치를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이 지역의 유일한 한양도성 성벽과 프랑스공사관터 등 정동의 역사문화자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750m의 역사탐방로가 조성돼 정동지역의 역사재생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주 기자

    고구려 : 2차 여수전쟁, 을지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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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여수 전쟁 : 살수대첩

    1차 전쟁에서 패전한 수 문제는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이후 고구려에 대한 원정 계획 일체를 중단시켰고, 백제의 부추김도 무시하며 마치 전쟁이 없었던 것처럼 고구려를 대했다고 한다.
    이는 분노에 이끌리지 않은 냉철한 상황 판단으로, 문제가 확실히 명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604년 애비를 시해하고 새로운 군주가 된 수양제 양광은 전혀 다른 인간이었다. 

    아버지와 달리 오만하고 잔인하면서도 패기와 야심이 남달랐던 양광은, 즉위하자마자 만리장성을 보수했고, 대운하 건설을 재개하여 완성하였으며, 친히 원정을 떠나 서방의 토욕혼과 북방의 돌궐을 토벌하고 남쪽으로는 베트남까지 진출하는 등 그 위세를 떨쳤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동쪽마저 굴복시켜 천하 통일을 완성시키 위해 영양왕에게 입조를 명하였는데,
    고구려는 이전처럼 입조를 피하며 전쟁 준비에 몰두하였다.
    결국 607년, 동돌궐에서 고구려 사신이 마침 동돌궐을 방문한 수양제를 만나는 사건이 벌어졌고, 그 자리에서 양제의 최후통첩을 받게 되었다.

    최후통첩에서 밝힌 대로 양광은 탁군으로 향하였고. 백성들을 징발하여 몇 개월 만에 수백 척의 선박을 건조하는 한편, 군수물품을 모으고 병사를 징집하여 무려 113만이라는 공전절후, 전무후무한 대군을 만들어 내었다.
    보급을 위한 인원까지 포함하면 총 동원 인원은 300만 정도로서 당시 전체 중국 인구의 5%가 훨씬 넘는 숫자였다.
    천하에 명령이 떨어져 탁군으로 병력이 모였고, 7월에는 군량을 수송했는데 이를 위해 꼬리를 물고 이어진 배가 1천 리였다고 한다.
    병사들은 시간을 맞추기 위해 밤에도 걸어야 했기 때문에 피로로 쓰러지는 자가 속출했고.
    60만 명이나 징용되었다는 군수품을 나르는 인부와 차부도 길이 멀고 험해, 할당량인 두 사람 당 쌀 석 섬은 자기들 식량으로도 부족했다고 한다.
    정해진 분량을 나르지 못하면 처벌 받았기 때문에 징용된 사람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도망치면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어서, 천하에 쫓기는 자가 넘쳐났고, 떼를 지어 비적이 되는 자도 많았다고 한다.
    미친 놈 하나 때문에 온 천하가 몸살을 앓은 것이다. 히틀러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612년 음력  1월, 양광은 공식적으로 총공격을 명하였다.
    우중문과 우문술로 하여금 육로로 요동을 공격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내호아에게는 수군 대장의 직책을 맡겼다.
    육군이 요동을 뚫고 고구려의 내지로 침입할 때 내호아의 수군이 이와 합류하여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을 친다는 계획이었다고 한다.
    수양제가 이끄는 부대가 요수에 이르자 고구려 군은 우선 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지켰고,
    양광은 우문개에게 명하여 부교를 만들게 하였는데, 강의 길이를 잘못 예측하여 부교가 딱 어른 한 명 키 남짓하게 모자랐다고 한다.
    도강하던 수나라군은 황당할 수밖에 없었고 고구려는 우왕좌왕하는 적들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으나,
    수나라군이 다시 부교를 만들어 공격하자 이번에는 고구려군이 무려 만 명의 사망자를 내며 대패하였다. 확실히 쪽수에는 장사가 없다.
    도하에 성공한 양광은 100만의 군사로 요동성을 겹겹이 포위했고 맹렬한 공격을 하였지만, 요동성은 강한 저항을 했고 3개월이 지나도 요지부동이었다.
    만일 요동성이 뚫려 100만 대군이 내지로 밀려들었다면, 을지문덕이 제 아무리 신묘한 계책을 쓴다 해도 역부족이었을 것이므로, 요동성이 양광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수비하며 시간을 끈 것이 2차 여수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요동성의 고구려군은 농성하는 도중 상황이 불리해지면 바로 항복 의사를 타진하곤 하였다고 한다.
    수나라군은 황제의 친정이었기에 중요 결정 상황은 황제에게 보고를 해야 했고, 결정을 기다리는 동안 휴전이 불가피하였는데, 워낙 대군이라 보고 단계가 무지하게 많았고,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고구려 군은 그 시간을 정비하는데 사용하였고, 반면에 수나라 장수들은 급하게 싸워야 할 때 감히 멋대로 나서지 못하고 황제의 명을 받느라 기회를 놓치게 되었고.
    수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런 짓을 세 번 연속으로 했다고 하는데, 양광은 대국 황제의 관대함을 보이기 위해 알면서도 속아주었다고 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요동성은 함락을 거부하고 있었고, 시간은 가고. 답답한 마음에 방어선 상의 다른 성들도 건드려 보았지만 단 하나의 성도 함락을 시키지 못하였다. 요동 일대, 고구려 요새들의 격렬한 저항이 수양제의 본래의 작전에 큰 차질을 주었던 것이다.
    한창 생업에 종사해야 하는 국가 전체, 성인 남자의 1/4 가까이를 끌고 와서 요동성에서 시간만 끌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다급해진 양광은 평양 직공을 위해 우중문과 우문술을 대장으로 하는 별동대를 구성하게 하였고, 9개 군 35만 병력을 차출해 평양 직공을 명령하였다.
    각지의 방어선을 우회하여 수군과 합류해 평양성을 공략하는, 일격에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시도였는데,
    이는 고구려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으며, 고구려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음을 의미하였다.35만의 별동대, 이 숫자를 별동대로 운용할 수 있는 군대, 전무후무할 것이다. 
    아무튼 숫자가 많으니 엄청난 보급이 필요하였고, 물량이 많으니 진격의 속도에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백일 분의 식량을 병사 개개인이 짊어지게 하고 빨리 가라고 하였는데, 이번에는 이게 너무 무거웠다.
    그렇지 않아도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스트레스가 심한데, 길은 험하고 짐까지 무거우니, 지휘부의 금지 명령도 불구하고 너도 나도 보급품을 버리게 되었고, 길을 절반 정도까지밖에 못 갔는데 식량이 간당간당해졌다고 한다.지쳐 죽는 게 빠를지, 굶어 죽는 게 빠를지 모르는 상황이 된 것이다.
    위인 을지문덕은 당연히 청야 전술로 불난 집에 부채질 하였고. 항복 사신을 빙자하여 직접 적진을 찾아가 적정을 탐색하기도 하는 등 별동대의 수뇌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거짓 항복을 눈치 챈 우중문의 재촉으로, 배고프고 지친 수나라 군대는 정처 없이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는데,
    거짓말에 속아 교전 중인 적의 총사령관 잡을 기회를 놓쳤고, 별동대의 허실까지 적나라하게 노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뜩이나 식량도 부족한데 괜히 시간만 끈 꼴이 되었으니 얼마나 열불이 났을까?
    적군의 지친 기색을 눈치 챈 을지문덕은 이들을 더욱 피곤하게 만들기 위해 싸움을 걸었고, 싸울 때마다 거짓 패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일곱 번 모두 지는 일도 있었고.
    수나라군은 어쨌든 그동안 목말랐던 승리를 계속하여 맛보았고, 진군도 할 수 있어 어느 정도 사기가 올랐으나, 편하게 진군하는 것이 아니라 싸우면서 가는 것이니, 피로도 피로이지만 시간이 말도 못하게 걸렸다.

    육군이 이렇게 꾸물거리는 동안 평양 인근에 먼저 도착한 수군은 조급해졌다.
    수나라의 수군은 영양왕의 아우 고건무가 지휘하는 병력을 격파하고 평양성에서 6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상륙하는데 성공하였고,초전의 승리에 흥분한 내호아가 육군의 합류를 기다리지 않고 4만의 병력으로 평양성 직공에 나섰는데, 그만 고구려군의 공성계에 걸려 전멸해 버리고 말았다.
    왕제 고건무는 500기의 결사대로 적진을 휩쓸었고, 내호아는 겨우 탈출하여 대동강 하구로 후퇴하였다고 하는데, 다시는 강을 거슬러 올라오려고 하지 않았다 한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수군의 패퇴 소식은, 쫄쫄 굶고 있던 별동대에게는 지옥문이 열리는 소리처럼 들렸을 것이다.
    지칠 대로 지친 우중문의 별동대는 평양성까지는 어찌어찌 도착했으나, 보급은 바닥이 난지 오래고 수군과의 합류는 물 건너 간,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이때 을지문덕의 편지가 도착하였는데, 마지막 거짓 항복 편지였으나 그 의미가 이번엔 달랐다. 철군의 명분이 되어준 것이다.
    우중문은 별 수가 없음을 깨닫고 퇴각하기 시작하였는데, 참고 참았던 우리의 을지문덕 장군이 반격을 시작하였다.
    7월, 수나라 군대가 살수에 이르러 강을 반 쯤 건넜을 무렵, 갑자기 고구려 군대가 뒤에서 공격을 하였고, 별동대의 모든 부대는 한꺼번에 무너져 버렸다.
    수나라 군대에서 살아남은 병력은 하루에 450여 리를 달아났다고 하는데, 전투는 아예 머리 속에 없었을 것이고 그저 제 한 목숨 살리기 위해 뛰고 또 뛰었을 것이다.
    30만이 넘는 별동대 9군 가운데 살아남아 돌아간 병력은 겨우 2천 7백여 명이었고 수만을 헤아렸던 군수와 기계는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살수 대첩이다.

    살수 대첩의 참변을 접한 양광은 크게 노하여, 돌아온 우문술, 우중문, 내호아 등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이들을 모조리 삭탈관직한 후에 귀환하였는데,
    을지문덕에게 농락 당한 우문술은 쇠사슬로 묶어 죄수 취급을 하였고, 을지문덕을 그냥 놔주게 만든 주범인 유사룡을 극형에 처했다고 한다.
    수나라가 8개월간 그 엄청난 인력과 물자를 소비해가며 얻은 소득은 요수 서쪽의 무려라를 함락시키고, 요동군과 통정진을 설치한 것 뿐이었고, 그 외에는 성 하나도 제대로 함락시키지 못하고 병사들만 잔뜩 죽이고 퇴각하였으니, 양광… 참으로 죄 많은 놈이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도 비록 최고의 승리를 얻었다고 할 수 있으나, 워낙 힘에서 차이가 나는 상대였기에 공성계, 청야 전술 등 제 살 깎아먹는 전술에 의존 할 수밖에 없었고,
    요동과 별동대의 이동 구간 그리고 평양 인근은 초토화 되었으며, 다른 지역도 인력 차출, 물자 공출 등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살수대첩에서 수공을 썼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뻥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의 공학 기술로 30만을 수장시킬 수 있는 댐을 만들어 적시에 터뜨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별동대는 수공으로 무너진게 아니라, 패주나 다름없는 회군 도중에 군사적으로 가장 취약한 도하 작전을 하다가, 전력을 다한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가 정확할 것이다.
    어떻게 이겼든, 한 번 싸움에 30만을 소멸시킨 살수대첩은 우리 역사상 최대의 승전이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일을 해내신 위대한 분에 대한 기록은 매우 부실하여 출생지, 생몰연도, 가문 등 기본적인 사료도 없다.
    2차 전쟁이 시작될 때 느닷없이 출현하여 총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는 종전 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데,
    이로인해 누구는 명재상 을파소의 자손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온달처럼 평민줄신의 인재라고도 하고, 심지어는 귀화한 이민족 출신라는 설도 있다.
    기록이 없으니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구조이나, 뭐가 되었건 을지문덕 장군이 우리 민족사에 찬란히 빛나는 별이라는 사실만은 불변일 것이다.

    고구려 : 1차 여수전쟁, 강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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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침입

    수나라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로서,
    대대적으로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을지문덕에게 농락당해 쫓겨났고, 그 여파로 망해 버려,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나 한껏 충족시켜 주는 역할을 한 그저 그런 중국 왕조들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나, 그렇게 만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후한 말기부터 시작된 400년 간의 중원의 혼란을 종식시켰를 뿐만 아니라, 대운하를 완성하여 대륙의 동질성을 높였고, 지방에까지 관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균전제를 실시하여 소규모 자작농의 숫자를 크게 늘렸고, 율령을 확립하였으며, 과거제를 비롯한 제도를 정비하여, 중국의 후대가 감사해야 할 업적을 많이 남긴 나라이다.
    양제 때 고구려 침공을 위해 동원한 병력과 인원의 규모만 보더라도, 주변국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엄청난 국력을 자랑하는 강대국이었다.

    중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완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빼어난 내치로 나라를 안정시킨 당대의 걸출한 영웅 문제는 수나라의 미래를 위협할 수 있는 가상의 적으로 돌궐과 고구려를 상정하였다.
    수나라가 가진 그 엄청난 힘을 생각만 해도 아찔했을 고구려는 평원왕 시절부터 계속해서 조공을 바치는 한편 군비를 확충하며 전쟁에 대비하였다.

    쇠락하던 고구려를 부흥시킨 평원왕이 서거하고, 수나라의 천적 영양왕이 590년 즉위하였을 때,
    수나라는 돌궐과 토곡혼은 물론 베트남, 백제, 신라 등 주변국들을 신하국으로 삼고 조공을 받는 등 기세가 등등하였는데, 고구려는 조공을 하기는 하였으나 완전 굴복과는 거리가 있었다.
    수문제는 고구려 정벌을 위해 수륙군 30만 명을 준비하는 한편,  매우 무례한 서신을 보내어 완전 굴복을 요구하였다.
    이에 분노한 영양왕은 고구려의 힘을 과시하고 수나라의 반응도 보기 위해,
    강이식이 이끄는 기병 1만으로 임유관을 공격하였으며, 영주총관 위충을 살해하고 수나라의 북방 요충지를 파괴하였다.
    몰던 쥐에게 콧등을 물린 고양이 꼴이 된 수문제는 대노하여,
    598년 다섯째 아들 한왕 양량과 장군 왕세적을 원수로 하는 30만 대군을 동원, 육지와 바다 양면에서 요동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작전 미숙이었는지 지정학적으로 어쩔 수가 없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군사 행렬과 보급로가 수백 리에 걸쳐 늘어지게 되었는데,
    고구려군은 당연히 보급선부터 끊으려 했으므로 수나라 군대는 결국 군량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때 맞춰 장마가 시작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발생하는 바람에 수나라의 육군은 거의 무력화되었고 수군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는데,
    믿었던 수군마저 태풍을 만나 싸우기도 전에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고구려판 가미가제였다.
    기진맥진한 수군은 어찌어찌 요수에 도착할 수는 있었으나, 이미 엉망이 된 육군과 뭘 어찌해 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굶주리고 병들고 지친 30만 대군은 강이식이 이끈 정예 5만의 고구려군에게는 맛 좋은 먹잇감에 불과하였고,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기막힌 꼴을 본 수문제는 길길이 뛰었으나 결과는 결과,
    자신을 요동 분토의 신하라고 칭하는 영양왕의 립 서비스를 못 이기는 척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1차 전쟁은 이후 이어진 2차에 비해 규모가 작고 전투다운 전투도 없어 본격적인 전쟁의 개막 정도로 취급되지만,
    운이 좋았든, 상대가 실수를 했든, 당대의 영웅 수문제가 다년간 준비한 3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군에 단호히 맞서 승리한 것이므로, 그 자체로서 의미가 상당하다.
    이는 고구려가 동북아의 강자로 다시 복귀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수의 입장에서는 요동의 회복이 물건너 갔음은 물론 전통적으로 중국의 영토인 요서지역까지 고구려의 영향권에 들어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단한 승리였다.

    [사진] 평창군, 진부비행장 폐쇄로 5년 만에 고충민원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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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평창군] 20일, 평창군이 5년만에 진부비행장을 폐쇄해 고충 민원을 해결했다고 밝혔다.

    고구려 : 26대 영양왕, 마지막 명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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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는 대원, 평원왕의 맏아들로 25년 동안 태자로 재직하였고,
    590년 왕위에 올라 즉위 초반 3년간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책봉을 받고, 조공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5년 간은 관계가 냉랭했는지 사신을 교환한 기록이 없고,
    즉위 8년 째에 비로소 조공을 재개했으나,
    9년에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치기 위해 군대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1만의 말갈 기병으로 요서 지역의 임유관을 공격하였다.
    점령하지는 못하였다.

    고구려의 선제 공격에 열받은 수문제가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요동으로 쳐들어 온 것이
    1차 여수 전쟁인데,
    다행히 장마와 질병이 수나라 군대의 발목을 잡았고, 강이식이 분전하여 승리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방해하고 재 침공을 부탁하는 등 밉상짓을 하자,
    격노하여 바로 백제를 침공하였고,
    603년에는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나제동맹과 티격태격하는 동안 문제의 인물, 수양제가 등극하였다.
    양제는 돌궐을 정복하고 고구려마저 굴복시키기를 원하였는데,
    수나라의 침입을 예상한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여 배후의 위협을 차단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원왕 때 잃었던 아리수 이북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재위 23년째에 113만 여명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군을 동원한 수양제의 침략을 받았으나,
    을지문덕의 활약으로 물리쳤고,
    이듬 해에 미련을 못버린 수양제의 재 침공을 받아 다시 위기에 몰렸으나,
    다행히 수나라에서 양현감의 반란이 발생하여 이 염병할 놈들이 스스로 물러났다.
    다음 해에도 아직 정신을 못차린 양제의 침입을 또 받았으나, 
    이 때는 수나라가 반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여서 잘 달래어 돌려보냈다.
    재위 29년 수양제가 피살되면서 수나라가 멸망하였는데,
    그로부터 6개월, 618년 음력 9월에 영왕왕도 서거하여 고단하였으나 위대했던 삶을 마쳤다.

    통일된 대륙의 힘은 무서웠다.
    2차 전쟁 시 동원 인력은 병사만 113만, 다른 부용 인력까지 합치면 300만이 넘는다는 연구가 있는데,
    300만이면 당시 고구려의 전체 인구와 맞먹는다.
    이 엄청난 힘은 고구려의 전통적인 소수 정예 전투 집단으로 막을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으므로,
    저항한다는 것은 당랑거철의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하였으나,
    고구려는, 을지문덕을 비롯한 당시 전쟁 지휘부의 뛰어난 능력과,
    귀족, 평민할 것 없이 일치 단결한, 고대사에 드문 거국적 저항으로,
    이 전대미문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였다.
    이는 평원왕과 영양왕의 인자한 정치와, 수나라 성립과정에서 고구려로 귀화한 세력 등이 합작하여
    이루어낸 기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양왕은 거창한 수나라의 공격을 막아내어,
    광개토대왕 못지 않게 민족의 자존심을 한껏 고양시킨 분으로,
    풍채가 준수하고 쾌활하였으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한 성군이었다.

    태학박사 이문진이 유기 100권을 압축해 신집 5권을 편찬하고, 담징이 호류사 금당 벽화를 그린 것도 이 시기이다.

    고구려 : 25대 평원왕, 딸 바보 중흥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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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을 겪고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고구려의 왕 노릇하느라 전전긍긍했던 양원왕의 맏아들로서,
    출생년도는 모르나, 양원왕이 요절한 듯하니 아마도 10대에 아버지의 뒤를 이었을 것이다.

    휘는 양성, 559년 왕위에 올라,
    농상을 장려했으며, 먹는 음식을 줄이고 선대부터 축조하던 장안성 공사를 일시 중단하기도 하는 등
    근검절약하며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였고.
    고구려를 거덜 낸 귀족들 싸움에 넌더리가 났는지 평민 출신의 사위를 맞이하였다.
    사위 온달은 바보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게,
    야전에 능한 훌륭한 장수로서,
    수나라의 전신인 북주와 배산의 들판(현재의 내몽골 지역)에서 싸워 승리하였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신라를 막아내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이 기특한 사위의 지원 덕분에,
    평원왕은 어진 정사를 펼쳐 민심을 수습하고 국력을 회복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북주는 쿠데타로 망하고 수나라가 되었는데,
    초대 황제 수문제는 근근히 유지하던 남조의 숨통을 끊어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내치로,
    후한 말기 이래 400여 년을 지속한 중원의 혼란을 종식시킨 영명한 군주였다.
    대륙의 강력한 통일 왕조의 출현은 고구려를 비롯한 인접 국가에는 악몽과도 같은 일이고,
    고구려에 복속했던 거란의 일부가 수나라에 투항하는 등, 정세가 불안해지자,
    신라에 대한 공세를 중단하고,
    수와의 전쟁 준비를 시작하였으며, 장안성으로 궁성을 옮겼다.
    수습된 민심 및 회복된 국력과 더불어 이러한 대비는,
    대륙의 계속 되는 침략에 저항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일찌감치 실증한 분으로,
    딸자식의 땡깡에 속수무책인 평범한 아버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나,
    평민 출신을 중용하여,
    제 밥그릇 싸움에 여념이 없던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국력을 결집시켰으며,
    같은 평양에 위치하더라도, 전시용과 평시용으로 이원화되어 있던 기존의 궁성에서,
    보다 기능적인 장안성으로 이주하고 국정을 다잡아, 민심을 다독였고 나라를 중흥시켰다.
    비록 걸출한 정복군주 진흥왕에게 한강 유역은 물론 함경도의 일부까지 빼앗기는 치욕을
    맛보기는 했으나,
    통일된 대륙의 무서운 힘을 감지하고 나라를 안정시켜 후대의 위협에 대비한 업적은
    충분히 평가받을만 하다.
    평원왕이 고구려를 중흥시키지 않았다면,
    수, 당의 침입에 대한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은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32년간 재위하며, 진흥왕과 수문제라는 당대의 영웅 둘을 상대하면서도,
    고국천왕의 재림처럼, 선정으로 쇠퇴기로 접어들었던 고구려를 동북아의 강자로 되돌린 평원왕,
    명군이었다.

    고구려 : 24대 양원왕, 안쓰러운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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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는 평성, 545년 왕위에 올랐다.
    일본서기에는 즉위 당시 나이가 8세로 되어있으나,
    골육상쟁을 벌인 그 평성이라면, 533년에 태자가 되었으므로 최소한 12살은 넘어야 한다.
    뭐가 되었건 어린 나이에 옥좌에 앉은 듯하다.

    치세를 보면, 남조와 교류를 중단하고 북조에만 조공하였다.
    교통비 아끼려고 그런 것은 아닐 것이고, 나라의 힘이 약해져 북조의 눈치를 보느라 그랬을 것이다.
    즉위 3년에 백암성과 신성을 수리하여 전쟁에 대비하였다. 신흥 돌궐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나 보다.
    4년에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신라가 백제를 도와 실패하였고,
    6년에 백제에게 도살성을 빼앗겼고, 신라에도 2개 성을 빼앗겼다.
    7년에는 돌궐이 침입하여 신성과 백암성에서 싸웠으며 군사 일만을 동원하여 패퇴시켰으나, 
    이 기회를 틈탄 신라에게 10성을 빼앗기며 한강 유역을 잃었다.
    8년에는 장안성을 축조하여 수도의 방비를 강화하였다. 나제 동맹 때문에 불안했었나 보다.
    10년에는 백제 웅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3년에는 환도성 간주리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구 귀족 세력과 신진 세력 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재위 15년 만에 아직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전통의 우방 유연은 돌궐에 밀려 망하기 직전이었고, 북제는 이전 북위와 다르게 고구려를 얕보았으며,
    나제동맹은 점점 위력을 더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성을 수리하고 돌궐의 공격을 막아내었으며, 장안성을 축조하고 나제동맹과 끊임없이 대립하였며,
    반란도 진압하였다.
    북제의 사신 최유에게 두들겨 맞는 수모를 당했다는 야사가 전해지는데,
    그럴 리야 없겠으나,
    승려 혜량이 나라가 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거칠부에게 망명을 요청한 것이 이 시기이므로,
    고구려의 내부 사정 및  국제적 위상이 형편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불미스러운 사건 와중에 아버지가 사망하여,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니 무엇인들 제대로 할 수 있었을까 만은, 
    주어진 상황에서 나름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
    옥좌에 앉아 불안에 떨었을 어린 왕, 안쓰럽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 : 23대 안원왕, 쇠퇴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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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는 보연, 체구가 장대하고 도량이 넓었다고 한다. 
    안장왕이 로맨티스트답지 않게 후사도 없이 서거하여, 531년 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남북조와는 전통의 조공 외교를 이어 갔고, 끊임없는 자연 재해에 시달렸으며,
    재위 3년째에 아들 평성을 태자로 삼았고, 재위 10년째에 백제의 침공을 막았으며,
    재위 15년 만에 사망하였다.

    치세를 평가하기엔 기록이 심히 빈약한데,
    이냥반 치세의 어두운 이야기가 일본서기에 전한다.
    구라로 떡칠 한 일본서기에서 그나마 믿을 만하다고 하니 인용을 해보면,
    왕은 정부인에게서는 왕자를 얻지 못하고,
    후궁인 중부인, 소부인에게서 각각 아들을 하나 씩 얻었는데,
    그 중 중부인의 아들 평성을 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소부인 측에서 반발하여, 
    왕이 병으로 눕자 중부인 측과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중부인 측의 두목은 추군, 소부인 쪽은 세군이었다고 하는데 둘 다 외척 세력이었던 듯하다.
    이 두 세력은 궁문에서 치열하게 맞붙었고, 추군 측이 승리하였는데,
    승리한 추군은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를 만난 양, 
    3일간 잔당을 소탕하여 약 2000여 명을 살해하였다고 한다.
    그 와중에 병이 악화된 것인지, 칼을 맞았는 지는 모르나 왕도 사망하였고.

    추군은 국내성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던 귀족 불교세력이고, 세군은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한 신진 불교세력이었다는 설도 있는데, 
    뭐가 되었건 안원왕 시절, 지배층의 분열과 암투가 매우 심하였고, 따라서 왕의 권위가 형편없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지배층이 이 꼬라지면 민심 이반은 불 보듯 뻔한 것이고, 거기에 자연 재해까지 겹친다면 나라가 엉망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을 것이다.
    쇠퇴기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고구려 : 22대 안장왕, 능력있는 로맨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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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는 흥안, 문자명왕의 아들로 519년 왕위에 올라 중국의 남북 양조 모두와 교류하였다.
    재위 5년에 백제를 공격하였고,
    재위 11년 오곡에서 백제를 크게 이겼다. 포로는 2000.
    재위 13년째에 서거하였다.

    기록을 요약하면 이렇게 빈약하여, 고구려 쇠퇴기의 시작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으나,
    요서까지 영역을 확장하면서 북위의 용성을 약탈하였고, 
    백제와 빈번한 전쟁을 벌여 한강 유역을 확보하는 등, 문자명왕 보다 더 공격적이었고 실적도 좋았다.
    멀리있는 남조뿐만 아니라, 수시로 변경을 약탈당하던 북위도
    고구려를 높이 평가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고 하니,
    당시의 위상이 녹녹치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전성기는 안장왕까지 연장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

    전해 오는 일화에 따르면,
    태자 시절, 한성 부근에서 첩보 활동을 하다가 한주라는 미녀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훗날을 기약하고 헤어졌는데,
    귀국하여 고구려에 있는 동안, 
    그녀의 미모에 홀린 고을 태수가 첩으로 삼으려 했고, 거부하자 죽이려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듣자 부하 장수를 파견해, 
    잔칫날에 태수를 참살하고 이 의리 있는 미녀를 구하였으며,
    뒤이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가 한강 유역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춘향전과 거의 같은 스토리이다.
    또한 단심가는 한주가 태수의 협박과 유혹을 거절하면서 쓴 시를 정몽주가 차용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이 분의 능력과 로맨틱한 면이 부각되는 일화라 하겠다.

    안장왕의 죽음이 암살이고 아들인 복귀군은 일본으로 망명해 코마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로맨티스트 안장왕이 후사를 못 남겨, 동생이 뒤를 이었다는 것이 좀 어색하여 그럴 것 같기도 하지만,
    워낙에 신뢰도가 바닥인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기록이라, 왜놈들 창작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