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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5일 오전 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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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페이지 73

    백제 : 24대 동성왕, 회복의 기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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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4 대 동성왕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로, 해구의 반란을 토벌한 진씨 세력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어린나이에 등극하여 멋도 몰랐던 삼근왕과는 다르게, 신진세력을 대거 등용하는 등 왕 노릇을 제대로 하였다.
    누대의 대 귀족이자 반정 공신이나 다름없는 진씨를 다루는 솜씨로 보아 대단한 정치력을 지녔던 것 같다.

    481년(동성왕 3년)에는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한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을, 신라 및 가야와 연합하여 격퇴했으며,
    백제로 쳐들어 온 북위군을 격파했다….는데, 요서백제? 믿기도 어렵고 안 믿기도 그렇고.
    아무튼 요서에 친 백제 세력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백제와 왜의 관계처럼.
    그리고 오랜만에 말갈이 튀어 나오는데,
    그사이에 고구려에 복속되었었는지, 아니면 어디 산골에 짱 박혀 있었는지는 모르나,
    얘들도 이 땅에서 굳세게 살아온 한반도 원주민임에는 틀림없다.

    494년과 495년에는, 두 해에 걸쳐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침공해오는 고구려의 군대를 신라와 연합하여 격퇴하였고,
    498년에는 탐라국을 복속시켰다.

    개로왕 이후 단절된 중국(특히 남조)과의 관계를 회복시켰고,
    신라의 소지왕과 결혼동맹을 맺었으며,
    가야의 혼란에 개입, 가야연맹에 대한 세력 확대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회복된 군세를 바탕으로 다시 한강 근처까지 진출하였다.

    웅진천도 이후 계속된 혼란을 수습하고, 실추된 왕권과 국제적 위상을 어느 정도 살려내어, 
    무령왕 시기의 재 중흥의 발판을 만드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말기에 이르러서는 점차 향락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고 놀기만 했다고 한다.

    501년 최측근 백가에게 살해당했는데,
    백가는 동성왕을 살해한 후 반란을 일으켰으나, 무령왕에게 저항 없이 항복하였고 처형되었다고 한다.
    뭔가 냄새가 나지만 기록이 없다.
    재위는 23년.

    백제 : 23대 삼근왕, 계속되는 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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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대 삼근왕

    문주왕의 아들로 13세라는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부터, 문주왕을 시해한 해구로 대표되는 해씨 세력이 국정을 농단하였고,
    급기야는 연씨 세력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진씨 세력이 진압하였으나, 삼근왕은 재위 3년째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동성왕의 사주를 받은 진씨 세력이 암살한 것으로 보인다.

    어린아이가 멋도 모르고 왕이 되어 어어어… 하다가 죽은 꼴이다.

    백제 : 22대 문주왕, 치욕의 웅진 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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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2 대 문주왕

    개로왕의 아들 또는 동생이라고 하는데 동생이 맞을 것이다.
    백제의 웅진 시대를 연 왕으로서,
    고구려가 한성으로 쳐들어왔을 때, 일찌감치 탈출하여 신라의 자비 마립간에게 1만의 구원병을 얻어 돌아왔으나,
    이미 위례성은 함락되어 불타고 있었고 개로왕은 참수된 뒤였다.

    이는 한강 유역 및 한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문주왕은 웅진으로 이동하여 왕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는데,
    백제의 678년 역사 중 477년간 수도였던 한성의 상실로 인한 불가피한 천도는,
    지배세력의 재편을 가져 와, 그동안 떵떵거리던 대귀족 진씨, 해씨 등 한성을 기반으로 하는 세력들이 꺾이는 계기가 되었고, 사택씨, 연씨 등의 지방 세력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패전으로 인해 왕실이 권위는 땅에 떨어져 버렸고,
    비자발적 천도에 따른 지배계급의 혼란 또한 피할 수 없었으므로,
    백제는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셈이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아무 일이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결국 문주왕은 재위 3년째 되는 해 병관좌평 해구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되었다.

    성품은 부드러웠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백성들 또한 그를 사랑하였다 한다.
    태평기에 왕 노릇을 했다면 좋았을 텐데, 아무튼 안습인 왕 또 하나 추가다.

    백제 : 21대 개로왕, 목이 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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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대 개로왕

    고구려의 첩자에 속아 재정을 낭비하고, 바둑이나 두다가 나라를 말아먹고, 전쟁터에서 목이 잘린 이름도 괴로운 개로왕,
    도미 설화의 음탕한 폭군의 당사자로 의심받기도 하는,
    허랑 방탕, 황음무도, 어리석음의 대명사로서, 백제 사상 가장 찌질한 이미지의 왕.
    이런 상태의 왕이라면 가쉽도 풍부하고 기록도 많아야 정상일 텐데,
    의외로, 즉위 14년까지는 외국의 사서에 몇 줄 나타나는 것이 전부이다.

    기록이 부족하므로, 심증만으로 추정을 해보면,
    아신왕 사후 진씨, 해씨를 비롯한 대 귀족들은 고구려에 대항할 의지를 잃었고,
    고구려에 거의 복속되어있는 상황이었으나, 오로지 왕가만이 복수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을까?
    비유왕 이전까지는 국력이 미약하여 고구려의 반 속국이라는 굴욕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으나,
    비유왕대에 이르러 어느 정도 국력이 회복되었고, 비슷한 처지였던 신라 또한 고구려에 대해 자주독립을 꿈꾸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동병상련의 비유왕과 눌지왕은 나제 동맹을 맺었고, 연합하여 고구려에 적대적인 정책을 취하였으나,
    대귀족들은 아신왕대의 악몽이 떠올랐을 것이고, 필연적으로 갈등하였을 것이다.

    고구려의 사주를 받았는지 소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매국적인 세력에게 비유왕은 살해되었고,
    백제를 확실하게 제압할 필요가 있었던 고구려는 이틈에 수도를 함락시키고, 본보기로 비유왕의 시체를 방치하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개로왕이 정상적인 왕 노릇을 할 수 있었을 리는 없고,
    들판에 버려진 아버지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는 상황을 저주하며 절치부심하여,
    아버지의 유산 나제동맹을 기반으로 왕당파를 규합, 대 귀족들을 눌렀을 것이다.
    이 과정이 쉬웠을 리는 없으므로, 개로왕의 즉위 초반 14년은 신산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비유왕의 시체는 들판에 버려진 채 20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즉위 15년(469년)부터 개로왕은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게 하는 등 고구려에 다시 칼을 들었는데,
    18년(472년)에는 외교적으로도 수단을 부려, 북위에 고구려 정벌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었다.
    소위 개로왕 국서 사건인데, 동문선에도 수록되어 있는 명문이라고는 하지만,
    이 명문이 북위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하였고,
    대신 장수왕의 분노와 침략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에서 첩자로 보낸 승려 도림의 진언에 따라.
    왕성의 성곽과 궁실, 누각, 활 쏘는 사대 등을 짓고 선왕의 능묘를 수리하는 등,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국고가 고갈되고 백성들이 곤궁에 빠졌으며,
    이를 틈타 쳐들어온 고구려 군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어 개로왕 자신도 죽음을 맞았다고 하는데,
    그 무리한 토목공사라는 것의 항목을 살펴보면,
    고구려와 전쟁을 준비하거나, 궁궐을 수리하고 20년간 방치 되었던 부왕의 시신을 수습하는 등의 일들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고 해야만 할 일이기도 했다.
    궁궐의 정원에 사치를 부렸다는 기록도 있으나,
    진사왕대에 완성된 정원에 장식 좀 더했다고 국고가 탕진되지는 않았을 것이고,
    도미설화는 말 그대로 설화이므로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아무튼, 475년, 고구려 군이 공격해오자 개로왕은 왕자 문주를 남쪽으로 도피시키고,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수십 기를 거느리고 성을 빠져나왔지만,
    백제 출신의 고구려 장군에게 붙잡혀 아차산 아래에서 피살되었다.
    이 백제의 배신자는 먼저 개로왕에게 절을 한 뒤, 침을 뱉고 목을 베었다고 한다.
    쌓인게 많았었나 보다.

    피신한 문주는 신라로 도망쳐 구원군 1만을 끌고 돌아왔으나,
    위례성은 7일간의 공방전 끝에 불에 타, 재만 남은 상태였다.
    왕당파 귀족들도 원병을 이끌고는 왔으나 신라의 원병보다도 늦게 도착했다고 한다.
    백제의 중앙과 지방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개로왕, 그 속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재위 21년 만에 나라를 완전히 말아먹으며 한성시대의 막을 내렸다.

    백제 : 20대 비유왕, 까마귀 밥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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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대 비유왕

    구이신왕의 맏아들 또는 전지왕의 서자라고 하는데,
    구이신왕이 26살에 죽었으므로 그 맏아들은 아닐 것이다.
    뭐가 됐건 29년간 재위했는데, 용모가 아름답고 언변이 좋았으며,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신라의 눌지 마립간과 그 유명한 나제 동맹을 맺는 등,
    외교에도 상당한 재능을 발휘하였으나, 한강에 흑룡이 나타나자 갑자기 죽었다고 한다.
    살해되었을 것이다.

    비유왕이 죽자 바로 고구려의 침입이 이어졌는데,
    나제 동맹에 의해 신라에서 구원군을 파견하였으나, 이미 성이 함락된 뒤였고,
    비유왕의 시체는 들판에 버려져 20년 동안 방치되었다.
    그래도 명색이 왕인데 이 무슨?
    기록이 없으므로 마음껏 상상을 해보면,
    후대의 개로왕이 유력 귀족의 대명사인 진씨, 해씨와 격렬한 갈등을 벌이는 것으로 보아,
    이 참사의 원인은 귀족들이 제공하였을 것이고, 이러한 귀족들과의 갈등은 비유왕의 반고구려 정책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수왕의 강력한 고구려에 맞서려는 비유왕은, 귀족들에게 아신왕대의 악몽을 떠올리게 했을 것인데, 설상가상으로 나제동맹까지 맺어 고구려의 반감을 증폭시켰으므로,
    귀족들은 비유왕을 제거하는 것만이 자신들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일종의 반역질이긴 하나, 원래 귀족동맹체의 성격이 강했던 백제에서,
    귀족들에게 왕이란 무조건적인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동맹의 대표자 정도의 의미였으므로,
    귀족들의 이익에 반하는 약한 왕은, 동지가 아닌 언제든 제거가 가능한 적일 뿐이므로,
    별 죄책감도 없었을 것이다.

    뭐가 어찌 되었건, 매국적인 일부 귀족들이 고구려와 내통하여 비유왕을 살해하였을 것이고,
    왕당파들은 이에 반발하였을 것이므로,
    결국 내분에 휩싸인 백제는 고구려의 침입에 별다른 저항을 못하였고.
    고구려는 경고의 의미로 비유왕을 들판에 버려 까마귀밥이 되게 하였다…가 아닐까?

    뭐가 어찌 되었건 백제는 아신왕대에 이어 또 한 번 망한 셈이었다.

    백제 : 19대 구이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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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대 구이신왕

    전지왕의 맏아들로 8년간 재위하였다.

    이 양반의 삼국사기 기록은 단 두줄이다.
    즉위했다.
    죽었다.
    구이 요리만 하며 살았는지 원…
    다른 나라 기록을 봐도 사신 보내고, 무역하고 정도 밖에 없다.

    16세 즉위하여 26세에 사망하였으니 순탄하였을 리는 없지만 알 수가 없다.

    백제 : 18대 전지왕, 살얼음판 같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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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대 전지왕

    처절한 인생을 살다간 아신왕의 아들로,
    아신왕이 급사할 당시 일본에 체류 중이었는데,
    적대적 볼모가 아니라 일본에 군사를 구걸하기 위해 보내졌던 태자였으므로
    귀국하여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아신왕의 급사는 아마도 암살일 것이다.
    나라를 거덜 내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왕이란, 귀족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으므로.
    결국 반대파에 의해 제거 되었을 것이고.
    당연히 그 아들의 왕위 계승 또한 순조로울 리 없었을 것이나, 
    치열한 암투 끝에 다행히 전지왕 지지파의 승리로 간신히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전지왕 때의 외척은 해씨로서,
    선대왕까지 이어진 진씨의 왕비 독식이 깨어진 것으로 보아,
    아신왕에게 만정이 떨어진 진씨가 쿠데타를 주동 또는 묵인하였고,
    이에 맞선 해씨가 왕당파가 되어 전지왕을 옹립하였다는 가정을 해볼 수 있다.

    해씨의 지원으로 어렵게 왕위에 올랐지만, 아버지가 너무도 알뜰히 국력을 소모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고구려와는 싸워볼 엄두도 못 내었고, 그저 내정을 살피고 외교에 치중하며 16년간 재위했다.

    살얼음 판 같은 인생이었을 것이다.

    백제 : 17대 아신왕, 근성의 백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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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대 아신왕

    침류왕의 아들로, 총명하고 말 타기를 즐기는 비범한 사람이었고,
    숙부에게 빼앗겼던 왕위를 절치부심하여 되찾은 매우 근성 있는 인물이기도 하였다.
    아신왕은 어려서 왕위를 빼앗긴 후 왜로 피신한 듯 보이는데,
    진사왕이 광개토대왕에게 두들겨 맞아 영토를 잃고, 정치적 입지도 약화된 틈을 노려,
    왜의 지원 하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왜에서 귀국하는 길에 신라, 가야, 왜의 네트워크를 공고히 하는 등 외교적 수완도 뛰어났으며,
    정권을 장악한 후에는 백제 최대의 귀족 진씨 가문과 손을 잡고,
    진사왕이 날려먹은 경기 북부 및 황해도 영토를 탈환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즉위 후 거의 매년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별 성과는 없었고, 광개토대왕의 분노만 사게 되었는데,
    고구려의 반격에 결국 수도가 함락되었고 아신왕은 신하의 맹세를 하였으며,
    왕의 아우와 대신 10 명이 볼모로 끌려가고, 영토를 잃는 참담한 결과를 맛보아야 했다.
    이 지경이면 완전히 망한 꼴인데, 아신왕은 굴복하지 않았다.

    고구려에 복수하기 위해 군비를 축적하였고 대규모 징집을 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백성들은 이에 동조하지 않았고 대규모로 탈주하여 신라나 왜로 도망가 버렸다.
    이 엑소더스에는 왕족도 참여하여,
    궁월군이라는 작자는 무려 120 현의 백성을 데리고 왜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그나마 남아있던 군사력까지 고갈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존립마저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쯤 되면 포기할 만도 하건만,
    태자를 볼모로 보내고, 당대의 석학을 파견하는 등 왜의 군사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는데,
    야마토 정권의 입장에서는 대박도 이런 대박이 없었다.
    엄청난 숫자로 밀려드는 유민은 인구충원 및 무력강화로 이어졌고,
    유민들이 가지고온 선진 문물은 국가 발전의 초석이 되었으며,
    아신왕에 대한 지원은 왜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인 것이다.
    덕분에 야마토 정권은 왕조로서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400년, 왜의 군사력을 끌어들인 아신왕은 이번에는 공격의 방향을 바꾸어,
    그 동안 고구려의 속국처럼 되어 버린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광개토대왕에 의해 무산되었고,
    도리어 가야가 신라의 공격에 시달리게 되어, 한반도 남부의 패권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그러나 포기를 모르는 아신왕은,
    404년 일본의 지원을 받아 고구려를 다시 한 번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는데,
    이번에는 수군과 육군을 모두 동원한 양면 작전으로,
    황해도의 석성을 짓밟은 후 평양까지 쳐 올라갔으나,
    광개토왕이 직접 지휘하는 부대를 만나 격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해 405년에 아신왕은 사망했다.

    화병이라고 하는데, 그럴 만도 하지만,
    사망한 나이가 숙부가 살해당했을 때와 비슷한 젊은 나이었다고 하니 아마도 암살이었을 것이다.
    나라를 이렇게 거덜 낸 왕을, 그렇지 않아도 기세등등한 백제의 귀족들이 두고 보고만 있었겠는가?

    아신왕은 국제적 감각이 뛰어났고, 국내정치를 안정시켰으며,
    왜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지속적으로 전쟁을 하는 등, 근초고왕에 필적하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승승장구한 근초고왕과는 다르게, 
    하필 광개토대왕을 만나 재위하는 14년 내내 터지고, 말아 먹고를 반복했으니,
    그의 울분과 좌절이 안쓰럽다.

    나라를 잃은 의자왕과 함께 안습의 수위를 다투는 왕이다.

    백제 : 16대 진사왕, 관미성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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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6 대 진사왕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로 침류왕의 동생이다.
    침류왕이 죽자 조카 아신이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를 이었는데,
    침류왕의 짧은 재위와 연결해 보면 뭔가 의심스럽지만,
    뭐가 되었건 즉위 초반부터 고구려와 툭탁대었으며,
    즉위 6년째엔 도곤성을 함락시키고 2백 명을 사로잡는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다음해에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이 즉위하였다.

    광개토왕은 즉위 다음 해에 바로 백제를 공격하였는데,
    그 능란한 용병술에 백제는 연전 연패, 석현성을 비롯하여 한수 이북의 10성을 빼앗겼고,
    전략적 요충지 관미성마저 빼앗겨 경기 북부일대의 영토를 잃었다.
    관미성은 사방이 험한 절벽이고 그 주위에는 바닷물이 있어서,
    고구려군이 7방면으로 20일 동안 총공격해서야 겨우 점령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위치는 경기도 파주의 오두산성 혹은 강화 교동도 또는 황해 옹진반도 어딘가라고 한다.
    관미성을 상실한 직후 진사왕은 행궁에서 사망하였는데,
    성장한 조카 아신왕에게 암살된 것으로 보인다.

    사람됨이 굳세고, 용감 총명하며, 어질고,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정치에서도 큰 무리가 없는 괜찮은 왕이었는데,
    재위 중 하필 광개토대왕을 만난 것이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재위 기간은 8년, 향년 36세, 아까운 나이였다.

    백제가 정쟁과 고구려의 침략에 시달리며 위축되는 동안,
    야마토 정권은 착실하게 힘을 길러 일본의 확실한 패자가 되었고,
    그 힘을 바탕으로 새로운 관계 설정을 요구하였다 한다.
    백제의 하락과 왜의 상승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백제가 아직 여유가 있어서 왕궁도 꾸미고 그랬던 모양이다.
    왕궁에 큰 못을 파 바다처럼 꾸미고
    그 바다 가운데 산을 쌓아서 신선과 부처가 노니는 신선봉우리를 만들었으며, 
    온갖 동식물과 신기하게 생긴 바위들을 옮겨놔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백제 : 15대 침류왕, 불교와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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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대 침류왕

    근구수왕과 진씨 아이부인 사이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2년을 못 채우고 죽었다.
    할아버지의 업보를 대신 받은 의심이 강하게 들지만 기록은 없다.

    짧은 재위기간의 업적으로는 동진 마라난타의 포교를 받아들여, 백제 최초로 불교를 수입한 것이라고 하는데,
    불교를 전혀 모르던 땅에 처음 소개한 것은 아닐 것이고,
    아마도 왕실에서 본격적으로 불교를 믿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시기의 불교는 왕즉불 사상을 바탕으로 하였기에, 주로 왕권 강화에 이용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왕에게는 귀족세력을 누르는데 안성맞춤의 도구라고 할 수 있으나,
    이차돈의 예에서 보듯이 귀족세력 또는 토착세력의 반발이 격렬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반발이 정정 불안으로 나타나 암살된 것은 아닐까?

    백제 : 14대 근구수왕, 멋진 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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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대 근구수왕

    근초고왕과 왕후 진씨 사이의 소생으로, 강력한 외가의 덕을 봤는지 태자 시절부터 맹활약하였다.
    고구려의 침입을 받자 황해도 백천에서 싸워 격퇴하였고,
    수곡성까지 영토를 넓혔으며,
    377년 10월에는 부왕의 명에 따라 군사 3만으로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였고,
    고국원왕을 살해하였다.

    왕위에 올라서도 독이 오른 고구려와 열심히 싸웠고 평양성을 재차 공격하기도 하였다.
    동진과 교류하였고 일본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하였으며,
    왕인을 일본에 보내어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
    왕인은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9년간 재위하였다 하는데 좀 짧은 감이 있다.

    [사진] KTX·SRT 통합을 통한 철도 공공성 강화 촉구 기자회견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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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임주영 기자] 김영훈 정의당 노동본부장, 조상수 전국철도지하철노동조합 협의회의장, 박해철 전국철도노동조합 대협실장, 김원영 서울교통공사 노동조합 차량본부 사무국장, 김상합 현대로템 노동조합 위원장이 여영국 국회의원과 함께 지난 12월 5일 국회 정론관에서 KTX·SRT 통합을 통한 철도 공공성 강화 촉구 결의안 및 개정안 발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조상수 전국지하철노동조합 협의회 의장은 “철도안전법 개정안은 철도차량 제작과 정비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제도적 개선사항이다. 국미의 생명과 안전보다 비용절감을 우선했던 잘못된 철도지하철 안전 정책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