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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5일 오전 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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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 12대 근초고왕, 정복군주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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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대 근초고왕

    계왕을 살해하고 고이왕통을 멸절시켜,
    귀족 세력들간의 이합집산으로 한시도 편할 날이 없는 백제에 전제왕권을 확립한 철혈의 군주로서,
    백제의 최전성기를 열었고, 대륙백제의 환타지까지 만들어낸 명군이다.

    약 30년간 재위하였는데 즉위 19년까지의 기록이 없다.
    기록 부실이 가장 큰 원인이겠으나,
    다른 나라의 사서에도 기록될 만한 큰 일이 없었거나, 뭔가 비밀스런 일이 진행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재위 전반 20년 간 뭔 짓을 했건, 근초고왕은 재위 후반 10년 동안 엄청난 일들을 해낸다.
    고구려와 싸워 고국원왕을 죽인 일이 가장 유명하나,
    목지국을 정벌하여, 전라북도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고,
    가야의 탁순국 및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누르고 한반도 남부의 패권을 장악한 일,
    그리고 그 이후 침미다례국을 정벌하여 전남 지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한 것도 업적이다.
    또한 일본에 칠지도를 하사하고 아직기를 보내어 일본 태자에게 유학을 가르쳤으며,
    박사 고흥에게 서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중국 동진에 사신을 보내는 등 국제적 위상도 제고 하였는데,
    중국 측 사서에 이름이 기록된 백제의 첫 번째 왕이라고 한다.

    쿠데타로 집권한 후 20년 가까이 은인자중하다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갑자기 동서남북을 종횡하며 눈에 보이는 것은 다 때려잡고 한반도의 패권까지 움켜쥘 수 있었을까?
    당시의 국제 상황을 보면, 근초고왕 즉위년인 346년에,
    부여가 전연 모용황의 침입을 받아 실질적으로 패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비록 그 이후에도 부여의 명맥은 이어지나, 고구려의 보호국으로 연명하는 비참지경이 되고 말았는데,
    발해의 멸망에서 보듯이 고대국가의 패망은 잔존 무력집단을 남기고,
    그 무력집단의 일부는 남아서 부흥운동을 전개하거나, 아니면 외국으로 망명하는 것이 상례이므로,
    부여의 경우도 비슷했을 것이다.
    부여와 고구려는 항상 사이가 나빴고 대무신왕 이후에는 거의 원수나 다름없었으므로,
    부여의 망명 무력 집단은 고구려보다는 백제에 손을 내밀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소서노의 탈출과 유사한 과정을 거쳐, 부여의 무력집단이 백제로 왔다면,
    그리고  발해 유민이 왕건에게 협조했던 것처럼 이들이 근초고왕에게 협력을 했다면,
    백제가 갑자기 강해진 이유와 느닷없이 고구려와 사생결단을 낸 이유가 설명되고,
    백제의 요서경략설도 근거가 생긴다.
    근초고왕의 무기록 20년은 부여의 망명 무력집단과 근초고왕의 합작 내지 합병을 위한 기간이었고,
    근초고왕 시기의 강력한 외척 세력이었던 진씨 가문이 부여와 연결고리라면,
    자연스러운 설명이 가능할 것도 같으나 기록이 없으니 그저 상상만 할 뿐이다.

    일부 재야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부여 망명 무력집단과의 합작설에 따라 스토리 구성을 해보면,
    귀족 연맹체 성격이었던 부여는 모용황에게 무너진 후 지배층이 분열 되었는데,
    고구려에 대해 적대감이 강했던 세력들은 근초고왕에게 손을 내밀었고,
    이들을 영입한 근초고왕은 고이계를 제압하고, 전제왕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국내 정치를 안정시킨 후, 
    그동안 상전 노릇을 하던 마한의 맹주 목지국을 정벌하여 전라북도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으며,
    가야에까지 세력을 뻗히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식의 동맹이었는지는 모르나, 가야를 통해 왜의 야마토 정권과도 손을 잡았는데,
    철기조차 없었던 당시 야마토 정권은,
    백제 또는 부여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일본의 강자로 떠오르게 되었고, 백제와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백제는 증강된 무력을 바탕으로 신라를 압박하여, 신라, 가야, 왜를 묶는 네트워크를 형성하였으며,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이 네트워크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던 또 다른 해상세력인 전남지역의 침미다례국은 연합군으로 정벌,
    학살하여 본보기로 삼았다.
    침미다례국은 당시 ‘남만’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이질적인 세력이었던 듯하다.한편 백제의 팽창은 대방군을 멸망시키고 남하하던 고구려에 위협이 되었고,
    이미 전연의 모용황에게 신나게 터져 체면을 잔뜩 구긴 고국원왕은 체면도 좀 살리고 화풀이도 할겸, 백제를 침입하였으나,
    백제는 오히려 역공을 가하였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이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로서 백제의 영토는 경기, 강원, 충청, 전라 그리고 황해도의 일부를 아우르는,
    강력한 영토 국가가 되었다,
    여기에 요서경략설까지 더하면 더욱 웅대해지지만, 당시 항해기술이나 인구 그리고 세력분포로 보아,
    설사 요서 백제가 존재했다하더라도 직접 통치는 무리였을 것이다.
    근초고왕과 합작했던 요서의 잔존 부여세력을 지원하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백제, 왜 연합군의 결성이, 일본의 가야정복설과 한반도 진출이라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주장되기도 하나 당시의 일본 본토의 상황과는 잘 맞지않는다.
    부여 이주설을 한 번 더 써먹는다면,
    백제에 협력했던 부여세력이 백제를 도와 서쪽을 평정하고 가야를 압박했으며,
    신라를 제압한 후 가야의 도움으로 왜로 건너간 것이 아닐까?
    이들은 왜로 건너가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백제, 가야와 친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는데,
    나중에 일본서기를 기록할 때, 이 이주세력을 왜로 표기함으로 인해 발생한 혼란이,
    임나일본부설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일본에 철기가 보급되고 기마병이 나타나는 시기가 이 시기라 하니 아주 허황되지만은 않을 듯하다.
    근초고왕이 칠지도와 칠자경을 왜에 선물한 것도 이 이주 세력에 대한 고마움이나 친밀함의 표현이라면 이해가 간다.

    과거의 기록들이 부실하고 사서마다 모순되는 내용이 많아 실체적 진실을 알기 어려운 것이 아쉽다.

    백제 : 12대 계왕, 고이계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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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대 계왕

    분하게 죽은 분서왕의 장남으로,
    강직하고 용감하며 승마와 궁술 모두에 능했다고 한다.

    비류왕이 재위 40년 만에 죽자,
    빼앗겼던 왕위을 되찾아, 고이왕계를 다시 부활 시켰으나,
    2년 만에 비류왕의 아들, 근초고왕에게 패하여 고이왕통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단 두 줄, 안습이다.

    백제 : 11대 비류왕, 초고계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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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1 대 비류왕

    분서왕이 분사한 후 왕위를 이었는데 ,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성품은 인자하고 너그러웠다고 한다.
    기록에는, 왕이 되자마자 고이왕에게 축출당한, 사반왕의 동생이라고 하지만,
    사반왕과는 나이가 70년 이상 차이가 난다.

    시조 온조왕의 형 비류와 이름이 같아 뭔가 있어보이나, 
    민간 출신이라는 말도 있는 것으로 보아, 분서왕의 암살과 직접 연관이 있든 없든,
    몰락했던 초고계의 지원을 받아, 한군현 세력과 대치하느라 진이 빠져버린 고이계를 누르고
    정권을 장악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를 가능성도 있다.

    좀 많이 늘린 듯하지만, 40년간 재위하였다고 하는데,
    긴 재위 기간에 비해 업적은 별로 없어서,
    남아 있는 기록이 주로 가뭄, 우박, 태백성, 혜성 등 자연재해와 천문의 이상 등이다.
    기근으로 백성들이 서로 잡아 먹었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밀려난 고이계의 반격 등으로 왕 자리가 편안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불미스러운 사건 뒤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정정은 불안하였을 것이고,
    뭘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태였을 것이다.

    백제 : 10 대 분서왕, 분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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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대 분서왕

    어려서부터 똘똘하고 몸가짐이 발라 아버지 책계왕의 사랑을 받았고,
    부왕이 전사하자 왕위를 물려받은 후, 살부의 원수 낙랑과 치열하게 싸웠다.
    재위 7년째에 낙랑군의 서쪽 현을 점령하였는데, 그 이후 자객에 의해 바로 살해되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가 보낸 자객이었는지는 설이 분분한데,
    낙랑에서 보냈다고도 하고, 다음 대 비류왕이 보냈다고도 하고,
    심지어는 신라에서 보낸 8살짜리 황창랑에게 살해되었다는 말도 있다.
    8살짜리 자객은 말이 안 되지만, 적국에서 자객을 보냈을 가능성은 충분한데,
    그랬다면 어딘가에 기록이 남았을 것이다.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고이왕계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세력의 작품일 것이다.

    뭐가 되었건 책계왕의 뒤를 이어 분서왕마저 급사함으로써, 고이왕계는 몰락하였다.

    백제 : 9대 책계왕, 전장에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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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대 책계왕

    고이왕의 맏아들로, 체구가 장대하고 의지가 굳세었다고 한다.
    북방의 위협에 대한 대비로 위례성, 아차성, 사성 등을 수리 또는 수축하였다.
    왕비는 대방왕의 딸 보과인데, 고이왕 외교의 결실일 것이고,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대방에 구원군을 파견하여 고구려와 관계가 악화되었다는데,
    당시 고구려의 사정이 대방과 싸울 수 있었는지는 논란이 많다.

    재위 13년째에 낙랑의 지원을 받는 동예와 싸우다 전사하여,
    백제 왕들 중 첫 전사라는 썩 명에롭지 않은 기록을 남겼다.

    책계왕 시대는 중국 대륙에서 삼국시대가 끝나고,
    사마씨의 진이 천하를 통일함에 따라 한군현 세력이 부활하는 시기였다.
    팽창하는 한군현 세력에 대한 대응으로 주변국들의 이합집산이 심하였을 것이고,
    이 양반도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았을 것이나,
    기록이 부실하여 알기는 어렵다.

    백제 : 8 대 고이왕, 진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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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대 고이왕

    출신이 가장 불확실한 양반으로, 온조계의 방계 또는 비류계라는 설이 있고,
    심지어는 소서노의 전 남편인 우태라는 믿기 힘든 설도 있다.
    무려 53년간 재위했다 하는데, 이것도 믿기 힘들고.
    대륙백제도 건설했다는 설도 있는데, 이건 더 믿기 힘들고.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신라의 내물왕, 고구려의 태조왕과 함께 고대 국가의 기틀을 잡은 실질적 시조라 불리고,
    사실적 기록이 나타나는 것도 이 시기 부터이다.

    고이왕 이전의 백제는 국가라기보다는 정착할 땅을 찾아 헤매는 무장 집단의 성격이 강하였으므로,
    초기에는 용병집단 비슷하게 마한의 울타리 노릇을 하며 말갈족과 대치하였으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차차 체제를 갖추어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이왕 이전에 왕이라고 불릴 만한 인물이 있었는지는 의문인데,
    아마도 나중에 나라의 꼴을 갖추고 역사를 기록할 때, 체면상,
    온갖 윤색과 조작을 가미하여, 무용담이 전승으로 내려오는 행동대장급의 인물이나,
    대두목 급의 인물을 왕으로 기록하였을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긴 재위기간 또한 대충 꿰어 맞춘 결과일 것이고.

    뭐가 되었건 고이왕 때부터 한 세력의 독주와 권력의 집중이 나타났으며, 법령 또한 반포되어,
    힘을 우선시하던 이전의 원시적 상태에서 발전하여 제도의 통치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수장의 권력 강화는 6좌평,16품계 등 관직의 정비 및 위계의 확립으로 나타났고,
    고대 왕권 체제로 이어져, 국가 시스템의 효율성을 증대시켰다.
    덕분에 목지국을 누르고 마한의 실질적인 맹주가 되었으며,
    남옥저의 일부를 점령하는 등 영토도 확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중국의 서진과 외교관계를 맺었는데, 변방의 야인 취급이었겠지만,
    아무튼 국제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지역에서는 나름 힘을 쓰게 되었는지라, 동예와 우호관계를 조성하기도 했고,
    한사군의 후신인 낙랑, 대방과도 혼인을 통한 동맹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신라와는 자주 충돌하였다고 하는데,
    이 당시 신라나 백제가 변경에서 힘겨루기를 할 정도의 국력을 갖추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나,
    그렇다고 한다.

    고이왕은 무예가 뛰어나고 호방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기록만 보면 수양대군의 대선배처럼 보이나, 조선과 당시의 백제는 상황이 전혀 다르고,
    친삼촌도 아닌 듯하므로 유교적 도덕률을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태백성, 혜성 등 천문의 기록은 왕 노릇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유교적 명분론 때문은 아니고, 초기 국가의 일상적인 권력투쟁이었을 것이다.

    백제 : 7 대 사반왕, 안습의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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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대 사반왕

    구수왕의 맏아들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마자, 숙부인 고이왕에 의해 폐위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워낙 재위 기간이 짧아서인지, 우리 역사에 존재하는 왕들 중 기록이 가장 적고, 삼국사기에서는 왕으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사반왕의 폐위는 온조계 왕족들 중 초고계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므로,
    고이왕은 친삼촌이 아니라 아마도 숙부의 항렬을 가진 먼 친척이었을 것이다.

    신라 애장왕, 고려 헌종, 조선 단종, 보다 더 안습인 왕이다.

    백제 : 6 대 구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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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대 구수왕

    초고왕의 맏아들로 키가 7척에, 풍채가 빼어났으며 비범했다고 한다.
    재위 기간은 21년.

    구수왕의 치세에 대한 기록도 말갈, 신라 등과의 전투가 대부분으로, 주로 신라의 내해 이사금과 치고 받았다.
    말년에는 거의 자연재해로 얼룩지는데,
    자연재해는 강력한 전제 왕권 치하에서도 민심의 이반을 불러 지도력 약화로 이어지기가 쉬우므로,
    당시와 같은 부족 연맹 체제의 시기에는 집권 세력에게 결정적인 악재로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다음 대, 사반왕이 쫒겨 나는 것으로 상징되는 초고계의 몰락이 발생한 것은 아닐까? 

    그의 후손으로는 근구수왕이 있다.

    한국자유총연맹, ‘국리민복’(國利民福) 상표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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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자유총연맹
    한국자유총연맹 로고(사진=한국자유총연맹 홈페이지)

    한국자유총연맹(총재 박종환· 이하 자총)은 국민 행복과 국가 발전을 뜻하는 ‘국리민복’(國利民福)에 대한 상표(업무표장)등록을 마쳤다고 3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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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자유총연맹이 국리민복에 대한 상표등록을 마쳤다. (사진=한국자유총연맹 홈페이지)

    자총은 박종환 총재가 취임한 이래, 특정 정파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으며, 사익을 추구하지 않고, 모든 활동을 행함에 있어 최고의 판단 기준을 국민 행복과 국가 발전에 두고 국리민복 가치관 확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자총은 국리민복 가치관 아래 ▲평화통일 기반 확충 ▲자유민주주의 역량 강화를 위한 국민운동 ▲자유민주주의 시민의식 제고를 위한 교육 ▲자유민주주의 가치 연구 및 홍보사업 등을 중점적으로 펼쳐나갈 방침이다.

    한편 자총은 1989년 ‘한국자유총연맹’으로 명칭을 변경하기 전까지 사용했던 ‘한국반공연맹’ 명칭에 대해서도 상표(업무표장)등록을 마쳤다.

    민주시민교육 통해 학교 지원체제 구축 등 핵심과제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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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김동주 기자] 민병희 강원도교육감은 30일 오전, ‘한 명 한 명의 아이를 존중받는 민주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는 신년사를 발표하고, “비판적이고 창의적으로 사고하는 지성, 다른 사람의 처지에 공감하는 감성, 더 좋은 오늘을 만들어가는 시민성을 갖춘 민주시민을 길러내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배움의 기틀을 다져주는 책임교육 △삶과 교과를 통합하는 미래교육 △교육 중심 학교를 위한 지원 체제 강화 등을 새해 핵심과제로 제시했다.

    우선, 책임교육 강화를 위해 ‘한글 책임교육’은 한글해득을 넘어 읽기 유창성과 독서, 토론, 글쓰기 교육까지 확대하고, 개념과 원리를 토대로 한 수학 책임교육과 기초 튼튼 영어 책임교육으로 공교육으로서 책임성과 전문성을 높인다.

    이를 위해 2월, 초·중등 교원 4천여 명을 대상으로 한글, 수학, 영어 책임교육 연수를 실시하고, 협력교사제를 확대한다.

    또, 천천히 배우는 학생과 위기 학생을 위해 학교 다중지원, 교육지원청 통합사례 관리, 학교밖 전문가와 협력을 강화해 촘촘한 맞춤형 지원에 나선다.

    민 교육감은 책임 교육의 성과를 토대로, 학생들이 미래 사회로 나갈 준비를 돕기 위해 삶과 교과를 통합하는 미래교육으로 교실을 바꾸겠다고 강조했다.

    일상의 수업에서 토의·토론 학습, 프로젝트 학습, 협동·협력 학습, 문제해결 학습 등이 진행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민주시민교육과를 신설해 모든 아이가 존중받는 민주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 작은학교 희망만들기 통합지원단을 구성해 작은학교 정책도 밀도 있게 추진하고,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선도하기 위해 특성화고등학교 공동실습소는 AI, 빅데이터, 드론, 3D프린팅 등의 분야를 실습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바꾼다.

    강원행복고등학교를 더욱 밀도 있게 운영해 학생선택형 교육과정을 다양화하고, 정시와 수시를 효율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두 방향 정책을 마련한다.

    민 교육감은 책임교육과 미래교육을 이루기 위해 교육 중심의 학교 지원 체제도 대폭 강화한다고 밝혔다.

    학교지원센터, 교육지원청, 도교육청이 학교 업무를 직접 처리하도록 재구조화 되며, 교직원들의 역량 강화를 위해 ‘플랫폼형 연수 시스템’을 운영하는 등 교직원 연수 체제를 혁신한다.

    동시에 지자체와 협력해 ‘강원도형 돌봄 체제’를 구축하고, 아이들이 정규 수업 이후 학교 안팎에서 양질의 돌봄을 누릴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 가겠다는 뜻도 밝혔다.

    민병희 교육감은 “모두를 위한 교육이 10년이 되는 새해, 학교 현장에 권위주의와 행정 중심 문화가 옅어지고, 민주주의와 교육중심 문화가 자리잡았으며, 교실 수업이 살아나고 다양한 교육활동으로 학교가 들썩이기 시작했다”며, “지난 10년을 노둣돌 삼아 새로운 90년을 준비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김동주 기자

    백제 : 5 대 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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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대 초고왕

    개루왕의 맏아들로 무려 49년이나 재위했다는데,
    이 양반은 묘하게도, 루자 돌림의 비류계 왕통이 아니라 온조계 왕통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런 왕통이 존재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집권 세력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일 수는 있는데,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초고왕과 개루왕이 부자관계라는 것이 어색해진다.

    백제도 초기에는 부족 연맹체 수준이었을 것이므로,
    왕들의 재위기간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고, 한 세력의 집권기간 내지 주도 기간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개루왕 대에서 비류계의 주도가 끝나고, 초고왕부터 다시 온조계가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고고학상 증거로는 부여-고구려 계열의 유이민들 즉 백제가 마한의 영역으로 도래한 시기가 초고왕 때라고 하므로,
    온조계니 루자 돌림 왕이니는, 나중에 건국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조작한 것일 수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
    개루왕이 말년에 아찬 길선의 망명을 받아들인 일로 신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재위 내내 툭탁거렸다는데,
    각자 마한이나 진한의 중심 국가가 아니었던 이 시기의 백제나 신라가,
    변방에 수천의 기병을 보내 성을 점령하고, 수비병을 파견할 정도의 역량이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진실이야 뭐든 이름이 같은 것으로 보아 근초고왕과 연관이 있는 왕일 것이다.

    백제 : 4 대 개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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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대 개루왕

    무려 39년이나 재위했다고 하는데 기록이 별로 없다.

    그나마 눈에 띠는 것은 산성을 축조했고,
    신라의 반역자 아찬 길선의 망명을 받아주는 바람에 아달라 이사금과 싸웠다는 정도인데,
    나라에 이득도 없는 배반자의 망명을 받아 주었다고, 김부식에게 욕을 직싸하게 먹었다고 한다.

    이 양반도 그냥 이름이나 알아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