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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5일 오전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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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 긴 이야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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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창업 군주이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박씨들의 조상이다.

    기원전 67년 경주에 위치한 사로국이라는 도시 국가 비스무레한 곳에서 6부 촌장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하늘에서 백마가 표주박 같이 생긴 커다란 알을 가지고 나정이라는 우물가로 내려 왔더란다.
    알이 깨지면서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이 갓 태어난 애를 동천이라는 샘까지 데리고 가서, 물을 데우지도 않고 씻기자,
    애 몸에서 광채가 나고 별의 별 희한한 일이 생기더니, 태양과 달의 빛까지 더 밝아졌다고 한다.

    혁거세는 밝은 해 또는 밝은 이라는 뜻의 이두식 표현으로,
    이 신기한 아이가 기원전 57년, 13세에 촌장들의 추대를 받아 나라를 세웠고 천년 왕국 신라의 시조가 되었다.
    국호는 서나벌, 왕호는 거서간으로, 거서간은 왕 또는 존귀한 인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부인인 알영도 신화가 있는데, 이 여인은 우물가 출생으로  특이하게도 용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신화의 왕답게 사망 설화도 있는데,
    재위 62년을 끝으로 하늘로 승천하였는데, 황당하게도 7일 만에 시신이 부위 별로 나뉘어 지상으로 떨어졌고,
    백성들이 그 나뉜 몸을 다시 하나로 모아 장사 지내고자 하였으나, 
    웬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나타나 훼방을 놓는 바람에, 별 수 없이 양 다리, 양 팔, 그리고 몸통과 얼굴을 따로 따로 다섯 개의 무덤에 묻었다고 한다.
    이 무덤들이 현재 오릉 또는 사릉이라 불리는 무덤들이다.

    대부분의 신화가 그렇듯이 신라의 건국 신화도 우의적 표현일 것인데,
    난생 설화는 엄마의 불륜을 의미하거나 외부 세력의 유입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박혁거세는 유입 세력이었을 것이고, 백마 전설로 보아 기마 민족 계열일 가능성이 있다.
    사망 또한 특이한데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사지가 분리되는 것은 흉사일 가능성이 크므로,
    세력의 분열 또는 쿠데타를 의미하는 기사일 것이다.
    왕비 알영 또한 출생이 특이한 것으로 보아 이주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큰데,
    용 전설이므로 해양세력 즉 해적들이 아니었을까?

    이 시기는 가히 전성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한반도에 유난히 이주 세력들이 많았는데,
    추모, 유리, 온조 등이 본거지를 떠나, 신세계로 향하였고, 나라를 세워 왕 노릇을 하였다.
    이들이 서로 도미노처럼 밀어내거나, 내부갈등으로 일부가 딴 살림을 차리거나 한 것이 아닐까?

    즉위  17 년 차인 나이 서른에 비로소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는지, 왕비와 함께 6 부를 순시하며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였고.
    19년에는 변한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는데 …. 뻥인 것 같고,
    21년에 수도 금성에 성을 쌓았으며 ,
    26년에 궁실을 지어 나라꼴을 좀 잡았다 .
    30년 낙랑이 침범하였으나 도덕의 나라라 하여 스스로 물러갔다는데…택도 없는 이야기고,
    아마도 옛날 생각하고 껄렁한 몇 놈이 강도질하러 왔다가, 제법 틀이 잡힌 신라를 보고 공격할 엄두를 못 내어 돌아갔다….가 진실일 것이다.
    즉위 38년엔 표주박을 타고 일본에서 넘어온 호공을 마한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사신으로 간 놈이 겁도 없이 마한 왕을 열받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마한 왕은 호공을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는데,
    이듬해 마한 왕이 죽자, 되려 신라의 신하들이 마한 정벌을 권하였다고 한다.
    신라에 제법 힘이 붙었었나 보다.
    즉위 53년에는 동옥저에서 사신이 와서 말 20필을 바쳤다.

    고대사를 공부할 때의 재미인, 제멋대로 상상하기를 해보면,
    나름 풍요로운 땅 경주에 올망졸망한 세력 대여섯이 모여 국가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칼 든 외부 세력이 도착하였다, 그것도 둘씩이나.
    이들은 주로 남자들로 구성된 전투 집단 즉 고향에서 권력투쟁에 패배하고 도망한 세력이거나,
    배를 타고 온 해적 무리이거나 등등 뭐 이런 종류들이었을 것이므로,
    얘네들이 소서노 아줌마의 자식들 처럼 세력이 컸다면, 국가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부족들을 모조리 정복하고 지배하였겠지만,
    그 정도가 아니었기에 온건하게 토착 세력과 타협하였고, 그 타협의 결과물이 화백 회의를 비롯한 귀족들의 권리였다.
    그리고 이러한 초창기의 어수선함이 이후 박, 석, 김으로 왕성이 바뀌는 왕통의 불안정으로 나타났다…가 아닐까?

    신라 : 미약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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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 중 가장 찌질이.
    발전도 느리고 국력도 약해 가야, 왜구의 밥이었고 고구려의 속국 노릇까지 했던 안습의 나라.
    외세를 끌어들여 위대한 고구려와 바다의 지배자 백제를 멸망시키는 바람에, 우리 민족의 무대를 좁아터진 반도로 국한시켰고,
    골 때리는 골품제도를 끝까지 유지하여 나라를 골병들게 한 꼴통들의 나라,
    이렇게 욕을 많이 먹는 신라는, 992년간 지속하여, 우리나라 역대 왕조 중 가장 긴 수명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도 몇 안 되는 천년 왕국을 이룩한 왕조이다.

    신라가 우리 역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삼국을 통일한 후 강력한 중앙 집권 정책으로 말갈을 포함한 한반도의 제 종족들을 하나로 묶어,
    한민족의 형성을 주도하였고, 금속 공예를 비롯한 화려한 문화를 꽃피워 민족 문화의 뿌리가 되게함으로써 한겨레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신라를 욕하는 것은 자기 조상을 욕하는 미련한 짓이다.
    아무리 못났어도 아버지는 아버지 아닌가?

    신라는 경주평야에서 시작되었다.
    경주평야는 형산평야와 더불어 척박한 경상도에서 그나마 면적이 넓고 기름져 생산량이 많은 땅이었다.
    너나없이 먹고 살기 힘들었던 고대에서 경주평야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진배 없었므로,애 키우기도 좋았을 것이고,
    따라서 유, 이민도 많았을 것이니 자연히 인구 밀도가 높았을 것이고, 부자 소리 듣는 사람도 제법 있었을 것이다.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은 생명과 재산을 지켜줄 조직체를 필요로 하는 법이니
    경주평야에서 국가가 출현하게 된 것 또한 자연스러운 수순 이었을 것이다.

    신라의 전신은 고조선의 유민들로 구성되었다고 하는 진한이었다.
    진한 12부 중 서라벌 6부가 중심이 되어 느슨한 연맹체인 사로국을 구성한 것이 신라의 시작이었는데, 연맹체의 장은 돌아가며 하였고 각부의 장들은 모두 왕이라 불렸다고 한다.

    왕이라는 단어는 각 집단의 두목들을 부르는 일반적인 호칭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중국 넘들도 처음에는 미개했을 것이므로 두목을 의미하는 단어로 왕을 차용하였을 것이고,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두목의 권위도 따라 증가하여 왕이라는 호칭은 제일 높은 놈만 사용할 수 있는 고귀한 명칭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넘들이 떡하니 진서로 王이라고 쓰는 바람에,
    한반도에서 중국의 문자와 제도를 수입하면서 왕도 역수입 되었고, 의미 또한 고귀해진 것이 아닐까?

    뭐가 되었건 사로국에서 왕으로 불리던 두목들은 유리 이사금 때 성씨를 부여 받았는데 각각 이씨, 손씨, 최씨, 설씨, 배씨, 정씨 등이다.
    이들은 대대로 귀족 세력이 되어 잘 먹고 잘 살았고 고려, 조선 시대까지 지배층으로 살았다.
    아마도 이들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들일 것이다.
    신라의 왕성인 박, 석, 김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얘네들은 외래 세력일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신라는 외래 세력과 토착 세력이 연합하여 구성한 나라로 추정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남방계와 북방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신라 초기에 편두 즉 길쭉한 짱구머리를 만드는 풍속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백성들은 남방계(드라비다 ?), 지배층은 북방계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신라를 부르는 이름은 다양한데,
    걸의식국, 비집기국, 시라, 사라, 시림, 유계, 계괴, 계림, 서야벌, 서라벌, 유잠국 등으로 모두 누에치기와 관련된 이름들이라고 한다.
    서울도 서라벌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뭐가 되었건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57년 나정에서 알을 깨고 태어난 사나이 박혁거세가 왕으로 추대 되면서 신라가 시작되었다.
    이는 고구려보다 20년이나 빠른 시기로서 조작의 냄새가 심하게 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백제 : 멸망 그리고 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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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백제의 멸망은 느닷없는 일이었다.

    대륙의 통일왕조와의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거의 고갈된데다가, 연개소문 사후 그의 못난이 아들들의 삽질로 거의 자연사 수준이었던 고구려와는 다르게,
    백제는 무왕과 의자왕의 개혁이 성공하여 당대 한반도 최강의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고구려, 백제, 그리고 왜를 잇는 종적 연대의 중심으로서, 신라를 쥐잡듯이 하던 상황이었다.

    잘나가던 백제가 한 순간에 무너진 이유는, 고구려 때문에 어려울 것이라는 의자왕의 계산과는 다르게, 당대 세계 최강국, 당나라의 직접 침공 때문이었는데,
    늙은 대국 고구려는 당에 대한 견제 능력을 상실한지 오래였던 반면,
    고구려 배후의 신라의 전략적 가치는 여전하였으므로,
    당은 신라도 구하고, 고구려 공격의 남쪽 루트도 확보할겸 백제를 침공하였다.

    백제 공략전에는 당 13만, 신라 5만 등 도합 18만의 군사가 동원되었는데,
    이는 백제의 군대 동원능력의 서너배를 훌쩍 넘는 군세로서,
    의자왕의 전략과 전술은 당의 강력한 무력 앞에 모조리 무너졌고,
    신라를 막는데 사용할 수 있는 병력이 계백의 5000 결사대 정도밖에 없을 정도로,
    지방세력들은 개국 초기부터 늘하던 대로 정권의 위기를 방관하였다.
    따라서 백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의자왕이 충신의 말을 안 들어서 진 게 아니라,
    충신 할애비가 와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계백의 처절한 저항이나 관창의 죽음 같은, 감성을 자극하는 황산벌 싸움은 대세와는 별 관계가 없었고, 백강 전투에서의 패배가 결정적이었는데,
    나당연합군이 부여로 밀려들어오자 의자왕은 태자 효와 함께 옛 수도 공주로 피난하였고,
    제2왕자인 태가 남아서 사비성을 고수하였으나 오래 버티지는 못하여, 결국 1만여 명의 전사자를 내며 궤멸되었다.
    나당군은 이어 공주를 함락시켰고, 의자왕과 태자 효도 660년 7월 마침내 투항하여 ,공식적으로 백제는 멸망하였으나,
    이는 중앙정부의 붕괴에 불과할 뿐, 백제의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죽고….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지 않는가?

    당나라는 사비성을 함락시킨 후 5도독부를 설치하였으나, 그 통제력이 미치는 범위는 군 주둔지역 근방으로 한정되어 있었는데,
    소정방의 주력부대가 사비성에서 물러난 뒤부터는, 백제 유민들의 부흥운동이 더욱 활발해졌고,
    얼마 안 가 부흥군이 전국을 장악해 버렸다.
    또한 왕족 복신과 승려 도침은 왜에 있던 왕자 부여풍의 귀국을 추진하면서,
    주류성을 근거로 군사를 모으고 나당군에 대한 공격을 활발히 전개하였는데,
    왕조의 부흥을 선언한 이들에게 북서부의 많은 성들이 호응하였고, 
    복신은 이들을 결집시켜 사비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사비성에 주둔하던 유인원의 당군과 김인태의 신라군은 본국에 원병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고,
    태종 무열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온 뒤에야 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는데,
    이에 복신의 부흥군은 임존성으로 후퇴하여 흑치상지 군과 합세, 전력을 보강하였고,
    다시 주류성으로 돌아와 백강 입구를 막았으며, 당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동시에 사비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당군의 상륙를 막지는 못하여, 부흥군은 다시 임존성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나,
    662년, 일본에서 왕으로 추대된 부여풍이 원병을 거느리고 도착하자, 다시 적극적으로 전투를 전개하였다.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 원정을 위해 신라에게 쌀배달을 시키고 있었는데, 부흥군은 금강 동쪽에서 신라의 북상로를 점령하고, 사비성과 웅진성을 고립시켰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기에도 바쁜 와중에 부대를 파견해야 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던 부흥군은 안타깝게도 지도층의 내분으로 자멸하고 말았다.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이 또 복신을 죽여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다.
    나당 연합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함락시켰고, 구심점을 잃은 부흥군 지도자들 또한 항복함으로써, 
    4년에 걸친 부흥 운동도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강력했던 백제의 부흥운동이 내분으로 실패한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나,
    항복한 부흥군과 유민들은 668년 이후, 신라의 백제, 고구려 유민 결속정책에 따라,
    당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처하면서, 동일역사체의식을 형성해 나감으로서, 단일 민족국가 형성에 기여하였다.

    [칼럼] 누구나 알고 싶어 하는 청소년 정책, 당신은 알고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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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우 칼럼리스트

    [수완뉴스=박정우] 2019년 12월 27일 국회에서 공직선거법 일부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선거권 연령이 만 19세에서 만 18세로 낮아지게 됐다. 그러면서 청소년의 정치참여는 현재 우리 사회의 큰 이슈가 됐다. 특히 만 18세인 2002년 4월 15일 이전에 태어난 일부 고3 학생들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면서 학교의 정치화 vs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 확대라는 그 논란은 커지고 있다.

    그러면서 현재 청소년의 사회 참여를 비롯한 다양한 청소년 정책은 이러한 논란의 중심에서 어떠한 역할을 할 것인지 기로에 서 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현재 정부의 청소년 정책이 어떤지 알아보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시대 흐름에 따라 청소년 정책이 어떻게 변화하는 지에 대해 매 달 칼럼을 통해 논해보고자 한다.

    2018년 3월, 청소년 정책 담당 부서인 여성가족부(장관 이정옥)는 향후 5년간 우리나라의 청소년 정책의 근간이 될 「제6차 청소년정책기본계획(2018-2022)」(이하 기본 계획)을 발표했다. 「제6차 청소년정책기본계획(2018-2022)」의 정책비전은, “현재를 즐기는 청소년, 미래를 여는 청소년, 청소년을 존중하는 사회”로 설정하였으며, 이는 현재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사회에 참여하고 기여 하는 청소년, 미래를 살아갈 주인공으로서 필요한 역량과 자질을 갖추어 가는 청소년의 모습, 그리고 사회 모든 분야, 모든 구성원이 청소년의 참여와 권리를 존중하고 지원하는 사회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제6차 기본계획의 구조는 4대 정책영역, 12대 중점과제, 144개 세부과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가 함께 추진하게 될 주요 핵심과제는 다음과 같다.

    ※ 4대 정책영역 : 청소년 참여 및 권리증진, 청소년 주도의 활동 활성화, 청소년 자립 및 보호지원 강화, 청소년 정책 추진체계 혁신.

    첫째, 정책수요자인 청소년의 시설 이용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청소년이 원하는 서비스를 한 곳에서 제공받을 수 있도록 청소년 인프라를 개편하고자 한다. 그래서 청소년수련관, 문화의 집 등, 여러 청소년 수련 시설을 ‘청소년센터’(가칭)로 변경하여 종합시설로의 개편이 가능토록 하고, 집단 청소년 활동 서비스 외에 지역 청소년 1:1 개별 서비스 제공을 추진할 예정이다.

    둘째, 청소년들이 성숙한 민주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과 학습,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그래서 전국 지자체가 청소년참여위원회를 운영하도록 하며, 청소년참여예산제, 청소년 주도의 토론회·포럼 개최를 포함 모든 청소년들이 온·오프라인에서 의견을 표출할 수 있도록 청소년 참여 통로를 다양화하고, 모든 청소년 사업에 민주시민학습 프로그램, 양성평등 프로그램을 반영함으로써 자연스러운 과정이 되도록 지원하고자 한다.

    셋째, 청소년 대상 역량 기반 청소년 활동 지원체계를 구축하고 디지털 기술을 적극 활용하여 통합 전산화된 청소년 활동·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한다. 청소년들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역량을 진단하고 개발할 수 있도록 역량 지표 개발과 역량 기반의 청소년 활동체계를 구축하고, 청소년들이 각종 활동 정보를 공유하고 성과를 집적할 수 있도록 디지털플랫폼을 구축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위기 청소년이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조기 발굴해 상담·보호 및 자립까지 지속적·종합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도록 관계기관 간 협력을 강화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여성가족부, 교육부, 고용노동부, 경찰청 등 청소년 정책 관련 기관 간의 협력을 강화하여 학교 밖 청소년*, 가출 청소년 등 청소년 특성에 맞는 맞춤형 지원을 확대하고, 주거 우선 지원과 취업지원을 통해 위기의 회전문을 차단하고 위기 청소년의 자립을 지원하고자 한다.

    정부는 앞으로의 전반적인 청소년 정책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청소년의 건강한 성장과 보호가 그동안 청소년 정책의 목표였다면 이제는 청소년의 민주 시민으로서의 역량 강화와 4차 산업 혁명에 따른 시대 변화의 적응이 큰 과제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제들을 해결하는 것에 여성가족부는 집중을 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도 앞으로 1년 동안 이 칼럼을 통해 정부의 청소년 정책과 중요한 청소년 관련 문제들에 대해서 다룸으로써 정부의 청소년 정책을 알리고 중요한 청소년 관련 문제들에 대해서 상기시키고자 한다. 또한 앞으로 우리나라 청소년 정책은 일부의 정부 관료나 국회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정책이 결정되고 집행되는 폐쇄형에서 정책 입안 및 집행 과정 등 전반적인 과정에 청소년의 참여가 확대되어야 하는 개방형으로 변해야 한다.

    이러한 필자의 관점을 참고해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앞으로도 이 칼럼에 대한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박정우 칼럼리스트 / 법제처 국민법제관, 여성가족 분야

    [알림] 신규 칼럼 연재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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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우 프로필 (사진=공식 페이지 ‘프로대외활동러 박정우’)

    [수완뉴스=편집국] 작년 27일, 국회에서 공직선거법이 개정됨에 따라 만 18세 이상 청소년들도 투표가 가능해졌습니다. 오는 21대 국회부터는 만 18세 이상 청소년들이 직접 자신들의 손으로 국회의원들을 선출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우리는 청소년 정책의 당사자인 청소년들에게 다양한 청소년 관련 사회적 이슈를 상기시키고자 기명칼럼을 기획하였습니다.

    이번 칼럼 연재는 서울 양재고등학교를 졸업해 고려대학교 경제학과/철학과(복수전공) 4학년에 재학중인 박정우 칼럼리스트로 법제처에서 국민법제관, 서울시에서 어린이청소년 인권위원과 참여위원을, 여성가족부 청소년특별회의 서울지역 위원, 청소년유해매체물(음반) 심의위원 등 청소년 관련 활동을 두루 거친 경력을 가졌습니다.

    백제 : 31대 의자왕, 마지막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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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신을 탄압하고, 삼천 궁녀로 상징되는 향락과 퇴폐로 나라를 말아먹은 못난이로 알려져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잘났던 아버지보다 더 잘난, 그래서 백제의 마지막을 초라하지 않게,
    오히려 화려하게 장식했던 뛰어난 군주였다.

    무왕의 장자로 태어났는데, 모계가 불확실 한 것으로 보아 무왕이 왕이 되기 전에 태어난 듯하다.
    무왕의 정비는 사택지적비로 유명한, 당시 백제 최대의 귀족 사택씨인데,
    정비의 자식이 아닌 의자왕은 사택씨의 견제로 나이 40이 다 되어서야 태자 책봉을 받을 수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용맹스럽고 담이 크며 결단력이 있었고,
    어버이를 효로써 섬기고 형제와 우애롭게 지내어 해동증자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하는데,
    하필 증자인 것으로 보아 아버지처럼 유학을 좋아했나 보다.
    기세등등한 계모와 외척들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해 공부 열심히 하고, 예의 바르고, 그랬을 것이다.

    641년, 살얼음판 같았을 9년 간의 태자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후엔, 당태종의 책봉을 받아 정통성을 확보하였으며,
    별명에 걸맞게 유교 이념을 정치에 적용시키며 민심을 다독였다.
    이듬해엔 대대적인 친정을 하여,
    낙동강 서편에 위치한 미후성 등의 40여 성을 획득하는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는 신라가 병탄했던 옛 가야지역의 대부분으로, 선대의 숙원을 이룬 것이었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업적인데 의자왕은 그해 가을 윤충에게 군사 1만을 주어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그런데 대야성은 당시 신라의 실권자 김춘추의 사위가 성주로 있었던,
    가야지역을 통치하는 거점이자 내륙지방으로 통하는 요충지로서 신라의 목줄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이로써 신라는 반 쯤 죽은 것이 되었다.
    윤충은 김춘추의 사위, 딸, 외손주들까지 모조리 목을 베어 버렸다고 하는데,
    이 또한 성종의 앙갚음을 반 정도는 한 셈이었고.

    재위 초의 의자왕은 안으로는 온화한 정치로 민심을 얻고 밖으로는 숙적 신라를 공격하여,
    정치적 위상을 드높였으며 왕권을 강화하였다.
    643년 정월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으며, 11월에는 고구려와 화친을 맺는 한편,
    당항성을 공격하여 신라가 당에 입조하는 길을 끊어버리고자 하였다.
    비록 당항성은 당의 압력때문에 함락하지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으나,
    그 이후에도 거의 매년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를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몰아 넣었다.
    이 시기의 백제는 실질적으로 한반도 최강국이었다.

    신라는 당에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당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의 편을 들었는데,
    이에 의자왕은 당의 잇따른 군사적 실패 및 오랜 숙적 고구려와의 관계 개선 등으로 자신감을 얻었는지,
    당을 버리고 고구려, 백제, 왜를 잇는 종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어제의 적 고구려,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의 목을 조였다.
    이는 당시 상황에서는 나름 합리적인 선택으로서,
    사방으로 포위된 신라는 김유신의 분전으로 겨우 연명하며 당에 비명을 질러대는 수밖에 없었다.

    국력 신장과 군사적 승리로 자신감을 갖게된 의자왕은 계모 사택비의 사망 이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사택씨 등 정적들을 제거하였으며, 계백, 흑치상지 등 친위세력들을 대거 승진시켰다.
    이때 자신의 서자 41명을 모두 좌평으로 임명했다고 하는데,
    모조리 자식은 아니었을 것이고 자식 뻘의 왕족들이었을 것이다.
    마치 근초고왕의 재림을 보는 듯하다.

    의자왕은 대규모 숙청을 감행한 후에는 긴장이 풀렸는지, 후대에 악평의 원인이 된 사치와 향락에 빠지게 되었고,
    이 때 대부인 은고의 전횡 및 태자의 교체 그리고 성충, 흥수의 투옥 등 내부의 혼란이 발생하였는데,
    이틈을 노린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당고종은 대 고구려 전쟁의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하고 신라도 구할겸, 백제를 정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백제는 개국한지 678년째인 660년,
    소정방의 13만 당군과 김유신의 5만 신라군의 연합 공격에 의해 무너졌는데,
    이는 당군의 기벌포 상륙으로부터 고작 10일만으로, 당시 백제의 국력이나 의자왕의 역량에 비추어 너무도 허무한 결과였다.

    액면만 보면, 잘하다가 갑자기 노망이 나서 한순간에 나라를 말아먹은 꼴이나,
    고대에서 왕의 사치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기도 하였으므로,
    재정만 받쳐준다면 그다지 나쁠 것은 없었다. 경기 부양 효과도 있고.
    그리고 충신들은 숙청했다는 내부 혼란도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 중에 발생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으므로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다만 당이 직접 공격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직접적인 패인이었고,
    고질적인 중앙과 지방세력 간의 갈등으로 인해,
    국난의 시기에도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한 것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이유가 되었다.
    부흥운동에서 나타나는 그 저력을 당과의 싸움에 결집시킬 수 있었다면,
    계백의 5000 결사대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의자왕은 낙화암의 전설을 남기고 당으로 끌려가 얼마 후 병사하였는데,
    이 삼천궁녀 이야기는 비극적 아름다움의 극치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나,
    당시 사비성의 인구로 유추하여 볼 때 궁녀를 3000명 씩이나 채용할 수 없고,
    전국에서 조달했다고 하더라도, 그 비용도 비용이지만,
    다 늙은 왕의 이러한 만행으로 혼인 기회를 박탈당한, 왕권의 기반이라고도 할 수있는 젊은 병사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을 것이므로,
    만일 의자왕이 전대미문의 폭군에 호색한이라 실제로 이러한 미친 짓을 했다면,
    그 행적이 외국의 사서에라도 남아 있을 텐데, 그러한 기록이 전무한 것으로 보아,
    이 전설은 백제의 멸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라에서 조작한 이야기일 것이다.

    백제 : 30대 무왕, 또 한 번의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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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동설화의 남자 주인공으로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를 꼬셔냈다고 알려져있으나,
    당시 신라와 백제의 관계로 보아 택도 없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평왕은 셋째 딸이 없다.

    무왕은 출신 성분이 불확실한데,
    법왕의 아들이라는 설,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설, 그것도 아닌 지방 귀족의 아들이라는 설,
    금강의 과부가 왕과 통정하여 낳은 사생아라는 설…. 등등, 무지 많다.
    아무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어린 시절을 보낸 듯한데,
    누구의 자식이 되었든, 선대의 혼란을 성공적으로 수습하고 무려 42년 간 재위하며 나라를 안정시켰고, 국력을 회복시켰으며,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였다.
    관륵을 일본에 파견하여 천문, 지리, 역법 등에 대한 서적과 불교를 전달하였고,
    수, 당과 관계를 강화하였으며,이 놈들에게 고구려를 공격해달라고 청하였다.
    사비 왕궁을 수리하였고, 궁남지를 만들었으며, 미륵사를 건설하였다.

    증강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신라와 자주 충돌하였는데,
    예전의 백제와 달리 전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관산성 싸움 이후 계속된 패전의 사슬을 끊고, 쇠락해가던 백제에 안정감, 자신감을 되찾아 주었으며,
    가야 멸망 이후 처음으로 낙동강까지 진출하여, 신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재위 후반기에 익산 지역을 중시하여 천도할 계획을 세웠으며,
    왕궁인 평성을 축조하고 제석사를 창건하기도 했으나, 천도를 하지는 못하였다.
    이렇게 영명했던 무왕이 재위 말기에는 노망이 들었는지, 사치스러운 연회와 토목공사를 빈번하게 시행하여, 국력을 낭비했다는 비판을 자주 받으나,
    당시 백제의 재정에 비추어 이 정도 사치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오히려 경기를 활성화시키는 효과도 있었으므로,
    이는 무왕이 차원이 다른 재력과 능력을 귀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동안 실추되기만 했던 왕실의 위엄을 새로이 하고 귀족들의 잠재적 반역의지를 꺾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이벤트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따라서 이러한 비판은 왕권의 대척점에 섰던 귀족들이나, 통일 이후 정치적 목적상 백제를 깎아 내려야 했던 신라의 악의적 기술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백제왕들 중 드물게, 나름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다 간 명군이었다.

    백제 : 29대 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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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대 법왕

    법문의 왕, 즉 부처라는 소리이다.
    불교를 매우 숭상하여 백성들이 살생하는 것을 금하였다.
    물고기도 못 잡게 하고, 사냥도 못하게 하고, 사형제도도 폐지시켜 버렸다.

    혜왕의 아들로서 재위 기간은 달랑 2년인데,
    석연치 않은 혜왕의 즉위와 이 양반의 이상한 짓, 그리고 짧은 재위기간을 생각해 보면,
    이 양반이 위덕왕과 아좌태자에게 뭔가 아주 몹쓸 짓을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왕 자리가 탐나 덜컥 일을 저지르고 보니 지옥이 겁나더라?
    맥베드.

    백제 : 28대 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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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대 혜왕

    삼국사기에는 즉위기사와 사망기사만 나와 있다.

    위덕왕이 죽자 일본에 있는 아좌태자 대신에 왕위에 올랐지만 이미 나이가 71세였고 재위 1년 만에 고령으로 사망하였다.
    태자가 일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71세로 저승 문턱에 반쯤 올라선 왕의 동생을 왕위에 올린다?
    뭔가 냄새가 심하게 나지만 기록이 없으니 알 길은 없고,

    나라꼴이 어땠을까는 짐작이 간다.

    백제 : 27대 위덕왕, 한 많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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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대 위덕왕

    이 양반의 태자 시절을 보면 마치 근구수왕을 보는 듯하다.
    용맹이 대단해 고구려 군과 싸울 때 일기토도 마다하지 않았고, 아버지와 사이도 좋아 국정에 적극 참여하였다. 패기만만한 멋진 태자였던 것이다
    성왕이 근초고왕처럼 성공하였더라면 위덕왕도 해피한 인생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나.
    자신이 주도한 관산성 싸움에서, 아버지 성왕이 복병에 걸려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바람에,
    암울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하류 지역을 잃게 되자, 열 받은 태자는 신중론을 펴는 귀족들을 누르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북벌군을 이끌고 관산성으로 나아갔는데,
    진흥왕이라는 명군 덕에 전성기를 맞이한 신라는 위덕왕의 성질을 받아주지 않았다.
    지원 나온 아버지 성왕이 사망하고 태자 자신도 포위되어,
    4인의 좌평과 29,600명의 군사가 죽고서야, 겨우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죽고 싶었을 것이다.

    죄책감에 빠진 위덕왕은 왕위 계승을 포기하고 중이 되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왕위는 이었으나 아버지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과,
    북벌을 주장, 주도하고 패배하여 국가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 정치적 책임은 위덕왕을 평생 따라다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선왕들이 고생 끝에 강화한 왕권은 약화되었고, 귀족들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소위 대성팔족이 지배하는 정치 체제가 되었다.

    왕권이 약화되었어도 신라에 대한 복수는 중요한 정치적 명분이었으므로,
    신라와는 끊임없이 대립하였으나 진흥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가 적의 적인 사이가 되어,
    서로의 묵인 하에 번갈아 백제를 공격하는 짜증나는 상황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백제는 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패퇴하였고,
    열 받은 신라의 공격에 애꿎은 가야만 망하고 말았다.
    가야 합병의 주역은 우산국을 병합한 이사부와 미실의 연인 사다함이었다.

    근성은 아신왕을 비롯해, 면면히 내려오는 백제 왕실의 내력인지,
    이 지경이 되어서도 위덕왕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전쟁을 준비하였으며 진흥왕이 죽자, 호기라고 판단했는지 16년 만에 신라를 또 쳤으나,
    패배하였다. 얼마나 원통했을까.

    울분의 세월을 보내던 중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자,
    위덕왕은 수문제를 충동질하여 전쟁을 부추겼으나,
    1차 여수 전쟁에서 수나라는 고구려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위덕왕은 수문제를 재차 충동질하였으나, 호응을 받지 못하였고,
    도리어 고구려의 보복 공격만 받았다.

    이렇게 되는 일 하나 없는 좌절의 인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명은 상당히 길어 74세까지 살았는데,
    이상하게도, 후계를 아들이 아닌 나이 많은 동생이 이었다.
    뭔가 찜찜하지만 속사정을 알 길이 없다.

    재위만 45년, 참으로 한 많은 세월이었다.

    백제 : 26대 성왕, 목이 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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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6 대 성왕

    지식이 영매하고, 결단력이 있고, 천도지리에 통달하였고….. 아무튼 똑똑하였던 모양이다.
    부왕 무령왕의 뒤를 이어 백제의 부흥기를 이끌었으며,
    공주에서 부여로 수도를 옮겨 사비시대를 열었고,
    국호를 일시 남부여로 고쳐 부여와 연계를 강조하였다.

    성 뺐기고, 왕 죽고, 강제로 쫓겨나, 죽지 못해 옮길 수밖에 없었던, 치욕스러웠던 웅진 천도와는 달리,
    사비 천도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기획된 천도이며 왕권 강화의 마무리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성왕은 천도를 전후하여 내외관제를 16관등 22부제로 정비하였고, 종래의 담로제를 5방·군·성(현)제로 개편하는 등의 개혁을 통하여, 귀족회의체의 정치적 발언권을 약화시키고 왕권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확립하였다.

    불교에도 심취하여 경전을 수입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였으며 일본에 노리사치계를 보내어 불교를 전해주었다.
    성왕의 고구려쪽 파트너는 안장왕이었는데, 여전히 강대한 무력을 보유한 고구려를 백제 단독으로 막아내기에는 무리였으므로,
    전대부터 유지되어 온 신라와의 동맹관계를 그대로 지속하여 고구려의 남진 압력에 대항하였고,
    양, 왜 등과도 외교관계를 유지 발전시켜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551년 백제군을 주축으로 하는 신라, 가야 삼개 국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하였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사비회의를 통해 가야연맹을 영향권 안에 넣기 시작했으며, 가야연맹의 강자 안로국을 무력화시켰다.
    오랜만에 보는 호호탕탕한 백제의 모습이었는데, 아쉽게도 여기까지였다.
    어렵게 회복한 한강 하류 유역을 신라에게 빼앗기고만 것이다.

    신라에 복수를 다짐한 성왕은 553년 딸을 신라 왕실에 시집보내 신라의 이목을 가린 후 554년 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쳤다.
    싸움은 초반전에는 백제가 유리하였으나, 관산성 싸움에서 성왕이 복병에게 사로잡혀 목이 잘리면서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
    백제로서는 참으로 어이없고 아쉬운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고구려에게 목이 잘린 개로왕은 무력의 현저한 차이로 인한 어쩔 수 없는 불행의 성격이 강하였으나, 신라에 목이 잘린 성왕은 불운이었다.
    불행이든 불운이든 기구한 백제의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성왕의 불운은 전쟁의 패전으로 이어졌고, 
    패전의 결과 백제의 정치는 기껏 확립했던 왕권중심체제에서 귀족중심체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1세기 이상 지속되었던 나제동맹은 당연히 완전히 깨어졌고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아신왕이 광개토대왕이라는 천적으로 인해 좌절한 것처럼,
    성왕 또한 우리 역사 상 또 하나의 영명한 군주인 진흥왕을 만나 그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백제 : 25대 무령왕, 부흥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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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대 무령왕

    온전한 형태로 발굴된 무령왕릉 덕분에 백제의 왕들 중 가장 유명한 양반이다.
    출생에 대해서는 불륜의 씨앗이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정황상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이 맞는 것 같다.

    일본에서 태어났고, 동성왕이 시해되자 왕위에 올랐다.
    동성왕 반대파에 의해 왕위에 추대 되었으나, 반정공신이라 할 수 있는 백가를 토벌하고 귀족세력을 억눌렀다.
    동성왕이 말년에 향락에 빠져 포학무도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국력을 회복시키고 왕권을 강화해준 덕에 왕노릇을 제대로 할 수 았었을 것이다.

    22개 담로에 대한 장악력을 높여 중앙집권적 정치안정을 이루었고,
    좌평제를 개편하여 신, 구세력을 통제하였다.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고 제방을 구축하고 농사를 권장하는 등 민생안정에도 힘썼으며,
    중국 양나라와 외교 관계를 강화했고, 일본과 관계를 더욱 돈독히 했다.
    즉위 첫 해부터 문자명왕의 고구려를 공격했고, 말갈족과도 여러 번 싸웠다.

    말갈족, 한 동안 찍소리 없더니 동성왕 때부터 또 난리를 치는데, 무슨 일일까?
    고구려는 한강유역에서 백제를 쫒아 내었지만 완전하게 장악하지는 못했는데,
    백제의 빈자리를 원주민격인 말갈족이 다시 채웠거나, 아니면 백제에 복속했던 말갈이 주인을 바꾸어 이번에는 고구려에 복속했던 것은 아닐까?
    백제가 다시 한강으로 진출하자 말갈은 겨우 되찾은 서식지를 지키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사정이야 잘 모르겠지만, 뭐가 어찌 되었건 무령왕은 말갈과 싸워 한강 유역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남쪽으로도 진출하여 침미다례국을 완전히 병합하며 마한세력을 일소하였으며,
    동쪽으로는 섬진강 일대를 확보하고, 새로 확보한 지역에 군령과 성주를 파견하는 등, 장악력을 높였다.
    덕분에 한때 신라에 맞먹을 만큼 팽창했던 대가야가 몰락하였다.

    웅진 시대 왕 중 유일하게 천수를 누린 왕으로,
    62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약 23년간 재위하며 백제의 부흥기를 이끌었다.
    키가 8척에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망이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
    명군이었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무덤들 가운데 주인과 매장 연도를 정확히 알려주는 최초의 무덤인데, 박정희 시절 마치 도굴하듯이 발굴하여 말이 많았다.
    금제관식, 금제심엽형이식(귀걸이), 금제뒤꽂이, 은제팔찌, 청동신수경, 석수 등을 포함하여 총 2,900여 점에 달하는 부장품들이 출토되었다.
    신비의 왕국, 백제에 대한 궁금증을 많이 풀어준 왕릉이다.
    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