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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미약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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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 멸망 그리고 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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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누구나 알고 싶어 하는 청소년 정책, 당신은 알고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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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우 칼럼리스트

[수완뉴스=박정우] 2019년 12월 27일 국회에서 공직선거법 일부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선거권 연령이 만 19세에서 만 18세로 낮아지게 됐다. 그러면서 청소년의 정치참여는 현재 우리 사회의 큰 이슈가 됐다. 특히 만 18세인 2002년 4월 15일 이전에 태어난 일부 고3 학생들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면서 학교의 정치화 vs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 확대라는 그 논란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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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신규 칼럼 연재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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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우 프로필 (사진=공식 페이지 ‘프로대외활동러 박정우’)

[수완뉴스=편집국] 작년 27일, 국회에서 공직선거법이 개정됨에 따라 만 18세 이상 청소년들도 투표가 가능해졌습니다. 오는 21대 국회부터는 만 18세 이상 청소년들이 직접 자신들의 손으로 국회의원들을 선출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우리는 청소년 정책의 당사자인 청소년들에게 다양한 청소년 관련 사회적 이슈를 상기시키고자 기명칼럼을 기획하였습니다.

이번 칼럼 연재는 서울 양재고등학교를 졸업해 고려대학교 경제학과/철학과(복수전공) 4학년에 재학중인 박정우 칼럼리스트로 법제처에서 국민법제관, 서울시에서 어린이청소년 인권위원과 참여위원을, 여성가족부 청소년특별회의 서울지역 위원, 청소년유해매체물(음반) 심의위원 등 청소년 관련 활동을 두루 거친 경력을 가졌습니다.

백제 : 31대 의자왕, 마지막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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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을 탄압하고, 삼천 궁녀로 상징되는 향락과 퇴폐로 나라를 말아먹은 못난이로 알려져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잘났던 아버지보다 더 잘난, 그래서 백제의 마지막을 초라하지 않게,
오히려 화려하게 장식했던 뛰어난 군주였다.

무왕의 장자로 태어났는데, 모계가 불확실 한 것으로 보아 무왕이 왕이 되기 전에 태어난 듯하다.
무왕의 정비는 사택지적비로 유명한, 당시 백제 최대의 귀족 사택씨인데,
정비의 자식이 아닌 의자왕은 사택씨의 견제로 나이 40이 다 되어서야 태자 책봉을 받을 수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용맹스럽고 담이 크며 결단력이 있었고,
어버이를 효로써 섬기고 형제와 우애롭게 지내어 해동증자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하는데,
하필 증자인 것으로 보아 아버지처럼 유학을 좋아했나 보다.
기세등등한 계모와 외척들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해 공부 열심히 하고, 예의 바르고, 그랬을 것이다.

641년, 살얼음판 같았을 9년 간의 태자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후엔, 당태종의 책봉을 받아 정통성을 확보하였으며,
별명에 걸맞게 유교 이념을 정치에 적용시키며 민심을 다독였다.
이듬해엔 대대적인 친정을 하여,
낙동강 서편에 위치한 미후성 등의 40여 성을 획득하는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는 신라가 병탄했던 옛 가야지역의 대부분으로, 선대의 숙원을 이룬 것이었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업적인데 의자왕은 그해 가을 윤충에게 군사 1만을 주어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그런데 대야성은 당시 신라의 실권자 김춘추의 사위가 성주로 있었던,
가야지역을 통치하는 거점이자 내륙지방으로 통하는 요충지로서 신라의 목줄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이로써 신라는 반 쯤 죽은 것이 되었다.
윤충은 김춘추의 사위, 딸, 외손주들까지 모조리 목을 베어 버렸다고 하는데,
이 또한 성종의 앙갚음을 반 정도는 한 셈이었고.

재위 초의 의자왕은 안으로는 온화한 정치로 민심을 얻고 밖으로는 숙적 신라를 공격하여,
정치적 위상을 드높였으며 왕권을 강화하였다.
643년 정월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으며, 11월에는 고구려와 화친을 맺는 한편,
당항성을 공격하여 신라가 당에 입조하는 길을 끊어버리고자 하였다.
비록 당항성은 당의 압력때문에 함락하지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으나,
그 이후에도 거의 매년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를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몰아 넣었다.
이 시기의 백제는 실질적으로 한반도 최강국이었다.

신라는 당에 더욱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당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의 편을 들었는데,
이에 의자왕은 당의 잇따른 군사적 실패 및 오랜 숙적 고구려와의 관계 개선 등으로 자신감을 얻었는지,
당을 버리고 고구려, 백제, 왜를 잇는 종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어제의 적 고구려,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의 목을 조였다.
이는 당시 상황에서는 나름 합리적인 선택으로서,
사방으로 포위된 신라는 김유신의 분전으로 겨우 연명하며 당에 비명을 질러대는 수밖에 없었다.

국력 신장과 군사적 승리로 자신감을 갖게된 의자왕은 계모 사택비의 사망 이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사택씨 등 정적들을 제거하였으며, 계백, 흑치상지 등 친위세력들을 대거 승진시켰다.
이때 자신의 서자 41명을 모두 좌평으로 임명했다고 하는데,
모조리 자식은 아니었을 것이고 자식 뻘의 왕족들이었을 것이다.
마치 근초고왕의 재림을 보는 듯하다.

의자왕은 대규모 숙청을 감행한 후에는 긴장이 풀렸는지, 후대에 악평의 원인이 된 사치와 향락에 빠지게 되었고,
이 때 대부인 은고의 전횡 및 태자의 교체 그리고 성충, 흥수의 투옥 등 내부의 혼란이 발생하였는데,
이틈을 노린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당고종은 대 고구려 전쟁의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하고 신라도 구할겸, 백제를 정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백제는 개국한지 678년째인 660년,
소정방의 13만 당군과 김유신의 5만 신라군의 연합 공격에 의해 무너졌는데,
이는 당군의 기벌포 상륙으로부터 고작 10일만으로, 당시 백제의 국력이나 의자왕의 역량에 비추어 너무도 허무한 결과였다.

액면만 보면, 잘하다가 갑자기 노망이 나서 한순간에 나라를 말아먹은 꼴이나,
고대에서 왕의 사치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기도 하였으므로,
재정만 받쳐준다면 그다지 나쁠 것은 없었다. 경기 부양 효과도 있고.
그리고 충신들은 숙청했다는 내부 혼란도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 중에 발생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으므로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다만 당이 직접 공격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직접적인 패인이었고,
고질적인 중앙과 지방세력 간의 갈등으로 인해,
국난의 시기에도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한 것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이유가 되었다.
부흥운동에서 나타나는 그 저력을 당과의 싸움에 결집시킬 수 있었다면,
계백의 5000 결사대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의자왕은 낙화암의 전설을 남기고 당으로 끌려가 얼마 후 병사하였는데,
이 삼천궁녀 이야기는 비극적 아름다움의 극치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나,
당시 사비성의 인구로 유추하여 볼 때 궁녀를 3000명 씩이나 채용할 수 없고,
전국에서 조달했다고 하더라도, 그 비용도 비용이지만,
다 늙은 왕의 이러한 만행으로 혼인 기회를 박탈당한, 왕권의 기반이라고도 할 수있는 젊은 병사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을 것이므로,
만일 의자왕이 전대미문의 폭군에 호색한이라 실제로 이러한 미친 짓을 했다면,
그 행적이 외국의 사서에라도 남아 있을 텐데, 그러한 기록이 전무한 것으로 보아,
이 전설은 백제의 멸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라에서 조작한 이야기일 것이다.

백제 : 30대 무왕, 또 한 번의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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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설화의 남자 주인공으로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를 꼬셔냈다고 알려져있으나,
당시 신라와 백제의 관계로 보아 택도 없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평왕은 셋째 딸이 없다.

무왕은 출신 성분이 불확실한데,
법왕의 아들이라는 설,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설, 그것도 아닌 지방 귀족의 아들이라는 설,
금강의 과부가 왕과 통정하여 낳은 사생아라는 설…. 등등, 무지 많다.
아무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어린 시절을 보낸 듯한데,
누구의 자식이 되었든, 선대의 혼란을 성공적으로 수습하고 무려 42년 간 재위하며 나라를 안정시켰고, 국력을 회복시켰으며,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였다.
관륵을 일본에 파견하여 천문, 지리, 역법 등에 대한 서적과 불교를 전달하였고,
수, 당과 관계를 강화하였으며,이 놈들에게 고구려를 공격해달라고 청하였다.
사비 왕궁을 수리하였고, 궁남지를 만들었으며, 미륵사를 건설하였다.

증강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신라와 자주 충돌하였는데,
예전의 백제와 달리 전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관산성 싸움 이후 계속된 패전의 사슬을 끊고, 쇠락해가던 백제에 안정감, 자신감을 되찾아 주었으며,
가야 멸망 이후 처음으로 낙동강까지 진출하여, 신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재위 후반기에 익산 지역을 중시하여 천도할 계획을 세웠으며,
왕궁인 평성을 축조하고 제석사를 창건하기도 했으나, 천도를 하지는 못하였다.
이렇게 영명했던 무왕이 재위 말기에는 노망이 들었는지, 사치스러운 연회와 토목공사를 빈번하게 시행하여, 국력을 낭비했다는 비판을 자주 받으나,
당시 백제의 재정에 비추어 이 정도 사치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오히려 경기를 활성화시키는 효과도 있었으므로,
이는 무왕이 차원이 다른 재력과 능력을 귀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동안 실추되기만 했던 왕실의 위엄을 새로이 하고 귀족들의 잠재적 반역의지를 꺾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이벤트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따라서 이러한 비판은 왕권의 대척점에 섰던 귀족들이나, 통일 이후 정치적 목적상 백제를 깎아 내려야 했던 신라의 악의적 기술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백제왕들 중 드물게, 나름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다 간 명군이었다.

백제 : 29대 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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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대 법왕

법문의 왕, 즉 부처라는 소리이다.
불교를 매우 숭상하여 백성들이 살생하는 것을 금하였다.
물고기도 못 잡게 하고, 사냥도 못하게 하고, 사형제도도 폐지시켜 버렸다.

혜왕의 아들로서 재위 기간은 달랑 2년인데,
석연치 않은 혜왕의 즉위와 이 양반의 이상한 짓, 그리고 짧은 재위기간을 생각해 보면,
이 양반이 위덕왕과 아좌태자에게 뭔가 아주 몹쓸 짓을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왕 자리가 탐나 덜컥 일을 저지르고 보니 지옥이 겁나더라?
맥베드.

백제 : 28대 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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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대 혜왕

삼국사기에는 즉위기사와 사망기사만 나와 있다.

위덕왕이 죽자 일본에 있는 아좌태자 대신에 왕위에 올랐지만 이미 나이가 71세였고 재위 1년 만에 고령으로 사망하였다.
태자가 일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71세로 저승 문턱에 반쯤 올라선 왕의 동생을 왕위에 올린다?
뭔가 냄새가 심하게 나지만 기록이 없으니 알 길은 없고,

나라꼴이 어땠을까는 짐작이 간다.

백제 : 27대 위덕왕, 한 많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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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대 위덕왕

이 양반의 태자 시절을 보면 마치 근구수왕을 보는 듯하다.
용맹이 대단해 고구려 군과 싸울 때 일기토도 마다하지 않았고, 아버지와 사이도 좋아 국정에 적극 참여하였다. 패기만만한 멋진 태자였던 것이다
성왕이 근초고왕처럼 성공하였더라면 위덕왕도 해피한 인생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나.
자신이 주도한 관산성 싸움에서, 아버지 성왕이 복병에 걸려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바람에,
암울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하류 지역을 잃게 되자, 열 받은 태자는 신중론을 펴는 귀족들을 누르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북벌군을 이끌고 관산성으로 나아갔는데,
진흥왕이라는 명군 덕에 전성기를 맞이한 신라는 위덕왕의 성질을 받아주지 않았다.
지원 나온 아버지 성왕이 사망하고 태자 자신도 포위되어,
4인의 좌평과 29,600명의 군사가 죽고서야, 겨우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죽고 싶었을 것이다.

죄책감에 빠진 위덕왕은 왕위 계승을 포기하고 중이 되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왕위는 이었으나 아버지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과,
북벌을 주장, 주도하고 패배하여 국가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 정치적 책임은 위덕왕을 평생 따라다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선왕들이 고생 끝에 강화한 왕권은 약화되었고, 귀족들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소위 대성팔족이 지배하는 정치 체제가 되었다.

왕권이 약화되었어도 신라에 대한 복수는 중요한 정치적 명분이었으므로,
신라와는 끊임없이 대립하였으나 진흥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가 적의 적인 사이가 되어,
서로의 묵인 하에 번갈아 백제를 공격하는 짜증나는 상황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백제는 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패퇴하였고,
열 받은 신라의 공격에 애꿎은 가야만 망하고 말았다.
가야 합병의 주역은 우산국을 병합한 이사부와 미실의 연인 사다함이었다.

근성은 아신왕을 비롯해, 면면히 내려오는 백제 왕실의 내력인지,
이 지경이 되어서도 위덕왕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전쟁을 준비하였으며 진흥왕이 죽자, 호기라고 판단했는지 16년 만에 신라를 또 쳤으나,
패배하였다. 얼마나 원통했을까.

울분의 세월을 보내던 중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자,
위덕왕은 수문제를 충동질하여 전쟁을 부추겼으나,
1차 여수 전쟁에서 수나라는 고구려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위덕왕은 수문제를 재차 충동질하였으나, 호응을 받지 못하였고,
도리어 고구려의 보복 공격만 받았다.

이렇게 되는 일 하나 없는 좌절의 인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명은 상당히 길어 74세까지 살았는데,
이상하게도, 후계를 아들이 아닌 나이 많은 동생이 이었다.
뭔가 찜찜하지만 속사정을 알 길이 없다.

재위만 45년, 참으로 한 많은 세월이었다.

백제 : 26대 성왕, 목이 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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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6 대 성왕

지식이 영매하고, 결단력이 있고, 천도지리에 통달하였고….. 아무튼 똑똑하였던 모양이다.
부왕 무령왕의 뒤를 이어 백제의 부흥기를 이끌었으며,
공주에서 부여로 수도를 옮겨 사비시대를 열었고,
국호를 일시 남부여로 고쳐 부여와 연계를 강조하였다.

성 뺐기고, 왕 죽고, 강제로 쫓겨나, 죽지 못해 옮길 수밖에 없었던, 치욕스러웠던 웅진 천도와는 달리,
사비 천도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한 기획된 천도이며 왕권 강화의 마무리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성왕은 천도를 전후하여 내외관제를 16관등 22부제로 정비하였고, 종래의 담로제를 5방·군·성(현)제로 개편하는 등의 개혁을 통하여, 귀족회의체의 정치적 발언권을 약화시키고 왕권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확립하였다.

불교에도 심취하여 경전을 수입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였으며 일본에 노리사치계를 보내어 불교를 전해주었다.
성왕의 고구려쪽 파트너는 안장왕이었는데, 여전히 강대한 무력을 보유한 고구려를 백제 단독으로 막아내기에는 무리였으므로,
전대부터 유지되어 온 신라와의 동맹관계를 그대로 지속하여 고구려의 남진 압력에 대항하였고,
양, 왜 등과도 외교관계를 유지 발전시켜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551년 백제군을 주축으로 하는 신라, 가야 삼개 국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하였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사비회의를 통해 가야연맹을 영향권 안에 넣기 시작했으며, 가야연맹의 강자 안로국을 무력화시켰다.
오랜만에 보는 호호탕탕한 백제의 모습이었는데, 아쉽게도 여기까지였다.
어렵게 회복한 한강 하류 유역을 신라에게 빼앗기고만 것이다.

신라에 복수를 다짐한 성왕은 553년 딸을 신라 왕실에 시집보내 신라의 이목을 가린 후 554년 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쳤다.
싸움은 초반전에는 백제가 유리하였으나, 관산성 싸움에서 성왕이 복병에게 사로잡혀 목이 잘리면서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
백제로서는 참으로 어이없고 아쉬운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고구려에게 목이 잘린 개로왕은 무력의 현저한 차이로 인한 어쩔 수 없는 불행의 성격이 강하였으나, 신라에 목이 잘린 성왕은 불운이었다.
불행이든 불운이든 기구한 백제의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성왕의 불운은 전쟁의 패전으로 이어졌고, 
패전의 결과 백제의 정치는 기껏 확립했던 왕권중심체제에서 귀족중심체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1세기 이상 지속되었던 나제동맹은 당연히 완전히 깨어졌고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아신왕이 광개토대왕이라는 천적으로 인해 좌절한 것처럼,
성왕 또한 우리 역사 상 또 하나의 영명한 군주인 진흥왕을 만나 그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백제 : 25대 무령왕, 부흥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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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대 무령왕

온전한 형태로 발굴된 무령왕릉 덕분에 백제의 왕들 중 가장 유명한 양반이다.
출생에 대해서는 불륜의 씨앗이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정황상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이 맞는 것 같다.

일본에서 태어났고, 동성왕이 시해되자 왕위에 올랐다.
동성왕 반대파에 의해 왕위에 추대 되었으나, 반정공신이라 할 수 있는 백가를 토벌하고 귀족세력을 억눌렀다.
동성왕이 말년에 향락에 빠져 포학무도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국력을 회복시키고 왕권을 강화해준 덕에 왕노릇을 제대로 할 수 았었을 것이다.

22개 담로에 대한 장악력을 높여 중앙집권적 정치안정을 이루었고,
좌평제를 개편하여 신, 구세력을 통제하였다.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고 제방을 구축하고 농사를 권장하는 등 민생안정에도 힘썼으며,
중국 양나라와 외교 관계를 강화했고, 일본과 관계를 더욱 돈독히 했다.
즉위 첫 해부터 문자명왕의 고구려를 공격했고, 말갈족과도 여러 번 싸웠다.

말갈족, 한 동안 찍소리 없더니 동성왕 때부터 또 난리를 치는데, 무슨 일일까?
고구려는 한강유역에서 백제를 쫒아 내었지만 완전하게 장악하지는 못했는데,
백제의 빈자리를 원주민격인 말갈족이 다시 채웠거나, 아니면 백제에 복속했던 말갈이 주인을 바꾸어 이번에는 고구려에 복속했던 것은 아닐까?
백제가 다시 한강으로 진출하자 말갈은 겨우 되찾은 서식지를 지키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사정이야 잘 모르겠지만, 뭐가 어찌 되었건 무령왕은 말갈과 싸워 한강 유역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남쪽으로도 진출하여 침미다례국을 완전히 병합하며 마한세력을 일소하였으며,
동쪽으로는 섬진강 일대를 확보하고, 새로 확보한 지역에 군령과 성주를 파견하는 등, 장악력을 높였다.
덕분에 한때 신라에 맞먹을 만큼 팽창했던 대가야가 몰락하였다.

웅진 시대 왕 중 유일하게 천수를 누린 왕으로,
62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약 23년간 재위하며 백제의 부흥기를 이끌었다.
키가 8척에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망이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
명군이었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무덤들 가운데 주인과 매장 연도를 정확히 알려주는 최초의 무덤인데, 박정희 시절 마치 도굴하듯이 발굴하여 말이 많았다.
금제관식, 금제심엽형이식(귀걸이), 금제뒤꽂이, 은제팔찌, 청동신수경, 석수 등을 포함하여 총 2,900여 점에 달하는 부장품들이 출토되었다.
신비의 왕국, 백제에 대한 궁금증을 많이 풀어준 왕릉이다.
볼만하다.

백제 : 24대 동성왕, 회복의 기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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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 대 동성왕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로, 해구의 반란을 토벌한 진씨 세력에 의해 옹립되었으나,
어린나이에 등극하여 멋도 몰랐던 삼근왕과는 다르게, 신진세력을 대거 등용하는 등 왕 노릇을 제대로 하였다.
누대의 대 귀족이자 반정 공신이나 다름없는 진씨를 다루는 솜씨로 보아 대단한 정치력을 지녔던 것 같다.

481년(동성왕 3년)에는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한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을, 신라 및 가야와 연합하여 격퇴했으며,
백제로 쳐들어 온 북위군을 격파했다….는데, 요서백제? 믿기도 어렵고 안 믿기도 그렇고.
아무튼 요서에 친 백제 세력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백제와 왜의 관계처럼.
그리고 오랜만에 말갈이 튀어 나오는데,
그사이에 고구려에 복속되었었는지, 아니면 어디 산골에 짱 박혀 있었는지는 모르나,
얘들도 이 땅에서 굳세게 살아온 한반도 원주민임에는 틀림없다.

494년과 495년에는, 두 해에 걸쳐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침공해오는 고구려의 군대를 신라와 연합하여 격퇴하였고,
498년에는 탐라국을 복속시켰다.

개로왕 이후 단절된 중국(특히 남조)과의 관계를 회복시켰고,
신라의 소지왕과 결혼동맹을 맺었으며,
가야의 혼란에 개입, 가야연맹에 대한 세력 확대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회복된 군세를 바탕으로 다시 한강 근처까지 진출하였다.

웅진천도 이후 계속된 혼란을 수습하고, 실추된 왕권과 국제적 위상을 어느 정도 살려내어, 
무령왕 시기의 재 중흥의 발판을 만드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말기에 이르러서는 점차 향락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고 놀기만 했다고 한다.

501년 최측근 백가에게 살해당했는데,
백가는 동성왕을 살해한 후 반란을 일으켰으나, 무령왕에게 저항 없이 항복하였고 처형되었다고 한다.
뭔가 냄새가 나지만 기록이 없다.
재위는 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