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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청소년활동진흥센터, 2019년도 ‘경기도청소년자원봉사대회’ 시상식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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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문화의전당 꿈꾸는컨벤션센터에서 여성가족부와 경기도가 주최하고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과 경기도청소년활동진흥센터가 주관하는 ‘2019년도 경기도청소년자원봉사대회’ 시상식이 11월 9일(토) 열렸다.

    경기도청소년자원봉사대회는 청소년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를 고취시키고 청소년의 자발적인 참여의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매년 실시되는 자원봉사대회 시상식이다.

    경기도청소년자원봉사대회는 지역사회의 모범적인 청소년 및 지도자, 청소년 동아리를 발굴하고 시상해 청소년들의 봉사활동 참여를 유도하는 데 행사 목적이 있다.

    이번 시상식에서는 여성가족부장관상 6개, 경기도지사상 12개를 비롯하여 총 48개의 상이 시상됐다. 또한 수상자를 비롯해 축하객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시상식에서 수상을 축하하기 위한 수원시청소년재단 수원청소년문화센터의 방과후아카데미 합창단 ‘see밀레’의 멋진 축하공연과 여성가족부장관상 수상자 개인, 동아리부문 수상자 사례발표를 보며 정보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수상자는 자원봉사활동 청소년부문, 동아리부문, 지도자부문, 터전부문으로 총 4개로 나뉘어졌으며 서류심사와 심층면접심사를 통해 선정됐다.

    편집국 보도팀

    고구려 : 17대 소수림왕, 명군 중의 명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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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자는 구부.
    371년, 화살에 맞은 상처가 덧나 사망한 고국원왕의 뒤를 이었는데,
    왕이 무력화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결사 항전한 군민들 덕분에 평양성은 지켜내었으나,
    이미 아버지가 생전에 남북으로 온갖 망신을 떨며 나라를 알뜰하게 거덜내었기에,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의 동네 국가 수준으로 전락하였으며, 왕실의 권위는 바닥이었다.
    이러한 암담한 상황에서 탈출로를 모색하던 소수림왕은,
    이듬해에 태학을 세우는 한편 불교를 공인 하였다.
    유교 경전을 가르치는 태학은 물론이고, 왕즉불 사상의 불교 또한 왕권 강화에 기여하여,
    국력을 결집시킬 수 있는 수단이었으므로,
    절박한 처지의 고구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는 전진의 승려 순도에 의해 처음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해동고승전 등을 보면 민간에는 이미 한참 전에 퍼져 있었으므로,
    국가의 위기를 맞아, 왕실 차원에서 정식으로 받아들인 것이 처음이라는 뜻일 것이다.
    373년 율령을 반포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였고,
    다음 해에 아도 화상이 들어오자, 불교를 호국사상으로 삼아 사찰을 세우는 등 적극적으로 포교하였다

    재위 5년째인 375년, 백제에 대한 복수를 시작하여 빼앗겼던 수곡성을 되찾았고, 백제의 변경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377년, 거듭되는 변경 침략에 열 받은 백제 근구수왕이 직접 3만 군사를 동원하여 평양성으로 쳐들어왔으나, 달라진 고구려는 이들을 큰 손실 없이 격퇴하였고,
    그 해 11월에는 보복전을 펼쳐 남쪽을 정벌하였다.
    378년 큰 가뭄이 들어 곤경에 빠졌는데, 거란까지 침입하여 약간의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384년 후사없이 서거하여 소수림에 묻혔다.
    14년 1개월간의 재위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지략이 매우 뛰어났으며,
    태자 시절부터 국정에 참여하고 군대를 지휘한 멋진 왕자님이었다.
    불교를 공인하고, 태학을 세우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의 내치의 업적에 비해,
    외정의 화려함은 다소 부족하지만,
    단 5년 만에, 망할 지경의 국가를 정비하여,
    근초고왕이라는 당대의 명군을 상대로 보복을 하고 영토를 회복하였다.
    경이로운 능력이었다.

    우리 역사상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여 나라를 중흥으로 이끈 임금들로는,
    백제의 고이왕, 산라의 법흥왕, 통일신라의 신문왕, 고려의 광종, 조선의 세종대왕 등이 있으나,
    이 분들은 나라가 망조가 든 상태에서 치세를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혁명보다 어렵다는 개혁에 성공하여, 거덜난 나라를 재건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로 전성기로 진입시킨 능력은 고려의 현종에 비견할 수 있고,
    정비한 제도의 양과 질을 비교하면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소수림왕은,
    광개토대왕을 위해 준비된 인물 따위가 아니라,
    위대한 고구려를 가능케 한 진정 위대한 개혁군주라고 할 것이다.

    이 분의 또 다른 시호로는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해미류왕(解味留王) 등이 있어,
    해씨 고구려설의 신봉자들을 멘붕에 빠뜨리기도 하는데,
    입증 불가능한 고대 왕의 계보에 머리를 썪히기 보다는,
    당시 고구려인들이 소수림왕을, 대해주류왕이라고 불렸던 대무신왕의 계보를 잇는 뛰어난 정복군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고구려 : 16대 고국원왕, 패배로 점철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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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고구려의 이미지와 가장 안 어울리는 군주로서,
    아버지에게 전쟁에 대한 소질은 물려받지 못하였는지, 싸울 때마다 지고 영토를 빼앗겼다.

    이름은 사유, 모용외와 끝내 승부를 가리지 못한 미천왕의 장자로, 331년 왕위에 올랐는데,
    아버지와 달리 정통성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모용씨들의 소굴인 요동은 대를 이어 머리를 아프게 했다.
    재위 4년에 평양성을 증축하고
    이듬해에 신성을 보강하여 변경의 방비를 다지는 한편,
    동진에 사신을 보내고 전연의 망명객들을 받아들이는 등 전연을 견제하였다.
    그러나 연왕을 자칭하고 후조의 석호와 치고 받던 모용황이 배후의 안정을 위해 339년,
    신성으로 쳐들어 오자, 일단 한 판 붙고 본 것이 아니라 바로 굴복하여 동맹을 맺었고,
    이듬해에 왕세자를 사신으로 보내 전연에 조회하였다.
    그래도 마음까지 굴복한 것은 아니었는지,
    342년 비상시의 수도인 환도성을 수리하고 거처를 옮겼는데,
    그 해 겨울,
    승승장구하며 팽창일로에 있던 모용황은,
    중원을 도모하기 전에 배후의 위협이 될 수 있는 고구려를 정리하기 위하여,
    5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여 침입하였다.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싸웠는데, 그만 모용황의 기만전술에 속고 말았다.
    소수의 군대로 남쪽 길을 지키고 있던 왕이 적의 주력을 만나 대패한 것이다.
    환도성이 함락된 것은 물론 호위 병사 하나 없이 단신으로 피신해야 했는데,
    다행히 북쪽 길을 지키던 왕제 무가 추격군을 쫒아주어 포로가 되지는 않았다.
    왕을 놓지고, 5만이 넘는 고구려의 주력 또한 건재한 것을 확인한 모용황은,
    점령하여 직접 통치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였는지,
    수도를 철저히 파괴하여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고,
    모후 주씨와 왕비를 비롯한 5만여 명의 고구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미천왕릉을 파헤쳐 시신까지 가져갔다고 하니, 동천왕보다 더한 치욕이었다.

    거덜이 난 고구려는 이듬해에 왕제 무를 입조시켜 신하의 예를 갖추었고,
    애걸하여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은 후, 평양의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겼고 동진에 사신을 보내었다.
    고구려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것까지는 좋았는데,
    345년, 전연의 재침으로 남소성이 함락되었으며, 전연의 망명자였던 송황을 송환해야 했다.
    348년 웬수같은 모용황이 죽었고,
    355년에는 전연에 간청하여 모후 주씨를 돌려받았으며, 고구려왕에 책봉되었다.
    왕비는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보아 뭔가 사연이 있었나 보다.

    서쪽에서 당한 것을 남쪽에서 만회하려고 하였는지,
    369년 백제가 마한을 정복하러 간 틈을 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이끌고 치양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백제 근구수태자의 용전분투와 내부의 배신자로 인해,
    치양성을 뺏기는 커녕 오히려 수곡성을 내주고 말았다.
    370년 전연이 전진의 부견에게 망하였는데,
    전연 섭정 모용평이 고구려를 지들 속국이라고 생각했는지 피신 겸 망명해 오자,
    이 개념 없는 놈을 꽁꽁 묶어 전진으로 보내 버렸다. 그 동안 쌓인 원한을 일부라도 갚은 것이다.
    371년, 전연에 소심한 복수를 마친 후, 백제를 재침공하였으나,
    대동강 강가에서 기습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였고,
    그해 10월 오히려 근초고왕의 보복을 받아 백제 정예 군사 3만에게 평양성이 포위되었다.
    왕이 화살에 맞을 정도의 악전고투 끝에 겨우 백제의 공격을 물리쳤으나,
    고령의 왕은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향년 67세.

    조선의 선조만도 못하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안습의 일생을 산 군주이나,
    그 상대들을 보면 동정이 가기도 한다.
    고국원왕을 가지고 놀았던 모용황은 전연의 건국자로서 당대의 정복군주였다.
    실질적으로 멸망한 부여를 비롯하여, 만만찮은 세력을 지녔던 선비족 일파인 우문부, 단부
    그리고 5호 16국 시대, 중원의 패자들 중의 하나였던 후조 등,
    당시 모용황의 팽창에 제물이 되었던 세력들을 생각해 보면,
    그만하면 선방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죽음을 선사한 백제의 근초고왕 또한 명군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로서,
    한반도 최대의 곡창지대를 보유하고 가야, 왜, 요서를 잇는 해상 네트워크를 형성한 강자였다.

    하나도 버거운 당대의 영웅을 둘씩이나 상대해야 했던 안쓰러운 삶이었다.
    원한이 많아서가 아니라, 고국원에 묻혀 고국원왕이라고 부른다.

    고구려 : 15대 미천왕, 드라마 같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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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는 을불,
    서천왕의 손자로 태어나 귀하게 살다가 아버지가 역모의 누명을 쓰고 숙청되는 바람에,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게 되었다.
    백부의 칼날을 피해 신분을 숨기고 머슴으로 살았는데,
    여름에는 주인놈이 개구리 소리가 시끄러워 잠을 못 잔다고 지랄을 하여, 밤마다 연못에 돌을 던져야
    했다고 한다.
    을불은 고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1년 만에 뛰쳐나와 어찌어찌 소금 장수가 되었는데, 
    이 또한 만만치는 않아서,
    압록강변의 웬 못된 할망구가 신발 도둑으로 모는 바람에 현행 절도범으로 곤장을 맞았고,
    소금을 몰수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의 팔자는 알 수가 없어서, 안습의 세월을 보내던 을불은,
    봉상왕의 폭정에 열받은 국상 창조리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바람에,
    느닷없이 왕이 되었다.
    개구리 쫒게 하던 주인놈하고, 저 괘씸한 할망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떨결에 왕이 된 을불은 초년고생이 약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선왕과는 차원이 다른 정복군주가 되어, 이래저래 부담이 컷을 창조리를 흐뭇하게 하였다.

    300년, 즉위한 후, 중국 군현 세력과 치열하게 대립하였는데,
    302년, 현도군을 공격하여 적 8천여 명을 사로잡았고,
    311년, 서안평 점령하여 낙랑군 및 대방군의 보급로를 끊었다.
    이에 낙랑의 군벌 장통은 견디지 못하고 요동으로 퇴각하였으며, 
    313년, 낙랑 마침내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대방군마저 병합 하여 한반도에서 중국 군현 세력을 완전히 축출 하는 개가를 이루었고.
    317년에는 다시 현도성을 공격하여 박살내었다 .

    한반도를 정리한 후엔 요동으로 눈을 돌렸는데,
    마침, 선비족의 일파인 모용부가 요서 지방으로 세력을 확대하자,
    위협을 느낀 서진의 평주 자사 최비는 고구려에 요동 분할 점령을 제의하였다.
    중국놈들의 전형적인 이이제이 전술이기는 했으나, 손해 날 일 또한 아니었으므로
    318년, 선비족의 우문부, 단부 등과 연합하여 모용부를 공격하였고 수도인 극성까지 포위하였다.
    그러나 미천왕 못지 않게 영민한 군주였던 모용외가 교란작전을 펼치며 연합군을 와해시켜 버렸기에, 소득없이 철수하고 말았고,
    작전에 완전히 실패한 최비는 처자식까지 내팽개치고 319년 고구려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모용부의 보복 공격에 하성을 지키던 여노가 포로로 잡히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서로 치고 받으며 공방전을 이어갔으나 더 이상의 성과는 없었고,
    330년, 후조의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 모용부를 견제하였다.
    331년에 서거하여 미천의 들에 영면하였다.
    30년 5개월 간의 재위였다.

    당시의 내정은 반정 공신이자 귀족세력의 두목격인 창조리가 총괄하였을 것인데,
    외정의 좌충우돌도 내부의 지원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므로,
    미천왕의 업적은 창조리의 정치가 나쁘지 않았고, 왕과도 호흡도 잘 맞았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미천왕은 소시적에 고생은 하였으나, 옥좌와 훌륭한 재상을 함께 얻은 행운의 임금이기도
    하였다.

    318년의 요동 분할 작전이 성공하였더라면,
    일찌감치 요동을 차지하고 세력을 키워 고구려의 전성기를 앞당길 수도 있었을 것이나,
    모용외라는 호적수를 만나 성사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명군이었다.

    *모용외는 전연의 시조뻘이 되는 상당한 인물로서 요동을 먼저 차지하고 앉아 미천왕의 애를 태운,
    미천왕 인생 후반의 최대 정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얘도 명군이었다.

    고구려: 14대 봉상왕, 자살한 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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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는 상부 또는 삽시루,
    서천왕의 맏아들로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였으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고 한다.

    292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즉위 하자마자 숙신 정벌의 영웅 달가를, 아버지 후궁 소태후와 추문으로 엮어 죽여 버렸다.
    부자상속이 완전히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서모를 비롯한 반대 세력들이,
    부담되는 세력과 명성을 가졌으며, 형제상속이라면 계승 1순위였을 최대 정적, 숙부를 이용하려고
    하자, 선수를 쳐서 죽여 버린 것인데,
    역사상 되풀이 되는 흔한 권력 투쟁으로 식상하기까지 하지만,
    뛰어난 군사지도자이기도 했던 달가의 죽음은 상당한 혼란을 불렀을 것이고, 그 파장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 때문이지는 확실치 않으나, 다음 해에 연나라 모용외가 침입을 하였다.
    모용외는 전면전을 벌여 국토를 초토화한 것이 아니라 기습적으로 수도를 직공하였는데,
    정쟁으로 어수선하여 이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는지,왕은 허겁지겁 신성으로 대피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기병 500을 이끌고 왕을 영접한 고노자가 모용외의 추격군을 격퇴하였고,
    왕을 놓지고 패전까지한 모용외는 공성전을 할 상황이 아니었는지 발길을 돌렸다.

    운이건 뭐건 어쨌든 승전을 한 것인데,
    폭군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인지, 아니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나,
    모용외가 물러간 지 한 달도 안 되어 이번에는 숙부 다음의 정적인 아우 돌고를 자살하게 만들었다.
    미래의 미천왕인 돌고의 아들 을불은 이때부터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아우를 죽인 다음 해에엔 창조리를 국상에 임명하였다.
    즉위 5년째에 모용외가 다시 쳐들어 왔는데, 
    이 놈들은 서천왕릉을 도굴하다가 투탕카멘의 저주를 만나 도망갔다고 한다.
    황당한 이야기기는 하나 고구려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음을 상징하는 일화일 것이다.
    모용외가 물러간 후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임명하여 외침에 대비하였고,
    그 때문이었는지 이후 모용외는 얼씬거리지도 못했다고 한다.

    모용외의 침입을 두번이나 격퇴하고, 명장 고노자를 중용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므로,
    이 정도면 명군 소리를 들을만 한데,
    뭐에 씌웠는지, 재위 7년째 부터 본격적으로 욕먹을 짓을 시작하였다.
    서리와 우박으로, 먹고 살기도 힘든 백성들을 동원하여 궁실을 증축하였고,
    아직 죽이지 못한 을불을 찾으라고 신하들을 닦달한 것이다.
    재위 9년째에는 귀신이 울고, 지진이 일어나고, 가뭄으로 흉년이 드는데,
    또 궁궐을 증축하는 꼴통짓을 하였고.
    창조리가 정신 차리라고 하는데도 My way를 고집하였다.
    옳은 말 한마디 했다가 욕만 실컷 먹은 창조리가 열받아 쿠데타를 일으켰고,
    유폐된 봉상왕은 두 아들과 함께 목 매 자살하여, 우리 역사상 몇 안 되는 자살한 왕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8년 6개월간의 재위였다.
    봉상의 들에 장사 지내어 봉상왕이라고 한다.

    다음 대의 미천왕이 워낙 영민한 군주이고, 그 초년 고생이 동정을 자아내는지라, 
    봉상왕이 더욱 형편없이 느껴지기는 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엉망은 아니었다.
    명장 고노자를 중용하여 외침을 막고 창조리를 국상에 임명하여 내정을 다스린 것은 잘한 일이었고,
    정적을 숙청하는 것은 명군이고 혼군이고를 떠나 누구나 하는 짓이니 따로 공과를 논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빼박 폭군질은 흉년에 궁궐을 증축했다는 정도인데,
    일 시키면서 밥은 줬을테니, 백성들에게는 일자리 창출의 효과라도 있었을 것이고, 
    간언하는 창조리에게 왕권의 지엄함을 역설했다고 하는데 이 말도 틀린 말은 아니고.
    결국 팩트는 ‘흉년으로 수입이 줄어든 귀족들에게 부담을 가중시켜 반발을 불렀다’가 아닐까?

    유폐되자,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자식들과 함께 자살했다는 것으로 보아, 
    자부심과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었던 듯하다.

    고구려: 13대 서천왕, 한국판 투탄카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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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는 약로, 중천왕의 차남으로 태자를 거쳐 270년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에 우씨에게 장가를 갔고.
    한 십 년 내정을 살피고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며 열심히 왕 노릇을 하였다.
    280년 숙신이 쳐들어오자 아우 달가를 보내 박살 내버렸고,
    달가를 안국군으로 삼아, 양맥과 숙신의 여러 부락들을 통솔하게 하였다.
    숙신, 읍루, 말갈, 여진으로 이어지는 이민족과의 질긴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잘나가는 형들이 부러웠는지 286년, 동생 일우와 소발이 반란을 획책하자,
    재상을 시켜준다고 사기를 치고, 체포 · 처형하였다 .
    288년에는 서쪽 변경의 중요한 거점, 신성으로 장기간 순행하였다.
    292년 서거하여 서천원에 매장되었다.
    재위는 21년 5개월.

    할아버지 동천왕 처럼 총명하고 인자하여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고 하는데.
    골육상쟁의 비극을 피하진 못하였다.
    변경을 어지럽히던 숙신을 정벌하여 그 거점을 빼앗고 영토화한 것과
    이후 고구려 역사에서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성을 변경요새화 한 것 등이
    중요한 업적일 것이다.

    무덤에 얽힌 일화도 있다.
    봉상왕때 모용외가 쳐들어와 서천왕릉을 도굴하였는데,
    갑자기 무덤 안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도굴하던 자들이 죽자,
    적군이 혼비 백산하여 퇴각하였다고 한다.
    한국판 투탄카멘 왕이라고 할만 하다.

    고구려 : 12대 중천왕, 단호한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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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는 연불,
    동천왕의 맏아들로 태자를 거쳐 왕 되기 딱 좋은 나이인 25세에 아버지의 뒤를 이었는데,
    즉위하자 마자 동생들의 반란을 만났다.
    아마도 동천왕 시기에 위나라와 항쟁하면서 다른 왕자들도 나름의 지분을 확보했던 모양이나,
    별 호응을 못 받았는지 바로 진압되어 처형되었다.

    형제들의 피로 치세를 시작하여,
    즉위 3년 째, 국상의 권한을 강화하였고,
    다음 해에는 왕비를 투기하여 모함한 후궁 관나 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바다에 던져버렸다.
    상당한 미인이었다는데,
    단호한 성격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일화라고 하겠다.
    이후 별 눈에 띠는 일 없이 살았는데, 즉위 11년째에 위기가 찾아왔다.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위나라가 쳐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성격답게 직접 기병 5천을 인솔하여 양맥에서 이들을 격파하였고,
    8천여 명의 목을 베어 예전에 위나라에게 당했던 수모를 되갚아 주었다.
    그 이후로 한 10년 별 탈 없이 지내다 270년 서거하여 중천의 들에 묻혔다.
    향년 47세, 재위는 22년 1개월.

    부자 상속의 정착은 중요한 정치적 발전이기는 하나,
    빛에 따르는 그림자처럼,
    이전 계승 1순위였던 형제들의 상대적인 박탈감이 컷을 것이고,
    성장한 왕자들의 왕위 계승 경쟁이 격화될 소지 또한 충분히 있었다.
    골육상쟁의 비극은 동서고금에서 역사적으로 되풀이 된 왕가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므로,
    이제 막 부자상속의 첫 걸음을 뗀 고구려가 이를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강원도, 청년에게 구직활동비 300만원을 6개월 동안 지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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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김동주 기자] 강원도가 4일, 도내에서 구직활동을 하고 있는 만 18세 이상 만 24세 이하 미취업 청년들의 고용촉진을 지원하기 위해 청년구직활동 지원사업 참여자를 모집한다고 밝혔다.

    강원도 청년구직활동지원사업은 금년 2,000명 지원을 목표로 지난 9.2. ~ 9.27. 까지 대상자를 몾비한 결과 2,474명이 신청하여 10월말까지 1,371명을 선정하였고, 추가로 700여명을 모집할 계획이다.

    이번 사업은 11월 4일부터 오는 17일까지 모집할 예정이며, 공고일 기준 도내에 거주하고 있는 만 18세~34세 청년, 최종 학교를 졸업 또는 중퇴한 후 2년 이상 경과하고, 중위가구소득(부.모.본인 포함) 150% 이하의 미취업 상태로 구직활동을 하고 있는 상태여야 한다.

    강원도 청년구직활동지원금 지원체계 (사진=강원도일자리통합정보시스템 캡쳐)

    신청대상자는 취업활동 계획의 적정성, 거주지, 가구당 중위소득 등적격 여부를 심사하여 선정하며, 강원도일자리통합정보시스템(https://gwjob.kr)에서 구직활동계획서, 고용보험자격확인, 주민등록초본, 건강보험자격취득확인서(부.모.본인 포함) 등의 증빙서류를 첨부하여 신청하면 된다.

    다만 주36시간이상 근로자, 국민기초생활수급자 생계급여 또는 실업급여 지원자, 정부 일자리사업 참여, 취・창업성공패키지, 정부 및 타 지자체의 청년구직활동지원 사업 등에 참여하고 있다면 선정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번 청년구직활동지원사업을 통해 청년들에게 지원되는 구직활동지원비는 6개월 간 월 50만원씩, 최대 300만원을 포인트로 배정되며, 배정된 포인트는 농협중앙회에서 강원청년체크카드를 발급 받아 사용할 수 있다.

    포인트는 강원도 청년구직활동 복지포인트 몰(https://gwyouth.ezwel.com)에서 사용할 수 있다. 복지포인트 몰에 가입 후 제공하는 상품을 구입할 시 배정된 포인트에서 차감된다.

    다만, 그 밖의 매장 등에서 사용할 경우(예: 학원수강료, 교재 및 도서 구입비, 시험응시료, 면접활동비 등 기타 구직활동에 필요한 식비, 교통비, 숙박비 등)에는 사용할 수 없으나, 강원청년체크카드를 사용해 본인의 예금잔고에서 결제 후 사용내역을 복지포인트 몰에 환급신청을 할 경우 포인트에서 차감된다.

    복지포인트 몰에서 포인트로 배정된 월 50만원을 사용하거나, 강원청년체크카드의 사용내역을 환급신청할 수 있다. (사진=강원 복지포인트 몰 로그인 홈페이지 캡쳐)

    포인트 사용에 대한 문의는 도 청년일자리담당 공무원에게 문의하면 된다.

    강원도 청년어르신일자리과 윤창호 과장에 따르면 강원도 청년구직활동지원사업이 시행초기다 보니, 지원절차 및 세부적인 지원사항에 대해 참여자들의 문의가 많이 들어오고 있다. 이에 실질적인 구직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참여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지원내용을 개선해 나가겠으며, 향후, 취업 상담, 컨설팅, 취・창업 특강 등 다양한 취업 서비스를 병행하여 지원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김동주 기자

    소음피해보상법, 국회 본회의 통과… 소송 없이 강릉군비행장 등 소음피해 보상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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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시 의회 등 군용비행장 소음 피해와 관련해 소음피해보상법의 제정을 촉구하는 피켓시위가 국회의사당에서 열렸다. (사진=강릉시 제공)

    [수완뉴스=정치(국회)] 강릉시는 지난 10월 24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수정가결 한 ‘군용비행장·군사격장 소음방지 및 피해보상에 관한 법률’(이하 군소음법)이 지난 31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여야 의원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통과됐다고 밝혔다.

    1951년 개항한 강릉군비행장 군비행기에서 발생하는 소음 피해를 오랜 세월 인내하며 살아왔던 강릉지역 주민들은 소음피해 보상을 위해서 국가를 상대로 3년마다 민사상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해야 했다.

    하지만 이번 법률이 지난 3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별도의 소송절차 없이도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강릉지역에서 군비행기 소음 피해와 관련 현재 진행 중인 민사소송은 원고수 9만3천여명 청구액 316억원이며, 2005년부터 7만2천여명이 소송에 참여하여 올해까지 1023억원의 피해 보상금을 받았다.

    이 법률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국방부장관으로 하여금 소음영향도를 기준으로 제1종 구역, 제2종 구역 및 제3종 구역으로 소음대책지역을 지정·고시하도록 하고, 5년마다 소음방지 및 소음 피해보상에 관한 기본계획 수립과 자동소음측정망을 설치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사진 (사진=강릉시 제공)

    또한, 소음을 줄이기 위해 군용항공기의 이륙·착륙 절차의 개선과 야간 비행 및 야간 사격 등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실제 거주기간 등에 따라 소음피해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강릉시의회에서는 2008년부터 ‘비행장주변마을피해대책특별위원회’를 구성 운영하면서 수차례 군소음법 제정 촉구 대정부 건의 등 비행장 주변 피해 보상을 중앙정부에 지속적으로 요구하였으며 군용비행장 피해 공동대응을 위한 지방의회 전국연합회(이하 군지련)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특히, 국회 본회의 심사를 통과하기 직전까지 국회의원 표결 독려 및 피해지역 주민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국회에서 군소음법 제정을 촉구활동을펼쳤던 군지련 소속 지방의회 의원들은 일제히 환영의 목소리를 내며 그동안 군소음법 제정을 위해 관심을 가지고 애써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했다.

    또한, 강릉시 차원에서 1998년부터 항공소음도 80웨클이상 되는 강남동, 성덕동, 내곡동, 강동면 지역에 올해까지 37억원을 피해 주변 마을 주민 숙원사업비를 지원하여 군비행기 소음으로 고통받는 주민들을 지원해 왔다.

    강릉시 조영각 환경과장은 “소음으로 인하여 피해를 보고 있는 주민들의 실질적 피해보상과 소송과정에서 불필요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 문제가 해결되고, 해당 주민의 쾌적한 생활환경을 보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강릉시의회 신재걸 강릉군비행장주변마을피해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이 법률이 시행되면 소음 피해보상에 대한 대책은 마련되지만, 소음 피해지역 시설물에 대한 소음방지시설 지원도 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의 대책을 요구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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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다윈 영의 악의 기원> 프레스콜 현장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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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가무극 “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배우들 단체사진 (사진=육주현)

    [수완뉴스=육주현 기자]  지난 10월 16일 서울시 서초구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창작가무극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의 프레스콜이 진행되었다.

    서울에술단은 2018년 초연하여 관객드의 사랑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던 창작가무극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10월 15일부터 10월 27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한다. 30년 전 살인사건의 진실에 대한 선과 악의 갈등 그리고 이를 둘러싼 계급과 정의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박지리 작가의 동명 소설을 무대화했다. 여기에 서울예술단만의 색을 입혀 완성한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2018년 초연 당시 참신한 소재와 스토리에 목말라있던 공연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며, 무거운 주제를 다룬 대극장 작품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편견을 깨트린 창작가무극이다.

    사진=육주현
    사진=육주현
    사진=육주현

    이 날 프레스콜에는 ‘다윈’ 역할에 배우 최우혁, ‘레오’ 역할에 배우 강상준, ‘루미’ 역할에 배우 송문선, 외에 서울예술단 단원들이 장면 시연을 했다.

    육주현 사진기자

    [사진] 뮤지컬 이선동 클린센터 프레스콜 현장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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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뮤지컬 “이선동 클린센터” 배우들 (사진=육주현)
    창작뮤지컬 “이선동 클린센터” 장면1 (사진=육주현)
    창작뮤지컬 “이선동 클린센터” 장면2 (사진=육주현)
    창작뮤지컬 “이선동 클린센터” 장면3 (사진=육주현)

    [수완뉴스=육주현 기자]  지난 10월 10일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SH아트홀에서 뮤지컬 <이선동 클린센터>의 프레스콜이 진행되었다.

    2016년 한국콘텐츠진흥원 ‘대한민국 스토리공모대전 최우수상 수상작 <이선동 클린센터>가 창작 뮤지컬로 관객들을 만난다. <이선동 클린센터>는 인기 웹툰 <장미아파트 공경비>으로 잘 알려진 권정희 작가의 장편 소설로 2016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최한 ‘대한민국 스토리공모대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뒤 2018년 소설로 출판되었으며, 해외로도 수출되어 대만에 이어 인도네시아까지 번역되어 한류문학에 일조를 하고 있다. 뮤지컬은 사회적 이슈이자 현 사회를 곱씹게 하는 ‘현대인의 외로움과 고독사’를 주제로 새로운 직업군인 ‘유품 정리사’를 매개체로 시대적 공감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뮤지컬 <이선동 클린센터>는 귀신을 보는 능력을 숨긴 채 살아온 그리고 청년 실업자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하루하루 외롭게 살아온 이선동이 우연히 접하게된 ‘유품정리사’로 취직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공연은 소설의 주요 스토리인 죽은 자들의 유품을 정리하는 이야기를 통해 현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휴머니즘을 담아내고 있다. 고학력 청년 실업자, 홀로 외로이 사는 할머니, 빚을 안고 사는 젊은 세대, 주변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 등 공연 속 에피소드에서 나오는 캐릭터들은 사회적으로 조명이 되고 있는 현대인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담아내면서 한편으로는 주위를 되돌아 보게 하는 가슴 묵직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날 프레스콜에는 ‘이선동’ 역할에 배우 김바다, 기세중 ‘김정규’ 역할에 배우 강정우, 양승리 ‘강보라’ 역할에 배우 이봄소리, 금조 ‘엄마 외’ 역할에 배우 차정화, 이현진 ‘강형사 외’ 역할에 배우 장격수, 최영우 ‘문형사 외’ 역할에 배우 김동현, 김방언이 장면 시연을 했다.

    공연은 11월10일까지 대학로 SH아트홀에서 진행된다.

    육주현 사진기자

    고구려 : 11대 동천왕, 관구검의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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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는 관노부 주통촌에 살던 평민이었다.
    이 여성분은 처녀시절 국가의 교체(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자 떡을 이용해 잡는 기지를 발휘하였고,
    영리한 것이 이쁘기까지 했는지, 칭찬하기 위해 방문한 산상왕과 하루만에 만리장성을 쌓아버렸다.
    남편의 바람을 안 왕비 우씨는 길길이 뛰었으나,
    이 신데렐라는 이미 임신한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후궁 소후가 되었는데, 기특하게도 대를 이을 아들까지 낳아 주었다.
    이는 고국천왕과 산상왕의 공동 왕비이자 드센 여인 우씨의 불임으로 요원했던 부자 상속이 드디어 가능해졌다는 의미였으므로,
    산상왕의 외도는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중요한 정치적 발전을 이룩한 쾌거였던 셈이다.

    어머니의 일화로 인해 교체로 불렸던 동천왕의 정식 이름은 위궁으로,
    태어날 때 태조대왕처럼 바로 눈을 떠서 사물을 바라보았기에 태조대왕의 이름인 궁을 넣었다고 한다.
    이름이야 거창하든 말든, 이래저래 심사가 복잡했던 왕비 우씨는 하던 도발을 계속하였으므로,
    어머니의 출신이 한미하여 태어나기도 쉽지 않았던 이 어린 왕자는,
    그다지 명예롭지 않은 별명을 가진채 이런 저런 수모을 겪으며 자라야 했다.

    19살 나던 227년, 아버지의 뒤를 이었는데,
    이 시기는 중국의 삼국 정립기였으므로, 삼국의 역학관계를 고려하여,
    치세 초기에는 오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었고 이후에는 위나라와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요동의 공손연이 연왕을 자칭하며 깝죽대다가, 제갈공명의 호적수 사마의에게 맥없이 무너지는 바람에 위나라와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자 상황이 복잡하게 변하였다.

    242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겁도 없이 요동의 서안평을 선제 공격하였는데 별 재미를 못 보았고,
    오히려 2년 뒤에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초반에는 나와바리의 잇점을 살려 고구려가 승리하였으나,
    황건적의 난 이래 거의 반세기 동안 전쟁으로 날이 지고 새는 세월을 보낸 위군의 전술은,
    지금까지 툭탁거리던 애들하고는 차원이 달라 결국 비류수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고,
    환도성까지 내주고 말았다.
    이듬해 관구검의 재 공세에도 싸우는 족족 패하였고, 왕은 열심히 도망칠 수밖에 없었는데,
    현도태수 왕기는 이번 기회에 고구려를 끝장내려고 하였는지,
    집요하게 추적하여 고구려군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 넣었다.

    암담한 상황이었으나, 고구려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만고의 충신 유유가 적의 선봉장과 동귀어진하고 밀우가 결사적으로 분전하여,
    가까스로 위군을 몰아내고 환도성을 되찾은 것이다.
    의지의 고구려인들이 일궈낸 눈물겨운 승리라고 아니할 수 없으나,
    수복한 수도는 위군의 약탈과 방화로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으므로,
    별 수 없이 도읍을 평양성으로 옮겨야 했다.
    이해에 신라를 공격했다고 하는데, 그럴 정신이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로부터 2년 후 248년에 서거하였다. 향년 40세.

    온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였으며, 가까운 신하 중에 따라 죽으려고 하는 자가 너무 많아,
    새 왕이 자살을 금하였으나, 장례일이 되자 묘에 와서 스스로 죽는 자가 매우 많았으므로,
    땔나무를 베어 그 시체를 덮었고 그 땅을 시원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왕비 우씨의 적개심과 멸시를 참고 견디며 자란 동천왕은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평생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을 정도로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어서, 평소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았다고 한다.
    그 덕에 온 나라가 초토화되는 위기 상황에서도 배신당하지 않고,
    당대 최강인 위군을 결국 격퇴하였으며, 나라를 재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덤에 얽힌 일화를 하나 더 보면,
    두 남자의 여인 왕태후 우씨는 두 번째 남편인 산상왕 옆에 묻혔는데,
    이를 부끄럽게 여긴 고국천왕이 무당에게 현몽하여 자기 무덤을 가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국천왕의 무덤을 7겹의 소나무로 가렸다고.

    일화도 많고 다사다난 했지만, 훌륭한 성품으로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두었고,
    이를 발판으로 중국의 본격적인 침입에 단호히 맞서 싸우는 고구려의 위용을 처음 선 보인 명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