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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5일 오전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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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페이지 75

    백제 : 3 대 기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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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대 기루왕

    루자 돌림의 두번째 왕이다.
    다루왕의 큰아들로 태자 생활을 47년간 하고 왕위에 올라 52년간 재위했다는데,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고.
    신라와 적대하다 화친하고 다시 적대하고… 엎치락 뒤치락하였다 한다.
    말갈과도 열심히 싸웠을 것이다.

    별로 눈에 띠는 기록은 없으나 천재지변이 많았고, 일식 등 천문에 관한 기록도 보인다.
    고대의 기록에서 천문의 변화는 정치 세력의 부침을 반영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내부 권력투쟁이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용이 두마리가 나타났다는 기록이나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99년간 왕의 자리가 적어도 10번은 바뀌었을 것이다.

    설립과정으로 보아 백제는 귀족들의 집단 지도체제와 비슷한 정치체제 였을 것이고,
    왕은 그저 한 세력의 두목 정도였을 가능성이 많으므로,
    돌아가며 왕을 했든지 아니면 주고받았든지 했을 것이다.

    기록이 부실하므로 그냥 이름 정도나 알아두면 되겠다.

    [사진] 뮤지컬 "쓰릴 미" 프레스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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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육주현 기자]  지난 12월 18일 서울시 종로구 예스24 스테이지 2관에서 뮤지컬 <쓰릴 미>의 프레스콜이 진행되었다.

    지난 2017년 10주년 기념 공연을 끝으로 휴식을 가졌던 뮤지컬 <쓰릴 미>가 2년의 공백을 깨고 밀도 높아진 무대로 막을 올렸다.

    뮤지컬 <쓰릴 미>는 미국 전역을 충격에 빠뜨린 전대미문의 유괴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탄생했다. 단 한 대의 피아노가 만들어내는 탄탄한 음악과, 심리 계임을 방불케 하는 치밀한 감정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두 인물 간의 관계와 감정이 긴장감 높게 표현되는 만큼 관객들에게 전혀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하여 재관람을 이끌며 꾸준히 뜨거운 관심을 받아왔다.

    이 날 프레스콜에는 배우 이해준, 김현진, 구준모, 김우석, 노윤이 장면 시연을 했다.

    스태프들과 배우들까지 새로운 구성으로 꾸려진 뮤지컬 <쓰릴 미>는 12월 10일부터 내년 3월1일까지 예스24스테이지 2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육주현 기자

    백제 : 2대 다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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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대 다루왕

    온조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으나,
    이어진 루자 돌림 왕들의 시작으로, 비류계 왕통의 시조로도 본다.
    그런데 온조의 아들이면 온조계지 왜 비류계라는 말이 나올까?

    기록이 부실하니 나름대로 추리를 해보면,
    소서노의 전 남편 우태는 북부여 왕 해부루의 아들이었다고 하고,
    소서노는 졸본 부족장 연타발의 딸이었으므로 둘은 정략결혼을 하였을 것이고,
    초원의 유목민들의 관습대로, 우태도 징기스칸처럼 데릴사위 노릇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병들어 죽었는지 맞아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우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는데,
    소서노는 아이가 있었으나 남편이 죽었으므로 시집으로 들어가질 않고 그냥 친정에 남았을 것이다.
    아무리 작은 부족 국가라 해도 명색이 왕자인데, 아이를 둘씩이나 데리고 데릴사위 노릇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이 때 온조는 없었을 가능성이 더 많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애 하나 딸린 소서노는 추모(주몽)를 만나, 역시 정략결혼으로 다시 시집을 갔고,
    온조를 낳았으므로, 온조와 비류는 동복이부 형제가 되었는데,
    징기스칸의 예에서 보듯이 유목민들 사이에 이런 상황은 흔하므로, 특별히 흠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그럭저럭 잘살고 있던 소서노 일가는 유리라는 복병을 만나 시련에 휩싸이게 되었고,
    결국 따듯한 남쪽나라로 탈출하게 되었는데, 이 탈출 집단의 구성은 어땠을까?

    유리의 쿠데타 설을 믿는다면 유리에 반발하는 세력은 다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소서노를 따르는 세력들이 주축이었을 것이고, 동부여에서부터 추모를 따라왔던 세력 중의 일부와, 그외 유리와 상성이 맞지 않는 세력들도 탈출에 동참했을 것이다.
    이들은 파벌을 형성하였을 것이고, 파벌들은 입장에 따라 농경파와 교역파로 나뉘었는데,
    교역파는 항구를 선호하고, 농경파는 내륙을 선호하는 등, 정착할 지역을 고르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사사건건 대립하였을 것이고, 급기야는 갈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갈라진 두 집단은 무력충돌도 불사하였고, 처음에는 비류쪽이 우세하여 온조가 고전을 하기도 하였으나, 결국은 온조계가 우세를 점하게 되었는데,
    비류계에서는 온조계의 우세를 인정하고 다시 합치는데는 동의하였으나 항복이 아닌 일종의 동맹이므로,
    다음 대 왕위를 요구하였고, 말갈에 시달리느라 진이 빠져버린 온조왕은 아버지가 다른 형의 아들 즉 조카를 양자로 받아들이며 수용하였다.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진실이야 어디에 있건, 다루왕은 선왕의 뒤를 이어 49년간 재위하였다고 한다.
    매일 전쟁으로 날이 지고 새는 건국 초기에, 가장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왕들이 이렇게 장수하였다는 것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고,
    온조왕의 46년 재위 기간처럼, 한 사람만의 재위 기간이 아닌 세력의 집권 기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니면 누락된 왕이 있거나.

    진실은 여전히 아리송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다루왕은 온조왕처럼 말갈과 열심히 싸우며 영토를 확장하여, 청주에 성을 쌓았고,
    신라의 석탈해 이사금과도 여러 번 싸웠다 한다.
    이 당시 백제와 신라의 상황이나 역량이, 서로 접경하여 기병을 수천씩 동원하며 교전할 정도였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

    백제 : 시조 온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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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가지 설이 있어서, 추모(주몽)왕의 친아들인 지는 확실치 않다.
    친아들이든 아니든, 어느 쪽으로도 첫째가 아니므로 왕위와는 좀 거리가 있는 신분이었으나,
    복잡하고 사연이 많은 과정 끝에, 어머니 소서노가 일족과 더불어 남하하였고,
    일행이 서식지 문제로 분란이 생겨, 형 비류가 교역파와 더불어 미추홀로 떠나는 바람에,
    하남시 잔류파를 거느리고 어머니와 함께 나라를 세워, 졸지에 왕이 되었다.
    처음엔 신하가 10명이라 십제라 하였으나 이후 세력을 키워 백제라 하였다는데,
    참으로 상상력이 부족한 작명이라 아니할 수 없으나,
    얼마나 귀족 세력들의 힘이 컸으면 나라 이름을 귀족들 숫자로 하였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백제가 자리 잡은 곳은 말갈의 땅이었으므로 당연히 백성은 말갈족이었을 것이고,
    말갈족은 퉁구스계통의 언어를 사용했다 하니 언어도 달랐을 것이다.
    연고도 없는 외지인 집단을 환영하고 순순히 지배를 받아들이는 순한 양 같은 종족은 없으므로 정복이 필요했을 것인데,
    말갈이라고 해서 만민 평등의 이상사회는 아니었을 테고,
    피지배계층은 싸워봐야 별 이득도 없이, 괜한 생목숨만 날리는 꼴이 되기 십상이었을 것이니,
    눈치나 보고 있었거나 아니면 어디 짱박혀서 구경하고 있었을 공산이 크다.
    따라서 칼 든 놈들만 쫓아내면 땅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숨어 있다 돌아온 놈들이나 처음부터 저항하지 않았던 놈들은 그냥 백성으로 삼아 세금이나 걷으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결국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이민족이 원주민을 통치하는 식민지 지배 구조가 백제의 시작이었기에,
    이러한 태생적 한계가 귀족의 힘이 강하고 백성은 정치에 무관심하며,
    중앙 세력들은 끊임없이 권력투쟁에 몰두하고, 지방 세력들은 나라가 망하든 말든 자기 나와바리의
    안전만을 생각하는 백제의 고질적인 병폐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온조가 자리를 잡았을 당시, 북쪽으로는 평양에 근거를 둔 낙랑국이 있었고,
    동쪽으로는 춘천에 근거를 둔 말갈족 국가인 맥국, 남쪽으로는 마한이 자리 잡고 있었다.
    초창기에는 주변 제 세력들에게 저자세를 취했을 것이므로, 환영까지는 아니더라도 묵인을 받을 수는 있었을 것이나,
    백제의 세력이 커져감에 따라 점차 갈등 관계로 변하게 되었을 것인데,
    온조의 능력이 출중하였던지, 아니면 살기 위해 귀족들이 너 나 없이 뭉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국 백제는 맥국을 동쪽으로 밀어내고 성공적으로 안착하였다.

    즉위 후 제일 먼저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는 것으로 보아,
    온조왕은 추모(주몽)대왕의 자식이 맞기는 한 것 같은데,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그 다음부터는 주변국들과의 싸움으로 점철된다.
    말갈과 싸우고, 말갈과 연합한 낙랑 또는 동예와 싸우고, 공격을 받고 보복 공격을 하고 등등.
    재위 11년 낙랑의 부탁을 받고 말갈이 공격을 해왔다는 것으로 보아,
    이즈음엔 낙랑과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었고, 말갈이 낙랑의 용병 노릇을 한 게 아닌가 싶다.
    낙랑이 아니라 동예라는 설도 있다.
    13년에 여걸 소서노가 졸하였는데,
    이해에 도읍을 옮겼다는 것으로 보아 권력이 제법 확고해진 듯하다.
    온조왕의 권력이야 어찌되었든 주변 제 세력과의 갈등은 계속되어,
    말갈, 동예 또는 낙랑의 침입을 받고, 격퇴하고 등등, 사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24년에는 남쪽에 목책을 세웠으나 마한의 항의를 받아 철거하였고,
    26년에 마한을 기습하여 병합했다고 하는데, 믿기는 어렵다.

    백제와 마한과의 관계는 개국 이래 종주국과 번국의 관계로서,
    백제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낙랑, 동예와는 적대 관계가 되었으나 마한에게만은 신속하였는데,
    힘이 갑자기 커진 것도 아니고, 주변국들과 우호를 회복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쿠데타를 일으켜 두목을 때려잡고 두목의 나와바리를 삼켰다니,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아마도 시조왕을 신격화하기 위해 후대의 업적을 끌어온 조작일 것이다.
    온조왕은 재위기간 내내 말갈, 낙랑, 동예와 싸우고, 대책을 수립하고, 마한에 아부하고 등등,
    살기 위해 몸부림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도 장수하여 무려 46년간 재위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믿기는 어렵다.

    기록 미비와 후대의 조작 등으로 인하여, 삼국 초기 왕들의 기록은 모순이 많다.
    감안하고 읽어야 할 것이다.

    백제 : 시작, 신비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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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는 멀어서 신비한 느낌을 주는 반면,
    백제는 가까우면서도 알듯 말듯 실체가 잘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런 느낌을 주는 고대 국가이다.

    백제의 건국 설화는 여럿인데,
    어떤 설이든 추모(주몽)의 재취인 소서노가 자기 부족들을 이끌고 남하하여, 한반도 중부지방에 자리를 잡았다는 이야기는 동일하다.
    소서노는,
    추모가 전실 자식인 유리에게 다음 대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기 때문에 열 받아서,
    고구려의 초대 왕후라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내팽개치고, 산 설고 물 설은 땅으로 고난의 행군을
    하였다고 한다.
    여염으로 치면,
    부유한 과부가 가난뱅이 떠돌이와 결혼해서 잘 살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전실 자식이 나타나서 재산을
    가로채려고 하니까,
    열 받아 이혼하고, 혼인 때 가져온 재산 챙겨서 딴 살림 차린 꼴인데,
    액면만 보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일반 가정에서도 이런 일은 법원까지 가서, 변호사 사서 싸우는 아주 복잡하고 치사한 일인데,
    하물며 왕가에서라면,
    칼부림이 나도 몇 번은 났을 것이다.
    고대 국가에서 국력의 척도는 백성과 전사의 숫자인데,
    국가의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세력의 이탈을 추모 혹은 유리가 그렇게 쉽게 묵인 했을 리도 없고.

    고구려의 건국 설화를 보면,
    동부여에서 권력 투쟁에 밀려 탈출한 주몽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들은 졸본에서 토착세력과 연합을 형성하였는데,
    그 연합의 상징이 추모와 소서노의 결혼이었다.
    추모는 소서노와 결혼하여 생활의 안정도 찾고, 애도 낳고,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고향에서
    유리가 아들이라면서 찾아온다, 부러진 칼을 들고서.
    추모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칼과 아귀를 맞춰보고,
    ‘아이고 내 아들’하면서 나라를 물려줬다고 하는데,
    동화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이긴 하나 이게 실제로 가당키나 할까?

    왕 자리는 왕이 물려주고 싶다고 물려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왕권이 강력했던 견훤, 이성계 등도 이 짓하다가 다른 아들에게 박살났는데, 중국에도 비슷한 예가
    많고, 처가에 빌붙어 왕 노릇하던 추모가 감히 그런 생각을 했을 리가 없다.
    설령 했다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실권을 쥐고 있었을 소서노가, 비렁뱅이 모습을 하고 찾아온 전실 자식의 목을 못 비틀어서, 곱게 물러났을 리도 없다.
    백번 양보해서 소서노가 현모양처의 화신이라 그렇게 하고자 했더라도, 부족의 장로들이 결사 반대했을 것이다.
    추모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의 차원이 아니라 부족의 생존이 걸린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유리 쿠데타 설에 의하면,
    유리는 추모의 아들이라기보다는 동부여에서 탈출한 또 다른 이탈 세력의 수장이었다고 한다.
    동부여의 정치 시스템이 어땠길래 이탈세력이 이렇게 많이 생겨나는지는 모르겠으나,
    유리의 세력도 졸본으로 왔는데,
    선 이주 세력의 수장인 추모는 이미 졸본의 기존 세력에 투항한 상태였다.
    그래서 같이 탈출했던 동지들의 불만이 많았는데, 여기에 유리의 세력이 가세하게 되자,
    두 세력은 힘을 합쳤고 마침내 기존 토착세력을 누를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유리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추모와 토착 졸본세력을 압박하였고, 모종의 거래를 통해 서로
    분리하는 것으로 타협하였다.
    이때 추모가 죽었는지 아직 살아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추모는 해모수의 아들이 되었고, 유리의 아버지가 되었다.
    따라서 추모는 고구려에서 이탈한 소서노 세력의 수장일 뿐이고,
    순수 고구려의 진정한 시조는 추모가 아니라 유리이다.
    이를 유리 쿠데타 설 또는 해씨 고구려설이라고 하는데,
    그럴 듯하기는 하기는 하다. 백제가 동명성왕을 받드는 것도 이해가 되고.
    그러나 기록이 전무하므로 진위를 알 수는 없다.

    어찌 되었건 소서노는 무리를 이끌고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남쪽이라고 해서 팔 벌려 맞이하는 땅은 아니었고,
    여기도 토착 세력들이 서로 치고 받으며, 소신껏 살고 있는 지역이었다. 마한이라는 힘센 놈도 있었고.
    소서노는 남의 동네에 왔으니 이 동네 두목인 마한 왕에게 인사를 하였는데,
    마한 왕은 기왕에 칼든 놈들이 왔고, 자기 힘이 미치지 못하는 말갈의 땅에서 살겠다고 하므로,
    울타리 노릇이나 하라고 허락한 듯하다.
    마한 왕에게 정착을 허락을 받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번에는 정착할 지역에 대한 이견으로 분란이
    일어나,
    형 비류는 현재의 인천인 미추홀에 자리를 잡았고, 동생 온조는 하남시 부근인 위례에 자리를 잡았는데,
    두 세력은 갈등하였고, 무력을 동원한 주도권 다툼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비류가 병들어 죽는 바람에(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인천에 자리잡았던 세력은 다시 온조의
    세력과 합쳤고, 이들의 연합 정권이 백제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로 똘똘 뭉쳐 싸워도 생존을 장담하기 힘든 본거지에서 쫓겨난 세력이,
    단순히 서식지의 호불호만으로 두 조각으로 갈라진다는 것이 말이 될까?
    기록이 없으므로 마음껏 상상을 해보면,
    소서노의 세력은 원래 교역을 주로 하던 상인 세력이었는데,
    이 상인 집단이 유리세력과 마찰을 일으켜 일족이 단체로 남하하게 되었고,
    이 때 유리와 대척점에 있던 상인이 아닌 사람들도 동행을 하였다.
    상인들은 교역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항구가 유리하므로 바닷가에 자리 잡기를 원하였고,
    상인이 아닌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원하였는데,
    이 상인 세력의 대표가 비류였고 나머지 사람들의 대표는 온조였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소서노는 온조의 손을 들어줬는데,
    상인 세력은 고집대로 비류와 함께 미추홀까지 갔고, 나머지는 주위 세력이 만만한 위례에 머물렀다.
    그런데 미추홀까지 간 집단은 일이 생각대로 안 풀렸고 비류는 좌절 끝에 죽었다.
    반면에 온조는 성공적으로 정착을 하였고 세력이 커져서 비류의 세력을 흡수할 수 있었다…..가 아닐까?

    이 정도면 어느정도 이해가 가능하지만,
    워낙 오래 전 일이고, 기록도 부실하고 모순된,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이야기들이므로,
    그저 ‘온조가 말갈의 땅에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십제라 한 것이 백제의 시작이었다’로 충분할 것이다.

    고구려 : 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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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흥운동

    위대한 고구려는 그냥 죽지 않았다.
    유민들은 안시성, 요동성, 신성 등을 중심으로 계속 저항하였는데,
    지금까지 고구려를 지켜왔던 이 위대한 성들의 주민들은,
    저 철없는 연가네 3형제 따위가 말아 먹을 수 없는, 진정한 고구려인들이었고 고구려의 혼이었다. 

    여러 갈래의 부흥운동 중 대표적인 것은 검모잠과 안승의 부흥운동이었다.
    검모잠은 670년 궁모성에서 군사를 일으킨 후 황해도 방면으로 이동하여,
    왕족인 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추대하였고, 이어 신라에 도움을 청하였다. 
    당시 신라는 나당 전쟁을 수행 중이었으므로, 안승을 고구려왕에 봉하고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였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 것이다. 

    당은 안승의 부흥군을 제거하기 위해 움직였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던 중 의견이 갈리면서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였다.
    똘똘 뭉쳐 싸워도 될까 말까한데, 이 꼬라지면 될 일도 안 되므로,
    안승은 결국 신라로 날랐고 이로써 고구려 부흥운동은 사실상 끝이 났다. 

    투항한 안승은 보덕국왕에 임명되었고
    매소성 전투에도 참여하여 공을 세우는 등 신라에 적극 협력하여 진골 대우를 받았는데,
    이는 이후 고구려계가 백제계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게 하는데 공헌하였다.
    그리고 이 고구려계는 나중에 왕건이 고려를 세우는 기반이 된다.

    당나라로 압송었던 보장왕도 부흥운동을 벌였는데 비록 사전 발각되긴 하였으나,
    그 후예가 요동에 소고구려를 세워 고구려의 명맥을 이어 나갔다는 설이 있다.

    안승과는 별도로 만주에 잔류했던 고구려인들도 반항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발해의 건국으로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고구려 : 3차 여당전쟁, 위대한 역사의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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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전쟁 이후에 당나라는 내부 정치 투쟁 등의 이유로 준동하지 않았고
    신라도 백제부흥군에게 골머리를 앓느라 한동안 잠잠하였는데,
    그 잠깐의 휴식기에 연개소문이 사망하였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대귀족 중의 하나인 연씨 가문의 수장으로, 영류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은 인물이었다.
    사정이야 어떻든 역적질임에는 분명하였으므로 이는 당 침공의 명분이 되었고,
    비록 다 막아내었다고는 하나, 나라의 기간 산업이 초토화되고 온 나라가 거덜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수장인 연개소문에 대한 불만을 불렀을 것이고,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인 연개소문은 독재자가 되어 철권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민심 이반으로 이어졌으며, 지배층의 균열을 가속화시켰을 것이다.
    연개소문의 생전에는 그의 카리스마와 급박한 전황 때문에 그럭저럭 누르며 끌고 갔을 것이나,
    죽고 나니 사정이 달라졌다.

    연개소문의 뒤는 장남 연남생이 이었는데,
    당시 고구려의 사정은 찌질이 남생이의 지도력으로는 통제가 어려운 지경이었고,
    설상가상으로 두 동생 남건과 남산이가 반란을 일으켰다.
    찌질한 형놈도 문제이지만, 나라가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이놈들도 참으로 미련한
    놈들이 아닐 수 없다.
    조정과 백성들은 당연히 동요하였는데,
    동생들에게 쫓겨나 구세력의 온상인 국내성으로 피신한 연남생은 당에 구원을 요청하는 염병할 짓을 하였다.
    남생이 이 찌질이와 이 넘을 부추긴 국내성 세력,
    장수왕 대부터 이어진 고질적인 신구 세력 간 암투의 결정판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고구려에 치명타가 되었다.
    이 꼴을 본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서 살 길을 구했는데,
    가려면 저 혼자 갈 일이지 남부의 12개 성을 들고 튀었다.
    연정토 이놈은 신라에서 대접 받으며 잘 살다가 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귀국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고구려 정벌을 거의 단념하고 있던 당 고종은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달려들었는데,
    남생의 배신은 요동 방어선을 무의미하게 만들었고, 
    666년. 이 세적이 이끄는 당의 주력부대가 참전하면서 고구려의 운명은 절망적이 되었다.
    667년 필사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10월 신성이 함락되고 부근의 16성이 함께 당에 항복했다.
    남건의 분투는 설인귀에게 5만의 병사가 도륙 나는 것으로 좌절되었고,
    요동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남건이 압록강 방어선에서 당군을 저지하는 동안 안시성군 3만이 당군을 기습했으나 실패했고.
    668년 2월 이세적과 설인귀가 부여성을 함락시키자, 부여주 모두가 당에 항복했다.
    그 끈질겼던 고구려에 항복이 만발한 것이다.

    남건은 부여 성 탈환을 위해 5만 병력을 보내 이세적과 설하수에서 교전했으나
    3만 이상의 병력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으며,
    압록강 방어선마저 돌파한 당군은 평양성을 포위했고,
    한 달 남짓 포위가 이어지자 보장왕은 남산을 보내 당군에게 항복했다.
    싸우기만 하면 지는 주제에 남건이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농성을 이어갔으나,
    이적과 내통한 남건의 심복 신성이 성문을 열면서 무릎을 꿇었다.
    10월에 보장왕과 남건·남산 형제 등 20여만 명이 당나라로 끌려가면서,
    위대한 고구려의 700년 역사가 막을 내렸다.

    나라를 배신한 형 남생이와, 상황 파악도 못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나라를 말아먹은 동생 남건이,
    어떤 놈이 더 빌어먹을 놈일까?  난형난제가 아닐 수 없다.
    위대한 고구려는 비록 이렇게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나라를 말아먹는 것으로 끝이 났으나,
    그들이 지배했던 영역은 그 이후 발해로 이어졌다.
    발해의 멸망 후 만주가 우리 민족의 무대가 된 적은 없으나, 
    만주는 여전히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영토로 존재해 왔고, 존재할 것이다.

    고구려나 발해의 구성 종족, 이런 걸로 그다지 고민할 필요는 없다.
    고구려의 후예가 꼭 하나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주)한책협, 2019년 연말 3,000만원 기부 "꿈 실현 돕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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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한책협] (주)한국책쓰기1인창업코칭협회가 연말을 맞아 어려운 이웃을 위해 그동안 모은 3,000만원을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감사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한책협 기부계좌에 모인 성금을 사랑의 밥차, 독거노인종합지원센터, 탈북민 장학금으로 지원하기로 하였다.

    한책협은 김도사에게 책쓰기 코칭을 받고 작가가 되고, 1인 창업에 성공한 회원들이 활동하는 네이버 대표 카페이다. 김도사는 23년동안 205권의 저서를 쓰고, 8년간 900여명의 작가를 배출하며, 베스트셀러 제조기로 정평이 나있다. 실제로 2018년 317명의 한책협 출신 작가가 출판사와 게약을 하고, 2019년 180명이 계약하며 매일 연이은 계약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김도사가 연말 연시를 맞아 미국에서도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성금 기부 소식을 전해왔다. 한책협에서 김도사는 “내가 가진 재능과 물질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코치로 사람들의 꿈실현을 돕고 있고, 말뿐이 아닌 실천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고 말하였다.

    현재 한책협 책쓰기 6주 과정 월요일 저녁반, 토요일 오후반, 1박2일 개인코칭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김도사는 유튜브 ‘네빌고다드TV’ ‘김도사TV’를 운영하며 책쓰기, 글쓰기, 책 쓰는 법, 글 쓰는 법, 1인 창업, 성공학, 부자학 등 다양한 영상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한책협 김태광 대표는 책쓰기와 1인창업을 희망하는 미국인들에게 미국 뉴욕 메리어트 호텔에서 181회 책쓰기 1일 특강이 열렸다. 뉴욕, 뉴저지, 맨허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특강에 대한 참가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미국 뉴욕 방송 KBN은 김도사를 인터뷰하며 관심을 보였고, 한책협이 미국 진출로 자기계발 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고구려 : 2차 여당전쟁, 연개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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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차 여당전쟁

    2차 여당 전쟁은 한 번의 전쟁이 아니라, 당태종 이 세민 사후부터 연개소문이 죽기 전까지 진행된 수차례의 충돌을 말한다.

    이세민이는 양광이에 비해 대 고구려 전과가 상당하였으므로 원정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으나,
    지 아들은 아무래도 애가 비리비리한지라, 수나라 꼴이 날까 봐 그랬는지, 고구려를 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그러나 뒤를 이은 당 고종은 애비의 소원을 풀어주려는 효심이었는지, 아니면 애비를 능가하는 치적을 쌓으려는 허영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고구려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양광의 재림이었다.

    655년, 고구려는 백제, 말갈과 연합해 신라의 33개 성을 빼앗고 수도인 금성까지 위협하였다.
    김춘추는 당나라에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대었고,
    당나라는 신라도 구원할 겸, 소정방을 보내 북쪽에서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59년에는 설인귀도 실패하였고.

    북쪽에서 연이어 실패를 맛본 당은 남쪽으로 공세를 전환하여 백제를 침략하였는데,
    백제는 660년 13만의 소정방과 5만의 김유신 연합군을 막지 못하고 허무하게 망해버렸다.
    고구려의 동맹이자 삼국의 한 축인 백제의 멸망이 비리비리한 애를 고무시켰는지, 
    당 고종은 661년 나당연합군을 평양으로 진군시켜 내친 김에 고구려의 숨통까지 끊으려 하였고, 
    별도의 4만 4천 명의 병력으로 고구려의 변방을 공격하게 하였다.
    양동작전을 쓴 것인데,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어버린 고구려는 백제의 옛 동맹, 왜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왜는 백제의 원수 나당 연합군과 싸우기 위해 옛 백제 지역의 소유성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왜와 백제, 참으로 끈끈한 관계라 아니할 수 없다.
    어쨌든 이로 인해 나당 연합군의 진군이 저지되었고, 거기에 더해 백제 부흥군이 기승을 부리는 바람에,
    신라군은 대고구려 전선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남쪽에서 한숨 돌린 고구려는 서북 변방에 병력을 집중시켜 당나라군을 격퇴하였다.
    고구려의 외교가 모처럼 빛을 발휘한 것이다.

    당은 미련을 못 버리고 그 해 다시 대군으로 수륙 양공 작전을 구사하며 평양성을 향해 진군하였는데,
    이번에도 패하자 고종의 입지가 약화되었는지 일시적인 휴전 상태가 되었다.
    일시적인 소강상태를 이용하여 이번에는 연개소문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여 배후의 위협을 차단하려고 하였으나, 백제를 멸망시켜 기세등등했던 신라는 고구려의 공격을 격퇴하였고.

    고구려가 신라와 싸우는 사이 당나라는 다시 고구려 정벌에 나서, 소정방이는 10만 대군을 배에 태워 대동강을 타고 올라왔으며, 글필하력이는 요동으로 쳐들어 왔다. 또 양동작전을 쓴 것이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번에는 소정방이가 무난히 평양성을 포위하였는데,
    그러나 평양성은 만만한 성이 아니었다.
    평양성은 외곽, 외성, 내성 등 3중 구조로 되어 있고, 오랜 공성전을 경험한 유서 깊은 성이며, 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요새였다.
    따라서 소정방의 10만대군은 밥이나 축내며 보초를 서는 신세가 되었으나,
    북쪽에서는 한 달여의 공방 끝에 요동방어선을 무력화시킨 글필하력이가 압록강으로 육박해 들어왔다.
    이에 연개소문은 아들 연남생을 보내 이들을 막게 하였으나 이 찌질이는 3만 여의 사상자를 남기고 패퇴하였다.
    또 한 번의 고구려의 위기였으나, 때 맞춰 중국 서북지역에서 철륵(위구르)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설인귀가 초기 진압에 실패하는 바람에 요동공략군은 위그르 전선으로 방향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글필하력이가 뒤로 빠져 한숨 돌리기는 했으나, 아직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소정방과 합류하기 위해 압록강 인근에 상륙, 남하한 것으로 추정되는 방효태가 사수까지 전진해 온 것이다.
    이에 연개소문은 군을 직접 지휘하여 방효태군을 거의 몰살해버렸는데,
    방효태는 13명의 아들 그리고 같이 출전한 온 동네 사람들과 더불어 마지막 돌격작전에서 죽어버렸다고 한다.
    이것이 연개소문을 명장으로 만들고 최악의 역신이라는 오명을 벗게 만든 사수전투이다. 사수대첩이라고도 한다.

    글필하력이는 떠나고 방효태는 장렬히 전사하는 바람에, 소정방이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고 식량마저 부족한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소정방이는 신라를 향해 살려달라고 악악대었고,
    백제부흥군에 발목이 잡혀 멀거니 구경만 하고 있던  김유신은, 소정방이가 다 죽게 되자 별 수 없이 북진하여 고구려의 포위를 뚫고 당군을 구원하였다.
    김유신은 이 싸움에서 1만여의 고구려 병사를 사상시켰다고 한다.
    소정방이는 뒤도 안돌아보고 퇴각하였고.

    이 일련의 전쟁에서 고구려와 당나라 양측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고구려는 국가의 중심지인 수도 평양이 오랫동안 당군에게 포위 공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요동성을 비롯한 방어 라인이 붕괴되는 바람에 청야 전술 말고는 변변한 전술을 쓸 수 없었으므로,
    주요 곡창지대와 철 생산지가 거의 초토화되었다.
    당 또한 수양제를 뺨치는 고종의 집착으로 인해, 전력 손실, 국력 소모가 상당했는데,
    결과마저 신통치가 않아, 황권의 약화를 초래하였고 
    그 결과 중소지주층과 손을 잡은 측천무후의 세력이 커지게 되어,
    훗날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애비 말 안 듣고 잘되는 자식 없다더니 당고종이 양광이 꼴이 난 것이다.

    그리고 665년 연개소문이 죽었다. 못난이 아들들을 남겨 놓고.
    만일 사수대첩이 승리가 없었다면 연개소문은 민족의 영웅이 아니라 그냥 개소문으로 남았을 것이다.

    고구려 : 1차 여당전쟁, 최고의 수성장군 안시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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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 차 여당전쟁

    수왕조를 양광이 말아 먹는 바람에 중원이라는 사슴은, 같은 선비족 출신인 당 고조 이연의 차지가 되었다.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당나라가 시작된 것이다.

    창업주의 저주와도 같은 아들들의 골육상쟁의 결과,
    형과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 이연을 협박하여 황위를 강탈한 당 태종 이세민이가 즉위하면서 고구려에도 암운이 드리워졌다.
    이세민이 이놈도 양광이와 비슷하게 주변국들을 정벌하여 모두 굴복시키고 고구려를 노린 것이다.
    이 패륜아들에게 고구려 정벌은 지들 원죄를 씻어내는 세례 비슷한 것이거나, 천하 통일 졸업식 같은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구려로서는 참으로 억울하고도 미칠 노릇이었다.

    수나라에게 신물이 나게 당한 고구려는 당시 왕이 평양성 전투의 영웅 고건무였음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중국의 힘을 두려워하여 처음부터 저자세로 일관하며 알아서 기었다.
    당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지도를 헌상하는가 하면, 중국 사신놈들이 오다 가다 보라고 수나라 전몰 병사들의 뼈로 만들어 요서에 세운 전승기념물을 철거하였고, 태자를 사신으로 보내 입조시키도 하였는데,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당나라놈들이 시비를 걸었는지, 631년 이후부터는 전쟁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641년 5월, 이세민은 지도제작 일을 맡은 관리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간첩질을 하게 하였는데,
    이는 고창국의 멸망을 마지막으로 우방국들이 전멸해 예민해져 있던, 고구려의 조야의 불안감을 극도로 자극하였다.
    불안은 내분을 불렀고, 고구려의 지배층은 강, 온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 와중에 영류왕이 신흥 귀족 세력인 연가의 힘을 꺾으려 하다가 되치기를 당해, 오히려 연개소문에게 피살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연개소문은 영류왕 포함, 귀족 100여명을 제거하고 보장왕을 왕위에 올린 후.
    자신은 대막리지가 되어 철권을 휘둘렀으며, 쿠데타의 명분이기도 했던 반당정책을 노골화 하였으므로,
    이세민이는 심기가 불편해졌는데, 마침 고구려의 침략 때문에 죽겠다는 신라의 비명이 잇따르자,
    세민이는 우선 외교적 압력을 행사하여 고구려의 간을 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다르게 사신까지 구금하며 배짱을 부렸고,
    열받은 세민이는 주군을 살해한 역적 연개소문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골육상쟁의 추악한 권력이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 정의의 화신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644년 7월, 이세민은 출병에 필요한 군량 징발과 수송에 관한 조처를 취하였고, 장검에게 고구려의 방어 상태와 형세를 탐색하게 하였다.
    11월, 장량이 4만여 병사를 이끌고 해로로 평양을 향해 진군하였고, 이세적이 보·기병 6만과 함께 요동으로 진군하였으며, 이세민은 645년 2월 12일, 6군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향하였다.
    총병력은 20만 정도로 추정된다.

    645년, 당군은 남도 중도 북도의 세 갈래로 침입하였는데,
    이세적의 선봉군은 가장 평탄한 북도로 신속히 이동하여, 고구려군의 요하 방어선을 기습적으로 돌파하였으며, 현도성을 함락시킨 후 개모성까지 함락하여 군량을 넉넉히 챙겼고,
    일부 군을 주둔시켜 신성 방면의 고구려군을 견제하게 한 뒤, 주력을 남쪽의 요동성으로 진군시켰다.
    장검은 남도를 취해 도하한 뒤, 이민족 부대를 거느리고 건안성을 공격하였고, 고구려 지원군 4만을 기병 4천으로 저지하였다.
    이세민이의 본군은 중도를 취해 요택을 건너 요동성으로 몰려들었고.

    당의 주력이 도착함에 따라 요동성의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고구려군은 무당에게 굿까지 하게 하는 등 있는 힘, 없는 힘을 모조리 동원하여 최선을 다해 저항하였으나, 적이 워낙 강하였다.
    수양제의 백만 대군에도 그렇게 견고하게 버티었던 요동성이건만, 이세민의 기동력이 가미된 전술에는 허망하게도 열흘 만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당군은 기세를 살려 백암성을 함락시켰고. 수군은 요동반도 남단의 천혜의 요새 비사성을 함락시켰다.
    세민이가 이렇게 전쟁 초반부터 사정없이 몰아붙이는 통에,
    연개소문,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당나라 군대는 개모성에서 백암성이 이르는 넒은 지역을 장악하여 확실한 교두보를 마련하였지만, 건안성과 오골성 그리고 신성은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고정의의 신중론을 묵살하고, 전국에서 닥닥 긁어모은 15만 병력으로 당군과 당당하게 야전에서 맞붙었는데,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세민이의 전략에 말리고, 술수에 속고, 용맹에도 밀려, 수만 명이 전사하였고,
    결국 작은 구릉에 3만 7천여 병력이 포위되어 항복하고 말았다.
    항복한 고구려 장교만 3천 5백여 명이었고, 말이 5만 필이었다고 하는데,
    이 정도면, 군사적으로는 사실상 여기에서 전쟁이 끝난 것이었다.
    이게 주필산 전투인데 이 전투에서 설인귀가 두각을 나타내었다.

    승리한 이세민은 곧 계획대로 안시성으로 진격하였는데,
    당시의 안시성은 성주가 연개소문이 쿠데타에 호응하지 않았고, 서로 창검을 겨누기까지 한 전력이 있는 지라 별 다른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항복을 권유하면 순순히 응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항복을 거절한 것은 물론 강하게 방어하며, 전후처리의 단꿈에 빠져있던 이세민이를 오도 가도 못하게 한 것이다.
    세민이는 당연히 열 받아 성이 함락되면 모조리 도륙하겠다고 펄펄 뛰었으나, 그건 님 생각이고.
    안시성은 낮에는 철저한 수비, 밤에는 야습으로 당군을 농락하였다.
    이세민은 수개월에 걸쳐 흙을 쌓아 토산을 만들고, 토산 위에서 나무와 돌을 날려 안시성의 성벽 일부를 허물었으나,
    폭우로 인하여 토산이 무너지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그나마 고구려 병사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최후의 희망이었던 토산마저 잃어버리자 세민이는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잃었고 안시성 공략을 포기하였다.
    안시성을 떠난 당군은 결국 퇴각하였는데 퇴로마저 험하여 고생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을지문덕에 버금가는 고구려의 구성, 안시성주의 이름을 전하는 기록은 없고 다만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야사에 전한다.

    당시 당군과 안시성 간의 전투는 무척 치열하여 이세민이 이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어 애꾸눈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고.
    이런 참혹한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장안으로 돌아온 후에 “위징이 살아있었다면 반드시 나를 말렸을 터인데, 그가 내 곁에 없다는 것이 너무나 슬프고 애석한 일이다.”라며 한탄하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런 전설들과는 다르게 이세민은 수만 명 규모의 원정군을 지속적으로 편성하여 요동에서 소모전을 수차례 전개하였고, 재차 대규모 원정을 계획하였으나 명이 짧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죽었는데,
    이 소규모 공격은, 청야 전술을 쓸 수밖에 없는 고구려에게는 치명적인 전술로서,
    요동방어선 일대가 초토화되어 결국 불모지로 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수양제는 나라를 말아 먹은 반면 당태종은 내치가 훌륭하여 정관의 치라고 칭송받는 것이 다를 뿐,
    고구려에게는 수양제나 당태종이나 다 그 놈이 그 놈이었던 셈이었다.

    양만춘이라고 알려져 있는 안시성주.
    연개소문의 공격도 막아내었고 이세민의 침입도 막아내는 등 당대 최고의 군사전략가 두 사람을 동시에 머쓱하게 만들었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수성 장군이란 칭호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사진] 특화학교 스마트팜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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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커넥션] 청소년 비즈쿨 특화학교 디지털미디어고등학교 학생들과 관계자들이 함께 스마트팜 투어를 하고 있다.

    [사진] 커넥션, 스타터스 발대식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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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커넥션 제공

    [수완뉴스=커넥션] 지난 16일 청소년 자치단체 커넥션과 비즈쿨 특화학교인 디지털미디어고등학교가 청소년의 창업 저변 확대를 위해 중소벤처기업부와 창업진흥원이 운영하는 청소년 비즈쿨 프로그램의 후원을 받아 『비즈쿨 청소년 창업자 커뮤니티 ‘StartUS(스타터스)’』를 출범했다. 사진은 스타터스 발대식 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