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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봄” 메가박스서 오는 5월 19일까지 ‘너의 이름은’ 등 특별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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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포스터,‘마블 시리즈’ 홍보 사진,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포스터 (사진=메가박스 공식 홈페이지)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포스터,‘마블 시리즈’ 홍보 사진,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포스터 (사진=메가박스 공식 홈페이지)

    [수완뉴스=박신애 기자] 라이프시어터 메가박스가 ‘다시, 봄’ 특별 상영전을 진행한다. 이번 상영전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며 착한 가격으로, 코로나19로 인해 침체된 관객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극장가에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기획됐다. 4월 15일부터 5월 19일까지 진행될 3가지 기획전 상영작의 공통 키워드는 ‘다시, 봄’이다. 많은 관객들이 사랑하고, 많은 팬덤을 보유한 영화들을 대상으로 스페셜 재상영을 진행하는 중이다.

     ‘다시, 봄’ 라인업의 문을 여는 기획전은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이다. 두 작품 모두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으로 많은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영화로 유명하다. ‘시간’을 주제로 한 ‘너의 이름은’과 ‘날씨’를 주제로 한 ‘날씨의 아이’. 두 작품 모두 인간이 참여할 수 없는 초자연적 모습에 대해 이야기 하기 때문에 높은 인기를 끌었다. 두 작품은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이야기 하며 관객들의 향수를 자극하여 관객들의 발걸음이 다시 영화관으로 향하게 할 것이다.

     두 번째 ‘다시, 봄’은 ‘히어로 리플레이’이다. 마블 팬덤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히어로 리플레이를 통해 마블 팬덤의 영화관 방문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1주차에는 데드풀과 로건을 시작될 것이다. 이는 마블 중 X맨 시리즈에 나왔던 두 인물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2주차와 3주차에는 순서대로 마블의 어벤져스 시리즈가 상영될 예정이다. 어벤져스 시리즈를 순서대로 상영하는 만큼, 이번 ‘메가박스 히어로 리플레이 기획전’의 라인업 리스트는 마블 팬덤은 물론 일반 관객들까지도 관심을 가질만한 영화들로 구성되어 관객들의 눈호강을 책임질 것이다.

     마지막 ‘다시, 봄’ 이벤트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실사판과 애니메이션 두 가지 버전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제목과 달리 해당 영화는 하루키와 하쿠라의 따뜻한 청춘 이야기이다. 모든 사람의 하루의 가치는 같다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이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하루를 모두 소중히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이고, 어렵고 힘든 이 상황에서 해당 영화는 많은 관객들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배우들의 감정 연기를 중심으로 보고 싶다면 실사판을, 분위기와 빛의 흐름과 정교한 작화를 보고 싶다면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번 상영전은 전국 메가박스 극장에서 상영, 일반관 및 MX관에서도 관람 가능하다. 일반관은 특별 상영료 5000원, MX관은 8000원에 관람할 수 있다. 지난 9일 예매 오픈과 동시에 예매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는 4월 15일부터 4월 28일까지 관람 가능하고, ‘마블 시리즈’는 4월 15일부터 5월 19일까지 가능하며,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4월 23일부터 5월 6일까지 관람 가능하다.

    관람 가능 극장과 자세한 사항은 메가박스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박신애 기자

    고려 : 26대 충선왕, 경계인으로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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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 장, 이지르부카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사이의 맏아들이며 쿠빌라이의 외손자로서 첫 몽골 혼혈 고려국왕이다.

    1275년 출생하였고,
    3살에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이듬해에 원에 입조하여 외할아버지 쿠빌라이의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17살에 다시 입조하여 쭉 몽골에서 생활하였는데,
    19살 되는 1294년에 쿠빌라이가 죽었고,
    22살에, 이미 3명의 아내가 있었음에도, 계국대장공주와 정략 결혼하였다.
    아버지처럼 원 황실의 부마가 된 것이다.
    23살에 어머니 제국대장공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귀국하여,
    아버지의 총비 무비를 척살하고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는데,
    이에 충격을 받은 충렬왕이 양위하자, 이듬해인 1298년 즉위하였다.

    즉위 직후 선포한, 급진적이었다는 포고령을 보면,
    1. 나라에 공을 세운 인물에게 포상한다.
    2. 공신의 자손에게 공신전을 지급한다.
    3. 내시의 등급을 상승시킨다.
    4. 실력을 위주로 임명, 파면, 승진을 결정한다.
    5. 신분에 상관 없이 인물을 등용한다.
    6.무신 정권의 몰락과 함께 급격히 기운 무신들의 권세를 상승시킨다.
    라고 되어 있는데,
    현대적 시각으로 보면 대부분 당연한 소리라, 이게 뭔 급진인지 의아하기까지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분 타파, 토지 제도 개선, 관리의 임면 제도 개선 등 당시의 사회 환경상 혁명적인 사상을 담고 있었다.
    충선왕은 말만 한 게 아니라, 혈기 넘치는 젊은 국왕답게,
    사림원을 설치하여 거의 반원적라는 느낌을 줄 정도로 관제를 개혁하였으며, 권문세족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러한 쾌거는, 백성들에게는 통쾌하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권문세족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일이었으므로,
    기득권을 빼앗기게 된 이 죽여도 죽지 않는 바퀴벌레 같은 놈들은 격렬히 반발하였다.
    한편 대대로 귀족들의 나라였던 고려에서 권문세족들과 싸운다는게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지를 알리 없는, 당시 10대 초반에 불과했던 계국대장공주는,
    충선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후궁 조비를 질투하여, 조비가 자신을 저주하였다고 원황실에 무고하는 철딱서니 없는 짓을 하였다.
    이리되자 쿠빌라이의 뒤를 이은 원성종 테무르는,
    쿠릴타이에 참가할 수있는 고귀한 신분이면서 왕국까지 보유하고 있는 고종사촌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황위를 물려받지 못한 형님의 체면을 생각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대로 치면 초등학교 졸업반 정도의 나이인 조카딸의 판단을 받아들여, 즉위한지 8개월밖에 안 된 충선왕을 폐위하고 원나라로 소환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라면 폐위된 왕과 그 친위 세력은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말살되었을 것이나,
    충선왕의 경우는 국내의 정치적 반대파에 의해 타도 된 것이 아니었고,
    여전히 원황실의 부마였기에, 고려 왕위에 대한 계승권은 여전히 충선왕에게 있었으며,
    고려 조정에 대한 영향력 또한 살아있었다.

    원의 대도로 돌아온 충선왕은,
    따로 돈 나올 구멍은 없고, 자기가 실각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처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항렬이 높은 황실의 종친이자 학식이 뛰어난 젊은이답게,
    종친들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과 비상금을 털어가며 교류을 하였으며,
    운이 좋은 것인지 정치적 감각이 뛰어 났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고 있던 황제의 조카 카이산, 아유르바르와다 형제의 스승이 되었다.
    지체높은 집안의 홈스쿨링 가정교사가 된 것인데,
    선생 노릇에도 소질이 있었는지 제자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이렇게 나름의 호구지책과 근거를 마련한 충선왕은 허무하게 날려 먹은 고려왕 자리에 복귀하기 위하여,
    고려에 남은 자파의 귀족들을 충동질하여 환국운동을 전개하게 하는 한편, 아직 존속하고 있는 정동행성을 이용하여 아버지를 견제하였다.

    한편, 얼떨결에 다시 옥좌에 앉은 충렬왕은,
    이미 한번 양위를 하기도 한데다,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었던 마누라가 사망한 뒤여서,
    이래저래 면구스럽고 불안하기 짝이 없었는데,
    게다가 원의 조정에는, 치국은 고사하고 수신, 제가도 못하는 소인배로 낙인 찍혀,
    수시로 파견되는 사신들과 일본 원정이 끝난지가 한참 되었는데도 폐지되지 않고 남아 있던 정동행성을 통한 원의 극심한 간섭을 받아야 했다.
    이 꼬라지면, 치사해서라도 옥좌를 얼른 자식에게 돌려주고 여생을 즐겼으면 좋았으련만,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면서 왕위에 대한 집착은 왜 그리 강하였는지,
    아들과 며느리의 불화를 이용하여 이러한 상황을 단박에 역전시키고자 하였다.
    계국대장공주를 개가시켜 아들의 부마 신분을 박탈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직위해제 개념이 아닌, 완전한 폐위를 이끌어 내고자 한 것인데,
    이는 아버지가 아들의 결혼을 파토나게 만드는 비열한 짓이기도 했으나,
    왕위에 목을 맨 충렬왕은 이에 개의치 않고 집요하게 밀어붙였다.

    *계국대장공주

    한국공주라고도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쿠빌라이 칸,
    할아버지는 황태자였으나 아버지 쿠빌라이보다 먼저 죽은 친킴이고,
    아버지는 친킴 태자와 태자비 코코진의 장남이었으나 황위를 잇지 못한 카말라.
    따라서 공주는 황제의 딸이 아니었으므로, 억울하다면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황태후 코코진이, 쿠빌라이의 막내딸이 왕비로 있는 고려를 주목하였고,
    고려의 세자와 공주를 맺어주었다.
    이로써 공주는 황녀급 대우를 받은 셈이었고,
    고귀한 신분이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이민족이라는 굴레를 쓰고 살아야 하는 충선왕 또한,
    로열 패밀리 처가를 가지게 되었으므로, 서로 별 불만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공주의 나이였다.

    1296년, 5촌 아저씨 충선왕과 결혼했을 때, 공주의 나이는 12살,
    시어머니 제국대장공주보다도 4살이나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간 것인데,
    제국대장공주도 제대로 성숙한 나이에 결혼한 것은 아니었지만, 계국대장공주는 아예 성숙을 논할 나이도 아닌 그냥 어린 아이었다.
    이때 이미 3명의 아내가 있었고 양성애자라는 소문도 있던, 22살의 충선왕이 이 어린 신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소아성애자는 아니었는지 별거하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수도승처럼 금욕생활을 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다른 부인들과는 활발한 부부생활을 한 모양인데,
    1297년, 모후의 급사를 계기로 귀국한 충선왕은, 왕위에 올라서도 부부생활의 패턴을 바꾸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 계국대장공주는 조숙했던지, 충선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조비를 질투하였다고 하는데,
    13살 먹은, 어린 신부의 강짜에 충선왕은 기도 안 찼겠지만,
    남편이 뭐라고 생각을 하든, 철들기에는 너무 어렸던 공주는 친정에 충선왕과 조씨를 모함하는 편지를 보내, 소위 조비무고사건을 일으켰고,
    편지를 받아 본 원황실은 이 되바라진 어린 것의 억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충선왕과 조비를 원나라로 잡아가는 만행을 저질러 버렸다.
    이로써 남편의 폐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공주는,
    사춘기의 반항심인지 아니면 애가 원래 싸가지가 없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아버지의 비열한 개가 책동에 적극 동조하는 등 사사건건 남편과 대립하였는데,
    충선왕의 인맥이 빛을 발한것인지, 아니면 당시의 보수적인 결혼관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매번 중서성 고관들의 반대에 부딛혀 개가하지 못하였다.

    비열한 아버지와 무개념 아내라는 인생 최대의 난적들과 악전고투를 하던 충선왕에게,
    천지신명이 도왔는지는 모르겠으나, 황제 테무르가 후계도 남기지 않고 뒈져버리는 사태가 발행하였다.
    멀쩡한 후계자가 있어도 지지고 볶는게 다반사인 몽골 황실 풍토에서,
    이러한 지랄 맞은 상황은 필연적으로 후계자 쟁탈전으로 이어졌고,
    여러 번의 반전이 있었으나 결국 충선왕의 옛 제자 카이산이 뒤를 잇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충선왕은 결정적인 역할까지는 아니라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반면 아버지 충렬왕은 노구를 이끌고 대도까지 와서 아들과 달리 황후파 안서왕에게 베팅하고,
    계국대장공주를 개가시키기 위해 총력을 다했으나,
    늙은 고려왕에게 천하의 대세를 결정한 힘은 없었으므로, 역사의 수레바퀴는 제 관성대로 흘러, 황후파에게 패배를 안겼고 안서왕은 분사하였다.
    졸지에 역적이 되어버린 충렬왕도 이 수레바퀴에 깔리는 신세를 면할 수는 없었기에, 그 똘마니들은 모두 충선왕에게 주살되었고,
    계국대장공주와 눈이 맞았던 상당한 미남이었다는 서흥후 왕전도 제거되어, 충렬왕이 총력을 기울였던 며느리 개가 책동 또한 최종적으로 무산되었다.
    절에 유폐되어 있던 충렬왕은 겨우 목숨을 구하긴 했으나, 빈손으로 쓸쓸히 귀국하여야 했고,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평생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던 인생을 접었다.

    1307년 카이산이 원 무종에 등극하면서 태사가 된 충선왕은,
    이듬해 1308년에는 요령성 일대를 영지로 하는 초대 심양왕에 봉해졌으며, 아버지 충렬왕이 사망하자 고려로 돌아와 다시 고려국왕이 되었고,
    다음해에는 심양왕에서 심왕(瀋王)으로 격상되었다.
    원래 2자 왕보다 1자 왕이 더 격이 높은데, 충선왕은 출신과 공적 때문에 실권까지 있었으므로, 이즈음의 충선왕은 징기스칸의 동생들의 가문인 동방 3 왕가의 수장들과 동격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강력한 힘을 갖추고 다시 고려에 복귀한 고려심왕 충선왕은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처럼 ,
    1. 세금을 낮추어 걷는다.
    2.귀족들의 횡포를 엄단한다.
    3.실력있는 인재를 등용한다.
    는 포고령을 발하고,
    왕권의 강화, 농업과 잠업의 장려, 권문세족의 횡포 억제, 동성동본 결혼금지, 조세의 공평, 관리의 고른 등용 등을 추진하였으며,
    각염법을 시행하여, 권문세가와 사원의 소금의 전매 독점을 금지하고 폭리를 취하는 것을 막아, 재정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요양의 세력가 홍중희가 대도에서 입성론을 제기하며 충선왕을 정치적으로 공격하였고,
    고려 권문세족들의 저항 또한 여전하여 개혁이 지지부진하였는데,
    결정적으로 숙창원비 사건까지 터져 버렸다.
    숙창원비는 충선왕이 아버지 충렬왕을 위로하기 위해 바친 여인이었다고 하는데,
    숙창원비가 충렬왕의 무엇을 어떻게 위로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뻤는지, 아버지가 죽은 뒤 귀국한 충선왕도 숙창원비에게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이 자체로도 심각한 패륜인데,
    문제는 충선왕이 이 요부에 홀려, 능력도 없는 그녀의 오빠를 고위직에 등용하고, 팔관회까지 중지하는 등 정사까지 개판을 쳐버렸다는데 있었다.
    이는 개혁이다 뭐다해서 가뜩이나 짜증이 만발했던 고려의 귀족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데, 결국 조정 중신 우탁이 추악하다고 일갈을 하자 이에 부끄러움을 느껴 고려를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학자를 자처했던 충선왕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 충선왕은 아무리 쿠빌라이의 외손자로서 제 스스로는 그 어떤 몽골인 보다 더 몽골스럽다고 우긴다 해도 엄연히 왕씨를 가진 고려인이었기에,
    원의 조정에는 그의 출세를 고깝게 생각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홍중희처럼 제 것을 빼앗기고 이를 가는 정적들도 양산되는 상태였다.
    따라서 부끄러움 보다는, 황도의 정치적 상황이 불안하여 핑계김에 일단 중앙정계로 복귀했을 것이다.

    대도로의 복귀가 무엇 때문이었건 간에, 소위 원격 통치가 시작되었는데, 고려에게는 이게 또 새로운 악몽이었다.
    우선 왕의 원나라 체재비용이 많이 들었고,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의 사정상, 나랏일 또한 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 국내에서는 왕의 귀국 운동이 있었고, 원의 조정 또한 강력한 힘을 가지고 황제의 측근에서 정사를 좌지우지하는 고려 심왕이 부담스러워 귀국을 종용하였으나,
    대도의 정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충선왕은 이를 번번히 거절하였고,
    1310년 원나라에서 자신을 폐하고 장남인 세자 왕감을 고려 왕위에 올리려고 하자, 세자를 죽여버리면서까지 왕위에 집착하였다.
    그런데 1311 원무종이 죽고, 친밀도가 높았던 옛 수제자 아유르바르와다가 원인종으로 등극을 하자,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
    1313년, 제위 5년 만에 아들 충숙왕에게 고려 국왕 자리를 양위하였다.
    고려로 돌아가는게 징그럽게 싫었나 보다.
    그리고 1316년에는 조카 왕고에게 심왕 자리도 양위하였다.

    한편, 계국대장공주는 적극적인 성격으로, 무력을 포함한 상당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원나라에 영지가 있었고, 고려 왕비로서의 경제적 수입도 있었기에, 경제적 기반도 탄탄했다고 하는데,
    인생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는 바람에, 남편에게 회복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으며, 그 이후에도 잘못을 반성하기는 커녕 오히려 남편과 대결을 선택하였다.
    이로 인해 멀리 떠나간 남편의 마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공주 또한 되돌리려는 별 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
    비록 형식적인 결혼관계는 유지하였으나, 이미 쫑나버린 부부였기에 자식이 있을 수 없었으므로,
    결국 겉 보기에는 화려, 장엄하였으나, 애틋한 사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1315년 향년 30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원나라에서 사망하였다.

    충선왕은 왕위를 모두 내려 논 뒤에도 대도에 머물었는데, 아버지처럼 음주가무로 인생을 낭비한게 아니라,
    만권당을 설립하여 고려와 원의 저명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학술을 교류하고 고전 연구에 힘썼으며, 원 인종에게  과거제를 제의해 원의 과거제 실행을 돕기도 했다는데,
    이때 이제현도 초빙되었다고 한다.
    반면, 원 인종의 반대세력들은 완전한 몽골인도 아니면서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 권력상층부에 진입한 충선왕에게 적대적이었는데,
    1320년 원나라의  원인종  아유르바르와다가 사망하자  환관  임백안의 참소로  토번까지 유배를 가야 했다.
    다행히 이제현의 간절한 상소로 3년만에 귀양이 풀린 충선왕은  대도에서 소일하다
    1325년 사망했다. 향년  51세.

    *입성론
    일종의 자치령이었던 고려를 원의 지방제도에 편입시켜 황제의 직접통치를 받게 해달라는 청원으로 고려왕과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부원배들이 주로 주장하였다.
    이 입성책동은 충선왕 복위 이후부터 약 30년 동안 4차례에 걸쳐 발생하였는데,
    1309년(충선왕 복위 1) 경에 요양행성 우승 홍중희에 의해 제기된 것이 첫번째였다.
    홍중희는 희대의 매국노 홍복원의 손자로서 요양 지방에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었는데,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심양왕에 봉해지고 요양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하자,
    이에 위협을 느껴 충선왕을 탄핵하는 한편, 고려에 새로운 행성을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문에 충선왕은 고려왕에 복위한 직후부터 단행했던 개혁의 일부를 철회하는 등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으나, 충선왕에 대한 원황실의 신뢰가 확고하였기에
    홍중희의 볼기를 때리고 조주로 유배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323년(충숙왕 10)에는 유청신·오잠 등에 의한 제2차 입성책동이 있었는데,
    이는 충선왕이 토번으로 유배되고, 충숙왕이 국왕인을 빼앗기고 원나라에 억류되는 사건이 있자, 고려에서 심왕옹립운동이 일어났는데,
    유청신과 오잠 이 잡놈들이 심왕 고의 편을 들기 위해 제기하였고,
    행성의 이름을 삼한행성으로 정할 정도로 상당히 진전되었으나,
    당시 원나라에 머무르고 있던 이제현 등이 부당함을 강력히 주장하여 실행되지는 않았다.
    제3차 입성책동은 1330년충혜왕이 즉위한 직후에 장백상에 의해 추진되었는데,
    장백상은 충숙왕 때 정동행성 낭중을 지낸 몽골놈도 아닌 중국놈이었는데,
    충숙왕이 퇴위되고 충혜왕이 즉위하자 뜬금없이 입성책동을 일으켰다.
    이는 충혜왕이 직접 요청하여 중지되었다.
    1343년(충혜왕 복위 4)에는 이운·조익청·기철 등이 충혜왕이 탐음부도하다는 명분으로 제4차 입성책동을 일으켰으나,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대신 충혜왕을 퇴위시키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이렇게 4차례의 입성책동은 모두 좌절되었으나, 입성문제가 제기되고 논의되는 과정에서 원나라의 정치적 영향력이 더욱 증대되어 고려의 처지는 더욱 궁색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쟁점토론] 성매매 합법화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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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매매는 일정한 대가를 주고받기로 하고 성행위나 이에 준하는 행위를 하는 일이다. 인류역사의 시작과 함께 등장한 하나의 현상이라고 한다. 인간의 성욕은 성매매라는 작용으로 꽤 오래전부터 등장했다. 세계적으로 성매매 시장은 나날이 커져가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비윤리적이라는 인식과 함께 성매매금지법의 제정을 통해 음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유럽에서는 성매매 종사자들을 보호하고 관리하여 음지에서의 폐단을 없애보자는 취지로 성매매를 합법화한 국가들도 꽤 여럿 존재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성매매금지법 이후 오히려 성매매가 증가했다는 통계가 등장하면서 성매매합법화의 논의가 다시 등장하고 있다. 성매매합법화는 과연 성매매의 부정적인 측면을 줄여줄 수 있을까?

    찬성측

    성매매 합법화를 통해 성매매 시장을 양지화시켜 체계적으로 관리, 보호할 수 있다.

    성매매를 금지시키면 성매매는 더욱 음지로 들어갈 것이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가격은 점점 높아질 것이다. 합법화를 통해 국가가 체계적으로 성매매 종사자들을 관리하여 그들의 인권신장과 처우개선을 비롯한 제반 문제들을 개선해 나갈 수 있다. 또한 성매매 종사자들의 성병 예방 등 건강과 보건 측면에서의 기본권도 보호 가능하다.

    성매매 합법화를 통해 부정적인 인식을 개선할 수 있다.

    성매매 합법화를 통해 성매매 종사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개선하고 스스로 선택한 직업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며 그들의 권리를 지켜줄 수 있다. 권리를 부여하면 의무의 부여도 가능하므로 그들의 납세를 통해서 세수도 확보할 수 있다.

    반대측

    성매매 합법화는 인간의 성을 상품화하는 행위이다.

    인간의 성은 어떠한 이유로도 상업적으로 이용될 수 없으며 인간의 성과 성관계를 경제적으로 사고판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동이다. 그리고 이것을 합법화 하는것은 인간의 성과 성관계를 상품화하는 옳지 못한 행위이다.

    성매매 합법화는 여성의 지위와 권리를 하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성매매 합법화는 성매매 여성을 보호하지 못하며 오히려 성매매 여성은 성적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버릴 것이다. 또한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사고 얻을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 풍조를 확산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인창고등학교 글로벌미래전략토론회

    [칼럼] N번방 사건, 끝이 아니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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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우 칼럼리스트

     [수완뉴스=박정우 칼럼리스트] 갓갓의 N번방, 와치맨의 고담방, 박사의 박사방까지 우리는 이러한 이름들을 들으면 무엇을 떠올릴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2019년 2월부터 수십여 명의 여성을 협박하여 성 착취 영상물을 찍게 하고, 이를 텔레그램을 통해 거래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인 N번방 사건을 떠올릴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사건이 너무나 안타깝고 인간의 존엄성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됐다.

      특히 박사의 박사방은 그 악명이 매우 유명하다. 박사방의 박사인 조주빈의 신상이 공개됐을 땐 이제 갓 25살 된 청년이 이런 끔찍한 사건의 주범이였다는 것과 그가 보육원에 가서 봉사활동을 했었다는 것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 외에도 공동 정범인 강훈의 경우 이제 갓 성년이 되는 대학 신입생인데, 그런 그가 그동안 박사의 자금을 관리하는 자금책이었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구청 공익, 군인 등 다양한 공범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를 종합해 볼 때 공범들은 20대 초반에서 많아 봐야 중반인 걸 알 수 있다. 그들의 범행 수법도 참 잔인하다. 먼저 피해 여성들 대부분은 SNS에서 조건 만남이나 스폰 알바를 구하던 여성들이었다. 박사는 트위터 등에 고액 알바 모집 글을 올려 이러한 피해자들의 신상 정보를 먼저 수집한 뒤, 본 알바가 조건만남임을 가장하고 이들에게 주민등록증 사진, 계좌번호, 연락처 등을 요구했다.

      그 뒤 이렇게 얻은 개인정보를 이용해 성착취물을 찍도록 협박했으며, 이러한 영상을 박사방에 들어온 유료회원들에게 유포할 때 생년월일, 집 주소, 전화번호 등 피해 여성들의 신상을 함께 공개하는 데 사용되었다. 심지어 피해 여성의 더 세부적인 신원정보를 캐기 위해 동사무소에서 활동하는 사회복무요원도 매수했다. 그리고 이러한 성착취물에는 신체에 벌레 등 이물질을 넣게 하거나, 변기물을 먹이거나, 대소변을 누는 사진을 찍게 하거나, 화장실 배수구를 핥게 하는 등 인간성을 짓밟는 심각한 내용의 영상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한 이유는 이 사건의 피해자가 공식적으로 74명인데 그 중에 미성년자가 16명이나 되는데도 사건의 심각성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에 그 심각성에 대해서 다루고자 이 사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게 됐다. 

    이번 달 칼럼은 N번방 사건을 통해 현재의 ‘사법 제도의 성폭력 범죄’에 대한 미비점에 대해서 다뤄보고자 한다.

      먼저, 범죄자의 신상정보 공개제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동안의 범죄자의 신상정보공개의 기준이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강력범죄, 충분한 범행 증거, 국민의 알권리 등 공공의 이익, 범인이 미성년자가 아닌 경우 등 매우 엄격하여, 대부분 잔인한 살인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에 한정되서 공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 신상이 공개된 ‘박사 조주빈’의 경우 살인 혐의가 없는 경우로는 조주빈이 처음이다. 이러한 조치는 해당 인물이 저지른 사건의 심각성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박사 조주빈에 이어 신상이 공개된 부따 강훈의 경우 올해 나이가 2001년생으로 아직 만 18세 미성년자이다. 즉, 이번 공개는 미성년자인 피의자 신상을 공개한 것으로 신상정보 공개제도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신상정보 공개제도에서 미성년자의 기준은 청소년 보호법 상의 청소년 나이인데, 부따 강훈은 만 19세가 되는 해 1월 1일부터는 성년으로 취급하는 청소년보호법 조항 때문에 민법상 미성년자여도 신상정보 공개가 가능한 것이다. 사실 이는 매우 희귀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내가 문제 제기 하고자 하는 것은 신상정보 공개제도의 공개 기준과 공개제도의 운영의 효율성이다. 먼저 신상정보 공개 기준에서 미성년 범죄자에 대해서 어떠한 범죄든 미성년자이므로 앞으로 미칠 파급력을 생각해서 금지하고 있는데 이는 공익 및 국민의 알 권리의 관점과 비교할 때 과연 타당한 기준인가?에 대해서 많은 의문이 생긴다.

      오히려 필자는 개인적으로 살인뿐만 아니라 강도나 성범죄 등 다양한 종류의 강력범죄에 대해서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범죄를 저지른 미성년자 범죄자도 다른 신상이 공개된 범죄자들과 형평성의 원칙에 따라서 그 범죄 내용이 심각하고 지속적인 피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으면 미성년자임에도 신상정보를 공개함으로서 우리 사회의 공익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신상정보 공개제도의 운영과 관련해서도 보통 광역 지방 경찰청에서 신상정보 공개 관련 심의위원회(이하 심의위)를 두어 심의위의 결정에 따라 신상을 결정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 현행 제도이다. 이에 대해서도 사실 심의위의 민간 위원에 대한 요건이 법적으로 규정된 것이 없다보니 사실상 심의위 운영과정에서 외부 전문가의 구성이 사건에 따라 달라지다보니 심의의 효율성이 떨어지며 공개가 너무 제각각인 경우가 많다. 심의위의 민간 위원 요건에 대해서 보다 명확한 법적 기준을 마련할 필요성이 있다.

      다음으로는 성범죄에 대한 양형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성착취 범죄라는 것이 없을 뿐 더러, 더군다나 온라인상에서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집단 성폭행에 대한 혐의를 규정할 수 있는 죄명은 더더욱 없다. 그러다 보니까 개별적으로 이제 각각의 역할을 가지고, 각각 죄형을 적용해야 하는데 적용할 수 있는 죄명은 기존의 법률들에서 끌어오다 보니까 생각보다 형량이 높지가 않다.

      더불어 n번방에 들어간 사람들 중 유료 회원을 제외하고 무료방(맛보기방) 이용만 한 사람들인 단순 이용자의 경우 처벌은 받겠지만, 영리 목적이 아닌 단순 소지한 혐의를 적용받아 아동·청소년물 배포 소지죄로 벌금형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아청법상 벌금형을 받으면 신상정보 공개 대상에서 제외되므로 전원이 처벌을 받을지언정 전원의 신상이 공개되는 건 힘들다.

      심지어 해당 단순 이용자가 어떤 영상을 봤는지에 따라서도 처벌수위가 다를 수 있는데 해당사건의 피해 여성은 74명 중 16명이 미성년자이다. 따라서 성인이 피해자인 영상만 본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데, 이 경우 처벌규정이 없으므로 무죄가 된다.

      마지막으로 입법에 관련된 내용이다. 이번 N번방 사건 때문에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아청법)의 ‘대상아동·청소년 조항’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아청법은 아동·청소년을 성범죄로부터 보호하고 이들이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목적 아래 2000년 제정됐다.

      현행 아청법상 성매매에 유입된 아동·청소년은 ‘자발성’ 유무를 기준으로 ‘피해아동·청소년’과 ‘대상아동·청소년’ 으로 분류된다. 자발성이 없었다고 판단된 피해아동·청소년에게는 여러 법적 보호와 지원이 따르지만, 성매매에 가담했다고 판단된 대상아동·청소년은 피해자가 아닌 보호처분 대상이 된다.

      하지만, 보호처분 규정이 성매수자들이 아동·청소년을 협박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대상아동·청소년이 보호처분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해 ‘신고하면 너도 처벌받으니 가만히 있으라’는 협박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번 N번방 사건에서 미성년자인 피해자들을 ‘피해아동·청소년’과 ‘대상아동·청소년’ 중 어디에 속한다고 봐야 될 것이냐에 대해서 많은 논쟁이 일어났다.

      또한 이번 N번방 사건의 부따 강훈처럼 소년범에 대한 이슈도 많이 생겼다. 즉,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강훈도 소년범으로 보호 받는 거 아니냐?’는 것이다. 그 정답은 일단 소년법에 따른다.

    ‘소년의 기준은 만 19세까지 이므로 강훈도 소년법의 보호를 받는다. 따라서 그가 형사 기소가 돼서 아무리 형을 많이 받는다고 해도 징역 15년이 최대이다.’ 이에 대해 필자는 개인적으로 소년범이라도 흉악 범죄를 저지른 소년범에 대해서는 형법상 책임의 원칙, 비례의 원칙을 강하게 적용하여 그 형사처벌 한도를 무기징역까지 확대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를 고려해 볼 때 현행의 성범죄에 대한 양형을 강화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아청법이나 형법의 개정을 통해 성착취에 대한 형벌 규정을 신설하고, 아청법의 ‘대상아동·청소년’ 규정을 삭제하고 소년법상 소년범들에 대한 형사처벌 한도를 무기징역까지로 강화 하는 등 N번방 사건과 같은 신종 성범죄를 비롯한 더욱 고도화되는 강력범죄에 대응할 수 있으며, 변화하는 우리 사회 제도에 맞는 강력한 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박정우 칼럼리스트 / 법제처 국민법제관, 여성가족 분야

    디스코드, n번방이 숨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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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이동규 기자] 최근 조주빈(24) 외 관련 일당이 운영한 텔레그램 성착취물 공유 ‘박사방’이 저지른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되어 가고 있다. n번방, 박사방 등 조주빈과 그 공범 등은 미성년자를 상대로 불법 성 착취물을 촬영하여 유포한 혐의를 받아 현재 검찰 조사중에 있다.

    디스코드 홈페이지 캡쳐

    n번방이 운영된 텔레그램은 SNS인 ‘트위터’의 메신저이다. ‘카카오톡’과 같은 국내 메신저 외에 해외 기업이 운영하는 ‘텔레그램’이 범죄에 사용된 이유는 본사와 서버가 해외에 있기 때문에 단속이 힘들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n번방은 현재 조사중에 있지만,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은 불법 성착취물 공유방이 있을까. 해외 메신저인 ‘디스코드(Discord)’는 여러 사람들이 서버에 접속하여 다양한 채팅 채널을 구성할 수 있는 메신저이다.

    음성과 영상 통화도 지원하여 게이머들의 주 메신저가 되어있다.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중/고등학생, 어쩌면 초등학생과 같은 미성년자도 많이 분포하고 있다. n번방이 텔레그램에서 적발된 후, 이목은 디스코드에 쏠리고 있다.

    디스코드는 18세 이상만 볼 수 있는 설정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설정된 채널에 들어가면 ‘이 채널을 보려면 18세 이상이여야만 해요’라는 경고성 메세지만 뜰 뿐, 별도의 성인인증이나 부모 동의가 필요하지 않다.

    이와 같은 문제로 경기북부경찰서는, 디스코드 n번방과 관련하여 수사를 진행중이고, 벌써 수십명의 가해자가 나왔다. 가해자 중에서는 12세 초등생도 적발되어 일각에서는 청소년도 이미 성범죄에 노출되고 있다며 더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편 박사방 운영자인 조주빈과 그 공범들은 오는 24일 첫 재판이 열린다.

    이동규 기자

    2020 세월호: 극장들, 세월호의 6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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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 세월호: 극장들’ 포스터, (사진=’2020 세월호: 극장들’ 공식 페이스북)

    [수완뉴스=박신애 기자] 혜화동1번지, 연우소극장, 성북마을극장, 삼일로창고극장이 7일부터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기획 공연 ‘2020 세월호: 극장들’이 공연되는 중이다. 10개의 공연팀이 다양한 극장으로 분산되어 10개의 공연을 시기에 따라 개막할 예정이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한 상황은 공연팀들이 공연을 제 때 올릴 수 없다는 난관에 부딛혔다. 2015년부터 매년 선보인 ‘내 아이에게’는 코로나 19의 여파로 유튜브를 통해 공개 되었으며 실시간으로 보지 못한 관객들도 볼 수 있게 유튜브 사이트에 공개되어있다. 이 공연은 적은 제작비로 여느 무대처럼 화려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먹먹한 감동을 주는 공연이었다.

    7명으로 이뤄진 밴드가 함께한 공연으로, 마지막 부분에서 전 배우가 대사를 치는 부분에서 세월호의 현실, 여전히 크게 변하지 않은 세월호 이후의 사회를 마주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시간이 지났다고 잊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보며 마음 한구석이 저려왔다. 

    이어지는 두 번째 작품 <바운더리>(공연팀 퀴어연극제, 황유택 연출)는 오는 23일부터 26일까지 성북마을극장에서 관객을 만난다. 코로나19로 2m 간격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주최 측이 선택한 방식은 ‘거리 두기 좌석제’다. 회당 8명의 관객만 극장에서 관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문화예술계에 닥친 타격으로, 애초 10개 공연을 4월7일부터 5월3일까지 진행하려던 계획도 완전히 수정됐다. 현재 잡힌 일정으로는 6월28일까지다. <참담한 빛>(4월29일~5월3일, 혜화동1번지), <용민지애정술 본풀이>(4월30일~5월3일, 연우소극장), <기록의 기술>(5월7~10일, 혜화동1번지), <아지트, 틴스>(5월15~17일, 혜화동1번지), <시간 밖으로>(6월4~7일, 연우소극장), <장기자랑>(6월10~13일, 혜화동1번지), <추락 I>(6월17~21일, 혜화동1번지), <나 하나 나 둘 나 셋 나 넷>(6월13~28일, 삼일로창고극장)의 순으로 공연될 예정이다. 이 중 ‘시간 밖으로’는 소설 다비드 그로스만을 원작으로 만들어졌고, ‘나 하나 나 둘 나 셋 나 넷’ 은 관객이 배우로 참여할 예정이다. 

    혜화동1번지는 2015년부터 매년 세월호 기획 공연을 개최하여, 세월호의 현실과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 청소년, 유가족, 시민의 일상과 시간을 보여주며 많은 사람들에게 세월호를 기억할 수 있게 해주던 연극제였다. 상황이 어렵고 문화예술계가 얼어붙어 더욱이 힘들지만, 많은 관객들이 발걸음해주길 고대해본다.

    ‘2020 세월호: 극장들’의 각 참여 작품과 예매 관련 자세한 사항은 인터파크, 플레이티켓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박신애 기자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두산아트센터 <두산인문극장> 올해의 주제는 ‘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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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육주현 기자] “당신이 먹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You are what you eat.)”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는 사람과 음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1년 365일 수많은 식재료와 음식을 언제든지 접할 수 있다. 또한 ‘먹는 것’을 소비하고 생산하며 음식문화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기도 한다. 현재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먹고 있을까?

    두산아트센터는 <두산인문극장 2020> 주제를 ‘푸드(FOOD)’로 선정했다.

    두산아트센터가 2013년부터 시작해 8년째 진행하는 ‘두산인문극장’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과학적, 인문학적, 예술적 상상력이 만나는 자리다. 빅 히스토리: 빅뱅에서 빅데이터까지, 예외, 모험, 갈등, 이타주의자, 아파트 등 매년 다른 주제로 지금 우리 사회의 현상에 대해 근원적 질문을 던지며 함께 고민해왔다. 올해는 ‘푸드’를 주제로 강연 8회, 공연 3편을 5월 6일부터 7월 20일까지 진행한다.

    강연 8회, 공연 3편 구성, 다양한 관점으로 ‘푸드’ 살펴봐···.

    강연은 총 8회로 푸드(FOOD)의 역사, 의미, 윤리적 갈등, 미래 등을 살펴본다. 기조강연은 KBS 다큐멘터리 <누들로드>로 잘 알려진 이욱정 PD가 맡았다. 그는 문명을 만들어낸 음식인 빵과 국수의 역사를 통해 인류의 수수께끼를 풀어본다. 전중환 진화심리학자는 푸드의 진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살펴보고, 김태호 과학기술학자는 인류에게 빼놓을 수 없는 활동인 농업의 역사를 돌아본다.

    푸드가 가진 윤리적, 사회적 의미도 살펴본다. 돼지농장 대표 이도헌은 오늘날의 축산업을 돌아보고, 동물해방 운동의 바이블과 같은 『동물해방』(피터 싱어 Peter Singer 작)을 번역한 김성한 교수가 채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에게 푸드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김율리 인제대학교 섭식장애정신건강연구소장은 음식으로 인한 정신 · 심리적 장애를 살펴본다. 정재훈 약사는 현대사회 속 푸드의 모습을 보며 숨은 의미를 찾아본다. 마지막으로 주영하 음식인문학자는 한국 음식의 역사를 통해 현재, 미래의 모습을 다룬다.

    공연 3편은 연극 <1인용 식탁>, <궁극의 맛>, <식사食事>로 구성했다. ▲연극 <1인용 식탁>은 윤고은의 동명 단편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원작이 발표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은 더 이상 혼밥이 특별한 문화는 아니지만, 여전히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은 존재한다. 혼자 식사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식사의 의미를 들여다본다. 이오진이 각색하고 창작집단 LAS 대표 이기쁨이 연출한다. ▲연극 <궁극의 맛>은 츠치야마 시게루의 동명 만화를 각색한 작품으로 감옥이라는 공간에 갇힌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세상과 단절된 채 하루하루 살아가던 그들의 사정이 음식을 통해 드러난다. 평범한 음식 안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의 ‘궁극의 맛’을 발견한다. 제56회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수상한 신유청이 연출을 맡았다. 마지막 ▲연극 <식사食事>는 다양한 이유들이 뒤섞여 발생하는 ‘식사’라는 사건을 통해 음식과 먹는 행위 안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욕망을 살펴본다. 극단 그린피그 대표 윤한솔이 연출을 맡고 미술, 음악,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안데스, 이라영, 조문기가 공동창작으로 참여한다.

    ‘두산인문극장 2020: 푸드 FOOD’ 강연은 모두 무료다. 두산아트센터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예약 가능하며 선착순 마감된다. 공연은 두산아트센터 홈페이지와 인터파크 티켓에서 구매할 수 있다.

    강연 정가는 35,000원이며 두산아트센터 회원의 경우 할인해서 28,000원, 60대 이상 노인은 티켓은 10,000원이다.  자세한 티켓오픈 일정은 추후 홈페이지(www.doosanartcenter.com)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진=두산아트센터 제공

    육주현 기자

    고려 : 25대 충렬왕, 황제의 막내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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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 개명
    원종의 맏아들이다.
    이 양반은 썩 달갑지 않은 의미의 처음이 많은데,
    우선 몽골 황실의 부마가 된 첫 고려 국왕이고,
    성종조에 종묘를 설치한 이래 묘효를 부여받지 못한 첫 번째 왕이며,
    시호의 첫 자에 ‘충’자가 들어가는 첫 번째 왕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나 별 재미없으니 그만하고….

    1260년 태자에 책봉되었고,
    1271년 원나라에 입조하여,
    1274년 5월 이미 조강지처가 있는 39살 아저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쿠빌라이의 막내 딸과 정략 결혼하였으며, 이어 6월 원종이 사망하자 즉위하였는데,
    즉위를 위해 귀국할 때, 세조구제가 무색하게도, 머리를 변발하고 옷을 몽골식으로 입어 백성들을 뜨악하게 하였다고 한다.
    고려판 오렌지족이었던 셈으로, 고려 백성들은 이 꼴사나운 왕을 보며 혀를 끌끌 찼겠으나,
    그래도 황제의 부마였기에 제국 최고회의인 쿠릴타이에 참석할 권한이 있었고,
    원의 사신이나 다루가치들 뿐만 아니라 상국의 벼슬아치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나름 권위 있는 왕이었다.

    충렬왕의 서열은 원의 제후왕들 중 7위였다고 하는데,
    그래봐야 속국의 국왕이라는 처지에는 변함이 없어서, 즉위하자마자 쿠빌라이의 닦달에 일본 원정군을 파견해야 했다.
    쿠빌라이는 남송 점령전을 수행할 때, 일본에게 송과 관계를 끊고 원에 복종하라고 요구하였는데,
    당시 십대에 불과했던 일본의 쇼군은 이를 거부했고, 이어진 수차례의 협박에도 무시로 일관하였다고 한다.
    이에 짜증난 쿠빌라이가 일본을 징치하기 위해, 1274년, 고려를 앞잡이 삼아 일본으로 쳐들어 갔는데,
    몽골놈들이야, 이 겁대가리 없는 우물 안 개구리들에게 새로이 천명을 받은 천하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각인시켜주고, 막대한 부수입까지 올릴 수 있는 호쾌하고도 흐믓한 일이었겠으나,
    전비를 부담하고 선봉까지 서야했던 고려 입장에서는, 잘 되든 못 되든, 남는 것도 없이 일본의 원한만 사게 되는 지랄맞은 전쟁이었다.
    전투는, 마치 유럽의 기사를 연상케 하는 무사도의 일본군과 화약무기까지 가진 전투 전문가들의 싸움이었기에, 연합군이 초장부터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양상이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전개는, 고려를 비롯한 몽골의 침입을 받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늘상 있던 일이므로, 식상하기까지 하지만, 이번에는 결과가 달랐다.
    느닷없이 태풍이 불어와, 고려 백성들이 피똥을 싸가며 수년동안 건조했던, 연합군이 타고 온 배를 왕창 부셔버린 것이다.
    이 어이없는 사태에 연합군은 졸지에 섬나라에 고립되어 버렸고. 당장 보급이 난망하게 되었는데,
    망가지고 없어진 그 많은 배들을 빠른 시간 내에 다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난감해 하던 연합군은 결국 덜 부서진 배들을 수리하여 몸만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몽골놈들이야 황당했겠지만, 피 흘리며 싸워 이겨봐야 별 볼 일 없었을 고려군은 차라리 이렇게라도 전쟁이 끝나는 것이 반가웠을 것이다.
    따라서 1차 원정은 패전이라기 보다는 자연재해로 인한 정전에 가까웠는데,
    이리되자 약이 오른 쿠빌라이는 1279년 남송을 완전히 점령한 뒤,
    1284년 옛 남송의 병력 10만까지 포함된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하여 2차 침입을 명하였다.
    잠재적 불온 세력도 처리하고 말 안 듣는 왜놈들도 징치하고, 양수겹장의 묘수라고 생각했을 것인데, 그건 님 생각이고, 현실은 전혀 달랐다.
    이번에도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의 선전으로 인한 초전의 유리함과는 별개로,
    웬수같은 태풍이 또 불어와,
    주력인 남송의 병력은 배의 침몰과 함께 다수가 배에서 내려 보지도 못하고 사망하였고, 
    곤죽이 되어 겨우 상륙한 병사들도 일본군의 적개심이 가득한 칼날에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일본 애들도 일차 때 피 흘리며 제법 배웠던 모양이다.
    14만의 연합군 중 생환한 병사는 3만에 불과했다고 하는데,
    이에 열받은 쿠빌라이는 3차 원정도 계획했으나, 베트남이 더 열받게 하는 바람에 칼끝을 베트남으로 돌렸고, 
    덕분에 일본은 태풍 때문에 이겼든 뭐 때문에 이겼든, 몽골의 침입을 두 번씩이나 격퇴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게 되었다.
    2차 전쟁에서, 몽골은 자체 동원한 병사나 자원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피해 또한 거의 없었으나, 
    원정 준비에 피박을 쓰고 괜히 끌려가 칼춤을 췄던 고려나, 칼춤도 제대로 못 추고 죽는 역할만 했던 옛남송군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어이없고 억울한 죽음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1290년, 카다안이 침입하였다.
    백성들 집구석에서 밥이 끓든 죽이 끓든, 나름 고귀한 신분을 즐기며 왕 노릇을 하던 충렬왕에게 수난이 시작된 것이었는데,
    침입의 배경을 보면,
    쿠빌라이는 동생 아리크부카를 때려잡고 대칸이 되긴 하였으나,
    정력왕 징기스칸이 줄줄이 내 질러 논 자식들과 그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자손들이 나름의 지분을 주장하며 이전투구를 일 삼는 몽골의 태생적 정치구조 상,
    승자가 되었다 하여, 제압한 반대파들에게 완전한 복종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저항하는 자들을 일일이 쫒아 다니며 목아지를 비트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는데, 그 중에서도 중앙아시아의 지배자인 5촌 조카 카이두의 저항이 가장 골치가 아팠고 위협적이었다.

    카이두는 우구데이칸 국의 실질적인 창업군주로서, 평생 쿠빌라이를 집요하게 괴롭혔는데,
    이리크부카의 편에 섰던 카이두는 내전의 승자 쿠빌라이가 압박을 가해오자,
    초원 도둑놈들의 후손답게 아리크부카의 아들들을 포함한 반 쿠빌라이 세력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초기에는 자기도 징기스칸의 피를 일부 받았다는 것을 주장하기라도 하듯이,
    수도 카라코룸을 위협하는 등 기세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전설적인 명장 바얀의 활약과 노익장을 과시하는 쿠빌라이의 전술에 말려 싸우는 족족 패하였고,
    1294년 쿠빌라이가 사망한 후에도 세력이 꾸준히 줄어들었으며,
    1301년, 이를 참지 못하고 최대 규모로 진행된 최후의 전투에서는 카이두 자신마저 부상을 입고 허무하게 사망하여, 잘난 놈이나 못난 놈이나 인생이 무상하기는 매한가지라는 평범한 진리를 실증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몽골 역사에서 되풀이 된 흔한 반란들 중의 하나인데,
    엉뚱하게도 만주지역의 카이두 잔여세력이 쿠빌라이에게 토벌되면서 고려에 불똥이 튀었다.

    카다안은 카이두를 지지했던 동몽골 지역의 군벌이었는데,
    이놈들은 토벌군에게 박살난데다 퇴로까지 막혀 제 소굴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옛날 강동성을 점령했던 거란 대요수국의 잔당들처럼 고려로 침입하였다.
    카다안이 침입했을 때, 카이두와의 싸움에 한 팔 거들겠다며 한희유 등과 함께 몽골에 입조한 상태였던 충렬왕은,
    제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전쟁 대비를 위해 급거 귀국한 후 마치 진짜 왕처럼 이것저것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이미 알뜰하게 망가진 고려의 군사력으로는 방어고 공격이고 간에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었고,
    제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전문 경영인인데, 목숨까지 거는 것은 오바라고 생각했었..는지 까지는 모르겠으나,
    전투가 시작되자 바로 강화도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아마도 니들이 싼 똥, 니들이 치워라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같은 심정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왕이 강화도로 도주하자 개경의 수비책임자들 뿐만아니라, 서경유수까지 모두 왕을 따라가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이리되자 몽골의 토벌군이 도착할 때까지 고려에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내 나라 내 백성들을 지키겠다는 갸륵한 관리나 장수는 천연기념물보다 찾기 어렵게 되었고,
    카다안의 침입경로에 있던 백성들은 옛날 몽골 침략기처럼 말타고 칼든 도적놈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고려에 진입한 카다안 이 썩을 놈들은,
    집단 강간에, 약탈에, 방화에, 학살에… 온갖 분탕질을 처대었으며, 처먹을게 떨어지면 인육으로 식량을 대신하기도 했다는데,
    정규군도 아니고 비적 떼에 불과했던 이 놈들에게 처참하게 능욕당하는 고려, 나라라고 할 수 없었다.
    이 한심한 꼴에, 쿠빌라이는 제 놈이 고려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으면서도, 혀를 끌끌 차며 군사 1만을 파견하여 이 카다안 염병할 놈들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충렬왕은 강화도로 피난한 뒤에도 개경에서 하던대로 놀기만 하였고,
    지원군이 도착한 뒤에는 군량미도 부족한데 잔치를 열어, 몽골군을 이끌고 온 세도칸의 힐난을 받았다고 한다.
    충렬왕의 이러한 태업에 가까운 비협조에도 불구하고, 세도칸은 제법 강단이 있는 놈이었는지 열심히 전투를 수행하여, 현재의 세종 시 근처인 연기에서 이 죽일 놈들의 주력을 격파하였고,
    이에 승기를 잡은 토벌군은 한희유 등의 활약을 앞세워 잔당들을 모조리 도륙하였는데,
    충렬왕은 그제서야 강화도에서 기어 나와 개경으로 복귀하였다고 한다.

    사실 개념상 다국적 거대 기업 몽골의 고려 지사장쯤 되는 충렬왕에게,
    아무리 오너의 사위 신분이었다 해도, 진짜 왕 같은 책임감을 요구하기는 무리였을 것이다.
    따라서 충렬왕의 이러한 도를 넘는 찌질함을, 왕이되 왕이라 할 수 없는 처지에서 비롯된 소심한 반항 내지는 고려를 반신불수로 만들어 놓은 몽골에 대한 불만의 표현 등으로 합리화 하는 견해도 있으나,
    백번 양보한다 해도, 현대의 전문경영인들도 사안에 따라 그 직책에 따른 책임을 지는데,
    명색이 왕이라는 자가, 꼬박꼬박 세금 내고 부역을 바친 백성들을 아비규환의 지옥 속에 방치한 채, 저 혼자 안전한 섬구석에 틀어박혀 음주가무와 사냥에 탐닉했다는 것은,
    왕으로서의 최소한의 책무를 떠나, 인간으로서도 실격이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이에 걸맞는 정치적 책임이 뒤따랐을 것이나, 쿠빌라이의 막내 사위 충렬왕은 그런 책임에서도 자유로웠다.

    *제국대장공주
    이민족의 왕과 결혼한 원의 유일한 황금씨족 공주로서,
    방년 16세에 이미 이미 유부남이었던 39세의 아저씨와 정략으로 맺어졌는데,
    아직 철들 나이도 아니고 철들 필요도 없었기에,
    고려 왕비로서의 정체성 또는 역할에 대한 고민이나, 자신과 결혼해야만 하는 고려왕의 입장에 대한 고찰 따위 보다는,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늦둥이 딸로서의 자부심으로 가득차,
    관료들에게 몽골풍을 강요하기도 하고, 놀기만 하는 충렬왕에게 정사에 힘을 쓰라고 충고하기도 하였으며,
    축재에도 관심이 많아 고려의 인삼, 종이, 모시 따위를 실크로드를 통하여 러시아, 아랍에까지 판매하였다고 한다.
    반면 종놈이 능력 있는 주인댁 막내 애기씨를 모시고 사는 꼴이 되어버린 충렬왕은,
    왕으로서의 권위는 커녕 사려 깊은 아내의 내조 조차 기대할 수 없는, 남자로서 딱한 처지가 되어 버렸는데,
    이에 대한 반발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태자시절 맞이했던 조강지처 정화궁주를 공주와 동급으로 대우하거나, 총비 무비를 비롯한 수많은 후궁들을 거느리며 공주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주제를 모르는 늙다리 영감의 어이없는 행각에 크게 분노한 공주는,
    정화궁주를 유폐시키는 등 연적들과 그 자식들에게 마음껏 질투와 투기를 퍼부었는데,
    동기로 보나 신분으로 보나 감히 어느 누구도 공주를 제어할 수 없었으므로,
    대궐에는, 툭하면 서슬 퍼런 공주의 호통과 이어진 비명, 곡성이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이 꼴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했을 충렬왕은 사냥을 핑계로 시끄러운 집구석을 떠나 밖으로 돌았는데, 그때마다 무비를 동행하게 하여 공주를 더욱 열받게 하였다고 한다.
    공주 입장에서 충렬왕의 이러한 작태는, 노예나 다름 없는 하찮은 속국의 국왕 주제에, 감히 금지옥엽인 자신을 무시하는, 배신 내지 배은망덕과 다를 바 없었으므로,
    분노한 공주는 남편과 무비를 보기만 하면 길길이 날뛰며 잡아 먹으려고 하였을 것이다.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였으니 이혼도 못하고, 매양 서로에게 지옥이나 만들어 주는 최악의 부부생활을 해야 했던 충렬왕은 이에 넌더리를 내며 더욱 밖으로 돌았을 것이니,
    조정인들 제대로 돌아갈리 없었고, 나라꼴은 점점 더 개판이 되어갈 수밖에 없었다.
    충렬왕에게는 어찌할 수 없는 최악의 아내였겠으나,
    그래도 공주는, 아무리 측근이라 해도 전횡을 용서하지 않았고, 백성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로 보아, 공주는 무턱대고 갑질이나 해대는 욕심 사나운 일반적인 속물은 아니었고, 엄격했었다는 평가 그대로 나름 공정한 성품을 지닌 왕비였던 듯하다.
    이러한 성향의 여인이 일반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한 남자를 만났다면, 가정을 반듯하게 꾸린 현모양처라는 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나,
    그녀의 신분과 당시의 정세는 공주에게 이러한 소박한 행복이 아닌, 소란하고도 고통스러운 삶을 강요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정략결혼이라 해서 모두 불행하게 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민왕처럼, 막상 당사자들은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경우도 많았는데,
    당시 고려의 대내외적 여건은 두 사람에게 그 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비록 겉은 화려하였으나, 질투와 투기 그리고 분노에 사로잡혀 스트레스가 많았던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 23년(1297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있었던 쿠빌라이가 무엇이 아쉬워서, 처음에는 반대했던 이 결혼을 허락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가장 사랑하는 막내 딸이 여자로서의 행복을 포기하고 살다가 결국 요절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하자, 평소에도 아버지에게 비판적이었던 충선왕은 원에서 급거 귀국하여,
    시해되었기에, 고귀한 어머니가 40도 못 채우고 사망하였다고 단정짓고,
    어머니와 평소에 가장 사이가 나빴던 무비를 죽여버리고, 그녀의 측근 40여 명을 죽이거나 귀양보내 버렸는데,
    충선왕에게 이들을, 간악한 요부의 치마 속에 숨어, 임금의 눈을 가리고 정사를 어지럽히는 백해무익한 간신배들로만 여겨졌겠지만,
    마누라를 포함해서 사방이 감시자 내지 적으로 둘러쌓여 있던 충렬왕에게 이들은,
    그나마 왕을 지지하고 보좌해 주는 마지막 남은 친왕파와 다름 없었다.
    따라서 비록 아옹다옹했을 지언정 든든한 정치적 기반이었던 젊은 아내가 사망한데 이어,
    사랑 뿐만 아니라 정치적 수족까지, 뒤를 이을 아들의 폭거로 잃어버린 충렬왕은,
    결국 권력의지를 잃고 손을 들어 버렸다. 아마도 산다는 것에 대한 실존적 고민이 컸을 것이다.
    쿠데타 아닌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이러한 고려 왕실의 꼬라지에 넌더리가 났던지,
    즉위하자마자, 격하된 기존관제의 복구를 비롯한, 거의 반원정책에 가까운 개혁정책들을 야심차게 밀어붙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격한 행동은 충선왕의 힘이 커지는 것을 꺼려한 원조정에 의해 제동이 걸리고 말았는데,
    왕비가 조비를 무고한 편지를 명분으로 황제가 파견한 관리는 충선왕을 만나자,
    다짜고짜 옥쇄를 빼앗고 연행하듯 원나라로 끌고 가면서,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충렬왕에게 옥쇄를 건넸다고 한다.
    속국 고려의 왕, 참으로 가치 없는 자리였다.
    다시 복위한 충렬왕 또한, 아들과 무슨 왕 잡기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심정이 복잡하였을 것인데,
    원나라 또한 치국은 고사하고 수신, 제가도 제대로 못하는 충렬왕을 불신하여, 극심한 간섭을 하였다고 한다.
    이 꼴로는 개혁이고 왕권강화고는, 모두 물 건너가 버린 것이므로, 왕으로서의 정체성에 심각한 회의가 들어야 정상이었을텐데,
    충렬왕은, 되찾은 이 꼴꼴난 왕자리나마 지키기 위하여 아들과 끊임 없이 갈등하였고,
    심지어는 아들과 며느리가 불화하자, 어른답게 다독이고 충고하기는 커녕,
    아들의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며느리 계국대장공주를 개가시키려고까지 하였다.
    참으로 찌질한 여생을 보내는 중이었는데,
    때마침 몽골 황제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뒈져버리자, 노구를 이끌고 황도까지 가서 아버지 원종처럼 다음 대 황제를 찍으며 생의 마지막을 불살랐다.
    그런데, 그게 하필이면 아들이 속한 진영이 아니라 반대파인 황후파 안서왕이었다.
    아버지처럼 순수한 감이었는지 아니면 아들과 싸우다보니 그렇게 되어버린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뭐가 되었든 결과는, 애쓴 보람도 없이 안서왕이 주살 되면서 황후파의 완패로 귀결되었고,
    그 여파로 충렬왕의 측근들도 궤멸되었으며, 더불어 며느리 개가책동마저 자연스레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충렬왕은 초라한 모습으로 쓸쓸히 귀국하였고,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는데,
    이 때가 1308년. 향년 73세로, 고려 국왕 34명 중 최장수였다.

    충렬왕기는 기존 외왕내제 정책에 의한 국가 운영 시스템이 폐지되어 명실상부한 속국이 된 시기로서,
    관행적으로 사용되던 천자를 의미하는 호칭들이, 다루가치의 지적질에 의해 모두 바뀌었는데,
    우선 폐하는 전하로, 짐은 고 또는 과인으로, 천자의 명령을 전하는 선지는 왕지(王旨)로, 천자가 천하에 은혜를 베푸는 사는 유로, 천자에게 올리는 문서라는 뜻의 주는 정으로 바뀌었다.
    제사 제도 또한 바뀌어 성종이 설치한 7묘 9실제 태묘는 제후의 5묘제 태묘로 바뀌었고,  
    묘호도 사용금지가 되었으며, 시호 또한 스스로 정하지 못하였다.
    관제 역시 격하되어, 2성 6부제는 폐지되고 1부 4사제로 바뀌었으며,
    오등작 제도 또한 유지하기 힘들어, 나중에는 결국 군호만을 사용하게 되었다.
    서울을 의미하는 경(京)도 사용하지 못하여 수도 ‘개경 개성부’는 ‘개성부 개성현’으로 개칭되었고,
    태조 때부터 이어져 온 팔관회도 개수되어 만세를 외치지 못하였으며 천세로 바뀌었다.
    다만 의복은 그대로 이어져 곤룡포는 황제의 색깔인 황포를 유지했으며,
    천자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원구단은 어찌어찌 살아남아 조선까지 이어졌다.

    카다안의 침입 시나 말년에 한 짓을 보면,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이게 뭐하는 인간인가 싶을 정도의 한심한 이미지이긴 하나,
    즉위 초에는 나름 의욕적인 개혁 군주였다.
    쿠빌라이가 원종에게 약속한 세조구제을 명분으로, 고려의 존속에 확실한 도장을 받았고,
    1차 일본원정이 끝나자 1278년 다시 입조하여, 원나라 주둔군을 철수시키고 시어머니 노릇을 하는 다루가치들을 내쫓았다.
    또한 원나라의 호구조사 요구를 거부하여, 독자적인 조세징수 권한을 확보하였으며,
    카다안이 침입한 1290년에는 동녕총관부가 요동으로 이전하는 틈을 이용하여, 아버지가 잃어버렸던 자비령 이북의 땅을 돌려받았고,
    1301년에는 탐라총관부도 돌려받았다.
    그리고 2차에 걸친 일본 원정을 준비하느라, 독박 썼던 전비도 모조리 보상받았다.
    뛰어난 협상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예전 전민변정도감을 부할시켜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구제하려고 하였는데,
    비록 권문세족들의 반대와 천출 측근들의 무능과 부패로 무위가 되긴 하였으나,
    이후 고려 사회의 핵심 문제였던 양인 수의 감소에 주목했던 그 안목만은 평가할 만하다.
    그리고 편민 18사를 채택하여 백성들의 삶을 어루만지려고도 하였다.

    원조 오렌지족 답게 원의 대도에 자주 들락거리며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도 앞장섰고,
    안향의 건의를 받아들여 문묘를 설치하고 장학재단을 설립하였다.
    또한 일연삼국유사를 완성하고 이승휴제왕운기가 간행되었으며, 유명한 고려가요 쌍화점이 나온 시기이기도 하다.

    애잔한 일생이었다.

    강원 학교 밖 청소년 지원센터, 코로나19 대응 검정고시 온라인 강의 및 방문 급식 지원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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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김동주] 강원도가 도내 11개 학교 밖 청소년 지원센터(도 10개 시군)를 통해 코로나 19 영향으로 센터를 이용하지 못하는 학교 밖 청소년들을 위하여 검정고시 온라인강의 및 방문 급식지원 등 서비스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우선 5월 9일에 시행될 2020년도 제1회 검정고시 준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도내 학교 밖 청소년들을 위하여, 강원도 학교밖청소년지원센터는 4월 8일부터 강사와 학교 밖 청소년들이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프로그램(줌)을 이용하여 온라인(실시간) 강의를 시범운영하였으며, 내일 13일부터 매주 2회(월‧수) 온라인 강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또한 10개 시군 센터(춘천, 원주, 강릉, 동해, 태백, 속초, 홍천, 영월, 정선, 철원)에서는 인터넷 강의 수강권 및 교재를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각 센터에서는 학교 밖 청소년들에게 전화, 문자 및 SNS 등을 활용한 비대면 상담을 늘려 청소년의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체크하고 있으며, 사회적 거리 지키기와 손씻기 등의 안내도 실시하고 있다.

    아울러 코로나19 감염 예방을 위하여 학교 밖 청소년지원센터 프로그램 이용자들에게 지원하던 집단급식을 실무자가 직접 학교 밖 청소년 가정을 방문하여 식사대용 즉석 식품 등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변경하여 추진 중이며, 이에 대한 이용자들의 만족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강원도 여성청소년가족과 정영미 과장은 “코로나19 사태 장기화에 대비하여 학교 밖 청소년들의 건강권 보장과 학습 지원을 위해 노력할 것이며, 지역별 특성에 맞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활용하여 도내 학교 밖 청소년들에게 서비스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김동주 기자

    렌트카를 훔쳐 사망사고를 낸 10대 8명, 경찰과 추격전 벌여…배달 알바하던 오토바이 운전자는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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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김동주 기자] 훔친 렌트카로 경찰과 광란의 질주를 벌이던 10대 8명이 한 오토바이 운전자를 숨지게 하고 경찰에 붙잡혔다.

    대전동부경찰서에 따르면 이들은 훔친 렌트카로 면허가 없이 운전을 하다 오토바이 운전자를 사망케한 혐의로 13살 A군 등 8명을 붙잡았다.

    이들은 서울에서 대전으로 내려와 지난 29일 0시쯤 대전시 동구의 한 사거리에서 순찰차와 추격전을 벌였고, 오토바이를 들이받은 뒤 달아나 운전자를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이들이 현행법상 만 14세 미만의 촉법소년이라 형사처벌은 받을 수 없다며, 차를 운전한 A군만이 대전 소년분류심사원으로 넘어갔다고 밝혔다.

    오토바이 운전자의 지인으로 알려진 한 여성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제 남자친구는 별이 되었습니다. 대학교를 간다고 설레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너무 억울하게 사고를 당했습니다. 코로나19때문에 대학이 연기되자 집안에서 가장 노릇을 하던 제 남자친구는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해 죽기 전까지도 열심히 일했습니다. 사고가 나도 나도 죽지 않는다며 누누이 걱정끼치지 않게 얘기해주고 헬멧도 착용하며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사람이였는데 몇 초 순간에 의해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며 억울함과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한편 이번 사안은 청와대 국민 청원에도 올라왔으며, 청원 참여인원 51만명으로 현재 청와대 관계자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김동주 기자

    코로나19는 세균이 아닌 ‘바이러스’, 바이러스와 세균의 차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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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러스 자료사진 (사진=픽사베이)

    [수완뉴스=곽동주 기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이하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이다. 초중고 개학은 재차 연기되고 바깥을 내다봐도 한산한 거리에 지루함 마저 느껴지는 시기이다. 책상으로 돌아와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온 온라인 과제를 수행하던 도중, 문득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바이러스와 세균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둘 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바이러스와 세균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다르다. 그렇다면 바이러스는 무엇이고 세균은 무엇인가? 코로나바이러스를 비롯하여 바이러스와 세균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해보자.

    세균과 바이러스의 대표적인 구조 비교 이미지 (사진=픽사베이)

    바이러스는 세균보다 크기가 훨씬 작아 광학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다. 바이러스는 핵산(유전 물질)을 단백질 껍질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인데, 특이하게도 이는 세포의 구조가 아니다. 또한 효소가 없어 스스로 물질대사를 하지 못한다. 여기서 물질대사란 생명체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화학 반응을 뜻한다. 다시 말해 스스로 생존하는 기술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이러스는 어떻게 살아남는 것일까? 바이러스는 살아남기 위해 숙주 세포를 이용한다. 숙주 세포에 들어가 세포가 가진 효소와 리보솜을 이용하여 물질대사를 하면 독자적인 효소가 없어도 살아남을 수 있다. 특정 숙주 세포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핵산을 복제하고 단백질 껍질을 합성하여 증식하는 것도 가능하다. 즉, 바이러스는 생 세포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여과성 병원체이다. 바이러스에 의해 나타나는 바이러스성 질병은 항바이러스제를 사용하여 치료하는데,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은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생물체라는 것이다.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하는 항바이러스제가 개발되어도 바이러스가 기생하는 숙주 세포에 독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고, 증식 과정에서 돌연변이가 잘 일어나는 바이러스의 특성은 항바이러스제를 개발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준다.

    세균(박테리아)은 단세포생물 중 원핵생물에 속한다. 세균은 바이러스와 달리 스스로 물질대사를 할 수 있다. 세균은 효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핵막이 없어 DNA가 세포질에 분포하며, 대부분은 세포벽에 펩티도글리칸(다당류 사슬에 펩타이드 사슬이 결합한 화합물)을 포함하고 있다. 일부 세균은 다른 세포에 달라붙게 해주는 선모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세균은 바이러스와 번식 방법이 조금 다르다. 주로 분열법으로 번식하는데, 최적 조건에서 20분에 한 번씩 분열하는 세균도 있다. 이 종류의 세균 200마리는 3시간이면 102,400마리로 늘어나는 것이다. 우리 주변의 거의 모든 곳에 서식한다는 것이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는 수치이다. 대부분의 세균은 인체에 해를 끼치지 않으나, 질병을 일으키는 일부 세균은 항생제를 사용하여 치료할 수 있다. 그러나 항생제를 남용할 경우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세균이 증가하게 되고, 항생제로도 치료가 어렵게 된다. 따라서 의사의 처방을 지켜 적당한 양을 복용하여야 한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코로나-19) 일러스트 (사진=픽사베이)

    이제 요즈음 쟁점이 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에 대해 알아보자. 코로나바이러스는 사람에게 감기를 일으키는 바이러스 중 하나이다. 입자 표면이 돌기처럼 튀어나온 모양인데, 이것이 마치 왕관처럼 생겼다고 해서 라틴어로 왕관을 뜻하는 ‘Corona’에서 파생되어 이름이 붙여졌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어떤 특정한 종류의 바이러스를 뜻하는 것이 아닌 코로나바이러스과(Coronaviridae)에 속하는 바이러스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현재 유행 중인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는 베타 코로나바이러스(사람과 동물에게 감염되는 코로나바이러스)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예전 유행했던 사스와 메르스도 베타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해 일어난 질병이다. 주 증상은 발열과 호흡기 증상(기침, 인후통, 호흡곤란)이며, 두통 · 근육통 · 오한 · 가슴 통증 · 설사 등의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마스크 착용의 생활화 (사진=픽사베이)

    현재는 코로나바이러스를 종식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바이러스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비누를 이용하여 30초 이상 자주 손을 씻어야 하고, 바이러스의 전염을 막기 위해 입을 옷소매로 가리고 기침하여야 한다. 마스크를 항상 착용하고 눈, 코, 입 등을 만지지 않으며, 균형 잡힌 식사와 충분한 휴식으로 면역력을 길러야 한다. 

    또한 여행 등의 외출을 자제하여 바이러스를 전면 차단하려는 노력이 가장 필요하다. 당신이 기사를 읽고 코로나바이러스로부터 건강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곽동주 기자

    n번방과 함께 떠오르는 가짜뉴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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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완뉴스=이민혁 기자]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는 신종바이러스 “코로나19’와 함께 n번방과 박사방에 관련된 기사가 연일 뉴스를 장악하고 있다. 이와 함께 가짜뉴스 역시 국민 사이에서 떠도는 추세이다. 국민에게 정확한 내용만을 전달해야 할 언론사 조차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어떤 언론사가 무슨 내용을 잘못 전달하고 있는지 실태를 파악해보았다.

    신상 공개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사진=서울지방경찰청 제공)

    첫 번째는 ‘n번방’과 ‘박사방’의 혼용이다. 이번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의 신상 공개 대상인 조주빈은 ‘n번방’의 운영자가 아닌, ‘박사방’의 운영자이다. 이 두 개의 방은 엄연히 다른 방으로, 구분해서 써야 할 필요성이 있다. 다만, 아직도 몇몇 언론에서는 ‘n번방’과 ‘박사방’을 구분하지 못하여 국민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링크①) (링크②)

     두 번째 가짜뉴스는 단순 취합되어 계산된 26만여 명이라는 수치를 마치 대화방 속 전체 회원 수가 26만 명이라는 식의 과장 보도이다. YTN 및 공영방송 KBS 역시 전체 회원 수가 26만 명으로 추산된다는 식의 보도를 하였다. (링크①) (링크②) 이렇게 언론에서도 26만 명이라는 수치를 사실관계 확인 없이 오용하기에 이번 n번방 사건의 전체 회원 수가 26만 명이라고 착각하고 믿게 되는 국민이 늘어나고 있다.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발표문 中 일부. (자료 제공=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그렇다면 26만여 명이라는 수치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해당 수치는 텔레그램 성착취 대응 공동대책위원회가 텔레그램에서 발견한 60여 개 방의 참여자 수를 모두 합한 것으로, 중복 참여 등의 가능성으로 부정확한 수치이다. 이를 전체 회원 수로 말하는 것은, 1명이 20개의 방에 들어가 있을 때 전체 회원 수가 20명이라고 답하는 것과 똑같은 셈이다.

    언론은 빠르게 정보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정확한 내용을 전달할 필요가 있다. (관련근거: 언론기본법 제2장 제9조)

    이러한 가짜뉴스 때문에 젠더 갈등은 더욱 악화할 수밖에 없다. 이번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 관계자의 처벌과 가짜뉴스 제작 및 유포의 근절이 절실하게 필요해 보인다.

    이민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