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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 7대 목종, 게이의 슬픔

    왕 송, 헌애왕후의 소생으로 경종의 유일한 아들이었으나,
    경종이 사망했을 때 2살 남짓의 어린 아이에 불과하여 왕위를 잇지 못하였다.
    이러한 경우, 보통은 왕위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요소로 간주되어 압박과 설움 속에서 살기 쉬우나,
    도덕군자 성종은 왕 송을 친자식처럼 길렀을 뿐만 아니라 왕위까지 물려주었다.
    당숙 겸 외삼촌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을 때가 낭랑 18세,
    광개토대왕과 즉위 나이가 같으나, 그 인생은 판이하였다.

    997년 즉위한 후 아버지 경종의 몇 안 되는 업적 중의 하나인 전시과를 개정하였고, 
    지방을 순시하였으며, 빈민 구제와 민생 안정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국방에도 신경을 써서, 서경의 권위를 복구시켰고,
    요의 침략에 대비하여 성을 수축하였으며 군제를 개편하였다.
    이 정도 임금노릇이면 다 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머니가 보기에는 아니었는지, 
    헌애왕후는 목종이 어리다는 이유로 섭정을 하면서 정사에 간섭하였다.

    헌애왕후는 경종 사후 궁궐 밖 천추전에 기거하였는데,
    목종의 즉위로 태후가 되면서 천추태후라는 별칭으로 불리었다.
    이 여인은 중노릇을 하던 김치양과 간통사건을 일으켜,
    왕실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성종의 체면을 구기는데 일조를 했던 바로 그 여인으로서,
    성종 기에는 친 오빠 성종이 무서워 은인자중하는 신세였으나,
    아들이 왕이 되고 자신이 섭정이 되자 겁나는 게 없어졌는지,
    김치양을 요직에 등용하여 자신의 수족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못 다한 사랑을 마음껏 불태웠다.
    난데없는 새 아버지가 등장하여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는 바람에,
    10대 후반의 팔팔한 나이에 허수아비 꼴이 된 목종은 사람이 착한 건지 못난 건지,
    김치양을 끝내 잘라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처럼 사랑에 올인하여, 정사는 돌보지 않고 방탕과 쾌락만을 탐닉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대상이 황당하게도 동성이었다.

    목종은 자신의 애인들을 제외한 인물은 만나려 하지 않았으므로, 애인 둘은 자연스레 조정의 실세로 떠올랐고,
    김치양계와 더불어 조정의 양대 축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대단한 비젼을 가진 인물들이 아니라 그저 잘생긴 외모를 가진 필부에 불과했으므로, 국가가 산으로 가든 강으로 가든 관심이 없었다.
    태후의 애인과 왕의 애인들에게 장악된 조정은 혼란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었으므로,
    나라꼴은 점점 더 엉망이 되어 갔고….
    정치에 관심 없는 동성애자 국왕, 혈통 중심의 왕조국가에서 이보다 더 곤란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목종이 자식을 남길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천추 태후는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올리겠다는 야심을 품게 되었는데,
    곤란한 점은, 둘째 아들이 김 치양과의 사랑이 맺은 결실이라, 왕 씨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는 국가의 근본을 뒤흔드는 엄청난 일이었으나, 천추태후는 야심차게 밀어붙였고,
    사전 공작으로 다음 왕위 계승권자인 대량원군을 제거하고자 하였는데,
    대량원군 왕 순은 헌정왕후와 안종 왕욱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으므로 천추태후의 친조카였다.
    사랑에 눈이 먼 태후는, 부모 없이 자란 친조카의 불쌍한 사정 따위는 관심이 없었고,
    애가 똘똘하다는 이야기를 듣자 제거해야 할 정적으로 간주하여,
    신불사로 출가시켜 강제로 중을 만들었고, 자객을 수차례 파견하여 후환을 없애고자 하였다.
    왕 순은 이러다 죽겠다고 S.O.S를 날렸고,
    이를 안 목종은, 적의 적이라는 개념이었는지 아니면 왕 씨의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사명감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왕 순을 궁궐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서경의 강 조에게 궁궐을 숙위하라고 명하였다.

    왕명을 받들어 개경으로 오던 강 조는,
    명령이 조작된 것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듣고 서경으로 되돌아갔으나,
    이미 왕이 사망했으며 조정이 김치양 일파에게 장악 되었다는 부친의 편지를 받게 되자.
    역적을 토벌하고 왕통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군사 5천을 이끌고 개경으로 향하게 되었는데,
    수도 인근에 이르러서야 왕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잘못된 정보였던 것이다.
    반역을 토벌하기 위해 왕명도 없이 이 많은 수의 군사를 이끌고 왔는데,
    반역은 없었고, 오히려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오해받기 딱 좋은 꼴이 되어 버렸으니 참으로 난감했을 것이나,
    강조는 무장답게 이왕 뽑은 칼을 그냥 휘둘러 버렸다.
    순식간에 개경을 장악한 강조는 목종을 폐위한 후 왕 순을 왕으로 세웠는데,
    이때 왕이 되라는 추종자들의 아첨을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한다.

    나라가 죽을 쑤던 밥을 쑤던,
    애인들과의 사랑에만 몰두하였던 목종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나,
    방탕에 찌든 게이 왕의 정신 건강을 보살펴줄 만큼 상황이 한가하지는 못하였고,
    생명도 보장해주지 않았다.
    목종은 두 애인, 어머니 천추태후 등과 함께 황주로 유배가던 도중, 강조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 되어,
    우리 역사상 정사에 등장하는 첫 게이왕이자,  
    고려 최초의 폐위된 왕이라는 썩 명예롭지 못한 기록을 남긴 채,
    1009년, 향년 30세로 12년간의 재위를 마쳤다.
    그는 유배 길에서도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고 극진히 모셨다 하는데,
    즉위 초반의 의욕 넘치던 모습에 비해 그 최후가 너무도 초라하고 비참하여,
    비감하지 않을 수 없다.
    김치양은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고, 패거리 40여명도 척결되어 조정에서 일소되었으며, 
    천추태후는 유배지 황주의 궁에 연금되었다.
    그녀는 66세로 죽을 때까지 20여년을 더 살았다고 하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자기 때문에 모두 죽었고, 자신마저 영어의 처지가 되었으니, 
    그 절망과 회한의 눈물이 얼마나 많았을까?

    고귀한 여인의 빗나간 사랑과 그에 따른 치정 그리고 그 일가의 비참한 종말, 
    비극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경순
    김경순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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