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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 2차 여당전쟁, 연개소문

    2 차 여당전쟁

    2차 여당 전쟁은 한 번의 전쟁이 아니라, 당태종 이 세민 사후부터 연개소문이 죽기 전까지 진행된 수차례의 충돌을 말한다.

    이세민이는 양광이에 비해 대 고구려 전과가 상당하였으므로 원정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으나,
    지 아들은 아무래도 애가 비리비리한지라, 수나라 꼴이 날까 봐 그랬는지, 고구려를 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그러나 뒤를 이은 당 고종은 애비의 소원을 풀어주려는 효심이었는지, 아니면 애비를 능가하는 치적을 쌓으려는 허영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고구려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양광의 재림이었다.

    655년, 고구려는 백제, 말갈과 연합해 신라의 33개 성을 빼앗고 수도인 금성까지 위협하였다.
    김춘추는 당나라에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대었고,
    당나라는 신라도 구원할 겸, 소정방을 보내 북쪽에서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59년에는 설인귀도 실패하였고.

    북쪽에서 연이어 실패를 맛본 당은 남쪽으로 공세를 전환하여 백제를 침략하였는데,
    백제는 660년 13만의 소정방과 5만의 김유신 연합군을 막지 못하고 허무하게 망해버렸다.
    고구려의 동맹이자 삼국의 한 축인 백제의 멸망이 비리비리한 애를 고무시켰는지, 
    당 고종은 661년 나당연합군을 평양으로 진군시켜 내친 김에 고구려의 숨통까지 끊으려 하였고, 
    별도의 4만 4천 명의 병력으로 고구려의 변방을 공격하게 하였다.
    양동작전을 쓴 것인데,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어버린 고구려는 백제의 옛 동맹, 왜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왜는 백제의 원수 나당 연합군과 싸우기 위해 옛 백제 지역의 소유성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왜와 백제, 참으로 끈끈한 관계라 아니할 수 없다.
    어쨌든 이로 인해 나당 연합군의 진군이 저지되었고, 거기에 더해 백제 부흥군이 기승을 부리는 바람에,
    신라군은 대고구려 전선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남쪽에서 한숨 돌린 고구려는 서북 변방에 병력을 집중시켜 당나라군을 격퇴하였다.
    고구려의 외교가 모처럼 빛을 발휘한 것이다.

    당은 미련을 못 버리고 그 해 다시 대군으로 수륙 양공 작전을 구사하며 평양성을 향해 진군하였는데,
    이번에도 패하자 고종의 입지가 약화되었는지 일시적인 휴전 상태가 되었다.
    일시적인 소강상태를 이용하여 이번에는 연개소문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여 배후의 위협을 차단하려고 하였으나, 백제를 멸망시켜 기세등등했던 신라는 고구려의 공격을 격퇴하였고.

    고구려가 신라와 싸우는 사이 당나라는 다시 고구려 정벌에 나서, 소정방이는 10만 대군을 배에 태워 대동강을 타고 올라왔으며, 글필하력이는 요동으로 쳐들어 왔다. 또 양동작전을 쓴 것이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번에는 소정방이가 무난히 평양성을 포위하였는데,
    그러나 평양성은 만만한 성이 아니었다.
    평양성은 외곽, 외성, 내성 등 3중 구조로 되어 있고, 오랜 공성전을 경험한 유서 깊은 성이며, 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요새였다.
    따라서 소정방의 10만대군은 밥이나 축내며 보초를 서는 신세가 되었으나,
    북쪽에서는 한 달여의 공방 끝에 요동방어선을 무력화시킨 글필하력이가 압록강으로 육박해 들어왔다.
    이에 연개소문은 아들 연남생을 보내 이들을 막게 하였으나 이 찌질이는 3만 여의 사상자를 남기고 패퇴하였다.
    또 한 번의 고구려의 위기였으나, 때 맞춰 중국 서북지역에서 철륵(위구르)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설인귀가 초기 진압에 실패하는 바람에 요동공략군은 위그르 전선으로 방향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글필하력이가 뒤로 빠져 한숨 돌리기는 했으나, 아직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소정방과 합류하기 위해 압록강 인근에 상륙, 남하한 것으로 추정되는 방효태가 사수까지 전진해 온 것이다.
    이에 연개소문은 군을 직접 지휘하여 방효태군을 거의 몰살해버렸는데,
    방효태는 13명의 아들 그리고 같이 출전한 온 동네 사람들과 더불어 마지막 돌격작전에서 죽어버렸다고 한다.
    이것이 연개소문을 명장으로 만들고 최악의 역신이라는 오명을 벗게 만든 사수전투이다. 사수대첩이라고도 한다.

    글필하력이는 떠나고 방효태는 장렬히 전사하는 바람에, 소정방이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고 식량마저 부족한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소정방이는 신라를 향해 살려달라고 악악대었고,
    백제부흥군에 발목이 잡혀 멀거니 구경만 하고 있던  김유신은, 소정방이가 다 죽게 되자 별 수 없이 북진하여 고구려의 포위를 뚫고 당군을 구원하였다.
    김유신은 이 싸움에서 1만여의 고구려 병사를 사상시켰다고 한다.
    소정방이는 뒤도 안돌아보고 퇴각하였고.

    이 일련의 전쟁에서 고구려와 당나라 양측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고구려는 국가의 중심지인 수도 평양이 오랫동안 당군에게 포위 공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요동성을 비롯한 방어 라인이 붕괴되는 바람에 청야 전술 말고는 변변한 전술을 쓸 수 없었으므로,
    주요 곡창지대와 철 생산지가 거의 초토화되었다.
    당 또한 수양제를 뺨치는 고종의 집착으로 인해, 전력 손실, 국력 소모가 상당했는데,
    결과마저 신통치가 않아, 황권의 약화를 초래하였고 
    그 결과 중소지주층과 손을 잡은 측천무후의 세력이 커지게 되어,
    훗날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애비 말 안 듣고 잘되는 자식 없다더니 당고종이 양광이 꼴이 난 것이다.

    그리고 665년 연개소문이 죽었다. 못난이 아들들을 남겨 놓고.
    만일 사수대첩이 승리가 없었다면 연개소문은 민족의 영웅이 아니라 그냥 개소문으로 남았을 것이다.

    김경순
    김경순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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