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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 3차 여수전쟁, 더 위험했던…

     3차 여수전쟁

    2차 전쟁의 참패는 양광을 완전히 미친놈으로 만들었다.
    애비 수문제가 참담하게 실패했던 고구려 정벌을 성공시킴으로서, 
    천하 통일의 방점이자 최대의 치적으로 삼아, 차별성을 부각하고 황위 찬탈의 치부를 가리려고 했었는데,
    애비보다 더 커다란 실패를 맛보았으니 멀쩡했다면 더 이상했겠지만,
    패퇴 후 단 4개월 만인 613년 3월, 4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원정을, 그것도 친정을 감행한 것은 해도 너무한 짓이었다.
    수나라 백성이야 제 나라 임금이 미친놈이라 그렇다지만, 고구려 백성은 도대체 뭔 죄란 말인가?

    2차 침략의 실패를 교훈 삼은 양광은 3차에서는 장수들에게 자유 재량권을 부여하여, 고구려를 효율적으로 몰아붙였다
    왕안공이 이끌었던 선봉대는 신성을 고립시켰고. 본대는 요하를 도하하여 요동성을 공략하였는데,
    초반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요동성이 함락되지 않자, 포대 1백여만 장을 쌓고 이동식 망루를 이용하여 요동성을 내려다보며 공세를 펼쳤고,
    2차 전쟁 때처럼 별동대를 차출하여 압록강 인근까지 접근시켰다.

    요동성은 거의 함락 직전이 되었고 또다시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왔는데, 고구려는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수양제의 휘하에서 보급 임무를 담당하던 예부 상서 양현감이 과거의 원한과 수양제의 폭정에 불만을 품어, 친구인 이밀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수양제는 비밀리에 철군을 결정하였는데, 이때 양제의 측근 참모였던 곡사정이 고구려로 망명하여,
    반란 때문에 수나라 군대가 철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고구려는 적의 후미를 공격하여 약간의 피해를 강요하였고.

    3차 전쟁, 고구려에게는 2차 전쟁 보다 더 위험하였다.

    김경순
    김경순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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