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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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 물

창백한 빛이 허공을 가르고하늘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웅크리고 앉아빗줄기에 마음을 씻는다 어둠이 온몸을 감싸면깊은 한숨은 비로소 자유를 얻고 저린 걸음으로 다가선 창엔 소란한 바람이 불고차가운 비가 부딪는다

노여움

처음부터 타오르는 불꽃은 아니었다오히려 미약한 몸짓이었다 폭우처럼 쏟아지던 시련에 소리 내어 우는 것 말고는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때 너의 차가운 눈빛은 초라함을 비추었다 실망과 분노에 들뜬 마음은 혼잣말을 내뱉으며잿빛 하늘을 바라보았고 오래 침묵하였다

혼술

후회의 칼날은 날카롭고매일이 번거로운데배워야 할 것은 아직도 많아 느지막이 나서보니 눈이 오다 만 하늘은고양이 낙태한 상이고차 많은 길은가로등에 반질거린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선술집 근처를 서성대다가김이 푸짐한 만두 몇 개를 사고 돌아와늙은 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여 정

어쩌다석양의 나그네 되어어두운 산자락을 걷는다 달은 구름 속을 서둘러 가고바람 소리 스산한데다리는 무겁기만 하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니길은 풀숲으로 사라지고숨도 거칠어 걸음을 멈추고고단한 몸을 땅에 맡긴다 산 아래 불빛이 오히려 별 같다

오 늘

냄새조차 생경한 도시에서홀로 밥을 먹고 생면부지의 사람들이어깨를 부딪치며 몰려가는신전 같은 전철역 앞을 지나서 분노는 삭이고무례와 모욕은 넘기며존재가치 증명에 골몰하는채찍질 같은 하루를 살고 세상 복잡한 교차로를 통과하여통유리 밖 야경을 바라보며미션인 양 러닝머신 위를 달린다 눈물이 날 것 같은 이...

산행

소복한 노란 잎들 사이에점점이 박힌 빨간 열매들이안개비에 말갛게 씻기는가을로 난 길 바위 아래밑동이 굵은 나무는하늘을 향해 기이한 몸짓을 하고 하늘가에돌담으로 둘러친신이 머무는 자리는 고요하다 구름 속을 내려가니 다시 만난 어여쁜 길은제 가진 것을 아낌없이 떨구며붉은 손을 들어 배웅하고 어두운...

향수

망각의 저편에서기억의 단편이 떠올라 깊은 그리움에뒤로 달려가는 마음은눈물을 머금었으나 찾아간 옛길엔넝쿨들만이 다리를 잡을 뿐 꿈을 꾸듯 헤매어도흘러간 시절은 흔적도 없고지형마저 낯설어 할머니가 묵주기도 하시던너럭바위에 마음을 내려놓고추억을 더듬는다 멀리서 불어온 바람에옷깃이 펄럭인다

해고

둥지가 이미 무너졌는데어찌 평안을 탐하랴 억지 미소를 지으며머물던 흔적을 지운다 비굴하지 않았으니 궁상떨지 말고분노하지도 말자 정들기 전이라 다행이다

기 일

금빛으로 반짝이는 바다저 멀리 배 몇 척 어릿하고 갈매기 나는 빨간등대 아래젊은 애들 웃음소리 싱그러운데 그 예쁘고 수다스러웠던 네가사철 그 안에만 있다니 부박하고휘발성이 강한순간의 생각을 너무 믿은 탓이다 보기 싫어 돌아가려 해도입술을 비죽이며 울던코흘리개가 눈에 밟혀 넋을 놓고 바라만...

암천(暗天)

비틀린 소나무들 사이로오래된 상징처럼 달이 뜨고 맥락없이 내뱉어지는 혼잣말에문득 비감해질 때 늙은 가수의 처량한 노래를 듣느니 개울가로 난 길을머리칼이 흠뻑 젖게 걷는다 가쁜 숨을 달래며 뒤돌아보니 어둑한 길엔여울물 소리만 가득할 뿐 땀 흘리며 걸어온 흔적도몰아세우던 생각의 자취도 없어 화단석에 걸터앉아어머니 아버지...

반 주

운명의 채찍은 가차 없고 잿빛으로 늙어도 힘을 잃지 않나니 하루의 고역을 마치고 어둠 깃든 창에 어린 흐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술은 독하고 바람 소리 구슬프다

자유

입속의 사탕 같던 애착등줄기를 훑어 내리던 공포 근심의 사슬에 묶이고분노의 불길에 타들어 가던 마음도 시간의 어둠에 묻혀기억마저 아스라해지느니 과대 평가된 삶의 무게와두껍게 두른 허세를 벗고 내 것이 아닌 미래와가망 없는 꿈들과도 작별한 후 의자 깊숙이 몸을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