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완뉴스=모난 생각]
혐오의 이유
국적을 불문하고 타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배경에는 상대적 비교에서 오는 자기만족이 존재한다. 자신의 현실에 만족감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자신보다 비교우위가 낮은 집단을 곁에 두고 위로를 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사회의 기준에서 실패하면 실패할수록, 자신의 모습이 불만족스러우면 불만족스러울수록 타인의 성공과 실패에 엄격해지게 된다.
이것이 한국의 비교문화와 더해져 합격의 기준이 평균과 다르게 이상화되고, 그 아래의 삶은 무시하는 것이 은연중 당연하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개인의 가치를 결정하는 문화와 무한경쟁 사회에서 나도 언제 뒤처질지 모른다는 공포심, 그리고 사회적 지위에 따라 개인을 차별하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 배경이 어우러져 사람에게 등급을 매겨 품평을 나누는 일이 당연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승리자와 패배자를 나누는 사회의 기준에서 패배자가 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분노를 안으로 돌려 자기 자신을 파괴하거나 자기 파괴를 막기 위해 자신도 다른 사람을 서슴지 않고 혐오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남지 않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타인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엄격한 기준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혐오의 순환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는 비교문화와 상하관계를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그림자인 것이다.
공론장에서 사라지는 사람들
놀라운 것은 이러한 타인의 멸시에서 벗어나려면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아 ‘네가 가장 매력적인 상품이 되면 된다.’라는 식의 논리가 횡행한다는 점이다. “한 달에 500 이상 벌지 못하면 이 나라에서 애 낳는 것은 아이에게 죄짓는 것이다.”라는 발언에 대한 반응이 “수입에 연연하지 않고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가 아니라 “네가 월에 500 이상 버는 일을 하면 된다.”라는 식이다. 발언의 현실성을 떠나서 이러한 논리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고 비교우위와 열위를 나누어 차별을 정당화하는 한편, 상향 비교를 통해 가해자 역시 피해자가 될 수 있고 피해자 역시 가해자의 논리를 내재화시키는 동시에 어디선가 혐오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혐오와 증오를 효과적으로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기를 원하고 실패를 두려워한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모두 내 책임으로 정리되는 세상에서, 개인에겐 인정받기 위해 타인에게 매력적인 상품이 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인해 자기 위치에 대한 집착과 그로부터 비롯된 우월감과 열등감으로 작동하는 위계 주의가 고착된다. 그러나 구직자의 평균 능력이 올라간다고 정해진 일자리가 늘어나진 않으니, 낙오자들의 평균 능력만 올라가고 있는 현재, 인재들은 좁은 취업문 앞에서 좌절하거나 취업 후에도 원하는 일자리가 아니었음을 느끼며 구직 대기자가 아니라 취업 의사가 없는 ‘그냥 쉬는’ 사람들로 전환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냉소와 혐오가 이들의 휴식을 고립과 은둔으로 이어지게 만들 위험이 크다는 사실이다. 경력직 선호와 공채 축소의 추세 속에서 이루어진 120만 청년 백수의 시대, 최근 들어 서서히 주목받기 시작하는 구직 의사 없이 ‘그냥 쉬는 청년’들과 ‘자기불구화’(실패가 두려워 제대로 시도조차 하지 않는 전략) 라는 주제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혐오 사회와 함께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해적 혐오 사회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통찰하여 원인을 찾는 것은 노력이 필요하고, 해결 방법도 난해하다. 반면 눈앞의 고통을 특정 대상의 잘못으로 못 박는 것은 한결 쉬울 뿐 아니라 사태의 해결 방법이 가시적이라는 측면에서 희망적이다. 그렇기에 삶이 고단하고 미래가 암울할수록 사람들은 간단하게 타인을 손가락질한다. 그리고 상대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우월감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와 너도 충분히 성공하지 못했다는 멸시와 분노로 이어진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다. ‘냉소의 대상’이 되는 청년 백수들이 직업을 가지고 사회에 진입하여, ‘손가락질받으며’ 2~3명의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으면 내수가 축소되고 연금이 무너져 타인을 혐오하는 본인들이 살아가야 할 공동체가 파괴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혐오와 갈등들은 우리 사회를 높은 행복감을 누릴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남들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이 공론장에서 실종되는 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이 되고 있다. 타자를 비웃으며 짓밟은 대가는 내일의 자신에게 돌아온다. 깨어진 사회적 연대와 극단으로 치닫는 경쟁, 자해적 혐오의 순환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
모난 생각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