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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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밤새 내린 함박눈이온 세상을 선물처럼 감싸면하얀 골목에아이들의 짜랑한 웃음소리제풀에 놀란 참새는눈 쌓인 가지에서 날아오르고아랫목에 손 깔고 앉으면할머니가 차려 주시는무채 썬 된장찌개계절은 잊혀도 그리움은 남아눈감으면 떠오르는 얼굴한 번만이라도다시 볼 수 있다면

그 날

달빛은 구름 속에 갇히고바람이 귀신 소리를 내던 날줄 지어선 가로등은인적없는 거리를 하얗게 비추고눈 시퍼런 길고양이는돌풍에 놀라 괴성을 지른다대기를 가득 채운 악한 기운이허공을 어지럽게 휘저을 때마른 백일홍은 제 그림자와 섞여기괴한 춤을 추고귀엽던 동생은 목을 매단다

존 엄

그립거나두려울 게 별로 없고정욕에서도 놓여난 지금타인의 미소를 사야 할 필요가더는 없으므로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가고 싶은 곳도가야 할 곳도 없기에헛수고와 비굴을 멈추고좌초한 배처럼 주저앉아풀벌레 소리 사라진차갑게 식은 세상을 바라본다삶이란맨손에 쥔 한 줌 눈덩이 같은 것

이력서

몇 년을 벼리고 벼려 겨우 한 줄온 계절을 다 보내고야 또 한 줄빛바랜 책 속에 그어진 밑줄 같은가슴 아린 지나간 삶의 흔적눈 위 두껍게 쌓인 어둠 아래활활 타오르는 기억숨을 쉬기조차 힘든 독한 허무겨울바람에 구르는...

저물녘

구절초 무성한마른 잎 구르는 이끼 낀 산책로벼랑에서 떨어지는가는 물줄기나뭇가지에 줄지어 앉은 까마귀핏빛 노을휘어지는 길 위로 어리는너무 미안해서 서러운그리운 얼굴서늘한 바람에문득 깨어느리게 다시 걷는다

추모

갈매기 무리 지어 앉는오래된 방파제 아래끊임없이 떠밀려와속절없이 부서지는 파도무너지는 마음과옷자락 입에 무는 슬픔이머무는 자리봄철 꽃처럼해사했던 아이마지막이 시리게 가여워죽은 나무처럼 서서오래도록 바라본다

아픈 여름

검은 구름에서 불어온악한 바람이막내 누이를 데려간 후폭우처럼 쏟아지는 슬픔에머릿속에 번개가 칠 때마다벼락을 맞은 듯이천둥 같은 울음을 울었고가슴이 타들어 가는 아픔에숨을 쉴 수 없을 때에는이글대는 태양이 달구는 거리를무턱대고 걸었고어렸던 그때처럼손등으로 눈물을 비비며돌아가신 아버지께 빌었다잘못했습니다.

재취업

상념에 잠긴 채복잡한 거리를 지나날 선 시선들이 만드는생경한 시공간의 흐름 속에서들끓는 심정을무표정으로 가리고익숙지 않은 장비로구차스레 밥을 벌다가흐릿한 거울 속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며손을 닦고일당을 계산하며가로수 아래를 걸어음식 냄새 자욱한 골목에 눕는다

은행(銀杏)

파아란 하늘에 푸르게 맺혀어루만지는 바람에장식 방울처럼 흔들리기도 했으나폭우 속 번개에 놀라고천둥에 떨더니어느 가을날여름내 쌓인 햇빛의 무게에수직으로 낙하하여바닥을 구르다노란 잎으로끔찍한 냄새를 가리었느니이제는 쉬어야 하리응어리는 땅에 맡기고

초 혼 (招魂)

생사의 갈림길에 매달린 그악한 절규그 애달픔에 발을 구르고맥락 없이 이어지는 어린 시절의 추억에머리를 감싸 쥔다양친의 모습이 어린 고운 얼굴은가슴 속 화인으로 타들어 갈 뿐말이 되어 나오질 않으니떨리는 손으로 향을 사르고피어오르는 연기만 우두커니 바라본다문득 머릿속을...

강가에서

폭우에 떠밀려 비스듬히 꽂힌잠자리가 맴맴 도는껍질 벗겨진 마른 가지몸 부대끼며하늘거리는 갈대가 부러워달그림자 짙은 밤이면바람이 실어 오는 소식에가슴 조이고깊은 하늘 속가물거리는 별빛이 애달파짐짓 강물만 바라보다아침을 맞는다

하루

허위허위 올라간 길에고즈넉한 산사쏟아지듯 엎드려 절하고망연히 바라보니어둑한 하늘에검은 새 날아오르고키 큰 나무 사이 가파른 길은아득하다수은등 켜진 거리앙칼진 바람에마른 가지는 이상한 날갯짓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