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완뉴스=김동주 기자] 영화는 단순히 장면들을 이어서 붙여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방대한 양의 촬영본에서 최적의 컷을 판정하고 재구성하여, 영화적 시공간을 창조해 내고, 관객으로 하여금 몰입할 수 있게 만든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화려한 액션과 폭발적인 CG가 가미한 슈퍼히어로 영화, 눈물샘을 자극하고 감동적인 스토리로 중무장한 영화는 대중의 공감과 인기를 모은다.
관객들은 매년 셀수 없는 영화, 드라마 등의 작품을 보고 느끼고, 영화를 만드는 이들(감독, 작가, 배우 등)은 자신들이 참여한 작품들이 박스오피스 순위에 오르고 내리는 것을 보며 희비가 교차하는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화려한 스크린의 이면에는 대중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디지털 파일 안에 갇힌 채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소외되었다.
「그린 폴터가이스트」는 영화상 연출과 상관없이 편집에 의해 희생된 존재들을 상기하고 연극적인 무대를 통해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다. 연극적 무대를 통해 영화에서 사라져버린 존재들 즉, 자크 랑시에르의 ‘몫 없는 자들les sans-part’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랑시에르는 『미학 안의 불편함』과 『감성의 분할』에서 예술을 크게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눠 논의를 전개한다. 우선 플라톤적 관점에서 윤리적 체계를 예술 자체의 독립성보다는 그것이 공동체의 에토스와 진리성에 기여하는지 구분한다. 이미지가 공동체에 유익한가, 진실한가에 따라 예술의 가치를 매겼다. 재현적 체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 예술을 사회적·정치적 위계와 연결하여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법칙이 존재하는데, 예술의 자율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나, 왕은 비극에, 서민은 희극에 등장해야 한다는 식의 위계를 투사하고 있다. 미학적 체제에서는 칸트/실러적 관점에서 예술의 단독성을 선언하는데, 고정된 법칙이나 사회적 위계로부터 자유로운 무관심성과 해방의 상태에 관해서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으며 누구나 예술을 향유할 수 있으므로 위계와 법칙이 무너진 상태라고 보고 있다. 즉, 예술의 단독성과 일반 법칙으로부터 자유를 지니는 것은 미학적 체계가 갖는 민주적 성격을 의미한다. 예술은 더 이상 도덕적 훈육의 도구도 아니고,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나 특정 장르 법칙에 갇힌 기술도 아닌 그 자체로 고유한 경험의 영역을 형성한다. 또한, 과거에는 ‘비극은 고결해야 한다’거나 ‘그림은 대상을 똑같이 닮아야 한다’는 법칙이 예술을 지배했으나 현대 미학적 체제―정확히는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부터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감성적 위계가 소멸한다. 따라서 소설 속 주인공이 반드시 위대한 영웅일 필요가 없고, 악당이지만 악당이 될 수 밖에 없는 사정을 지니거나, 영웅이지만 때때로 악당적인 면을 지니는 양면적인 캐릭터가 탄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전에는 선악이 분명하여 영웅과 악당의 구분이 명확했지만, 이제는 작품에서 영웅과 악당을 바라볼 때 무조건 관객으로 하여금 무조건 영웅의 편에서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는 악당의 시각에서도 상황을 이해해 볼 수 있는 입체적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의 위계가 파괴된 미학적 체제에서는 “이것은 예술이고 저것은 소음이다”라는 이분적 구분을 거부하기 때문에 과거의 체제에서 배제되었던 이름 없는 자들, 사소한 사물들, 편집 과정에서 잘려 나갔을 법한 무의미한 순간들이 예술의 단독성을 획득하며 전면에 등장할 수 있다.
랑시에르에게 미학적 경험이란, 기존의 사회적 신분이나 역할(치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연극은 화려한 영화적 연출 대신 초록색 크로마키 의상을 입은 배우를 차가운 무대 위 밝은 조명으로 그를 비추어 현재 배우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원래라면 스크린에서 멋있게 등장해야 했고, 관객도 불편한 의자 대신 영화관의 편안한 의자에서 만났겠지만 상호 이질적인 장소가 주는 불편함이 관객으로 하여금 배우가 연극 무대에서 연기하는 캐릭터가 ‘아르케’의 사회에 속하는 ‘몫없는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지워진 존재들을 전통적인 가시성의 영역(스크린) 안에 두지 않고, 그 밖에 두어 그들의 이야기를 함으로서 영화적 아르케를 파괴하고 있다. 랑시에르의 철학에서 치안(Police)은 각자에게 적합한 자리가 있고, 그 자리에서만 말해야 한다는 아르케를 강요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일반 법칙은 이야기는 스크린 안에서 완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지만, 연극은 지워진 존재들을 연극 무대라는 영화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간에 배치함으로써 영화적 아르케를 부정한다. 이로서 몫 없는 자들이 자신들의 자리가 아닌 곳에서 나타날 때, 기존의 지배적 질서는 균열을 일으킨다. 그러나 균열은 사회 질서의 부정이 아니라 그들이 비로소 더 이상 스크린 안의 소모품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재구성하는 주체로서 탈바꿈할 수 있게 된다.
랑시에르의 미학적 체제에서 예술은 감각의 일치가 아니라 불일치를 통해 작동한다. 스크린에서 지워진 존재가 현실의 공간이나 다른 매체에서 말을 걸어올 때, 관객은 감각의 불일치를 경험한다. 특히, 관객은 ‘스크린에 있어야 할 존재가 왜 여기(연극 무대)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배우가 처해 있는 현실과 고뇌를 공감할 수 있다. 또한 이 질문이 지니는 가치는 미디어를 통해 관객에게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몫이 없었던) 존재들이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말하기의 장을 발견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나아가 관객은 단순히 스크린만을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공간에 배치된 지워진 존재들의 서사를 찾아 나설 때, 관객은 수동적 수용자에서 능동적 해석자로 변모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연극은 스크린 안의 주인공(중심)과 삭제된 존재(주변) 사이의 위계가 무너지고 모든 공간이 동등한 서사의 층위를 갖게 됨으로써 미학적 평등을 실현하고 있다. 아울러 무대와 스크린을 배치하여 삭제된 존재들을 카메라를 통해 의도적으로 비추면서 그들이 영화 세트장에서, 영화 속에서는 소모품으로 존재했던 모습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김동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