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칼럼 백제 : 30대 무왕, 또 한 번의 부흥

백제 : 30대 무왕, 또 한 번의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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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완뉴스=김경순 기자]

서동설화의 남자 주인공으로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를 꼬셔냈다고 알려져있으나,
당시 신라와 백제의 관계로 보아 택도 없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평왕은 셋째 딸이 없다.

무왕은 출신 성분이 불확실한데,
법왕의 아들이라는 설,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설, 그것도 아닌 지방 귀족의 아들이라는 설,
금강의 과부가 왕과 통정하여 낳은 사생아라는 설…. 등등, 무지 많다.
아무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어린 시절을 보낸 듯한데,
누구의 자식이 되었든, 선대의 혼란을 성공적으로 수습하고 무려 42년 간 재위하며 나라를 안정시켰고, 국력을 회복시켰으며,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였다.
관륵을 일본에 파견하여 천문, 지리, 역법 등에 대한 서적과 불교를 전달하였고,
수, 당과 관계를 강화하였으며,이 놈들에게 고구려를 공격해달라고 청하였다.
사비 왕궁을 수리하였고, 궁남지를 만들었으며, 미륵사를 건설하였다.

증강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신라와 자주 충돌하였는데,
예전의 백제와 달리 전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관산성 싸움 이후 계속된 패전의 사슬을 끊고, 쇠락해가던 백제에 안정감, 자신감을 되찾아 주었으며,
가야 멸망 이후 처음으로 낙동강까지 진출하여, 신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재위 후반기에 익산 지역을 중시하여 천도할 계획을 세웠으며,
왕궁인 평성을 축조하고 제석사를 창건하기도 했으나, 천도를 하지는 못하였다.
이렇게 영명했던 무왕이 재위 말기에는 노망이 들었는지, 사치스러운 연회와 토목공사를 빈번하게 시행하여, 국력을 낭비했다는 비판을 자주 받으나,
당시 백제의 재정에 비추어 이 정도 사치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오히려 경기를 활성화시키는 효과도 있었으므로,
이는 무왕이 차원이 다른 재력과 능력을 귀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동안 실추되기만 했던 왕실의 위엄을 새로이 하고 귀족들의 잠재적 반역의지를 꺾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이벤트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따라서 이러한 비판은 왕권의 대척점에 섰던 귀족들이나, 통일 이후 정치적 목적상 백제를 깎아 내려야 했던 신라의 악의적 기술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백제왕들 중 드물게, 나름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다 간 명군이었다.

김경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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